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고을
산천이 아름다워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강토에는 사람이 살기 좋은 명고을이 많다. 더욱이 인물은 지령이라 하였듯이 수려한 산천정기가 서린 명고을에서는 훌륭한 인물도 많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청화산인 이중환은 그가 쓴 지리서인 택리지에서 경상도 지역은 특히 산수가 아름답고 생리가 풍부하여 사람 살기에 팔도에서 으뜸이고 인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데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하였다.
영남지방 중에서도 삼남의 사대길지를 꼽았는데, 서애 유성룡이 태어난 안동 풍산의 하회마을과 충재 권벌의 종택이 있는 봉화의 닭실마을, 의성김씨 종택이 있는 임하의 내앞마을, 그리고 회재 이언적과 우재 손중돈이 태어난 경주의 양동마을이 그곳이다. 네 곳 모두가 경상도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으며 태백산의 정기를 받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점이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고을을 살펴본다면 하회마을, 양동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6대 민속마을로 지정된 강원도 고성의 왕곡마을, 전남 순천의 낙안마을, 충남 아산의 외암마을, 제주도 서귀포의 성읍마을 등이 있는데 모두 다 하나같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으며,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돤 한국의 명고을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풍수적으로 명당길지에 자리잡아 오래도록 그 명성을 아는 사람은 다 알아주는 고을로는 지리산 자락의 남사마을, 칠곡 웃갓마을, 영양의 주실마을, 경북 영덕의 괴시리마을, 서울 남산의 한옥마을, 경북 영주의 수도리 무섬마을, 대구 남평문씨 세거지인 인흥마을을 비롯한 각 성씨들의 세거지 등 전국적으로 많은 명고을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최근 들어서는 박사가 많이 배출되어 박사마을이라 이름 붙은 곳이 두 군데가 있는데, 100명의 박사가 배출된 강원도 춘천 서면의 박사마을과 88명의 박사를 배출한 전북 임실군 삼계면의 박사마을이 그곳이다.
우리나라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이런 명고을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풍수답사를 하다 보면 느끼게 되는 공통된 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산세와 수세가 우수하다는 것이다. 비단 산과 물이 어우러져 수려할 뿐만 아니라 산이든 물이든 제각기 나름대로 특징이 하나씩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인물은 산천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다는 풍수언을 짐작으로나마 믿게 되고, 이처럼 자연이 조화롭게 잘 짜여진 명당길지에 터를 잡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느끼고 탄복하게 된다.
여러 명고을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을인 삼남의 사대길지인 경주 양동마을에 대해 풍수적으로 살펴보겠다.
영남의 길지 경주 양동마을
양동 민속마을은 삼남의 사대길지의 하나로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으며 조선시대의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반촌마을이다.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두 씨족이 이룬 집성촌마을로 보물, 민속자료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양동 마을에는 가옥 150여채, 정자 15개소, 학당, 영당, 사당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이 가운데에는 보물 3점, 민속자료 12점, 지방유형문화재 4점이 포함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는 무첨당(제411호), 향단(제412호), 관가정(제442호)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잠정등록이 되어 있다.
양동민속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청동기시대부터로 보며 양반마을로 형성된 시기는 대략 15∼16세기를 전후한 조선 중기시대로 본다. 문헌에 의한 양동마을 최초의 인물은 여강 이씨(驪江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면서부터이다.
이후 풍덕 류씨(豊德 柳氏)인 류복하(柳復河)가 이광호의 손녀와 결혼하여 처가에 들어와 살았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고 무남독녀 외동딸이 하나 있었다. 이 딸은 청송 안덕에 살던 월성 손씨인 양민공(襄敏公) 손소와 결혼하였는데 손소는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모두 상속받아 정착하여 살았으며 이것이 월성손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540여년 전의 일이다.
양동마을이 명고을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면서다. 조선 유학의 성현이자 우참찬을 거쳐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429) 선생과,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된 동방 5현의 한 사람인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 -1553)선생이 모두 양동마을에서 탄생하였다.
손씨 집안의 인물인 손중돈은 손소의 아들이고, 이씨 집안의 인물인 이언적은 손소의 큰 딸과 결혼한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의 아들이다. 공교로운 것은 숙질간인 두 인물이 손소가 살았던 서백당의 같은 방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양동마을은 손씨와 이씨의 두 씨족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두 집안 모두 외손의 후예인 동시에 사돈지간이 되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양동마을은 대대로 외손이 잘되는 외손이 마을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학상으로 볼 때, 양동마을은 물(勿)자형의 명당에 해당한다. 마을의 뒷 배경이자 주산(主山)인 설창산에서 산등성이가 네 줄기로 뻗어 내려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풍수를 잘 보려면 관산점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관산점이란 명당의 전체형국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말하는데 이 관산점만 잘 찾으면 명당찾기는 금세 이루어진다. 양동마을의 관산점은 안산인 성주봉이다. 성주봉 정상에 올라가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갔는지 마을이 잘 보이게 나무를 베어 공터로 만든 곳이 한군데 있다. 이곳에 서면 양동마을과 멀리 안강평야가 한 눈에 들어 온다. 물론 마을의 골짜기와 산능선을 헤아려 보면 물(勿)자 형국도 뚜렷하게 보인다.
성주봉 정상에서 양동마을을 내려다보면 설창산에서 내려뻗은 물자의 1획에 해당하는 산줄기에 물봉동산이 있고, 앞쪽으로 안강평야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관가정이 자리잡고 있다. 아래 골짜기가 물봉골(勿峰谷)이며. 바로 옆 언덕에는 양동마을에서 가장 잘 지어진 집인 향단이 자리한다.
두 번째 획의 꺾어진 부분 아래가 거림(居林)이며 이 산줄기의 위에 두 명의 성현을 탄생시킨 서백당이 있다. 마을의 안산(案山)인 성주봉아래 자리한 골짜기가 하촌(下村)이다, 물봉골과 하촌 사이에 있는 것이 안골(內谷)로 위쪽 언덕에는 여강이씨 종택인 무첨당이 자리 잡았다.
물봉골 너머에는 갈구덕(渴求德)이 있다. 풍수에서는 ‘물(勿)’자형 형국을 좋은 집터로 친다. 이는 물(勿)자의 글자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으나 글자의 모양이 사신사(四神砂)가 잘 감싸고 있는 장풍국(藏風局) 형태가 되기에 좋은 곳으로 치는 것이다.
양동마을 또 하나의 형국은 강을 향해 나아가는 배와 같이 생겼다 하여 선유행국(船遊行局)이라 한다. 그로 인하여 마을 대부분의 기와집들은 지붕을 뱃집(맞배지붕)으로 하고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뚫려 가라앉는다고 해서 우물을 파지 않았는데, 그리하여 마을에는 예부터 우물이 귀했다.
양동마을의 진산(鎭山)은 설창산(雪倉山)이다.
설창산에서 좌로 뻗어 외청룡을 이루며 달리던 용맥은 마을의 바로 앞에 호명산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이다.
수려하면서도 뾰족하게 솟아오른 안산은 전형적인 문필봉(文筆峰)의 형세를 띠어 양동마을에 훌륭한 문사(文士)가 날 것을 예언한다.
진산(鎭山)인 설창산이 좌측으로 내려보낸 청룡은 안쪽으로 두 개의 작은 산줄기를 흘려보내고는 안락천에 맞닿아 행룡을 멈추고는 마을을 안으로 감싸며 수구(水口)를 관쇄(關鎖)시켰다.
우측으로 내려온 백호는 물봉을 일으키고 안락천을 따라 마을을 지키며 양동초등학교 뒤에서 청룡과 만나 수구를 이룬다.
웅장하지는 않아도 후덕한 복룡(福龍)의 형세를 지닌 현무(玄武)와 수려한 안산, 그리고 마을을 양쪽에서 감싸는 청룡과 백호로 인하여 양동마을은 장풍(藏風)이 잘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향(向)은 동쪽을 바라보는데 비록 남향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동향도 좋은 방향에 속하고, 터의 지세는 뒤가 높고 앞이 낮은 전저후고(前低後高)형이며, 앞으로는 기계면에서 들어오는 안락천(安樂川)을 접하고 있어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갖춘 길지(吉地)이다.
다음으로 양동마을의 들을 보면 안락천 너머로 기름진 안강 평야가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한때는 이 넓은 안강들의 반이 양동마을 두 가문의 소유였다고 한다.
형산강과 안락천이 만나는 합수처(合水處)는 안강평야를 기름진 농토로 만들어 양동마을에 부(富)를 이루게 하여주니, 바로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밝힌 생리(生利)가 풍부한 곳이 된다.
또한 산줄기와 물줄기가 지형적으로 태극문양을 띠고 있어 양택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명당자리인데다 경주방면에서 흘러드는 형산강 물줄기를 역수(逆水)로 맞는 지형인지라 이는 마을의 끊임없는 부(富)의 상징이 된다.
(역수란 두 개의 물줄기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두 개의 기운이 상충하여 강한 기운을 일으키므로 매우 길한 수세로 본다.)
게다가 마을의 백호자락을 안락천이 감싸고, 그 너머에는 기계천과 칠평천이 흐르고 있어 물줄기는 무려 세 겹이나 된다.
또한 풍수에서 역으로 흘러드는 물은 마을의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아주 귀한 물로 보는데 여러 겹의 역수(逆水)가 겹겹이 가로 막으면 마을 안의 생기는 더 잘 갈무리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물줄기들은 배호자락 물봉에 가려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런 물줄기를 암공수(暗拱水)라 하여 더 귀하게 여긴다.
양동마을의 풍수적인 특징 하나는 바로 형국에 따른 금기이다. 물(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피 혈(血)자’가 된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동해남부선 철로가 마을을 통과하도록 계획된 것을 마을 주민들의 반대로 철로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고 한다.
마을의 배치에 있어 양동마을은 유교풍수의 관념이 적용되었다. 산등성이의 제일 높은 자리에는 종갓집들이 자리 잡았고, 그 아래에 방계 후손들이, 그리고 하인들의 집은 맨 아래 골진 부분에 위치하도록 하여 종손 중심주의와 신분에 따른 상하관계를 분명히 하였다.
마을의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의 마을이 산줄기가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부분에 자리하는데 비해 양동마을은 산줄기의 능선 위에 집터를 정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교풍수의 관념이 작용했던 탓이지만 물자형의 형국이 산등성이라 할지라도 겹겹이 둘러싼 산줄기 덕택에 장풍이 비교적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풍수적으로도 문제가 없었으리라 보여진다.
양동마을의 주요가옥
①서백당(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월성 손씨 대종택(大宗宅)인 서백당(書百堂)은 문필봉(文筆峰)의 지기가 모인 곳으로, 큰 인물 3명이 나온다는 삼현지지(三賢之地)로 불린다. 당호(堂號)는 마음에 참을 인(忍)자를 백번 써야 종손의 자격이 생긴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며, 민가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마당 가운데 심어진 500년이 넘었다는 향나무가 가옥의 전통을 그대로 말해준다.
물(勿)자 형국에서는 글자의 어깨부분이 지기가 응집된 부분이다. 즉 두 번째 획이 꺾어지는 부분인데 서백당은 바로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서백당의 자리를 잡아 준 지관은 이곳에서 3명의 현인이 출생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실제로 집을 지은 지 6년 만에 손소의 둘째아들 우재 손중돈 선생이 태어났고, 이어 회재 이언적이 같은 방에서 태어났다. 이로써 두 명의 현인은 이미 탄생하였는데 문제는 나머지 한 명의 현인이 출생할 차례이다. 손씨 가문에서는 회재선생의 탄생 이후 나머지 한명의 현인이 외손에서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출가한 딸이 이곳에서 출산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외부인에게도 이 방만큼은 일체 개방을 하지 않는다.
서백당의 뒤로 돌아가자 용맥의 지기가 뭉친 잉(孕)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강한 지기는 두 인물이 태어난 산실(産室)을 향해 정확히 들어갔다.
②무첨당(無添堂, 보물 제411호)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이번(李番)공이 살던 집으로 1460경에 지은 여강(驪江) 이씨(李氏)의 종가집인데, 정면 5칸, 측면 5칸의 'ㄱ'자형 집으로, 네모기둥과 둥근기둥을 번갈아가며 방과 마루를 배치하였다.
한때 흥선대원군이 방문하여 썼다는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대원군이 파락호 시절 이곳 양동마을에 와서 여강이씨 문중으로부터 왕손 대접을 톡톡히 받았기에 그 후 집권을 한 대원군은 여강이씨라면 검토해 보지도 않고 등용을 시켰다고 전한다. 양동마을이 아직도 보존이 잘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③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입향조 양민공 손소의 장남이 다른 집안에 장가를 가면서 그 집안의 대를 잇게 되자 둘째 아들인 우재 손중돈은 장형의 귀향에 대비해 종택인 서백당을 비워두고 아래쪽에 관가정을 지었다. 서백당과 달리 마을 입구의 높은 언덕에 지어진 이 집은 너른 안강평야를 굽어볼 수 있도록 만든 정자의 경치가 압권이다.
건물의 평면이 ‘ㅁ'자형을 이루어 아담한 정원이 있으며, 안채 뒤편 동측에는 맞배지붕의 사당이 있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④향단(香壇, 보물 제412호)
향단은 두개의 중정을 두고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붙여 전체를 날 ‘일(日)’자형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이 조화를 이루어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다. 향단은 회재 선생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이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은 집인데 경상감사 시절 동생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향단은 마을 입구에서 한눈에 보이며 화려하고 개방적인 외관을 하고 있다. 하지만 기다란 행랑채로 앞쪽을 막고 맞배지붕 세 동을 잇댄 지극히 폐쇄적인 구조다.
오랜 전통을 지닌 양동마을에는 이 밖에도 많은 집들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방문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주택으로 낙선당(樂善堂), 심수정(心水亭), 수운정(水雲亭), 이향정(二香亭), 안락정(安樂亭), 수졸당(守拙堂), 강학당(講學堂), 대성헌(對聖軒) 등이 있다.
안강읍 옥산리에는 회재선생의 낙향지인 독락당(獨樂堂)이 있고, 인근에 선생을 봉안한 옥산서원이 있는데 나오는 길에 들러볼만 하다. 마을 뒤 설창산 배면에 조성한 안계호의 넓은 호반경관도 여행중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볼거리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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