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던 추억의 인천 술집들
동인천 인근, 용동
중구 용동 큰우물집은 1960년대 대학시절 저녁이면 동인천에서 기차를 내려 우르르 달려가던 막걸리집이다. 큰우물 바로 옆 골목에 면해 있었는데 간판을 큰우물집으로 붙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 주인이 건재하다. 이 집에서는 명물 안주가 노가리 구이였다. 값도 싸고 흔해서 용돈이 궁한 대학생이나 문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1970년대 시인 최병구, 손설향, 서예가 장인식 선생 등을 모시고 드나든 기억도 떠오른다. 시인 최승렬 선생은 이 노가리를 썩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골목집-동인천 옛 주택은행 옆의 언덕으로 오르는 골목길에 있던 이 막걸리집은 돼비지가 유명했다. 언덕 위쪽으로 사창가가 있어 다소 꺼림칙했으나 주머니가 헐한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한 여자를 잃고 서서 먹던 추억이 깃든 집이다.
열차집-동인천역에서 나와 좌측으로 청과물 가게 틈,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골목 안에 있었다. 집은 좁고 길어서 마치 열차 모양이었으며, 바로 동인천역과 경인선 철로에 붙어 있다시피 했던 까닭에 주점 이름을 더 열차집으로 불렀다. 안주는 오늘날 포장마차처럼 다양했던 생각이 난다. 학생들, 인근 상인, 리어카꾼, 지게꾼들이 드나들었다.
로젠켈라-1960년대 말인가 용동 큰우물 거리에 등장한 고급 맥주집이다. 1970년대 전성기를 누린 집이다. 생맥주와 고급 안주와 호화로운 인테리어, 한 마디로 멋진 신사가 가는 레스토랑도 겸한 라이브 쇼도 하던 집이었다.
화백-역시 큰우물 거리에 있던, 넓은 실내를 가진 호화 맥주집이며 레스토랑이었다. 로젠켈라와 쌍벽을 이루었다. 친구의 연애를 도와주던 ‘옛날’이 있던 집이다.
신포동 중앙동
백항아리-50년대에 생긴, 카바이드 불을 켜던 신포 시장통의 명물, 대명사. 80년대 말 무렵까지 있었다. 인천의 모든 유명 인사와 짐꾼, 막일꾼, 지게꾼이 함께 드나들던 약주집. 안주는 대체로 거저 내주는 새우젓. 드문드문 황새기를 굽거나 손바닥만한 양은그릇에 감자국을 떠 안주로 삼아 서서 마시는 집. 자기 먹을 안주를 가져가도 좋은 특이한 집이었다. 시인 최병구, 서예가 부달선 선생, 화가 우문국 선생, 김인홍 선생, 화가 정순일 선생, 고촌, 윤박 선생 등등!
대전집-빈대떡이 유명했었다. 지금도 즉석에서 돼지기름을 번철에 두르고 부쳐 주는데, 이제 배가 불러서 그런지 맛이 옛날만 못한 듯이 느껴진다. 돼지 족발도 이 집의 대표 안주였다. 거리가 죽어 더욱 초라해진 느낌이다. 지금 주인의 어머니가 할 때가 정말 은성(殷盛)한 시절이었다. S의 얼굴이 떠오른다. 바로 옆에 충남집이 있었다.
다복집-오래된 약주집이다. 이제 술집으로는 이 거리에 남은 몇 안 되는 노포(老鋪)라고 할 것이다. 이집은 60년대에 처음 출입을 했는데 보쌈과, 두부 속을 3분의 2쯤 갈라 그 안에 돼지고기를 다져 양념에 버무린 소를 넣어 번철에 부쳐 주는 두부샌드위치와 스지탕, 보쌈, 각종 저냐가 유명했다. 당시로서는 다소 가격이 높아 출입이 어려웠다. 이 집은 돼지 족발을 자작으로 삶아 내는데 ‘카라멜’이라는 색소(향도 있다)를 바르지 않고 꼭 일반 가정에서 삶듯 한다. 맛이 담백해서 올드 팬들은 요즘도 이곳을 찾는다. 족발을 좋아하던 은사 시인 최승렬 선생이 단골이셨는데, 족발에서 오려낸 ‘돈살’을 특히 즐겨 자셨다.
미미집-가난과 궁상과 눈물과 시가 있던 집이다. 신포동 옛 화신면옥에서 시장으로 통하는 골목에 있는 집이다. 80년대 초 500원자리 마른 북어와 역시 500원이던 ‘법주병’ 약주를 손설향 시인과 내게 매일 무상으로 내주던 보니파시오네 집. 랑승만 시인, 미술 평론가 김인환, 고촌 김영일 화백, 이정 장주봉 화백, 김구연 아동문학가, 채성병 시인, 김학균 시인, 조우성 시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던 집.
신포주점-80년대 말까지는 아주 번창했던 약주집이다. 이제는 세월이 무상하다 할 만큼 쇠락했다. 한 사장과 부인. 손님이 손수 잔을 꺼내고 수저를 가져다 놓고 앉고 서고 해서 박대구이, 홍어찜, 황새기 구이 조개탕 등을 먹던 집이다. 서울서 박송 시인이 오면 혼자 구석에 서서 마시던 생각이 난다. 마른북어를 우리가 직접 홍두깨로 두드려 연탄불 위에 굽던 생각이 아련히 슬프다. 고 최병구 시인, 박 송 시인, 야구인 김선생, 고촌, 한기천 군, 우 선생, 정순일 화백, 김인홍 선생, 전요셉, 장주봉, 김진안 군..... 이제는 속절없이 퇴락해 가는 주막.
금빛 날개-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자 주인이 남성들을 뇌쇄하던 맥주집. 신포동 은성다방에서 기업은행 쪽으로 가면서 2층에 있었다. 여인의 이름도 성도 기억에 없고 외상값이 얼마 남았는지, 그 후의 일도 아는 바 없다. 눈빛을 받은 기억도 있지만 죽은 고촌 형이 좋아했다. 음악이 다양하고 풍부해서 좋았다. 고촌이 ‘물새우는 강언덕’과 ‘모나리자’를 부르곤 했다. 70년대 말 80년대 중반 무렵이 아니었던가. 이 집 상호를 ‘날개쭉지’라고 부르던 기억이 난다.
은탑-역시 맥주집이다. 금빛 날개 지척에 있었다. 1층이었다. 미모는 떨어져도 상냥했다. 서울 연합통신에 근무하던 선배들이 우르르 달려가곤 하던 집이다.
꿈과 같이- 가난한 문사들에게 은전을 많이 베풀던 맥주집. 신포동 외환은행 뒤편 2층이었다. 80년대 초반에 생겨 90년대 말쯤까지 영업을 했다. 성실, 성보 자매가 늘 다정했다. 파래김을 양념 없이 구워 청양고추를 잘게 썰어 넣은 간장에 찍어먹는 안주가 독특했다.
마냥집-할머니 손에서 만들어진 모듬전과 족발이 우수했던 집이다. 지금은 그런 맛을 내는 집이 없다. 안주가 해물로 바뀌고 주인도 바뀌었는데 그 주인이 현재 친딸이다.
하인천, 북성동
수원집-6․25 이후 옛날 인천 부두가 인천역 뒤에 있을 때 생긴 밴댕이 횟집의 후신이다. 애초 자유공원 쪽으로 좀 올라간 자리에 있던 원조집은 간판 없이 ‘인민군’집으로 불리었는데 헐한 잡고기와 밴댕이회를 됫병 소주, 약주와 함께 팔았다. 술잔은 양은 양재기였다. 구워서도 팔았는데 70년대 문을 닫고 그 집에 있던 지금 사장 신태희 씨가 밑으로 내려와 차린 집이다.
수원집은 하인천역 일대 전통, 명물집으로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도 손님들이 내려온다. 연안부두, 구월동 밴댕이골목, 강화 등지에서 내놓는 뼈를 발라낸 ‘세로썰기’에 대해 옛 전통 그대로 뼈채 ‘가로썰기’를 하는 집이다. 입안이 다소 까실거리기는 해도 씹고 나면 더 고소한 맛이 남는다. 이 집의 번창과 함께 인근에 몇 집 밴댕이회집이 생겨났다.
화가 우문국 선생, 서예가 김인홍 선생, 정순일 화백, 고 김영일 화백 등과 동락(同樂)하던 시절이 그립다.
첫댓글 개인적으로 가보고싶은 곳은 '꿈과 같이'와 '마냥집'입니다. '꿈과 같이' 훌쩍 날아가 '마냥' 눌러앉아있음 좋을 것 같아...
아하, 꿈과 같이는 정말 꿈과 같이 날아가 지금은 없답니다. 마냥집은 아직 남아 있지만 옛날 같은 정취가 없어서.... 그래도 좋으시다면 한번 초청을 하지요. 그런데 나는 모레 씨를 모르니...
'꿈과같이'가 없어졌다는 건 이미... 그래서 꿈에서만 날아갈 생각. '모레'를 모르신다니, 내일은 혹시... 아시나요?
모레를 모르는 것은 곧 내일도 모른다는 말과 같겠지요. 모레에 계신 분은 꿈이 많으신 분 같군요.
바로 그거지요. 내일을 모르는데 어찌 모레를 알겠습니까... 하여 '모레'는 꿈이 많아서가 아니라 여일할 내일보다 좀 더 멀리, 모레 쯤으로 미루어보는 것... 그야말로 꿈과같이 덧없이 한평생이 가고있습니다.
하루를 생각하니 알겠군요. 모레 씨!
완존 선문답이시로군요들. ㅎㅎ
'드러누운 문답'인지도 모르겠네요.
'드러누운 문답'이 당근 훨 낫지요. ㅋㅋ /근데 지는 모레는 아직도 몰라요,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글쎄, 모레가 누구인지 나도 몰라요. 혹시 모래가 아닌지...
이제야, 근접...모래와 모레였어요. 그래서 '모레씨'라 부르는 것보다 그냥 모레가...'모레--하고 부르다보면 입안에 남는 그 모래바람...
모레, 모래, 모레, 모래, 모레, 모래.........................................................이 모래 알갱이들! 그리고 '입 안에 남는 모래바람!' 터벅터벅 사막을 가는 낙타 같군요.
내일보다 더 먼 후일, 모레까지 모래밭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낙타의 하염없는 생각... 사는 게 모래? 정말 모래? 모래는 거지? ㅊㅊㅊ
모래여, 모레여, 적막하구려. 어디 계신고?
이렇게 찾으신 줄 모르고... 꿈도 없이 자고 있었습니다.
모레는 이 새해에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신지.....
찾으시니 뵙고싶습니다. 일년 반이나 지난 어느 날...
언제나 내일이 아닌 모레가 바스락거리는 모래 소리를 내는 아침....
이번 소식은 바로 전달이 되었네요^^건강은 어떠신지요..사막을 건너 오실만큼되면 약차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그냥 조금씩 늙어간다오. 가끔 기관 고장도 일으키면서... 그래, 그 약차를 마셔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