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영조 34년인 1758년에 천주교에 대한 제재령이 내려 졌다.또한 사도세자의 비행인 고변자 나경언을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이라는 주장을 하여
결국 그를 참수하였다.
1776년 영조 52년에는 문소의(文昭儀, 영조의 후궁)가 아이를 잉태했을 때에
양인(良人)의 아들을 몰래 구하여 적자(즉 사도 세자)의 지위를 빼앗고자 몰래
도모하는 것에 함께 참여하였기 때문에 극형에 처한 뒤 그 처자들을 연좌시켜
노비의 적(籍)에 올렸다.
문녀(文女) 및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은 사사(賜死)하였고,
윤양후(尹養厚)는 경폐(經斃)하고, 이상로(李商輅)와 심상운(沈翔雲)은 목을 베어 죽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의 죽임을 당한 사람은
대부분이 무고 아니면 유언비어에서 였다.
무고나 유언비어의 방법으로는 익명으로 글을 쓴 뒤 시장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붙여 방방곡곡에 퍼지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런 것을 ‘괘서’라고 불렀다.
영조 31년 나주에 붙었던 괘서의 내용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나주 괘서 뿐 아니라 조선시대 붙었던 수많은 괘서의 내용은 모두 사라졌다.
이유가 있다.
괘서엔 정치적으로 과격한 내용이 담겼는데, 주로 고위 관료나 임금이 타깃이었다.
특히 임금에 대한 내용은 차마 그대로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4자 흉언’, ‘6자 흉언’, ‘8자 흉언’이라는 식으로 대체됐다.
그래서 괘서가 발견되면 불태운 뒤 내용만 상부에 보고하곤 했다.
『영조실록』을 보면 나주 괘서에 담긴 내용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영조가 직접 국문에 참여한데다, 주변 신하들이 만류할 정도로 냉정함을 잃고
격분한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나주 괘서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록을 통해 대략
유추는 가능할 것 같다.
결국 이 사건은 영조를 지지하지 않던 소론계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수사가 종결되면서 대대적인 숙청으로 이어졌다.
당시 숙청 규모를 보면 영조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론의 주요 인사 500명이 사형된 것은 물론 이들 집안의 가족들은 노비로 만들었다.
또한 조태구 등 이미 사망한 소론 주요 리더들의 관직도 삭탈됐다.
뿐만 아니라 소론과 가깝다는 이유로 밀풍군 이탄을 비롯한 많은 종친들까지 사정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영조는 업적도 많다.
허지만 여론이나 흉언에 민감한 성격이어서
결국 아들인 사도세자까지 죽게한 불우한 왕이 되고 말았다.그의 말년에는 치매와 난청이었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드루킹을 보면, 조선 후기 예언서를 이용한 모의세력이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당시 모의 세력이 성벽이나 시장에 붙이는 궤서로 여론을 조종했듯,
이들은 ‘현대판 궤서’ 댓글을 이용했다.
댓글에 의해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영조처럼 흔들려서는 안된다.
과감하게 색출하여 불행한 나라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천민에서 왕에 올랐던 영조.
제대로 해보려고 했지만 밑에서 흔들어 댔으니...
결국 아들까지 죽여야 했던 영조.
참으로 불우한 왕이었다.
지금도 광화문에서는 박근혜를 '마녀사냥'이라며
문재인을 탄핵하라고 태극기시위를 하고
그 반대쪽에서는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역사가 판단할 일이겠지만
하여튼 불행한 일이다.
국제 정세도 심상치가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