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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8 이후 우리가 걸어온길*
* 상세한 내용은 2.18 대구 지하철참사 유족회 사무실로 문의 하셔도 됩니다
*tel 253-6491~3 256-3320 fax253-6495
<2003년 2월18일>
* 오전 9시 53분=참사발생 당일 오후2시 우리은행 2층에서 열린 관계회의에서 소방서장이 차량을 분리해야 구출이 용이하다고 하자 반월당역으로 견인하자고 할 때 그쪽은 지하철 2호선이 공사중 이어서 안되고 대구역으로 견인하자고 할 때 공보관이 시장님 거기는 롯데가 있는데요 하니까 "그러면 안돼" 라며 방치
* 시청일지= 당일 오후4시 지하철 양측 방향으로 운행결정
* 지하철공사 일지=별단을 만들어 월배기지 차량으로 자동차 견인 결정
<2003년 2월19일>
* 오전9시,50사단 501여단이 청소 하려고 들어가는데 경찰의 저지에 진입 실패
* 오후 1시30분 =2차시도 위의 지시가 있었다며 경찰의 저지를 뚫고 501여단은 장화 신고 삽과 푸대를 들고 400~500푸대의 쓰레기를 치우고 물청소 실시
* 오후 2시= 시민회관에서 조해녕시장과 윤진태사장에게 청소를 항의 윤사장은 중부경찰서에 잘 보관 하겠다고 안심시키며 계속진행
* 오후7시=사고의 현황 파악을 위해 대표위원들을 찾았으나 2인만 있는데 대표직을 사퇴 한다고 표명,이에 대강당에서 대표위원 선출 15인,위원장은 18일 선출 되고 사퇴 표명도 없이 연락이두절 그래서 공석으로 두기로함
<2003년 2월22일> = 오후 윤석기위원장 와서 위원장직 수락표명
* 오후7시 유가족들이 시민회관에서 중앙로 역사로 비를 맞으며 중앙로 역사 지하 1층으로 들어가 깔개와 모포 신청, 사람 200명에 모포 20장 보내옴
<2003년 2월23일>
* 시민회관에서 시민 사회단체와 조시장 간담회를 하고 중앙로 역사 유족들에게 설명회
* 유족질문=어떤 이유로 군까지 동원하며 물청소를 했는지?
* 현장보존을 안한 이유는?
* 조시장 답변=다 정리 되었다는 경찰청장의 전화보고를 받고 청소를 지시 하였음
* 임대윤 동구청장=유족의 질문에 답변할 가치가 없다라는 말 남긴후 조시장과 퇴장
<2003년 2월24일>=유족과 국립과학수사 연구소, 밤새워 재수색
,
<2003년 2월25일>= 안심 기지 차량에서 쓰레기 더미수색, 146점의 증거품과 6점의 시신일부 발견
<2003년 2월26일>= 시민사회단체가 주관하는 1차 추모시민대회 중앙로 역사위에서 개최
<2003년 2월27일>= 고건국무총리 취임후 바로 시민회관방문
<2003년 2월28일>= 중앙특별지원단 파견
<2003년 3월1일>
* 0시30분경 대구시 교통과장과 중부경찰서 경비계장이 방문, 중앙로 차량통행을 제한한다고 통보하고 중앙로 차량 통행금지
<2003년 3월2일>
*시민 사회단체가 주관하는 2차 추모 시민 대회를 차량 통행이 금지된 중앙로 역사 위에서 개최 흰풍선이 망자들의 넋인양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고 ....
<2003년 3월10일>= 인정사망 심사 위원회 구성, 유가족은 유해는 일괄 인수하고 장례는 합동장례로 결정
<2003년 3월12일>= 실종자대책위는 대구시장과 윤진태 지하철 사장을 증거인멸 및 훼손 혐의로 고소
<2003년 3월14일>= vj특공대 방영으로 전동차 유해중 1구가 첫확인
<2003년 3월15일>
* 시민사회단체 3차 시민추모대회를 열고 지하철 교대역으로 행진
* 안전을 무시한 전동차 운행을 저지하기위해 유족이 탑승한후 사령실과 통화를 시도 했으나 다른역과 통화중 이어서 실패하고 비상연락을 시도 했으나 고장으로 연결되지 않아 기관사가 자신의 휴대폰으로 사령실에 연락
< 2003년 3월18일>
* 실종자 대책위와 사망자 대책위가 통합
* 서울에서 촛불 추모행사에 운영자외 2인이 참가
* 도보로 서울까지 간 목사님과 유족3인 참가
<2003년 3월20일>
* 노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시청광장 시위, k2에서 잠시면담, 대구시에서는 유족대표 교체 요구로 시간 지연시킴
<2003년 3월21일>= 인정사망 심사위원회가 76명을 1차로 사망인정
<2003년 3월22일>= 실종자 유해 첫 인도
<2003년 3월24일>= 유해 인도와 관련 중부경찰서가 약속어긴 것을 항의 시위
<2003년 3월25일>
* 추모공원부지 물색 및 답사 망우공원, 두류공원, 상인동 위령탑, 답사하고 유명 풍수와의 조언으로 나침반으로 방위표시와 촬영
<2003년3월26일>
* 틱낫한 스님 중앙로 역사 방문하고 걷기 명상법으로 중앙로 역사에서 시민회관 까지 걷고,걷기명상 에 관련한 책 증정하고감
<2003년 3월27일>= 아름다운 재단이 후원자 추천요구에 제출함
<2003년 3월31일>=김기욱 부시장이 수창공원에 추모공원 조성을 약속
<2003년 4월1일>
* 시청2층에서 건교부 교통정책 실장과 시장,그리고 시민사회단체와 유족이 안전한 지하철 관련 간담회
<2003년 4월2일>
* 상인동 지하철공사 항의방문, 김영창사장 명패를 윤석기 위원장이 들고 옴
* 동인3가 동사무소에서 주도하는 추모공원 반대운동 증거 포착
<2003년 4월3일>
* 납골당 및 낙산리 시립묘지 견학일자, 대구시에서 버스를 보냈으나 유족이 견학 하지 않는다고 보냄
* 성내2동 동사무소 에서도 여론조장 작업문건 입수
<2003년 4월4일>= 중구의회가 수창공원조성 반대결의
<2003년 4월5일>= 수창공원과 관련 중구청장 면담을 요청 전화로 통화하고 4월7일날오후4시 약속함
<2003년 4월7일>
* 오후 4시 중구청방문, 약속 어기고 청장이 면담거부 동시 구청떠남
* 유족들 항의로 로비 점거하고 구청장 면담요구
<2003년 4월9일>
* 중구청8층에서 구청장외4인과 유족측 5인이 면담
*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추모음악회 오후4;30, 오후7;00
<2003년 4월10일>=특별수사본부 윤진태 사장과 조해녕시장 대질신문 오전10시~오후10시30분까지
<2003년 4월11일>=특별수사본부 윤진태 사장과 조해녕시장 대질신문 오전10시~오후10시까지
<2003년 4월12일>
* 국립과학수사 연구소가 지하철 참사 유해 191구 라고 최종발표
* 한백손해사정인 설명회를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오후2시 개최
* 아웃백스테이크 동성로점에서 시식회를 가지고 전액을 성금으로 전달,운영자 외 2인 참가
<2003년 4월13일>
* 오전11시~ 시민회관 귀빈실에서 부시장과 회의
* 오후4시~ 소방서3층에서 중앙지원단 단장배석, 문화연구원장과 3인 운영자외 2인, 묘지관련 1차 논의 결렬
* 오후5시~ 소방서5층에서 중앙 지원단장과 백승홍 국회의원, 대구시 도로교통국장, 동성로 17개 상가 번영회 회장 단 과 중앙로 통행재개에 관해 논의
<2003년 4월14>=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손해사정인 평화 & 유니코 설명회
<2003년 4월15일>= 김해 중국민항기사고 1주기 추모제참석 운영자외 2인
<2003년 4월16일>= 인정사망 심사위원회가 1인 인정사망 인정하여 총192인으로 인정
<2003년 4월18일>
* 특별수사본부 대질신문 오전10시~오후4시,
* 추사추 발족하기로 회의록에 서명
* 오후6시에 시보건복지과장, 기획관리실장,외2인 유족은 운영자외4인 묘지관련 논의중 조시장이 안심 기지차량에 땅이 있으니 보라고 해서 운영자가 행정구역이 어디냐고 묻는데 위원장이 가만있어요 라며 제지, 조시장은 버스파업에 따른 논의로 자리비움,나머지 새벽3시반까지 회의
* 식사 제공하던 삼성 자원봉사단이 마지막으로 철수
<2003년 4월19일>= 중앙특별 지원단 해체, 시민회관 식사 어구식당과 대가 해장국에서 식권으로 시작함
<2003년 4월21일>= 천안초등학교 성금전달,운영자외 3인 285만원을 전달하고옴
<2003년4월22일>= 특별수사본부 대질신문, 시청에서는 기회회견을 가지고 앞으로는 강경책을 쓰겠다고 공언
<2003년 4월23일>
* 5대사찰 위령제후 보현사에서 유족들에게 식사제공
* 아줌마 부대들이 시민회관 3층 수습대책본부를 점거하고 분향소 설치를 요구,철야
<2003년 4월24일>
* 모 아줌마가 pet병에 담긴 노란 액체를 들고 휘발유라고 하자 중부 경찰서장, 정보과장, 경비과장이 방문하고 증거물 압수하여 가면서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서장님이 직접 시청을 찾아서 수습에 대해 건의를 하겠다고 약속함
<2003년 4월25일>
* 중부경찰서 서장이 대구시를 방문 수습에 대하여 장시간 논의함
* 문화연구원장이 아줌마들의 자제를 건의함
<2003년4월26일>
* 아줌마들이 돈거둬서 직접 분향소 설치
* 아웃백스테이크 수성점에서 시식회를 하고 전액을 성금으로전달, 운영자 외3인 참가
<2003년 4월27일>
* 시청 철거반이 3대의 대형버스에 나눠타고 운동화 신고 장갑끼고 와서 아줌마들이" 너희들 오늘 죽어볼래" 라고 하자 시측에서는 "죽을놈은 이미 다 죽었지 않냐" 라는 말에 격분,부시장을 사무실로 데리고 가자 놀랜 부시장이 탈진한 듯 한 포즈에 메스콤은 일제히 감금 이라고 보도 그때는 중부경찰서장,수사과장, 경비과장,이 배석하고 있었고 경대병원 의사도 왕진 시켜놓은 상태
<2003년 4월28일>= 상인동 가스폭발사고 8주기 추모제참가, 운영자외 3인 참가
<2003년 4월30일>=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손해관련 설명회,두류공원 설명회와 동일
<2003년 5월1일>
* 경제 원로인 12인이 대구지하철참사 수습을 위하여 친히불편한 몸으로 방문하시어 대구시에 수습을 위한 전반적인 논의를 하고 애쓰시겠다는 의지를 보이시며, 금복주 재단의 회장님은 화원동산에 묘지를 하겠다면 자신이 기증한 땅이라 추진하겠다고 건의함
<2003년 5월2일>
* 행정부시장이 취임식을 마치고 곧바로 사고 수습을 위하여 방문
* 삼덕교회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전달하는 사망자 성금 1인당 200만원을 수령하고 식당에서 오찬을 함
* mbc tv토론회 한뒤 여론조사 하기로함
* 경제원로인 재차 방문 빠른 수습을 당부 운영자는 대구대공원으로 묘지를 하고 싶어 하는 유족들의 의사 전달
<2003년5월4일>= 조부시장 유족들의 의견 수렴한다는 명분으로 유족대표들과 오찬
<2003년 5월5일>= 영남과 한백의 토론회를 개최 시민회관 대강당
<2003년 5월6일>
* 영정안치식,조부시장 참석, 김목사님의 찬송가,회장 질녀의 풀룻연주,중창과, 반주 이세라 무용단의 한국무용도 모두 괜찮았는데, 째즈 무용단의 무용도중 음악이 잠시잠시 끈기더니 끝내 안나오자 열심히 연습한 무용단에게 면목이 없었고 음악 담당도 미안해 하고 이것이 옥의티였다
<2003년 5월8일>
* 집단 설사는 하고 병원은 다 쉬고 해서 시립의료원으로 치료하러감
* 대구시 수돗물을 삼다수로 교체해줌
<2003년 5월14일>= 합동장례식 가안 이라면서 5월22일 받아온날
<2003년 5월16일>
* 운영자가 진정서를 쓰고 68명의 연명서를 가지고 조부시장에게 묘지없는 장례는 수락 할 수 없음을 표명
<2003년 5월19일>= 운전사령실,기계사령실, 기관사, 역무원등 9명의 1차공판, 11호법정 담당검사 김형진
<2003년 5월21일>=어구식당의 식권 거부로 동봉식당 으로 변경
<2003년 5월22일>= 합동장례식 무산
<2003년 5월26일>=지하철공사 역무원등 9명의 2차공판
<2003년 5월28일>
* 100일제에 참석하지 못한 부시장이 뒤늦은 방문으로 사무실에서 김밥을 들며 사담
* 대구두류공원: 오후 6시,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자축하는 조수미 공연
* 이때: 서울 한강고수 부지에서는 2.18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국민추모 음악회 추진위원회"와 mbc tv가 주최한 행사가 열림
<2003년 5월30일>
* 대구대공원의 1,2,3,4, 부지의 확정은 희박 하다는 정보를 듣고 ,대내외 업무국장이 삼덕동118번지 포도밭 제5부지를 부시장과 결정
<2003년 6월1일>
* 윤위원장이 제5부지를 가보고 포도밭이 아닌 북쪽 방향의 삼덕동118-1 번지를 결정하고 일요일 저녁 이라서 유족도 별로 없음에도 있는 유족만으로 결정
<2003년 6월2일>
* 추모사업추진위원회도 삼덕동118-1번지 제5부지를 가결 시킨날
* 지하철공사 운전사령실 직원외 9인 공판 법원 방청
<2003년 6월3일>
* 사회운동가였던 장기표 한국사회민주당 대표가 대구를 방문, 겸사 지하철 참사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오셔서 조문하고 위로금 전달
<2003년 6월4일>= 대표위원들이 단합대회라는 명분으로 하양의 동경에서 저녁식사
<2003년 6월7일>=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오후3시 부시장 간담회 개최
<2003년 6월9일>
* 오전브리핑 시간에 이모위원의 국과수 번호와 이름을 삭제하자는 내용을 묵살 함에 운영자가 투표의 부당함 을 건의 하며 정의 대로 하자고 함
<2003년 6월11일>
* 유족이 튜브 영화관람, 비상벨 누르면 전동차가 플랫폼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 보고 처음으로 알고 분개함
<2003년 6월12일>
* 노대통령이 대구 방문 함, 밀라노 프로젝트 때문에 했지만 우린 건의할 사항도 있어 면담을 요청 했지만 거절
<2003년 6월13일>
* 윤진태 지하철 사장 1차공판,
* 장기표 한국사회민주당 대표가 운영자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와 어려움을 같이 하겠노라고 도울것 이 있다면 도움을 요청라는 전화
<2003년 6월18일>= 행정부시장이 국무조정실에 지하철 수습보고 건의차 상경,삼덕동118-1번지 보고함
<2003년 6월19일>= 시민회관 1호실에서 보건복지과 여성국장,과장,관련직원과 설명회
<2003년 6월25일>
* 합동 장례식 결정한날, 점심때 긴급 소집할 때는 개인장례 이므로 6월29일,30일,7월1일중에 택하라 해놓고 저녁 브리핑때는 합동장례로 명칭변조함
* 부시장의 낙산리 답사 건의에 운영자의 형제 모두 답사
<2003년 6월28일>= 윤석기 위원장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서 접수함
<2003년 6월29일>= 합동장례식, 인정할 수 없는 다수는 참석 하지 않음
<2003년 7월5일>=대구지하철참사 유해 마지막으로 운영자외 1인이 인수
<2003년 7월7일>=대구지하철참사 유해 낙산리 시립묘지 유공자 묘역에 3구 처음으로 안치
<2003년 7월13일>=김충국 대표와 강달원위원 부시장과 면담
<2003년 7월14일>=한백손해사정인단이 대구시 수습대책본부에 서류보관증 받은날
<2003년 7월15일>=한백 손해사정인단이 대구시와 계약했다고 허위로 유족들에게 문자날림
<2003년 7월16일>= 지하철공사 윤진태 사장 공판
<2003년 7월17일>
* 희생자 대책위의 유족만 간담회를 하기로 한 것을 유족연합회가 희생자들이 하나로 되어야 수습하기도 쉽다 라고 부시장님께 간담회 일정을 미뤄줄 것을 요청함에 응해서 희생자 간담회 무산된날
<2003년 7월18일>= 윤석기 위원장직무 집행정지 가처분 공판 44호 법정
* 운영자가 다른단체에 가입되어서 자격이 없다라는 판사님께 소를 제기 할때는 그 단체의 일원이었고 거기를 탈퇴한 이유는 오랜세월을 같이해야 하는 유족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진술에 속개 , 일자는 8월8일
* 한백손해 사정인단이 계약했다고 거짖문자를 보내다가 드듸어 정식으로 대구시와 정식으로 계약한날
<2003년 7월19일>=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전체 유족을 대상으로 국민성금 관련 간담회 개최
<2003년 7월21일>
* 중부서 인터넷 성금 관련진술,진술시 4월 24일의 휘발유 증거품과 3월24일의 시위시 증거품이 고스란히 보관됨을 확인
<2003년 7월23일>=현대오일 뱅크에서 1만원 주유권 342장 2.18대구지하철참사유족회 운영진에게 증정
<2003년 7월25>
* 기존 유족연합회에서 유족의 통합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2.18 대구지하철참사유족회로 명명하고 회원은 직계유족의 위임을 받은자가 할 수 있으나 임원은 직계만이 자격이 있음으로 창립총회(투표지 보관)
* 김충국, 강달원 위원이 대구시 수성구청장과 묘지관련건을 논의
<2003년 7월28일>=경원대 대학생 기자단 방문 인터뷰
<2003년 7월29일>= 윤진태 결심공판
<2003년 7월30일>= 218.대구지하철참사유족회가 북부소방서 5층으로 이사
<2003년 8월2일>
* 창립총회때 불참자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 2.18 대구지하철참사유족회의 정관을 추인받는 임시총회개최(투표지 보관)
<2003년 8월3일>=한백손해사정인단이 2.18유족회의 회원들의 보상금에 가압류 함을 통보해옴
<2003년 8월6일>
* 성상희 변호사, 김태열 교수, 정덕규 교수, 2.18유족회 오후7시에 방문, 오후11시가 넘도록 유족 통합추진 위원으로서의 진지한 대화나눔 *(통합추진의 명분을 위해서도 운영자에게 고소 취하 하라고 권면)
* 지하철공사 사령실 직원등 9인의 결심공판
<2003년 8월7일>= 윤석기 위원장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취하함
<2003년 8월9일>
* 2.18대구지하철참사유족회 강당(소방서5층)에서 조기현 부시장이 도로교통과장,세정과장과 특별위로금 지급 관련 간담회개최
* 시민회관 에서는 분향소 철거
<2003년 8월12일>=2.18유족회 년간 소요경비 내역을 대구시 수습대책본부에 공문으로 요청
<2003년 8월23일>
* 오전11시=대구시 도로교통과장외 3인이, 2.18유족회 임원3인과 유가족 들의 특별손실에 대한 명칭을 바꾸어
요청하라는 건의건으로 긍정적으로 논의함
* 오후3시=부시장,보건복지과장,문화연구원장,세정과장이 2.18 유족회 대표들과 특별손실액에 대해 논의
<2003년 8월25일>=희생자 유가족들의 특별 손실에 대한 지급 요청을 정식 공문으로 재차 요청
<2003년 8월27일>
* 대구시에 유가족 경제손실에 대하여 전국 재해구호협회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의 진의와 유족회의 건의를 위한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고 대기상태
<2003년 8월29일>
* 지하철 1079호,1080호 차량에서 나온 골편을 화장하여 납골당 안치
<2003년 9월3일>
* 2003년 8월26일 대구시 대책본부에서 보건복지부로 건의한 문건을 공문으로 보내옴
(수습 61210-428 문건내용=유가족 단체인 2.18유족회와 희생자 대책위에서 2.18사고이후 실종자 확인을 위한 유가족들의 생업중단에 따른 손실분을 국민성금에서 지급하여 줄것을 요청 하는 바 붙임과 같이 건의하오니 긍정적으로 검토 회시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붙임1.실종자 유가족 생업중단에 따른 손실분 지급 건의1부
2. 2.18 대구지하철참사 유족회 요청서 1부
3.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요청서 1부 끝
*2.18 유족회는 희생자 전체의 휴업 손실을 건의하였음
* 2.18 대구지하철참사 유족회는 공문 발송 에서 회신까지의 처리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조속한 회신이 이루어지지 않을시는 유족회 임원들이 직접 보건복지부 장관 면담을 요청 하오니 일시 및 장소를 회신 바란다는 공문서를 보냄
<2003년 12월 13일>
*2.18 대구지하철참사유족회가 북부 소방서 5층에서 대구은행 동신교지점 2층으로 이전함
< 2004년 12월18일>
*윤진태 지하철 사장의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미필적 고의를 적용해서 1년 6월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