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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는 충남 서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청양군, 부여군과 접하고 서쪽은 서해에 면하였으며, 남쪽은 서천군, 북쪽은 홍성군과 접한다. 총인구는 약 10만여명이다.
동부는 차령산맥의 남서 끝부분에 위치하는 산악지대를 이루며 서부는 해안지대로서 대체로 평지를 이루고 있다. 남북으로는 길게 산지와 평지의 점이지대를 이루며 넓은 평야가 있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여 일찍부터 간척지로 이용되었다. 1995년 보령군과 대천시가 통합되면서 보령시가 되었다.
□ 개화예술공원
개화예술공원은 약 18ha (약54,000평) 규모로 모산조형미술관과 세계 최대 규모의 조각공원, 화인음악당, 허브랜드로 이뤄졌다. 주황색 지붕의 모산조형미술관은 보령에서 나는 오석으로 지었으며, 여러 유망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조각공원은 조각상, 시비 등 총 1,500여 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입구로 들어서기 전부터 거대한 조각 작품들이 즐비하다. 주로 오석을 이용한 작품들이다. 현존하는 시인들의 시를 새긴 육필시비공원도 볼거리다. 공원 곳곳에 7개의 연못과 폭포, 산책로 등이 조성되었다. 사슴과 토끼, 오리 등도 자유롭게 노닌다. 그리고 개화예술공원 가까이에 석탄박물관도 있어서 볼거리가 다양하다.
□ 성주사지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 법왕에 의해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었다. 법왕은 삼국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위령하는 뜻으로 세웠다고 한다.성주사로 개명된 것은 통일신라 말기이며,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 하나로 이름 높았던 곳으로 아주 번성했던 사찰이었다고 한다. 성주사라는 명칭은 성인이 거하는 절이라는 뜻인데, 성인은 신라 말기의 무염국사를 일컫는다고 한다. 무염국사가 성주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 성주사는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 등 천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였으며, 성주사에서 정진하는 수도승만 2,000여명에 달했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어림잡기도 힘들다.
이곳에서는 백제 시대에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역사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사적 307호로 지정된 성주사지에는 현재 국보 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를 비롯하여 , 국가보물 및 지방문화재 등으로 지정된 유물이 다수가 있다. 낭혜는 무염국사의 시호이며, 신라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열세살의 나이에 입문한 낭혜는 21세에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 그곳에서 선종을 익혔고, 귀국하여 성주사의 주지가 되어 신라의 선종을 크게 융성시킨 낭혜는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진성여왕이 낭혜를 기리기 위해 시호와 함께 부도비를 세우게 되었었다. 무염국사 입적 두해 뒤에 세운 부도비로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썼다. 이 부도비는 전해오는 신라의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또한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 역시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하여 신라 부도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비신의 재질은 성주산이 주산지인 남포오석이다.
□ 순교성지 갈매못 ---천주교 박해의 현장,
순교성지 갈매못은 천주교 순교사적지로 전래 초기에 천주교인들의 신앙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던 내포(內浦)지방의 연못이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조선 제5대 교구장이던 주교 ‘다블뤼’는 주교의 복사이자 회장인 ‘황석두’와 함께 당진에서 체포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신부 ‘위앵’·‘오메트르’도 자수하였다. 또한 ‘장낙소’도 제천에서 체포되어 이들 모두는 의금부로 압송되어 심한 문초를 받은 뒤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마침 고종의 혼인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던 관계로 서울에서 형을 집행하는 것이 문제가 되자 보령의 수영(水營)으로 옮겨져 처형하였던 것이다. 이곳 수영에서는 갈매못에서 처형했으므로 이곳이 순교유적지가 된 것이다.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던 갈매못은 병인박해 때에 군문효수를 당했던 ‘다블뤼’ 주교 등을 비롯해 수많은 무명 순교자의 피로 물든(1866년3월30일 성금요일) 처형장이었다.
대원군이 이 자리를 처형장으로 택한 것은 명성황후의 국혼이 예정된 시기로서 수도에서 200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 형을 집행해야 탈이 없으리라는 무당의 예언도 있었고, 러시아와 프랑스 함대가 침략을 시도한 서해의 외연도가 아스라히 바라보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인근의 오천성은 충청수영이 있던 곳으로서 다른 지방과 다르게 전국의 죄인들이 여기까지 와서 처형당하기도 했던 것이다.
전래적으로 이곳은 무서운 곳으로 알려져 마을사람들이 누구도 이 근처에 오지 않았으나, 1927년부터 이 곳이 성지로 관리되기 시작했고, 1975년에 순교비가, 1999년 경당이 완공되어 수많은 순례 단체가 줄을 이어 방문하고 있다.
단체 순례자들은 언제나 편리한 시간에 미사봉헌을 예약할 수 있다. 이곳은 2013년부터 충청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 상화원 (죽도)
대천해수욕장 아래 죽도에 위치한 개인소유의 상화원은 죽도의 자연을 지키고자 만들어진 한국식 전통정원으로, 조화를 숭상 한다는 뜻의 상화원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섬 둘레에는 1km에 이르는 지붕 있는 회랑이 설치되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긴 회랑이라고 한다.
죽도 섬 전체가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정원이며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아름다운 바다 풍경과 한옥의 멋스러움을 만날 수 있다. 섬 전체 산책로에 데크가 깔려 있고 지붕도 있어 날씨가 뜨거운 날이나 눈 비가 오는 날이면 한층 걷기가 좋을 것이다.
상화원에는 한옥마을, 판석광장, 하늘정원 등이 조성 되어 있으며 판석광장은 보령의 특산물 오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늘정원은 3층 건물 높이로 서해안 낙조를 볼 수 있다.
상화원은 특히 사라질 위기에 있는 한옥들을 이곳으로 옮겨와 원형 그대로 복원해 놓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상화원 입구에 있는 의곡당은 원래 고려시대 후기에 건립된 화성 관아의 정자로서, 현존하는 목조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라고 한다. 본래의 귀한 기둥이 남아있고 대들보가 살아 있어서 서까래와 기둥 몇 개만 추가하면 보존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한옥 9채가 들어서 있는데 보령 지역에 있던 한옥을 그대로 옮겨 왔거나 전국에 보존 가치가 있으나 사라질 위험성이 있는 한옥을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 보령 석탄박물관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사업 이전까지, 전국의 80여개 탄광에서 연간 163만여톤의 석탄을 생산할 때 보령 성주리 탄광촌은 충남지역 최대 탄전지역이었다. 그중에도 이곳 성주리 일대의 탄광에서는 우리나라 석탄생산량의 10%를 차지하는 거대한 탄광촌이었다.
그러나 석탄산업합리화사업 이후 연차적으로 페광이 진행되어 1994년 심원탄광을 마지막으로 보령지역의 탄광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오늘날 그 흔적만 남아 과거를 말해주고 있다.
고된 하루의 끝 ! 땅 속 깊은 곳 막장은 30도를 웃도는 지열로 열기가 가득하고, 지하수가 흐르고 있어 습하기까지 했다. 지하 수백미터 깊은 밀폐공간에서 광부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벗어 땀을 짜내며 일해야 했다. 작업을 끝낸 광부들은 막장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목욕탕으로 달려가 땀과 탄가루로 범벅이 된 몸을 씻어 내고 그날의 일과를 마무리 한다.
땀과 탄가루로 범범이 된 광부들의 얼굴은 씻어도 씻어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렇게 고된 하루를 보내고 동료 광부들과 함께 탄가루를 씻어준다는 돼지고기를 안주로 막걸리 한 사발씩 쭉 들이키며 하루의 피로를 털어 버리곤 하였었다.
이들의 피땀으로 캐어낸 석탄은 연탄이 되어 우리네 방구들을 덮혀주고, 매서운 한겨울을 이겨내게 해주었으며, 공장을 돌려 생필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광부들은 석탄 생산량으로 임금을 책정하는 도급제로 일하였으며, 밥먹을 시간도 제대로 없이 탄광 작업장에 한번 들어가면 일이 끝날때까지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이 도시락을 준비해서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광부들은 작업장 휴계소에서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으며 밥의 일부를 쥐에게 던져 주기도 했다. 갱내에서는 쥐는 사고를 예견해주는 수호신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쥐를 발견하면 안심하고 작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오천항
보령에 오천항이라는 항구만 있었다면 특별할 것 없는 곳이었겠지만, 이 곳에는 오천항을 한 눈 에 담으며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닐 수 있는 옛 성곽길, 충청수영성이 있어서 한층 특별하다.
바다, 돌성곽길, 나무 등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 속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 오천성 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별로 크지 않은 항구인데도 유명세를 타는 이유는 저 멀리 보이는 수영성의 모습을 보아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성곽길을 따라 가면서 바라본 풍경은 바로 오천항, 서해바다이다.
오천항 충청 수영성이 더욱 빛났던 건 바라보는 풍경이 바로 바다라는 점, 보면 볼수록 참으로 절경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곳이다. 충청 수영성에서 바라 본 오천항의 모습이다. 운치가 있다.
오천성(鰲川城)은 조선 중종 5년(1510)에 서해안 방어 기지의 하나로 쌓은 성이다. 구릉 주변 에 성을 쌓아 성밖과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주 전망 좋은 곳이다. 오천항은 백제 때 부터 배가 드나들던 항구로 일본과 중국을 향한 중요한 교역항이었고, 조선 시대에 와서는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수영(水營)이 있었으니 군사적인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곳이다.
□ 보령의 역사인물 (토정 이지함)
이지함은 보령사람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형백(馨伯), 호는 토정(土亭)이다. 서경덕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한강변에 흙담 움막집을 지어 살았으므로 자신의 호를 토정이라 했다.
이지함은 사육신 중 이개의 후손으로 이개는 성삼문·박팽년·하위지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 김질(金礩)의 밀고로 체포되어 죽게 된다. 그런 연유인지 이지함은 벼슬길에 연연해 하지 않았는데, 이지함 선생은 재물을 가볍게 여겨서 남에게 주기를 잘했으며 세상의 화려함 이나 음악, 여색에 담담하여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산의 현감으로 있을때 걸인 들을 구제해주기 위해 걸인청을 운영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경전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사서와 제자백가의 책까지도 섭렵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날이 밝도록 공부했으나 이웃에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있어 연희를 베푸는 장면을 보고는 그것을 천하게 여겨 마침내 그만두었다고 한다.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웠던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던 토정 이지함은 당대에 궁핍한 삶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던 백성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위안과 희망을 주는 토정비결이란 비결서의 저자 기도 했다. 따라서 대중적으로 점을 보는 것은 토정 이지함 (李之菡)(1517 (인종 1)~78(선조 11))이 토정비결을 만들면서부터 민간에 서서히 보급이 되기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명 조식선생이 “조선의 장자”라고 극찬했던 토정 이지함 선생의 묘가 보령에 보존되어 있다.
한국 천주교 박해사 연표
시 대 |
중 요 사 항 |
(1) 지봉 이수광 : 지봉유설(백과전서)에 “천주실의” (2) 교산 허 균 : 중국에서 최초로 천주교 12단 기도문“을 얻어와서 소개함 / 최초의 천주교 신자(세례하고 관계없음) (3) 성호 이 익 : 성호사설에서 “천주는 유학의 상제이며, 불교의 석가와 같다” 천주교를 긍정함으로써 제자중에 천주교 신자가 많이 나왔다. (4) 안정복 : 천주교 전파운동을 일으킴 / 제자 이가환, 정약종, 이승훈, 이벽, 권철신, 홍유한 등이 대부분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물론 천주교를 비판하는 제자도 있었다) | |
1784 (정조 8) |
이승훈이 세례 받고 귀국. 조선교회 창설 / 두 번째 순교자 |
1785 (정조 9) |
을사추조적발사건 / “김범우”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됨 |
1790 (정조14) |
베이징 교구에서 제사 금지령을 내림. (조상 제사 금지) |
1791 (정조15) |
진산사건 / 전라도 진산군에 사는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유교식 상장(喪葬)의 예를 쓰지 않고 조문을 받지 않았으며, 외종사촌 권상연과 함께 로마 가톨릭 예식으로 장례를 치렀고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라 버림 윤지충과 권상연은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고 난행(亂行)하였다는 죄명으로, 1791년12월8일(음력11월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함. |
1795 (정조19) |
주문모 신부 입국 |
1800 (정조24) |
정조 죽음 |
1801 (순조 1) |
신유사옥 (천주교에 대한 조선정부의 첫 공식박해) 당파싸움이 원인 (300여명 순교) / 주문모, 이승훈, 정약종 등 사형, 정약용 등을 귀양 / 오가작통법과 연좌제 / 황사영 백서 사건 / 300여명 순교 / 서소문에서 사형 |
1836 (헌종 2) |
모방 신부 입국, 정약용 선종 김대건 등 마카오 유학 |
1839 (헌종 5) |
기해사옥 / 3명의 프랑스 천주교 신부를 처형 |
1845 (헌종11) |
김대건 신부 귀국 |
1846 (헌종12) |
병오사옥 |
1849 (헌종15) |
최양업 신부 귀국 |
1866 (고종 3) 정월 |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 / 불과 수개월 동안 국내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됨 / 이 사건을 빌미로 병인양요 발발 |
1868 (고종 5) |
독일인 오베르트 (남연군묘 도굴실패) |
1880 (고종17) |
뮈텔 신부 입국 |
1942 |
노기남 주교 승계 |
1968 |
김수환 서울 대교구장 승계. 병인 순교 복자 24위 시복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