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경남 統營市는 동쪽으로는 견내량 해협을 경계로 거제시와, 북서쪽으로는 사천시,
서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남해군과 마주하며, 북쪽으로는 고성군에 접하고 있다.
남쪽은 남해 바다다.
지형은 洛南正脈의 대곡산(543m)에서 갈라진 지맥이 벽방산(650m)-발암산(261m)을
거치면서 통영반도와 작은 섬들을 형성한다.
주로 해안 구릉지가 발달해 평지가 드물고 해안 매립지 등에 약간의 평지가 있다.
해안선은 총길이 617km인 라이스식 해안으로 41개의 유인도와 109개의 무인도가 흩어져 있다.
수온이 적당하고 동해난류가 흐르는 해역은 한국 수산의 보고라 할수 있어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했다.
또 연중 난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매우 온난한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세계 최대 난류 중의 하나인 쿠로시오 해류가 통영해역을 지나 동해로 북상하는데,
연평균 기온은 14도 내외로서 연평균 기온차가 전국에서 가장 적은 곳이다.
1월 평균기온은 2.5도 내외이고,8월 평균 기온은 25~26도.특히 도서지방은 바다의 영향으로
일교차가 육지보다 적다.
연평균 강수량은 남한의 평균값을 크게 넘는 1388mm로 다우지역이다.
삼한시대엔 변진12국중 '고자마동국'(현,고성)에 속했고 가야시대엔 6가야중 小伽倻에 속했다.
삼국시대엔 浦上八國중 '고자국'이었고, 뒤에 古自郡이 됐다.
통일신라 시대에 固城郡으로 개칭했고, 757년(경덕왕16) 고성군의 9주 중 康州(현,진주)에 속했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9) 거제현에 속했고, 충렬왕때인 1275~1308년 남해현에 병합됐다가
다시 복구됐다.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 후인 1593년(선조26) 한산도에 충청,전라, 경상의 3도 통제영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통영 이라 부르게 됐다.
1604년(선조37) 통제영을 거제현 두룡포(현,통영시)로 옮겨와 설치했다.
1895년(고종32) 통영을 파하고 고성군에 분리해 1900년(광무4년)에 진남군을 설치했다.
1909년(융희3)에 용남군으로 개칭했으며, 1914년에 거제군을 합쳐 다시 통영군으로 부르게 됐다.
1931년 통영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53년 거제군이 분리됐으며, 1955년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
분리 됐다.
1973년 통영군의 용남면 무전리를 충무시에 편입했고,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합쳐 통영시가 됐다.
현재 1읍6면11동의 행정구역을 이룬다.
통영은 남해안 최대의 수산도시다. 넓은 간석지와 대륙붕의 발달로 각종 난류성 어종의 어장을 이루며
특히 멸치 어획고가 높아 전국 생산의 약 80%를 차지한다.
바다양식 수산물은 미역,김,파래,바닷말,바지락,새꼬막,홍합,굴 등이며, 이가운데 굴 양식이 가장
활발해 연간 생산량은 전국 생산의 30%에 이른다.
현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이웃 진주까지 개통되어 접근성이 좋아졌고, 충무교와 통영대교 두개의
다리로 연결된 미륵도는 총 연장 23km의 해안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지리적 특성상 육로보다는 해로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해 부산에서 여수를 잇는 항로의 중심지였다.
통영-부산을 왕래하는 쾌속여객선이 있어 부산까지는 1시간30분 거리고, 그밖에 한려수도 주변
주요 섬들 사이에 정기항로와 여객선의 배편이 많고, 제주 서귀포배편도 생겼다.
*세병관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洗兵館은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두룡포(현,통영시)로 옮겨온
이듬해인 1605년(선조38) 7월에 준공한 통제영의 客舍를 말한다.
정면 9칸, 측면5칸의 단층 팔각지붕으로 된 웅장한 건물로 모든 칸에는 창호는 벽체를 두르지 않고
통칸으로 개방했다.
우물마루로 된 평면바닥의 중앙 일부를 한단 올려 놓았는데 여기에 전패를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으로 '두보'의 시에서 따 왔다
원래 보물이었다가 2002년 10월 국보제 305호로 지정됐다.
*충열사
명정동에 자리한 충렬사(사적 제236호)는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7년후인 1606년(선조39) 충무공의 충절과 위훈을 추모하기위하여
통제사 '이운룡'이 왕명으로 건립했고, 1663년(현종4)에 사액됐다.
현재 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비롯해 동서제, 경충제, 숭무당, 비각, 전시관, 강한루 등
2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춘추행사와 탄신일인 4월 28일 탄신기념제, 순국의 기신제(음력
11월19일), 그리고 한산대첩 기념행사의 고유제를 봉안하고 있다.
충렬사 경내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는 '충렬사명조팔사품'(보물제 440호)은 명나라 신종 이
이충무공의 전공을 높이 기려 보낸 '군의장물'이다.
팔사품(도독인,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은 총8종 15점으로 되어있다.
그동안 통제영에 보관하다가 1895년(고종32) 통제영 기구가 개편된 이듬해인 1896년
충렬사로 옮겨왔다.
*해저터널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의 해협인 '판데목'을 지하로 왕래하는 해저터널,
옛날에는 해협이 사취로 메워졌고 이후 작은 배가 다닐수 있도록 다시 파 그 위로는 돌다리를 놓아
人馬가 통행할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5월에 공사를 시작해 5년 6개월 만인 1932년 12월 해협을 넓히고 그 밑을
파내어 길이 461m, 너비5m, 높이 3.5m의 콘크리트 터널을 만들었다.
이 터널은 차량통행이 가능했으나 충무교가 완공된후에는 도보로만 통행 할수있다.
일본인들은 운하를 파고 '다이코호리'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관명이다.
일본인들이 많은 경비와 시간과 인력을 동원해서 해저터널을 건설한 이유중 하나는 임진왜란때
자기 선조들이 이곳에서 많이 죽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그 원혼이 떠 도는 곳을 밟고 지나 다니지 말고
밑으로 다니라는 의도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인들은 일본의 원혼들을 밟고 다니기 위해 나중에 충무교를 건설했다고 한다.
통영반도의 남단과 미륵도 사이의 해저터널 위로는 현재길이 1420m, 너비55m,수심3m의 통영운하가
뚫려있다.
*한산도 제승당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8월에 선조는 충무공에게 3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고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통괄 지휘케 하는데 이무렵 충무공은 한산도에 진영을 옮기고
장기전에 대비한다.
이후 1597년 2월 26일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3년 7개월 동안 한산도 두억개에 터를 고르고
'운주당'을 비롯한 각종 창고를 비롯해 부대시설을 건립했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불타버리고 폐허된 지 142년 만인 1739년(영조15) 조경 제107대 통제사가
이곳에 유허비를 세우고 운주당 옛터에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친필 현판을 걸었다.
그후 1760년(영조30) 이충무공의 후손 '이태상'제121대 통제사가 낡은 건물을 중수하면서 유허비를
손질하고 비각을 뒤로 옮겨 세웠다.
그로부터 117년 뒤인 1877년(고종14) 공의 10세손 '이규석' 제198대 통제사가 제승당유허비를 새로
다듬어 세우고 옛비는 그옆에 묻어 두었는데, 최근에 다시 발굴하여 2기를 함께 보존하고 있다.
1896년 통제영이 혁파되고 뒤이어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게 되자 지방 유림에서 제승당을 관리 했으나
자원조달이 어려워 퇴락했다.
1932년 한산도 주민을 비롯한 통영군민들이 모금운동과 계를 통해 이듬해 한산도 제승당 준공식과
충무공 영정 봉안식을 거행했다.
현재 유적지에는 충무사, 제승당, 수루, 한산정등 당우를 비롯해 유허비2기, 한글유허비1기,
통제사 송덕비7기, 비각5동 등이 있다.
* 착량묘
해저터널 근처에 있는 鑿梁廟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 13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착량' 이란 임진왜란때 당항포 해전에서 참패한 왜적들이 쫒겨달아나다가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에
가늘게 이어진 해협을 파서 도망친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통영 사투리로는 폰데(판다,판도)라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지방민들이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판도가 보이는 언덕위에 초가를 짓고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매년 음력 11월19일 기제와 향사를 모셔온것이 사당의 시초가 되었다.
1877년(고종14) 충무공의 10세손인 통제사 '이규석'이 기와집을 짓고 착량묘라 했고, 여기서 지방민
자제들을 교육했다.
경내엔 사당, 서재, 동재, 고직사 등 4개 동과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미륵산 용화사
미륵도 주봉인 미륵산(461m) 기슭의 용화사(경남문화재자료 제10호)는 신라 선덕여왕때 '은점'이
'정수사'로 창건한 절집이다.
고려 시대인 1260년(원종1)에 산사태로 허물어지자 3년뒤 '자윤'과 '성화'가 미륵산 제3봉 아래로
자리를 옮겨 짓고 '천택사' 라 했다.
조선시대인 1628년(인조6)에 불탄것을 1752년(영조28)에 '벽담'이 다시짓고 용화사라 했다.
경내에는 정면3칸, 측면2칸 의 맞배기와집인 '보광전'(경남유형문화재제249호)을 비롯해
미륵불좌상을 봉안한 용화전, 명부전, 적묵당, 해월루 등 목조건물과 육모정 형태의 종루가 있고
그 위쪽에 효봉대종사 5층 사리탑과 불사리사사자법륜탑이 있다.
*통제영 12공방
工房은 지방 관청의 6방중 하나로 제반 공정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관아를 말한다.
주로 진공품과 군기를 만들던 통제영 12공방은 다음과 같다.
통영갓으로 일컬어지는 흑립을 비롯한 벙거지 패랭이 등을 만든 입자방(笠子房),
말총을 엮어 망건, 탕건, 유건 등을 만든 총방 (總房)
버들가지나 대오리를엮어 고리를 만든 상자방 (箱子房)
지도와 수조도 및 의장용 장식화를 그린 화원방 (畵員房)
각종 나무로 가구및 문방구 등을 만든 소목방 (小木房)
쇠를 녹여 각종 철물을 주조한 야장방 (冶匠房)
주석과 백동 등으로 각종 장석을 만든 주석방(周錫房)
금 은 제품을 만든 은방 (銀房)
각종 공예품에 칠을 한 칠방(漆房)
활집인 동개를 만든 동개방 (同箇房)
신발의 화자방 (靴子房)
말 안장의 안자방 (鞍子房)
자개를 붙여 나전제품을 만든 패부방 (貝付房)
가죽 제품을 만든 주피방 (周皮房)
둥근 부채를 만든 미선방 (尾扇房)
임금이 하사하는 端午節扇을 주로 만들어 바치는 선자방은 독립된 공방에 속했다.
* 통영의 별미
- 충무 김밥
- 졸복국
- 굴요리
- 통영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