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날 떡국 / 정연복
설날 아침 맛있는 / 떡국 한 그릇을 먹으며, 덩달아 나이도 / 한 살 더 먹는다. 나무로 치자면 나이테 / 한 줄이 더 그어지는 셈이다.
그래, 올해부터는 / 한 그루 나무처럼 살자. 하루하루 전혀 / 조급함 없이 살면서도, 철 따라 꽃을 피우고 /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이,
나이가 들어간다고 / 겁먹거나 허둥대지 말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 좋은 사람 쪽으로 변화하면서 내가 먹은 나이에 어울리는 / 모양으로 살도록 하자. |
경기도 남서부에 있는 화성시는 서해에 접하며 남양만·아산만·군자만 등을 이룬다.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간석지가 펼쳐져 있으며, 수도권의 인구 유입 및 공장의 확산과 시내 개발사업 추진으로 일부 지역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김포시·평택시와 더불어 경기도의 곡창지대이다. 인구는 약 60만명이다.
군자·남양·분양의 세 만을 끼고 있는 화성시의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여 간척·염전·수산양식에 적합한 지형이며, 분양만에는 남양만 방조제가 건설되어 거대한 담수호인 남양호가 생겨났다.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의 진산인 화산(花山)으로 옮겼으며, 1794년부터 수원성 축성을 시작하여 2년후 성을 완공했다. 수원은 새로운 성곽도시로 변모했고, 오늘날까지도 옛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49년에는 수원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화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2001년 3월 21일 화성시로 승격되었다.
□ 용주사(龍珠寺)
화성시 송산동에 있는 아담한 화산(華山) 자락에 용주사라는 절이 있다. 용주사는 국보가 여러 개 있는 오래된 절이기도 하지만, 정조의 효심이 깊이 묻어나는 특별한 사찰이기도 하다. 용주사 누리집에 방문하면 절 소개에 '효행 근본도량 용주사'라고 나와 있을 정도다. 그래서 흔히 효행 사찰이라고 부른다.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산 현릉원(현재 융릉)에 옮긴 뒤 아버지 넋을 기리며 무덤을 돌볼 사찰로 용주사를 지었다. 용주사는 숭유억불 정책을 내세운 조선시대에 오대산 상원사와 함께 명실상부한 왕실의 원찰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용주사를 지을 당시 주변을 둘러보니 무덤 가까운 곳에 신라 문성왕 때 지었다는 갈양사(葛陽寺)가 병자호란 때 불타 터만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이곳에 용주사를 짓는다.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되었는데, 낙성식 전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이제야 한을 풀고 승천한 것이라고 믿고 '용주사'란 이름을 직접 지어 내린다.정조의 효심으로 다시 태어난 용주사에는 범종(고려 때 제작됨)이 보물 제120호이며, 김홍도가 그린 탱화와 '부모은중경'은 경기도 유형문화재(제17호)로 지정되었다. 정조가 심었다는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나무다. 대웅보전은 보물 1942호로 지정됐다. 왕릉이나 향교에서 볼 수 있는 붉은 홍살문도 절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홍살문은 경의를 표하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인 용주사는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위패를 모신 능침사찰이며, 제사 물자를 준비하기 위한 조포사(造泡寺) 역할도 했다. 능침사찰은 왕과 왕비의 능침을 수호하고 명복을 비는 사찰을 말하고, 조포사는 능(陵)이나 원(園)에 딸려서 제사 물자를 조달하는 절을 일컫는다. 또한 왕의 위패를 모신 절이기 때문에 홍살문이 세워졌다.
□ 조선왕릉(융릉 · 건릉)
화성시 효행로에 위치한 조선 왕릉으로 융릉과 건릉이 있다.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의 효성을 엿볼 수 있는 왕릉으로 사도세자의 능이 융릉이며, 정조임금의 능이 건릉이다. 1789년(정조 13년) 현재 위치로 사도세자를 옮겨 모시고 현릉원(顯隆園)이라 불렀고, 순조 16년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를 현릉원에 합장하였으며, 고종 때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1800년(순조 즉위년) 정조가 승하하자, 현릉원의 서쪽에 건릉을 세우고, 그후 정조비인 효의왕후를 합장하여 모시고 건릉이라 하였다.모든 조선왕릉은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었다.
매화 향기 가득한 갯벌이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었던 매향리가 죽음의 땅으로 바뀌게 된 것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한미행정협정에 따라 ‘매향리 미 공군 사격장이 생기면서 부터다.
그 후 1954년부터 미군 주둔이 시작되었고 1958년에 농섬을 중심으로 사격장이 형성되었다.
매향리 인근에는 사격장이 형성되어 2005년 폐쇄되기까지 미군 항공기 및 육.해군 등이 실탄과 연습탄을 사용한 폭격 및 사격훈련장으로 이용해 왔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연간 약 250일에 걸쳐 훈련이 실시되고 일일 평균 11.5시간 동안 15~30분 간격으로 행해졌으며 사격 횟수만도 1일 600회를 넘겼다. 그 뿐만 아니라 야간에도 훈련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훈련이 없는 주말에만 농지에 나가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나가 일을 했다.
713가구 4000여 명에 달하는 인근 주민들은 한여름 폭염에도 굉음으로 인해 창문을 열 수 없었고 잠마저도 편히 잘 수 없었다. 폭격기 오폭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과 폭발 여파 주택파괴 소음에 의한 난청 현상 등 많은 피해를 겪으면서도 어디다 큰 소리로 하소연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이러한 피해를 견디다 못한 주민들은 1988년부터 소음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수차례 사격장 점거농성을 벌이면서 국회와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 하는 등 끈질기게 투쟁한 결과, 2000년 농섬을 제외한 육상 기총 사격이 중단되었고 그 후 매향리 주민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2004년 대법원이 원고 승소확정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2005년 미군 사격장으로 사용되어 오던 매향리 사격장은 54년 만에 완전히 폐쇄되었다.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전투기에서 쏟아 부었던 포탄과 탄피가 가득한 죽음의 땅에서 지난 역사의 아픔과 고통을 딛고 마을은 평화 생태 레저공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지자체와 주민이 복원에 나서고 있다. 폭격장에 투하된 포탄으로 조각가들이 평화조각을 만들어 기증 전시도 하며 매년 음악으로 위로하고 예술로 치유하는 매향리 평화예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화성시 향남면의 제암리는 3.1독립운동 당시 전체 33가구 가운데 2가구를 제외 하고는 순흥 안(安)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었으며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3.1독립운동을 계기로 불어 닥친 일제의 잔악한 탄압의 회오리바람은 이곳을 '죽음의 마을'로 바꾸어 놓았다.주민은 거의 전부가 천도교와 감리교 신자였는데, 동학혁명 운동 이전에 이 지역에 동학이 포교되어 천도교 신자가 많았고, 감리교는 1905년 선교사 H.G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아 입교한 안종후에 의하여 들어 왔다고 한다. 개인 집인 초가집 교당이 제암리에 있었고 인근 지역을 합하여 15호의 신자 집이 있었다 한다. 그후 신자들의 증가로 1911년 교회가 마련되었다.
제암리 사건의 전모
1919년 3월 30일 발안 장날을 기해 수천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만세시위는 제암리의 기독교와 천도교 주민의 주도적 역할로 이루어졌고, 그후 지속적으로 야간 횃불시위로 이어졌다. 이처럼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가 3.1독립운동 당시 제암리에 살다가 발안으로 이사한 순사보(巡査補) 조희창에 의해 일본 경찰에 그대로 보고되어 3월 30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 3일 화수리, 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발안은 주요 경계대상 지역으로 지목되었고 이들의 검거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 제암리 사건이다.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인 중위 아리타(有田俊夫)는 부하 11명,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그리고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고있던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4월 15일 오후 제암리에 도착하여 주민들을 강제로 교회당 안으로 집합시킨 후 곧바로 밖에서 문을 닫아 걸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밖으로 빠져 나오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이어 일제 군경은 고주리로 가서 주모인사로 지목된 천도교인 가족 등 6명을 결박하여 총살 하였다.
(넋을 잃은 미망인들과 폐허가 된 제암리 마을 !)
화성시 남양성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지다, 1991년 10월 7일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지로 공식 선포된 곳이다.
남양 반도는 박해 시대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숨어 살면서 옹기를 구워 연명함으로써 인근에 백학, 홀연, 활초리 등 여러 공소들이 형성되었다. 남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하는데, 포구가 발달하여 해상으로 서해안의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등은 물론이고 중국과의 연락과 이동이 용이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 많은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찾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조선 시대 남양은 도호부(都護府, 종3품 아문)가 위치한 곳으로 지금의 남양 성모 성지 자리는 병인년 대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붙들려와 갖은 고문과 매질로 배교를 강요당하고, 배교하지 않을 경우 처형을 당했던 장소이다.
이곳 남양의 향토사가로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던 홍승길 씨와 황창호, 홍순환 씨 등 지역들의 구전에 의하면 이곳 성모 동산 일대는 ‘건넝골’로 불리었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외지로서 밤나무 등이 우거진 으슥한 곳이었고 약간의 전답이 있었으며, 신자들을 산 채로 생매장한 곳이라고 한다.《치명일기》와 《증언록》에는 남양의 순교자들로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덕골)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명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전하고 있지만, 여러 사실들로 미루어 남양에 일찍부터 신앙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남양 포졸들이 멀리 충청도에까지 가서 신자들을 붙잡아다 처형했던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분명 많은 신자들이 남양에서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남양 성지는 다른 성지들과는 달리 대부분 무명 순교자들로 구성된 치명터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가 1983년, 당시 남양 본당의 박지환 요한 신부에 의해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남양 본당 전 신자들은 기금 마련과 함께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였고, 특히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김남수 주교에게 남양 성지를 성모 성지로 개발하고자 하는 의지를 전하면서 이후 성지 개발은 전 교구민의 관심 아래 진행되었다.
□ 화성시의 이모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