13. 꺼지지 않는 등불
손자 인목이가 표충사에서 서울에 와보니 일본에서 전보가 와 있었다. 아버지가 서울에 도착한다는 날짜는 바로 내일이었다.
아버지가 내일 오면 모레는 표충사로 갈 생각으로 기다리던 손자는 조간신문에 ‘종정효봉스님 표충사에서 입적’이라는 활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믿어지지 않았다. 신문을 읽어내려가던 손자는 다시 한번 놀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다를게 하나도 없던 죽음을 눈앞에 둔 병석의 늙은, 할아버지가 그렇게 훌륭한 분이었던가 하고 놀랐다. 신문마다 사진과 함께 효봉스님의 입적기사를 주먹만한 글씨로 보도했다. 방송은 방송대로 특집보도를 내보냈다.
스님의 장례식 문제가 또 한번 화제거리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문도들은 표충사에서 장례를 치르고 다비식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종단에서는 종정이므로 종단장으로 서울에서 장례식을 올려야 한다고 맞섰다. 장레식을 어디서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세상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부질없는 망상일 뿐이다.
결국 스님의 장례식은 종단장으로 결정되었다. 스님의 법구가 운구되는 길목은 한강에서 조계사까지 길 양옆으로 사람들의 행렬이 길다랗게 끈을 이루었다. 조계사 앞은 물론 종로 거리는 인파들로 붐벼서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몇 년 전 이씨 왕조의 마지막 왕비인 윤비의 장례 역시 장관을 이루었으나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모여들지는 않았었다.
무엇인가. 이토록 많은 인파를 모이게 한 것은 이 시대의 황량한 사막에서 사람들의 가슴에 스님이 따라주던 감로수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이제 스님은 자취도 없이 서쪽으로 불어간 한 줄기 바람처럼 묵언의 설법을 하고 있는 것을.
다비식은 화계사에서 있었다. 다비를 하고 남은 잿속에서 스님의 자취를 붙들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사리 53과가 영롱하게 빛났다. 사리는 송광사, 표충사, 미래사, 용화사의 사리탑에 봉안되어 뒷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것이다.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효봉 연보
서기 1888년 5월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성리 금성동에서 수 안(逢安)이씨 병억(炳應)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 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을 찬형(燦亨)이라고 하였다.
1892년(5살) : 조부로 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인근 마을사람들 이 신동이라고 불렀다.
1901년(13살) : 한문을 가르쳐주던 조부가, 찬형이 인절미를 먹다가 혼절하자 홧김에 마신 술로 인해 돌아가셨다. 이때까 지 사서삼경을 통달했다.
1902년(14살) : 평양감영에서 실시한 백일장(예전의 과거시험)에서 장 원을 하였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폐지된 이후의 백일장이라서 성균 관에 입학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
1903년(15살) : 햇수는 정확하지 않으나 이 무렵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찾아가서 일인 교장에게 입학시켜줄 것을 부탁하여 입학이 허락되었다.
1909년(21살) : 결혼한 햇수는 알 수 없으나 이해에 장남 이영발이 태 어났다. 이어서 차남 이영실과 막내딸을 낳았으나 이 들이 태어난 햇수는 알 수 없다.
1911년(23살) :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에 유학하였다.
1914년(26살) :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성에 서 실시한 고등고시(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15년(28살) :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 펑양의 복심법원(고동법원)에 서 이후 10년간 법관생활을 하였다.
1923년(36세) : 독립운동을 하다 붙잡힌 조선인에게 법이 정한 규정에 의하여 사형 언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하 였다. 일인들은 조선인들의 민족감정에 반발을 일으 키지 못하도록 조선인 판사 이찬형에게 이 재판을 맡 겼다. 사형언도를 하고 난 이찬형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집을 나와 3년 간 방랑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중 삶에 대한 회의와 사형수에 대한 참회로 자아에 대한 큰 의문을 품고 엿장수 행세를 하며 팔도강산을 떠돌다가 민족에 대 한 자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갔다. 그 러나 장작림의 암살사건을 보고 민족정기를 떨칠 인 재가 되는 길을 찾으려면 진인을 만나서 자아완성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인을 찾아나섰다.
1925년(38세) :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화상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불문에 귀의하였다. 운봉(雲峰)이라는 법명을 받 았다.
1926년(39세) : 여름, 선지식을 찾아나섰다. 통도사 내원암에 게시는 용성화상을 친견하고 하안거를 마쳤다. 겨울에 다시 수월화상을 친견키 위해서 간도까지 행각을 하였다.
1927년(40살) : 깨달음이 밖에 있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의 자성에 있음을 알고 금강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름부터 이 듬해 여름까지 신계사 미륵암에서 수행하였다.
1928년(41살) : 겨울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신계사 보운암에서 장좌불 와의 용맹정진을 하였다.
1929년(42살) : 겨울, 금강산 온정리 여여원 선방에서 안거하며 역시 장좌불와의 용맹전진올 하였다.
1930년(43살) :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1년6개월 동안 법기암 뒤에 토굴을 짓고 하루 한 끼의 공양만 들면서 장좌불와의 용맹전진에 돌입하여 개오(開悟)하고, 바다 밑 제비 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 쪽으로 달은 동쪽으로라는 오도송을 읊었다.
1931년(44살) : 겨울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유점사 선원에서 안거하며 입승(立繩)의 소임을 맡았다.
1932년(45살) : 여름, 여여원에서 안거하였다. 이후부터 오후에는 불 식하면서 정진하였다. 겨울에는 마하연 선원에서 동 안거를 마쳤다.
1934년(47살) : 여름 여여원 토굴에서 안거하고 겨울에는 신계사 미륵 암에서 안거했다.
1935년(48살) : 여름에 금강산을 떠나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에서 안 거하고 겨울에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친견 하고 수행하였다.
1936년(49살) : 여름 태백산 정암사에서 안거하고 겨울에는 덕승산 정 혜사에서 만공스님을 친견하고 동안거를 마쳤다.
1937년(50살) : 이해 여름 송광사에 와서 1946년까지 10년 동안 보 조국사의 정헤결사정신을 이어받아 인재 양성과 사찰 부흥에 진력하였다.
1946년(59살) : 이해 겨울 1950년 여름까지 해인사 가야총림의 방장 화상으로 도제(徒弟)양성에 진력하였다.
1950년(63살) : 6·25동란을 만나 부산 온천동 금정사로 피난하여 동 안거를 마쳤다.
1951년(64살) : 여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영 용화사 도솔암에서 동 방제일선원을 열었다. 각지의 선객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수행정진을 하였다.
1952년(65살) : 겨울부터 1954년 3월까지 용화사 뒤에 토굴을 짓고 수행정진 하였다.
1954년(67살) : 여름에 제자 구산이 미래사를 지어 미래사에서 안거하 였다. 이해 4월24일 은사 석두화상이 입적하였다. 8 월17일 종단정화 준비위원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9월 까지 정화불사의 일로 서울 선학원에 주석하였다.
1955년(68살) : 정화불사의 일이 쉽게 마무리 지어지지 않자 통영 미 래사로 내려와 오후불식하며 정진하였다.
1956년(69살) : 여름에 지리산 쌍계산 탑전에서 안거하였다. 이해 11 월 세계불교도우의회 제4차대회에 한국 대표로, 동산 ·청담스님과 함께 참석하였다.
회의가 끝나고 인도와 네팔 동남아의 불교국을 순방 하였다. 귀국하여 종회의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70살) :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총무원장으로 재직하며 종단 의 중흥을 위해 힘썼다.
1958년(71살) :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여름에 양주 흥국사에서 주석하 고 겨울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 당선원에서 안거하였다.
1960년(73살) : 여름부터 1963년 9월까지 미래사에서 안거하였다.
1962년(75살) : 4월11일 통합종단의 초대종정으로 추대되었다.
1963년(76살) : 10월에 병환으로 인하여 동화사로 옮겨 주석하였다.
1966년(79살) : 5월14일 밀양 표충사 서래각으로 옮겨 주석하였다. 10월15일(음력9월2일) : 오전 열시에 입적하였다 .이때세 수는 79세 요, 법랍은 42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