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추웠고, 외로웠다.
작디 작은 방인데도 어릴적 현미경으로 봤던 우주마냥 광활하고 어둡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아무리 피곤하고 그토록 어둡더라
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날이 허다했다.
보일러를 틀어도, 이불을 둘러싸매도, 펭귄처럼 뒤뚱거릴 정도로 옷을 겹겹이 껴입어봐도 집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스탠드, 램
프, 형광등을 모두 키고 심지어는 볼펜과 핸드폰줄에 달려있는 조그마한 플래시라잇까지 모조리 밝게 비추어놔도 집은 밝아지
지 않았고, 자취방은 누군가가 머무는 집 같다는 느낌 하나 안나게 처량했다.
어쩌면 그 원룸 자취방은 그저 어떤 비어있는 쓸쓸한 공간 하나인것만이 아니었는지도.
어쩌면, 그것은 진공상태의 내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온기를 원한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어떤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려 하면 머리가 아팠고, 아무리 골머리
를 앓아봐도 뼈에 사무치도록 차가운 이런 곳에 누군가 따뜻한 사람이 온다는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세상의 틀에 어긋나지 않은 그들의 추측도, 그 무엇도 내겐 공감할수 없는 거리에 불과했다. 내게 필요한것은 온기
가 아니었기에.
어두운 곳에만 있었던 자에게 갑자기 빛이 들어오면 반갑기보다는 오히려 혼란과 고통만 있을수밖에 없는것처럼, 진심으로 필요
한것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옆에 함께 있어줄수 있는 존재였다. 눈을 멀게 할 태양보다, 은은한 별빛을 더 반기듯.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얼어붙어있는 방에 무표정으로 들어서서 낮은 한숨을 동반자 삼아 창문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네가 있었다.
별빛이 머무는 이유, 네프
별빛의 강물을 타고, 자연스럽게 그 끝자락이라도 되는것마냥 부드러운 몸짓으로 쓰러지듯 앉아있는 여자가 창문 앞에 있었다.
언제부터 그녀가 그곳에 앉아있었는지 알수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듯 풍경에 녹아나서, 보고있는 이 순간에도 정말 그 곳
에 있는지 확신할수 없었으니까.
어딘지 투명하다고 생각되는 그 신비스러운 몸은, 창문 밖의 새하얀 별들을 넋놓고 바라보는듯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미동하나 없이 고요한 공기 사이로, 내가 그녀를 바라보는 미묘한 전류가 흘렀다. 숨을 거칠게 내쉬기 전까지는 숨을 참고있다
는 사실도 몰랐지만, 생각보다 꽤나 다급하게 공기를 원하는 몸에 의해 가쁘게 입자들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여자가 내 숨소리를 듣고는 살짝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나의 조각같던 그녀의 몸에 생기가 불어지는 순간 위험한 냄새
가 났다.
그녀가 움직이는 순간 침묵 속에 균형을 잡고있던 마법의 순간이 깨지고, 나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서야 소위 친구라
고 불리는 작자들조차 잘 오지 않는 자취방에 처음보는 왠 여자가 자기 집인마냥 덜컥 앉아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남의 집에서, 그것도 내 집에서 저렇게 여유롭게 앉아있다니..킬러인가?
“Hey. (이봐.)”
여자가 그제서야 뒤돌아보았다. 완벽히 태닝되어있는데다 굴곡까지 완벽한데도 내 주변 여자들처럼 누구를 꼬시려고 만들어놓
은 몸이 아니라, 정말 사냥을 하기 위해 최적화된 몸인것마냥 한없이 위협적이어서 아름답기까지했다.
“What. (뭐.)”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범이 자기에게 덤벼드는 하룻강아지 하나를 보는 것처럼 입꼬리 한 쪽을 들고 웃
는 여자. 수상쩍다 못해 일류 킬러가 확실하다고 단정지었다. 뒷모습을 보이지 말고, 잘 타협해야해. 얼핏보면 십대 후반이라고 생
각해도 될 정도로 어려 보이니까 아직 프로가 아닌 견습생일 수도 있어. 그럼 돈을 더 줄테니 그냥 가라고 꼬시면 되겠지.
“What do you think you’re doing here? (여기서 뭐하는거야?)”
“Well, I was relaxing, but since you interrupted me so rudely, I’m so very obviously talking to you right now. (뭐, 쉬고 있
었는데, 니가 무례하게 방해했으니까 보다시피 너랑 대화하고 있잖아?)”
“Who sent you? (누가 보냈지?)”
“Nobody. (아무도 보낸 사람 없는데?)”
“What? Then who are you? Why are you here? (뭐? 그럼 넌 누구고, 왜 여기있는거야?)”
“Hey, do you have something to eat? (아, 근데 먹을 거 좀 있어?)”
“What? (뭐라고?)”
어이없어하는 와중에도 여자는 물결 흐르듯 날렵한 동작으로 한번에 미끄러지듯 일어서서 냉장고로 다가갔다.
“Wow, this place is a dump. You’re in serious need of a grocery shopping, I mean it. (와, 여기 사람 살 곳이 못 되네. 진심
으로 너 장 좀 봐와야될것 같은데?)”
“What are you talking about? Get the hell out of my house! (뭔 소리야? 내 집에서 꺼져!)”
여자의 눈에서 불꽃이 확 튀었다. 분명 입을 벌리지 않았는데도 집이 동굴로 변한 것마냥 그녀의 목에서 울려나오는 위협적인 재
규어의 그르릉거림이 들리고, 집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Nobody talks to me like that. (아무도 나한테 그딴식으로 말하지 못해.)”
“Well? What are you going to do about it? It’s not like you’re going to kill me, you would’ve done it already if you were here for that, right? (왜, 그
래서 어쩔건데? 죽이러 왔으면 진작 죽였을거아냐?)”
“Hmm. (흠..)”
그녀는 매력적인 입가를 재미있다는 듯 들어올리며 웃었다. 기다란 송곳니가 눈에 들어왔지만,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해 분장하
는 미국 십대들은 이미 여러번 보아왔기 때문에 별 느낌은 없었다. 그냥 정신 나간 여자일까? 그렇다면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도 이해가 갔다.
그녀에게야말로 넌 누군데 날 모르고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냐고 묻고 싶었다. 이 근방에서 내 집을 아는 놈들은 극소수였지만 그
렇다고 내 얼굴을 몰라보는 녀석들은 드물었다. 아슬아슬한 자리이긴 해도 이 구역에서 나는 절대자로서 군림했기 때문에 도대
체 저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That’s funny. I don’t taste fear in you. You might be a good toy for me after all. (재밌네, 날 무서워하지 않고 있잖아? 좋
은 장난감이 될 것 같네.)”
장난감이라니..응당 다른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면 벌써 한참 전에 죽여버렸겠지만, 왠지 이 여자는 좀 더 지켜보고 싶었다. 그
냥 정신이 나간 여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왠지 원인모를 위엄이 깃들어있었다. 언제나 사람들을 자신의 멋대로 부릴 수 있는 절
대 권력자의 여유로운 태도가, 자신을 사냥할 동물이 없어 우거진 숲에서 군림하는 재규어같은 태도가.
“What’s your name? (이름이 뭐야?)”
무슨 파티에라도 온 것마냥 여유로운 태도로 이름을 물어오는 여자의 태도에 재밌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해서 한번 웃었다. 내
가 네 재미있는 장난감이 될 것 같다고?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안 그래도 마약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잔뜩 촛점이 풀린 눈으로 진
득하게 달라붙어오는 여자들을 상대하기도 진절머리나던 참이었기에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라면 한동안은 재미있
게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Kyle. (카일.)”
“You don’t look like a Kyle. I smell something different. Let me guess. Korean? (별로 ‘카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사람
처럼 보이지 않는데. 다른 냄새가 나. 어디 맞춰볼까, 한국인?)”
“How did you know that? (어떻게 알았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것도 있었지
만, 동양인같지 않은 이목구비 때문에 혼혈이라는 오해도 많이 받는데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맞추는 사람들은 극히 드
물었기 때문이다. 날 몇년동안 안 딜러들이나 부하들 앞에서도 나는 줄곧 영어를 구사했고, 뭐 딱히 한국인같은 짓을 할 이유도 없
었다.
“Let just say that it’s one of my talents. (그냥 내 재능들 중에 하나라고만 말해두지)”
“What, are you one of my stalkers? (내 스토커들 중 하나야?)”
“You wish. (웃기고 있네.)”
정말 재미있다는 듯 여자는 내게 다가와 어린아이에게 하듯 머리를 부비적부비적 쓰다듬었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리 다가
온 것이 놀라운 것은 둘째치고라도 그 행동 자체의 대담함에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서 있자 여자가 웃었다.
“태임이라고? 좋은 이름이네. 난 소혜라고 불러, 그럼.”
아..재규어가 사람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특이한 악센트가 있던 그녀가 한국어를 유창히 구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한
국어 역시 여자 목소리치고는 낮고 허스키한 동시에, 카페오레처럼 부드럽긴 했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너..대체 누구야?”
“소혜라니까.”
소혜가 옅은 레몬빛의 머리를 무심하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보니 나처럼 그녀는 도저히 인종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얼굴
을 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한 동양인 같았지만 그러기에는 동양인의 몸매가 아니었고, 또 피부색은 동양인
이 자주하지 않는 완벽한 탠 색이었다. 그렇다고 흑인이나 히스패닉 계열이라기에는 무리가 많았고, 또 백인이라고 하자니 그것
도 무리가 많았다. 제일 가까운 것은 동양인인데..
“넌 대체 아시안이야, 뭐야?”
“난 아무것도 아니야.”
소혜는 커다랗고 위험한 고양이 하나같았다. 자꾸만 팔짝팔짝 가만히 있지 못하고 뛰어다녔고, 혼자 살기엔 좀 크다쳐도 그녀
가 그렇게 뛰어다니기에는 좀 좁은 감이 있는 내 자취방을 자신의 집이 된것처럼 편하게 돌아다녔다.
그러고보니까 그녀의 옷은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절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나도 지금 집 안인데도 코트를 입고 있는데, 그녀
는 추운 기색 하나 없이 그녀의 완벽하게 날렵하고 탄탄한 배가 드러나도록 디자인되어있는, 딱 달라붙는 레몬색 긴팔 하나와 물
이 상당히 잘빠진 데님 소재의 까만 핫팬츠만을 입고 있었다.
“안 추워?”
“안 추운데! 근데 배는 좀 고파. 고기 없어? 고기!”
“아까 봤잖아. 없어. 넌 어떻게 여기 들어온거야?”
분명히 잠그고 나간 것을 기억하는 (그래봤자 이 원룸에 발을 들인지는 벌써 몇일이나 됐지만) 창문을 그녀가 늘씬한 손가락으
로 가리켰다. 지금 보니 처음 들어왔을땐 그녀만 보느라 눈치를 못 챘는데, 창문은 활짝 열어젖혀져 있었고, 분명 쳐 놓았던 두꺼
운 커텐은 거칠게 양 옆으로 젖혀져있었다.
“장난할 기분 아니니까 말해. 문 비밀번호 알려주는 놈이 있었겠지?”
“난 거짓말은 안해. 정말 고기 없어?”
“야! 남의 집에 들어왔으면 말에 대답은 해야될거 아니야. 너 뭐하러 여기 온거냐고!”
사람을 죽여본 사람들끼리는 서로에게서 피냄새를 맡을 수 있는 법이다. 그녀는 내가 만난 어느 누구보다도 그 향이 더 짙었다. 다
만 다른 점이라면 다른 이들에게서는 불쾌하고 비릿한 생선같은 느낌만 들던 피가 그녀에게서는 향으로 바뀌어 달콤하게 느껴진
다는 정도일까. 죽음을 매혹적으로 보이게 하는 여자. 그래서 나는 그녀가 굉장히 위험한 킬러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다.
“킬러야?”
“뭐, 어떻게 보면 그렇기도 하고. 근데 니가 생각하는 그런 킬러는 아냐. 고기 먹으러 갈래?”
이쯤 되자 슬슬 욕이 나오려고 했다. 매력적이고 신선한 장난감이건 말건 그건 둘째치고라도 그놈의 고기 소리를 입으로 다시 쳐
넣어주고 싶었다.
“제대로 좀 말해봐! 그놈의 고기 소리 좀 그만하고. 킬러가 아니라고? 웃기지마. 너한테서는 피냄새가 정육점에서보다도 더 짙
게 풍기니까.”
“와, 생각보다 잘 골랐네. 그런 것도 알았어? 어이쿠, 참 잘했어요!”
정말 두통이 생길것만 같았다. 넌 대체 누군데 날 알지도 못하고 창문으로 기어들왔다는 소리나 지껄이는거야? 술에 취해 벽에 대
고 말하던 때처럼 답답했다. 벽은 부숴버리기라도 했지만 저 여자를 때리기는 왠지 싫어서 참고참자 결국엔 눈꺼풀에서 미세한 경
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짜식 성격 더럽네. 이거 말해주면 고기 사줄래?”
“그래. 제발 좀 제대로 말해 그러니까.”
목을 걸고 간신히 죽인 갱의 두목의 목숨 대신으로 받은 사례금이, 은행 따위는 어렸을때 빼고 이용해보지 않은 내 주머니에서 두
둑하게 느껴졌다. 이 근방에서 나를 도둑질할만큼 멍청한 녀석은 없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양의 현금을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목숨을 걸고 기껏 받은 돈을 처음 만난 저런 4차원 여자에게 고작 ‘제대로 된 대답’ 따위를 듣기 위해 쓴다는건 좀 어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저 여자에게는 자꾸만 호기심이 생겼다.
“좋아. 난 소혜고, 악령세계에서 도망쳐왔어. 금욕을 하는 중이야. 사람을 안 건드리려고 말이야. 나 멋있지? 아, 뭐 딱히 더러
운 인간들이 불쌍해서라던가 하는 감정적인 이유는 아니고, 그냥 딴 놈들이 인간들을 먹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 맘에 안 들어서 단
식투쟁하는거뿐이야.
그래도 나도 금단증상은 안 생기게 도중에 인간 대신 먹을 공포가 필요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인간을 물색
한거고, 거기에 니가 당첨된거야. 그러니까 한 마디로 너는 니가 살아오던 대로만 살아오고, 나만 달고 다니면 내가 널 해치진 않
겠다는 소리지. 응? Capiche? (이해하겠지?) 아, 걱정마, 난 다른 놈들 눈엔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건 걱정할 필요없어. 야, 왜 그
런 표정을 짓는거야?”
“푸..푸하하하하하! 야, 너 진짜 설마설마했더니 그냥 미친거 맞구나? 괜히 몇 억짜리 프로 킬러인줄 알고 잔뜩 긴장했네. 용하
다, 용해, 내 집까지 들어온 것만도! 어쩐지 날 모르더라.”
“뭐, 맘대로 생각해.”
화를 낼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소혜는 의외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물결처럼 날렵하게 점프해서 내 바로 옆까지 눈깜짝할 사이
에 다가왔다.
“대체 그건 어떻게 하는거야? 올림픽 단거리 선수였냐?”
“이제 대답 해줬으니까 고기 사줘. 고기!”
부모님들이 마피아에 살해당하고 길거리에서 자라오면서 어쩔 수 없이 뒷골목의 세계를 배우면서 별의별 미친놈들을 봐왔지
만, 정말 이 여자는 정상을 위장한 광녀같았다.
어찌보면 마약 한줌을 위해서라면 내가 옷을 벗고 내 구두를 핥으라고 해도 항시 촛점 없는 눈으로 정말 복종하는 여자들이나, 소
설 따위를 너무 많이 읽었는지 정신줄을 놓고선 정말 자신들이 나를 바꿀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듯, 꼴에 자신들이 빛이라도 되
는것마냥 현모양처처럼 매일 요리나 해대는 주제에 그게 인생의 전부라도 되는것마냥, 내가 그것에 감동해 눈물이라도 흘리면
서 그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해야하는것처럼 구는 여자들보다도 더 재미있었다.
빛은 무슨 얼어죽을 빛. 차라리 마약을 쳐먹은 여자들은 닥치기라도 하거나 말해도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후자의 여자들은 정
말 피곤한 종류였다. 내 인생 자체가 잘못됐다고 비난하는 동시에 그것이 사랑이라도 되는것마냥 구는것이 짜증났다. 그러다 정
말 더 이상 ‘나쁜 남자’의 행동을 그녀들이 원하는것처럼 잠시라도 멈춰준다 싶으면 실망하는 기색까지 비쳤다. 뭐 어쩌라고.
태양은 너무 눈이 부시다. 그것과 함께 있으면 나는 눈이 멀어버린다. 야행성으로 커버린 나를 억지로 되돌리면 많이 만진 고양이
처럼 죽어버리겠지. 내게는 별같은 존재가 필요한 것을.
“그래, 고기. 무슨 고기?”
몇 번 이 여자도 가지고 놀다 질리면 버리면 된다고 스스로 자위하며 묻자, 여자는 한참을 고민했다. 자신이 악령세계에서 도망
쳐 나왔다는 황당한 얘기는 손쉽게 하면서 해봤자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 따위의 한정된 대답이 있는 물음은 골똘히 생각하는
게 어찌보면 정말이지 별에서 떨어진 외계인 같기도 했다.
“으음..”
소혜는 기어코 십분이나 고민했다.
“그냥 내가 아는 레스토랑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아직 영업할거야.”
“응, 대신 맛 없으면 죽는다?”
왠지 죽인다는 말이 진심으로 들리는데도 해맑게 웃으며 집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아다가 아서라, 감기 걸린다, 하며 이
미 열려있던 옷장에서 내가 가진 코트 중에 가장 두꺼운 것을 억지로 입혀놓았다. 왜 그랬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이미 입혀
놓은 것을 다시 벗기기도 좀 그렇고해서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라, 너 나 좋아하는구나?”
소혜가 생글거리자 다른 여자들같았으면 아예 대답을 해주질 않거나 그냥 피식 비웃어주었을텐데, 자꾸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진
짜같아보이는 송곳니 때문에 정신이 팔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근데 그 송곳니 어디서 샀냐?”
“응? 뭐가?”
“할로윈 상품이지?”
“뭔 소리야, 이 송곳니는 진짜라구.”
도저히 사람의 치아라고 볼 수 없는 날카로운 맹수의 이빨들을 드러내며 그녀가 보란듯이 입을 벌려준다. 미친 여자일거라고 단
정 지어놓고 어디에서 구르다 왔을지도 모르는 여자 입에 손을 넣는다는건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이상하게 소혜의 치아
에는 손을 가져다댔다.
“이거..”
송곳니를 확 잡아당겼는데, 치아의 느낌이었다. 인공 치아가 아닌 자연산 치아. 저 송곳니가 진짜라고..? 치아성형 따위로 깎아 만
든 송곳니라기에는 이미 길이 자체가 조금 불편할 정도로 긴데다 저 정도로 완벽하게 하려면 돈이 물쓰듯 빠져나갔을 것이 분명했
기에 인공일리는 없었다.
“원래 악령들 타고난 이빨이 그래. 고기 먹으러 가자!”
한숨을 푸욱 쉬며 그녀의 손을 이끌어 온 레스토랑은, 사실 영업 종료된지 꽤나 되는 곳이었지만, 한때 사기치다 마약 딜러에
게 총 쏘여 죽으려는 것을 내가 구해줬던 적이 있는 놈이라 오밤중에 요리를 시켜도 될 것 같았다.
뭐 사실 이딴 하렘같은 곳에 자리한 레스토랑이 좋을 리는 없었지만, 소혜가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를 파는 곳은 주변에 이 곳밖
에 없었는데다, 처음 만난 정체도 모를 여자에게 돈을 쓰는 자체가 이상했기 때문에 그녀는 불평할 주제가 못된다고 생각했다.
“Thanks, man, I owe you one. (고마워, 빚 좀 졌네)”
맘에도 없는 말을 하자 자다 깨어나서 요리를 해야했던 녀석은 씨익 웃어보였다.
“Nah, man, come any time. It’s no prob, ya hear? Anything for you, my man! (걱정말고 언제든 찾아오라고, 널 위해서 지나치
게 문제가 되는게 뭐가 있겠어?)”
그래, 그렇겠지. 오줌까지 지리면서 그 마약딜러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는데 내가 구해줬으니 오죽 고맙겠어.
뭐 이 세계가 그렇듯, 녀석은 왜 내가 무려 30인분의 고기를 주문했는지 묻지 않았다. 여기에서 오밤중에 뭔가를 부탁한다
는 건 다 뭔가 비릿한 이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You need some help carrying it, bro? (그거 옮기는데 도움 필요하진 않아?)”
“It’s all right. I’ll just make her carry half. (저 여자한테도 반 들라고 하면 되지 뭐.)”
“Her? (무슨 여자?)”
“What are you talking about? She’s right here. (뭔 소리야? 바로 여기 있잖아.)”
“Oh, man, you started smokin’ that shit? You is gonna lose your work! (마약 시작한거야? 안돼, 일거리 떨어진다고!)”
너야말로 내 바로 옆에 서있는 소혜가 어떻게 안 보일 수 있냐고, 너야말로 마약하는것 아니냐고, 그러다 또 빚이 생겨서 그 마약
딜러 놈에게 또 협박이 오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한소리 하려는데, 소혜가 재미있다는 듯 목에서 고양이처럼 그르릉거리는 소리
를 내더니 놈의 바로 코앞까지 가서 퍽, 하고 놈의 살찐 배를 주먹으로 쳤다.
“What the fuck? Shit, did I get shot? (뭐야, 씨발? 총 쏘인거야?)”
추하게 엉덩방아까지 찧으면서, 놀라운 힘에 밀린 것처럼 놈이 뒤로 자빠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놈은 예전 마약딜러 앞에
서 그랬던 것처럼 또 오줌을 지렸다. 그의 바지를 타고 더러운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다. 죽음 앞에서 놈은 맥을 못 추었다. 그렇
게 좋은 삶을 사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러는건지 이해는 안됐지만.
소혜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아, 하며 만족스러운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치 무언가 맛있는게 공기에 떠 있는 것처럼 그녀
는 입까지 벌리고 무언가를 맛보고 있었다.
“You didn’t see her? She was right in front of you! (이래도 못봤다고 할거야? 니 코 앞에 있었잖아!)”
문득 소혜가 자신은 악령이라서 나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 것이 생각나서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What you talking about, man? Get out! I’m sorry man, imma talk to you later, but you gotta go now! (무슨 소리야? 미안하지
만 나중에 얘기하자고. 좀 나가줘!)”
녀석은 한번도 내게 보인적 없던 무례한 태도로 마구 나를 떠밀었다. 사실 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가 나를 밀어제끼면
서 그의 바지에서 떨어지는 누런 액체 때문에 그 곳에 한참동안 발을 디딜 생각은 없었다.
쾅!
한밤중을 마구 울려제끼는 문소리와 함께 나는 밖에 내던져지다시피 밀려나왔다. 분명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소혜는 어느
새 장정 하나도 들지 못할 분량의 고기를 한손에 쥐고서 힘든 기색도 없이 나를 보고 생글거리고 있었다.
“고기다!”
..그리고 고작하는 말은 그것. 오렌지빛 눈을 반짝이며 그녀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너..대체 뭐야?”
“나? 소혜라니까.”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대답할 의향도 없다는 듯 알 수 없는 단조롭고 음산한, 그러나 가사는 굉장히 발랄한 괴상한 노래
를 흥얼거리며 내 옆에서 걸었다. 나도 더 이상 질문할 힘이 없었고, 무슨 이상한 일을 알게 될지 몰라 그냥 닥치기로 결정했다.
“그래, 그럼 소혜야. 그거 들어줄테니까 내놔봐.”
“아, 어린 것이 말이 많네. 난 아동 강제노동은 안 시켜요.”
어이없어하는 나를 뒤로 남기고 그녀는 30인분의, 거의 소 한마리를 들고 간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양의 고기를 한 손에 거머쥐
고 발랄하게 앞으로 뛰어나갔다. 밤의 하렘이 무섭지도 않은지, 천하무법자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매일 돌아오는 자신의 집인것마냥 그녀는 내 집을 익숙하게 찾아냈다. 불도 없는 곳에서 어두워 한두번은 비틀거릴 법도 하건
만, 나만큼 어둠에 익숙한 것처럼, 그 모순된 아름다움을 지닌 몸으로 날렵하게 공기를 가르고 골목을 누볐다. 언제나 내 아래에
서 그 비루먹은 목숨들을 부지하려고 빌빌 기는 놈들이나, 좀 먹은 뇌로 말만 나를 소위 구출해준다며 자신들이 나에 비해 더 잘났
음을 숨 하나하나마다 각인시키고, 자기들이 구세주마냥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과는 달랐다.
나를 장난스레 무시하는것 같기도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튈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녀는 여왕이었지
만, 나를 밑에서 하인 부리듯 부리지도 않았고, 방금 엄청난 능력을 자랑했음에도 언제나 지배하는 자의 익숙함으로 금방 잊고 고
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몸에 위험요소와 아름다움이 곳곳에 배여있었고, 내게서 어떤 무시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러면서
도 내 옆에 있어주었다. 참 이상한 여자.
소혜는 기어코 30인분 중에 내게 한 입을 준 것 빼고는 그것을 모두 혼자 먹어치웠다. 자기 몸보다도 더 커보이는 볼륨인데 그것
을 어떻게 다 위로 넣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그렇게 먹어놓고도 탄탄한 복근에 전혀 영향이 미치지 않는걸 보고서 마치 블
랙홀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태임아, 나 잘게.”
아니, 이 여자가 무방비하게 처음보는 남자인 내 앞에서 저런 복장을 하고 자겠다고 한다. 시키지 않아도 벗고 자는 여자들이나 혼
자서만 요조숙녀인척, 섹스 한번 해보지 않은것마냥 내숭떨며, 함께 자자고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연애의 비법이랍시고 어디
서 줏어들은 지식으로 튕기려 애쓰는 안쓰러운 여자들과 달리 소혜는 그저 묻지도 않고, 날 원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이 잔다는 사
실을 공지하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소파가 있는데도 구지 내 침대에 폴짝 뛰어올랐지만, 전혀 미워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 착각일까, 별빛 때문일까, 그녀
의 몸이 은은하게 별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다.
너무 밝지도 않고, 포근한 빛. 매연에 얼룩진 도시의 하늘에서 찾기도 힘든, 가끔은 비행기 빛을 보며 별빛이라고 억지로 세뇌시켜
야하는 그 빛이 그녀에게서는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그녀는 우주같다. 어둡지만 밝고, 넓지만 좁고,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우주.
“뭐해? 얼른 와.”
마치 내가 자신의 집에 방문해서 그녀가 선심쓰는 것인마냥, 소혜는 침대에 늘씬한 키에도 불구하고 꽤나 쾌활한 모습으로 앉
아 자신의 옆자리를 두들겼다.
“내가 덮칠까봐 겁나지 않아?”
원하지 않는 여자를 덮칠 정도로 여자가 궁핍한것도 아니었고 성욕에 미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장난으로 피식 웃으며 놀리는
데, 소혜가 재규어같은 오렌지눈을 때묻지 않은 순수한 눈빛으로 치켜뜨며 말했다.
“응? 아냐, 넌 안 그럴걸로 믿어.”
아까 장난스럽게 남자의 배를 주먹으로 가격해서 남자가 무서워 오줌까지 질질 흘릴 정도로 때려놓은 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하
렘의 어두운 길을 고기 30인분을 들고 팔짝팔짝 뛰어왔으면서 저런 눈빛이라니! 웃기기도 하고 왠지 귀엽기도 해서 허, 하고 웃음
을 터뜨리는데 소혜가 그 눈빛을 유지하며 입꼬리 한 쪽을 들어올렸다.
“뭐, 건드리면 그 손목 잘라버리면 되지.”
발랄한 표정으로 말한 뒤 그녀는 풀썩, 침대에서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피더니 편하게 드러누웠다. 그녀와 있으면 어떤 표정을 지
어야할지 모르겠다. 화를 내야할 상황이거나 어이없을 상황인데 그저 자연스럽게만 느껴져서 그것이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아참, 내가 악령이라서 나랑 같이 있으면 악몽 꿀 수도 있는데, 뭐 난 여지껏 몇천년 살아오면서 컨트롤 해본 적이 없으니 니가 알
아서 잘 하라구.”
새침떼기처럼 말하더니, 그녀는 아예 눈을 감고 금새 자기 시작했다. 멍하니 바라보는 와중에도 쌕쌕, 숨까지 고르게 쉬어가며 혼
자 편해하고 있다.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내가 왜 처음 보는 여자를 위해 소파에서 자야하나 잔뜩 고민하고 있는데, 소파에 드
러누우려는 참에 소혜가 오렌지 눈을 번뜩 뜨더니 입술을 옹알거렸다.
“이봐, 태임아? 어서 이리로 오지 않으면 내일은 고기를 주지 않을거야.”
안 줘도 돼, 라고 말하려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침대로 들어가서 그녀의 옆에 누웠다. 언제 내게 말을 걸었냐는 듯, 그
게 내 꿈인것마냥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또 곤히 잠에 들어서 내 옆에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방비하다. 아, 이런 젠장.
마약에 미친 골빈 여자들은 많았기 때문에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여자를 가질 수 있었고, 꼭 그런 여자들과 자지 않더라도 스
스로 내게 접근하는 여자들도 종류별로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베스킨라벤스 아이스크림을 먹는 느낌이었다. 여자에 굶주린 적
도 없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먼저 여자에게 덤벼든 적은 없었다.
그러나 소혜는 달랐다. 달콤한 피의 향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매콤한 향료로 바뀌었고, 도저히 인공
적인 향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맛있는 향이 났다. 잡으면 내 손 밑에서 미끄러져 날렵하게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릴것
만 같은 몸에, 나를 거부할 것 같으면서도 유혹하는 몸. 아..
덮칠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여 행사하던 권력은 같은 헌터로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
다. 그녀는 내가 내 자신이 그만큼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성욕을 자극하는 것과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녀
는 정말 손을 대면 내 손목을 잘라버릴까?
“태임아, 까불면 뼈다귀로 맞는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결국은 손을 살금살금, 한번도 그래본 적 없이 섬세하게 뻗고 있는데, 소혜가 자신의 허리에 올려진 손을 치우
지도 않은채 섬뜩한 쇳소리로 내뱉었다. 한번도 살아보며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에 움찔하긴 했지만, 허리에 있는 손은 기어코 빼
내지 않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오늘 고작 처음 본, 고기나 좋아하는 이상한 여자일지는 몰라도 소중했다. 덮치지는 않더라도, 조
금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이었다. 나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나를 이용하지도 않고, 나를 바꾸려 하지도 않은채 내 있
는 그대로의 옆에서 이렇게 편히, 아무런 목적 없이 잘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난 손목 두개 다 있어야 고기 요리할줄 아니까 자르진 말아줘.”
나름대로 장난기 있게 말하자 소혜가 꿈결인것마냥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풉, 하고 웃었다. 신기하게도 허스키하면서도 전체적
으로 감미로운 톤을 지닌 그녀의 목소리에 빠져들어 성욕이 조금은 잠잠해졌다.
“딴 생각하지 말고 오늘밤은 그냥 자. 그럼 상을 줄지 또 어떻게 알아. 난 어디 가지 않아.”
누군가 날 두고 어디 가지 않는다고 말해본 적이 언제였더라? 없다. 그리고 말했다고 해도 내가 그 소리를 반길 것은 그녀밖에 없
을 것이다. 어째서? 그녀는 별빛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그녀는 은은히 빛을 발했다. 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더욱 편하게 잠을 잘 정도로. 내게 어느 날 방문해
준 장난스러운 재규어.
“상이라..”
야생의 향을 맡으며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 누구에게도 해준 적 없던 팔베개를 자진해서 해주며 부모
님이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경계를 놓고 나른한 잠에 빠져들었다.
고아원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부모님을 죽였던 마피아는 기적적으로 도망간 나를 찾고 있었고, 내 얼굴은 동양애들 중에 흔한 얼
굴이 아니었기에 찾기가 쉬웠다. 그런 대낮에 얼굴을 들이민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어느 날 밤 나는 히치하이킹을 몇
번 해서 운좋게 그 갱들의 영향력 밖에 있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조차 끝나지 못하고 부모님 없는 꼬마아이가 도시에서 사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더러
운 뒷골목에서 뒹굴었고, 마약에 쩔어진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들이 몰래 물에 탄 마약을 몇번 접한 적은 있지만 마약도 사람에 따
라 정도가 다른지 내게는 그닥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어차피 마약을 할 돈도 없었는데다 환각상태에 빠지는 것도 다른 사람들처
럼 황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손쉽게 끊을 수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자그마한 갱들은 존재했다. 두들겨맞고, 신고식을 하고, 랭킹을 차고 올라가고, 부모님과 열두살이 되도록 써
왔던 한국말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마약거래하는 심부름을 하기도 했고, 돈을 훔치기도 했고, 안해본 일은 거의 없었다. 뭐 딱
히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사회에서 밀려나올때쯤 나는 어느새 성인이 되어있었다.
친구가 아닌 서로 이용하는 사이의 지인들은 수없이 넘쳐났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고, 어렸을때부터 어울려왔다고 해
도 어느 날 단 5만원을 훔치기 위해 등에 칼을 꼽아넣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거대한 도시에서 우리같은 놈들이 몇 명 밤마다 죽
어난다는 것은 더 이상 기삿거리도 아니었고, 뉴스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익숙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며 부모님이 피하라고 신신당
부하던 그룹이 어느새 눈을 떠보니 ‘우리’가 되어있었다.
포커페이스야말로, 혼자의 입지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살아남는 길이었다. 누군가를 믿다가 배신당해 어느 날 아침 대가리 뒤에 커
다란 총 구멍이 나 있는 놈들을 한두번 본게 아니었다. 처음엔 구역질도 많이 했지만, 몇 년 흐르지도 않아 나는 돈을 위해 쥐도새
도 모르게 좀 먹은 돈만 챙기며 우리 부모님 같은 사람들을 죽이러 다니는 놈들을 마주 죽이는 킬러가 되어있었다.
사람을 죽이는게 무서웠다는건 아니다. 오히려 처음 더러운 뒷골목에 들어와 먹을 돈이 없어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을 주워먹던 것
이 더 역겨웠다. 역겨운 놈들을 원래 그들이 있어야할 쓰레기통에 넣는다는 것은 음식쓰레기를 오물취급하는 것만큼 당연한 것이
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사회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중지한지는 벌써 수 년. 이미 이렇게 변해버린 것, 되돌릴 수
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나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죽을때까지 단 한번도 완벽히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죽음의 정글에서 나는 혼자 살아남아
야했다.
겉으로는 예의바르게 눈 앞에서 수년간 ‘친구’였던 자의 머리에 총구멍이 나도 같은 얼굴을 유지했지만, 속은 썩어들어갔다. 나
도 모르게 남아있던, 어느 날 밤 부모님을 빼앗긴 아이의 모습은 포장되고 위장되어 이렇게 홀로 남았다.
그녀가 오기 전에는.
매연의 더러운 공기에 가려 별빛이 보이지 않는 도심의 하늘. 그러고보면 그녀가 별빛을 받고 빛난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된 것이
었다. 그녀는 별빛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별빛이었다.
별나라에서 온 것처럼 엉뚱하게 행동하고, 별처럼 나를 밝힌.
아까의 성욕은 어디갔는지 아직 잠든 그녀의 머리카락을 이마에서 넘겨주자 그녀가 자신은 악령인줄도 까먹었다는 듯 장난스럽
게 웃었다. 그녀는 나를 재밌는 장난감이라고 말했고, 나도 그녀를 갖고 놀려 했지만, 어느 순간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함께였
다. 첫 날 밤인데도 언제나 이래왔던 것처럼 익숙했다.
어쩌면 정말 그녀가 말했던대로 고기는 놀라운 마법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까불면 때리겠다며 먹고서 깨끗이 씻어 (손을 한번 위로 스윽, 하자 씻겨나갔는데,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원래 자신
은 놀랍다며, 왜 몰랐냐고 풉, 하고 웃었다) 손이 뻗는 창틀에 올려놓은 고기의 뼈다귀를 보며 웃어야할지 이상해해야할지 결정
을 못하는데, 갑자기 눈물 한방울이 뚝 떨어졌다.
다락에 숨어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는 순간에도 혹시나 들킬까봐, 부모님이 신신당부했던 것처럼 소리도 내지 못하고, 결과
적으로는 참아졌던 눈물. 그리고 나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정중히 정말 꼭 해야할말만 하고, 생존을 위해 꾹 다물고 살
았던 입.
입보다도 굳게 막혔던 눈물의 샘. 피와 토사물이 섞인, 구정물이 흐르는 골목에서 겨울에도 벼룩이 잔뜩 기생하는 동물들이 자던
곳을 대충 손으로 털고 자던 첫 날 밤에도 흐르지 못했던 눈물. 그것이 소혜를 보며 뚝, 뚝, 한 방울씩 떨어지나 싶더니, 결국은 장
마처럼 쏟아졌다.
윗몸만 일으켜 보던 소혜의 매끈하게 탄 얼굴 위로 장마에 불은 폭포처럼 물을 쏟아내다 혹시 그녀가 깰까봐 고개를 돌리는데, 소
혜가 아직도 눈을 감은채로 이불 속에서 내 손을 꼭 잡아왔다.
“내일도 울면 뼈다귀로 맞는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그녀는 엄포를 놓았다. 한번 피식, 하고 웃다가, 결국엔 다시 쏟아지는, 인생 처음의 눈물에서 나
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목놓아 울었다. 열두살 어린아이의 모습 그대로, 참아왔던 모습 그대로.
어둠 속에서 소혜는 불을 켜지 않았다. 포근하게 감싸주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소혜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
다는 것을 그제서야 제대로 느꼈지만, 열네살이 되고 어울리던 갱의 대장급되는 녀석이 이 놈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널 죽이겠다
며 으름장을 놓고 쥐어준 총과, 그래도 싫다고 발버둥치는 나를 그 녀석이 죽을 정도로 여기저기 찢어놓는 바람에 잔뜩 온 몸
이 내 자신의 피에 절여진 날, 그 날 느꼈던 그 뜨거운 온기에 질려있던 내게는 단 샘물 같은 한기였다.
“이상하게 네 공포는 먹어도 맛있지가 않아.”
소혜가 속삭였다. 별빛이 아른거리는 그녀의 입술이 눈물에 적셔진채 닫혀진 내 눈두덩이에 닿나싶더니 눈물자국을 타고 내 입술
로 함께 타고 내려왔다.
“그래도, 이건 좀 괜찮네.”
그녀는 감정 표현을 잘 하지 못했다. 내가 울자 어떻게 달래줘야할지는 몰랐지만, 괜찮냐고 물어보는건 멍청한 짓이라는 것
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나를 안아줬을 뿐이다.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입을 벌리고 웃으려다, 입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그녀
의 야생의 향에 취해서 웃음을 중도에 멈추고 대신 웃음보다도 더 매콤하도록 즐거운 그녀의 입으로 역침투해들어갔다.
“뭐, 아까 예상외로 잘 참았으니 상을 주긴 줘야겠지.”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어서 입술에서 입을 떼고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다 봉긋하게 올라온 부
분에 옷 위로 한번 조심스럽게, 소중하게 입을 맞추자 그녀가 간지러운 듯 기분 좋은 목소리로 웃었다.
“첼로같아.”
그녀로 인해 금방 찾아왔다 허리케인처럼 강하게 한번 나를 치고, 치유된 모습으로 자취를 감춘 눈물의 마지막 흔적을 닦아내
며 그녀의 귀에 속삭이자 그녀가 그녀 치고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널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우린 서로 선택한건지도 몰라.”
“누가 누굴 선택했으면 어때. 지금 함께 있는데.”
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있는 그대로, 상처도 지금의 모습도 모두 질문 없이 받아주었다.
그녀의 한기 덕분에 내가 평소에도 찝찝해하던 페로몬들 따위에 시달리지 않던 별빛 가득 찬 그 밤의 끝자락에서 그녀의 레몬
빛 날개가 침대 위로 강림했던 것을 그래서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옆에 나란히 누운채 맞이하는 첫 아침이 다가왔다.
-
암묵의 동의 속에 소혜는 나와 무려 반년이 넘도록 내 집에 머물렀다. 처음엔 24시간 장난칠 힘이 남아돌고, 침대에서 소파로, 가
끔은 좁은 원룸 안에서 안쓰럽게 그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깃털로 나를 간질이기까지 하던 소혜는, 어느 날 부터인가 말라가기 시
작했다. 그녀의 생기가 넘치던 오렌지빛 눈에서 서서히 별빛이 사라지고, 희미한 향만 남았다.
“요새 왜 그러는거야?”
습관대로 그녀의 머리를 내 팔에 올려놓고 어둠 속에서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데, 그녀에게서 희미하게 나는 빛으로만도 충분
히 보이는 마른 그녀의 몸에 걱정이 되어 미칠것만 같았다.
“뭐가?”
목소리에 그 자신감이나 사랑스럽던 여왕같은 권력은 흔적조차 간신히 찾아볼 정도로 사라졌으면서, 소혜는 내가 걱정하는 것
을 눈치채고 시치미를 뚝 뗐다.
“요새 왜 그렇게 마른거야? 아예 죽어가고 있잖아. 너 악령이잖아? 악령은 사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몇백년은 기본으로 건강
히 산다고 했잖아. 왜 그런거야?”
“아무것도 아냐.”
그녀가 내게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반년을 일심동체인것마냥 함께 해오던 그녀의 등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이대
로 희미해져 사라져버릴까봐 나는 그녀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아니, 원래는 세게 잡더라도 간지럼조차로도 인식하지 않던 그녀여서 습관이 되어버린 행동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
자신도 모르게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가, 소혜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서둘러 입을 닫았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
다.
“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나한테서 멀어지지 않는다고. 나도 그래, 왜 그런거야?”
“나 말이야, 악령들 사이에서 열손가락에 꼽히는 상위 클래스야. 그래서 다른 악령들의 존재가 옆에 없으면, 한마디로 말해서 왕에
게는 자신들의 백성들이 있어야 왕이듯이, 우리같은 존재들은 다른 악령의 존재가 없으면 힘을 잃게 돼. 그뿐이야. 아무것도 아
냐.”
“그럼..돌아가야하는거야?”
“돌아가지 않을거야.”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며 다시 내쪽을 바라보았다. 흐릿해진 오렌지빛이 그때서나마 잠시 생기를 띄었다. 나를 한 곳에서 이렇게
도 오래 머물게 한 바로 그 눈빛으로.
그때부터가 전쟁이었다. 그 후 세달동안 그녀는 거의 아사 직전에 다가섰다. 아무리 많이 고기를 먹이고 별 짓을 해보아도 전혀 차
도가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어? 너 정말 이러다 돌아가야되면..다른 방법, 정말 없는거야?”
소혜는 고개를 떨구었다. 요새는 날개를 펼 힘도 없는지 자취도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있어야할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있어.”
그녀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작게 속삭였다.
“뭐? 뭔데! 왜 여태 말하지 않은거야?”
이제는 나보다도 힘이 약해져버린 그녀가 혹시 조금이라도 아파할까 소중히 품 안에 넣으며 다그치는데, 그녀가 수치심이 가득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목숨. 얼마간의 기간과 맞바꿈할수 있어.”
“그렇다면..”
사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이미 더러운 놈들의 피가 한두번 묻어본 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할 수 있었
다. 그녀는 이런 나를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 사실 때문에 나를 가까이 하는 것도 아닌, 나이기에 나
와 함께 해주는 것이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냐, 하지마, 태임아.”
“어째서?”
“너랑 지내고나서는 인간들한테 손을 대기 싫어졌어. 자꾸 인간들의 공포를 먹으려고 하면 네 얼굴이 떠올라서, 도저히 못하겠
어.”
바싹 말라서 이젠 갈비뼈가 보일 정도의 그녀의 몸 때문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럼, 그럼 어떡할건데..”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될까?”
“이대로..? 이대로 있으면 너..”
“알아.”
최대한 힘주어 단호히 말하려 애쓰는 그녀를 무릎에 앉혀놓은 채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몇 시간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
지 못했다. 위로를 받아야할 것은 그녀인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은 역시 그녀였다.
악령들도 또 한번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배웠다. 눈에 띄게 희미해져가는 그녀는 더 이상 인간의 음식을 손에 대지
도 않았고, 퀭한 눈으로 벽을 바라보고 있는 때가 많았다.
그때부터였다, 그녀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 서서히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니, 오렌지 빛이던 그녀의 눈은 전체적으로 붉게 변해
서, 흰자위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섭다기보다는 슬펐다. 이제는 힘도 없으면서 내가 가까이 다가오면 송곳니를 드러내며 손톱
을 몇센티나 고양이처럼 속에서 끌어올려 확 치켜세우고 달려들기까지했다.
생존본능. 그녀의 안에 잠들어있던 악령의 자아가 자신의 자발적인 소멸을 느끼고 살기위해 발버둥치며 기어나온것이다. 가끔 소
혜가 정신을 차릴때면 그녀는 내 얼굴에 잔뜩 난 자신의 손톱자국을 보며 울다 지쳐 잠들곤 했다. 그럴때면 그녀를 내 무릎에 올려
놓고, 이제는 아이의 무게밖에 나가지 않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야하는건지 스
스로와의 갈등에 빠질때도 많았다.
언제 잠시 그녀의 정신이 돌아왔을때 물어본적이 있었다. 나도 악령이 되면 안되겠느냐고. 그러면 그녀의 건강이 돌아오지 않느냐
고. 그녀는 힘이 없어 그녀의 원래 목소리가 아닌 새된 비명을 지르며 안된다고 말했다.
끔찍한 고통이라고, 원래 악령이 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악령으로 바뀌는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다고. 절대 내게 겪
게 하지 않겠다고.
“날 바꿔줘.”
어린아이처럼 졸랐다. 하지만 제정신이었을때 그녀는 일순간 자신의 예전의 위엄을 되찾아, 무조건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달라
고 부탁, 아니 강요했었다. 자신의 마지막이라고. 나는 복종 아닌 복종을 해야했다. 그녀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듯이 나 역
시 그녀를 그녀가 정한 상태의 그녀로 사랑해주어야했으니까.
이제 얼굴에서는 그녀의 눈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퀭해지고, 가끔 생각 없이 그녀를 만질때면 말 그대로 그녀가 귀신이 된 것처
럼 그녀의 몸을 통과할 때가 허다해질때쯤, 그녀는 잠시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커플 잠옷을 입고 싶어.”
그녀답지 않게 꽤나 아기자기한 것을 원하는 이유는 나와 함께 무언가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악령과 킬러라는 웃기지도 않
은 콤비 때문에 다른 사람들 같은 방식으로 데이트해보지 못해서, 그것이 한에 남았던걸까.
문득 그녀가 이것을 원하는 이유가,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밤이 될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내 별이 희미해지
고, 사라진다.
“하지만, 시간을 더 같이..”
“아냐, 꼭 입고 싶어. 금방 갔다와.”
그녀가 본능에 몸을 맡기지 않고 버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결국 강경하게 떠미는 그녀에 의해 집
을 뛰쳐나왔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줄이기 위해 뛰고, 택시를 잡고, 눈에 띄는 가장 첫 잠옷을 집었다. 유치한 디자인. 흰 색의 같
은 바탕에 여자것은 분홍색 하트, 남자것은 하늘색 하트.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택시 안에서 더 빨리 달려달라고 강요하고 있는데, 내가 문 밖을 나서기 직전 바라보았던 그녀의 눈이 묘하게 빛나던 것이 기억났
다. 그 눈길의 뜻은..설마..
우리의 예전 대화를 기억해냈다.
‘악령이 죽으면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악령답게 독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서야 자기도 죽어.’
‘그래? 대단하네.’
‘그러니까 악령들이 죽어갈땐 옆에 있지 않는게 좋아.’
우리의 마지막 밤은 마지막 밤이었지만, 그녀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잠옷을 입고 사라질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를 떠밀어 보
내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삼으려고 했다..
끼익!
택시의 기사에게 소리지르다시피해서 속도위반이란 위반은 모조리 하고 내려 집으로 뛰어왔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뚝
뚝 떨어졌다.
“소혜야, 왜..”
너 없으면 난 다시 옛날로 돌아갈걸 알면서, 라고 말이 나오려는 것이 달리느라 숨이 차서 더 나오지도 않았다.
쾅!
열어제낀 문 안에서 소혜는 붉은 눈으로 서있었다. 그녀의 발 아래에는 왠지 낯익은 남자 하나가 시뻘건 장기를 내비치며 널브러
져있었다.
“소혜야..”
그녀는 내 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하지만 그녀의 발 아래에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게, 그러나 죽
지 않고 최대한 그 고통의 기간을 연장시키기 위해 소혜가 마련해놓은 죽음의 축제 속에서 있는 남자는..
탕.
기억 속의 두발의 총성이 머리 속에서 울려퍼졌다. 다락방에서 내려다보던 부모님의 핏물도 떠올랐다. 눈물도 떨구지 못한채, 눈
도 감지 못한채,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또 지르던 그 날..
그 놈이었다.
“소혜, 너..”
이성을 잃은 순간에서도 그녀는 내 악몽마다 나타나는 그 놈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놈을 첫 파괴대상자로 삼은 것이었다. 놈은 피
가 꿀럭꿀럭 차오르는 목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들어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악령들은 눈물을 흘리지 못하기 때문에 흘린다던 피눈물..
“소혜야? 나 알아보겠어?”
“가! 늦기 전에 가란 말이야!”
그녀가 악을 썼다. 자꾸 붉은 눈과 오렌지색 눈이 교차하고, 내부의 싸움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사람
을, 내가 가장 증오하던 사람이었는데도, 이렇게 분해시켜놨다는 것에 대한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듯 자꾸만 손으로 얼굴을 가렸
다.
“보지마..피범벅이잖아..”
그 놈의 장기는 일부분 뜯겨져있었고,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키스를 퍼붓던 그녀의 입술에는 역시나 그 살점 중 일부분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로테스크하지 않았다.
“나도, 널 있는 그대로 사랑해. 괜찮아, 소혜야.”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그녀에게로 걸어나갔다. 그녀가 매끈하게 잘 빠져있으면 어떻고, 장기를 입에서 뚝뚝 흘리고 있으면 어떤
가..소혜는 소혜였다.
“나오지마!”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수도 없던 순간, 그녀의 눈에 생존본능이 다시 떠오르더니, 놈의 드러난 장기보다도 더 붉은 색의 눈으
로 그녀가 내게 송곳니를 치켜세우고 달려들었다.
나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고, 남루한 목숨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다만 가장 큰 공포는, 다시 혼자 남겨질 것 같다
는 것과 그녀가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너와 함께 했으면 좋겠어.”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잣말을 내뱉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목덜미를 세차게 긁어내 동맥이 터졌나 싶더
니, 곧 정신을 잃었다.
-
“으아악!”
살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 미안해, 하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었어, 애절하게 외치는 소혜의 목소
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했다.
괜찮은거야 이제는? 넌 괜찮아? 물어보고 싶은데 소리는 나오지도 않고, 계속 그녀에게 손을 뻗기 위해 톱으로 사지를 잘라내
는 고통 속에서 버티고 또 버텼다.
“태임아, 안 일어나면 뼈다귀로 맞는다.”
아, 드디어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고통은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딱, 하고 멈추고, 소혜의 목소리와 향만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윗몸이 정말로 일으켜졌다. 죽음이 이렇게 현실적인건가?
“왜 안 피했어 이 바보야! 죽을래 진짜? 내가 그때 못 참았으면 어떡할뻔했어?”
그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니 죽은 것은 아닌것 같았다.
“아..”
“니가 안고있던 커플잠옷에 부딪혀서 단숨에 숨통 끊는거 간신히 면했잖아! 미쳤어? 아니, 무슨 잠옷을 그렇게 빨리 사와?”
그녀가 투덜댔다. 좋으면서, 또 투덜댄다. 귀여운 심술쟁이.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느껴보지 못했던 힘이 혈관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손을 들어 바라보니 원래 항상 밤에만 돌아다
니느라 무슨 병 걸린 사람처럼 창백했던 피부가 소혜와 같은, 완벽하게 태닝된 매끈한 피부로 변해있었다. 어깨를 만져보자 내 의
지에 따라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 설마..?”
“그래, 이 바보야. 그만큼 피를 흘렸으니 살려내는 길이 그때 그 이성 잃은 머리로 생각해낼 수 있는게 고작 이거밖에 없었어. 그
냥 핥았으면 됐을텐데, 아우, 바보같이!”
“난 잘됐다고 생각하는데.”
진심이었다. 그녀와 이제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고, 그녀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도 즐거웠다. 서로 힘 조절하면
서 만지지 않아도 되고, 이제 정말 내가 꿈꾸던 것처럼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사랑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 너 근데 이제 멀쩡하다?”
소혜는 오렌지빛 눈과 탄탄한 몸을 다시 되찾은채, 윤기가 돌아온 레몬빛 머리를 휘날리며 나를 향해 눈을 찡그리고 서있었다.
“당연하지. 악령이 있잖아. 난 이제 악령세계랑 인연 끊어도 아파질 일이 없어.”
그 악령이 누구냐고, 안 보인다고 말하려다 그제서야 제대로 머리에 박혔다. 내가 그 악령이구나, 하고.
“근데 웃긴게 내가 소멸 직전에 의식이 생기는 바로 그때랑 널 공격한때랑 딱 맞아떨어져서, 너가 나랑 똑같은 엘리트 악령이 됐다
는거야. 이젠 뼈다귀로도 못 때리게 생겼어.”
그녀가 정말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몸을 일으키자 놀랍게도 날개가 확 돋아 뻗어나오면서, 그녀를 내려다보는채로 이제 놀랍
게도 가볍게 느껴지는 그녀의 발이 땅에서 살짝 떨어질 정도로 들어올린채 키스했다.
“아, 맞다. 잠옷 사왔으니까 상 줘.”
씨익 웃자 그녀가 바로 옆에 들고 있던 뼈다귀로 내 머리를 강타했다.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괜하 아픈척 엄살을 피웠다.
그녀는 동정도 가지지 않고 꿈쩍도 안했다. 소혜구나. 소혜가 돌아왔다! 이런 걸로 기뻐해야하는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래
도 좋았다.
“잠옷 입고 올거야. 너도 입어!”
그녀가 괜히 팩 쏘아붙이더니 하늘색 하트가 있는 남자용 잠옷을 들고 갈아입기 위해 사라지려했다.
“야야, 소혜야! 안돼, 분홍색 잠옷 입으면 나 쫄티된단 말이야.”
장난스레 웃으며 바꿔치기를 하자 그녀가 흥, 외치며 재규어와 같은 날렵한 걸음걸이로 재빠르게 사각지대로 이동하더니, 슈퍼맨
마냥 이초도 안되어 갈아입고 왔다.
우리는 나란히 커플 잠옷을 입은채 침대에 앉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침대에 앉고 내 무릎엔 소혜가 앉았다. 그녀에게
서 다시 돌아온 별빛이 은은히 비추었다.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은채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음미하며 그녀의 레몬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고있는데, 그녀에게서 뿜
어져나오는 감미로운 별빛 때문에 다시 우주가 생각났다.
“소혜야, 우리 카페 하나 만들까? 우리 원룸은 우리 날개 뻗기엔 너무 작은 것 같아. 우리 이러다 날개 엉켜서 뜯기겠다.”
“그건 그러네. 카페? 어떻게?”
“우주 컨셉으로, 우리 원룸처럼 새까맣게 해놓고 별빛을 박아놓는거야.”
“으아..엄청 힘 소모되겠네.”
“이젠 나도 노동할 수 있으니까 뼈다귀로 때려가면서 실컷 일 시키면 되지!”
소혜가 카페오레 목소리로 즐겁게 웃었다.
“그럼, 이름은 뭘로 할건데?”
아직도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채 한참 생각에 잠겼다.
“너, 대단하더라. 마지막 순간에 날 알아보다니.”
“뭐, 내가 원래 좀.”
장난기있게 가르릉거리는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하며 우리 카페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Ne.F, Never part From myself, Never part From you. (네프, 너에게서도, 나 자신에게서도 멀어지지 않아)”
“네프.”
내 우주인 그녀가 칭호가 무색하게 싱그럽게 웃었다. 잔혹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이제 내게 있어서 그 어떤 모습도 완
벽하게 다가오는 존재였다. 소혜도 잘 표현은 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프.”
그녀의 말을 되풀이하며 소혜의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번엔 손목 잘라버리겠다는 소
리 하나 없이 한 목소리로 웃으며 키스했다.
카페 ‘네프’에서 가장 감미로운 별은 단 하나, 소혜(宵暳)였다.
소혜(宵暳) : 별로 하여금 밤을 밝히다.
태임(台恁) : 별에서 온 그대, 별빛으로 나를 비춘 그대.
[작가말]
연참이 오늘부로 끝나네요.
폭풍이야기님, 사빈님, 준&건 맘님, 복주머니님 모두 정말 수고하셨고,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바래요 :)
중도 탈락한 다른 작가님들도 공포소설방에 올라올 나머지 이야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드디어 [차마 죽일 수 없는 너]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모든 이야기들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소혜와 태임이의 얘기가 연참용으로 쓰여질 장편이었죠.
그런데 속편으로 해서 한 이야기로 묶기 위해 압축하고 압축하다보니 그들의 이야기가 많이 잘려,
사랑에 빠지는 부분이 상당히 서둘러지고 줄거리가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서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줄 아는 이 둘의 사랑도 많이 축복해주세요 :D
[차마 죽일 수 없는 너[에 나오던 의사 기억하시나요? '남궁공유'에게는 비밀이 있습니다.
좀 짧아질 것 같아, 올리게 된다면 그냥 블로그에만 넣어놓을게요. http://blog.naver.com/never_before 입니다.
여지껏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독자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연참, The End.
|
|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잘 읽었어요. ^^
감사합니다. 준&건 맘님도 수고하셨어요. 일주일동안 푹 쉬고 재충전하세요 :)
와우~ 수고하셨습니다.. ㅎㅎㅎ
감사합니다, Deathrasher님. 여기까지 읽느라 수고하셨어요 :)
시험이 겹쳐서 온새미로님 글 먼저 읽었어요. :) 다른분 글들도 주말에 읽어볼예정이구요. 재밌게 잘 읽었어요. 왠지 전 이 이야기가 더 좋네요. 그럼 장편으로는 안나오는건가요? 단편이라서 더 아쉬움이 있는거 같아요. 수고 하셨구요. 담에 더 좋은 글 부탁해요. 항상 기다리고 있답니다. Cheers!
앗, 감사합니다, 하늘을날다님 :D!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는지요? 사실 이건 비밀이지만 저도 이 이야기에 더 애착이 갔답니다. 그런데 이 글은 스물다섯편은 장난으로 넘어가도록 계획되었던 이야기라, 연참용으로 다른걸 썼지만요. 아쉬워서 단편으로 쓰긴 했습니다만은, 용량이 줄고 줄은지라 많이 부족하네요. 할 수 있다면 장편으로도 조금 바꿔서 써보려구요 :) 하늘을날다님, 응원 감사드립니다. 최선을 다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D 좋은 주말 보내세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젠 한 숨 돌리세요..
감사합니다, 사악한 702님. 여기까지 읽느라 수고하셨어요 :) 좋은 하루 되시고, 전 애착이 가는 단편 아이디어 몇개가 있어서 그것을 쓰러 갑니다 :D
방대한 분량으로 달려오신 온새미로YS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쓰다보니 늘게 되더라구요. 사빈님의 글, 정말 라인업때부터 두근거리면서 기대했는데, 여기까지 달려와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정말 수고하셨구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들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마지막 소혜, 태임의 이야기도 재미있군요. 로맨틱해요. 연참완수한 것 축하드리고, 앞으로 공소방에서 금방 또 뵙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감사해요, super21s님 :) 여지껏 하나하나 핵심을 잡는 댓글들에 많은 힘을 얻었답니다. 곧 단편들 몇개를 들고 찾아갈 예정이예요. super21s님도 [엄마를 사랑하는 법] 완결 얼마 남지 않은 것 축하드립니다! :)
이번 연참 대회를 같이 하면서 온새미로님께 가장 크게 놀랐습니다. 매회 어쩜 그렇게 긴 분량을 척척 멋지게 써 내시는지요... ^0^ 멋진 작품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폭풍이야기님. 폭풍이야기님도 이번 완결때 굉장히 많은 분량 쓰셨던데, 대단하세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 [귀신이 온다]의 미유와 냐우 이야기도 많은 기대하고 있구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온새님은 베드엔딩으로 갈듯하다가 헤피엔딩으로 가는것이 참 묘미인거 같습니다.한번쯤 해보고 싶은 세기의 사랑이군요
감사합니다, 괴상망측님 :) 또다른 이야기편까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