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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물안개처럼 그리움이 떠오는 안성탐방 !
새벽녘 물안개 피어오르듯 누구나의 가슴속에 고향의 그리움을 떠올리게 만드는 곳이 안성이다. 한폭의
그림처럼 포근하게 어울리는 안성을 거닐다보면 뭉글뭉글 향수에 젖어드는 내 고향같은 안성 ! 지금의
안성시는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안성군이란 이름을 얻었다. 현재 인구는 약 20여만명이다.
□ 안성맞춤박물관
안성맞춤박물관은 '안성맞춤' 이라는 말로 유명한 안성유기, 그리고 안성의 농업 및 향토문화를 소개하고
자 건립한 시립박물관이다.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내 부지에 지난 2002년 건립하여 개관하였다. 유기는
일반적으로 “놋그릇”이나 “놋쇠로 만든 생활용구”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유기의 기원은 현재와 같은 구리
·주석의 합금이 사용된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조선시대 안성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지나가는 길목에 있었으며, 충청도와 연접해 그야말로 삼남지방의 물
산이 모였고, 서울로 가는 요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더불어 서해에서 죽산을 지나 강원도 지역까지 연결된
조선후기 안성시장길(安城市路)로 불리던 동서로 역시 16세기 초에 갖추어져 있었으니 당시 안성은 사통
팔달 교통의 요지였던 셈이다.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발달된 안성의 교통로를 기반으로 17세기경에는 전국적인 상권을 형성하며 안성장
이 발달했다. 이를 토대로 안성에는 유기를 비롯하여 수공업 또한 상당히 발달했으며, 안성은 조선중기
이래 유기의 명산지로 이름이 높아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안성맞춤박물관은 이와 같은 안성
지역 문화의 특성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 안성소리박물관
한국영화 3,500여 편을 녹음한 한국영화 녹음분야의 선구자로 후진 양성과 음향 및 녹음기술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경순(1921-2008)씨를 기리기 위해 후배 영화인들이 건립한 영화 소리박물관이다. 이곳 소리박물관에는 녹음기, 편집기, 영사기, 각종대본, 포스터, 등 영화관련 기자재와, 상장, 트로피
그리고 이경순 선생의 유품을 비롯 국내 영화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품2,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품으로는 국내외 각종 영화제에서 영화상을 휩쓴 신상옥 감독의 1964년작 빨간마후라 제작에 사용
했던 35mm스텐드형 영사기 등 우리나라 영화 발전의 현장을 함께한 크고 작은 영사기들이 전시되어 있으
며, 우리나라 영화발전 및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포스타 등 다양한 영화자료를 볼 수 있어 관람객
들을 과거 추억 속으로 이끌고 있는 곳이다.
□ 조병화문학관
편운 조병화(1921-2003)시인의 문학을 기리기 위한 조병화문학관은 안성의 지역 주민들에게 문학적 환경
을 마련하기 위해 1990년 조병화 시인이 대지를 제공하고 국고의 지원을 받아 1993년 건축하였다. 이곳은
한양(漢陽) 조(趙)씨의 집성촌으로, 문학관은 작가가 살던 고향집이었다.
문학관에는 편운재와 청와헌이 있는데, 편운재는 조병화 시인의 어머니 가 별세하자 어머니의 묘소 옆에
세운 작은 서실이며, 청와헌은 1986년 조병화 시인이 인하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정년퇴임하고 이듬해 완
공해서 입주한 시골집으로, 들판가의 집이어서 ‘개구리 소리를 듣는다.’하여 청와헌이라 이름하고, 가끔씩
집필 또는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이곳은 조병화시인의 주요 작품들과 소장품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는 1921년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서
울중고등학교 재직 시절인 1949년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시작으로 53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이외
에도 그는 선시집 28권, 시론집 5권, 수필집 37권, 번역서 2권, 시 이론서 3권, 화집 5권 등 총 160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고 한다.
그의 다작과 다산의 비결은 쉬운 낭만의 언어로 넓은 독자와 대화를 이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소월의
서정시가 두메산골을 노래했다면, 조시인은 외로운 도시인의 고독을 구가했다. 수학교사와 교수를 하면서
도 학생들에게 시(詩)를 열강하기도 했고, 경성사범학교 시절에는 럭비선수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림도 자
주 그려 유화전만 8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전시실에는 창작 시집 53권이 전시되었으며, 럭비선수 시절의 유품 및 그림을 그리는 화구
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자화상을 비롯해, 여러 편의 대표작들이 스스로 그린 그림과 함께 벽에 빼곡히
걸려 있었다. 중앙 유리전시관에는 평소 애용하였던 담배 빨부리(마도로스 파이프), 감사장 및 패, 훈장,
한국예술원회장 직함 패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시인 조병화의 삶과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문학관과 묘막, 서재, 시비 등을 한곳에 지어 시인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관람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 석남사
안성시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서운산 동쪽 기슭에 있는 석남사는 조그마한 사찰이지만, 절 입구에서 대웅전까지
오르는 돌계단의 경관이 볼 만하다. 신라 문무왕 20년에 고승 담화덕사가 창건했으며 이후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크
게 중건하는 등 이름 높은 스님들이 석남사를 거쳐갔던 역사깊은 사찰이다.
경내에는 16나한이 모셔진 영산전을 비롯해 대웅전, 마애석불, 석탑, 부도 등 유적들이 있다. 대웅전 바로 아래 학
이 나는 듯한 팔작지붕집이 영산전과 조화를 이루며, 옹기종기 터를 다스린 석남사 경내는 서운산의 풍취에 푹 빠져
들게 하는 매력이 풍겨난다.또 하나 석남사는 드라마를 통해 아름다운 한국의 사찰로 국내외에 널리 소개된 사찰이
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드라마 ‘도깨비’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면서 불자와 일반 시민은 물론 중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안성시는 올해 ‘2월
관광자원 명소’ 석남사를 추천하기도 했다. 때문에 석남사는 도깨비 외에도 SBS ‘뿌리깊은 나무’, MBC 드라마
‘오로라 공주’, KBS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물론 영화 ‘패션왕’ 등 방송과 영화 관계자들이 섭외사찰 1순위로 꼽는 도량이다.
더불어 최근 전국에서 찾고 있는 참배객은 물론 일반인, 외국인 관광객의 방문이 급증하는 등드라마 인기를 실감
하고 있어 종교를 초월해 국내외에 불교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문화포교의 사찰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 서일농원
안성에서 가볼만 한 곳 중의 하나가 서일농원이다. 1983년 부터 자리한 서일농원은 3만평 규모이며 2천여
개의 옹기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다. 전통장류(된장)생산농원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에
서는 장의 원료인 콩과 고추를 재배하는 밭이 있으며 전통 장의 맥을 잇고 연구 개발을 하는 곳이다. 장류
연구소, 황토발효숙성실, 저온보관시설동, 제품생산동 등이 있다. 전통음식 시식점 솔里는 소나무의 다른
우리 말 "솔"과 마을을 의미하는 한자 "里"를 모아 "솔里"라고 이름을 하였다. 서일농원에서 만드는 모든
제품을 직접 시식할 수 있는 전통음식점이다. 된장 만드는 농원인 만큼 햇볕이 잘 드는 깔끔한 농원이다.
또한 콩과 고추를 심는 밭, 배과수원, 매실원 등 30분 정도 산책을 즐길 만큼 아담하게 가꿔져 있다. 주인
서분례 명인의 야무진 솜씨가 베어있는 조경은 잔디와 배나무, 매실나무, 소나무가 어우려져 운치가 좋다.
볕 잘 드는 곳에 삐뚤어짐없이 늘어서 있는 2,000여개의 장독대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풍경이다. 산책로
를 거닐다 잠시 쉴 수 있도록 정자를 마련하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된장 농원으로 유명한 이곳을 견학이나 관람을 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하루 300 ~ 400명 정도이다. 식
품을 배우는 학생, 발효식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 가정주부, 나들이 가족들이 많다. 나들이로 나선 가족들
은 제대로 된 장맛도 보고 아이들에게는 우리 음식도 알려주고 싶어 찾아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서일농원의 맛깔스러움을 누릴 수 있는 전통음식시식점인 '솔리' 에서는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의 옛 맛을
느낄수 있다. 구수한 청국장과 된장찌개를 중심으로
더덕, 가죽, 깻잎, 감, 달래, 미역, 무말랭이, 무, 파래 등의 장아찌와 쌈을 싸먹을수 있는 고추장, 쌈장과 싱
싱한 야채를 마련하여 소박하고 정갈한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수 있도록 하고 있다.
□ 남사당 바우덕이(김덕암)
남사당 바우덕이 김덕암은 1848년(헌종 14)∼1870년(고종 7). 조선후기의 남사당패이다. 바우덕이는 열 다
섯 살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여자로써 남사당패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끌던 천재 예
인이었다.1848년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1853년에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남사당
패에 맡겨져 줄타기, 살판 등의 남사당 놀이를 익히게 된다. 바우덕이가 15세 되던해 에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연로하여 새로운 꼭두쇠를 선출할 때 바우덕이가 어린 나이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고 한다.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는 전국적으로 그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지친 노역자를 위로하기 위해 남사당패를 불러서 공연을 펼쳤는데 그 때 뛰
어난 공연으로 고종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받는다. 바우덕이는 이후에도
전국을 돌면서 남사당을 대중공연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폐
병을 얻어 1870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 무덤이 있다.(출처 한국학
중앙연구원)
안성바우덕이축제는 우리나라 전통문화인 남사당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축제인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광대라 할 수 있는 바우덕이라는 인물을 추모하고 기리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는 축제이다.
2006년 유네스코 공식자문협력기구인 CIOFF?의 공식축제로 지정, 우리나라 전통을 소재로 한 가장 한국
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잡고 있다.
□ 안성의 역사인물
박서(朴犀, 고려시대,?~?)
제1차 몽고의 침입시 서북면 병마사로 재임중이었다. 적장 살리타는 철주를 함락하고 귀주에 육박하여 왔
다. 장군은 귀주성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몽고군은 성을 포위하고 30여 일동안 파상적인 공격을 펼쳤
으나 장군은 기지를 발휘하여 대응함으로써 귀주성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몽고는 고려의 통사 지의심
과 학록 강우창을 보내어 회안공 정(廷)의 첩(堞)으로써 항복하기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박서는 이러한 권
유를 듣지 않고 성을 더욱 견고하게 수리하면서 항전하였다. 고종 19년(1232)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몽고군의 철수가 단행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감찰어사 민희와 후군지병마사. 우간의대부 최임수를 귀주
성에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하자 장군은 왕명을 어길 수 없어 마침내 항복하였다.
이후 몽고사신은 장군이 귀주성을 고수하고 항복하지 않음을 문책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최이(崔
怡)는 "경이 국가에서는 충절이 비할 데 없으나 몽고의 말도 또한 두려운 것이니 경이 알아서 할 지어다"
라고 난처한 고려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장군은 고향의 향리로 돌아와 일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이숙번(李叔蕃, 조선시대,1373~1440)
문신으로 본관은 안성, 자는 백응(佰膺), 호는 운정(藝亭)이다. 태조 2년(1393) 춘장방에서 10등으로 급제
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태조 7년(1398)지안산군사로 재직할 때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사공신 2등
에 안성군으로 봉해졌고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좌명공신 1등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을 내세워
방자한 행동을 일삼으므로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태종13년(1413) 병조판서에 제수되고 이듬해
찬성, 태종 15년(1415)에는 안성부원으로 제수 받았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
다. 묘는 시흥군 수암면 산현리 (현 시흥시산현동)에 있다.
홍계남(洪季男, 조선시대,1564~1597)
무신이며 의병장으로 본관은 남양이다. 우찬성 자수의 아들로 서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단정하고 위용과 용력이 뛰어나 무술에도 특출하였고 높은 것을 뛰어 넘는 재주가 있어
홍나비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변사 이일의 휘하로 상주에서 신립장군과 합세
하여 충주탄금대에서 혈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규합하여 목촌에서 성을 쌓고 왜군
과 대치하였다. 죽주성에서 적군은 그를 사로잡고자 부친의 시신을 성 밖에 달아 놓고 유인작전을 펼쳤다.
그는 적을 처단하고 부친의 시신을 무사하게 가져와 진중에 안치시켰다. 이같은 공으로 장군은 당상관으
로 특진되었고 수원판관겸 기호양도조방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절충장군 칭호를 하사받았다. 선조 29년 이
몽학이 난을 일으켜 홍계남이 자기 편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하옥되어 많은 고초를 당했으나 무고
함이 밝혀져 석방.복직되었다. 이듬해 34세를 일기로 영천에서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부음을 듣고 처자
와 노모의 부양을 적극지원하도록 하는 한편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그리고 그의 충효를 널리 후세에 전하
고자 <삼강행실도>에 속기토록 했다.
□ 또 하나의 고찰 “칠장사”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636)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 수도하고 입적한 고려 때
고승 혜소국사가 현종 5년(1014)에 크게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칠장사의 묘미는 오랜 세월에 빛 바랜
단청이 고색창연한 대웅전을 찬찬히 굽어보는 것이다. 새것을 덧씌우는 것만이 아름다움의 전부가 아니라
는 사실을 칠장사 대웅전이 말해준다. 오랜 풍상을 겪은 대웅전은 단청 문양을 세월에 날려 보냈지만 힘있
게 뻗은 추녀에서 힘찬 자태를 느낄 수 있다. 대웅전의 기풍을 눈여겨 보고 있으면 칠장사의 오랜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것 같아 자연스레 칠장사에 얽힌 이야기에 귀를 열게 된다.
① 소국사비(慧炤國師碑) 설화 : 임진왜란 때 적장인 가토(加藤淸正)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
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크게 꾸짖자,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빼서 베니 홀연히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
라지면서 피를 흘렸으므로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쳤다고 한다.
② 벽초 홍명희의 역사 소설 ‘임꺽정’의 일곱 도적과 병해스님 이야기의 배경
칠장사에서 열반하신 '여인천하' 드라마의 갓바치스님(병해대사)과 제자인 임꺽정이야기의 발원지이며,
천민으로 등용될수 없는 사회제도를 바꾸려 했던 두 사람의 실화 이야기 발원지이다.
③ 궁예가 13세까지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활연습을 한 활터가 남아있고, 어사 박문수가 이 절에
서 기도를 드리고 장원급제를 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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