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도 먼 여행
(서 아프리카 선교지 순방기)
박 동 식
총회 선교부에서 모집한 서 아프리카 선교지 순방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 15일간 보고 듣고 생각한 바를 여기 적는다.선교지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1. 출발에서 암스테르담까지
<어려웠던 출발 준비> 이번 순방의 초점은 시에라 레온 선교부에서 실시하는 원주민 목사 안수식이었다. 시에라 레온 선교부의 요청으로 총회 선교부에서 공개 모집했으나 희망자는 4명에 불과했다. 선교부는 출발 날짜를 연기하고 2차 모집을 했으나 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관심이 적은지 희망자는 더 늘지 않고 마침내 류윤욱 목사, 박두욱 목사, 박동식 목사, 김정한 목사 4명이 3월 15일에 출발하기로 확정됐다.
<출발 당일의 어려움> 1995. 3. 15 12:05 네덜란드 항공 KL 866편 암스테르담 행이 우리가 탈 항공기이다. 당일 부산에서, 대구에서, 울산에서 각각 국내 항공기 편으로 상경하여 제2국제청사에 집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그날 아침 김포 공항은 짙은 안개로 항공기 이 착륙이 금지되었다. 각 지역에 비행기 결항 사태가 일어났다. 나는 8:10경 첫 항공기로 상경했으나 대구에서는 승용차로, 울산에서는 승용차로 김해 공항에 와서 상경할 것이라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김해로 오신 두 분이 10:30 항공기에 탑승했다는 소식을 들고 check in 시간을 20분 연기시켰으나 끝내 KL 866 편을 놓치고 말았다. 마감 5분전에 도착한 류윤욱 목사님과 나는 숙의 끝에 두 사람이라도 가기로 하고 쓸쓸히 암스테르담 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재미없는 여행> 다해도 4명밖에 안되는 여행에 두 분이 함께 탑승하지 못한 아쉬움에서 무거운 마음과 재미없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13시간의 긴 항공 여행을 하면서도 머리 속에는 떨어진 두 분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비행기는 3. 15(수) 17:30 암스테르담 스키폴(Schiphol) 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중 나온 최용준 전도사님 안내로 암스테르담에서 한국인 민박을 하는 한경순 집사님 댁(Korea Guest House 020- 696- 1650) 에서 낮 익은 김치와 한식으로 식사를 했으나 입맛이 씁쓸했다.최 전도사님이 3.16 14:00 서울에서 암스테르담 행 KAL항공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두 분이 KAL기 편으로 올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했다.
<뒤따라온 기쁜 소식> 항공사에서 제공한 ibis Schiphol air port hotel에 투숙했다.이 호텔은 우리처럼 항공기를 갈아탈 손님으로 분비고 있었다. 짐을 들어주는 포터도 없고 룸 보이도 없었으나 팁이 절약되어 좋았다. 이 호텔에서는 무엇이든지 자급자족이었다. 아침 식사도 자기 손으로 가져다 먹는 대륙식 뷔페였다. 수신자 부담전화 (collect call 06-022-8220)로 한국에 연락한 결과 두 분이 3.16 14:00 KAL 기 편으로 온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즐거운 여행이 되는 듯했다.
2. 암스테르담에서 프리타운까지
<힘든 시에라 레온 행> 1995.3.16(목) 14:10 KL 579 편으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을 떠나 프리타운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가 공항에서 체크인 하는 시간보다 8시간 앞서 서울서는 두 분이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것이고 우리는 숨바꼭질하듯이 프리타운으로 달아나고 있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든다. 우리 두 사람은 무거운 짐을 끌고 셔틀버스로 공항에 와서 체크인 하게 되었다. 화물 초과요금으로 미화 500 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겨우 5kg의 초과요금 152 불을 내고 첵크인을 마쳤다. 4명이 같이 왔으면 곤욕을 치르지 아니해도 될 것을 추가 요금까지 물어야만 했다.
탑승구에 오니 여기부터 승객은 흑인 일색이다.간혹 백인이 있으나 동양 사람은 우리 둘 뿐이다. 이제부터 흑인 체취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나는 콧병이 나서 냄새를 맡을 수 없어 흑인 냄새가 있는 줄도 몰랐다. 후각이 예민한 일행은 흑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도 냄새가 난다고 했고 내가 집에 돌아오니 옷에서도 몸에서도 흑인 냄새가 난다고 하니 흑인 특유의 냄새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지루한 프리타운(Freetown)입국 수속> 1995.3.16(목) 14:00 KL 579편은 7 시간의 비행 끝에 3.16 19:20경 어느 농촌 간이 비행장 같은 룬기 공항에(Lungi) 털컹거리면서 내려앉았다. 비행기가 1시간 먼저 도착하는 통에 암스테르담에서 입고 온 내의와 겨울옷 벗을 시간을 놓쳐 버렸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달아오르고 땀이 비오듯 흘리기 시작했다. 화물 인도장에와서 소위 컴베어 벨트(나무로 만들어 손으로 돌리는)앞에서 30여분을 기다리면서 땀을 흘리다 못해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화장실에 가서 겨우 내의를 벗었으나 땀은 여전히 흘렀다. 다행히 신대원 선교사가 화물인도장까지 들어와서 우리의 불편을 최대한 처리해 주었으나 여러 화물 중에 우리 화물을 가려내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한시간 이상 걸려서 모든 수속을 마치고 공항밖에 나오니 이곳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이 마중을 나와 반가운 해후를 나누게 되었다.
<프리타운에서 떨어진 룬기 공항> 룬기 공항 바다 거너편에 프리타운이 보인다.육지로 프리타운에 간다면 100km를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40분 걸리는 페리를 이용한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는 페리가 떠날 시간을 차안에서 무작정 기다려만 했다. 다행히 냉방이 된 선교사님의 차안에서 서로의 안부와 고국의 소식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가 오고 갔다. 마침내 러시아서 제공했다는 페리는 큰 입을 벌리고 우리를 차에 태운 체 삼키듯이 배안으로 빨아 드렸다.그날 따라 우리 일행을 환영하듯 배는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큰 등치에 맞지 않게 좀처럼 속력을 내지 못하고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외국에서 프리타운 가까이 새 공항을 건설해 주겠다고 해도 현정부가 거절한다고 하니 그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3. 시에라 레온에서(Sierra Leone)
<사자의 산 시에라 레온> 시에라 레온은 1462년 포르투갈 선원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다. 바다에서 본 프리타운 배후의 산이 사자를 닮았다고 해서 시에라 레온이라 불렀단다. SIERRA는 "산"이라는 뜻이고 LEONE은 "사자"란 뜻이다. 즉 사자의 산이란 말이다. 시에라 레온을 지금은 국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1.4월 영국 보호령으로부터 독립하여 밀톤 마르게이(Milton Margai)가 첫 수상이 되었다가 1964년에 죽은 후 수 차례의 쿠데타가 반복되었고 현정부도 젊은 군인들이 통치하고 있다고 했다.
<자유(free) 없는 프리타운(Freetown)> 영국은 1787년 시에라 레온 연안을 식민지로 삼기 위하여 영국의 해방 노예를 이주시켜 이 마을을 프리타운이라 했다. 1808년에는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해방 노예는 크리올(creole)이라는 특수 집단을 만들어 서부 아프리카 일대의 교육 문화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1896년 영국이 시에라 레온의 각 부족(멘데,테므네 족등)을 영국의 보호령 아래 둠에 따라 이 지역에 크레올과 보호족, 양대 세력이 생겨 불안의 불씨를 남기게 되고 지금 이 불씨에 불이 붙은 셈이다.
프리타운은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다.중국이 제3세계의 수장 역할을 하고자 지었다는 빌딩이 여기 저기 있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 군청 소재지 정도로 생각하면 될 만한 도시이다. 전기 사정은 형편없어서 하루 몇 시간도 송전을 못하기 때문에 선교사 가정에는 발전기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지금 프리타운에는 자유가 없다.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현정부를 반대하여 삼파의 반군들이 프리타운을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고 있어 겨우 프리타운만 자유를 누리고 있고 계속 피난민들이 모여들고 있다. 만일 프리타운 안에 반군 첩자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밖에서 반군이 쳐들어오는 날에는 무너지고 만다고 한다.
<프리타운을 지키는 우리 선교사들> 이런 위험 천만한 도시를 우리 선교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대원/안광자,이순복/조봉숙,이승옥/박성애 선교사님들이다. 이미 서구 선교사들과 한국 다른 교단 선교사들은 다 철수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경솔하게 양떼를 버리고 떠난다면 원주민 교인들은 마음 문을 닫고 복음을 듣지 않게 되며 선교의 문은 닫히고 말 것으로 믿고 있다. 신대원 선교사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원주민 교회가 떠나라고 할 때까지 기다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난을 아는 한국 선교사가 일만km 먼 이곳까지 온 이유가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하나 같이 선교사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긴급한 상황에서 철수 계획은 완벽한지 안전을 당부를 했다.
<찾아온 용감한 손님들> 전날에 수 많은 서양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프리타운에 우리가 탄 KL 579 편에는 서양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은 이유를 여기 와서 알게 되었다.이런 곳에 어거스틴의 안수식을 위해 한국의 손님들이 찾아간 것이다. 안수식에 참석하기로 약속했던 영국 손님들은 모두 약속을 취소했다는 대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이곳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영국인 평신도 선교사 로버트 씨가 말했단다. 하지만 칭찬 받기에 부끄러울 것은 없다.
<선교사님들의 환대> 선교사님들은 찾아온 손님들을 온갖 정성을 다하여 숙소와 식사에 신경을 쓰면서 환대했다. 한국 외항 선원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게, 도미,생선으로 한 요리, 소중하게 남겨 두었던 한국요리 재료들로 만든 맛난 한국 음식을 때마다 차려서 대접했다.동양의 손님들은 그 중에 망고를 제일 좋아했다.때마다 나오는 망고를 매번 먹어 치웠다. 마치 오댓새이에 나오는 이야기중에 돌아갈 고향을 잊어 버리게 하는 연밥처럼 망고를 먹고 고향을 잊어버릴 번 했다.
<현지인 어거스틴>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똑똑하게 생긴 흑인 어거스틴은 일찍 로버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단다. 어거스틴은 아프리카 성경 신학교를 졸업했고(A.B.C.)미국에서 리폼드 신학교에서 교육학 석사를 취득했다. 지역을 위해 일할 아주 귀한 인물처럼 보였다. 그가 공부를 마치고 장로교 교회를 세울 마음으로 모국에 돌아와서 한국 선교사가 벌써 장로교회를 세운 것을 알고 우리 선교사와 협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민 교역자를 길러서 스스로 자기 백성들의 복음화의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다. 지금도 심보 목사(Simbo)와 JUI성경대학을 곧 졸업할 빅토(Victor)씨와 화란 한인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화란 틴델신학교서 곧 석사 학위를 받을 럼프리(Lumpery)씨등 협력할 좋은 일꾼들이 있어서 마음 든든하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일꾼들이 모두 신실한 일꾼이 되어 자기 민족을 살리는 사역자들이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의 안수식> 1995.3.19 오후 4시 이번 순방의 하이라이트인 어거스틴의 목사 안수식이 있었다. 나는 미리 아비장으로 떠났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들은 대로 적은 것임을 밝힌다. 어거스틴의 안수식은 이곳 TV 방송에서 미리 안내 방송도 나갔고 당일에는 녹화 방송도 내보냈다. 제일교회로 사용 중인 학교 강당에서 거행된 안수식에는 많은 지역 인사가 초청되었고 현지 목사님이 말씀을 전했다. 울산교회에서 기증한 찬양대 까운으로 찬양대원은 예쁘게 단장했고 사직동교회서 준비한 기념품은 원주민에게는 안수식과 교회를 기억할 좋은 기념품이 될 것이다.
<선교사 자녀교육을 위한 어려움> 선교사는 문화충격, 언어장벽,풍토병 등 많은 문제에 직면하지만 그 중에 자녀 교육과 자녀들의 충격이 선교사들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할 것이다. L 선교사님의 딸이 유달리 뚱뚱해서 내력을 물었더니 언어장벽과 학교에서 옆자리의 현지 아이의 괴롭힘을 받고 그 갈등을 혼자서 해소할 수 없어서 음식을 마구 먹었다는 것이다. 부모도 미쳐 눈치채지 못했다니 어린이 자신의 고충은 오죽했겠는가? 언어장벽 때문에 사모님들이 흘린 눈물도 엄청나게 많을 것으로 안다.이 모든 분들께 주님의 위가 넘치기를 기도 드린다.
서구 선교사들은 최일선에서 사역하는 선교사 수만큼 자녀들을 가르치는 학교 교사, 기숙사, 주방에서 일하는 선교사들,교육계,의료계에서 일하는 지원 선교사 수가 많다고 한다. 한국 선교사는 무엇이든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그래서 한국 선교사는 장기 선교가 드물고 어렵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도 지원 선교사를 늘려야 할 시점에 왔다고 본다.
<풍토병 말라리아> 서 아프리카의 말라리아는 무서운 풍토병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서 아프리카에 온 백인들이 말라리아로 많이 죽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백인의 무덤"이라고 한다. L 선교사님의 작은 딸의 무릎 아래 다리가 성한 곳 없이 모기에 물린 자국으로 꽉 매워져 있어서 아유를 물었더니 학교에서 낮에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라 했다.이곳에서 모기에 물리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선교사님들은 한국에서 감기에 걸리듯이 일년에 몇 차례 말라리아로 아프다는 것이다. 말라리아가 얼마나 아픈지 뼈마디가 아프다 못해 어스러지는 것 같다는 표현을 들으면서 참으로 힘드는 사역임을 절감했다.말라리아 예방약을 장복한 S 선교사님의 사모님은 코 뼈가 비틀어졌고 P 선교사의 두 자녀는 백내장이 왔다고 하니 안쓰럽다.그래서 3, 4년 간격으로 말라리아 예방약을 안 먹는 지역으로 가서 수개월 체질 개선을 해야 한다고 한다. 원주민들 중에는 지금도 말라리아로 죽는 이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돈이 없어 약을 못쓰고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나무 뿌리에 의존해서 치료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비쟝으로 가는 항공편> 뒤에 오는 두 분이 프리타운에 오던 날 낮에 나는 프리타운을 떠나 아비장으로 갈 참이었다.이순복 선교사와 함께 룬기 공항에 나왔으나 아프리카 내륙을 운항하는 가나 여객기가(Ghana Airways)가 폭우 때문에 결항했다는 소식이 날아 왔다.가나 항공은 승객이 적으면 마음대로 결항하는 악명 높은 항공기란다. 어쩔 수 없이 공항에서 가까운 룬기 공항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다. 우리 일행이 돌아가는 길에 가나 항공기를 타고 프리타운에 와서 암스테르담 행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데 만일 가나 항공이 멋대로 결항을 한다면 연결 비행기를 놓쳐 큰 낭패를 당하겠다는 염려가 엄습해 왔다.서울에서 결항의 쓴맛을 본 우리들인지라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돌아가는 길이 순탄하도록 기도했다. 주의 도우심으로 돌아가는 길은 좋은 날씨에 어려움 없이 연결이 되었으나 아프리카 항공 여행에는 결항을 념두에 두고 계획을 짜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다.
<룬기 공항의 복잡한 출국수속> 시에라 레온의 출국수속은 복잡하여 초행인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화물검사 - 첵크인 - 출국신고 - 이민국 검사 -- 공항 사용료 20$ 지불 -- 별실로 된 판정실(판정에 하자가 있으면 이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 -- 보안 요원의 휴대품 검사 이런 과정을 거친다. 이런 복잡한 수속 때문에 룬기 공항에는 일을 대행해 주는 면허 받은 대행인이 많았다. 이들은 여행객에 따라 붙어서 일을 도와주고 수수료를 챙긴다. 후진국일수록 수속이 복잡하고 선진국일수록 간단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출입국 신고서가 없었다.그들은 명랑하고 친절하면서도 풍부한 과학적인 정보로 마약 사법을 잘 잡아내는 듯했다.아직도 우리 나라 공항은 선진국과는 좀 거리가 있는 인상을 받았다.무뚝뚝하고 위협적이다. 좀더 상냥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 글을 적는다.
4. 코트 디브아르에서
<코트 디부아르와 아이보리 코스트> 영어로는 아이보리 코스트(Ivory Cost)라 하지만 이 나라의 공식 명칭은 불어로 코트 디브아르(C te d'Ivoire)라고 한다. 이 말은 상아 해안이라는 의미이다. 전날 이곳에 상아가 많아서 붙인 이름인지 모르겠으나 지금 동물원외에는 이 나라 어디서도 코끼리를 볼 수 없다.
<아비장의 첫인상> 아비장은 코트 디브아르의 수도로써 상아해안 답께 아름다운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오니 시에라 레온을 거쳐온 나그네의 눈에는 여기가 아프리카인가 생각할 만큼 전연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공항 건물이며,정돈된 시가지며,고층 빌딩 등이 현대도시와 같았다. 하지만 아비장 공항에 내리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나의 가슴을 꽉 메워 아프리카임을 실감하게 했다.
이곳을 고향 삼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아비장의 첫 인상이 어떠냐?"고 하면서 그들이 제2고향 삼고 살고 있는 아비장을 은근히 자랑하는 눈치이다. 1842년 프랑스 해군사관이 해안 부족 추장과 보호 협정을 맺은 후 서방 국가에 처음 알려진 나라이다. 1960 독립을 하기까지 프랑스 식민지로 있었으며 프랑스는 아비장을 가장 모범적이고 규모 있는 도시로 개발하여 서 아프리카 중 가장 발전한 도시로 만들었단다.
<현명한 지도자 우프에. 보아니> 우프에.보아니(Houphouet Boigney)는 프랑스 식민지하에서도 1944 아프리카 농업협동조합을 조직했고 1946년 아프리카 민주연합을 조직하여 반공 친 서방을 주창했고 1960.8월 독립국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아프리카 독립국가들이 서구인들을 추방한 반면 보아니 대통령은 외국인들에게 떠나지 말고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해서 자립할 수 있는 터를 마련했다.
코트 디브아르에는 아칸족(18그룹), 크루족(24), 굴족(37),만데족(9) 모두 100여 그룹이 살고 있으나 보아니 대통령은 "우리는 하나다"라는 표제하에 정책을 폈기 때문에 부족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 보아니는 1993년 죽기까지 33년간 장기 집권을 했지만 사후에도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고 국가는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봉쥬우(Bonjour)의 도시 아비장> 불란서 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비장은 어디를 가나 "봉쥬우"를 연발한다. 영어로 good day 즉 낮에 하는 인사이다. 처음 만난 이에게도, 말을 걸때도, 택시를 탈때도. 전화를 걸때도 "봉쥬우"를 먼저 한다. 만일을 "봉쥬우"를 안하면 봉쥬우 먼저라는 핀잔을 받게 된다고 한다. 검은 얼굴이 봉쥬우 때문에 인정미가 넘쳐 보이고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이런 인사를 우리는 만들 수 없을까 부러워진다.
<아비장의 한국인들> 이곳에 장기간 살고 있는 한국 교민의 주된 생업은 사진 현상소이다.흑인들의 첫번째 취미는 돈을 모아서 사진을 찍는 것이라 했다.그래서 현상소가 성업을 하는 모양이다.현상소에는 십여명의 사진 업자들이 딸려 있다. 우리 나라도 1960대, 가정에 카메라가 보급 되기전 사진사들이 가정을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 주던 시대가 있었는데 아프리카는 지금 그런 수준에 와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교민들은 지점을 여러 지역, 여러 나라에 개설했고 한국인이 안 들어간 나라가 없다고 했다. 불어를 익힌 교민들은 비자도 없이 무조건 들어가서 개척한다고 한다.사진 현상업이 호경기가 지나갔다고 하지만 현상소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한국인의 개척 정신을 선교에 활용한다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교민사회를 선교의 발판으로 삼아 아프리카 선교를 넓혀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비장의 한인교회> 한인들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 교회가 교포사회의 구심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비장의 교민수는 장년 150여명, 어린이 50여명 모두 200여명이지만 주일 회집수는 40여명이다. 곽상호 목사가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교회는 교포 자녀를 위하여 한글학교를 개설하여 담임목사가 교장이 되어 교회와 교포사회의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아비장 한인교회는 셋집에서 모임을 갖다가 1994년에 10만 불을 들여 부란서 양식의 주택을 구입해서 일부 개조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교회 건물에는 지역 선교사들이 쉬어 갈 게스트 룸(손님방)이 마련 되어 있고 욕실과 화장실이 딸린 게스트 룸은 호텔 못지 않고 취사 기구가 갖추진 넓은 주방은 콘도처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한인교회 박용규, 이영길 두분의 장립집사는 교회의 살림을 도맡아 섬길 뿐 아니라 우리 일행이 머무는 동안 온갖 정성을 드려서 수고해 준 일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한국 대사님의 환대> 코트 디브아르는 U.N.상임 이사국 중의 한 나라인 관계로 냉전시대는 북한 대사관이 이곳에 상주했으나 냉전시대가 끝나니 이 나라와 아프리카 각국에 상주했던 북한 대사관이 다 떠나갔다.우리 나라도 냉전 종식후 철수한 나라가 많아서 아비장의 대사관에서 이웃 5개국의 영사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대사님께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들이 인사차 방문을 해도 되겠느냐고 문의했더니 배상길 대사님이 오히려 우리 일행을 초대해서 한국관에서 융숭한 만찬으로 대접했다. 대사님은 반백이 섞인 품위 있는 모습에 소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격의 없는 대화를 이끌어 가시면서 우리 일행이 즐거운 대화중 맛있는 한국 요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했다. 대사님의 환대에 다시금 감사를 드린다.
<야무수크로로 가는 길> 야무수크로는 보아니 전 대통령의 고향 마을로써 이곳을 행정 수도로 만들기 위해 넓은 벌판에 구획정리를 해서 길을 만들고 공공건물을 짓고 콩코드 비행기 이 착륙이 가능한 비행장까지 만들었다.수만 평의 대지위에 왕궁같은 자신의 저택을 짓고 악어를 기를 수만 평의 연못까지 만들었다. 우리 일행은 박용규, 이영길 집사님의 승용차로 아비장에서 230km되는 이곳을 방문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출발했다. 아비장 근교는 야자, 고무나무 등 이름 모를 과목을 심은 과원이 잘 다듬어져 있었으나 얼마 못가서 밀림지대가 나타났다.온갖 열대림이 방치된 체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비로써 열대 지방의 밀림이 어떤 곳인지?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국도중 129km는 4차선 도로로서 시속 120 km를 달릴 수 있는 도로이지만 도로 갓 길에는 원주민들이 걸어다니는 길이 있고 주민들은 어디서든지 도로를 횡단하고 있었다. 3시간 주행끝에 야무수크로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자 뜨거운 태양열 때문에 현기증이 날 것만 같다. 국민들의 반대로 행정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지 못한 이유를 앎만 했다.
<베드로 성당보다 더 큰 천주교회당> 코트 디브아르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이다 왜냐하면 보아니 대통령과 현 대통령도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야무수크로를 아프리카 천주교회의 성지를 만들 야망을 갖고 사재를 들여 수 만평 넓은 들판에 로마 베드로 성당보다 더 높고 더 큰 성당을 지었다. 베드로 성당은 미켈란젤로 같은 대가들이 돌로 만든 반면 여기는 외국 기술자를 드려와서 콘크리트로 흉내만 낸 모조품 같은 것이다. 베드로 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최고 걸작품이라는 대리석으로 만든 피에타상이 있는데 여기는 목각으로 축소판 피에타가 있었다. 5천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마다 에어컨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고 네게의 기둥안에 엘러베이터를 설치했고 스피커는 기둥안에 감추어져 있었다.보아니는 이 건물은 바티칸에 바쳤다고 한다.아프리카 오지에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기는 하지만 돌아서는 우리의 입맛이 씁쓸했다. 이런 공적으로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과 차라리 이 돈으로 공장 몇 개를 더 지었다면 좋을 번했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서 아프리카 선교의 중심지 아비장> 천주교 신자인 대통령 까닭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파벌 싸움이 없는 이 나라에 서 아프리카 선교부 본부가 모여 있고 선교사 자녀를 교육할 영어학교가 셋이 이 나라안에 있다. 여기에 선교부를 두는 이유는 이 나라는 5개국과 접해 있고 여러 나라에서 많은 이주민과 내란을 겪는 피난민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때문이다. 이 나라 인구는 1990년에는 1,256만 명이었으나 1995년에 1,532만 명으로 증가했다.이들 중에는 각 부족, 각 종교인이 포함되어 있다. 아프리카도 우리 나라처럼 도시화 현상으로 농촌은 노인들만 남아 있고 똑똑한 젊은이들은 도시로 모여들고 있다. 지금은 추장을 붙들기보다 도시로 흘러 들어온 젊은이들을 훈련시켜서 돌려보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흑인 국가의 태반이 불어를 공용어로 쓰는 국가이므로 불어권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아비장에 선교부를 둘 필요가 있을 것으로 안다.
이번 여정에 가나의 타말레에서 사역하는 이신철, 박은생 선교사를 방문할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으나 마침 이신철 선교사님이 방학을 맞은 자녀들을 데려가기 위해 바브아에 가는편에 1,400km를 달여와서 아비장에서 우리를 만날 수 있어서 위로를 받았다.다음에는 먼저 아비장에 와서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 가장 편리한 여정임을 알게 되었다.
<사하라 사막의 모래 바람> 1월이면 풍향이 북에서 남으로 불게 되는데 이 바람은 우리 나라 황사처럼 사하라의 흙먼지를 서 아프리카 지역에 덮어씌운다. 황사가 얼마나 심한지 태양 빛을 가리워 그때가 되면 오리려 시원해진다고 한다. 황사보다 더 무서운 이슬람교 세력이 북에서 남으로 몰려오고 있다.이슬람을 믿는 자를 모슬렘이라고 하는데 모슬렘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어 코트 디브아르의 통계에 의하면 1990년에 인구의 5%이던 모슬렘이 1995년에는 38%나 된다고 한다.선교 단체들이 필사의 노력을 하지만 모슬렘의 증가 율이 기독교보다 훨씬 앞선다니 염려스럽다.과거 지배 계급인 서구인들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면서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가져왔기 때문에 복음을 잘못 볼 가능성이 있다. 이슬람은 막대한 오일 머니를 뿌리면서 이슬람을 전파하고 있다. 복음의 우월성으로 마지막 보루인 코트 디브아르를 끝까지 지켜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