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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엔아랫마을 하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 구경한번 와보세요보기엔 그냥 시골장터지만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 |
전라도 쪽 사람들은 나룻배 타고경상도 쪽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경상도 사투리에 전라도 사투리가오손도손 왁자지껄 장을 펼치네 ---- 구경한번 와보세요오시면 모두모두 이웃사촌고운 정 미운 정 주고 받는경상도 전라도의 화개장터 ---- |
하동군은 경상남도 남서부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진주시와 사천시, 서쪽은 전남 광양시와 구례군, 남쪽은 남해군, 북쪽은 산청군과 함양군,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시와 접하고 있다. 총인구가 약 5만여명에 이른다.
자연환경은 동서의 폭이 좁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지형으로 북쪽에는 해발 1500m 이상의 높은 산지가 모여서 형성된 지리산 국립공원이 있으며 남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진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알프스 라고도 불리우듯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빼어나다. 하천으로는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섬진강에 화개천, 횡천강 등이 합류한다.
□ 화개장터
화개장터는 본래 화개천이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열리던 장으로, 섬진강의 행상선(行商船) 돛단배가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상류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화개장은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있으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소속되어 있고, 5일마다 정기적으로 장이 섰다.가수 조영남이 ‘화개장터’노래를 부름으로써 이곳 화개장터는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 쌍계사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쌍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13교구 본사로 말사는 43개이며, 4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이 절은 723년 (성덕왕23)에 의상의 제자인 삼법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때 소실된것을 벽암스님이 1632년(인조1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칠불사 가야국 김수로왕의 부인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었다. 김수로왕과의 사이에 10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태자가 되었고 둘째 셋째 아들은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가 되었으며, 일곱 아들은 장유화상의 지도아래 출가하여 승이 되었다. 드디어 일곱 아들이 성불했다는 소식을 듣고 허황후는 아들들을 만나려 수도처로 달려갔더니, 연못 속에서 황금빛 가사를 걸친 일곱 아들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게 되고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그 후 김수로왕은 기뻐하며 아들들이 공부하던 곳에 대가람을 이루니 그곳이 바로 오늘의 하동군 화개면의 지리산 반야봉에 위치한 칠불사이다. □ 남사예담촌 경북에는 안동하회 마을, 경남에는 산청남사 마을이 옛날부터 양반마을로 그 명성이 자자했을 정도로 산청 남사예담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로 선정된 전통한옥마을이다. "남사 예담촌" 이란 말은 옛 담 마을 이라는 뜻으로,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이 담겨 있으며, 올곧은 옛 선비들의 기상이 서려있는 마을로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 마을에서는 700년 된 매화나무가 대를 이어 꽃을 피우고, 600년 묵은 감나무에서는 지금도 홍시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 아름다운 흙담과 어울어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고 있다. 사양정사에는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정씨집안은 곳간을 열어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줬다고 한다. (정몽주 선생의 후손인 정제용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움) □ 최참판댁 “평사리”(박경리의“토지”무대) 1926년 경상남도 충무(통영)에서 태어나,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 졸업한 뒤 결혼했으나, 부군은 좌익으로 몰려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1955년 단편 〈계산〉과 단편 〈흑흑백백〉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2007년 7월말 폐암이 발견됐고, 2008년 4월 4일 뇌졸중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였으나, 2008년 5월 5일 숨을 거뒀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경리의 사망 직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외동딸 김영주는 시인 김지하와 결혼하였으며 현재 원주시 토지문화관 관장직을 맡고 있다. <토지> 줄거리
▶ 제 1부 요약 (1, 2, 3, 4권) 1897년부터 1908년까지 약 10년간, 하동의 평사리를 무대로 5대째 대지주로 군림하고 있는 최참판댁과 그 소작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860년대부터 시작된 동학운동, 개항과 일본의 세력 강화, 갑오개혁 등이 <토지> 전체의 구체적인 전사가 된다. 동학 장군 김개주와 윤씨부인에 얽힌 비밀이 차차 풀려 나가면서 --- 신분문제와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귀녀와 평산 등이 최치수를 살해하며, 전염병 창궐과 대흉년, 조준구의 계략으로 결국 최참판댁이 몰락한다. 최참판의 딸 서희는 조준구의 세력에 맞섰던 마을사람들과 함께 간도로 이주한다. ▶ 제 2부 요약 (5, 6, 7, 8권) 1910년부터 약 7~8년간 간도에 정착한 서희 일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경술국치이후 간도 이민현상과 독립운동의 여러 면모, 가치관의 변절 등 당시 간도 한인사회의 삶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된다. 서희는 공노인의 도움으로 용정에서 대상으로 성장하나, 함께 온 농민들은 외지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서희와 길상의 혼인, 구시대를 대표하는 김 훈장의 죽음, 이용과 월선의 애끓는 사랑과 월선의 감동적인 마지막 모습, 일본의 밀정이 된 김두수와 길상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의 대립이 펼쳐진다. ▶ 제 3부 요약 (9, 10, 11, 12권) 최서희 일행이 간도에서 귀국한 다음 해인, 1919년 가을부터 1929년 광주학생운동까지 약 10년여의 세월을 다루고 있다. 주된 공간 배경은 1920년대 서울, 진주, 만주 등으로 점차 확대된다. 특히 일제에 의하여 추진된 자본주의화와 경제적 억압이 도시를 중심으로 포착되고, 여기에 이상현을 중심으로 3·1운동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지식인 집단의 갈등과 혼란이 엮어진다. 조준구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서희의 허무감, 김환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의 의병활동, 송관수를 중심으로 한 형평사운동, 간도와 만주의 망명객들의 생활, 이상현과 기화의 불륜, 임명희와 조용하의 결혼이 그려지며, 임이네와 용이, 김환 등은 죽음을 맞이한다. ▶ 제 4부 요약 (13. 14, 15, 16권) 1929년의 원산 노동자 파업에서부터 만주사변, 남경대학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상황이 주로 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되고, 농촌붕괴와 도시유랑민들의 증가 등 1930년대 일제의 폭압과 혼란상이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전개된다. 특히 조선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예술, 사상, 민족성 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전편을 통해 폭넓게 제시된다. 서희의 아들 환국과 윤국의 성장, 길상의 출옥, 군자금 강탈사건 이후 만주로 도피하는 송관수의 갈등, 명희의 이혼과 새로운 삶, 유인실과 일본인 오가다의 사랑, 그리고 인실의 도피와 변신, 색소폰주자로 떠도는 송관수의 아들 영광의 모습 등이 그려진다. ▶ 제 5부 요약 (17, 18, 19, 20, 21권) 1940년경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민족의 삶이 확대된 공간을 오가며 다양하게 펼쳐진다 서희는 박 의사의 죽음, 양현과 영광의 슬픈 사랑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으며, 인실과 오가다의 재회, 길상의 관음탱화 조성, 소목장이가 된 조병수와 아버지 조준구의 처절한 죽음, 후일담 형태로 채워지는 평사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주요 인물간에 얽혔던 한이 한겹씩 풀어진다. . 또한 해도사와 소지감 등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모임, 이홍의 딸 상의의 일본인 학교생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된 우개동의 행패 등을 통해 일제말의 현실이 적극적으로 그려진다. 1945년 8월 15일, 양현은 강가에 나갔다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이를 서희에게 전한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1897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달려온 <토지>의 마지막 장면이다.
□ 마고성, 삼성궁
이름도 생소한 마고성과 삼성궁을 설명하기에 앞서, 우선 우리의 고대사를 그것도 역사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소설같은 내용을 우리 역사탐방 회원들에게 짧은 시간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함이 앞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한민족이라면 꼭 알아야 하는 우리 역사의 시원과 관련됨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알려주고 싶은 역사학도로서의 오기도 발동하게 된다. 우선 본 강의가 들어가기 전에 역사를 기록함에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 방법이 있음을 말하고 싶다.
① 객관적 기술 (歷) : 과거의 객관적 사실을 기록 / 역사가는 사실만을 정확히 기록한다 / 실증주의
② 주관적 기술 (史) : 과거의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으로 재구성 / 역사가의 해석을 기록 / 상대주의
다시 말하면 100% 검증되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만을 역사로 인정하고 기록하는 방법을 객관적 기술이라 하는데, 그리하면 글자가 없던 시대에 신화 형태로 전해오는 선사 이전의 역사적 사실들은 역사가 아닌 것으로 되고 만다. 그리하면 우리 민족은 뿌리가 없이 갑자기 지상으로 튀어나온 사생아가 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고조선 이전의 역사는 단 몇줄로 신화라고 소개되고 말았다. 그 결과 기원전 약 5천여년의 우리 역사는 우리 한민족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 오늘날 마고성과 삼성궁이란 이름으로 흔적만 간신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삼성궁 = 환인, 환웅, 단군 3신을 모신 궁)
다음은 마고성과 삼성궁과 관련한 자료를 검색하여 여기에 소개한다. 다음 자료(뮤대륙 이야기)는 아직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신화적인수준의 내용임을 말씀드린다..
제1장 : 한국인의 뿌리
□ 사라진 「무 대륙」
1926년 가을, 전세계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 육군의 예비역 대령인 제임스 처치워드(James Churchward)가 「잃어버린 무 대륙(The Lost Continent of Mu)」이라는 책에서 고고학자들도 들어보지 못한 무 대륙의 실재를 주장한 것이다. 그는 1868년부터 인도에 머무르면서 원주민들 사이에 전설로 내려오는 무 대륙에 대해 듣고 필사적으로 그 확인 작업에 매달렸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인도의 옛날 사원에서 무 대륙에 관한 사실이 적힌 옛 점토판을 발견하여 그것을 해독했다. 그 결과, 원주민들 사이에 전승된 무 대륙이 상상의 땅이 아니라 실제로 태평양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대륙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이러한 확신이 서자, 무 대륙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 50년 동안이나 세계 각지를 떠돌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방대한 자료와 사진들을 수집하였다.
드디어 제임스 처치워드 대령은 아주 오랜 엣날에 일어났던 지구상의 대 폭발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득한 옛날, 지금의 태평양이 있는 위치에 무(Mu)라는 광대한 대륙이 있었다. 그 동쪽 끝은 현재의 이스터 섬, 북쪽 끝은 하와이 제도, 서쪽 끝은 마리아나 제도 그리고 남쪽 끝은 지금의 쿡 제도에 해당한다. 동서의 길이는 8,000km, 남북은 5,000km로 지금의 태평양 면적의 절반 크기다. 이 무 대륙에 인류가 나타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5만 년 전의 일이다. 이곳에 살았던 인간은 매우 우수한 민족으로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고 있었다. 태양을 숭배하고 세계를 지배했던 무 제국은 날로 번영했다.
어느 날, 전대미문의 거대한 화산폭발이 있어났다. 대지가 갈라지며 지옥의 불길 같은 거대한 불기둥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땅이 요동을 치고 바다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무 대륙은 조각조각 갈라지며 바다 밑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태평양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무 대륙이 바다 속으로 잠기고 커다란 해일이 지구를 덮쳤다. 지금으로부터 1만2천5백년 전, 지구가 생긴 이래 최초이자 최대의 문명을 건설했던 무 대륙은 이렇게 사라졌다.』
□ 고대 문명은 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인류가 나타난 이후 지구의 자연 환경에는 커다란 변화가 여러차례 있었다. 여러 번의 빙하기가 반복되었는데, 빙하기에는 지구의 많은 부분이 얼음으로 덮여 있어서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 빙하기의 사이에는 간빙기가 있어서 기후가 따뜻해지고, 빙하가 녹고 비가 많이 내렸다.
마지막 빙하기는 제4기 빙하기로 “뷔름빙기”라고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11만년전에 시작되어 12,000여년 전에 끝났다. 뷔름빙기 때 지구의 북반구는 완전히 눈으로 덮혀 있었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적도 이남과 아프리카, 중동,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정도였으며 유럽 전체와 시베리아, 캐나다 북부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이 때 캄차카반도 와 시베리아 일부 지역이 얼지 않은 것은 높은 산맥이 북극으로부터 내려오는 냉기류를 차단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효과로 아시아 대륙과 그 남부지역은 빙하의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할 수가 있었다. 고대문명은 이들 지역에서 태동하게 된다. 빙하로 덮혀 있었던 기간이 최소 5만년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고대에 아시아 문명이 유럽보다 월등히 앞서 발전할 수 있었던 명백한 이유가 지구물리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다.
□ 서해바다는 육지였다.
지구가 따뜻해지자 빙하가 녹게 되어 지구상의 바다 수면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빙하기 때보다 바다는 넓어지고 육지는 줄어들었다. 따라서 빙하기 때의 동아시아의 지형은 한반도와 일본, 중국 대륙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해는 거대한 호수였다. 빙하기가 끝나자 바다의 수면이 높아지면서 비로소 오늘날의 한반도 지도처럼 된 것이다.
즉, 선사 시대에는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면서 한반도 모습도 여러 차례 변하였다.
그러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약 1만 년 전쯤, 오늘날 한반도 모습이 생겨난 것이다.
□ 무 대륙의 마고문명이 한반도로 들어왔다.
1만2천5백여 년 전에 태평양의 뮤 대륙이 해저 가스층 붕괴로 사라지자, 생존자들이 무 대륙 북서쪽지역인 서남해와 한반도 지역으로 들어왔다. 무 대륙의 생존자들을 이끈 이는 마고라는 여사제이다. 뮤 대륙에서 이주해 온 마고족은 서남해 토착민과 하나가 되어 태양족인 마고족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마는 무의 변음이다
무 대륙은 바닷물이 넘쳐 땅을 덮고, 해저 가스층의 폭발로 대륙의 지반이 붕괴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작은 섬들이 살아남았다. 지금의 태평양 섬들이다. 이러한 비극이 일어난 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1만2천5백 여년 전의 일이다. 우리의 직계조상이 되는 마고麻姑는 ‘사라진 무 대륙에서 온 어머니 여신’이라는 뜻이다. 무·마는 모와 같은 뜻, 즉 어머니라는 뜻으로 무의 변음이다. (고는 여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봄)
아틸란티스 문명과 함께 지진으로 남태평양 바다속으로 붕괴된 '무'대륙의 문명인 마고문명이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일본구주지역과 대만지역,그리고 남해지역의 해저에서 대형 피라미드 건축물들이 잠겨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뮤 대륙이 붕괴된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북상하여 지금의 서해지역에서 집단거주를 하면서 마고문명을 건설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서해를 중심으로 하는 산동. 한반도. 요하지역 등 주변 지역이 현 인류문명의 시원지라 할 수 있는 마고문명권(환 문명권)이라고 할 수 있다.
▲ 1만년 이전 육지였던 서해지역의 마고문명(환 문명)은 사라진 태평양의 무(마)문명을 계승했다.
[부도지]에서 말하는 마고성이란 북쪽 천산지역이며, 이곳으로 이주한 황궁씨가 남긴 문명이 요하지역 홍산문명이다. 홍산문명 유적지에서 마고여신상과 마고 여신전이 발굴된 이유이고, 요하지역에 천산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 마고문명과 거석문화
마고는 여성 통치자이며 제사장이다. 요하지역의 홍산문명과 산동지역의 대문구 또한 여신전이 발견되어 여성 통치자와 제사장이 지배한 문명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이는 무대륙의 문명이 모계문명 이었음을 보여주며, 마고문명권의 특징이 고인돌로 대변되는 거석문화로 뮤대륙의 문명도 거석문화가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고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한반도 고인돌 역시 마고를 상징하는 거석문화로 볼 수 있다.
고대 무 대륙과 연결되었을 오키나와 해저에서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피라미드가 발견된 바 있다. 라무가 통치한 뮤 대륙에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많았을 것이고, 마고전설을 담고 있는 고인돌들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서남해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한 이유가 될 것이며, 서남해의 용왕신이 마고 할머니인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