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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기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
깊은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다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것을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
전라남도 남서부 무안반도 남단에 있는 목포시는 수륙교통의 요지이며, 1980년대 말부터 대불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광주·광양·목포를 잇는 서해안개발의 항만·거점 도시로 자리잡았다. 인구는 약 24만여명 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적했던 조그만 어촌이 고려 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왕건이 궁예 밑에 있던 태봉 시기 때,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를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 위해 나주를 점령하고자 목포에 도착해 나주 지역을 복속했다고 한다. 이때 장화왕후를 만나 혼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와 나주 지역은 후삼국시대 재통일 과정에서 왕건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장화왕후>
나주지역을 점령한 왕건은 어느 날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는 도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을 발견하고 말을 달려갔다. 그곳엔 열 예닐곱 살 먹어 보이는 예쁜 처녀가 조그만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기에 그에게 물을 청했다. 왕건을 살펴본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건네주면서 우물가에 있는 버드나무 몇 잎을 훑어 물 위에 띄웠다.
표주박을 받아 든 왕건은 버들잎을 후후 불어 가면서 한 모금씩 먹을 수밖에 없었다. 물을 다 마신 왕건이 처녀의 이런 태도가 이상하여 버들잎을 띄워 준 까닭을 물었다.
"장군께선 갈증이 몹시 심한 듯 하여 급하게 물을 마시면 체할까 염려되어 용렬한 짓을 하였습니다."
처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처녀의 지혜에 감동한 왕건은 그의 아버지인 오다련을 찾아가서 정중하게 청혼하여 쾌히 승낙을 받는다. 그 처녀의 아버지 오다련은 나주지역의 호족이었다.
이리하여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고려 제2대 혜종 임금이며, 후에 장화왕후에 오른 오씨가 빨래하던 샘 완사천(浣紗泉)은 이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채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왕건은 역사상 가장 많은 부인을 두었다. 29명 부인중 제2왕후인 장화왕후가 이 완사천의 주인공이다.
□ 정광정혜원
목포시 죽동에 위치한 정광정혜원은 100여년전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본인이 세운 일본사찰이다.
주변 환경을 무시하고 우리의 전통 사찰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모습의 정광정혜원은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도심형 사찰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편 이와 유사한 사찰인 군산 동국사는2003년에 일찍이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으나, 이곳 정광정혜원은 아직 문화재 등록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목포시민들은 문화재 등록을 위해 노력 중이다. .또 정광 정혜원은 고은 시인과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 스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승려였던 고은 시인이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정혜원으로 포교를 나왔다가 전남대 상대 학생이었던 박재철(법정 스님의 속명)을 만나 불교로 귀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 정광 정혜원 앞 뜰에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한 동상이건립 되어 있다. 이처럼 정광정혜원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의 아픈 역사를 보여준다.
□ 남농 허건 기념관
남농기념관은 전라남ㄷ고 목포시 갓바위에 위치한 박물관으로서 남농 허건의 작품 200여점 등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남농의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남농(南農). 전라남도 진도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의 손자이며, 직업 화가였던 허형(許瀅)의 아들이다. 화가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나타냈다. 그러나 생활의 빈궁함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목포상업전수학원 에 들어가 상업을 공부하였다. 그런 가운데에도 타고난 그림 자질이 발휘되어,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 (약칭 선전) 동양화부에 수묵 담채(水墨淡彩) 의 사실적인 풍경화로 입선하였다. 1944년까지 연달아 입선과 특선에 오르면서 전통 화단에 진출 하였다.
1952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참가하여 추천 작가·초대 작가·심사 위원을 역임하 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그리고 1957년 김기창(金基昶), 이유태(李惟台), 김영기(金永基), 김정현(金正炫), 박내현(朴崍賢), 천경자(千鏡子) 등과 중진 한국화가단체 백양회(白陽會) 창립에 참가하였다.
18세 때부터 목포에 정착한 이래 그곳을 떠나지 않은 채 작품 활동을 하였고, 1983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에 피선되었다. 선생은 평생을 목포에서 보내면서 한국 화단의 중심에 서서 많은 미술 활동을 하였으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 후진 양성에 진력하던 중 1987년 지병으로 사망 하였다.
1981년에는 평생 수집한 수석· 자기· 목물과 조부인 소치 허련부터 3대의 작품들을 목포시에 기증 하여 향토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987년에는 진도 운림산방을 사재로 복원하여 진도군에 기부 체납 함으로써 우리 예술계에서 문화유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등 본보기가 되었다.
□ 유달산
호남정맥(노령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유달산은 오랜 엣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은 혼령은 이등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저승길에서 극락세계로 가는 영혼은 세 마리 학(삼학도 섬)이나 고하도의 용머리에 실려 떠나고 용궁으로 가는 영혼은 거북섬(龜島)으로 가서 거북이 등에 실려 용궁으로 떠난다고 한다.
유달산은 목포시와 다도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므로 산정에 두 개의 봉수대 를 설치해 멀리 바다에서 들어오는 외적을 경계하였다. 달성각(達成閣)에서 약 100m 내려오면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午砲臺)와 노적봉(露積峯)이 있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군량을 쌓아둔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속인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여 진다. 남쪽 기슭의 해안을 광복 전에 일본 사람들이 매축하여 신시가지 를 만들었는데, 현재 만호동 과 무안동이 이 지역에 해당한다.
이 산에는 대학루(待鶴樓)·달성각·유선각(儒仙閣)·관운각(觀雲閣)·소요정(逍遙亭) 등의 정자가 있다. 산 중턱에는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유달사(儒達寺)·관음사(觀音寺)·수도사(修道寺) 등의 사찰이 산 중봉에 있으며, 활터도 있다. 산의 정상인 일등암(一等巖)에 오르면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그 경관은 장관을 이룬다.
유달산 노적봉(露積峰) 바위는 이순신 장군의 의인전술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노적봉은 해발 60미터의 바위 봉우리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이 봉우리에 짚으로 이엉을 엮어 바위를 덮었는데, 마치 군량미를 쌓아 놓은 노적처럼 보이게 했고, 또한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을 빙빙 돌게 해서 많은 군사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영산강에 백회(白灰)를 뿌려 쌀뜨물로 보이게 하였다. 또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우리 민속인 ‘강강술래’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적은 수의 군사로 다수의 일본군 그것도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물리치거나 위급을 피하기 위해서 사용한 전술이다. 독성산성에서 권율 장군이 산등성이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뿌려 말을 씻는 것처럼 보여 식량과 식수가 부족해지길 기다리던 일본군으로 하여금 포위망을 풀고 다른 곳으로 가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적봉 상단의 바위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어 ‘큰 바위 얼굴’이라 불리기도 한다. |
※ 삼학도의 전설 유달산에 한 장사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세 처녀가 이 장사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세 처녀가 자신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게 된 장사는 수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세처녀를 불러 자신의 수도가 끝날 때까지 바다 건너 섬으로 건너가 살고 있으면 찾아 가겠다고 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 약속을 믿고 세처녀가 조각배를 타고 섬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이를 먼 산 에서 바라보는 장사는 이제야 자신도 세처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되고 다시 돌아와 달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배를 향해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화살이 꽂힌 배는 구멍이 뚫려서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이 때 세처녀가 학으로 변해 하늘로 솟아오르고, 다시 바다위로 내려와 세 개의 섬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
□ 목포진
목포지역은 예부터 내륙과 해상을 연결하는 군사상의 요충지로서, 지리상으로 영산강 하구를 안고 있으며 바다로 연결되는 요충지에 있다. 이 때문에 호남과 경상 남부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로 사용되는 길목 역할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목포진이 설치된 배경에 대한 기록을 살펴본다.
『무안현 목포(木浦)와 보성현 여도(呂島) 등은 모두 왜적이 드나드는 요해지인데, 병선(兵船)을 정박한 곳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청하옵건대, 목포와 여도에 따로 병선을 설치하고 만호(萬戶)를 임명하여 보내소서.(세종 21년 4월 15일)』 이와 같이 목포(木浦)는 길목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돼 그 곳을 침략하는 왜적을 경계하기 위해 진(鎭) 설치가 재기 되었다. 성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그 보다 후대인 연산군 때의 일이다.
목포진은 조선 세종21년(1439)에 현재 자리에 목포 만호진을 설치하였으며, 개항과 함께 고종 21년(1895)에 폐진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목포 만호진의 성이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원래 위치는 대략 현재의 목포시 만호동 일대일 것으로 추측되며, 이 일대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에서 당시의 돌을 확인할 수 있다. 만호진의 성은 일본 영사관, 영국 영사관 기지로 사용되다가 민가로 전용되었으며, 만호동 공터에는 목포진 유적비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 목포근대역사관
목포근대역사관은 목포시 유달동에 위치한 근대역사 전용박물관이다. 건물은 구 목포 일본영사관이 본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자 목포지점의 건물도 같이 쓰고 있다.
구 목포 일본영사관은 동양척식주식회자 목포지점 건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과거 일인 거류지 내에 있다. 신고전주의의 건물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건립 당시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어 대한민국 사적 제289호이기도 하다.
박물관 내부에는 목포의 개항과 당시 조선의 역사, 일제의 야욕과 수탈의 상징적 사진들, 당시 동척이 쓰던 금고 등이 있으며 2층까지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다. 대개 근대자료사진전을 기획 전시하고 있다. 입장료는 어른 2,000원(목포 시민 1,000원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는 일제가 1908년 식민지 농업 경영과 일본인 이민 사업을 위해 설립한 회사이다. 토지와 곡물을 빌려 주고 50% 이상의 고율 소작료와 비싼 이자를 받았다. 일제는 지세의 공정한 부과와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다(1910~1918). 그러나 실제로는 지세 수입을 늘려 식민 지배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고, 일본인이 쉽게 토지에 투자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왕실과 국가 소유 토지, 마을이나 문중 소유 토지 등을 조선 총독부 소유지로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토지 조사 사업은 소유권자가 정해진 기간 내에 직접 신고하여 소유자임을 밝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한국인의 지세 부담은 증가하고, 총독부 소유 토지는 크게 늘었다. 총독부는 소유지 가운데 상당 부분을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넘겼고,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이를 일본 이주민에게 싼값에 분배하였다. 또한, 토지 조사사업 이후 일본의 농업 회사와 지주들이 조선에 대거 진출하였으며, 이들은 관습상 인정되던 소작인의 경작권을 무시하였다. 이로써 소작인은 기한이 정해진 계약에 따라 소작을 해야 했으므로 고율의 소작료를 부담하는 등 소작 조건이 크게 나빠졌다. |
국도1.2호선 기점 기념비는 목포근대역사관 내에 세워져 있다. 1호선은 목포에서 신의주까지인데 현재는 판문점에서 끊겼고, 2호선은 목포와 경남 부산을 잇는 동서연결 국도인데, 목포와 신안 간 압해대교가 이어져 현재는 신안이 기점이다 |
동양 척식은 한국인을 아프게 한 이름이었다. 한국 경제와 농민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일제의 침략 정책에 따라 한국, 만주, 동남아시아에까지 검은 손길을 뻗쳤다. 동양척식 목포지점 부산지점 건물은 근대 역사관으로 꾸며져 있다.
1911년 봄, 전라도 나주군 왕곡면의 한 할머니는 자기네 논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일본사람 하나가 헌병과 순사까지 데리고 와서 논두렁에 팻말을 박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한걸음에 달려가 소리쳤다. “남의 논에서 무엇을 하는 게요?” “보면 모르겠소? 여기는 동양 척식의 땅이라고 표시를 하고 있소.” “누, 누구 땅이라고? 여긴 내 땅이오. 내 땅!” 할머니는 팻말을 뽑으려 달려들었다가 일본 헌병에게 떠밀리고 말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였기에 남의 논에 팻말을 박고 주인 행세를 하려 든 걸까?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12월, 일본인을 한국에 이민시키는 회사로 설립되었다. 서울에 본사를 두고, 부산, 대구, 목포, 사리원, 평양 등 주요 도시 아홉 곳에 지점을 세웠다. 당시 일본은 빠른 근대화를 거치면서 여러 사회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가난한 도시 사람들이 심각한 문제였다. 산업이 발전하자 사람들은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렸지만, 집이나 식량이 부족해 고통을 겪고 있었다. 품삯마저 적어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으로 일본 사람을 이민시키면 가난한 도시민 문제도 해결되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 다스리기 쉽다고 생각했다.
밥숟가락까지 다 가져가시오, 그 당시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소작인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다 가져가거라. 밥 먹는 숟가락은 이제 필요도 없다.”먹을 게 없으니 숟가락마저 필요없다는 울부짖음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한국 농민들에게 높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었다. 만약 돈을 제 때 갚지 못하면 빌린 돈보다 훨씬 값나가는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 농민들은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이 아니라 도둑질해가는 ‘도척’이라고 말했다.
폭탄을 던진 나석주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간도로 갔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무력 투쟁을 벌이는 의열단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그러나 두 곳에 던진 폭탄은 안타깝게도 터지지 않았다.
간도와 만주로 쫓겨 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점령하자 동양 척식 주식회사는 본격적으로 일본 이민자를 모집했다. 한국으로 이주하는 일본인이 늘면서 한국인은 농사를 지을 곳이 없어졌다. 가난한 농민들은 살 곳을 찾아 간도로, 만주로 떠나야 했다. 농민들 대부분이 추운 겨울에 만주로 떠났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살림살이를 정리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추운 겨울, 가난한 농민들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짐이라야 이불보따리 하나, 옷가지 몇 개, 숟가락이 전부였다.
“일본 사람은 쌀밥 먹으러 한국에 오는데 우리는 잡곡밥 먹자고 만주로 떠나는구나!” 사람들은 탄식을 내뱉으며 고향을 등졌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눈시울을 적셨어요. 시인 이상화는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보고 이런 시를 썼다.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가도다 잊음 속에 있는 간도와 요동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겨가도다 |
□ 갓바위
갓바위에는 중바위가 있고 삿갓바위가 있다. 바다 쪽에 있는 바위가 마치 스님 두 분이 삿갓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여 갓바위라고 부르며 중바위는 훌륭한 도사스님이 기거 하였다 하여 중바위라 전해진다. 갓바위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진리를 깨달은 경지 높은 도사 스님이 영산강을 건너 나불도에 있는 닭섬으로 건너가려고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과 지팡이를 놓은 것이 갓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월출산에서 도를 닦던 도사스님이 상좌스님을 데리고 목포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려고 축지법을 사용해서 영산강을 건너려다 상좌중이 잘못 따라와서 건너지 못하고 돌로 굳어졌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아주 먼 옛날 목포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약값을 벌려고 집을 떠나 돈을 벌다가 아버지를 돌보지 않아 그만 돌아가시게 되었다. 이에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몇 날 며칠을 굶어가며 삿갓을 쓰고 하늘도 보지 않고 용서를 빌다가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대중(전 대통령), 김지하(소설가), 이난영(가수), 차범석(극작가), 남진(가수, 본명 김남진), 이매방(국악인), 김우진(시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투신), 허형, 허련, 허건(동양화가). 등
□ 암태도 사건
1923년 9월 암태도의 대지주 문재철은 소작인들로부터 7~8할의 고율소작료를 징수했다. 이에 소작농들은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은 불납동맹을 결성했다.
그러자 지주는 소작료 강제징수를 감행했고, 목포경찰서는 수십 명의 경찰을 보냈다.
소작회는 쟁의를 강화했고, 일경은 소작인 50여 명을 체포하여 간부 13명을 목포로 압송했다. 600명의 농성단이 목포경찰서 등지에서 구속자 석방 시위를 했다. 농민들은 목포법원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한 데 이어, 문재철의 집으로 가 시위를 하다 일경에게 26명이 체포되었다.
그러자 전국에서 이들의 딱한 사정을 알고서 전국적으로 지원과 지지가 잇따르자, 부담을 느낀 일제는 구속자를 석방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소작료 조정 약정서가 교환되었고, 쟁의는 소작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 해양문화재 전시관
일제의 경제침탈과 식민지 수탈정책,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수탈
일제는 조선의 경제구조를 일제의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고, 한국의 식량과 원료를 수탈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일제의 목표는 이 과정에서 토지 조사사업, 임야 조사사업을 실시하고, 회사령, 삼림령, 어업령, 광업령을 공포하였다.
1. 토지 조사사업(1912~1918) : 토지의 소유권, 토지가격, 지형 및 용도를 조사하는 것임.
총독부는 당사자가 소유권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소유권을 인정, 대한제국 정부 소유지와 황실 소유지, 미신고 토지 및 소유 관계가 불분명한 토지 등은 강제로 빼앗았고, 또, 지주의 권리만 일방적으로 인정하고 농민이 오랫동안 누려왔던 관습적인 경작권을 부정하였다. 그 결과, 농민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총독부는 토지가격을 높이 책정하여 토지세를 더 많이 거두어들였다.
2. 회사령 공포 : 회사 설립 및 해산할 때에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함으로써 한국인의 기업 활동과 자본 축적을 억제하고, 산업구조를 일제의 의도에 맞추어 재편하였다.
1910년대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빠르게 성장하던 일본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그러자 일제는 식량과 공업 원료를 한국에서 값싸게 공급받고, 일본 기업의 한국 침투를 돕기 위한 조치를 잇따라 시행하였다.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은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수리 시설의 확대와 품종 교체, 화학 비료 사용 증가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의 지주는 다소 이익을 보기도 했지만, 소작농은 수리 조합비나 비료 대금을 비롯한 각종 비용 부담이 늘어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자작농이나 소작농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화전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늘어난 생산량보다 더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1920년에 일제가 회사 설립을 신고제로 바꾼 이후, 면방직이나 식료품 공업, 광업 분야에 일본 자본의 침투가 늘어나면서 노동자의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일제는 일본 자본의 높은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인 노동자의 탄압을 일삼았는데, 한국인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민족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