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
구약과 신약 사이의 400년 정도의 역사/ 기독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
중간사의 의미
1. 말라기 ~ 마태복음(세례 요한) 사이의 역사
2. 약 400년 정도의 기간
3. 하나님의 말씀이 없던 시기 ㅡ 선지자가 없던 시기 “침묵기”
제사장과 선지자
1)제사장 = 사람 편에서 나와서 사람을 등지고 하나님을 상대로 사역하는 사람
2)선지자 = 하나님 편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들을 상대로 사역하는 사람
선지자의 역할: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 하나님의 입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이 깨어지지 않도록, 그 언약이 유지되도록 돕는 역할(돌아오라고 선포함)
선지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타락했다는 이야기
엘리야, 엘리사가 있었던 시대는 정말 문제가 많았던 시대/ 가장 큰 위기의 시대
큰 선지자가 있었던 시기가 가장 타락했던 시기였습니다!!!!
선지자가 많다는 이야기는? 그 시대가 정말 타락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사장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언약이 다 깨진 상태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역할
하나님의 입 – 선지자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안 보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할 때까지….
제사장도 있고, 성전도 있고, 레위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선지자만 없었어요.
그 시기를 "침묵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고 마지막 선지자로 보낸 사람이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은 말라기 선지자까지가 아니라, 세례 요한 때까지입니다.
구약성경을 10시대로 분류하면,
1. 선사 시대
2. 족장 시대
3. 이집트 시대(430년) - 240년의 노예생활
4. 출애굽 시대(or 광야시대) 40년
5. 가나안 정복 및 사사시대(
6. 통일왕국 시대 – 사울, 다윗, 솔로몬
7. 분열왕국 시대 – BC 931년
북 – 여로보암(19명의 왕 / 722년 앗수르에 인해서 한번에 멸망함)/ 9개의 왕조
살만에셀5세가 사마리아를 공격했지만 마무리 못했고, 사르곤2세가 사마리아를 멸망시킴.
남 – 르호보암(20명의 왕 / 586년 바벨론에 멸망)/ 아달랴(여왕)
605 – 느부갓네살 귀족과 왕족을 잡아감 그런데 이것이 착각임을 알다. 이스라엘은 종교지도자들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됨/ 그래서 제사장들을 잡아감
597 – 에스겔(종교 지도자들을 다 잡아감) 여호야긴도 잡아감 (역사에서는 이 때를 멸망으로 봄)
세계사는 이 때 유대가 멸망했다고 봄
586 – 성경에서는 성전이 무너졌을 때, 예루살렘성이 무너졌을 때, 유다가 멸망했다고 기록함
582 – 예레미야서 마지막 장 52장에 나옴/ 가난한 모든 사람까지 잡아간 때
8.포로시대 – 바벨론 포로 70년
9.포로귀환시대(3차례) – 538년 스룹바벨/ 458년 에스라/ 444년 느헤미야
10.400년 침묵시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
페르시아가 아직 통일된 국가를 가지지 못하고 도시 국가 형태로 있을 당시, 메대(메디아)가 바사(페르시아)를
다스리고 있던 때입니다. 페르시아가 메대의 속국이었을 때가 있었답니다.
이 때는 아스티아게스라는 메대왕이 바사까지 다스리고 있을 때입니다. 그에게는 만다네라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스티아게스 왕이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의 딸 만다네가 소변을 누었는데 전 도시가 물에 잠기고, 아시아 전역에 물이 범람하는 꿈이었지요.
아스티아게스 왕은 메대 정치인들이자 해몽가들인 마고스들 즉 사제들에게 이 꿈을 이야기하고 꿈의 해석을 청했습니다. 애굽의 바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등 고대로부터 왕이 꿈을 꾸면 늘 이렇게 번거로워지나 봅니다.
사제들이 말한 꿈의 해몽은 만다네가 낳은 아이가 아스티아게스를 반역하고 결국은 아시아 전체를 점령하게 될 것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그러자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이 일에 대처하기 위해 메대인들 중에서 사위를 고르지 않고 바사에서도 중류층보다 훨씬 낮은 처지에 있었던 캄비세스라는 청년에게 딸을 시집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결혼한 딸 만다네가 임신했을 때 아스티아게스 왕은 전보다 더 해괴한 꿈을 꾸게 됩니다.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의 음부에서 포도나무가 자라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제들은 이번에도 '만다네의 아이가 왕이 되어 아시아를 지배한다'고 해몽했습니다. 아스티아게스도 위협을 느꼈는지 그의 오른팔과 같은 신하 하르파고스라는 자에게 자신의 손자가 태어나면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르파고스는 아스티아게스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만다네의 아들을 산속에 있는 소치기 내외에게 맡겼습니다.
때마침 소치기 집에서도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소치기의 아내는 만다네 공주가 낳은 아들을 자기 아들로 기르고, 자신의 죽은 아들의 시신을 왕자의 시신으로 하여 왕자의 장례를 치르게 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는 만다네와 캄비세스는 바사로 이주를 하지요.
그렇게 메대에서 소치기의 아들로 살고 있는 만다네 공주의 아들이 10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아이가 친구들과 놀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직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모했던 소치기의 아들은 그날 그의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왕으로 뽑혔는데 아이들에게 정확한 역할을 분담시키고, 보고하게 하고, 명령을 어긴 아이는 심하게 매질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 심하게 매질 당한 아이는 메대의 귀족인 왕의 신하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소치기의 아들에게 맞고 온 것에 대해 분했던 신하는 왕에게 소치기의 아들을 고발했고, 결국 아스티아게스 왕은 소치기의 아들을 만나게 되지요.
그런데 한눈에 자기의 손자임을 알아본 아스티아게스 왕은 늠름한 외손자를 보고 마음에 감동이 왔는지 고레스를 그의 친부모인 만다네와 캄비세스가 살고 있는 바사(페르시아)로 보냅니다. 그러나 아스티아게스 왕은 자신을 속인 신하 하르파고스만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스티아게스 왕은 하르파고스를 식사에 초대하여 하르파고의 아들을 죽여 요리한 음식을 먹게 해서 처벌을 했습니다.
자기의 아들을 죽여 만든 요리를 먹고 원한을 품은 하르파고스는 결국 아스티아게스에 대한 반란을 꾀하고,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 고레스를 메대와 바사 전체 왕이 되게 합니다. 아스티아게스 왕의 꿈이 현실이 되고 있던 것이죠. (성경과 5대제국 조병호지음 pp.192-193)메대 바사제국은 메디아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인데 외손주인 바사왕 고레스가 외할아버지의 나라 메대제국을 정복한 스토리입니다. 류모세선교사가 쓴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3부” pp196-209에도 이런 내용이 나오고, 바사와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벨론으로 쳐들어 갔는데, 바벨론 성이 얼마나 웅장했는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성벽이 3개나 되었고 그 중간에 수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바벨론 왕은 벨사살이었는데, 고레스가 쳐들어온 날 벨사살은 귀족 천 명을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 그때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온 금, 은 그릇으로 술을 마셨다. 그때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썼는데,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다. 다니엘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다니엘을 불러 벨사살 왕이 본 글을 해석했는데,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우바르신)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다”(단 5:25-28)
결국 그날 밤에 갈대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62세였더라(단 5:30,31)
메대 역사를 보면 다리오(카악사레스 2세/ 고레스의 삼촌) 1년이고 바사 역사를 보면 고레스 1년이다.
야사를 보면,
고레스가 쳐들어와도 벨사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치를 벌이고 술을 마셨습니다. 성이 워낙 철두철미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성문 가운데 쪽문을 발견했습니다. 오물, 쓰레기가 쌓여있는 곳이었습니다. 그쪽으로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쪽은 군사가 없었습니다. 고레스가 한 명씩 들여보냈습니다. 들어가서 보니까 밖에는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안에는 군사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이겼던 것입니다.
*고레스도 자신의 작은 나라가 대제국이었던 바벨론을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놀랍게 승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복하고 보니까 넓은 바벨론 영토를 다스릴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넓은 영토를 도무지 관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539년 고레스가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칙령의 내용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모든 나라
백성들을 다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가는 것이었습니다.
* 538년 이스라엘 1차 포로귀환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던 모든 민족이 다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약 50년 정도의 포로생활(586-538)
605년 첫 바벨론 포로들을 기준으로 하면 605-538년 약 70년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하면서 해방을 위해서 갈망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고레스가 칙령을 발표해서 돌아가라고 했을 때 이미 바벨론에 정착한지 많게는 68년, 짧게 잡아도 50년이 지났습니다. 바벨론은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제국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돌아갈 고국 예루살렘은 살기가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과연 다 돌아갔을까요? 그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200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돌아간 사람들은 약 5만명이었습니다. 주로 성전건축을 위한 사람들이고, 부자들은 노예를 데리고 돌아갔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페르시아제국에서 살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있었습니다.
* 536년 예루살렘 성전 재건 시작(성전기초를 놓음)
성전 폐허의 잔재들을 다 치우고 땅의 기초를 다시 세우려고 하는데, 페르시아 군대가 와서 중단을 시켰습니다. 성전 지을 자재들을 다 준비해 두었는데...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은 자신들의 재산들을 성전을 재건하는데 다 바쳤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재건하지 못한 상태로 16년 정도가 흘러갔습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이 기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바닥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520년에 학개와 스가랴가 나타나서 성전을 다시 짓자고 했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백성들에게 다시 돈을 내라는 의미였습니다. 학개는 “성전을 재건하고 나면 세상의 보물이 올 것이다.” 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독려했습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 2:9)
솔로몬 성전보다도 지금 짓는 스룹바벨성전의 영광이 더 클 것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지을 때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결국 516년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을 풀지 못하면 신약의 성전을 풀 수 없습니다. 언약궤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 봉헌식에 5만명이 참여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 봉헌식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고 축복을 기대했을 것인데...
학개. 스가랴의 말을 따라서 모든 것을 바쳤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학개. 스가랴이후에는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 458년 2차 포로귀환
에스라(학사)
* 444년 3차 포로귀환
느헤미야(총독)
2,3차 포로귀환에 대해서는 페르시아 역사 안에서 설명할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역사
559-530 고레스의 통치
530년 고레스의 첫째 아들 스멜디스 죽음(캄비세스가 죽인 것?)
530-522년 둘째 아들 캠비시스가 왕이 되어 다스림(캠비시스가 형을 죽이고 왕이 됨)
522년에 가우마타가 왕이 됨(자기가 스멜디스라고 함)
‘가우마타 스멜디스’라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우마타는 자기가 ‘합법적인 왕’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우마타를 “적법한 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다리오가 반란을 잠재우고 왕이 되었습니다.
522/521 사실 다리오도 합법적인 왕이 아니었습니다.그래서 자기가 합법적인 왕임을 증명하려고 페르시아를 세운 고레스의 건국이념 등을 그대로 따라가겠다고 선포했습니다.
520년 이스라엘에 학개와 스가랴가 나타났습니다. = 성전재건 독려 = 516년에 완공
536년에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서 성전재건이 중단되었습니다. 520년까지.
다시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 이스라엘 총독이었던 닷드내가 다리오에게 조서를 보내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고레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라고 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별궁에서 고레스의 칙령을 발견해서 다리오는 성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다리오가 고레스의 이념을 그대로 따라야 자신의 정통성을 세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전쟁(그리스와의 세 번에 걸친 전투)
기원전 800년경부터 그리스는 지중해에서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식민지건설과 무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의 세력 확대는 당시 오리엔트의 중심 세력이었던 페르시아와 불가피한 충돌을 야기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3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페니키아의 뒤를 이어 소아시아 서안의 그리스 식민지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아테네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에 저항했습니다. 페르시아가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다리우스 1세의 원정군이 그리스 본토까지 진출하려는 도중에 실패하고 돌아간 전쟁으로 기원전 492년에 일어났습니다.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은 다리우스 1세가 아테네를 응징할 목적으로 에게 해를 건너 아테네로 쳐들어간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리오가 수많은 군대를 데리고 쳐들어갔지만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이것이 490년 마라톤 전쟁입니다.
마지막으로,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가 총력을 기울였던 전쟁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상호 협력을 맺어 전쟁에 대처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군대를 괴멸시킨 480년 살라미스 해전은 전쟁의 판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전쟁의 최종 승리는 그리스에 돌아갔습니다. 이때 페르시아 왕이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로(Xerxes)였습니다.
* 486년 아하수에로왕(Xerxes)가 페르시아 통치
* 484년 페르시아의 모든 장관들을 다 모이게 함
* 483년 모든 사람들을 다 모아 6개월 동안 잔치를 벌임
단순히 먹고 마시는 잔치가 아니라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분위기를 북돋우고
임무를 맡기는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울러 왕의 권위를 국내는 물론
만방에 높이 세우는 잔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왕이 왕비가 나오라고 하는데 말을 듣지 않아서 폐위시켰습니다. 에스더서에는 왕비 와스디를 폐위하고 곧 바로 새로운 왕비를 간택한 것처럼 나오지만, 에스더가 새 왕비가 된 것은 아하수에로 왕이 그리스와 싸웠던 살라미해전(패배) 이후였습니다.
480년 아하수에로 왕이 그리스를 정복하려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리스가 거짓 항복했다가 역습을 해서 페르시아가 패배했습니다. 페르시아가 이기는 줄 알고 돌아가는데 뒤통수를 쳤던 군대가 스파르타였습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한 것이
“영화 300”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아하수에로 왕은 낙담한 상태였고, 그때까지 공석이었던 왕비를 새롭게 간택하려고 했습니다. 그 동안 페르시아의 왕비를 간택할 때, 가장 유력한 일곱 가문의 딸들 중에서 간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일곱 가문의 딸들 중에서 뽑지 않고, 모든 페르시아 여인들 중에서 간택했습니다. 얼굴이 예쁜 것을 기준으로 왕비를 간택했습니다.(?)
* 479년 페르시아 왕비의 조건 - 가장 예쁜 사람을 왕비로!!!
이러한 예는 없었지요. 결국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 464년 아하수에로가 죽음 - 아닥사스다가 왕이 됨
* 460년 이집트에서 반란. 페르시아를 치려고 함
* 459년 이집트를 진압함
그래서 아닥사스다가 가장 신뢰하는 메가비주스장군을 이집트로 보내서 진압합니다. 하지만 이집트는 항상 위협적인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사이에 완충지대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458년 2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있었지만 말입니다.
* 458년 이스라엘의 2차 포로귀환
그래서 아닥사스다가 할 수 없이 458년 2차 포로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페르시아가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서 이스라엘 포로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 444년 이스라엘의 3차 포로귀환
449년 그렇게 믿었던 장군 메가비주스가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믿는 도끼에 발 등 찍힌 꼴이 되었지요./ 아닥사스다가 배신당했습니다.
445년 메가비주스가 반란을 철회하고 항복합니다.하지만 아닥사스다가 징하게 고민합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황폐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 고민하다가 고향에 보내달라고 왕에게 간청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도 이집트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완충지대로 만들려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느헤미야를 유다 총독으로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부탁해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느혜미야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세 번째 포로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와 헬라제국이야기
알렉산더와 페르시아 간의 두 번에 걸친 큰 전투 이야기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기원전 356년 7월 말 ~ 기원전 323년 6월 10일)는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돈의 아르게아다이 왕조 제26대 군주입니다. 그리스 폴리스 제국(諸國)과 오리엔트 지방에 대한 공격적 팽창으로 패권을 잡아 마케돈의 바실레우스(군왕), 코린토스 동맹의 헤게몬(패자), 페르시아의 샤한샤(왕중왕),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임하고 스스로를 퀴리오스 티스 아시아스(아시아의 주主)라고 칭하였습니다.
기원전 356년 펠라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20세의 나이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해 바실레우스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치세 기간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미증유의 군사 정복 활동으로 보냈고, 30세가 되었을 때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 이르는, 그 이전까지 고대 서양에 전례가 없던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유년기의 알렉산드로스는 16세가 될 때까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기원전 336년 부왕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로스는 필리포스가 개척한 부강한 왕국과 숙련된 군대를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코린토스 동맹의 패자로 추대된 알렉산드로스는 그 권위를 이용해 팽창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334년 그는 소아시아에서 군림하던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10년에 걸친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 등 몇 차례의 결정적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분쇄했고, 마침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페르시아 제1제국을 멸망시켰습니다. 이 시점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돈 제국의 강역은 아드리아 해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렀습니다.
"세계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으로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 인도를 침공했으나 병사들의 반발로 회군하였습니다. 바빌론을 제국의 수도로 삼기 위한 개발을 계속하던 와중이었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는 계획했던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시작하지 못한 채 바빌론에서 사망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그가 죽자마자 일련의 내전으로 산산이 조각났고, 조각난 각각의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들과 참모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자칭하면서 각각 왕을 칭하고 할거하였습니다. 이들을 디아도코이라 합니다.
1) 이수스(이소스) 전투(BC 333년)
기원전 333년 남부 아나톨리아의 이소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으로 침입해 약 4:1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전투입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침입해 들어가서 페르시아 속주 총독들의 군대를 물리치고 1년간 거의 모든 소아시아 지역을 손에 넣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다리우스 3세는 페르시아 내부에서부터 군대를 끌어모아 반격을 준비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을 먼저 보내 이소스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소스는 군사적 요충지로 페르시아가 이소스 일대를 차지하면 다리우스는 함대와 보급을 동시에 얻고 소아시아의 알렉산드로스의 배후를 위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리우스는 파르메니온이 '요나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알고 대군을 이끌고 시리아에서 우회하여 북쪽에서 이소스 평원으로 진격했고 이소스를 먼저 저항 없이 차지했습니다. 그는 남겨진 알렉산드로스의 부상병의 손을 모두 자르고는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이때 자신이 마케도니아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흩어져 있는 군사를 모아 남쪽에서 파르메니온과 합세했습니다.
양쪽 군대의 병력에 대해서 현대의 연구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추산합니다. 물론 페르시아군의 규모에 대한 고대의 기록은 훨씬 과장 되어있습니다.
페르시아군: 경보병 63,000 / 페르시아 불사부대 10,000 /
그리스 중장보병 10,000 / 기병 11,000
마케도니아군: 경장보병 13,000 / 중장보병 22,000 / 기병 5,850
다리우스의 군대는 좁은 해안가에 진을 쳤고 중앙의 강가에 말뚝을 박아 적을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다리우스는 그 자신이 중앙의 배후에 최정예 보병과 함께 위치하고 그 앞에 그리스 중장보병들과 페르시아 보병을 배치, 기병은 우익을 맡아 타격대로 배치했습니다. 왼편 산기슭에는 경보병 한 부대를 배치하여 알렉산드로스의 배후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반면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최정예 컴파니언 기병대을 직접 지휘하여 오른쪽 날개를 맡고 테살리아 연합군 기병을 좌익에 배치하고 중앙은 파르메니온이 이끄는 팔랑크스를 배치했습니다. 기병을 좌우익에 나누었지만 주력인 기병을 우익에 집중했습니다. 이는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전장의 특성상 좌익과 우익에 기병을 고루 분배할 경우 바다에 면한 좌익의 움직임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는 알렉산드로스의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전투는 항상 격동"인 상태에서 그의 기병대는 우익에 쏠려 격동적으로 페르시아 제국군의 좌익을 격파한 뒤 후미와 우익을 연이어 공격함으로써 포위 섬멸전의 정석을 보여줍니다.
전투는 페르시아의 기병이 강을 건너 마케도니아의 왼쪽을 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왼쪽 날개는, 2년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전투에서 난제를 맡았는데 그것은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군을 맞아 최대한 버티면서 오른쪽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정예 기병이 페르시아를 격파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중앙의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은 강을 건너 페르시아의 전열에 가까스로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컴페니온 기병대를 이끌고 직접 다리우스의 본진으로 돌파해 들어갔습니다.
페르시아의 전열은 급속히 무너지고 다리우스는 급히 후방으로 도망쳤고 알렉산드로스는 좌익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뒤로 돌아 페르시아의 그리스 용병의 뒤에서 공격했습니다. 다리우스가 도망가는 것을 본 페르시아 군대는 앞다투어 도망치기 바빴고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마케도니아군은 패주하는 페르시아군을 해질 때까지 뒤쫓아 살육하였습니다. 이때 페르시아군의 시체로 강은 붉게 물들었고 댐을 이룰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전투로 페르시아군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다리우스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로는 처음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완패하였습니다.
2) 가우가멜라 전투(BC 331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 나서 이수스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합니다. 그리고 다리우스를 즉각 추격하지 않고 페니키아의 적 함대 기지를 공략합니다. 티로스를 마지막으로 페니키아의 적 함대 기지에 대한 공격을 끝낸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평화 제안을 거부하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우가멜라 부근의 평원에 진을 치고 있는 적과 결전을 벌입니다.
당시 페르시아 군으로서는 맞서 싸우기보다는 작은 접전으로 적을 괴롭혀 탈진 시키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다리우스는 정면 격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페르시아 군은 전차부대에 유리한 평탄한 가우가멜라의 평원에서 수적 우세를 이용, 강력한 기병대를 좌우에 포진한 기다란 전열이었습니다. 다리우스는 중앙에 1000명의 기마 호위병과 인도, 카리아인 기마병 뒤에서 지휘하였고, 유일하게 훈련받은 그리스 용병인 장갑보병 2000명이 그와 함께 대기하였습니다. 베수스(Bessous) 휘하의 좌익은 동부 지방의 기병대가 맡았는데 그중 사카 카타프락트(Saca cataphracts)라고 불려지는 작사르테스 출신 중장기병 1000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마자이우스(Mazaeus) 휘하의 우측 전열은 서부의 기병대가 맡았습니다. 보병부대가 기병의 후미를 맡았고 선두에는 200여대의 전차 부대가 포진했으며, 코끼리 15마리가 중앙에 포진하였습니다.
말은 코끼리와 맞닥뜨리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다리우스가 잘 활용하였다면 알렉산드로스의 기병에게 대단히 효과적인 작전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장에서 코끼리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수비대형 접근작전을 채택하여 선두에 밀집대형 군대를 적진 대열의 반쯤만 되는 길이로 배치하였고, 양측면에 긴 종대를 붙여 지원했다. 중앙에는 밀집대형 군대와 히파스피스트 6개 부대, 중앙 좌측에는 파르메니온 휘하의 기병대와 궁수 등, 우측에는 필로타스(Philotas) 휘하의 켐패니언 기병을 비롯한 기병들과 투창병, 마케도니아 궁수가 배치되었습니다. 좌측은 많은 동맹국 기병, 우측은 클레안더(Cleander)의 베테랑 용병과 궁수, 투창병을 포함한 기병으로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가우가멜라 전투는 페르시아군의 불안정성과 그리스 군 좌익의 취약성의 문제였습니다. 전투 전날 다리우스는 병사들을 밤새 무장시킨 채 세워둬 병사들을 피로하게 하였습니다. 10월 1일 아침, 알렉산드로스는 컴패니언 기병대가 낫-전차부대와 마주보고 있음을 알고,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진격해 보병을 전차부대와 마주서게 했습니다. 컴패니언 기병대는 평탄한 지반의 거의 끄트머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적의 그러한 이동을 막지 못하면 전차부대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카 카타프락트를 진격시키고 박트리아 기병대를 뒤따르게 해서 알렉산드로스의 극우 대열과 상대하게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노련하게 새 부대를 새로운 단위로 편성해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컴패니언 기병대는 꽤 오래 페르시아군을 견제하였고 이어 창병이 적을 물리쳤습니다. 이어 시작된 페르시아 전차부대가 공격해왔지만, 투창병이 던진 창에 혼란에 빠져 참패했습니다.
다리우스는 적의 마지막 예비대를 우익 그리스인들에게 투입된 것을 알고, 베수스가 실제보다 잘 하고 있다고 오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정적인 2차 포위 공격의 감행을 결정하고, 모든 기병대 대열을 앞으로 진격했습니다. 페르시아 좌익은 컴페니언 기병에게 집중 공격을 가하는 대신, 우측의 그리스 군으로 공격방향을 돌렸고, 선두대열에 균열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는 그 빈틈을 향해 전열을 선회시켰고, 밀집대형 군대의 일부와 컴패니언 기병이 쐐기꼴 대형을 이루어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리우스는 보병 호위대가 살해되는 동안 교묘히 도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컴패니언 기병과 밀집대형 군대 4개 부대가 진격하여 생긴 그리스 전열의 빈틈에 뛰어든 페르시아 기병 호위대가 밀집대형 군대를 둘로 갈라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리스 좌익을 무너뜨릴 기회를 버리고 후방의 수송로를 약탈했습니다. 그리스 좌익의 파르메니온의 군대는 포위되어 곤경에 빠졌습니다.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에게 구원을 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승리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그 요청을 듣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승리를 뒤로 미루고 컴패니언 기병대를 돌려 구원하게 합니다. 그는 페르시아 호위병 일부와 격렬한 교전을 벌였습니다. 페르시아 병사들은 다리우스의 도주를 알고 사기를 잃고 후퇴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우익은 무너졌고 베수스 휘하의 좌익은 질서정연하게 퇴각하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의 재건을 막기 위해 총 추격에 나섰습니다.
세계 최대 전투 중 하나였던 가우가멜라 전투의 승리로 페르시아는 멸망하게 되었고, 중근동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강까지 원정하였고, 동서 문화 융합에 힘써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제국은 분열되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형성된 헬레니즘 문화는 간다라 미술 형성에도 영향을 줍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가 보여준 군사개념과 전군의 공조체계 등은 전쟁사에 큰 획을 남기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이 놀라운 전법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장군과 황제 나폴레옹이 사용했습니다.
유대 역사와 관계가 있는 알렉산더 이야기
느부갓네살은 전쟁에 미친 사람이지만, 알렉산더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전쟁에 미친 사람들, 모든 싸움꾼이 정복하려고 했던 땅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두로”(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땅, 섬 두로, 육지 두로)였습니다. 두로는 마치 뉴욕과도 같은 지역이라 세계 모든 물류가 모이던 곳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냐를 시작으로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까지 정복하는데 10년 걸렸는데, 손톱보다 작은 나라 두로를 정복하는데 무려 7개월이나 걸렸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두로는 육지 두로와 섬 두로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육지 두로에서 나온 물건(쓰레기)를 바다에 던져서 길을 만들어서 섬 두로(Tyre)를 정복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이전에는 한번도 정복되지 않았던 땅이 두로 섬이었습니다. 육지 두로를 무너뜨리고 나서 7개월 동안 두로 섬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육지에서 두로에 길을 놓아서 정복해 버립니다.
“네 재물을 빼앗을 것이며 네가 무역한 것을 노략할 것이며 네 성을 헐 것이며 네가 기뻐하는 집을 무너뜨릴 것이며 또 네 돌들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에 던질 것이라”(에스겔서 26:12)
두로 –“지중해의 돈을 모이던 곳”이 멸망했습니다. 상권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두로를 대신해서 지중해의 돈을 긁어 모으는 역할을 할 항구가 필요했는데, 그곳이 바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두로에서 이집트를 향해 내려가는데 두로와 이집트 사이에 있던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군사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데,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저 앞에서 오는 모습을 보고, 알렉산더 대왕이 말을 타고 오다가 자기도 말에서 내려서 걸어서 그 사람들을 맞이했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중에 할아버지가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 두루마리를 펴더니 단 11장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책, 성경에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말하고, 자기들은 그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들은 알렉산더는 전쟁 없이 예루살렘을 정복합니다.
이를 계기로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하는 곳마다 유대인에게 중요한 자리를 주었습니다. 이때 생긴 것이 은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곳마다 경제(돈)와 교육을 꽉 잡았습니다. 상류층의 자리를 유대인들이 많이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곳곳마다 회당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지낼 때는, 회당에 유대인들이 모였지만, 다 포로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헬라제국)이 등장한 후부터 회당에 모이는 유대인들은 사회지도층들이었습니다. 남의 나라에 살면서도 유대인들은 잘 살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호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뭔가 좀 배우고 싶은데 그들의 언어(히브리어)를 모르니 참 답답했습니다.
그러던 시기에,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집트를 점령하러 내려갑니다. 이집트는 늘 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쉽게 이집트를 정복했는데 보니까 한 도시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무역항 두로를 대신해서 이집트 북쪽에 무역항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그래서 지중해의 중요한 무역항이 이곳으로 바뀌었습니다. BC 323년(23살) 인도를 정복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33세 나이에 알렉산더는 죽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하는 지역마다 두 가지를 통일시켰습니다.
1. 언어 - 헬라어
2. 문화 – 헬레니즘(철학, 문학, 예술, 신화, 외모지상주의, 달변가 우대)
사도 바울이 등장했을 때 언어가 통일 되지 못했다면 선교하는 것은 몇 백 년 걸렸을 것입니다. 침묵기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 = 헬라제국의 언어와 문화를 통일시킴 (헬레니즘)
Hellenism 헬레니즘 = 인간 중심, 개인 중요, 논리 중요, 사실 중요
Hebraism 헤브라이즘 = 신 중심, 공동체/관계 중요, 직관(느낌) 중요, 의미 중요
3. 유대인 이주 -> 신약 때까지 이어짐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들린 곳이 회당인데, 헬라제국 내에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이주하면서 남자 성인 10명이 모여 사는 지역마다 회당이 공식적으로 세워졌습니다. 회당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회당에서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지만 언어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 323년 알렉산더가 죽고 거대한 헬라제국은 장군들에 의해 4개로 나누어집니다.
● 마게도냐(수도/본국) - 카산더와 부인 데살로니가
카산더가 부인을 위해서 만들어준 도시가 데살로니가
● 비두니아 - 리시마쿠스
●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 셀루키드
*수도는 안디옥/ 정치의 중심지
*다소 / 교육의 중심지 = 바울이 태어나기 수 백 년 전부터 교육의 중심지
이곳에도 많은 도서들이 있었음
●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예루살렘) - 톨레미
*수도는 알렉산드리아
*톨레미는 장군이 아니라 학자였습니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정말 귀한 책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알렉산더와 함께 정복전쟁을 하면서 귀한 책들을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그 책들을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지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
다니엘서에 헬라제국이 넷으로 나누어지는 것과 셀루키드와 톨레미왕조에 대해 예언되어 있다.
카산더와 리시마쿠스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톨레미2세
-어디를 가나 유대인들이 가장 잘 사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에게 그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신들에게는 잘 사는 비법이 담겨있는 책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책이 바로 구약성경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톨레미2세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관장이었던 데메트리오를 보내서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대제사장 엘르아살을 만나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잘 사는 비법이 담긴 책과 히브리어로 된 그 책을 헬라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제사장 엘르아살은 각 지파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한 학자들을 6명씩 뽑았습니다. 72명이 와야 하는데, 70명만 보내왔습니다. 이들을 각 방에 한 명씩 집어넣고 히브리어로 된 성경 구절을 한 구절씩 주고 번역하고 다 모아서 조사 하나 틀리면 다시 해석하게 해서 주전 270년경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성경이 70인역입니다. (BC 270년경)
이 성경이 바로 초대교회에서 봤던 성경입니다.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최초의 성경입니다. 이 성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성경이 폭발적으로 읽혀지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인용한 구약성경은 거의 다 70인역이었습니다.
* 198년 안티오커스 3세와 톨레미5세 전쟁
이때 팔레스타인이 셀루키드 왕조(시리아)로 넘어가게 됨
셀루쿠스 왕조가 예루살렘에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습니다.
190년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안티오커스 3세가 친구 사이였는데, 한니발이 꼬셔서 로마와 전투하도록 했는데, 시리아가 로마에 완전히 박살 났고, 그 결과 12년간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모든 돈을 다 긁어 모아서 전쟁 배상금을 갚았습니다. 178년까지 계속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리아는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175년에 안티오쿠스 4세가 왕이 되어 자기 이름을 바꿈 =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에피파네스 – 신의 현현/ 신으로 나타난 자/ 자신을 신으로 섬기라고 요구
에피마네스 – 미친놈(바보) -> 히브리어/ 유대인들이 안티오쿠스를 부르던 이름
에피파네스가 강력한 왕이 되길 원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 174년 예루살렘 대제사장 온니아스 3세 - 동생 여호수아
그 당시 대제사장은 전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제사에 쓸 흠이 없는 동물들을 파는 것(요세푸스에 의하면 시중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4배나 비쌈)과 성전세를 위한 환전소에서 벌어들이는 엄청난 수익금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제단 밑에서 흐른 피가 고여 썩은 땅이 아주 비옥하다고 그 흙까지 팔아먹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이 온니아스였지만, 동생 여호수아가 안티오쿠스 4세에게 막대한 돈을 주면서 대제사장직을 자신에게 주도록 요구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헬라화시키는 데 앞장서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궁하고 예루살렘을 헬라화 하는데 온통 신경이 곤두서있던 안티오커스4세는 대제사장 온니아스를 파면시키고 여호수아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해버렸습니다. 안티오커스4세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이름을 제이슨(Jason) – 야손으로 바꾸었습니다. 제이슨은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의 이름을 헬라 이름으로 바꾸게 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여호수아는 타락하여 성전 바로 밑에 자기 돈을 들려 큰 규모의 경기장을 만들고, 경기를 안식일에 열고 자기가 모든 경기들을 주관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아테네, 예루살렘에 올림픽경기장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온통 벌거벗고 경기를 하게 했습니다. 그 일을 대제사장이 주관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가운데 이런 일을 반대하던 경건한 무리들이 뭉쳤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의 무리를 ‘하시딤’ (바리새파의 원조)이라고 불렀습니다.
* 171년 메넬라우스가 여호수아가 안티오커스4세에게 주었던 돈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안티오커스4세에게
가서 대제사장직 요구했습니다.
안티오커스4세에겐 누가 대제사장이 되든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돈만 많이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야손)를 파면시키고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 임명했습니다.
문제는 메넬라우스는 레위지파가 아니라 베냐민 지파였습니다.(마카비상서 2:3)
대제사장 아론 이후 최초로 레위지파가 아닌 베냐민지파에서 대제사장이 된 사람이 메넬라우스였습니다.
아론을 시작으로 지속되었던 대제사장의 정통성이 사라져버렸습니다.
* 안티오커스는 두 번의 뇌물을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에게 넉넉한 돈이 생겼습니다. 단 시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전쟁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군대를 조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공격하려고 했을까요? 로마는 상대하기 힘들어서 안 되고, 당시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치던 알렉산드리아에 지중해의 모든 돈이 모이고 있었기 때문에 안티오쿠스가 바로 알렉산드리아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로마가 깃딤에서 배를 보내서 안티오커스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안티오커스4세가 이집트를 거의 다 정복했는데, 로마가 무서워 - 엄청난 전쟁배상금 때문에 – 결국 눈물을 삼키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때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야손)가 메넬라우스를 덮쳤습니다. 명분은 있었습니다. 메넬라우스가 온니아스 3세를 죽였다는 명분.... 이것이 안티오쿠스 4세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돈 받고 임명한 거지만, 그래도 자신이 임명한 대제사장을 덮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걸 핑계 삼아서 안티오쿠스4세가 시리아로 돌아갈 때, 바닷길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로마에게 당한 모욕과 분노를 성전에 다 쏟아 부었습니다. 이집트를 정복하지 못한 분풀이를 예루살렘에 다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을 파괴했고, 유대인들에게 할례도 행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했으며, 이제부터 제사는 돼지로만 드리고, 성전에 제우스(바알샤멤)을 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스라엘 전 지역에 전령을 통해 안티오커스4세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도한 사람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야손)였고, 이것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을 ‘하시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바리새파의 원조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시작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칭찬하실 만큼.
* 167년 기슬월 (12월) 안티오커스4세의 명령
1. 안식일 금지
2. 할례 금지
3. 제사는 돼지로만
4. 성전에 제우스(바알샤멤) 상 세움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교에 대해서 사상 최대의 박해를 했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안티오쿠스 4세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했으며,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을 살해했고 성전 제단을 부정한 짐승의 피로 더럽혔습니다. 이로 인해 율법을 지키려는 수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려는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마카비 혁명/ 맛다디아이야기
이때에 예루살렘 북서쪽 모데인(Modein) 마을의 하스모니안 가문의 성격이 급하고 뒤끝이 없는 제사장 맛다디아는 왕의 관리로부터 이방의 희생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이 앞으로 나와서 희생 제사를 드렸는데, 맛다디아는 이를 보고 분노해서 왕의 전령과 제사 드리는 모든 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맛다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힘을 합쳤으며, 경건한 하시딤들도 그들에게 동조했습니다.
맛다디아가 죽자(B.C 166), 마카비라 부르는 그의 첫째 아들인 유다가 저항 운동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유능하고 과감했으며 저항 운동을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게릴라전법으로 여러 가지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셀루커스 왕조가 유다의 별명을 ‘망치’로 지어주었다. 그리고 당시의 유대인의 투쟁은 유다의 별명 ‘망치’를 따라서 “마카비 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시리아의 셀류커스왕조는 반란 초기에 그들을 과소평가하여 하급 장군들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격전에 능한 마카비의 군대에게 계속 패배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시리아는 그 전쟁의 심각성을 인식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안티오쿠스는 파르디아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기 때문에 충분한 군대를 유대로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후에 상당수의 시리아 군대가 유대에 파견되었지만, 엠마오에서 유대의 마카비에게 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카비는 그 여세를 몰아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고, 시리아 편에 섰던 대제사장 메넬라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 B.C 164년 12월 유다 마카비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쥬티퍼의 제단을 허물고 새로운 제단을 쌓았습니다.
마카비는 시리아의 요새인 아크라를 공격하게 되자, 안티오쿠스 4세의 사망 후 실질적인 권한을 가졌던 리시아스가 직접 많은 군대를 끌고 진격해 왔습니다. 이때에 마카비는 그들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시리아 군대가 권력 투쟁의 문제로 귀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으로 마카비에게 화해를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164년 기슬월(12월)에 종교적인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돼지 피를 닦고 성전을 청결케 하고 성전을 봉헌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어로 하누카(수전절)라고 하는데, 신약성경 요한복음 10:22절에만 나오는 새로운 절기입니다. 절기는 100% 구약에 나오는 절기지만 오직 수전절 만큼만 중간사에 기반합니다. 경건한 하시딤은 종교 자유의 획득에 만족하고 전쟁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승기를 잡은 유다 마카비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정치적인 자유(독립)을 얻기 위해서 전쟁을 했습니다. 결국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했으며 이때에 시리아 군대에 의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B.C 160년).
한번 승리했기 때문에 그 희망을 가지고 계속 시리아를 공격하지만 맛다디아의 넷째 아들까지 다 죽었습니다.유다 마카비가 전사한 후에 그의 동생인 요나단이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시리아군은 여러 번 요나단의 저항 세력과 싸웠지만 그들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했습니다.
이때에 시리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B.C 153년에 알렉산더 발라스가 스스로 자신을 안티오쿠스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시리아 왕이었던 데메트리우스 1세를 공격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권력 투쟁 속에서 모두 유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때에 요나단은 발라스를 지지했습니다.
발라스는 이에 대한 답례로 요나단을 대제사장 및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왕권과 제사장 권한은 한 사람에게 통합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마치 옛날의 신정정치가 부활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요나단은 시리아의 장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그의 형제인 시몬이 그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리아는 또 다시 내분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시몬이 데메트리우스를 지지했습니다. 이에 대해 데메트리우스는 유대인들에게서 받던 세금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이 때에 유대인들은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시몬을 영구적인 영도자와 대제사장으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하스몬 왕조가 합법화되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메시아로 믿을 만큼 그들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막내 아들 시몬이 142년에 시리아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우리나라 광복절과 같은 날입니다.
바벨론에게 586년에 나라를 뺏겼다 다시 찾은 거니까 444년 만에 독립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444년 만에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이룬 시몬을 마치 누구처럼 느겼을까요? “메시아” 아닐까요? 메시아가 오시면 핍박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다고 믿고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랍비들과 지도자들은 시몬에게 “당신은 왕과 대제사장의 칭호를 동시에 취하시옵소서.” 라고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때부터 왕과 제사장 직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하스몬왕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때부터 왕의 혈통, 제사장의 혈통, 정통성이 다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도 B.C 135년에 프톨레메호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요한이 요한 힐카누스 1세라는 칭호로 시몬의 뒤를 잇게 되었습니다. 몇 개월 후에 프톨레미호의 요청을 따라 안티오쿠스 7세는 그의 지배권을 재확인 하려고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요한 힐카누스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안티오쿠스는 유대의 자치권을 보장 했지만, 예루살렘 요새를 헐어버리고 시리아에 조공을 드리게 만들었습니다.
마카비 일가는 마카비시대 초기에 경건한 하시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통치 때에 하시딤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그리고 에세네파로 분리되었습니다. 처음에 힐카누스는 바리새파와 좋은 관계를 가졌지만, 그들이 힐카누스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놓으라고 요청하게 되자, 관계가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힐카누스는 사두개파와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135년 힐카누스1세가 등극했고, 유다, 사마리아, 갈릴리, 이두매 4지역을 다 회복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당시의 영토 상당 부분을 이 때 회복했습니다. 이때 힐카누스가 이두매를 ‘안티파터’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이게 했습니다. 그때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던 하시딤들도 힐카누스를 도왔습니다. 그래서 힐카누스가 술이 얼근하게 취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불만이 있든지, 무슨 이야기든지 해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시딤 가운데 대표격인‘엘리아살’이 일어나서 “당신은 위대하지만 왕과 대제사장직을 겸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왕의 얼굴이 변했습니다. 엘리아살이 떠난 후에, 사두개파 요나단이 힐카누스 1세에게 엘리아살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시딤 전체가 왕을 반대한다고 거짓말을 해서 힐카누스1세가 하시딤(바리새파)과 결별하게 만들었습니다. 힐카누스가 요나단이 속해 있는 사두개파와 손을 잡았습니다. 당시 사두개파는 백성들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때 사두개파가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하시딤에서 분리된 자들이 바리새파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B.C 105년 힐카누스가 죽게 되자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권좌에 올라 일년간 다스렸습니다.결혼을 잘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살로메 알렉산드라입니다. 힐카누스는 자신의 아내가 여왕이 되기를 원했지만, 아리스토불루스가 권력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였고, 자신의 동생들은 투옥시키거나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B.C 104년에 아리스토불루스가 죽게 되자, 그의 처가 세 동생을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중 큰 형제인 알렉산더 얀네우스를 대제사장 자리에 앉히고 살로메 알렉산드리가 그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정복 전쟁을 통해서 다윗과 솔로몬 당시 모든 땅을 다 회복했습니다. 얀네우스는 하스몬가에서 최초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얀네우스가 유다, 사마리아, 갈릴리, 이두매 4지역을 다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실수한 게 하나 있었는데, 이두매 출신 안티파터를 이두매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얀네우스는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며 바리새파와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당시에 유대 백성들은 바리새파의 편에 서 있었고, 시리아의 원조를 받는 얀네우스와 싸웠습니다. 그러므로 얀네우스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바리새인들에게 잔인한 복수를 자행했습니다. 그는 800명의 바리새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했으며, 그들의 처자를 살해했습니다.
* BC 77년 얀네우스가 죽은 후에 그의 처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권좌를 이어 받아 여왕이되었습니다.
이때가 이스라엘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녀는 대제사장직을 그의 맏아들인 힐카누스 2세에게, 둘째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군사령관직을 맡겼습니다. 여왕이 권력을 나누었습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죽은 남편의 충고를 따라 바리새파(하시딤)와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라가 죽은 후(B.C 68년)에 그녀의 두 아들인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와 권력을 놓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두매 총독 안티파터는 여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교활한 놈이었습니다. 그는 힐카누스2세를 꼬셔서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몰아내도록 했습니다.
BC 63년에 안티파터와 힐카누스2세가 로마의 폼페이와 힘을 합해서 아리스토불루스를 몰아냈습니다.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안티파터도 힐카누스2세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지 못하고,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와서 이스라엘을 장악했습니다. 로마는 형제간의 싸움을 이용해서 유대를 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B.C 63년). 이로 인해 유대는 다시 정치적 독립을 잃고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비운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 폼페이 장군에게 딱 달라붙은 사람이 안티파터였습니다.
BC 63년부터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마카비 혁명을 통해 BC 164년 기슬월(12월)에 종교적인 독립을 쟁취하고 100년 정도 독립된 나라, 하스모니안 왕가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 BC 48년 폼페이가 줄리우스 시저에게 패합니다.
이 전쟁에서 나온 것이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말입니다. 로마의 장군들은 이 강을 건널 때 군대를 해산시키고 반드시 무장해제하고 자기만 건너와야 합니다. 무장해제하지 않고 전군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반역입니다. 율리우스 시저가 그 강을 건널 때, 시종이었던 안토니우스가 시저의 반역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율리우스 시저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들어왔습니다. 반역으로 폼페이장군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1인 독재 통치를 하게 됩니다. 이때 안티파터는 율리우스 시저에게 딱 달라붙었습니다.
* BC 48년 줄리우스 시저가 이두매(에돔) 출신 안티파터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안티파터의 아들을 당시 한직이었던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 받도록 수를 썼습니다. 유대 총독이었던 헤롯이 ‘유대의 왕’ 칭호를 황제 안토니우스에게서 받아낸 것입니다. 그때가 BC 40년이었습니다.
* BC 43년 줄리어스 시저가 원로원에 의해 암살당함
* BC 40년 안토니우스가 황제가 됨
BC 40년 헤롯이 아버지 안티파터에게 딱 달라붙어서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오려고 하는데, 시리아 내전으로 오지 못하고 37년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때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가 바로 헤롯 대왕입니다. 유다, 갈릴리, 베뢰아, 이두매 모든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헤롯이 유대왕으로 임명 받은 연도가 두 개 나오는 이유입니다.
BC 31년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 황제의 권한을 원로원에 바치고, 공화정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합니다. 그래서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최고의 칭호를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로마제국 안에 원로원 도시와 황제도시를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군대는 원로원도시에서만 징집할 수 있게 법으로 정해서 황제를 견제하도록 했습니다.
누가복음 2:1절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바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헤롯도 아버지 안티파터가 이두매 출신이므로 이방인 출신이었습니다. 정통성 문제가 있어서 힐카누스 2세의 딸과 결혼도 했습니다. 헤롯이 자신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했던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이 BC 20년에 성전을 증축/개축/보수한 일이었습니다. BC 516년에 재건되었던 스룹바벨성전은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지만 많이 방치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20절에 보면 예수님 당시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때는 AD 26년경이 됩니다. 헤롯은 아들 딸, 며느리, 사위까지 다 죽였을 만큼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두 살 아래 사내 아이들을 죽이도록 명령한 것은 헤롯에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헤롯 대왕 BC 4년에 죽었습니다. 예수님 태어날 당시 헤롯 대왕은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해는 BC 5-4년경이 됩니다.
헤롯 대왕이 많은 아들 중에서 세 명에게만 땅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습니다.
1) 유대 - 헤롯 아켈라오 - 가장 악한 왕
2) 갈릴리, 베뢰아 - 헤롯 안디바
*헤롯 안디바는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헤롯 빌립(갈릴리 북동쪽을 다스리던 왕과 이름만 같지 다른 인물) 집에 잠시 머물다가 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 부인도 안디바와 눈이 맞아서 둘이 같이 살았습니다. 그 여자가 헤로디아였고, 그 문제를 가지고 지적한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아주 나쁜 놈입니다.
3) 갈릴리 북동쪽 - 헤롯 빌립
헤롯이 아들을 왕으로 임명을 해도 반드시 아들들은 로마로 가서 황제에게 가서 왕으로 인준을 받아야 했습니다. 헤롯 빌립이 자신을 왕으로 임명해준 로마 황제에게 감사의 뜻으로 가이사랴 도시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가이사랴 도시를 지어서 로마 황제에게 바쳤는데, 가이사랴가 이미 있어서 자기 이름을 뒤에 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했답니다. 여기는 황제의 권위가 있고 위협을 느끼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황제, 왕인가 물어보신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엄청나게 큰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당시 도시의 이름에 황제의 이름이 붙는 데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올림픽 경기장, 도서관, 넓은 도로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헤롯 아켈라오는 유대지역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3,000명을 죽였습니다. 유월절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시끄럽게 했다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아켈라오가 황제칭호를 얻기 위해서 로마로 갔는데, 여리고의 유력한 자 50명이 상소를 보내서 오랫동안 로마에 묶여 있다가 몇 년 후에 돌아왔습니다. 그 복수심이 불에 타서 아켈라오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는 다시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래서 옳거니 기회를 엿보던 옥타비아누스/가이사 아구스도는 AD 6년에 아켈라오를 파면시켰습니다. 그리고 노른 자위 땅이었었던 유대 땅을 헤롯의 아들들에게 안 맡기고, 로마에서 직접 총독을 보내서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게 했습니다. 그때 총독으로 보내는 사람은 로마 기사계급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에서 유대에 총독을 보내기 전에 당시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던 사람을 유대로 보내서 인구조사를 하게 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AD 6년 수리아 총독 구레뇨에게 유대 땅의 인구조사를 하게 했습니다. 헤롯을 못 믿어서 구레뇨를 보내서 세금을 제대로 거두기 위해 인구조사를 하게 했습니다. 그 후 AD 26년에 로마에서 신뢰하던 기사계급/ 로마원로원의 실세가 뒤를 봐주던 유대총독이 빌라도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많이 드리니까 피를 땅에 묻어서 냄새도 나고 불결해서 수로를 만들어 예루살렘 성을 청결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루살렘성전에서 받은 성전세로 공사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대제사장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 사람을 건드릴 수가 없어서 3대 절기 때마다 명절을 지키러 돈 들고 찾아오는 갈릴리 사람들을 공격해서 다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 수로를 만들었습니다.(눅 13:1)
로마가 한 일들 중에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제일 중요한 일은 로마제국 전역에 넓은 도로를 만들어 로마와 통하게 한 일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도로 만들기 : 도로 폭 4미터, 인도 3미터 , 전체 10미터
도로를 돌로 깐다. 깊이 1미터 전쟁할 때 방벽으로 삼으려고
43킬로 직선 도로 = 아피아 가도, 애그나티아 가도 40-50킬로 마다 숙박시설
여행을 자유롭게 하라고 강도 도둑들 다 제거
16킬로마다 마패 같은 것을 사용해서 말을 갈아탈 수 있도록 해줌
헬라제국 = 언어통일(헬라어)
로마제국 = 길 만들기, 도로정비
바울이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이 베푼(?) 모든 혜택을 받아 누린 사람입니다.
만약 바울이 전도여행/선교할 때, 당시 아시아와 유럽의 언어가 통일되지 않았고, 전 로마제국을 잇는 도로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2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그렇게 많은 나라를 선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