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사령관 부장 이 성 덕
구세군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는 해의 감회와 감격을 어떻게 표현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한 세기를 함께 살며 헌신한 선후배 동역자들과 군우들에게 벅찬 희망과 용기를 안겨줄 수 있을지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구세군의 한국선교 초기는 한일합방의 경술국치로 나라 안의 정세가 풍전등화와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한일의정서(1904년2월)를 체결하고 을사보호조약(1906년) 한일신협약(1907년7월)등 차례로 체결하며 식민지화 계략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때에 이준열사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 회의에서 한국대표로 입장하는 것을 거부당하고 1907년7월14일 장렬하게 순국하였으며 1907년7월20일 고종황제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 당하였으며 구한국군은 해체되었다. 그 후 1910년8월18일 대한제국 각의에서 합방조약을 통과 하므로 조선왕조 건국 27대 519년, 대한제국 국호제정 18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해 창립자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는 1907년도 구세군 일본군국을 방문하여 구세군인대회를 인도하였다. 그 다음 해 1908년7월 런던의 크리스탈 팰리스(crystal palace)에서 열린 구세군 창립 43주년 기념대회에서 한일 관계와 헤이그에서의 만국평화회의 한국대표 입장을 주장한 영국 대표단의 주장에 대하여 알았을 창립자는 허가두(Robert Hoggard)를 한국 개척사관으로 임명 하였다.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은 1895년도에 기독교의 총 교인수가 530명이었다. 5년이 지난 1900년도에는 7,690명으로 증가 하였다. 그 후 교회는 한일합방의 민족적인 수난 중에도 부흥하고 성숙하여 1905년부터 1907년까지 기독교 대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교회들이 신 개척 되고 신축되었다. 그러나 1907년도를 전후하여 일제는 새로운 법(광무신문지법)을 제정하고 각종 문서운동과 계몽활동을 탄압하였으며 교회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불순분자들의 집단으로 지목하여 탄압하였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도 1905년부터 장로교와 감리교가 선교구역을 분할하여 원산 북부 함경도는 캐나다장로교가, 그 이남은 미,남감리교가 선교를 담당하고 서울의 남부 경기도와 충북은 미,북장로교가 맡고 충남은 미,북감리교가, 전라도는 미,남장로교, 경북은 미,북장로교가 각각 맡게 되었다. 그 외의 안식교는 1904년도, 침례교는 1906년, 성결교는 1907년에 각각 한국선교를 개시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위긴스(Arch R Wiggins)가 저술한 <세계구세군역사>에 의하면 창립자는 일본을 방문한 1907년 봄 일본 구세군대회에서 흰옷을 입은 조선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후 한국선교를 위해 수행중인 조지 레일톤(George Scott Railton)부장을 존 롤리(John Lawley)정령과 함께 한국선교답사를 하게 했었다고 하였다.
이듬해 한국선교 개척사관으로 임명 받은 허가두(Robert Hoggard)정령 동부인은 1908년8월18일 증기선 “자이텐 호”(The S,S, Ziethen)를 타고 그 해 10월1일 한국에 도착하였고 다른 일행은 10월15일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 함께 온 일행은 본 윅(Bonwick)참령 동부인을 포함하여 사관 5명과 여병사 1명 외 허가두 정령의 자녀 3명 본 윅 참령의 딸 2명 허가두 정령 동부인 까지 총 13명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혈화기를 날리게 되었다.
45일간의 항해를 한 후 한국에 도착한 허가두 정령은 종로구 평동에 여장을 풀고 1908년10월11일 첫 집회를 열었다. 참석인원은 분명한 기록이 없으나 회개인이 6명이었다. 그 다음 주일 11월18일에는 3번의 집회에서 참석자가 남자 120명 여자 12명이며 회개인은 남자 23명 여자 1명이었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그 후 1908년11월11일(수) 야주개(현 종로구 당주동) 첫 번째 영문을 개영 할 것을 결정하고 400여명이 회집할 수 있는 회관을 계약하여 그달 22일(주일)에 경성(서울)제일영문을 개영 하였다. 이렇게 개전의 포문을 열고 동년 12월9일(수)서울 제2영을 광통교(종로구 서린동31의 청계천 둘째 다리)인근에 개영 하였다. 그러나 8개월 만에 영문을 닫게 되었다. 허가두 정령과 개척자들은 가로전도를 비롯하여 다방면으로 열심히 노력 하였으나 당시 교계 상황이 선교구역 분할로 기득권이 강화되어 수도권은 물론 각 지방으로 확장하기는 쉽지 않았다. 주왕산 끝자락 청송진보를 비롯하여 소백산의 오지 충북영동, 개마고원의 오지 신,구 고산 원산으로 가는 오지의 김화 복계, 검불랑, 평강, 공주군의 유구 등 두메산골에서의 선교가 고작이었다.
허가두 정령은 선교지역을 확장하기 위해 비장한 결심을 하고 더 넓은 지역의 선교를 시도하게 된다. 1909년2월9일 충북 보은의 향교에서 12회의 집회를 인도하였으며 평양에 가서는 500여명이 모인 곳에서 전도하였고 장대현 교회에서는 2000명이 모인 예배에서 설교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그 후 제물포에서 배편으로 충남서산의 지곡 항(일명 벌말이라고도 함)에 입항하여 태안, 해미, 홍주(홍성) 갈산, 광천, 강경 군산, 광주, 목포, 부산 등 각지를 순방하며 선교지를 답사하고 선교 하였다. 1909년3월27일 밀턴(Milton)기관은 1개월간 대천, 은진, 서산, 군산, 대구 지역을 답사 하였고 그 해 5월10일에는 본 윅 (Bonwick)참령과 밀턴(Milton)기관이 4일간 전도여행을 하였다. 그 후 6월10일에는 밀턴(Milton)기관 단독으로 1개월간 충청남도를 순방 하였다.
허가두 정령은 1908년부터 그가 이임하는 1916년6월28일까지 8년 동안에 사관 87명을 임명하고 영문78개소를 개척 하였으며 신도2,753명을 확보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재임 중 사관 양성을 위하여 1910년2월15일 성경대학을 개교하여 1912년 구세군사관학교로 개칭 하였고 그 후 1928년9월13일 정동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1985년11월28일에는 현 과천교사를 신축 봉헌하고 이전하였다. 구세공보는 1909년7월1일 창간하여 1915년8월호는 5000부를 발행하여 전국에 보급하였다. 1915년7월18일에는 당시 서대문정 1정목58번지(현 신문로 구세군회관빌딩)의 790평을 매입하여 연건평 184.5평을 신축하여 동년 9월15일(수) 헌당하고 2층은 본영사무실로 사용하였으며 1층은 서울제일영문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1916년5월1일에는 “영국부흥전도단“소속 페리(Perry)양과 내시(Nash)양이 영국총영사의 입회하에 죽첨 정 3의 58(현 서대문구 충정로 3가 58의 100주년 기념빌딩 신축 부지)의 659평과 건물을 구세군에 헌납하였다. 그 곳에 헌납자의 뜻을 따라 혜천원(여아보육원)을 개설하고 연합집회와 재경사관친교를 위해 사용하였으며 동년 7월 17일에는 아현영문을 개영 하였다.
개전사령관 허가두 정령이 이임한 후 제2대 사령관으로 부래 지(George French)정령이 1916년6월30일부로 부임하였고 전국 각지의 지방과 영문들은 차질 없이 사역을 시행하였으며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의 난민을 구제하는 일도 하였으며 1918년10월10-17일까지 열린 기념행사의 집회에는 1천여 명 이상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1918년12월30일에는 정자옥(미도파) 일본인 “고바야시 겐 로꾸” 사장이 3,000원을 구세군에 기부하여 보육사업(서울후생학원)을 시작하게 되었고 1919년3월1일 독립운동 당시에 서울에서의 구세군인 수감자가 10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각 지방에서도 많은 참가자들이 있었고 부상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전국 각 영문에서는 하사관들의 활약도 대단했다고 한다. 경성제1영(현 서울,1908,11,22개영)의 조중길, 유병태, 서교원, 성흥원 정교. 대흥영(1908,8,25개영)의 김 영근 정교. 오천영문(1909,5,19,개영)의 이구영 정교. 각계영(1912,2,14,개영)의 김희주 정교. 진주영(1912,3,5개영)의 전성채정교. 태안영(1912,7,2,개영)의 유응조 정교. 도당영(현 음암,1913,11,7,개영)의 박창록 정교. 노매실영(1913,3,19,개영)의 강대진 정교. 경주영(1916,4,10,개영)의 최봉희 정교. 송리영(1917,11,14,개영)의 채동수, 손경두 정교. 외 수많은 군우들의 헌신적인 사역으로 성장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부래지 정령은 재임기간 중 독립운동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된 사회적 혼란기 였으나 서울 제3영(저동, 현 연희영)을 개척하는 등 전국 각지에 20여개 영문을 신설 하였고 전주 풍남리에 2,449평의 지방본영 부지를 매입 하는 등 헌신적인 사역을 하고 1919년11월, 미 서군국으로 전임 되었다.
1920년5월10일 “신태빈”(William Steven)참장 동부인이 제3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3월에 금주호 20,000부를 발행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본격적인 절제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 5월에는 홍성에 구세약방을 개설하고 뉴질랜드에서 의료계 종사자였던 배덕신 부관을 임명하여 월 4,5백 명의 환자를 도왔다. 그 해 12월에는 원산으로 몰려온 러시아혁명의 난민 8천여 명을 위하여 구세군사관 쿠퍼 부관과 위일빈 부관을 임명하여 봉사하였다.
그 후 신태빈 참장은 1924년4월3일 북경을 거쳐서 영국으로 돌아가서 국제본영 외무서기관으로 부임 하였다. 재임 중에 개척한 영문 중 부산영(20년) 광주영(21년) 홍성영(21년) 신흥영(23년)은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24년4월9일 배일수(Wiebe Palstra)참장이 제4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40여년간 봉직한 노장이었다. 신임 사령관의 지방 순회 시에 영동에서는 군수 경찰서장 각 학교장 등 지방 유지들이 총동원되었고 심천영 방문 시에는 육병세 면장이 환영하였으며 낙평영문에서는 지방사관을 포함하여 300여명이 모였다. 전주에서도 도지사 초청 다과회가 있었으며 동년 6월9일에는 서울 장충공원에서 구세군인 운동회가 열렸다. 그 해 11월8일에는 서울공회당에서 자선음악회를 개최되어 배일수 사령관의 사회로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와 윤심덕양의 독창이 있었으며 일본인 단소합주도 있었다. 12월26일에는 서대문정 1정목에 “빈민구제소”를 개설하고 146명을 수용하였으며 서울 1,2,3영에서 1,000여명에게 국밥을 제공했고 대구에서도 200여명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구세군 창립 당시의 특색 있는 사역이 한국선교에도 차츰 정착되어갔다.
1925년 5월에는 박묘득, 권영호, 허영, 세 명의 사관이 처음으로 만국사관학교의 교육에 참가하였으며 2월21일에는 재조선(대한) 구세군유지재단이 등기 되었다. 5월16일에는 홍성의 구세약방을 신축하여 봉헌하였고 배덕신사관의 헌신적인 봉사로 매월 4,5백 명의 환자를 치료하므로 농촌지역의 의료선교가 정착 되었다.
1925년 10월 31일부터 11월3일까지 열린 군국총회에서는 해주지방에서 사용할 전도마차를 전달하였고 천연동에 신축한 여성실업관(현 여자관)을 봉헌하였다.
1925년12월15일에는 정동에 뿌람웰 뿌드의 칠순기념관을 건축하기 위한 모금을 위해 한국사관 김동수, 신순일 부관과 유장순, 유경덕 부위 김일영, 박동식 학생(후생학원)을 허일 원장 내외가 인솔하여 출국하였으며 캐나다와 미국을 6개월간 114도시를 순방하며 집회를 인도하였고 연 회집인수는 157만660명이며 회개인이 269명이었고 한국선교 후원자는 31명이었으며 이듬해 6월 9일 귀국하였다. 정동의 사관학교 건축비 총액은 70,000원이었다.
1926년 8월16일(수)에는 두영서(James Toft)정령이 제5대 한국사령관으로 부임 하였고 동년11월 4일에는 구세군 제2대 대장 부람 웰 부스(Bramwell Booth)가 총회 인도 차 내한하였다. 이때에 26분규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총회 시에 20개 항의 진정서(요지는 1.본영의 재정운영 투명성 요청 2.선교사관과 한인사관 차별대우 페지, 3.한국인 사관의 정책 의결권 보장, 4.도덕성 정화 요망, 5.선교사관들의 생활태도 개선 요청 등이었다.) 여러 차례 진정서를 대장에게 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후 진정서를 영문으로 다시 번역하여 우편으로 보냈다 고 한다.
이와 같은 분규로 인하여 사관 44명이 면직되고 사관학생 28명이 퇴학조치 되어 1936년 11월 14일자 조선일보에는 70여명의 사관이 면직된 것으로 보도 되었다. 그 후 서기장관 트윌리(Twilley)부정령은 전근 되고 지방장관 솔스베리(Salisbury)참모 정위는 부관으로 강등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 후 표면적으로는 진정된 것 같았으나 발전성장에는 큰 차질이 생겼다.
사령관 두영서 참장은 한국에 부임한지 2개월 만에 군국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경황 중에 분규사태를 맞게 되었고 그 후 어수선해진 군국을 수습하고 국제관계를 고심 하다가 1928년 6월 15일에 심장이상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승천하게 되었다.
1926년 11월의 분규는 단순한 소요사건으로 보기보다는 구세군의 해외선교가 선교지 상황에 보다 실제적으로 적응하고 토착화해야 할 필요성을 확인한 긍정적인 측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 생각한다. 비싼 대가를 치루었으나 미래지향적인 결단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정리해 본다.
1928년 9월 22일 제6대 사령관으로 박준섭(Joseph Barr)정령이 부임 하였다. 그 달 27일에는 부람 웰 부스 7순 기념관으로 신축한 정동의 사관학교(연815.5평)를 봉헌개관 하였다. 12월에는 한국 최초의 자선냄비 모금이 시작되어 15일부터 31일까지 848.67원을 모금하였다.
1930년 1월부터 박준섭 정령 부인이 가정단을 조직하여(세계 가정단은 1907,1,28,창설)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발족되었다. 그 해 2월에는 영세가정의 자녀와 학령 초과자들의 단기교육을 위한 간이학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한때는 전국에 40여개 학교가 있었다. 대흥영문의 간이학교는 학생수가 200여명 이상 이었다 고 한다.
1931년 1월 17일부터 3월 3일까지는 특별구령대전을 전개하였다. 1월 7일부터 시작된 영동지방 연합 전도대는 광평,신흥,정산리,공평,영동,심천,양정,주곡영문을 순회하며 21일간 연속집회를 하였고 회개인 78인을 얻고 2개 영문을 신설했다. 1935년 10월 1일부터 다음 해 연말까지 국제 구세군은 100만명 구령대전을 전개 하였으며 우리 군국에서도 1만 명 구령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준섭 사령관은 부인이 승천한 1934년도부터 구세군 영동병원 설립을 계획 하여 추진하고 있을 때 맵 참모총장의 방한 시에 박창래 참령의 주선으로 홍명희 영동읍장, 이해용 영동군수 손재하 도의원의 협조로 영동읍의 한 지방민이 1만여평의 병원 부지를 기부하였다.
1935년 5월 6일 박준섭 사령관은 7년여의 한국사역을 마치고 영동병원부지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끝으로 한국을 떠나 캐나다군국으로 전임되어 그 곳에서 은퇴 하였다. 그 해 10월 8일 위 일선의 인도로 영동병원 기공식을 거행 하였다. 당시 충북도지사 김동훈 지사의 축사가 있었다.
1936년 5월 14일(목) 위 일선(Tomas W, Wilson)정령이 제7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위 일선 정령은 21년간 일본에서 사역한 사관이었다. 부임하던 해 11월 15일 일본을 드나드는 여객을 위한 “여객지우”(여객의 벗)을 개설하여 여객안내 및 보호와 각종 편의를 제공하였다. 1936년 2월 1일자로 구세군의 계급명칭을 구한국군의 참위,부위,정위,부관,참령,부령,정령보,정령,참장,부장을 당시 일본 구세군의 계급명칭과 같이 소위,중위,대위,중교,소좌,중좌,대좌,소장,중장,대장으로 정교는 조장, 부교는 군조로 계급명칭을 변경하였다. 1937년도에는 영문을 소대로 담임사관은 소대장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1939년 10월 3일에는 황 종률 사관이 간첩혐의로 종로 서에 구금되었으나 많은 취조를 당한 후 무혐의로 석방 되었다. 그 후 일제의 한국교회 박해가 심해져서 성결교단이 해산 되었고 많은 교인이 구세군으로 출석하게 되었으나 구세군의 국제관계도 어려워지므로 사관들의 이직이 속출하였다.
1940년 9월 18일에는 일본의 구세군이 강압에 의하여 구세단 으로 개편, 개칭 되었다. 그 후 1940년 10월 16일에는 위일선 사령관이 일본을 방문하여 한국의 구세군 개편문제를 협의하였고 10월 29일에 구세단 으로 개편되고 황종률 정령보가 대표가 되고 사카모도 참령이 총무서기관이 되었으며 위일선 사령관은 자문역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위일선(Tomas Wilson)부장이 떠나기 전 히노하라(황 종률)를 구세단 대표로 사카모도 참령을 총무서기관으로 발표하는 10월29일자 공문을 보냈으나 훗날 확인한 결과 국제본영과는 무관한 일로 확인 되었다.
같은 해 12월 9일 2개월3일 만에 구세단장에 사카모도, 총무부장에 황 종률, 전도부장에 장운용, 청년부장에 이응목, 가정단 부장에 황종률 부인으로 각각 임명된 것으로 한국구세군사(장형일 저)에 기록되어있다.
그 후 위일선 참장은 1941년 2월 13일 서울을 떠났고 11월 14일에는 영동병원에 부임했던 이치선 박사 가족도 떠났으며 외국인 선교사 18명 전원이 떠났다.
1941년 12월에는 “구세신문“이 28권12호로 종간 되었으며 구세신문 폐간 후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이 공동으로 간행하는 ”기독교신문“이 1942년4월 29일자(8면)로 창간되었다.
1942년 4월 27일에는 영동읍 계산동에 건축(대지986평, 연건평 480평,3층)한 “구세군영동병원“(병상80석)을 개원하고 초대 원장으로 이용겸 박사를 취임 하였다. 그 해 9,014명을 진료하였으며 이듬해는 17,357명을 진료하였다. 의료진에는 전 세브란스병원장 임의선 박사와 고병간 박사도 있었다. 1942년 7월 1일에는 처음으로 사관 4명(3기생 허 곤, 8기생 장춘경, 9기생 이수종, 10기생 이인배 사관)이 은퇴하였다.
1943년 3월 22일에는 영동병원의 순회 진료반이 양강면에서 138명을 치료하였다. 그 다음달 4월의 하순 어느 날 초강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필자는 학교 운동장의 놀이터에서 일본인 아이 형제와 다투다가 심하게 다쳐서 생명의 위험으로 구세군영동병원에 입원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 어린이는 훗날 초강영문을 개척하신 박위선 부교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당시 영동병원 사무장은 제13대 사령관이셨던 전용섭 부장이었으며 양정영문 박정하 전도부인(LA영문 장후자 부교님의 모친)께서 병실을 방문 하였었다. 그 후 65년이 지난 오늘 전 사령관(제20대)으로 선교100주년 회고를 쓰게 된 감회는 남다른 느낌이다.
1943년 11월부터 구세단을 개편 된지 3년 만에 구세단교회로 호칭하게 되었으며 11월 25일에는 아현영문에서 장로교목사 채필근과 감리교목사 정춘수, 구세단의 사까모도 단장이 사관들을 교사(목사)로 안수 하였고 12월 2일에는 영동영문에서 사까모도 단장이 사관들을 교사로 안수하여 정교사로 임명받은 자가 황종률 외 33명이었다. 그 해에 성결교, 안식교, 동아기독교(침례)는 해산되었고 장로교, 감리교, 구세단 교회는 하나로 통합되어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하여 장로교의 김관식 교사(목사)는 통리가 되고 김응태교사(감리교)가 부통리가 되었으며 사가모도 단장(구세군)은 사회국장이 되었다.
1945년 구세단교회의 전국통계를 보면 개심자244명, 예비병436명, 병사102명, 가정단130명, 하사관 88명, 영학생 46명만 겨우 남았다.
일제에 의하여 구세군이 구세단이 되고 구세단교회가 되었다가 장, 감, 구,를 강제로 통합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전락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였으며 수많은 순교자들이 속출하는 수난의 역사를 통과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 하므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었을 때 구세단 교회에 남은 교사(사관)는 모두 54명이었다. 남은 자들이 총회를 소집하고 기독교조선 구세단교회의 교칙을 근거로 교단 명칭을 구세교회로 확인하고 교단 총리를 황종률, 부총리는 박창래,로 하였으며 교칙을 기안하여 통과한 후 교단 명칭을 기독교 조선 구세교회로 확정 하였다.
1946년 9월 14일 구세군 국제본영에서 전쟁 후의 태평양지역의 구세군을 복구하기 위하여 촬스 데이비슨 부령을 일본과 한국을 답사하던 중 구세군 한국 총회에 참석하여 전후사정과 실태를 살핀 후 국제본영에 귀임한 후 1946년10월 5일자로 황종률 정령보를 서기장관으로 참모총장이 추인하므로 구세군 한국 군국이 복구되었다.
그 후 1946년 10월 12일 서기장관 황종률 정령보의 명의로 박창래 참령을 중선지방관 겸 대전영문 담임사관으로 임명하므로 구세군이 정상 궤도를 찾게 되었다.
그 이듬해 1947년 2월 25일 허버트 로드(Herbert a, Lord)참장이 제8대 한국 사령관으로 부임 하므로 구세단 이전의 구세군으로 완전히 환원 되었다. 부임 후 로드 사령관은 선교사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과의 교분도 좋았었고 군정재판의 고문역을 맡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구세군재건에 힘썼다. 많은 사관이 복직하였고 복구와 발전을 위한 3년 계획을 세워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947년 10월에는 구세군사관학교를 재개하고 제31기생이 입학하였으며 1949년 5월 15일 폐간 되었던 구세신문을 복간 하였고 다음 달 6월 12일에는 교파연합으로 금주 단연 대회를 주도하여 참석자수가 5만이 넘었다 고 한다.
겨우 복구되어져가는 한국구세군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또다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로드 사령관은 28일 서울이 함락된 후 7월 1일 잔류 선교사들, 외교관들과 함께 평양으로 끌려갔다. 엄동에 걸어서 중강진 까지 도보로 강 행진 하였다 고 한다. 강 기모 참위는 오가에서 피살되고 서대문영 담임사관 김삼석 고등정위는 동년 8월 22일 영문에서 납북 되었으며 진주영 담임사관 노영수 고등참령은 9월 9일 공산군에게 순교 당하였고 김화영문의 유영복 정교가 패주하는 인민군에게 50년10월8일 순교하였다. 이듬해 3월 8일에는 부토리영 담임사관 김진하 참령이 납북 되었다.
1952년 1월에는 아현영문을 재개하였고 전란 중에도 전국 각 영문의 군우들은 신앙생활에 전념하여 영문을 신 개척 하는 등 전례 없는 열심을 보였다.
1953년 1월 9일 위도선(chris W, Widowson)정령이 제9대 사령관으로 부임 하였다. 2월4일 오후1시에 당시 본영이 부산(범일동 1302)에 있었으므로 부산에서 구세군과 한국기독교 연합회와 공동 주최하여 환영회를 열고 감리교 유형기 감독과 함태영 부통령, 신익희 국회의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2월 5일 신임 사령관은 신임메시지를 발송하고 순방길을 떠나서 대구영문(11일) 대구혜천원(12일) 영동병원(14일) 영동영문(15일)등 전 후 복구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었다는 것을 선배 사관님들이 증언하였다. 당시 구세군 사회부 아동시설에는 제주에 92, 서울 131, 대구 57, 군산 129명을 보호하였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난민들을 돕는 일에 위도선 사령관의 역할이 컸었다.
1953년 10월 29일 밤 서대문영문에서 황종률 정령의 은퇴식이 위도선 사령관의 사회로 거행되었다. 그는 구세군 한국선교 초기부터 구세단과 구세교회 시절에도 교단의 중심부에 서서 흔들림 없이 단체를 지켜온 구세군의 상징적 사관이었다.
서울이 완전 수복된 후 1954년 10월 28일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KNCC) 제8회 총회에서 총무서기관 장운용 정령께서 회장으로 당선 되었고 전국 각 지방은 재편성(서울, 충청, 경상, 전라)되었으며 사업은 안정적으로 발전하여 많은 영문을 신 개척하고 영문을 신축 되었다. 54년11월 8일은 해외 지원금(옥스포드기금,언크라)으로 은퇴사관 주택 5동을 북아현동에 마련하였으며 1956년 중에 서대문, 마포 돈암, 북아현, 급식소를 시작으로 전국에 14개의 급식소가 개설 되었다.
1957년 8월 1일 위도선 사령관의 전근이 발표 되었고 9월 6일부터 13일까지 순회 한 후 10월 29일 한국을 떠났다.
1957년 9월 20일 하 비 (Frederick W, Harvey)정령이 제10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2월7일 한국에 부임 하였다. 1958년 4월 3일 혈화청년 전국연합회 창립총회가 있었다. 1950년 10월 1일부로 사관의 계급이 참위, 부위, 정위, 참령, 부령, 정령 보, 정령, 참장, 부장, 으로 개정되었다. 1960년도는 4,19학생 의거가 일어났고 500여명의 부상학생을 가정단원들이 위문하였다. 1961년 5월 16일의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정치적으로 큰 이변이 있었고 기독교계는 이에 대한 적절한 성명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NCC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공약을 준수하고 조속히 민주화하기를 촉구하는 한편 61년5월 22일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주최로 구국기도회를 열었으며 본영의 참모악대도 활약했다. 그 해 8월 4일에는 장희동 부위(제18대한국사령관,1991-1994)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사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하였다. 61년9월 26일에는 사관학교 제1기생 황종률 정령께서 향년 74세로 승천 하였다. 1961년10월 13일부터 19일까지 윌프레드 킷칭(Wilfred Kitching)대장 동부인이 내한하여 1926년도 이후 35년 만에 대장이 인도하는 총회를 개최 하였다 1962년 1월 3일 라의도(Paul A, Rader)학생참위 동부인이 사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하였고 그의 기도생활과 열정은 학생들과 군우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당시 필자는 43기 사관학교 학생으로 재학 중이었다. 훗날 라의도 교관은 구세군 제15대 대장(1994-1999)이 되었다. 1962년도 연말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정교 57명이었고 하사관 총수는 918명이었다.
1963년도에는 사회부서기관 잉글(George Enggle)부정령의 주선으로 미 군국의 지원으로 북아현동의 양로원 부지20,445평 후생학원 부지 8,270평을 1,186만원에 매입(서울시로부터 불하)하였다.
1964년 7월 24일에는 경기도 과천 문원리에 19,000평(현 사관학교, 양로원, 승리관, 과천영 부지)을 300만원에 매입 하였다. 당시 자산부서기관은 신경산 부령이었다.
1965년은 구세군창립 100주년의 해였다. 한국에서는 교회연합으로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걸고 전국복음화운동을 전개하였고 구세군인들도 적극 참여하였다. 하비사령관은 대회고문이었으며 장운용 서기장관은 추진위원회 부회장이었고 안길화 전장서기관은 실행위원회 분과위원장 이었다. 하비 사령관은 8년간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965년 11월 11일 한국을 떠났다.
1966년 1월 13일에 노시화(Leslie C, Rusher)정령이 한국에 도착하였으며 17일 제11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고 20일 아현영문에서 환영예배를 모였다. 장운용 서기장관과 안길화 전장서기관, 안성옥 서대문영 정교가 환영사를 했다. 그 해 5월 5일부터 16일까지 푸레드릭 쿠츠 (Fredrick Coutts)대장 동부인이 한국을 방문하여 대통령으로부터 모란장을 받았으며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도는 세계가정단의 해였다. 한국에서도 군국표어를 “한국의 가정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정하고 서울지방 가정단 대회에서 김옥길 이화대학교 총장을 특별강사로 초청하는 등 각 지방의 가정단 행사가 있었으며 12월 27일에는 군국 최초로 장희동 정위 동부인이 싱가폴, 말레시아 준군국 선교사로 파송 되었다.
1968년은 구세군 한국선교 60주년 맞는 해였다. 10월 7일부터 13일까지 군국총회가 열렸으며 미국 총사령관 햅번 부장이 특별인도자였다. 총회기간 중 신문로의 구세군회관 기공식이 신경산 자산부서기관의 사회로 거행되었다. 68년10월 18일부터 6,800여평의 부지에 서울후생학원을 건축하기 위하여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1969년도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7월 7일)되고 호남고속도로가 개통(12월 20일)되는 해였다. 국제구세군은 7월 23일에 영국의 썬버리코트에서 열린 구세군 최고회의에서 위크벅 대장이 선출되었다. 군국 내에서는 혈화청년회 전국연합회와 각 지방의 청년회가 활성화되었고 전국적으로 하사관들의 역할도 괄목할 만큼 강화되었다.
1970년 5월 22일에는 위크벅(Wickberg)대장 동부인이 내한하였다. 네 번째 한국을 방문한 구세군대장이다. 중앙회관에서 모인 환영회에는 김관석 NCC총무를 비롯한 각계의 인사들이 참석하여 환영하였고 정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무궁화 훈장을 받게 되었다. 그 해는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강변에는 수자원 개발공사의 매립지 조성사업이 한창이었고 그 곳 상공에는 현장을 시찰하는 청와대의 헬리콥터가 가끔 날고 있었다. 필자는 그 곳에 600평 부지를 매입하고 연건평 540평의 5층 건물을 건축하고 저동영문을 이전하려는 꿈이 있었다. 그 후 4월14일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평영문으로 전근하게 되었다.
70년9월 1일에는 구세군의 수난과 재건을 온 몸과 삶으로 지켜오신 역사의 증인 장운용, 이은례 정령 내외분께서 명예롭게 은퇴하였다. 이틀 후 9월 3일부로 전용섭 정령보가 정령 진급과 동시에 서기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양풍원 정령보는 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971년은 국제본영에서 “세계 어린이의 해”로 정하고 랄손 정령을 어린이운동 책임자로 임명하여 어린이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전 세계적으로 적극 추진하였다. 그 해 4월 13일 6,25사변 중에 납북되었던 제8대 한국사령관이었던 로드 부장이 향년83세 로 승천하였고 한국 군국에서는 5월 13일 정동의 중앙회관에서 추모예배로 모였다. 동년 10월 30일에는 유부린 정위 동부인이 한국을 떠났다. 71년11월 15일은 연희영문을 연건평148,16평을 신축하여 봉헌하고 저동영문을 이전하였다. 건축비총액은 대지매입비를 포함하여 6.00만원이었다. 동년 10월 21일은 노시화 부장 동부인이 만국 순회부장으로 임명되어 호주로 떠났다.
1971년 12월 12일은 고득렬 (W.stan Cottril)참장 동부인이 제12대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신임 사령관은 행정에 치밀하였고 사관 개개인의 영성과 기획능력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이었으며 1972년도에는 연중행사계획을 달력에 게재하게 하였고 사관 개개인의 신상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대하는 지도자였다.
72년2월25일은 신문로에 지하2층 지상9층으로 신축한 “구세군회관”을 준공 하였다.
72년4월10일에는 구세군영동병원의 운영이 부실하다는 이유와 신문로 빌딩 건축비를 충당할 목적으로 40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당국에 폐원신고를 하고 타인에게 매각하였다. 그 병원에서 생명을 다시 찾은 필자의 마음은 매우 안타까웠다.
72년11월 28일부로 대전1영을 대전중앙영으로 2영을 대동영, 3영을 삼성영, 4영을 문창영, 5영을 성남영, 6영을 서대전영으로 개칭하는 등 전국의 영문들을 지역명칭을 따라 표기하게 하였다.
1973년 4월 11일 구세군 한국선교65주년 기념총회 인도자로 카이저 부장(미 서군국 사령관)동부인이 내한하였다. 그 해에 안성에는 황종률 정령의 따님이 안성영문 개척을 위해 대지242평 회관 53평을 헌납하였고 원주영문 개척은 춘천영문 담임사관과 군우들이 주선하였고 원주영문담임사관은 이듬해 6월에 임명 되었다. 1973년 8월 10일 고득렬 참장은 코리아 하우스에서 전용섭 사령관 취임식과 계 인수 서기장관 환영식을 인도한 후 12일 김포공항에서 항공편으로 출국하였다.
1973년 8월 13일 전용섭 부장은 제13대 한국 사령관으로 대한본영 사령관실에 첫 출근하였다. 전용섭 사령관께서는 가정단총재 이성조 부장과 함께 자국인으로는 처음 사령관에 취임되었다. 8월16일자로 국내의 유수한 일간지와 지방신문들까지 대서특필하여 보도하였고 8월 18일 오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주최로 100여명이 모여 환영회를 열었다. 그 때를 위하여 준비한 것처럼 미국 풀러 신학교에서 선교신학을 연구하고 라의도(Paul A, Rader) 참령이 8월 17일부로 귀국하여 사관학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인 백기화(Kay F,Rader) 참령과 함께 교육에 진력하는 한편 재무관 우인덕(Peter Wood)과 함께 군국성장발전을 위한 일에도 적극참여 하였다. 1974년도의 표어는 “성령으로 행군하자“였다 분기별 계획을 세우고 전국 각 지방과 영문들이 총력을 다하여 군국의 중흥을 위해 노력한 결과 도처에서 승전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개척, 영문 부지 헌납 및 신축, 비품헌납 등 헌신적인 미담들이 줄을 이었으며 각 영문은 자진하여 자급을 선언하였다. 사령관 전용섭 부장은 74년4월 18일 최고회의 참석차 영국으로 출국하였고 5월 13일에는 최고회의에서 와이즈맨(Clearence D. Wiseman)부장이 제10대 대장으로 선출 되었고 사령관은 10월 8일 귀국하였다. 1975년도의 군국표어는 ”기도하며 나아가자“(살후3;1)이었다. 75년1월 20일-22일까지 열린 행정사관회 에서는 각 분야의 사업을 분석, 평가하여 보다나은 발전을 위해 장점은 더욱 강화하고 취약점을 개선 보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발전적 기류가 확실해졌다. 전국 각 지방과 영문에서는 ”하사관 전진 강습회“가 열리고 ”교사강습회“, 영문학생대회”, 청소년웅변대회“ ”교사강습회“등 각종 활동이 활발해졌다.
각 지방별로 모이는 “가정단 캠프”는 여성들의 능력을 성장사역으로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대외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65년도 전국복음화운동과 74엑스포 대 집회에 이어 75년도 여의도에서 모인 구국기도대회(80여만명)때에는 전용섭 사령관은 대회고문이었으며 김해득 전장서기관은 CBS재단이사장이 되었다. 1976년 10월 13일에 대전 “헬몬수양관“에서 제1차 ”군국성장협의회”가 개최되었고 필자도 참석하여 “하나님나라 확장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발제강의를 하였다. 다수의 중견 정교님들도 첫모임부터 함께 하였다. 그 후 제7차까지는 협의회로 모이고 제8차부터 제10차까지는 “성장 세미나“로 모였으며 제11차부터는 성장대회를 개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군국성장의 기반이 이때에 구축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2,000년도까지 500개영문의 목표는 제1차 회의에서 결의하였고 100,000명 이상 군우 확보운동은 제2차 회의에서는 의결하였고 1,000명이상 모이는 영문 10개 영문 이상 결의는 제3차 회의에서 의결한 것이다. 90년도 제7차 회의에서는 500개 사업 처 개척계획을 2008년으로 수정 재확인 하였다. 제8,9,10차까지 열린 “성장 세미나”는 선교역량을 배양하고 사역의 전문성을 갈고 닦는 기회가 되었다. 96년도 장충체육관에서 모인 제11차부터는 성장대회(구세군인 대회)로 모였다.
1977년 10월 8일 김해득 부장이 제14대 사령관으로 임명 되었다, 1978년 3월3일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KNCC)회장으로 취임 되었고 1978년10월13일-19일까지는 아놀드 브라운(ArnoldBrown)대장이 인도하는 총회가 있었으며 “노래선교단”이 창단 되었고 1980년 미국, 호주군국 10주년 기념대회에 정교들이 참석하였다. 1980년5월6일에는“군국자선위문단”이 창단되었다. 부인 오현철 부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직무에 종사 할 수는 없었지만 명석한 머리와 구세군을 아끼고 기도하는 평소생활은 타의 추종이 어려울만큼 독실했다. 자녀 5남매를 훌륭하게 양육한 현모양처였다. 김사령관은 재임 중 대외관계가 매우 좋아서 구세군에 대한 타교단의 관심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평소 혈당이 매우 높아서 합병증으로 건강에 어려움이 있는 때에도 목포, 부산까지 출장을 하셨고 귀경 도중에는 천안에 들려서 당시 영문 건축현장에 일하고 있는 필자를 격려하시기도 하였다 그 후 79년7월12일에 신축된 예배당(연286평의3층 건물)을 헌당하였다. 1980년 11월 1일 그토록 사랑하고 좋아하시던 정든 구세군을 뒤로하고 천국을 향하여 떠나셨다. 그 무렵 80년11월 14일에는 처음으로 해외 한인사역이 시작 되어 미국의 L.A. 한인영문에 김민제 정위 동부인이 담임사관으로 파송되었다.
1980년 12월 4일 제14대 한국사령관을 김순배 정령께서 임명되었다. 은퇴를 앞두고 있어서 각 지방 사관회에서 퇴임인사를 했던 터였으나 사령관직의 공석으로 국제본영은 긴급하게 전장서기관이었던 김정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임명은 갑작스러웠지만 군구성장사역의 중심에 서계셨던 분으로서 군국을 이끄시는 일에 별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재임 중 18개 영문이 신 개척 되었고 총회 인도 차 내한한 마리온(Edwin Marion)부장 편으로 인도네시아 영문 신 개척 지원금도 전달하였다. 부인 이덕영 정령께서는 지병으로 십수년 동안 와병 중이어서 여성사업은 서기장관부인 백기화 정령이 맡아야 했었다.
84년6월27일은 독일정부의 지원프로젝트로 신축한 부평의 인평고등학교와 직업훈련원 건물을 준공하여 헌당하였다.
1983년 12월 31일 사령관 김순배 정령께서 참모총장 고득렬 (Stan W. Cottrill) 부장의 인도로 은퇴하였다.
1984년 1월 1일자로 라도명(Robert S Rightmire)부장이 제16대 사령관으로 부임 하였다. 일본군국에서 사령관으로 있었던 관계인지 동양문화에 생소하지 않은 듯하였다. 당시 장희동 정령께서 서기장관으로 부임하여 군국 내에서의 각종 사역에 큰 불편은 없었으며 2년 5개월 간의 재임 중에 “과천 사관학교” 신축 이전의 중요한 일을 추진하여 전군우가 총력을 다 해 준공하였다. 그 후 여성사업 소식지를 창간하였으며 1985년 3월 20일에는 696장의 구세군찬송가가 발행되었다. 당시 필자는 서대문영 담임사관으로 1억여원의 건축비 부채를 정리하는 한편 강동영문과 필립핀의 민도르영문, 포천영문을 개척하고 훗날 개척된 충무영문 개척자금을 준비 하였던 것으로 보면 그 당시의 군국성장도 잘 진척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재임 중 16개의 영문 신개척 되었다.
1986년 6월10일부로 김석태 부장이 제17대 한국 사령관으로 임정선 부장은 여성사업총재로 임명 되었다. 김석태 부장께서는 학구적인 자세로 배우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 하시는 관계로 전국의 많은 사관들이 배우는 것에 큰 관심을 두는 시기였다. 1987년2월11일 대구역 광장에 가출여성과 아동을 위한 상담과 선도를 위해 “우정의 집”을 개설하였으며 1987년5월13일에는 “구세군 한국정교회”(초대회장 양웅철)가 창립되었고 1989년5월13일에는 “대전여성직업보도원”이 개원되었다.
1988년4월8일-14일까지 이봐 버러스(Eva Berrows)대장 인도로 “80주년 기념총회”가 열렸다. 1990년에는 대전, 서대전 역전에도 “가출여성 및 아동상담소“를 개설하였다. 여성사업총재 임정선 부장은 음악을 전공한 분이어서 구세군의 음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사관자녀 장학금을 조성하고 장학회를 발족하여 지방사관들의 자녀교육에 큰 도움이 되었다.
90년2월17일에는 음암영문 이재옥부교(고 김기철 정교 부인)에게 자녀5명을 사관으로 헌신하게 한 공로를 인정하여 금성뺏지을 수여하였다.(99년도 김경호 사관이 임관 하므로 사관 6명이 되었음)
6월 29일-7월8일까지 제7회 구세군 국제대회에 사관 및 하사관 9명과 선교합창단 10명이 참가하였다.
1991년3월2일부로 제18대 사령관 장희동 부장이 부임하였으며 여성사업총재에는 정은식부장이 임명되었다. 장,사령관 동부인께서는 구세군을 널리 홍보하는 일을 우선을 판단하여 주한 미대사 도널드 그레그(Donald P, Gregg)를 비롯하여 각계의 유명인사들을 찾아 다양한 대외활동을 하였다. 그 후 주한 영국대사 데이빗 라이트(David J, Wright))의 주선으로 영국 황태자비 다이애나가 과천양로원을 1992년 11월에 방문하였다. 그 후 양로원장 김남선 원장의 주선으로 현대그릅 창업자 정주영 회장의 초청을 받은 사령관 장희동 부장과 여성사업총재 정은식 부장 부부는 정 회장으로부터 5억원 지원을 약속받아서 양로원을 건축하였다. 1991년8월12일-23일까지 남서울지방에서 운영하던 구세군신학원을 구세군선교신학원으로 개칭하여 구세군사관학교에서 개강하였으며 동년 11월27일 양웅철 정교는 한국교회 평신도 단체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1992년1월23일에는 대한본영에 3국(인사,기획,업무,)을 신설하고 각료제를 도입하였고 2월19일-25일까지 횃불선교회관에서 이봐 버러스(Eva Evelyn Burrows) 대장의 인도로 구세군대회가 열렸으며 3월12일 충북지방 신설에 이어 8월 1일에는 서산지방(현 서해지방)을 신설하였다. 1993년6월12일은 군국자립대책을 위한 충정로 개발헌금 작정주일을 실시하여 30억원 이상의 헌금이 약정되었다. 1994년8월4일부터 5일간 “아,태지역 정교세미나”가 한국정교회(회장 양웅철 정교)주관으로 개최되었으며 8개 군국에서 110명(해외13명)이 참가하였다. 당시 필자는 군국본영 기획국장으로 함께하였다. 1994년8월31일 장희동 부장 동부인은 미 서군국 사령관으로 발령받고 이임하였다.
1994년9월1일부로 김성활 정령이 제19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부인 전광훈 정령이 여성사업총재로 임명되었다. 취임식은 9월4일 오후3시30분 서대문영문에서 동양부장 임아 앙 (Lim, Ah Ang)부장의 인도로 거행하였다. 그 해 11월19일 구미영문, 12월 13일 공주영문, 12월10일 가수원영문이 개 영 되었고 1995년 3월17일 “대전여성의 집”이 개원되었다.
1995년12월1일부로 제20대 사령관에 이성덕 정령이 임명되었으며 부인 조인선 정령이 여성사업총재로 임명되었고 손덕수(Robert F, Saunders) 부정령이 서기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취임식은 12월3일 오후3시에 서대문영문에서 대장특사 아더톰슨(Arthur T,Thompson)부장이 인도하였다. 12월8일 조선호텔 20층 호경 전에서 모인 자선냄비 만찬회는 140여명의 내외 귀빈이 참석하였고 자선냄비에 관한 사회적 관심과 후원에 대하여 홍보하는 한편 새롭게 조직된 “청소년보호사업 단”에 대해서도 홍보하는 기회가 되었다. 12월25일(월) 영시에는 명동에서 자선냄비 종료식 (시종식은 12월4일 시청앞)을 시민과 함께하는 성탄예배로 모였다. 95년 12월1일부로 기독교TV (KCTS)가 개국하여 첫 방송을 했으며 구세군도 창립 이사로 기여하였다.
1996년1월13일에는 블라디보스톡 선교를 위해 황선국 정교(아 현 영문)가 북방선교헌금으로 준비한 개인적립금 1억3천연여만 원을 인장과 함께 통장을 사령관 실을 방문하여 헌납하였다.
96년1월23일에는 대전에서 익명의 사관 한분이 10,000,000 원을 헌납 송금하여 은급기금 적립을 개시하게 되었다. 2008년1월31일 현재 55억3천여만 원의 적립누계 보고되었다. 그동안 헌신적으로 노력한 동관들에게 치하와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96년1월24일-25일까지 국제본영의 승인을 받아 18인으로 구성된 “인사위원회“ 제1차 회의가 경기도 이천시의 미란다호텔에서 열렸다,
96년1월29일-2월3일까지 이성덕 사령관이 마카오에서 열리는 ”동북 아시아평화회의“에 한국측 대표단원(18명)으로 참석하였다.
96년4월17-25일까지 “96구세군인 대회”(제11차 군국성장대회)가 “새 시대를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주제로 모였으며 21일(주일)장충체육관에서 모인 전국연합성결회는 약8,000여명(당시 신문 보도는 1만여 명)이 모였다. 사관후보생 헌신자 134명, 일반 헌신자 14,921명이었으며 오후에 모인 여성대회는 5,000여명으로 기획국 집계로 보고되었다. 다음 달 5월2일에는 서산시의 ”석림복지관“이 개관되었다.
96년6월15일-22일까지 사령관 이성덕동부인은 6월15일-22일까지 미 서군국 임관임명식 참석 및 ”재미 한인영문 성장전략회의“ 인도차 도미하여 미 서군국, 중앙군국, 동군국, 남군국을 순방하고 NHQ의 총사령관을 예방한 후 귀국하였다.
96년7월18일(목)은 ”천안역 부녀 아동상담소“를 개관하였고 7월21일(주일)은 아현영문 개영80주년 기념예배를 이,사령관이 인도하였으며 그 날 서울시내 6개 영문에서 참가한 13명의 남성 중창단 ”리조이스“(Rejoice)의 창단을 치하하고 격려하였다.
96년9월10일(화)에는 보령시 명천동(대천)”명천종합사회복지관“이 김학현 보령시장을 비롯한 각계단체장과 사관 및 군우 등 250여명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개관되었다.
96년9월23일에는 ”김영삼 대통령“ 내외가 과천양로원을 방문하여 따듯한 위로와 격려를 하였으며 구세군의 노고에 대하여 치하와 감사를 했다.
96년10월16일-17일까지 대전 유진호텔에서 열린 ”구세군 행정지도자회의“에서는 ”21세기선교회관”(충정로)건축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하였고
96년10월28일(월) 구세군강북복지관(정위 김태열)에서 무의탁 독거노인을 위한 그룹홈(Group Home)“노인의 집“을 시범사업으로 개설하였으며 11월29일(금) 영문병설 시범사업으로 합덕영문 부설 ”노인복지회관“(건강센터)을 건평40평 규모로 준공하여 당진군수 외 지역주민 등 100여명이 참석하여 개관하였다.
96년12월4 자선냄비 시종식이 있은 후 5,000여만원을 들여 제작한 ”구세군봉사차량“이 봉사를 개시하였고 12월4일-24일까지는 롯데백화점의 ”싼타랜드“에서 매일2회 “거리의 작은 음악회”(섭외부서기관 유미혜 정위 주관)가 열렸으며 롯데백화점 입구에 “엔젤트리”(Angel Tree)를 설치하여 불우청소년소녀에게 선물 보내기캠페인을 하여 140여명이 참여하였다. 1996년12월31일 현재 “군국자립기금헌납(충정로빌딩 건축헌금) 누계”는 885,704,048원이었다.
1997년1월6일에는 정예병사 육성을 위하여 “구세군연수원”이 개설(초대 연수원장; 서기장관 손덕수 부정령. 총무; 교육부서기관 박만희 참령)하였고 전국을 4개 권역(수도권, 서부권, 중부권, 남부권)으로 각기 지역연수원을 두었다. 연수원교재를 출판하였으며 그 후 각지방별로 1개소씩 연수원을 운영하게되었다.
97년2월16일은 “블라디보스톡 개척사관 파송예배”를 서대문영에서 450여명이 모여 정위 이정훈 정위 박선례 사관 부부를 개척사관으로 파송하였다.
97년4월7일(월)은 제1차 구세군발전협의회 포럼을 대전중앙영에서 38명의 사관 및 정교가 참가하여 오전10시부터 오후5시까지 허심탄회하게 발전저해요인들을 분석하고 새로운 방안들을 모색하는 진지한 모임을 가졌다.
97년4월14일(월)-16일(수)끼는 용평리조트에서 “총체적성장”이라는 주제로 미, 서군국 남가주 지방장관 밴 크리프 부정령을 강사로 모시고 117명의 사관이 모였다
97년5월16일(금)오전11시에 “은퇴사관 친교회 창립총회“가 영등포영문에서 열렸으며 이성덕 사령관의 설교(“하늘에 쌓아둔 소망”)가 있은 후 제1회 총회가 개최되어 회칙 통과 후 임원을 선출하였으며 초대 회장에 김순배 정령이 선출되었디. 6월5일에는 서산지방 진장영문(부위 김영일)병설“팔봉복지관”을 개관하였다. 5월20일-21일 중국 난징에서 열린 ”한중교회협의회“에 이,사령관이 참석하였다.
97년5월19일(월)에는 새롭게 선교를 개시한 구세군 대만지역의 서기관으로 박옥영 정위가 임명되어 CX421편으로 출국하였다.
97년7월15일(월)한일은행의 한마음통장의 하나인 “구세군 자선냄비 통장”을 개설하기 위한 구세군사령관과 한일은행장의 협의가 있었다. 고객이 이용하는 계좌의 은행 측 수익의 일부로 자선냄비 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이었으며 연중 계속되는 새로운 모금방법이었다.
1997년8월25일-28일까지 “제12차 군국성장대회”(97성장대회)가 용평 리조트에서 열렸고 국내외에서 1,266명(해외 14개군국에서 87명)이 참가하였다. 초청 주 강사는 장희동 부장이었으며 분과별로 성장사역을 깊이 있게 토의하였고 야외에서 모인 그룹기도회는 은혜가 충만하였다. 특별히 각국대표의 전통문화 축제는 이채로운 체험이었다. 이 대회에서 전 진보영문 김매자 부교는 괴정영문 개척을 위한 대지와 건물 및 임야를 헌납하였고 영등포영문 김경숙 부교는 필리핀 개척헌금을 약정하였다. 채택한 결의문13항 중 제13항에 1,000여명 이상 모일 수 있는 자체수련원을 설립하고 선교문화원을 2개 처 이상 신설하기로 하였다. 507명의 헌신서원자 중 후보생36명, 영문신개척94명, 영문신축89명, 북한선교6명, 해외선교2명, 병설개설10명, 별정사관헌신2명, 해외참가자31명, 개인전도237명이었으며 참가자 전원이 일어서서 충실한 구세군인 되기 위하여 재 헌신 하였다.
1997년10월29일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영문 개영예배”(라의도 대장의 뜻을 따라 북한선교 전초기지)를 이 사령관 동부인이 인도하였다. 9월6일은 호주 해외개발부 자문위원 고든놀스가 방한하여 “노매실의 농수로 공사”를 살펴보았다.
1997년9월19일(금)부터 타군국 사관학생 위탁교육(3개월 과정)이 사상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필리핀군국에서 2학년 여독신 2명(아나 페랄타. 플로렌스 알키오) 파푸아뉴기니 준군국 1학년 한 동부인(간디 이코토. 무루 이코토) 영어통역으로 수강하고 전장실습에도 참여하였다.
97년9월23일에는 탈북 난민들의 사회적응 및 직업보도 등 정착지원을 위한 시설로 서대문구 냉천동 삼호아파트단지 내에“ 루디아의 집”을 개관하였다.
97년9월24일 양태수, 전옥경 참령이 싱가폴. 말레지아. 미얀마 준 군국 전장부, 사회부 서기관, 부인은 후원자부 담당관으로 임명되어 출국하였다.
97년11월18일(화)경북지방 “괴정영문 및 복지타운”(노인의집,청소년복지센터,성경통독원)의 개관예배를 드렸다.
97년12월12일 “영세민 무료심장수술”(국립의료원수술지원)“100례 기념축하회”가 송태호 보건복지부장관 참석한 가운데 국립의료원에서 열렸다.(2007,12,31,현재 국내와 중국조선족,러시아의 고려인 등 500명 이상 시술하였음) 12월13일 “의료친교회 성탄축하회”를 모였으며 매년 2,3회씩 시행하는 무의촌 의료봉사를 위해 재 헌신하였다.
97년 말 현재로 충정로에 “신축할 21세기선교회관“을 ”충정로개발위원회“ 치밀한 검토가 있은 후 지하3층 지상21층으로 설계하여 신축에 필요한 추가 부지를 29억8천만 원(군국자립기금으로)에 3필지를 매입하였고 시공사와 협의계약한 후 2000년 4월까지 준공하기로 하였으나 IMF경제위기로 시공사의 연기요청에 따라 연기되었다.(당시 자산서기관 정위 신재국)
1998년1월8일 “다 일 사”(Rehabilitation Center)를 정동 중앙회관 부속실에 개관하고 국가적인 경제위기로 실직한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 설수 있도록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사업으로 시작하였다. 이 사실이 일간신문에 보도 된 것을 보고 롯데복지재단(이사장; 전 총리 노신영)에서 박쌍룡 이사를 보내어 전국에서 운영하는 다일사의 운영비를 지원하기로 하였으며 그 후 정동 다 일 사를 비롯하여 제주까지 13개 처의 봉사를 적극 지원하였다.
1998년도 1월 중에는 11일(주일) 남서울지방을 시작으로 전국9개 지방에서 “전 병사 성 군화 성별대회를 개최하였다. 2월24일은 천연영문 병설 ”천연 우리 집“(후생학원에서 퇴원한 5,6명의 자녀들에게 사회에 적응하고 정착하는 기간 동안 함께 머물게 하는 집)을 개관하였다. 그 후 “중동 우리 집“(서울후생학원 병설) ”군산 우리 집“(차병원 조주연 박사가 80평 대지의 전통한옥을 매입하여 군산후생학원 병설로) 등이 개설되었다.
1998년3월12일(목)-19일까지 호주 멜본에서 열린 “국제지도자회의”에 사령관 이성덕 정령과 여성사업 총재 조 인선 정령이 참석하였고 대회기간 중 5월14일 부장으로 진급하였다. 그 후 “뉴질랜드 한인사역”을 준비하기위해 오크랜드를 방문하여 기획국장 Jhon Major 부정령, 북지방장관 Howard Davies 부정령, 오클랜드 콩그레스홀 담임사관 Gordon Daly 참령을 비롯한 17명의 한인 구세군인들을 만나 의논하여 현지에 한인구역을 조직하였고 한국어방송과 한인신문에 협의결과를 보도하는 등의 개영 준비를 하였다. 3월30일은 대전 중앙영 병설 “대전 청학관”을 개관하였다.
98년4월22일(수)오후3시 “만영장학회 기금전달식”이 신문로 구세군회관 503호실에서 내외신기자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있었다. 정은식 부장(전 사령관 장희동 부장 부인)의 모친 이주영 여사께서 부군(고 정만수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충남 아산시의 땅 7필지 토지8,560m2와 지상 건물 일체를 장학기금으로 구세군에 헌납하므로 만영장학회가 설립되었다.
98년4월23일(목)오전11시에 “백화산수련원 건립사업 설명회”가 영동영문에서 각 지방장관 및 사관대표, 한국정교회 회장 관련하사관 등 25명이 모였으며 이,사령관은 영성이 강한 군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영성수련원이 필요함을 설명하고 건축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건축위원장은 장명석 지방장관으로 선임하였다. 남한국토의 중심권에 위치한 소백산맥의 백화산 기슭에 영동영문(담임, 정위 이기용) 개척자금으로 매입한 수련원부지(영동군 황간면 금계리산21-1) 7,855,32평에 연건평 762.06평의 3층 수련원을 건축하기로 하고 건축자금은 각 지방별로 담당금액을 정하여 각 영문에서 헌금하기로 의결하였다. 그 후 충청지방(장명석 지방장관)의 개척자금으로 5,433평을 추가 매입하여 부지총면적이 13,288.32평이 되었다. 98년4월30일부로 충서지방(지방장관 전광표 참령)이 병설사업 100% 달성하였다.
5월23일(목)오후7시 “목요 연합 성령회”에서 해외협력사관을 파송하였다, 정위 황선엽과 정위 최명순 사관 부부는 런던 한인영문 개척사관으로 강성환 부정령과 이정옥 부정령 부부는 호주 남 군국 부서기장관, 여성사업 부서기관으로(6월1일부)각각 파송되었다.
1998년5월11일-19일까지 “구세군아태지역 지도자회의”(The Salvation Army South Pacific and East Asia ZONAL CONFERENCE)가 서울 “라마다 올림피아호텔”에서 열렸다. 라의도(Paul A.Rader)대장 동부인과 유부린(Fred L. Ruth)부장 외 50여명의 국제지도자들(사령관, 서기장관 동부인)이 참가하였으며 대회기간 중 대통령 초청 오찬회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라의도 대장은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다.
98년6월3일(수)오후2시에 실직 노숙자들을 위한“충정로사랑방”을 개관하였다. 개관식에는 롯데복지재단 노신영 이사장 외 각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100여명 입소자들은 전원 일용직이라도 취업을 알선하고 3년 안에 자립하도록 지원할 계획을 하였다. 현재까지 이사업은 다양하게 확장하여 지속 되고 있다. 6월30일은 서산지방(지방장관 허규현 참령)이 병설사업 100% 달성하였다.
98년9월3일(목)은 백화산수련원 기공예배가 270여명의 참석한 가운데 이,사령관의 인도로 거행한 기공식에는 박완진 영동군수, 정태호 영동군의회 의장, 최광하 영동경찰서장 외 지역 각계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98년9월15일에는과천실비요양원(승리관)이 대지2,150m2(650평) 건물1,450.60m2(439.3평)지하1층 지상3층으로 준공되어 개원하였으며 정부와 과천시청 보조금10억여 원을 과천양로원 김남선 원장이 주선하였다.
98년9월22일-29일(화)까지 이성덕 부장을 대표단장으로 한 한국기독교 방북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였다. 이,부장이 군복을 착용하고 방북한 것은 분단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후 국제본영의 북한사역을 위해 아태부장 유 부린(Fred L. Ruth)부장 일행 4명이 방북하여 협의한 후 귀로에 루스 부장이 한국본영에 들려 결과를 알리고 국제본영의 계획을 듣게 되었다.
98년10월11일에는 필리핀 마닐라에 한인영문을 개영 예배를 이,사령관 동부인이 인도하고 김종선 부위 동부인을 담임사관으로 임명하였다. 필리핀선교는 당시 필리핀 사령관 손 덕수 부장(전 한국본영 서기장관)의 도움이 컸으며 선교를 착수한 개척자금은 당시 사관학교 교감 김 필수 사관의 누님(영등포영문 김경숙 부교)께서 97성장대회 때에 약정한 것이었다.
98년10월23일은 “구세군 한국 HIV/AIDS 대책팀”을 처음으로 구성하였고 과천 승리관 에서 모임을 열었다. 그 후 99년9월18일에는 부산에 대책팀을 결성하고 부산 쉼터를 개관하였다. 10월2일에는 이,사령관은 “제2건국위원”으로 위촉되어 청와대에서 위촉장을 받았다.
98년11월21일은 구세군선교문화원 “한 무리 어울 마당”을 개원하고 차세대의 선교를 위해 문화예술적인 새로운 접근을 위한 사역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98년11월21일(토)은 서울시의 요청에 의하여 부녀보호소건물을 수리하여 “대방동 사랑방“을 개원하였다. 11월28일은 강서구민회관에서 ”구세군어린이합창단“의 창단공연을 500여 관중 앞에서 하였으며 여성사업총재 조인선 부장은 소년소녀 가장에게 장학금을 전달하였다.
98년12월31일(목)-1999년1월31일까지 ”사랑의 고속도로 모금운동“이 시작되어 5,000만원 모금 목표를 초과달성하였고 그때부터 본영사회부의 장학금지원과 조선족 심장병어린이 수술사업을 시작하였다.
1999년2월23일 참모총장 맥스웰(Maxwell)부장이 사관총회를 인도하였고 구세군사관학교 제72기 임관임명식을 인도하였다.
99년3월18일(목) 본영 사회부(서기관 손명식 참령)는 인터넷정보센터를 구축하기 위해 보건복지부로부터 6,500만원을 지원받아 98년9월부터 추진해오던 상세한 과정을 이 한상 부위의 브리핑(OHP로)을 받았다. 6월30일까지 1차 설치작업이 끝날 것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99년3월23일에는 사령관 이성덕 부장이 대한기독교서회 재단이사장으로 취임되었다. 99년4월2일(금)-9일까지 이,사령관 동부인은 캐나다군국 초청으로 브리티시 콜롬비아 남 지방을 방문하고 뱅쿠버 한인영문(김명한 정위)의 집회를 인도하였으며 현지 목회자들의 모임과 현지 신문기자의 인터뷰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돌아왔다.
구세군 대장 선출을 위한 최고회의 참석을 위해 사령관 이성덕 부장과 여성사업총재 조인선 부장이 4월28일(수) 오후1시 KE 907편으로 출국하였다. 금번 대장 선거를 위한 최고회의부터 여성부장들이 참석 할수 있게되어 조인선부장이 함께 참가 하게되었고 제 16대 죤가완스 대장이 선출되었다.
99년6월4일-15일까지 서울후생학원 악대가 미 동군국 4개 지역을 순회 연주하였으며 99년6월12일(토)은 청소년보호 사업단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야외음악회를 1,500여명의 청소년관중 앞에서 멋진 공연을 하고 실직가정 자녀20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였다.
99년6월18일(금)-6월29일-29일까지 “노래 선교 단“과 남성 중창단 “리 조이스”가 국제본영의 초청으로 라 의도 대장 동부인의 은퇴예배에 이,사령관 동부인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7개 영문을 방문하여 순회공연을 하고 귀국하였다.
99년8월2일(월)-5(목)일까지는 “여성영성수련대회”가 열렸다. 1,122명이 참석하였으며 여성사업총재 조인선 부장의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개회예배 설교에 이어 김필수 정위의 은혜의 밤 설교를 통해 큰 은혜를 체험하였고 배재대 최영숙 교수의 “가정생활과 여성의 역할“과 김남선 정위의”지역사회봉사“에 대한 강의는 매우 유익하였으며 지방별로 준비한 가정단 캠프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매우 다채로운 공연이었다.
99년8월9일(월)-12일까지 ”99청년영성수련대회가 “더불어 일어나 약속의 땅으로 가자”(수1;2)라는 주제로 개최되어 1,100여명이 참가하였다.(청년부 이재습 정위 주관) 8월12일-14일까지는 제1기 ”해외선교학교“가 백화산수련원에서 개최되었다.
99년8월16일-18일까지 2박3일간 백화산수련원에서 열린 “제1기 성민수련회”는 44명의 정교들이 참가하였으며 27명의 사관들이 “섬김이“가 되어 성심껏 봉사하였다 개회예배는 이,사령관이 인도하였고 파송예배는 김석태 부장이 인도하였다. 성민수련회는 구세군인을 거룩한 병사로, 거룩한 성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수련원의 기본 프로그램이기도하다. 제12기 성민수련회(2006년7월26일-29일)까지 진행되고 있다.
99년9월13일(월)-15일까지는 ”영문성장 전략세미나“가 대한본영 성장부 주관으로 백화산수련원에서 열렸다. 102명의 사관이 참가하였고 ”대형화 전략“(500-1,000명) 발제는 참령 박종덕, ”중 대형화 전략“(200-500명)발제는 정위 조효정, ”중형화“(50명-200명)발제강의는 정위 이덕중, ”건강한 영문 비전 제시“는 참령 임헌택 사관이 각각 강의를 하였고 3명의 사관이 성장사례 발표를 하였으며 결론은 영운의 갱신과 성장은 사관의 변신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확인하고 다짐 하였다.
99년10월7일”제13차 군국성장대회“ 및 ”군국자급선언식“이 백화산수련원에서 개최 되었다. 1200여명이 참석 하였으며 전 군우들이 믿음과 정성으로 건축한 수련원에 모인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고 2,000년대의 성년군국을 내 손으로 일구어 가겠다는 굳은 결의가 가득찬 분위기였다. 군국의 현황이 250여개의 영문과 100여개의 사회사업시설, 병설을 포함하여 538개처가 8월30일 현재로 성장목표 500개처를 초과달성 하였음을 감사하고 10만여 한국 구세군인은 군국의 자급을 엄숙히 선언 한다는 군우대표 남녀 두사람의 선창에 따라 회중이 복창하는 선서로 자급을 선언 하였다.
“세계 NGO 대회”가 99년10월10일(주일)-15일까지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렸다. 한국NGO자문위원인 사령관 이성덕 부장 동부인과 국제본영 자원개발국장 스키너 부장, 윌슨 참령(호주) 아놀드 참령(뉴질랜드)와 서기장관 강성환 부정령 외 많은 사관들이 참가하였다. 대회장에는 구세군 홍보부스를 설치하고 음악회를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구세군 홍보관을 찾은 시민은 7,000여명이었다.
99년11월15일(월)오후2시에 “구세군 백화산 수련원 헌당예배”를 드렸다. 전국 각영문의 군우 및 내외 귀빈 700여명이 참석하였고 영동군수, 군의회의장, NCCK총무, 영동군교회연합회장의 축사가 있었고 이,사령관은 설교를 통해 백화산수련원이 구세군인들 뿐 만 아니라 “한민족 성민화운동”의 요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수련원의 부지면적은 13,288,32평 지상3층의 연건평762,06평이며 총공사비는1,655,840.282원이었다. 각종 비품이 완비되었고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철 접의자가 준비되었었다. 시공을 맡은 김용환 정교(아현)의 헌신적인 희생과 봉사에 감사드린다. IMF경제공황 중이었지만 공사비 전액을 전국의 사관 및 군우들이 헌신적 믿음으로 드린 헌금이었음을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수련원은 2008년3월 현재까지 매년 정기적으로 전체 구세군인의 영성강화를 위한 수련회를 여름과 겨울 두 차례 모이고 있으며 성민수련회를 비롯하여 정교 수련회 및 사관. 하사관. 가정단, 장, 청소년, 악대수련회까지 수시로 개최하고 있다. 2007년도의 사관학교 증개축기간 중에는 전 학생 교관들까지 수련원을 이동하여 수업을 하였다.
99년11월22일(월)에는 사령관 이성덕 부장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제48회기 회장으로 취임되었다. 99년11월24일 오후2시에는 2천년도 부터 실시되는 군국자급을 위한 보다 효과적인 정책과 방안을 협의하기 위하여 “군국자급대책위원회”(위원장; 업무국장 정학용 부정령) 주관으로 각 지방장관 등 20명이 내장영문에서 모였다.
99년11월25일(목) 오후2시에 한국군국에서 처음 개설하는 군산의 장애인시설 “캐더린목양원”의 개원예배가 있었다. 이,사령관은 “푸른초원의 양떼와 목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샬롬회“ 이동우 회장에게 감사패를 드렸다. 캐더린목양원은 샬롬회의 자모들이 자녀들의 장래를 위하여 폐교된 증석초등학교를 매입(1억3천여원)하여 구세군에 증여한 것이다. 부지는 2,420평이며 건물은 300여 평이었고 공시비 2억7천여만 원으로 개축 및 리모델링을 하였으며 아름답게 조경을 한 후 개원하게 되었다. 이 일을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이 많다. 특별히 은퇴 후 군산에 거주하시는 김소인 참령의 역할과 수고에 감사 들인다. 99년12월1일에는 이,사령관이 정부의 통일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99년12월31일 밤11시-2000년1월1일 아침9시까지 백화산수련원에서 열린 “새 천년 맞이 성회”는 본영사관과 각 지방장관 및 인근 사관과 군우 120여명이 참가하여.“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소망의 새아침”(벧후3;13)이란 주제로 모였다. 일출 시간에는 뒷동산 갈대밭에서 “열린 세상 열린 사람”이란 현수막을 들고 사관학생들의 농악 사물놀이와 함께 “한 무리 어울 마당”이 열렸으며 참가자들은 새천년의 새 희망을 가슴에 담고 하산하였다.
2000년1월11일 “구세군 정보센터”를 개관하여 구세군의 각종 보고시스템을 전산화하게 되었다. 대한본영의 인터넷 주소는 http;//salvationarmy.or.kr이다. 2000년1월20일은 제1회“사회복지 자문위원회”를 신년하례 겸 코리아나호텔에서 모였으며 자문위원회 활성화 방안을 협의하였다.
2월18일(금)은 2월20일 개영하는 일본 오사카한인영문 담임사관으로 임명한 장주석 참령 동부인(은퇴)이 JL952기 편으로 출국하였다. 2000년4월20일 중국용정에 개설한 “구세군 복리원”(안근영 부교 주선)과 심장병어린이 후원을 위해 사회부서기관 손명식 부정령과 해외선교담당관 이재성 정위가 중국연변을 방문하여 연변자치주 3개시를 방문하고 적십자책임자를 만나서 구세군의 활동을 협의하였다.
4월29일(토)은 블라디보스톡영문(정위 이정훈)의 사역을 위해 시당국에서 요청하는 상수도 정수장시설공사를 네델란드 군국의 지원(24,200불)을 받아서 추진한 공사가 준공 되어 서기장관 강성환 정령 동부인이 준공식을 인도하였다. 5만여 명의 시민이 맑고 깨끗한 식수가 공급되는 한편 구세군에 대한 인식과 관심도 좋아지게 되었다.
2000년5월25일(목)-26일까지 *한민족 화합 문화한마당*이 구세군선교문화원 주관으로 백화산수련원에서 열렸다. 정부의 문화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지원하였고 NCCK와 CCK가 후원하였으며 전국 각 지방 주민들을 지방장관들이 인솔하여 수련원에 집결하였고 1,200여명이 모였으며 첫날 밤의 전야제 “대문열기 한마당”은 찬양과 예배, 모닥불과 불꽃축제 한마당을 열고 참가자들이 손에 손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즐거워했다. 이튿날 “만남의 한마당“은 계명대학교 이종오 교수의 ”21세기 국민화합의 새로운 지표“라는 특강이 있었고 사령관 이성덕 부장의 ”개회선언”이 있은 후 NCC K 김동완 총무, CC K 박영률 총무, 문광부 김순길 종무실장, 영동군 박완진 군수 등의 축사가 있은 후 89년도부터 매년 10월10일 소백산맥 삼도봉에서 “삼도봉 만남의 날”(경북, 전북, 충북)을 개최하여 지역화합을 도모한 것을 치하, 격려하기 위하여 구세군 주선으로 영동군, 무주군, 김천시에 문화관광부장관명의 공로패를 수여하였다. 6,25 노근리 희생자 유족과 지역노인들을 위한 잔치도 베풀었고 “문화한마당” 공연은 TV방송 진행자 허참이 진행하여 “동래학춤”(영남) 유태평양과 정읍 시립국악단의 “통일 기원과 북춤과 창”(호남) “봉산 탈춤”(서북) “이호연의 경기민요”(기호) “김형조의 정선아리랑”(관동)등 5대문화권의 전통 문화예술과 중국연변의 조선족 문화를 대표하는 공연팀이 공연하였으며 윤형주 장로가 찬조 출연하였다. 21세기의 선교를 공연예술적인 국민정서에 접근해야할 필요성이 절실한 때에 구세군의 과감한 시도에 대해 참석하신 목사님들도 크게 공감하였다.
6월14일(월) 삭선영문(정위 손석돌)이 신축 이전한 후 구건물을 수리(25,502,000원)하여 영문병설 “지역사회복지관”(노인건강센터, 방과 후 공부방, 무료급식 등)으로 개관하였다.
2000년6월18일(주일)오후3시30분 서대문영문에서 사령관 이성덕 부장, 여성사업 총재 조인선 부장의 은퇴예배가 대장특사로 오신 장희동 부장 동부인의 인도로 거행되었다 이,부장은 “다함이 없는 일”(빌3;12-14)이라는 설교를 통해 은혜의 복음 전하는 일은 다함이 없다 고 하였으며 NCCK 김 동완 총무, 구세군한국정교회 박창수 회장의 축사 후에 조인선 부장이 답사를 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잃은 자의 구원을 위하여 38년1개월의 사역을 마치고 6월30일부로 은퇴 하였다. 그 후 6월28일-7월2일까지 사령관 이성덕 부장 동부인은 미국의 아틀란타에서 열린 “구세군 국제 지도자회의”와 “구세군 새천년대회” 참석을 끝으로 현역사역이 끝났다. 재임기간 중 신개척 25개처는 국내 18개처(김해,칠곡,주안,동군산,괴정,영주,새광주,동래,안면도,경산,능곡,북춘천,동청주,해운대,석림,동대천,금계,만경)이며 해외한인 사역이 개시된 곳은 7개처(블라디보스톡,마닐라,오사카,런던,보스톤,뉴질랜드의 오클랜드,브에노스아이레스,)이었다. 영문을 신축하여 봉헌한 영문이 25개처(밀양,진주,오천,전주,진보,율목,부상,남충주,산곡,만수,주안,안산,안양,내장,용대,부남,삭선,광주,부평,표정,진장,관작,이원,영등포,이천)였다. 국가경제가 어려운 시기여서 사관의 생활비를 97년도 선에서 동결하였음에도 누구 하나 불평불만 없이 군국성장사역에 최선을 다하신 동관 및 군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00년7월1일부 제21대 사령관으로 강성환 부장이 여성사업총재에 이정옥 부장이 부장 진급과 동시에 임명되어 7월16일에 호주 남군국 사령관 더글러스 ( Davis E. Douglas) 부장의 인도로 취임식이 서대문영문에서 거행되었다.
10월5일-10일까지 한국구세군인 새천년대회가 유관순 기념관에서 제16대 죤 가완스(John Goans)대장의 인도로 거행되었다.
11월16일 부평기술고등학교가 인평자동차정보고등학교로 인가되어 자동차학과 등 3개학과를 증설하였고 12월12일에는 경증치매노인복지를 위한 ”홍재동 노인복지센터”를 수탁 개관하였다.
2001년3월9일에는 평택종합복지관을 개관하였다.
5월1일에는 국제구세군의 계급제도가 변경되어 95명의 부위가 정위 되고 102명의 정위가 참령으로 지급되었으며 “정교연수과정”을 신설하여 10월2일부터 시행하였다.
12월28일에는 송림영문 경로식당이 개소되었으며 12월 자선냄비운동부터 전국 1만여 은행의 협조 하에 월2,000원 자동이체 하는 모금사업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2002년도부터 사관자녀장학금을 하사관자녀까지 확대실시 하기로 하였다.
1월16일자로 구세군의 일부 명칭을 개정하여 서기관은 부장으로 지방장관은 지방관으로 사관학생은 사관후보생으로 호칭하게 하였다.
2월23일-28일까지 사령관 강성환 부장 동부인과 서기장관 김민제 정령 동부인이 호주 멜본의 질롱에서 열린 “아태지역 지도자회의”에 참석하였다. 2월 말일 현재로 사관자녀장학기금은 2억원이 되었다.
3월 5일에는 정동의 중앙회관이 서울시문화재로 지정되었다.
3월20일은 구세군한국정교회(회장 박창수)가 백화산수련원에 건립한 “구세군 순교자기념비“ 준공예배를 드렸다. 5월20일부터22일까지 15년차 참령 진급자 61기”평화의 사자학기“14명사관의 연수회가 실시되었다.
7월12일은 “무안 나눔의 집“을 개관하였으며 15일에는 ”부여영문” 개영 및 ”나눔의 집”을 개관하였다.
8월30일부터7월7일까지 진행된 최고회의에 강성환 사령관 동부인이 참석하였고 제17대 대장 존 라슨(John Larsson)이 선출되었다.
9월2일은 기증받은 부지에 “영월사회복지관“을 준공하여 개관하고 동시에 영월영문도 개영 하였다.
10월4일 전국사관체육대회가 처음으로 열려 사관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행정간소화 및 온라인 시스템화, 사회부시설을 각 지방으로 이관하고 각 영문의 교회로 표기허용 하였고 유성영문 개영(10월19일) 분당영문 개영(10월22일) 노숙인 응급보호시설 ”드롭인센터“를 개설하였다.
2003년10월9일-14일까지 ”구세군 한국개전95주년기념대회“가 존 라슨(John Larsson)대장의 인도로 과천시민회관에서 열렸다.
12월말 대한본영을 정동 중앙회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이전하였다
2004년12월26일 사령관 강성환 부장과 여성사업 총재 이정옥 부장의 은퇴예배가 일본군국 사령관 하리타 노소미(Harita Nozomi)부장이 인도 하였으며 2004년12월30일부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2005년1월1일부로 제22대 사령관으로 전광표 부장이 여성사업 총재에는 유성자 부장이 부장 진급과 동시에 임명되었고 취임식은 1월9일 오후3시30분 서울제일영문에서 대장특사로 오신 마코토 요시다 부장의 인도로 거행되었다. 전, 사령관 동부인은 사령관으로 임명되기에 앞서 2004년도에 호주 멜본과 영국 런던에서 행정지도자 과정 및 군국지도자 과정을 이수하였다.
2006년11월에는 한국교회협의회(NCCK)회장으로 취임되었다. CBS이사, CLS이사, CTS주주, 기독교재단법인 이사. 기독교장기재산기증협회 공동회장, 열린 기독교포럼 상임 고문.한국 에이즈예방재단 이사. 한국 D M Z 평화포럼 원로자문위원. 2007한국교회 대 부흥100주년사업위원회 상임대회장. 국가조찬기도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사령관의 활동사항은 1)북한선교활동으로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준비하던 북한선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정지원을 하였고 북한 지원의 폭을 확대 하였다. 북한선교를 위한 국제본영의 승인을 받아 “개발부“를 신설 하였다. 국제본영 주도로 시행해온 북한 개발 사업을 한국본영에서 주관하게 되었다. 북한의 와우도 병원 리모델링 공사를 지원하였으며 북한의 홍수 피해복구를 지원하였고 북한의 치산치수를 위한 유실수 밤나무심기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백화산수련원 숙소(2층) 1동을 건축하였으며 과천사관학교를 증개축 하였고 서울후생학원을 천연동으로 이전하였다. 일죽의 ARC연수원을 건축하였으며 충정로사랑방을 망우동으로 이전하였다. “구세군한국선교 백주년기념 빌딩”을 건축하기 위해 지난 2008년1월30일 기공식을 하였으며 같은 날 북아현동에 건축하는 본영사관주택건축 기공식을 하였다. 97년도 말경 추진하던 건축계획은 대지만 마련하고 긴축비는 준공 후 임대보증금으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시공사와 약정하고 추진하려는 상황이었으나 현재는 수백억원의 넉넉한 자금 (98년도에 2002월드컵경기를 대비한 상암동 개발을 이유로 서울시에서 수용계획을 전해왔었던 상암동의 후생학원을 매각한 자금)으로 건축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다.
앞으로 “백화산수련원을 증개축하기 위해 설계중이며 4월중 기공하게 된다.
3) 한국군국의 선교100주년을 기념하여 몽골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개전을 다각적으로 적극 준비하고 있다.
4) 군국자급을 위해 은급기금을 조성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2007년12월31일 현재 은급기금 총액이 5,535,062,044원이다.
사령관 전광표 부장은 구세군한국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알차고 성대하게 시행하기 위하여 황선엽 참령을 백주년기념행사 책임자로 임명하고 100주년기념사업의 진행을 위하여 인터넷 홈피 http;//www.sak100.or.kr을 설치운영 하는 등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08년 10월에 개전한 구세군 한국군국은 지난 1세기의 역사를 일제 36년사와 한반도 분단 60년사를 함께하며 온갖 역경과 수난 속에서 일 해왔다. 앞서가신 선배 동역 자들과 하사관 군우들의 헌신과 봉사에 머리 숙여 그 헌신과 희생에 경의를 표하며 감사한다. 국토분단으로 잃어버린 휴전선 북쪽의 90여 영문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도록 아쉽기만 하다. 필자가 98년도 방북하였을 때 원산영문이 위치했었다는 원산의 상남동을 찾아가 보았으나 3층 연립건물만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요즘 대한본영 북한개발부(부장 황선엽 참령)에서 남포의 병원개축지원, 북한 고성지역의 10,000여 평의 산에 밤나무심기를 추진하고 있으며 국제본영에서는 수년전부터 요구르트공장을 설치하고 지원 중이므로 한반도 전역으로 향한 구세군의 선교 열기는 접지 않아도 되리라 믿는다.
필자는 2000년6월 퇴임인사의 내용에 21세기의 한국구세군은 성년군국으로 보다 성숙하여 전 군우가 거룩한 성민으로 다시 태어나고 훈련받은 병사가 되어야하며 시민정서에 깊이침투하기 위해 공연문화사역에도 앞서가는 일당백의 용사들이 되기를 기원하고 한국교계에서는 물론 국제구세군 안에서도 선교사역의 선봉장이 되기를 바란다. 고 하였으며 2008년8월호 구세공보에 기고한 100주년의 제언에서는 4가지 제언을 하였다. 선교2세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위해서는 1) 영성수련으로 전군우가 거룩한 성민으로 다시 태어나서 이 강산 도처에 인간상록수가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는 일을 하자. 2) 선교문화원을 활성화하여 퇴락해가는 사회 속에 전천후적인 해결사로 침투할 재능을 고루 갖춘 감각이 뛰어난 병사를 육성해야한다. 3) 구세군 사역에 필요한 전문화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대학을 설립 운영해야 한다. 4) 전인적인 인간구원(사람 살리는 일 살전5;23.구세군교리 문 제11조)을 위해 구세군병원을 재 설립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선교2세기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통로가 있다면 10만 병사를 정예화 하여 일당백의 용사가 되게 하는 일이다. 구세군의 모든 영문들이 영문이 위치한 지역사회의 제반문제들을 감싸 안고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며 살기 좋은 세상 행복한 사람들로 가꾸어가는 일을 하므로 이한반도의 도처에 구세군기가 휘날리고 “전인구원의 사역”이 물결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우리의 이러한 간절한 소원이 반듯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첫댓글 부장님 잘 읽었습니다. 부장님이 카페를 운영하시는 것을 보니 나이는 실로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