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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수필작가
정태헌
전남 무안 출생쪾『수필과 비평』,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쪾국제Pen클럽, 한국문인협회, 수필문우회, 대표에세이문학회, 무등수필문학회 회원쪾수필집『동행』 외
│대표 작품│
하루 외4편
“밉다니, 그런 소릴랑 당최 말어.”
도리질하는 모선 할머니의 흰머리 위로 늦가을의 짧은 석양이 지고 있다. 육십 년이 지나도록 무소식인 사람, 그 무정한 사람, 미울 법도 한데 외려 나를 나무란다. 지금도 변함없이 시댁이 있는 남해 바닷가 쪽으로 귀기울임을 놓지 않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돌아올 줄 알았제, 꼭…. 근디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개벼.”
여든하고도 또 삼 년을 곤고히 살아온 모선 할머니, 그 여인네.
그녀는 스무 살에 외진 바닷가 마을로 시집을 갔다. 정분 있게 살던 그들에겐 곧 예쁜 딸도 하나 생겨났다.
“곤곤한 살림이었제, 혀도 맘만은 그득했제.”
한데 시집온 지 삼 년이 지나던 가을 끝 무렵이었다. 바깥 출입에서 돌아온 남편은 저녁상을 물리더니 아내를 조용히 불러 앉혔다. 전에 없이 입에선 술 단내가 풍겨 왔다.
“임자, 삼 년만 기대려 줄랑가.”
요 꼴로 살다간 평생토록 가난을 벗지 못할 터, 일본으로 건너가 한밑천 잡아 올 테니 고생스러워도 기다려 달라는 말이었다. 그런 남편의 말이 내심 믿음직스러웠다.
“그라시오.”
다음날, 남편은 동네 친구 두 사람과 더불어 일본으로 떠났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떠나 보낸 여인네는 그래도 한 점 딸년이 있었기에 더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한데 남편 떠난 이듬해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귀국선이 오가자 마을에서 함께 떠난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도 이제 당연히 돌아오리라, 부둣가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달뜨기 시작했다. 삼 년을 기약했는데 일 년 만에 남편이 돌아오는 것이다.
시부와 시숙이 서둘러 마중 갈 채비를 했다. 따라가고 싶단 말이 목구멍까지 치올랐지만 남세스러워서 차마 입 밖에 내질 못했다. 동구 밖까지 배웅을 하며 말귀도 못 알아듣는 어린 딸년에게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몇 번이고 일러 주었을 뿐.
여인네는 서둘러 다스운 밥을 지었다. 정성껏 마련한 반찬을 소반 위에 올려 상보로 덮어 두고 새로 지은 밥은 아랫목에 묻어 두었다. 마당에 내려앉는 참새소리에도 두 귀가 쫑긋거려졌다. 동동거리는 가슴을 달래느라 동구 밖을 오가며 해질녘까지 서성거렸다.
“을메나 길던지, 그날 기대리는 시간이…….”
어둑할 무렵, 시부와 시숙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함께 떠났던 사람들의 집에선 반가운 울음과 웃음소리가 뒤섞여 담장 너머로 쏟아져 나왔다.
“오것지라우.”
섬돌을 발로 툭툭 차며 하는 시숙의 말이 고마울 뿐이었다.
피치 못할 일이 있어 지금 못 왔을 뿐 여인네는 남편이 돌아올 거란 믿음을 잃지 않았다. 해방이 되었으니 틀림없이 올 거야, 내일은 오겠지, 며칠 후면 동구 밖에 들어서겠지 하고 믿고 믿었다. 그날 이후부터 밥을 지을 때마다 남편의 밥까지 지어 아랫목에 묻어 두었다.
“그게 이 늙은이가 사는 심이었제.”
그 세월 속에서 여인네는 딸년마저 홍역으로 놓치고 말았는데, 남편이 돌아오면 어찌 말을 해야 할까 그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사는 일이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육십 년 세월을 하루같이 문밖에 귀를 세워 두는 가슴졸임이었다. 어느 때라도 불쑥 들어설 것만 같아 밥 담아 놓는 걸 한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혼자 사는 여인네였지만 밤에도 문고리를 걸어 둘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흐르자 친정에선 다른 남자라도 보라고 채근을 했다.
“그럴 수는 없었제, 암, 그럴 수는…….”
그날 밤, 남편과 나눈 그 얘기를 잊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돈 벌어 올 텐께, 그때 우리 잘살어 보세.”
손 잡은 남편의 은근한 말 한마디에
“그라시오”
하질 않았던가.
오늘일까, 내일일까 동구 밖 느티나무에 기대어 기다리던 날들이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였던가. 때론 외진 마을에 홀로 사는 것이 안타까워 친정 조카들이 대처바닥으로 가자 할 때도 듣지 않았다.
“쓰잘데기 없는 소리, 안 가야. 오믄 이리로 올 것인디…….”
돌아와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얼마나 허망해 할 것인가. 세월이 모질고 그리움이 가슴 찢을 때면 동구 밖 느티나무 둥치를 손바닥으로 쓸며 두들길 뿐이었다.
아직도 기다리느냐는 말에 할머니는 손을 저으며 말문을 막는다.
“아야 아야, 그런 소릴 마소. 시방도 보고 싶은디.”
오지도 않을 사람 기다려 무엇 하냐고, 육십 년 기다렸으면 됐지 않느냐고 하니
“하루 같은디, 그새 육십 년이여? 그 사람 간 날이 바로 어저께만 같은디…….”
하고는 아랫목의 놋주발에서 눈길을 거두더니 말을 잇는다.
“살어만 있어도 소원이 없제. 인자 밉지가 않어.”
저 놋주발이, 그 마음 하나가 육십 년 세월을 하루로 꿰어 버린 것일까.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게 세월이라 하거늘.
아름다운 퇴장
이즘 창 너머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 눈길이 자주 머문다. 수령이 오십 년은 족히 넘은 아름드리 나무들이다. 노랗게 단풍 든 오리발 낙엽이 소슬바람에 맥없이 떨어지고 있다. 입동(立冬)이 지났으니, 달포 뒤쯤이면 맨몸으로 찬바람과 눈보라를 맞아야 하리라. 십여 년의 세월을, 이층 사무실에서 창 밖 두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며 계절의 순환을 실감해 왔던 터이다.
은행나무 두 그루는 여남은 발자국 간격으로 나란히 서 있다. 한데 오른편 나무보다 왼쪽의 나무에 더 마음이 쏠린다. 오른편 나무는 단풍 색깔이 께저분하지만, 왼쪽 나무는 노란 단풍이 선명하고 깔밋하다. 게다가 오른편 나무는 낙엽 지는 게 어쩐지 바동거리는 모습이지만, 왼쪽 나무는 그 고운 잎을 미련 없이 떨군다. 무슨 연유 때문일까. 경사진 땅에 생장 조건이 별다른 데라고는 없어 보이는데.
같은 수종이라 하더라도 단풍 색깔은 다양하게 물이 들고 해마다 그 질이 다르다는 말이 실감난다. 기온, 습도, 자외선 등 생장의 외부 조건에 따라 다양한 효소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단풍은 평지보다 깊은 산, 강수량이 많은 곳보다는 적은 곳, 음지보다는 양지, 기온의 일교차가 큰 곳에서 더 아름답다. 오염된 도심의 가로수보다 심산유곡의 단풍이 더 아름답지 않던가.
께저분한 오른쪽 은행나무를 새삼 바라본다. 어쩌면 단풍의 미추는 외부조건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에 그 비결이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만큼 치열하게 살았느냐와 내면의 닦음이 그 색감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어찌 나무뿐이겠는가. 사람 사는 세상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던가. 조용한 삶의 마무리보다 미련과 허욕으로 발버둥치다가 결국 때를 놓쳐 밀려나는 꼴을 자주 목격해 오던 터이다.‘시작할 때’는 아름다웠을지라도, ‘물러날 때’를 선택하지 못해 훗날 이름을 더럽힌 자들이 어찌 한두 사람이랴.
왼편의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문득 이태 전 고국을 떠나 외지로 향한 어느 목자(牧者)의 신선한 모습이 가슴에 젖어든다. 십여 년 전, 그는 신도 수십 명으로 출발하여 어렵게 교회를 일군 목회자다. 충실한 종으로 살아가는 그의 철저한 소임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찾아드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났지만, 부러 예배당도 짓지 않고 교회를 이끌어 왔다. 신도 수가 수천 명이 넘게 교세가 확장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교회 건물을 짓지 않았다. 교인들은 건축을 재촉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학교 건물에 더부살이하며 오로지 이웃을 사랑하고 하늘을 찬양할 뿐이었다. 그는 교회를 시작할 때 신도들에게 약속한 바를 실천하고자 했다.
애초 그는 ‘십 년 동안만 이곳에서 봉사하고 떠나겠다’고 언약을 했다. 또한 헌금의 절반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할 것이라 약속했다. 봉사와 사랑을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기에 교회의 외형과 신도 수보다는 기도와 청빈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이리라.
지명(知命)의 나이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외지로 떠날 결심을 한 것이다. 그가 스위스의 가난한 한인 교회로 떠나던 날, 공항에 배웅 나온 사람은 지인(知人) 몇 사람뿐. 십 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교인들의 마지막 배웅과 가족을 위한 약간의 사례금도 매몰차게 뿌리쳤다.
“때가 되면 물러나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나무는 새순이 돋고 가지가 굵어지며 그러다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요. 하지만 때가 되면 낙엽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을 위해 스스로 썩어 갑니다. 태양도 한낮에 온 세상을 밝히지만 저녁에는 서산으로 자신의 몸을 감추며 사라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마음속의 욕심을 버리고 역할을 다했을 때 물러나는 것이 순리라고 믿습니다.”
그가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다. 열매보다 낙엽을, 영광보다 봉사를 자청한 셈이다. 어찌 목회자인들 인간적인 공명이 전혀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욕심을 버리고 그 교회의 자생력을 위해 아름다운 퇴장을 결심했으리라. 또 다른 곳에 씨앗을 뿌리기 위함이 아니었겠는가. 역할을 마친 후 스스로 물러갈 때를 선택한 것이다. 사람은 떠날 때를 알아야 하고, 그때는 뒤돌아보지 말아야 하리라.
본분과 역할을 다하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정녕 아름답다.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은 장엄한 노을처럼 아름답다. 노을은 스스로 몸을 태우다가 서산으로 지지만 그 아름다움은 뭇사람들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질 않던가.
무욕(無慾)의 목자(牧者). 그가 고국을 떠나기 전 되새겼다는 옛 시(詩)가 가슴에 흐른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내가 걷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갈림길
―동행 1
그들을 만난 것은 산비탈을 오를 무렵이다. 두 사람은 너럭바위에 앉아 땀을 들이고 있었다. 가까이 이르자 그들은 이내 털고 일어선다.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며 함께 오르기 시작했다.
숲길 양쪽엔 유월의 신록이 짙푸르다. 부드러운 흙길을 밟는 촉감이 그만이다. 입산객들의 왕래가 잦은 저쪽 길보다 인적이 뜨음하고 적요한 이 산길이 더 마음을 끈다. 솔향으로 기분이 상쾌하고 정신이 맑아진다. 오늘은 야트막한 구난봉(峯)에라도 오르리라 작정하고 혼자 나선 길이다.
단출한 차림들이다. 산길을 걸을 때는 꽉 낀 옷보다는 헐렁하고 가벼운 옷차림이 제격이다. 또 청산에 들어가는데 격식은 어설궂다. 늙숙한 할머니가 앞장을 서고 다음은 까까머리 청년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뒤따른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일행이 된 셈이다. 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으며 걷는다. 한데 청년의 말은 어둔하고 뜨덤뜨덤하다.
“할머-이, 이-거 뭐-여?”
“오냐, 나무가 잠을 잔단다.”
연전에 태풍으로 쓰러진 상수리나무를 가리키며 묻고 답한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나슨하다. 마음을 숲 속에 풀어놓고 유유자적하게 오래도록 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저 같은 목소리가 되는 걸까. 곳곳에 소나무들도 뿌리 뽑혀 누워 있다. 아름드리 나무들도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이처럼 무력한가 보다. 하지만 주변의 풍경이 이상하게도 조화를 이룬다.
갈림길이다. 오른쪽은 구난봉으로 오르는 길이요, 왼편은 창창울울한 숲길이다. 왼편 길은 기웃거리기만 했던 미지의 길이다. 오른쪽 길로 접어드는 순간 할머니는 동행을 요청한다.
“이쪽도 좋은 길이라우.”
청년도 빨간 등산모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끌림도 있었지만, 왠지 동행 요구를 거절하고 싶지가 않았다. 청산은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는 곳이라 했던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흰나비가 길잡이를 하듯 길섶에서 맴을 돈다.
동편 산마루 위로 먹장구름이 흐른다. 또 비가 올 모양인가. ‘찌찌 찌찌 찌르릉’ 산새가 지척에서 우짖는다. 여전히 청년은 묻고 할머니는 연신 대답을 한다.
“할머-이 할머-이, 이-거 뭐-여?”
“오냐 오냐, 복분자여.”
근방에 다문다문 산딸기가 널려 있다. 청년은 따먹기에 여념이 없다. 할머니는 곧 비가 올 것이라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풀섶에 앉는다. 한 줄기 바람이 인다. 숲에 파도가 이는 건 바다로 나들이 갔던 바람 한 떼가 숲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저편의 청년을 바라보며 말문을 연다.
“산밑 각화 마을에 사는 놈이라우. 달포 전부터 날마다 산길을 같이 오르는 동무가 됐어. 스무 살 남짓 됐는데 교통사고로 뇌를 크게 상해 저렇게 멍텅구리가 됐다나. 옛날 기억조차 잊어버린 천치가 됐다우. 나이와 이름도 모르는… 날마다 마을 어귀 정자나무 앞에서 해죽거리며 맴돌고 있기에 산동무 삼아 동행한다우.”
할머니는 팔순의 나이답지 않게 다부지고 정갈하다. 문 할머니라 불러 달란다. 그리고 저 빨간 모자를 구해 준 사람은 문 할머니다. 까까머리 뒤통수의 심한 수술자국이 흉해 등산모를 사 주었더니 저렇게 쓰지 않고 들고만 다닌다는 게다. 이름은 그냥 섭이라 부르기로 했단다.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지만 묻지 않았다. 섭이는 보이지 않는다. 복분자 따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다. 계곡에서 푸드등 푸드등 산꿩 뛰는 소리가 기운차게 들려 온다. 섭이가 돌팔매질이라도 했을까.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문 할머니는 섭이를 찾는다. 덤불 속에서 벌쭉 웃으며 그가 나타난다. 섭이는 문 할머니와 나에게 빨간 모자 속에 든 산딸기를 한줌씩 집어 준다. 이젠 섭이와도 무언중에 교분을 튼 셈이다. 빗방울이 맹감 잎새를 두들기는 소리가 상쾌하다.
섭이는 굵어지는 빗줄기를 손바닥으로 받으며 환호성을 지른다. 문 할머니도 느긋한 표정이다. 조급하게 구는 사람은 나뿐. 두 사람은 태연하다. 안절부절못하는 내가 우스꽝스럽다. 문 할머니는 다음 능선까지 가려 했는데 아쉽다는 표정이다.
“할머-이 할머-이, 이-거 뭐-여?”
“오냐 오냐, 뻐꾸기 소리 아닌가베.”
섭이와 할머니는 다정한 연인 같다. 간간이 빗속에서 들려 오는 뻐꾸기 소리가 숲 속에 일렁인다.
작달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후득후득 나뭇잎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한 줄로 서서 우린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섭이가 앞장서고 다음은 나, 마지막이 문 할머니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섭이의 목소리는 커지고 대답하는 할머니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 간다.
산어귀 마을 정자나무에 도착했을 때 우린 비에 흠뻑 젖었다. 섭이는 나를 보며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인다. 그리고 누런 이를 내보이면서 마을 쪽으로 달린다. 내일도 네 시에 만나자는 신호라며 문 할머니는 언제든 동행하려면 이곳 정자나무에서 만나잔다. 이제 섭이도 문 할머니도 나를 산동무로 끼워 주려는 모양이다. 뜻밖에 오늘은 행운의 날이다. 청산에서 두 사람과 동행한 것이 마냥 하뭇하다. 한데 문 할머니는 왜 그 숲길로 동행을 권유했을까. 헤어지는 갈림길에서 뒤돌아본다.
산허리엔 문 할머니와 섭이의 목소리가 빗속에서 아직도 도란도란거린다.
반달 속의 개똥참외
어긋나게 돋은 왼손 엄지손톱 하얀 반달 속엔 나에게만 얼비치는 게 있습니다. 그 곳엔 개똥참외와 뜸부기 울음, 달빛과 유순이가 있지요. 저는 그런 엄지손톱을 지금도 검지와 중지 안에 감추는 버릇이 있답니다.
초등학교 적 우리 집은 학교와는 시오리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오가기 위해선 신작로 가에 있는 유순이네 오두막을 거쳐야 했답니다. 다 꺼져 가는 그 오두막은 막술을 파는 주막이었지요. 유순이 어머니는 박가분을 하얗게 바른 예쁜 여인이었습니다. 하늘색 물방울 무늬 블라우스에 쪽빛 통치마를 곱게 차려 입은 모습을 가끔씩 볼 수가 있었으니까요.
육 학년, 같은 반인 유순이는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데다 키는 작았지만 제 또래보다 숙성한 아이였지요. 그래서인지 다른 애들보다 그네의 가슴이 사뭇 봉곳했답니다. 우린 그게 참 궁금했지요.
그러던 어느 체육시간이었답니다. 난데없이 소나기가 퍼붓는 바람에 우린 쫄딱 비를 맞고 말았습니다. 사내애들이야 러닝셔츠도 입지 않은 웃통에 고무줄 넣은 검정 무명바지 하나로 뛰어다녔지만 여자애들이야 그럴 수 있나요. 교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온몸이 흠뻑 젖고 말았습니다. 그때 교실에서 제대로 보았지요. 다른 애들하고는 유다르게 봉곳한 그 가슴을 말입니다. 작은 개똥참외만큼은 됐지요. 그게 그토록 궁금했지 뭡니까.
그 즈음 학교에선 교실 뒤편에 연못을 파고 금붕어를 기르기 시작했답니다. 난생처음 본 금붕어가 신기하기 짝이 없었지요. 그래서 점심시간이면 애들이 모여들어 금붕어를 구경했는데 그날은 유순이도 끼어 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유순이와 저는 연못가에 나란히 앉게 되었고 유순이는 못 속의 물을 훔치며 금붕어의 노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하곡마을 코흘리개 동출이 녀석이 유순이 뒤로 살금살금 다가서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떤 음모가 있구나’ 전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순간 동출이 녀석이 유순이의 간타후쿠를 밑에서 위로 훌떡 들추고 마는 게 아니겠습니까. 간따후쿠는 요즘 원피스 같은 옷인데 유순이는 그만 아랫도리를 통째로 보이고 만 것입니다. “얼라리 꼴라리.” 모두들 깔깔거렸습니다. 저도 그만 얼결에 보고 말았지요.
그러니까 요즘 초등학교 사내애들의 짓궂은 장난인 ‘아이스께끼’를 당한 셈이지요. 유순이는 얼굴이 홍당무가 돼서 단풍나무 그늘을 지나 넘어지듯 달음박질을 쳐 교실 모퉁이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틀 후, 공작품을 만드는 자연 시간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유순이와 저는 몇몇 애들과 한 조가 되었습니다. 나무 인형을 만드는 시간이라서 유순이는 못질을, 저는 나무토막 잡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만 유순이가 박아야 할 못은 못 박고 제 손을 망치로 내리치고 말았습니다. 눈에서 번갯불이 번뜩이더니 왼쪽 엄지손톱이 벌겋게 부어 올랐고 이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틀 전 ‘아이스께끼’ 당한 앙갚음을 또래보다 어린 제게 했다면 전 정말 억울한 일이지요. 전 얼결에 본 것뿐이니까요.
며칠 후, 늦은 밤이 돼서 혼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육 학년이라 대처로 중학교를 가기 위해 늦은 밤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던 때였습니다. 그날은 함께 다니던 동네 애들이 먼저 가버리고 나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또 저를 놀리려고 몰래 도망쳐 버린 게지요. 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어 파하자마자 정문에서 기다렸는데 저희들끼리 후문으로 도망쳐 버린 게 분명했습니다. 무서움을 많이 탔던 어린 저를 그런 식으로 곧잘 놀리곤 했었거든요. 혼자 갈 수밖에요.
그날은 명랑한 달빛이 미루나무에 걸려 있는 밤이었지요. 무서우면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크게 부르며 달리는 게 상수였어요. 어지간히 불렀는지 목청이 아파 올 무렵 유순이네 집 근처가 가까워졌습니다. 근데 늘 미루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궐련을 피우던 유순이 아버지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멀리서 보아도 그 집 앞 길가 미루나무엔 반딧불 같은 불빛이 깜박깜박했으니까요. 그건 유순이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중이란 신호였습니다. 유순이 아버지는 곱사등이에다 왼발을 심하게 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불편한 몸인데도 늘상 밖에서 맴돌며 서성이는 것이, 그 시절 저에겐 유순이의 봉곳한 가슴 다음으로 궁금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유순이네 집이 점점 가까워져 왔습니다. 건너편 논 어름에서 뜸부기가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뜻밖에도 유순이가 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네 아버지가 늘상 앉아 있던 미루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늦은 시간에 유순이를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달빛 아래였지만 유순이라는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답니다. 작은 키에 꽈리 같은 유순이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일순, 전 당황했지요. 유순이의 다음 행동이 너무나 뜬금없는 것이었으니까요. 무언가를 불쑥 제 앞으로 내밀었는데 저는 또 얼결에 그것을 받고 말았습니다. 제가 손에 든 것을 살필 틈도 채 주지 않고 그네는 쏜살같이 달려 오두막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뭐라 말이나 해 주지.”
어디서 났는지 제 가슴만한 개똥참외였습니다. 갑자기 뜸부기 울음소리가 커졌습니다. 얼결에 받아 쥔 이 개똥참외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저는 신발을 벗어 쥐었습니다. 그리곤 달렸습니다. 왼손엔 개똥참외를 오른손엔 ‘진짜표’ 통고무신을 쥐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어머닌 발이 클 때까지 오래 신으라고 늘상 큰 고무신을 사 주셨기에 달릴 때는 신발을 손에 쥐고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만 돌부리에 걸려 덜컥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무르팍이 시큰거리고 쓰라린 걸 보니 피멍이라도 든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르팍의 아픔보다도 더 먼저 느낀 것은 왼손의 허전함이었습니다. 그 꿀물 같은 개똥참외가 넘어지는 통에 어디론지 굴러가 버린 게지요. 아무리 환한 달빛이라 해도 우거진 풀숲 사이로 숨어 버린 개똥참외를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하필이면 늦은 밤에 불쑥 참외는 줄 게 뭐람. 넘어진 것이 순전히 개똥참외 탓으로만 생각되었습니다. 무릎이 몹시도 아팠지만 무덤이 근처에 있어서 더 이상 머뭇거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아픈 다리로 동구까지 달려오며 하고픈 말이 자꾸 목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입 안에서 맴돌 뿐이었지요.
‘씨∼ 나쁜 지집애’
어머니의 방
그모도록한 텃밭을‘어머니의 방’이라 부르고 싶다.
대문 어귀, 20여 평 남짓한 그 곳엔 모락모락 갖가지 푸성귀가 자란다. 소출을 위한 밭이라기보다 어머니만 나며들며 머무르는 내면의 공간인 듯싶다. 이제 노쇠한 어머니로선 더 이상 전답을 건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기력이 부쳐 도리 없이 옥답을 남에게 내주셨다. 대신 허드레 창고를 허물고 그 자리에 텃밭을 일구었다. 흙냄새를 못 잊어서이기도 했겠지만 내심은 이젠 당신의 뜻대로 모든 일을 끝마친 지금, 당신만의 공간이 필요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텃밭엔 푸성귀뿐만이 아니다. 그 둘레엔 작은 돌로 담을 쌓고 빙 둘러 철 따라 피는 소담한 꽃들을 심어 놓으셨다. 얼마 전엔 과꽃이 도담하게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발치엔 시들머들한 대추나무 한 그루가 텃밭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생 어머니는 시부모를 봉양하고 시동생, 시누이들을 짝지어 내보냈으며, 오 남매의 자식들을 새 둥지 만들어 출가시키고 이젠 빈 가슴으로 텃밭에 수굿이 남아 계신다.
이태 전, 그날의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허영허영하기만 하다.
“인자, 다 끝났는 갑따!”
어머니는 산기슭 선영에서 솔바람에 옷섶을 여미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새로 세운 망주석에 기대어 노을지는 서녘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는 옆모습이 지금도 솜솜하기만 하다.
어머니는 자나깨나 부채처럼 선영의 산일을 사뭇 걱정하셨다. 이런 저런 일로 차일피일해 오던 조모님의 유해를 조부님 유택 옆에 안장하고, 석물 세우는 일이 마치 당신 생전의 마지막 과업이라도 되는 양 여기시었다.
생전에 자별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시부의 배려를 갚으려는 듯, 모진 시집살이였음에도 시모에 대한 마지막 섬김이라도 하려는 양, 어머니는 그 일에 집념으로 매달리셨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뒤란 장독대 옆의 감나무가 떠오른다. 지금은 고목 되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그 단감나무 말이다. 그 허구한 세월 동안 철마다 풍성한 열매로 베풀고 이젠 소진해 말라 가는 감나무는 어머니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열예닐곱 살에 산골로 시집온 어머니는 그 이듬해 외할아버지로부터 귀한 단감나무 한 그루를 건네 받아 장독대 옆에 심으셨다. 그리고 그 감나무와 함께 오늘까지 70평생을 살아오신 셈이다. 당시 마을에 유일했던 그 단감나무는 해마다 가지가 휘도록 감이 풍성하게 열려 촌동들의 입맛을 돋우었고 마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젠 고목이 되어, 병원 출입이 잦으신 어머니처럼 시들하게 메말라 가고 있다. 아마 어머니와 감나무는 평생을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살아오셨을 것이다. 까다로운 시모에다 시동생과 시누이들의 뒤치다꺼리에 오죽이나 고단하셨으랴. 때론 감나무 그늘 밑에서 치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삼켰을 것이다.
실로 어머니는 한평생 자신을 내팽개친 채 오직 가족들의 안녕만을 위한 희생과 나눔의 일생이었다. 삭정이가 된 감나무의 굽은 가지처럼 어머니의 허리는 이제 속절없이 휘고 말았다.
어쩌면 어머니의 고단한 삶은 애초부터 혼자 짊어져야 할 운명이었던가 보다. 공직에서 일찍이 물러나신 아버지는 그저 논둑에서 뒷짐만 지고 벌판만 바라볼 뿐이었다. 의당히 농사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린 눈에도 끼니조차 가족들과 함께 하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기껏 선 채로 부엌에서 물 말아 훌훌 넘기시고 다시 들녘으로 내닫곤 하셨다. 집에서 거느리던 머슴보다 먼저 일어나 진종일 들판에서 살다시피 하셨다.
그런 당신의 삶이 고달프셨던지 자식들의 가르침엔 열을 보이셨다. “나처럼 무지렁이로 살지 말고 대처로 나가 편히들 살거라.” 하시며 매섭게 다그쳤던 것도 지금 헤아려 보니 가슴이 뭉클하기만 하다.
지금도 미루나무만 보면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중학교 시절, 하룻밤 묵고 일요일 오후 도회로 가는 길목이었다. 어머니는 공부에만 몰두할 것을 신신당부하셨다. 그날도 동구밖까지 따라 나오며 한사코 다짐받는 걸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동구밖 미루나무에 기대어 물끄러미 어린 자식이 산모롱이를 굽이돌 때까지 눈을 떼질 않고 바라보고 계셨다.
반 마장의 그 길을 난 눈물을 훔치며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던가. 바람에 나부끼는 미루나무 잎새들이 어머니의 손짓 같게만 느껴졌던 기억 때문에 지금도 미루나무를 보면 가슴이 젖어 온다.
달포 전,‘다녀가라’는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 왔다. 예전에 흔치 않았던 일이라 혹여 허리 병환이 도진 게 아닐까 가슴이 철렁했다. 도회의 자식들 집에 오셔도 하룻밤 지새우기 무섭게 아버지를 졸라 시골로 내려가셨던 어머니였다. 자식들에겐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셨던지라 불길한 예감으로 급히 달려갔다.
산그늘이 내린 어둑한 마을길로 접어들었을 때 저만치에 어머니는 마중 나와 계셨다. 마음이 한결 놓였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어둑한 동구밖에서 뵌 어머니는 더욱 작게만 보였고, 애잔한 바람이 가슴속을 훑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왔다.
“애비가 좋아하는 상추가 하도 때깔이 고와서…….”
말끝을 흐리시는 어머니의 속내를 헤아리며, 이젠‘마음마저 쇠진해지셨구나.’하는 생각에 허전허전하기만 했다. 그날 어머니는 평생을 곁에 두고 사용해 온 손재봉틀을 말끔히 닦아 내놓으셨다.
“인자, 나헌테 요것도 쓸모가 窪따.”시며 며느리에게 건네는 어머니의 손등이 그날따라 유난히 메말라 보였다.
지금쯤, 어머니는 텃밭에서 무얼 하고 계실까.‘인자 죽어도 여한이 없다’시던 어머니는 어떤 표정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텃밭에 수굿이 머물러 계실까. 누에가 껍질을 벗고 나방이 되듯, 텃밭에 한 송이 과꽃으로 남은 어머니의 모습이 아릿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앞베란다 한쪽에 놓여 있는 손재봉틀이 자꾸만 흐리게 보여 애써 하늘만 바라본다.
│정태헌 작품론│
고요 속의 외침
혹은 얼음 속의 불꽃
―정태헌 수필집 『동행』
박 하 원 (수필가)
열며
수필의 본질과 뿌리가 우리의 삶 자체에 있다는 것은 새삼 거론할 바가 못 된다. 그러기에 수필은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닌 구체적인 삶의 기록이어야 하고 그 기록은 수필의 질료와 힘이 되어 세상의 틈 사이로 감춰져 있던 인간의 길들로 드러나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수필집 ‘동행’은 깊은 사유에서 얻은 낮은 눈길과 따뜻한 손길로 오붓하고 정갈한 길 하나를 열어 놓고 들어서는 이 누구에게나 동행이 되겠노라 손을 내밀고 있다.
우선 이 작가의 글을 읽노라면 작가의 수필 세계가 매우 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대상을 바라보고 사유를 펼쳐 나가는 방향이 밖을 향하지 않고 내면으로 파고든다. 그는 하나의 대상을 살피는 데에도 카메라의 슬로 모션으로 장면을 잡는 것 같다. 그 움직임은 느리고 소리가 나지 않으며 색깔을 바꾸지도 않는다. 그러나 다시 보면 그것은 섬세하며 깊고 무겁게 아래를 향해 수렴되어 들어간다. 그래서 사물들의 미세한 흔들림이 그에겐 중요한 이벤트가 되고 힘이 되며 글을 떠받드는 에너지가 된다.
또 다른 특징을 꼽자면 하나의 에피소드를 넌지시 던져 놓는 것이다. 「점입가경」, 「봄 풍경」처럼 하나의 이야기를 풍경처럼 묘사해 놓고 정작 화자는 시치미를 떼고 물러나 그 풍경을 읽는 독자들의 표정을 망연하게 쳐다본다. 툭 던져 놓고 시치미 떼기, 이런 던짐은 나 역시 간혹 쓰는 수법이기는 하나 내가 좀더 끈적거리는 욕망을 지우지 못하고 들척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것에 비하면 그는 그저 고요한 물빛 무늬만 슬쩍 보여 주면서 유유자적하는 것이 내심 부럽다. 이런 ‘딴전 부리기’ 수법은 독자의 주의를 당기며 서정과 언외(言外)의 감칠맛이 있어 수필을 해석하고 감상하는 능력을 발달시키기도 한다. 그 같은 고요의 무늬를 얻기까진 그 안쪽의 깊은 호수와 강을 이루기 위한 격정적 흐름이 만만치 않았을 터이지만 독자들을 고요한 물결 위에 마음을 누이고 과거가 현재로 전이되는 과정을 평화 속에서 즐기게 해 준다.
1. 시대의 진술 「흔들리는 세월」 「아름다운 퇴장」
이 글들은 사회적 시대성을 소재로 하여 쓴 것이다. 수필은 언제나 시대를 진술하고 관통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수필은 그것을 정직하게 드러내되 거기에 파묻히지 말고 통어하고 조리하여 새로운 질서의 세계로 수렴시키는 작업이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너무나 교과서적이어서 구닥다리처럼 느껴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고집이 아니라 우리 수필사의 많은 작품들이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에 새로운 길을 냄으로써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두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이런 소재들은 자칫 세월이 주는 고리타분함이나 삶에 짓눌린 피해의식의 표출을 자제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작가는 겸손함과 낮은 눈길, 따뜻한 심성적 배려로 교훈적 질타보다는 끌어안는 여유를 보여 준다. 이것은 이런 소재가 주는 진부함을 벗어 버리게 하고 나아가서는 ‘무엇을 쓸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쓸 것인가’의 중요함을 대두시켜 주고 있다.
2. 죽음, 산 자를 아우르는 매개 「동행 3―국화꽃」
수필은 특히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탐구가 없이는 쓸 수도 읽어 낼 수도 없는 장르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긴 하나 삶에 대한 탐구는 죽음의 탐구가 없이는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말할 수가 없다. 하여 많은 작가들이 죽음을 소재로 다루지만 어떤 작가는 그것을 타나토스의 충동으로 써 내려가고 어떤 작가는 ‘살고 싶어’라는 마음으로 풀어 나간다. 그러나 이 수필가는 모든 삶은 죽음에 의해 그 한계가 지어지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또 다른 계기를 지니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부활한다고 일러준다.
시립 공동묘지로 가는 버스에 세 남자가 타고 있다. 완벽한 타인이다. 중년의 남자와 백발이 성성한 노인 그리고 화자, 세상이 누군가를 버릴 때 그러하듯 버스는 영락공원으로 가는 초입에 세 사람을 내려놓고 흙먼지만 남긴 채 산모롱이를 돌아가 버린다. 차에서 내린 순서대로 묵묵히 걷는 세 사람, 각자의 사연을 나누듯 국화꽃을 나누고 두 잔씩의 소주와 알사탕, 그리고 아무것도 줄 게 없어 안타까운 화자는 마음을 나눈 후 말없이 헤어진다. 그러나 세 사람은 이제 타인이 아니다. 삶의 숨쉬기를 뛰어넘어 죽은 자들의 것을 나눈 이들은 이미 타인이 아닌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죽음을 결코 끝이라 이름짓지 말라 한다. 산 자를 아우르는 매개로 두며 종말이 아닌 또 다른 인연 속에서 부활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실 죽음의 문제는 종교의 본령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서의 죽음이란 소재는 이처럼 훨씬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삶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3. 아린 수필가의 언어 「어머니의 방」
바르슐라의 말마따나 우리는 이 세상에 그냥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왜냐면 허허벌판이 아니라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집은 적의에 찬 세계로부터 나를 지탱해 주고 지켜 준다. 집은 영혼이며 육체라는 말도 거짓이 아니다. 왜냐면 그 집이란 다름 아닌 숨탄것들의 영원한 방, 영원한 자리, 바로 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몸 속에 자식 숫자만큼의 방을 갖고 계신다. 그런 어머니가 이제 그 방들을 그만 버리시려 하는 것이다. “나처럼 무지렁이로 살지 말고 대처로 나가 편히들 살거라.” 하던 때와는 또 다르다. “인자, 나헌테 요것도 쓸모가 窪따.” 자식들의 허물을 깁듯이 찢어진 옷을 기워 입히곤 하던 손때 묻은 재봉틀도 며느리에게 내어 준다. 여기서쯤은 지중하기만 하던 작가의 감정 다스림이 드디어 넘너른해진다. 모도록하게 생각하리라 다짐했던 어머니의 텃밭이 수굿한 아픔으로 흩어지는 것이다. 자식의 방을 닫아걸고 자신의 방을 지음으로써 자식들을 화리서니로 놓아주고 싶은 어머니의 심정을 수필가 아들이 녹여 쓴 이 작품은 아무리 수필가의 언어라 할지라도 참으로 아리게 다가온다.
4. 믿음의 위대성 「하루」
누군가의 말처럼 회상이란 가장 무력하지만 가장 힘센 삶의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회상은 무력하면서 동시에 가장 유력한 인간만의 정신 능력일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웠던 삶도 아무리 슬프기만 했던 감정들도 회상 속에선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이러한 회상의 정화력을 신뢰하여 자칫 진부함으로 흘러 버릴 이 소재를 회상에 벼려서 ‘사는 법’이란 명제를 풀어 나간다. 삼 년만 기다려 달라는 말에 ‘그라시오’ 믿고 보내는 모선 할머니, 하나뿐인 딸년마저 잃어버렸지만 끼니때마다 아랫목에 밥을 장만해 묻어 두는 그녀, 오늘일까 내일일까 이사는커녕 동구 밖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그녀의 믿음이 그 질기고 아픈 육십 년 세월을 견디고도 “살어만 있어도 소원이 없제. 인자 밉지가 않어.” 하게 했다. 그렇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빚어지는 것이 인간일진대 그 사이 믿음이 없이는 무엇을 이룰 것인가. 작가는 그 한의 세월 육십 년을 ‘하루’라 명명하며 아련한 추억이나 추상적 무력이 아닌 구체적 현실의 고통을 견디는 방법으로 ‘믿음으로 사는 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5.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서정 「반달 속의 개똥참외」
사실 수필을 들뜬 영혼의 발산이나 요란한 감정의 사치, 유년의 추억놀이쯤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폄하된 생각들에 정면으로 맞부딪칠 수 없는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에 수필을 멀리하고 있는 독자들이 있다면 나는 이 작품을 읽어 보라 권하고 싶다.
작가에게 있어 유년의 인물들은 물결 무늬 같은 존재이다. 그것은 그리움이란 부재를 달고 기억을 발현시켜 그의 글밭에 뿌리를 내리고 자양분을 넣어 주는 에너지원이 되어 있다. 왼쪽 엄지손톱 하얀 반달 속에 현현하는 개똥참외, 이 글을 읽노라면 문학인에 있어 유년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수필이라는 타임머신에 독자를 태우고 소나기 퍼붓는 시골학교 운동장으로 안내하여 간타후크 속의 개똥참외를 함께 궁금하게 만들고, 한입 깨물어 보지도 못하고 놓쳐 버린 꿀물 개똥참외를 아쉬워하게 하며 깨진 무르팍을 호호 불며 ‘씨- 나쁜 지집애’를 읊조리게 만든다. 그리하여 이미 많은 작가들이 써 왔던 그리움의 언어들 대신 ‘진짜표’ 통고무신을 손에 쥐고 달리는 작은 소년의 환상을 심어 준다.
6. 글쓰기의 축복 「간이역」
글을 쓰는 일이란 무엇인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이다. 어두운 서랍에 처박혀 있는 빛 바랜 사진첩 같은 나의 한 부분을 환한 빛 가운데로 끄집어내는 일과도 같다. 그러기에 작가는 오브제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도 결국 하고 싶은 ‘내’ 얘기를 은근슬쩍 토해 내는데 이런 비밀스런 즐거움이 없다면 머리에 쥐가 나는 이 치열한 작업을 아무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달변도 행운이겠지만 말로 다하지 못하는 감정의 표출이나 분위기, 나아가 상상력을 글로 깨워 일으키는 일도 그에 못지않은 축복이리라.
나는 작가가 이런 글의 축복을 맘껏 누린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닌가 한다. 보일 듯 말 듯, 결국 속내를 다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색깔과 모양, 심지어는 보드랍거나 딱딱한 감촉과 냄새까지를 느끼게 하여 그가 세워 둔 간이역에 잠시라도 머물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독자들을 유도하는 것이다.
간이역은 기다림이며 깨달음이다. 속도를 방해하는 훼방꾼이 아니며, 쓸모 없는 우수리가 아니다. 속도 지상주의가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 또 다른 가치를 표상한다. 기다리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익는 곳이다.
현대인들은 정신적 뜨내기라고 한다. 자의 반 타의 반, 존재의 근거를 상실하고 뿌리 없이 살고들 있기 때문일 게다. 존재의 근거나 뿌리를 상실했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건지 모르겠다는 참담한 의식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식들에게 위로가 되고 길잡이 되는 것은 문학인이 져야 할 또 다른 짐일 것이다. 이런 짐을 나누어 지고자 내미는 그의 수필의 등은 한여름의 폭염을 조용히 이겨 낸 자들의 차분한 내성을 지니고 있다. 한없이 가라앉은 정담(情談)의 뉘앙스, 특히 한을 수용하고 위로하는 자세는 고요하고 정겹다.
닫으며
요즈음 여전히 많은 수필집들이 쏟아져 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어가 그려내는 분위기에 푹 빠져드는 재미를 느끼는 경우가 드물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이나 우선 내가 현란한 말들로 재주를 부린 수필들에 감동을 받기엔 너무 묵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흔치 않았던 새로운 언어들까지 무리 없이 아우르는 작가 정태헌의 넓고 깊은 언어의 아우라에서 나는 또 다른 희망을 품으며 문자향(文字香)에 마음을 헹구는 행복의 시간을 누렸다.
그의 글들은 대체적으로 조용하나 밝고 따스하다. 얼음 속의 불꽃을 보는 느낌이 이러할까. 작가는 수필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깨달았음을 고백하지만 그의 수필에 여과된 세상은 금속성의 차가움을 지닌 것까지도 사람의 체온 같은 온기를 지니게 된다. 다만 단문 구사를 지향하는 그의 문장이 긴장감은 있지만 수필에서 결코 배제할 수가 없는 유장미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낳게 한다. 또한 이미지가 다양하지만 단색으로 처리되어 약화되는 감도 없지 않다.
앞으로의 그의 글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 숨김 속에 떨림을 집어 넣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할 것 같은 예감이다. 외롭지만 깊고, 어둡지만 따뜻한 문학의 길을 가는 그에게 뜨거운 손 맞잡을 많은 동행이 생겨나길 빈다.
│문학적 자전│
갈증의 세월
정 태 헌
1. 씨앗
그 무렵, 난 도회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한 달 한두 번, 토요일을 맞아 고향집에 들어서면 숙부는 늘 허름한 옷차림에 핏기 없는 낯빛이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하다가 누구하고도 상의 없이 학교를 ‘때려치우고’ 독학을 한다며 골방에 들어앉은 숙부, 그런 숙부가 아버지께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숙부가 하는 공부란 ‘쓸데없는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평소 병약했던 숙부는 골방에 파묻혀 두문불출하며 읽고 쓰기에 전념을 하더니만 결국 폐를 어긋내고 말았다. 한데도 숙부가 계시는 골방엔 늘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그런 숙부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간혹 뒷산 너머 저수지 가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갈수록 의아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만 했을 뿐. 그러다가 난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어느 날 숙부가 골방으로 나를 불렀다.
“대학 가면 무슨 공부하려느냐?”
여전히 병색 짙은 얼굴인 숙부의 뜬금없는 물음에 난 눈만 끔벅일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또 혼자말처럼 뭐라 말을 했는데 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숙부는 그런 내게 세 권의 책을 내밀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황순원의 ‘단편소설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이 내 문학의 텃밭에 처음 씨앗이 드리운 날이 아닌가 싶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달포에 걸려 그 책들을 읽었고, 그러면서 난 숙부에게 점점 끌리기 시작했다.
그 해 겨울 방학, 우린 골방에서 동숙하며 긴 겨울을 났다. 그때서야 난 숙부가 소설을 쓰시는 분이라는 걸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왜 대학을 그만두고 칩거하며 쓰기에만 몰두를 하였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난 벽에 쌓인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었다. 방학이 끝나고 고3이 되었지만 소설 읽기에 정신이 팔려 다른 공부는 소홀히 한 것은 말해 무엇 하랴. 당시, 숙부의 담배 연기와 각혈, 골방의 칩거와 뒷산을 헤매는 모습이 어쩌면 내게로 전이되어 무늬로 자리잡히지 않았나 여긴다.
2. 후원
어머니는 내 문학의 후원자이셨다.
대학 입시 무렵, 난 국문학과에 가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께 그런 심중을 내비칠 수가 없었다. 숙부의 ‘하는 짓’을 보고 대학에 가서 문학을 공부하는 일은 ‘사람 버리는 짓’이라 인식하고 계셨기에 입 밖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뒷일은 뒷일, 국문학과에 원서를 넣고 말았다. 시험을 치르고 합격통지서를 받아 들었지만 아버지를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어찌하랴, 실토하는 수밖에. 아버지의 불호령은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 등록금도 주지 않겠노라고 선언을 하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등록 마감 날이 돼도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결국 발을 동동 구르던 어머니가 어찌 변통을 하여 마련해 오신 돈으로 마감 직전에 등록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조차 난 아버지께 말씀 드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완고한 고집을 누그러뜨린 것은 며칠을 두고 계속된 어머니의 애걸복걸이었다. 어머니는 단지 자식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싶었을 뿐이었으리라. 겨우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내게 단단한 약조를 받으셨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을 끝까지 마칠 것과, 숙부님처럼 ‘엉뚱한 짓’은 하지 않겠노라는.
3. 갈증
그러나 문학은 늘 목마름이었다.
내 원대로 입학을 하였건만 대학 생활이 문학에의 갈증을 씻어 주진 못했다. 문학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걸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했다. 숙부님이 대학을 중도에 ‘때려치우고’ 왜 골방에 칩거하며 독서와 쓰기에 몰두하였는가를 차차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약속을 파기할 만큼 문학을 향한 열정과 치열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자신 또한 없었다. 그러나 늘 목은 탔다. 나름대로 독서와 습작을 하며 소설 공모에 기웃거리기도 했고 치기가 발동해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그 무렵, 신춘문예 계절이 오면 겨울은 내내 감정의 명암이 엇갈리는 혹독한 세월들이었다. 각 신문에 난 모집 공고를 보는 순간, 가슴은 방망이질을 쳐댔다. 어렵게 단편 원고를 마련하여 보내고 나면 그때부터는 기다림으로 애가 탔다. 하지만 몇 번의 고배는 날 지치게 했다. 새해 아침, 신문에서 당선작들을 읽는 순간의 참담함이란 말해 무엇 하랴. 절망의 수습으로 달포를 지내고 나면 갈증은 더욱 깊어졌지만 능력과 공부 부족으로 낙방한 걸 어찌하겠는가. 겨울의 들뜸과 새해의 좌절을 거듭하며 결국 문학은 내게 미늘이 되고야 말았다. 지쳐 발목을 빼려 하면 할수록 더 깊숙이 빠져들고 말 뿐이었다.
4. 빗질
신앙은 내면의 담금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니 숙부님 같은 ‘백수’ 신세는 면하였고, 아버지와의 약속은 그런대로 지킨 셈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곧바로 교편을 잡게 되었지만 신춘문예의 계절이 오면 그 열병이 도지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더 이상 투고는 포기했다. 글쓰기가 겁이 나고 자신이 없어서였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만 보며 지냈다. 그런 나를 추스르게 한 것은 신앙에의 몰두였다. 문학에서 신앙으로 눈길이 옮겨진 것이다. 신앙은 내게 평강과 또 다른 삶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아픈 상처를 빗질해 주었고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었다. 애초 꿈꾸었던 길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듯싶었다. 문학은 강 건너 등불이 되고 만 셈이었다. 그 후, 십여 년의 세월은 그 동안의 좌절과 절망의 쓴 고비들을 치유해 주었다. 신앙은 나를 곧추세우는 데 큰 버팀목이었으니까.
한데도 어찌된 일인지 만년필을 꺼내 바라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문학에의 미련은 잠시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었을 뿐, 지워져 버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난 늘 만년필을 소지하고 다녔다. 어쩌다 만년필을 잃어버린 날이면 안절부절못하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당장 만년필을 구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녀야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만년필에 잉크를 가득 넣고 난 후의 배부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신앙의 빗질로 위로 받으며 잠잠하던 의식이 책을 읽는다거나 신춘문예의 계절이 오면 피가 다시 빠르게 도는 걸 느껴야 했다.
5. 숙연
문학은 결국 내 운명의 끈이었다.
그날, 무심히 성당 한켠에 있는 책장을 넘겨 보다가 수필 전문 잡지를 펼쳐 보게 되었다. 몇 편을 보다가 몸을 훑고 지나가는 전류를 느꼈다. ‘그래, 이젠 살아가는 우리 이야기를 따뜻하고 진솔하게 쓰면 되겠구나!’ 소설보다는 수필을 쓰리라. 다시 원고지를 사들였고 만년필에 잉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몇몇 주변 문인들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고, 수필 이론서를 십여 권 사들여 탐독했다. 하지만 이론서를 읽어 갈수록 외려 수필 문학에 대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갖게 할 뿐이었다. 문학의 궁극적 효용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 아니던가. 감동은 무엇보다 그 내용의 진실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 진실을 새로운 방법으로 형상화해 보고 싶었다. 수필의 문학성은 소재의 상상적 질서화와 의미화에 있는 것, ‘무엇’을 쓸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쓸 것인가에도 천착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문학 장르로서 수필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고 수필 장르의 격과 진정성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안이한 글쓰기가 수필을 주변 문학으로 전락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하니, 한 편의 수필은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앓이 하며 ‘낳고’ 빚어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 본격 수필을 위해서는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늘 ‘수필적 마음가짐’을 지니고 살아야 하리라 여겼다. 일상의 삶 자체가 수필적이어야 글과 사람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다른 장르보다 독자에게 훨씬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고, 문학적 매력을 줄 수 있는 장르가 수필이라는, 새로운 눈뜸이었다. 때문인지 ‘잘 쓴 수필‘보다는 ‘좋은 수필‘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나도 그런 수필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좋은 사람만이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는 믿음, 수필은 모든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장르라는 매력은 내게 강한 흡인력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끙끙대며 쓴 첫 수필이 운 좋게 수필 전문지에 당선되었고, 거푸 한 달 간격으로 다른 두 곳에 추천과 당선이라는 행운이 날아왔다. 문득 숙부님이 생각났고 어머니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등단 후 5년째, 이곳 저곳에 발표한 글들을 불러모아 첫 수필집 ‘동행’을 상재하고 그만 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의 문학수업 시절’은 과거지사가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진행될 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평생을 ‘문학수업 시절’로 보내야 될 것 같다.
내게 문학은 이제 ‘강 건너 등불‘이 아니라 ‘손에 든 등불‘이라 여긴다. 처음의 열망과 끝없는 갈증을 그 기름으로 부어 어떤 풍우에서도 꺼지지 않을 등불 하나 이룰 수 있다면, 그 등불이 누군가의 시린 가슴에 한 점 온기를 줄 수 있다면, 내 젊은 날의 고뇌와 부침은 꽃을 피울 것이라 여긴다. 나는 이제 그 ‘갈증의 세월’을 생의 기쁨으로 기꺼이 용납하리라.
2004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