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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연천군 !
연천군(漣川郡)은 경기도 북부에 있는 군이다. 동쪽은 포천시와 강원도 철원군과 경계하고, 남쪽은 동두천시, 양주시, 파주시와 접하며, 서쪽은 군사분계선을 끼고 북한의 황해북도 장풍군, 북쪽은 북한의 철원군과 경계를 이룬다. 인구는 2015년 기준 약4만5천여 명으로 경기도의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가장 적다. 또한 장단면과 장도면의 상당한 면적은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 북쪽에 위치하여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 경원선 신탄리역
2012년 11월20일 경원선 신탄리역~철원 월정리역(백마고지)간 5.6km구간이 복원 개통됐다. 경원선은 1914년 8월 개통된 이후 용산~원산간 223.7km를 운행하며 한반도 중앙부의 물자소송에 많은 역할을 해 왔으나 한국전쟁으로 파괴돼 현재 비무장지대 주변 31km가 단절됐다.
그런데 이번 신탄리~철원간 철도 복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62년 만에 철원지역에 철도가 운행하게 되고 앞으로 남북 및 대륙철도 연결에도 가교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철도 개통에 따라 현재 동두천~신탄리역까지 운행하는 열차를 백마고지역까지 연장 운행하고 있다. 또 수도권 전철과 연계 운영 돼 철원군 주민들의 수도권 접근이 한 층 수월해 졌으며, 철원평야 철새 도래지 등의 관광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펌)
□ 허브 빌리지
연천군 왕진면에 1만7000여평 규모로 조성된 허브빌리지는 눈 앞에 넓게 펼쳐진 임진강과 향긋한 허브향이 어우러져 마치 지중해 휴양지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품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다양한 테마로 꾸며져 있는 허브정원에는 사랑의 연못을 비롯, 라벤더 가든과 윈드 가든, 스톤가든 등의 테마로 꾸며져 있으며, 계절마다 화려한 색깔의 꽃을 심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 여행객들을 열광케 한다.
그 외에도 커피 팩토리와 허브 숍, 허브 찜질방 등이 있다. 또한 허브를 이용한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허브 비누, 허브 향초, 허브 방향제 만들기 등을 진행하며 야외 허브족욕탕에서는 라벤더, 레몬 등 피로회복에 좋은 허브추출물을 활용한 족욕 체험도 무료로 즐길 수 있어서 연인이나 가족의 나들이 쉼터로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장남인 전재국씨가 2004년 이곳 연천 땅을 매입하여 조성한 대규모 허브빌리지이다. 임진강을 끼고 깎아내린 기암절벽의 완만한 능선이 감싸 안은 형상은 “그림 같다”는 탄성을 절로 자아낸다.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 최전방에 숨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밝힌 전 전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무일푼이다. 국가에 납부해야 할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전 전 대통령은 1997년 2월 비자금 조성 혐의로 선고받은 추징금 2205억원 가운데 검찰이 강제 집행한 재산 등 납부한 532억원을 제외하고 1673억원을 지금껏 내지 않고 있다. |
□ 재인폭포
폭포의 길이는 18m이다. 폭포 주위는 길이 100m, 너비 30m, 깊이 20m 정도로 큰 Y자형 협곡을 이루며, 검은빛을 띠는 화강암·현무암 등이 계곡과 조화를 이룬다. 폭포 옆에는 마실 수 있는 석간수가 솟아나며, 폭포 위에는 수려한 계곡을 조망해 볼 수 있는 조그만 다리가 있다. 폭포의 상류 쪽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청옥색의 용소(선녀탕)가 있으나, 지금은 군작전지역으로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옛날에 줄타기 재인(광대)의 처를 탐한 포천원님이 재인으로 하여금 폭포 위에서 재주를 부리게 하고 줄을 끊어 재인을 죽이고 난 후, 그의 부인을 범하려고 하자 부인이 원님의 코를 물어 정절을 지켰다는 한이 담긴 전설이 전한다. 그후 이 고장을 '코문이'라 부르기 시작해 현재 고문리가 되었다고 하며, 폭포이름은 재인폭포라 했다고 한다.
폭포로 가는 도중에는 연천 댐 주변의 솔밭, 전곡호, 한탄강 하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한탄강유원지, 아우라지유원지 등이 연이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경기도의 명소이다.
□ 동이리 주상절리 (한탄강 베개용암)
베게용암은 신생대 제4기에 북한의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이 옛 한탄강 유로를 따라 흐르다가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급랭하여 형성되었다. 오리산 화산체는 정상에 직경 400m 가량의 분화구가 있는 것이 위성사진으로 확인된다. 베개용암은 분출된 용암이 물속에서 그대로 식어 생성된 것이다. 용암이 물과 만나 용암류의 접촉면은 급히 식어 굳지만 안쪽으로는 액체 상태로 계속 흐르면서 표면 틈으로 마치 치약처럼 삐져나와 굳어 생긴 것이 베개용암이다.
대체로 둥글거나 베개 모양이기 때문에 베게용암이라고 한다. 또한 급속히 식었기 때문에 중심부는 갈라져 주변으로 퍼지는 파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로 해안·해저 화산 부근에서 발견되지만 호소 주변부에서도 발견된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은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 내에서는 발견된 예가 드물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따라서 지질학·지형학·경관적 가치 역시 높다. 이 지역은 한탄강과 바로 인접한 절벽인데다 군사 시설이 인접하여 민간인의 접근이 어렵기 때문에 베게용암의 원형이 현재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주상절리(柱狀節理) :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 모양으로 굳은 것인데 바닷가에 많고 내륙지방 에는 희귀하고 기둥의 단면은 4각~6각형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
□ 전곡리 선사유적지
전곡리 ‘선사박물관’ 은 우리나라 구석기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5, 60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 고고학계는 동아시아에는 주먹도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고인류단계에서부터 동아시아지역의 인류가 서구지역의 인류에 비해 문화적으로 열등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곡리에서도 주먹도끼가 발견되었다.
1978년 4월, 동두천에 근무하던 미공군 하사관 그렉 보웬이 한탄강유원지에 놀러왔다가 지표면에 나뒹굴고 있는 가공한 듯한 몇 개의 돌덩어리를 보게 된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던 그는 이 돌들이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석기시대 유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돌들을 주워 부대로 돌아와 그 즉시 사진과 함께 발견 경위를 소상하게 적어 프랑스 고고학자인 보르도 교수에게 보내게 된다.
보르도 교수는 당시 서울대학교 김원룡 박사를 소개했고, 김원룡 교수는 이 돌들이 바로 구석기시대 유물인 주먹도끼 3점과 긁개 1점임을 확인하였다. 그 후 전곡리 일대에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79년에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전 세계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주먹도끼는 전기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손에 쥘 수 있을만한 돌을 가공하여 끝 부분은 뾰족하고, 넓적한 양 옆에는 날이 서 있으며, 손으로 잡는 부분은 둥근 형태인 다용도 석기를 말한다. 한탄강 유역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는 유럽, 아프리카지역에서 발견되는 아슐리안계 주먹도끼와 동일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석기들은 인류 최초의 도구로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이 상당한 지적 수준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곡리에서는 30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주먹도끼를 비롯하여 찍개, 긁개, 밀개, 뚫개 등 대략 5천여 점의 구석기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전곡리 유물이 약 30만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우리 조상은 이미 수십만 년 전에 이 땅에 구석기시대를 열었고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거치며 우리민족의 기틀을 형성했다.
□ 연천 숭의전지 (崇義殿址)
숭의전지는 조선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 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고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등 고려 4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뒤 1451년(문종 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 홍 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 희, 강감찬, 윤 관, 김부식, 김취려, 조 충, 김방경, 안 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 연천 경순왕릉
경순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경종 3)에 죽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 연천 고구려 3대 성(城)
연천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곡리 선사유적이 유명하지만, 또한 연천에서만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 있으니 바로 고구려 유적이다. 고구려는 중국대륙의 혼란기였던 5호16국·남북조시대에 한반도북부와 만주 일대에서 크게 번성했던 국가였다. 고구려가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 속에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강력한 철제무기와 산성축조기술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남진정책(南進政策)’으로 백제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등 이 시기에 남한지역에 많은 고구려의 흔적을 남겨 놓게 된다.
남한 내(內) 고구려 유적의 70%가 경기도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부분 성(城) 또는 보루(堡壘)로 남아있는데, 연천군에는 3곳의 고구려 성(城), 고분(古墳) 1곳, 10여 개의 보루가 남아있다. 연천의 3대성, 즉 호로고루, 당포성 그리고 은대리성은 강안(江岸)평지성이라고 하는데,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는 높이 10~15m 정도의 현무암 주상절리(수직절벽)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곳 성들은 성의 일부분만을 구축하면 별도의 성벽을 구축하지 않더라도 쉽게 적을 막아낼 수 있어서 강안(江岸)평지성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아쉬워하는 중원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멸망. 지금은 중국이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자기네들의 역사로 탈바꿈시키고 있어 더욱 안타깝다. 더 늦기 전에 남한에 남아있는 고구려의 유적을 찾아 제대로 정비와 보존을 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보루(堡壘) - 작은 성 (예:강화도 광성보). 보루는 적군을 막거나 공격하기 위해 흙이나 돌로 튼튼하게 쌓아놓은 진지를 가리키는 군사용어이다. 1백~2백 평 규모의 군사용 성으로 약 1백 여명이 주둔하는 규모이다. |
□ 연천 태풍전망대 / 열쇠전망대
경기도 북부 연천은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되었으며 서구만 가지고 있던 구석기 유적의 학설을 뒤집고 아시아에도 이미 구석기 문화가 존재하였음을 전세계에 알린 지역일뿐만 아니라, DMZ안보관광지역이며, 우리나라 생태연구 및 지질학적으로 유명하고, 남북분단의 현장과 먼 옛날 삼국이 패권을 차지하기위해 다투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대한민국 서부전선 최전방 남방한계선에 위치한 태풍전망대는 천하무적 태풍부대에서 1991년 12월 3일 건립한 것으로, 서울에서 약 65km 떨어진 비끼산의 가장 높은 수리봉에 위치한다. 태풍전망대는 휴전선까지 800m, 북한 초소까지는 1,600m의 거리에 떨어져 위치하고 155마일 휴전선상 북한과 가장 가까운 전망대로 유명하다.
태풍전망대에는 국군 장병들이 종교 집회를 가질 수 있는 교회·성당·성모상·법당·종각 등이 있고, 북녘에 고향을 두고 떠나온 실향민의 망향비와 한국전쟁의 전적비, 6.25참전 소년전차병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전시관에는 이곳으로부터 2km 떨어진 임진강 필승교에서 수습한 북한의 생활필수품과 일용품, 그리고 휴전 이후 수십 회에 걸쳐 침투한 무장 간첩들이 이용한 침투 장비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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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의 북녘 전망대로 열쇠전망대가 있다. 연천군 신서면 답곡리에 안보 교육과 망향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 1998년 4월 11일 육군 열쇠부대가 북녘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역에 ‘통일의 열쇠’가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있는 “열쇠전망대”를 건립하고 일반인에게 오픈하고 있다.
열쇠전망대는 남방한계선 바로 앞에 위치하여 DMZ의 현재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철책선 앞의 울타리에는 여행객들이 닫혀있는 통일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픈 소망을 담아 달아놓은 리본들이 바람결에 펄럭인다. 내부 전시실에는 DMZ의 생태를 소개하는 전시물들이 있고, 우리나라 군대의 내무실을 복원해두었다. 북한의 생활용품과 각종 장비들도 전시되어 있어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을 짐작해볼 수 있다.
태풍전망대와 열쇠전망대는 안보불감증에 빠진 현 세대들에게 통일에 대한 의지와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곳이다.
□ 연천의 역사인물
허목(許穆) 1595(선조 28)∼1682(숙종 8)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남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대학자,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미수(眉叟) 이며 연천 출생이다.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었으며 서예가·의술가로 유명했다. 왕징면 강서리에 미수 허목의 묘가 있다.
선생과 가장 무서운 정적으로 지목되었던 우암 송시열이 노경에 불치의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라 명재경각(命在頃刻)인 때에, 최후의 기대감에서 아들에게 명하기를,
“너는 나를 살리고 싶거든 미수에게 가서 내 병의 증세를 말하고 약의 화제를 지어 달라고 하여 그대로 약을 지어오거라.” 하니, 아들은 “아버지, 그것은 절대로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원수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에게 가서 화제를 지어달라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거절하니,
송시열이 “너는 아비가 시키는 대로하라. 이제는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의 화제를 써서 죽는다면 그것이야 내 명이 다한 것일 뿐이니라.” 하고 엄히 꾸짖어 빨리 다녀올 것을 재촉하였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허목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화제를 받아 와서 보니, 과연 독극물인 비상이 들어 있었다.
송시열의 아들은 또 아버지께 말하기를, “이 화제대로 약을 지어 드시면, 아버지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제발 이 화제의 약을 드시지 마십시오.” 라면서 간절히 간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여전히 “아무 말을 말고 그 화제대로 약을 빨리 지어 오라.” 고 호령을 하였다. 아들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더니, 과연 그 약을 먹고 금방 쾌차하였다는 것이다.
송시열 아들이 후에 허목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화제에 극약인 비상을 넣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허목이 대답하기를, “자네가 증상을 말하면서 대감께서 어린 손자 아이의 오줌을 드셨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어르신네의 병환은 바로 그 요독(尿毒) 때문이었으니, 그 독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네.”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허목과 송시열의 정치적 적대 관계를 초월한 깊은 인도주의적 생명관과 인간적 신뢰감을 깨닫게 하는 교훈으로 삼아 전설처럼 전하여 오고 있다.
정발 장군(鄭撥) (1553~1592)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백운(白雲)이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에 올라 부산진첨절제사가 되어 방비에 힘썼다. 이 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에 상륙한 왜병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그도 전사하였다.
미산면 백석리(柏石里) 34번지에 정발 장군의 묘가 있다. 나라에서는 뒤에 장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런데 정발이 전사한 후 그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모두들 안타까워하던 중에, 장군이 사랑하던 말이 그의 갑옷과 투구를 물고 와서, 그 의복과 투구를 가지고 의관장(衣冠葬)으로 장례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산진 전투 시 왜군에 종군한 네덜란드 선교사 프로이스는 ‘고려인들은 국왕에 대한 충성을 귀히 여겨 거의 전사할 때까지 싸웠고 포로가 된 자는 소수였다.(중략) 마지막에는 칼과 창이 부딪히는 육탄전이 되었는데 정발장군도 총탄에 쓰러져 부산진성은 함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군 18,700명 / 조선관군 600명, 민간인 1,000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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