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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땅의 끝이자 시작인‘해남(海南)군’!
매일 해는 뜨고 지고 하지만 그래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아질 것이란 희망을 안겨준다. 새로운 희망은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 끝은 곧 시작이다. 무르익은 봄꽃들이 사라지기 전에 뜨거운 여름의 뙤약볕이 시작되기 전에 땅끝마을을 돌아보며, 넘실대는 파도처럼 호연지기를 가슴 가득 품어보자 !
해남군은 한반도의 서남쪽 모서리에 자리잡은 전남최대의 군이며, 동북쪽만이 강진, 영암과 연결된 육지이고 3면이 모두 바다인 반도로 되어있다. 옛날부터 이곳은 영산강 유역의 문화 요소들이 파급되거나 형성되는 배경이며, 서남부를 경유하는 해로가 중국-한반도-일본을 연결한 문화이동로였다는 점에서 다양한 문화적 성격이 주목되는 곳이다.
해남은 소백산맥의 지맥이 해남반도 끝까지 이어지면서 완만한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나 동북부지역에서는 두륜산, 흑석산 등이 있어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해남군의 중부 및 서남부는 평야지대로 간척지, 양식장, 염전 등이 이어진다. 특히 해남은 리아스식 긴 해안선을 갖고 있으며 서남해안의 맑고 청정한 바다를 이용한 염전이나 김양식장 등 각종 수산양식으로 많은 소득과 함께 해남과 영암군을 잇는 영산강 종합개발사업으로 농경지 확장의 여지가 많은 곳이다.
기원전 중생대 시절, 해남의 환경을 상상해 본다면 저 멀리서 화산 연기가 솟아오르고 큰 호수 주변에는 공룡들이 무성한 식물 사이에서 먹이를 찾아 거닐고 있으며 여기저기에 일부 익룡이 모여 있고 작게는 작은 절지류들이 기어다니며 다른 무리의 익룡과 새들이 하늘 위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해남은 우리나라 최대의 철새도래지이며, 세계적 희귀조인 가창오리의 최대 월동지로서 그 중요성이 국제적으로 입증이 되었다.
2018년 4월 1일 현재 인구수는 대략 7만 3천여명이다.
□ 달마산 미황사(美黃寺 : 달마사)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489m)을 병풍삼아 자리한 미황사는 보는 순간 절로 탄성이 난다. 어디 앞모습만 고울까. 대웅전(보물 947호)과 응진당(보물 1183호) 마당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풍광도 일품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이곳을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라 했다.
미황사(美黃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749년(경덕왕 8)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돌로 된 배가 사자포구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의조가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맞이하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보니 금의인(金衣人)이 노를 잡고 있고 큰 상자 안에 경전· 비로자나불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40성중·53선지식(五十三善知識)·16나한·불화등이 꽉 차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 1마리가 나왔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인도 국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인데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므로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다.
이에 다음날 소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한 번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절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금의인이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것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고 했다고 한다.
그뒤의 사적은 알 수 없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약탈과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다. 1601년 (선조 34)에 중창하고, 1660년에 3창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보물 제947호)·응진당(보물 제1183호)·오백나한전·명부전·요사채 등이 있으며, 사적비와 여러 점의 부도가 전한다.
□ 도솔암
□ 두륜산 대흥사(大興寺)
두륜산은 해남의 명산으로 병풍을 두른 듯 빈틈이 없고 기울거나 탁하게 보이는 산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명산이다. 산봉우리 형상들이 수려하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대흥사는 두륜산 6개 봉우리를 병풍처럼 둘러 두륜산의 정기를 전부 받을만한 길지에 자리 잡은 보기 드물게 넉넉하고 풍족함을 느끼게 하는 사찰이다.
두륜산의 옛 이름이 한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흥사의 이름도 한동안 한듬절(큰 산에 있는 절)로 불리웠고, 한듬은 한자어로 '대둔(大芚)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절 이름도 대둔사로 바뀌었다가 오늘날 대흥사가 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산사들이 명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대흥사처럼 일체감을 주는 산은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사찰의 면적도 드넓고 평지도 아닌 산자락에 자리 잡았는데도 평지의 편안함과 안정감도 줄 만큼 여유롭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낮은 돌담장 안에 서산대사를 비롯한 대흥사가 배출한 역대 종사의 부도비 등 모두 50 여기의 부도와 14기의 부도비가 대흥사의 위엄을 나타내어 준다.대흥사는 우리 국토 최남단의 두륜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해남, 목포 등 전라남도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고 있다. 대흥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뒤에 자장스님과 도선스님이 계속해서 중창하였다고 한다.
- 시인 손광은 - 이곳은 우리나라 맨끝 땅 갈두리 사자봉 땅 끝에 서서 길손이여 토말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먼 섬 자락에 아슬한 어룡도 백일도 흑일도 당인도까지 장구도 보길도 노화도 한라산까지 |
수묵처럼 스며가는 정 한 가슴 벅찬마음 먼 발치로 백두에서 토말까지 손을 흔들게. 수천년 지켜온 땅 끝에 서서 수만년 지켜갈 땅끝에 서서 꽃밭에 바람일 듯 손을 흔들게 마음에 묻힌 생각 하늘에 바람에 띄어 보내게. |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삼재불입지처)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만년불훼지지)이라 하여 그의 의발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풍담스님으로부터 초의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가 배출되었다. 그리고 13대 종사 중의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모노레일
□ 전라우수영과 울돌목
해남 전라우수영은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조선 시대 전라우도 수군의 본영이다. 앞바다는 물살이 빠른 명량해협을 이루고 있고, 그 안쪽은 양도(洋島)라는 섬이 울돌목의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해주는 동시에 외부로부터 전라우수영을 가려주고 있어 천혜의 요새를 이룬다.
1597년 일본군이 2번째 조선에 침입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일본군의 재침략이 있기 직전인 그해 1월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해 통제사가 된 원균은 일본군에 대항했으나, 대패하고 전사해 수군은 전멸상태에 빠졌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정부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해 적을 막도록 했는데, 이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군사 120명과 병선 12척뿐이었다. (나중에 파손된 배 한척을 수리해 총 13척이 됨)
일본군이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해 서해로 진출하려 하자,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으로 12척의 전선을 수습해 9월 15일 우수영(해남)으로 수군을 옮겼다. 다음날 새벽 일본수군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군사력은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이순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신념으로 후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때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했던 왜인 준사가 적선을 내려다보고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를 가리켜주자,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에 일본수군이 분노해 일제히 덤벼들자 이순신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일본수군은 참패하고 일부는 달아나 버렸다. 이 해전은 12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일본수군은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량(울돌목)대첩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날 승전이었다.
□ 고산 윤선도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아버지는 윤유심(尹唯深)이나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숙부 윤유기(尹唯幾)에게 입양됐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박승종·유희분 등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봉림대군의 스승이 됐으나 모함으로 이듬해 파직되어 해남으로 낙향했다.
그 뒤 해남에서 병자호란으로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아름다운 섬인 보길도(甫吉島)에 은거하여,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했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이때 보길도의 부용동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과 맞서다가 유배되었다가 1667년(현종 8) 풀려나 부용동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보길도에는 세연정, 망끝전망대, 공룡알해변, 예송리 해수욕장, 송시열의 글쓴바위 등이 있다.
□ 윤두서 고택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큰 아들인 윤인미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하기 위하여 이 집을 지었으나, 해변에 위치한 까닭에 해풍이 심해 윤선도는 해남읍 연동에서 기거하고 증손인 윤두서(호 恭齋, 1668∼1715)를 살게 했던 건물이다. 윤두서는 조선후기의 문인화가로 현재 심사정(沈師正), 겸재 정선(鄭敾)과 더불어 조선의 3재(齋)라 불렸다.
□ 다산 정약용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산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6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 다산초당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경기도 남양주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하였고 그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 이 직접 병풍바위에「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일득록(日得錄)'은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正祖)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이 안에 쓰여 있는 그의 인재관을 읽어보자.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집을 짓는 사람은 먼저 터를 정하고 다음으로 재목을 살피고 그다음에 짓는다. 법을 세우는 것은 터이고, 인재를 선택하는 것은 재목이고 정령(政令)은 짓는 것이다." 정조 임금은 인재를 가리켜 집을 짓는데 쓰여 지는 재목(材木)과 같다고 했다. 그런데 정조가 재위 중 가장 신임한 재목은 누구였을까. 정조가 점찍은 인재는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이었다. 정조는 다산보다 열 살 연상이었다. 다산은 소과에 합격하자마자 문명이 파다했다. 정조는 다산이 지은 과거 문안을 보고 큰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눈여겨 본 것이다. 정조는 그를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기용한다. 정조는 다산과 학문을 토론하고 의기를 투합했다. 그러나 조정에 출사한 천재 다산이 개탄한 것은 정파와 권력에 좌우되는 인사정책의 모순이었다. 당시 조선의 주요 벼슬은 당파와 특정 가문이 독점하고 있었다. 아무리 뜻이 좋고 실력을 갖췄어도 같은 당이나 권력의 가문 출신이 아니면 기용되지 않았다. 다산은 조선을 개혁하려 했다. 실학을 수용해 가난한 조선의 경제 사정을 극복하고 오랜 당파싸움과 성리학 일변도에만 침잠했던 관리의식을 고치려 했다. 정조의 밀명을 받고 암행어사로 지방 실정을 돌아본 다산은 당시 관료사회의 비행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목민심서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개탄했다. "요즘의 수령이란 자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하고 어떻게 목민해야 할 것인가는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병들어 줄지어 쓰러져 구렁을 메우는데, 목민관들은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정조가 승하하자 다산을 싫어한 조선의 관료사회는 그를 18년간이나 땅 끝 마을 강진에 유배시켰다. 사약을 보내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산은 강진에서 학문에만 빠져 5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저술한다. 반듯한 조선을 만들고 과학과 실학을 수용해 근대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를 철저히 타부시하고 선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구태의 이데올로기를 탈피하지 못하다가 그만 신흥 일본의 침략을 막지 못하는 열등국가로 전락했다. 그 역사의 과오를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얼마나 뼈아프게 느끼고 있는가 ? 이제 곧 지방자치단체장과 시구도의회 의원을 선출하게 된다. |
□ 이순신 장군 전투일지
날짜 |
해전 |
장소 |
조선군 |
일본군 |
조선군 피해 | |
1592.5. 4 |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
91척 |
50척 |
1명 부상 | |
1592.5. 7 |
합포 해전 |
진해시 웅천동 |
92척 |
5척 |
없음 | |
1592.5. 8 |
적진포 해전 |
통영시 광도면 |
92척 |
13척 |
없음 | |
1592.5.29 |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
26척 |
13척 |
이순신,나대용 피격, *거북선 처음 사용 | |
1592.6. 2 |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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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척 |
전사11명 부상47명 (사천,당포,당항포 총계) | |
1592.6. 5 |
당항포 해전 |
고성군 당항포리 |
51척 |
26척 | ||
1592.6. 7 |
율포 해전 |
거제시 장목면 |
|
10척 | ||
1592.7. 8 |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면 견내량 |
56척 |
73척, 병력1만 |
19명 전사, 116명 부상 | |
1592.7.10 |
안골포 해전 |
진해시 안골동 |
|
42척 |
없음 | |
1592.8.29 |
장림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
173척 |
6척, 병력30 | ||
1592.9. 1 |
화준구미 해전 |
부산시 사하구 |
|
5척 | ||
1592.9. 1 |
다대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
|
8척 | ||
1592.9. 1 |
서평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
|
9척 | ||
1592.9. 1 |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
|
2척 | ||
1592.9. 1 |
초량목 해전 |
부산시 동구 |
|
4척 | ||
1592.9. 1 |
부산포 해전 |
부산시 동구 |
170척 |
470척, 병력 7만 명 |
정운 전사, 6명 전사, 25명 부상 | |
1593.2. 1 |
웅포 해전 |
진해시 웅천동 |
89척 |
40척 |
4척 전복 | |
1594.3. 4 |
2차 당항포해전 |
고성군 당항포리 |
124척 |
31척 |
없음 | |
1594.10.4 |
장문포 해전 |
거제시 장목리 |
|
불명 |
없음 | |
1597.7.16 |
칠천량 해전 |
거제도 칠천량 |
300척 |
1,000척 |
원균, 이억기, 최호 전사, 288척 격침 | |
1597.8.27 |
어란포 해전 |
해남군 어란포 |
12척 |
8척 |
없음 | |
1597.9. 7 |
벽파진 해전 |
진도군 벽파진 |
12척 |
13척 |
없음 | |
1597.9.16 |
명량 해전 |
해남군 진도군 |
13척, 1,170명 |
333척, 2만 6,600명 |
없음 울돌목 해전 | |
1598.7.19 |
절이도 해전 |
고흥군 고라금 해수욕장 |
이순신170척, 1만 7000명 명 진린128척, 2만 6000명 총병력 298척, 4만 3000명 |
100척 |
불명 | |
1598.10.2 ~ 10. 4 |
장도 해전 |
순천시 장도 |
불명 |
명 수군 62척 격침, 2,300명 전사, 조선군 360명 사상 | ||
1598. 11.19 |
노량 해전 |
남해군 노량리 |
조선수군 170척, 1만 6640명
명수군 66척, 2만 3700명 총병력 236척, 4만 340명 |
500척 전멸 |
이순신 전사, 10명 전사, 300명 부상
※난중일기에 마지막 주역점괘 “지화명이 3효” | |
총계 |
26전 25승 1패 (1패는 원균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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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명군 포함), 492명 부상, 불명 390명, 격침(명군 포함), 211척 총 사상자 3,23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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