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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가을호
전숙희(田淑禧) 추모 특집_작품론
지성과 인간애의 협주
윤 재 천
한국수필학회 회장, 한국수필학연구소 소장
1
철저한 정신력의 바탕에서 자기 모색과 확신으로 창작된 문학 작품인 경우, 그 본질에 대한 평가를 단순한 언어 표현의 결집체와 사유(思惟), 감성의 표출물로 해석하는 것은 바른 규명이라 할 수 없다. 이는 문학 작품이 단순한 표현의 결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름의 미학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달리 표현하면 고유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고유의 진실이란 작가가 발견한 대상의 본질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작가가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견해와 확신을 의미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에 의해 영위되는 삶을 바탕으로 그 의미의 중요성과 가치를 견고히 구현하며, 이를 어떠한 형태로든 객관화하여 본질적 의의를 확고히 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 성향이다.
그 심도와 체계적 면모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 연속성에 있어서도 구별의 요인을 찾을 수 있으나, 그것으로 인해 삶의 가치가 다르게 평가될 수는 없다.
삶이 갖는 본질적 가치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도 절대성을 유도해 낼 수 없다. 지식의 보유 정도와 재산의 유무, 사회의 지명도가 그 삶의 척도를 대신할 수 없어 개인적인 평가 기준을 가지고 객관적 절대성을 강요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한 작가에 대한 고찰은 측면에서 대비시키기보다는 그가 작품을 통해 구현하는 정신을 심층적으로 살핌으로, 그 삶이 갖는 존재 의의를 구명하는 것이 바른 방법론이다.
어떠한 의식이 작가로서의 존재적 가치를 격상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는가. 작가는 이 시대의 요청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바른 태도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귀납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이며, 비록 개인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나름의 평가 기준을 설정하기 위한 데서 비롯된 연구임을 밝힌다.
2
사르트르는 자신이 쓰는 한 줄의 글이 인류를 위해 어떤 보탬이 될 수 있으며,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회의했다. 여기서 그가 한 회의의 본질은 구체적인 어느 기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추구하는 것과, 일반 근로자가 목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 둘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작가로서의 존재적 가치는 어떤 것이며, 어떤 성격의 작품이 인간적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이를 위해 몇 가지를 설정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호와, 이미 설정한 것에 귀착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의 객관성을 규정해야 무엇인가 얻을 수 있기에, 다음의 기준을 설정하기로 한다.
첫째, 문학의 관심의 대상과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문제이다. 인간을 떠난 문제는 실제에 있어 문학의 관심도 될 수 없고, 궁극적 목표와 목적의 대상일 수도 없다. 인물 설정을 다른 동물이나 그 밖의 것으로 대치해서 표현할 수는 있으나,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상관물이요, 인간 자신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작가에게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그를 실현하기 위한 작가 나름의 노력이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형태로 표현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작가 스스로 모색하고 극복해야 하지만, 이러한 면모가 진하게 배어 있어 작품을 통해 작가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하는 것도 독자와의 심정적 교류이다. 인간의 진실이 배어 있고, 겸허한 심성이 혈액처럼 흐르는 글 속에만 작가만의 본질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
둘째, 글은 진․선․미의 융합체여야 한다. 철학의 본질 구명은 존재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가치 격상을 위한 방법론의 모색이라고 볼 때, 이에 부합하지 않는 사색은 명확한 의도의 방향을 전할 수가 없다. 시와 소설뿐 아니라 어떠한 장르에서도 나름의 세계는 건재해야 한다. 미사여구로 포장된 알맹이 없는 문학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이 적절한 표현으로 구성 체계를 가졌을 때, 삶의 갈증을 느끼고 있는 이웃에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문학이 교시적(敎示的) 기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시대의 선각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이다. 별스러운 삶을 산다는 것이 모든 이의 공감을 얻어내는 방안이 아니고,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오늘이라는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형태로든 문학이 그 시대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다.
셋째, 문학은 선명한 의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문학이 뿌리내린 내면에는 철학이 존재한다. 철학에서의 의도한 바를 문학이라는 표현 수단으로 표출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문학에서의 표현은 단순한 현상적 실체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철학적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지, 문학이 철학의 부속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철저한 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책임감이다. 왜 써야 하며, 누구를 위한 기록이고, 어떠한 가치를 갖는가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나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으로 확대 해석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나의 체험이 타인에게 반복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것은 강요되어야 할 성격의 문제도 아니며, 가능한 일도 아니다. 작가가 고민해야 할 것은 자신이 하는 작업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창출해 내는 일이다.
이상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살펴, 전숙희의 글이 갖는 명암을 구명해 보고자 한다.
3
전숙희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수필가로 소설을 공부했던 작가다. 이화여전 문과대학에서 이태준으로부터 사사를 받고 도미(渡美), 전공을 소설에서 비교문학으로 바꾸고, 그 이후에 철저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수필을 쓰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병화의 시 「전숙희」에 보면,
버릴 거 버리며
남길 거 남기며
마지막 손질을 서서히
곱게 다듬어 마무리 짓는
고요한 한 여인의 모습
깊은 곳에 은연히
생명의 빛 같은 그림자를 감고
넓은 시공 속에서 거리를 두고
혼자 있는 한 여인의 모습
당신은 그렇게
거센 세파 속에서
청초(淸楚)하오
수많은 삶의 질곡 속에서도 의연히 자신을 지켜 온 한 작가에 대한 애정이 서려 있다. 작가의 연륜과 그동안의 업적으로 보아 이제는 나름의 평가를 준비해야 하고, 아직 이루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함께 채워 가야 하는 것이 후학의 도리이기에, 그의 전기(傳記)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컬롬비아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한 후, 1940년 『女聲』과 『思想界』에 소설과 수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첫 수필집 『탕자의 변』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스무 권에 가까운 저서를 발간하면서 학교법인 계원여고 이사장, 월간지 『동서문학』 편집인, 국제펜클럽 부회장, 여러 사업을 열성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작가이며 교육자이다.
이 글에서는 작가가 남긴 문학적 노력과 그 결과를 조명하기로 한다.
조병화의 시 「전숙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전숙희의 삶은 수필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성품과 살아가는 모습이 수필의 본질과 비슷하며, 그의 작품이 이를 입증한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던 1930년대는 모국어조차 숨어서 말해야 하는 암흑의 시절이었다. 아무리 글을 잘 쓴다 해도 밝은 빛 속에 떳떳이 나서기란 불가능한 시대였다. 그때 나는 이화여전 문과 학생이었다. 그러면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김상용 선생님과 이태준 선생님, 이희승 선생님의 지도였다.
그 당시 나는 소설과 시작(詩作)을 했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신문과 잡지에 단편 소설을 발표하곤 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자면 나의 데뷔는 이화 재학 시절 문과 선생님들에 의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쓴다는 일」 중에서
전숙희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모이고, 그는 이를 큰 행복으로 받아들이며, 정으로 감싸고 있다. 스스로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이웃들이라며,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한다.
그의 글에는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막연한 감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교류의 기록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글이 될 수 있다. 수필집 『그리고 지나간 것은 모두 즐겁게 시작되리니』에서, 「시들지 않는 영혼 毛允淑」, 「朴花城의 문학 정신」, 「늘 푸른 巨木 趙敬姬 선생」, 「여자를 울린 남자 洪思重」, 「순교자의 金恩國 씨」, 「고독의 시인 趙炳華 선생」, 「사랑의 시인 金南祚」, 「1인 5역의 鄭喜卿」, 「실천하는 스승 辛鳳祚」, 「환상 속의 千鏡子」, 「90평생의 외길 李熙昇 선생님」과 같은 인물과의 교류와 덕담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그의 글에 등장하고, 그들에 대한 정감이 글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하던 오해의 말을 듣는 것은, 아는 친구들이 많은 만큼 종종 있는 일이어서 거의 면역이 생겼지만 한번은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후배에게서 느닷없이 길고 긴 항의의 편지를 받았을 때의 충격이야말로 잊을 수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기나긴 해명의 답장을 쓸 마음의 여유도 없이 전화로 나의 감정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미묘한 감정 문제의 해답을 말이 감히 글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그야말로 반은 착각에서 발생한 감정이었기에 그런대로 감정은 모두 다 정상화되었고 그 후로 우리 사이는 이전이나 다름이 없다.
―「착각 속에서」 중에서
전숙희의 글은 사람들 사이에 모아지는 정을 표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문학 세계의 설정이고 작가의 인간미가 반영된 예다.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은 대부분 주변 인물과의 접합 관계에서 비롯된다.
작가가 글에서 밝히는 것은, 뜻하지 않은 오해로 인해 서로간의 관계가 어색해지는 경우도 있으나, 그럴 때 그것을 반전시킬 수 있는 아량과 여유가 있어야만 만남의 가치가 있고, 살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전숙희는 큰 그릇이고 그릇다운 구실을 하고 있는 작가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운명지워진 혈육에 대한 애정이다.
하루 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아버님의 의식은 분명하시다. 날마다 방배동 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신다. 입원하신 지 오늘로 꼭 20일째가 된다. 10층 입원실에는 6남매가 모여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다.
더 슬픈 일이 벌어지기 전 이 원고를 넘기기로 했다. 부족하나마 이 책을 아버님 영전에 바쳐 못다한 효성과 사랑에 대신하고자 한다. 그는 언제나 책을 사랑했고 자신의 딸인 내가 책을 낸다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떠나시는 그를 눈물로 보내며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기쁨을 안겨 드린다.
에세이집 『그리고 지나간 것은 모두 즐겁게 생각되리니』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전숙희의 가치, 그의 인간적 훈훈함은 이런 면에 있다. 그는 죽음을 기쁨과 아름다움이라고 미화하지 않는다. 진실한 신앙으로 한평생을 살았지만, 그것을 이유로 범상의 범위를 뛰어넘는 모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흐느껴 울다 정신을 잃는 행동과 같은 감상적인 면모를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는 의연하게 책을 준비해 마지막 떠나는 길을 감싸 안으려 한다.
그에게 문학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정이고, 책은 그 기념비적인 결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막에 피어나는 꽃, 더러 말은 들었지만 풀 한 포기 자라날 수 없는 사막에서 꽃이 피다니, 나는 내 눈으로 그 기적 같은 사실을 보며 가슴이 벅차 왔다. 오아시스와 목마르고 굶주린 아이들의 즐거운 함성들과 사막에 피어난 줄기찬 생명의 꽃송이를 바라다보며 닫혔던 내 마음이 열리고 생각의 샘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생각의 샘. 그것은 오히려 머나먼 사막에서, 목마른 아이들 속에서 맑게 솟아나고 있었다. 굶주림 속에서도 웃고 떠드는 아이들과 불처럼 내리쬐는 태양과 바위틈에서도 피어나는 꽃을 바라다보며 그 끈질긴 생명은 은총과 기적이 오히려 문명의 풍요 속에 메말라 있던 내 가슴을 눈물처럼 적셔 주었다.
―「마음의 샘, 그리고 창조의 샘」 중에서
단순한 언어의 미감에 문학적 가치를 둔다면, 문학은 지극히 나약한 푸념과 희구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떠한 사상이나 심중에 파도치고 있는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 문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 삶에 대한 판단과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 유한적 존재로서 느끼는 영원한 것에 대한 애틋한 경외심―인간에게는 인간이기에 느끼는 아픔과 환희―이 있다.
작가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을 여행하면서 느낀 고뇌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적은 글이다. 비유를 적절히 사용해 글의 품격을 격상시키면서 그를 통해 표출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한없는 동경과 삶에 대한 연민, 자성의 몸부림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지식인의 가슴에 자리할 수 있는 오만과는 다르다.
작가가 인간을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타인을 동정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 자신이 오히려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가슴에 서린 훈훈한 정이다. 그 정을 표현함에 전숙희는 세련미를 발휘하고 있다. 그 우아한 문체는 적확한 대상의 묘사로 독자를 친근하게 이끈다. 문장의 호흡 속에서도 지루한 느낌이나 난해함을 주지 않는다.
적절한 어휘의 선택과 비유어의 효과적인 배열은 작가 특유의 섬세성을 보이면서 품격을 형성하고 있다. 대부분의 여류 작품이 감성적인 신변작에 지나지 않고 일종의 자기 과시와 토로에 급급한데, 전숙희의 글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감을 연륜과 함께 확인한다. 어제까지 생명을 지닌 사람이던 그가 내일은 산야에 묻혀 그 자연의 한 줌 흙으로 보태어지고 거기서 또다시 나무를 자라게 하고 꽃을 피우는 자연과의 합일을 본다.
사람의 아름다움 중에서도 나는 사랑을 제일로 꼽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라. 어린것을 들여다보는 어버이의 그 자애로운 미소를 보라.
―「아름다움 앞에서」 중에서
전숙희의 글이 읽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을 주지 않는 큰 이유는 현학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있다. 선택에 의해 택해진 것은 아니더라도 운명 지워진 것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 숙연한 마음으로 읽게 하는 이유가 된다.
전숙희의 글에는 스스로의 자각과 겸허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숙명적 사실, 여자라고 하는 스스로의 겸허함,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한정된 시간을 살다 절대자의 곁으로 가야 한다는 운명에 대한 수긍이 차분히 들어 있다. 염세적인 탄식이 아닌 의욕적 활력으로 자신을 일구며 사는 것을 보면, 과연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생각하게 된다.
전숙희는 나름의 빛깔과 향기를 내적으로 응축하면서 흔들림 없이 산 행복한 작가다.
숲과 나무는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유지해 주고 명상을 낳게 한다. 나무는 자라서 우리들이 살아갈 집을 지어 주고, 작가들이 글을 쓸 종이를 제공해 주며 사람들이 읽을 책을 만들어 내는 종이도 생산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숲과 나무들이 병들어 가고 있다. 나는 국제 인권만 가지고 떠들 것이 아이라 좀 더 근본적인 문제, 자연 보호와 수목 애호 운동을 신속히 폈으면 한다.
장내에서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자연보호와 오염 방지 문제가 의제로서 채택되었다.
―「레닌그라드행 청춘호 열차」 중에서
전숙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작가다. 별스런 사상으로 세상을 감복시키려는 사람이 아니고, 이웃에 살며 이웃의 문제를 고민하고 개선하려는 사람이다. 그에겐 어떤 문제이든 남의 일이 아니며, 남의 고민이 아니다. 국제펜클럽 부회장직을 유감없이 수행할 수 있는 힘도 여기에 바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류의 관심은 자기 본질에 대한 탐구와 추구의 한계에서 벗어나 사회 문제로 옮겨지고, 오늘의 자연환경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모색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환경에 대한 자각과 노력 없이는 어떠한 미래도 기대할 수 없고, 이런 환경 속에서는 문학과 예술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작가의 발언은 현명하고 바른 지적이다.
전숙희의 문학은 사랑에서 비롯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나는 한국인이다.
세계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생각하게 되며 따라서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통일에의 소원은 오아시스를 찾아다니는 사막의 낙타처럼 우리에게는 갈망의 목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받는 것과 주는 것」 중에서
전숙희 문학이 추구하는 것이 과연 얼마만 한 범주인가를 알게 하는 구절이다. 작게는 고향 원산(元山)에 대한 향수라 할 수 있고,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조국애라고 할 수 있다. 한평생 교육과 문화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큰 힘은 가슴에 서린 사랑에 기인한다.
큰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작은 장애와 삶의 굴곡은 잠시 불편한 일일 뿐, 그것이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작가를 통해 알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한 문장이기는 하나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이 한마디에서 우리는 그의 인간됨과 신뢰, 동지애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에 나누어 주면서 그것을 기쁨으로 아는 사람이고, 남에게서 조금만 도움을 받아도 크게 고마워하는 사람이다.
큰일을 스스럼없이 처리하는 것을 보면 수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고, 수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인식하고 있는 작가다.
전숙희의 이러한 면모는 한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어떻게 영위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제시다. 그에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뇌와 고통이 있지만,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모습에서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4
전숙희의 문학이 이제까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앞으로 어떠한 변모의 과정을 이룩할 것인가,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설정될 것인가를 살펴보았다.
그의 삶과 글은 인간적인 체취, 그 자체의 모습이고 반영이다. 작가의 사회활동이나 그 영향력으로 볼 때 평범한 한 여인의 소박한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고, 그가 보여 준 인간적 체취 때문에 더욱 큰 가치를 지닌다.
전숙희의 문학적 소재는 인간이고, 주제도 인간의 삶에서 얻어진 지혜다. 그의 글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다.
정을 나누며 사는 일은 한 편의 좋은 글을 쓰거나 재물을 모으며 사는 일만큼 어렵고, 마음 씀이 각별해야 가능하다. 전숙희는 이 점에서 남다른 작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을 단순한 이웃이 아닌, 진정한 우정의 대상으로 사랑하였기에 오늘이 있다.
숲을 보느라 나무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나무를 살피느라 숲이 있음을 잊는 경우도 있다. 전숙희는 아름드리 나무이며, 드넓은 벌판을 채우고 있는 숲이다. 굳세고 아름다운 한 그루 나무로 푸른 숲을 이루는 생생한 모습이 작품 전면에 흐르고 있다.
전숙희는 평범한 일에 열기 어린 사랑을 투입할 줄 아는 한국인의 표상으로 문학인으로서의 참모습을 구현한 작가다.
전숙희(田淑禧) 추모 특집_추모사
主 날개 밑 쉬는 영혼,
영원한 안식을
박 형 구(朴馨丘)
한국언론문화연구회장, 한국사이버문화연구회 이사장
쫚 生活이 꿈, 꿈이 藝術, 藝術이 現實로 남아
에세이스트 벽강(璧江) 전숙희(田淑禧) 여사가 노환으로 8월 1일 오전 8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1세. 먼저 영전에 고개 숙여 주님의 품에 안기기를 기도한다. 고인은 국제펜클럽 종신 부회장과 학교법인 계원학원 이사장이었다. 고인과는 나는 국제펜클럽 해외대회에 참가한 횟수만도 10회 가까이에 이른다.
이화여전 문과를 나온 후 1938년 단편소설 「시골로 가는 노파」를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54년 수필집 『탕자의 변』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수필 활동에 전념해 다정다한한 여성심리를 표현했다.
60년대부터 최근까지 국제펜클럽 한국 대표를 지냈으며, 89년 예술원 회원이 됐다. 작품집으로는 『이국(異國)의 정서』 『영혼의 뜨락에 내리는 비』 등이 있다.
글마다 작가의 혼을 담듯 좌절과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희망의 새 빛이 그 어둠과 냉혹함을 밝게 비추고 녹여 주리라는 신념을 읽게 한다.
따라서 일상 다반사가 에세이 속의 시였으며 생활이 꿈이 되고 꿈이 예술이 돼 예술이 현실이 된다는 구조로 정진정명의 에세이스트였다.
생애의 업적이 지대해 고인의 빈소에는 문화훈장이 추서됐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층 30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8월 5일 오전 8시, 영결식은 성남시 정자동 계원예고에서 10시에 문인장으로 치른다.
쫚 삶의 追憶을 위해 글을 썼다
삽삽한 한국 고유의 어머니여야 하는 이의 자연의 요소를 그 에세이집에서 접근하게 한다. 거기에는 연연한 열정과 강렬한 의지, 명윤한 양식이 꽉 차게 스며 있어 읽는 이에게 차탄의 느낌을 충동한다.
일찍이 소설가 이태준(李泰俊)님에게 사사했으며 등단은 소설 「시골로 가는 노파」를 『여성』지(1939.10)에 발표하면서부터였다. 『女性界』 『思想界』 등에 수편의 소설을 발표하고, 한때 영화에도 관심을 두어 「어화」의 조연출을 맡기도 했는데 결혼(광복 이후)하고서 수필 창작에 전념했다.
1955년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일간지 알래타운 콜 클라이클 신문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1년간 언론계와 문화계를 둘러보았다. 언론인, 문학인의 의지를 이때부터 굳혔는데 첫 수필집 『蕩子의 辯』(1954) 출간 다음 해였다. 『異國의 情緖』(1957)는 곧 미국 기행 기념 에세이로 주목됐다.
『삶은 즐거워라』, 『나직한 말소리로』, 『영혼의 뜨락에 내리는 비』, 『가진 것은 없어도』, 『어둠이 가면 빛이 오듯이』(1988) 등 대표 에세이집을 냈다. 델리키트하고 다정다감한 여성의 심리를 통한 인생관, 사회관, 우주관, 철학관, 신념(종교관), 혹은 생래의 감각이 크게 비상하고 있었다.
고인은 삶의 추억을 위해 글을 썼다. 나는 내 생을 스쳐 간 그 수많은 사람을 아쉽게 내 가슴에 겹겹이 적어 두리라며, 그렇게 추억을 위해 썼다.
쫚 華麗한 海外活動과 絢爛한 에세이
고인은 행복한 에세이스트였다. 생애에 단 한 번도 작품집을 내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하는 박행한 문필가가 있다. 예를 들어 출판 기회의 혜택을 받고도 어쩌다 두세 권을 내놓을 정도다.
고인은 이 점에서 에세이 정신에 탁월했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온갖 경력이 화려했다. 1991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펜 중앙위원회에서 국제 종신 부회장으로 선임되던 해부터 인생이 바뀌었다.
여기에 대한민국 예술원상, 독일 괴테 문화훈장, 러시아 푸슈킨 문화훈장 등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고인이 남긴 20여 권의 수필집. 『탕자의 변』(1954) 『이국의 정서』(1954) 『여수상 인디라 간디』(1966) 『밀실의 문을 열고』(1969) 『삶은 즐거워라』(1972) 『나직한 말소리로』(1973) 『청춘이 방황하는 길목에서』(1978) 『영혼의 뜨락에 내리는 비』(1981) 『가진 것은 없어도』(1982) 『우리의 시간이 타는 동안』(1985)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1987) 『오늘을 산다』 『다시 사랑의 말을 한다면』 『어둠이 가면 빛이 오듯이』(1988) 『아직도 가슴속엔 볼가 강이 흐른다』(1990) 『그리고 지나간 것은 모두 다 즐겁게 생각되리니』(1991) 『해는 날마다 새롭다』(1994) 『예술가의 삶』(1995) 『PEN 이야기』 등을 출간, 2007년의 자전 에세이집 『가족과 문우 속에서 나의 삶은 따뜻했네』는 열광적인 환영 안에 빛나기도 했다.
쫚 작은 일에도 人情美 넘치던 女傑
고인은 작은 일에도 인정의 아름다움이 괴어 넘치는 여걸이었다. 해외 펜 대회에서는 국제회장단 부회장으로 연단에서 베푸는 아량과 포용력이 대단했다.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얘기, 프라하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그작가) 과의 웃음 띤 교환(交驩) 등 활동재단(裁斷)이 다채로웠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다른 PEN 회원들에게도 그랬으리라 믿지만, 고인에게 죄스러움을 잊지 못하는 것은 프라하 펜 대회 때 남김없이 녹취한 테이프를 귀국 보고회(고인의 자택) 때 공개 예정으로 회순에 썼다가 내가 테이프를 지참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실망한 표정을 눈에 선하도록 기억한다.
1985년 1월 12일 내가 아동문학 작품 「별난 나라 이야기」로 제7회 한국아동문학작가상을 받던 날, 김동리, 최태응 선생께서 특별히 시간 내 축하해 주셨고, 전숙희 회장님께서는 펜클럽 권일송 부회장과 수상 축하 점심으로 저희 부부를 초청해 이튿날 무교동 선린 그릴에서 런치타임을 할애해 주셨다. 솔직히 그날의 감격을 나는 잊지 못한다.
세월도 흘러가고 생명도 구름처럼, 영원 속으로 흘러가되 오직 우리가 공존하는 동안 서로 만나고 알고 사랑했던 사실만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단 하나의 삶의 확증이 아니겠는가? 하시던 고인이셨다.
쫚 서울 大會는 豪華燦爛한 세리머니로
고인은 모윤숙 대표 이후 국내 펜클럽(83-91)을 해외에 과시해 온 고고한 인물이다. 나의 인터넷 해외기행문 「다시 가 보고 싶은 都市」(30편) 또한 고인과 함께 다녔던 곳이기에 그립다.
문학 세계를 통해 각국 국민의 상호이해를 도모하고 각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옹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국제적 문학인단체(현 회장 李吉遠)다. PEN은 시인, 극작가(poet, playwriter)의 P, 수필가 편집자(essayist, editor)의 E, 소설가(novelist)의 N을 나타내며 나아가 전체로서 펜(PEN)을 나타낸다.
영국의 여류작가 스콧(Scott)의 제창에 따라 1921년 영국에 펜클럽이 조직되고 그 후 프랑스의 아나톨 프랑스가 호응해 프랑스 펜클럽이 만들어진 이후 각국에 확대됐다. 국제펜클럽 본부는 런던에 있으며 1988년 서울에서 제52차 국제펜 대회를 개최해 서울 올림픽 직전에 성황을 이루었다.
서울 대회는 동서 진영 모두 1,000여 명을 초청해 워커힐에서 베풀었으며, 세계 각국 국제 대회에서 가장 호화찬란한 회의와 리셉션을 자랑했던 관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스폰서로 통천 술신 고인의 얼굴을 아낌없이 세웠다.
쫚 幼年의 望鄕, 愛鄕의 想念 가슴에 안고
고인은 건강이 허락됐으면 고향 원산(元山) 피서지 기행을 떠나셨을지 모른다. 기회 있을 때마다 들추어 향수에 젖었던 언제 다시 가려나, 내 고향 푸른 바다 元山!
현재(1980년대) 50대 이상의 지식인들이라면 여름의 원산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으리라. 그토록 동해의 푸른 바다는 더위를 식혀 주고 젊은이에게 꿈과 낭만을 심어 주던 곳이다며 고인은 태양의 계절이 오면, 하염없이 노스탤지어에 잠겼다.
고인은 다분히 아름다운 고향 원산(元山)의 동화 같은 환경과 찬란한 고장 원로의 피를 받아 선천적인 문학인으로 타고나셨다.
때문에 어떤 고뇌에 부딪쳐도 고인의 문학 정신은 미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 환경 안에서 무한히 에세이의 옹달샘 물을 길어 올려 착잡한 현실을 비현실적인 몽환의 세계로 승화시켜 자라는 세대에 꿈과 희망을 불러일으켜서는 마른 혼을 윤기 있게 하는 중대한 사명을 부여 받은 작가였다.
아― 다시 대할 수 없는 원산(元山) 바다, 빛과 조수의 향기에 씻기며 성장하시어 유년의 망향, 애향의 상념을 가슴에 안고 가신 고인이 그립습니다. 멋있고 아름다운 90 인생, 너무 부러운 삶을 맺고 가십니다. 사모하는 전숙희(田淑禧) 회장님의 遺志는 저희 남은 회원 모두가 받들겠습니다. 부디 평안히 가십시오. 주님의 품 안에 고이 쉬소서.
(2010년 8월 1일)
▣ 전숙희의 나의 수필 쓰기
미적효과 이상의 세계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한 작법이라는, 논문 비슷한 것을 쓰기 위해 나는 꽤 오래 고민했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쓰는 수필이란 어떤 규칙적인 법칙이나 테두리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남에게 공개하고 발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쓰는 수필이 아무렇게나 규범 없이 즉흥적으로 써 던지는 무책임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때로는 일주일도, 또 한달도 고민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명작을 쓰는 것도 아닌데 쓴다는 일의 과정은 다른 어떤 장르의 문학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머리 속에 떠올리고, 가슴으로 덮은 다음 적절한 언어를 골라 창조해 내기까지 무한한 고뇌와 망설임과 노력을 기울이듯 수필 쓰는 이들의 광정 또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나의 수필 작법을 이야기한다는 의미에서 몇 마디 부언해야만 할 것 같다.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나는 점점 더, 얼마나 마음 속에 주제를 안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때로는 길을 걸으면서, 또 차를 타고 달리면서, 더욱 선명하게는 새벽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주로 무엇을 어떻게 쓸까 생각한다. 오래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의 테마가 떠오르면 나는 주로 아침 시간을 택해 써 내려간다. 내 수필의 길이는 대개 200자 원고지 10매에서 15매 내지 20매가 고작이다. 하루에 다 쓰지 못하고 이틀, 사흘 걸릴 때가 있다. 이것은 분망한 내 생활 탓도 있겠지만 대수롭지 않은 원도도 나는 한두 번은 꼭 다시 퇴고하고 고쳐 나가기 때문이다. 한 번 써 놓은 원고를 고친다는 것은 밤새워 지어 놓은 저고리나 두루마기를 뜯어 다시 바느질하는 이상의 고난이 따른다. 그러기에 똑바른 판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편의 글이 써진 다음에는 필자에게서 떠나 독자들의 것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한 편에 담긴 사상과 철학과 인생을 보는 눈, 그리고 재치 있는 표현력 등을 엄밀하게 재검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청탁 일자에 몰려 바쁘게 써 보낸 원고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몇 달 후에 누군가 읽었다는 인사를 받을 때는 순간 부끄러워지고 독자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명에 대한 엄숙함과 책임감을 다시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수필 작법에 있어서의 하나의 규범을 들라면 그것은 성실한 사고와 성실한 태도라고 말하고 싶다. 그 성실의 온상에서 신선하고 맛 좋은 포도주가 익어 나오리라고 믿는다.
오늘날 한국 독서계 인구 중 시나 소설을 전공하는 사람 이외의 독자로서는 수필 독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수필의 대중성을 말해 주는 동시에 그 중요함을 또한 쓰는 이들이 생각해야 되리라고 믿는다. 대중성이 있으니 만큼 수필의 문학성이 약해지기 쉬운 우려도 있다.
그러므로 수필 작가들은 노력해 문학성이 높으면서 대중에게 읽혀지는 글을 써야한다는 데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수필이란 제재의 다양성과 형식의 자유로 이루어지는 글인 동시에 작가의 개성이나 사고가 직선적으로 강하게 표출되는 것이어서 자칫하면 개인 주변의 잡문이나 넋두리로 문학성을 잃기 쉬운 것이다.
몽테뉴도 그의 「수상록」에서 내 자신이 바로 내 책자의 재로이다라고 말했다. 즉 수필은 인간자조(人間自照)의 가장 순수한 문학 형식이라며, 동시에 문학으로서의 심미감을 잃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최근 들어 문단에 수많은 수필가들이 등단하고 있다. 또 출판 불황에도 불구하고 수필집만은 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수필가들은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즉 그 수가 질을 격하시키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수필 작품의 질을 높여, 현재 독서계에 일고 있는 수필 붐과 동시에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서 확고한 위치를 정립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폴 발레리는 그의 시화(詩話)에서 산문과 시를 보행과 춤으로 비유했다. 나 역시 항상 그런 생각으로 내 시상과 사색을 다듬어 수필이라는 산문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요즈음에 내가 생각하는 것은 착상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안일에서 벗어나 좀더 깊이 생각하고 섬세하게 느끼고 또 철저히 자료를 조사한 다음 완전한 자신을 가지고 한 편의 글을 쓰는 데 임하고자 하는 생각이다.
또 한편, 쓰는 사람은 남보다 많은 것을 느낄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즉 폭넓은 지식이다. 이것은 독서에서만이 얻어지는 것이다.
많이 읽고, 깊이 사색하고, 넓게 통찰한 다음 성실하게 언어 구사를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 전숙희 대표작
삶의 슬기 외 2편
밤새 훈훈히 김 오른 방문을 열고 청마루로 나서면 코끝이 짜릿하도록 부딪쳐 오는 싸늘한 아침의 감촉. 불기 없는 목욕탕에 받아 놓은 물 위엔 살얼음이 지고 뜰 앞에 서 있는 나무에 매달렸던 마지막 잎마저 떨어져 버리고 가지만이 생명 없는 표본인 양 처량해 보이는 초겨울의 아침, 마치 새치름하게 청초한 여인의 모습 같은, 그러한 초겨울 아침을 나는 좋아한다.
그래서 부엌에서 보글보글 밥 끓는 소리와 뽀오얗게 서린 김의 훈훈함이 더욱 정다운 아침, 또 어쩌면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난, 그 마음속에 너그러움과 따뜻함이 이끼처럼 깔려 있는 초로의 모습, 그러나 어딘지 범치 못할 단정함과 의연한 여인의 얼굴과도 같은 그 모습을 나는 사랑하고 싶다. 쌀 뒤주에는 햇곡이 가득하고 곳간에는 차곡차곡 담은 김장독과 겨우내 방들을 덥혀 줄 연탄이 쌓이고 담가 놓은 포도주는 향기롭게 익어, 어쨌든 한시름을 놓고 이제 휴식의 아침을 맞을 만하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가까워 오는 설날의 꿈을 익히고, 젊은이들은 성탄절에 주고받을 선물과 카드로 마음이 설레는 아침, 나는 폭신한 털옷으로 몸을 싸고 싸늘한 고요 속에 그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일만이 즐겁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나뭇가지의 흰 눈송이가 쏟아진다. 마치 어려서 내가 좋아하던 어떤 크리스마스카드의 그림 풍경처럼. 얼마 후, 흰 눈은 걷히고 나뭇가지에는 새파란 움이 트이더니 푸른 나뭇잎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오래잖아 나무에는 눈부신 붉은 꽃송이들이 탐스럽게 만발한다. 태양은 밝고 우주는 온통 밝은 풍경이다.
그러나, 바라다보고 있는 동안 어느샌가 그 꽃들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 한다. 그리고 드디어는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거기 그렇게 서 있지 않은가. 이제 앞으로 열 번을 더 져 나뭇가지에 잎이 피고 또 떨어진다고 하자. 그리고 열 번 다시 그 붉은 꽃이 만발하고 또 흰 눈송이가 덮일 때, 내 머리는 이미 희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리라. 초조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으리라.
나는 어려서 곧잘 책상 앞 벽에다 그 시절의 어린 여학생의 버릇대로 시간은 황금이다라고 문구를 써 붙이고 날마다 쳐다보기를 좋아했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던 나는 내 시간이 너무나 모자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이렇게 나 자신을 채찍질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도 결국은 나에게 별다른 성과를 주지는 못했다. 즉 지나간 그 많은 시간들도 나에게 기적을 낳아 주진 않았다. 나 자신의 의욕과 협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나에게 넉넉히 주어졌던 노다지 황금과도 같은 그 시간에 노다지 덩어리를 마구 함부로 낭비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내 비록 오늘날 그 시간을 통해 별것이 되지는 못했을망정 나는 쓰고 단 생활을 맛보고 또 배웠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사랑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고 망각의 슬기로움과 평화로움을 가르쳐 주었다. 시간은 나를 황금처럼 빛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지는 못했으나, 그 시간은 나에게 사람을 사랑하고 남을 히애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르쳐 주었다.
푸른 꿈을 가득 지녔던 20대에 나는 지망했던 문학에서 철학으로 옮기려고 했다. 문학조차 시시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회의에 가득 찼던 20대의 나는 모든 것을 동경하면서 또 동시에 경멸하려 드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30대 40대의 나는 변해 있었다. 정열을 다해 생활을 사랑하는 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열심으로 이성을 사랑하고 친구를 따르고, 아이들에게 정을 쏟고 사회생활에 참여하고…….
그러나, 나는 이제 다시금 때때로 철인이 되려는 나 자신을 보며 혼자 미소 짓는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부귀영화도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도다. 나는 성경의 이 구절을 즐겨 되씹어 본다. 그러노라면 뭔가 가슴속이 허전해 온다. 인생 전체가 연기처럼 모호한 느낌이다.
그러면 왜 나는, 또 많은 사람들은 그처럼 헛되고 헛된 생을 영위하기 위해 그처럼 악착스럽도록 열심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 생각하는 나는 외롭지 않다. 철학 서적을 뒤질 필요는 없다. 인생의 해답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뜰 앞에 서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김 서린 부엌에도, 골목 밖에서 떠들어 대는 아이들의 음성에도, 내 인생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나는 때때로 실망이란 아픔을 맛보았고 움직이지 않는 차바퀴를 억지로 밟고 나가려는 어리석은 욕심조차 부려 보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그마한 내 생활의 창을 통해 생명의 존엄과 삶의 보람을 배워 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인생과 더불어 밝아 오는 이 초겨울 아침에도 나는 가슴속에 훈훈한 애정을 품어 보는 것이다.
설
설이 가까워 오면, 어머니는 가족들의 새 옷을 준비하고 정초 음식 차리기를 서두르셨다. 가으내 다듬이질을 해서 곱게 매만진 명주(明紬)로 안을 받쳐 아버님의 옷을 지으시고, 색깔 고운 인조견(人造絹)을 떠다가는 우리들의 설빔을 지으셨다. 우리는 그 옆에서, 마름질하다 남은 헝겊 조각을 얻어 가지는 것이 큰 기쁨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살림에 지친 어머니는 그래도 밤늦게까지 가는 바늘에 명주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새 옷을 지으셨다. 우리는 눈을 비벼 가며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님이 홀로 앉아 꿰매는 바지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잠든 아기는 어머니가 꿰매 주신 바지를 입고 산줄기를 타며 고함도 지를 것이다. 우리는 설빔을 입고 널뛰는 꿈도 꾸었다. 설빔이 끝나면 음식으로 접어든다. 역시 즐거운 광경들이었다. 어머니는 미리 장만해 둔 엿기름 가루로 엿을 고고 식혜(食醯)를 만드셨다. 아궁이에서는 통장작불이 활활 타고, 쇠솥에선 커피 색 엿물이 설설 끓었다. 그러면, 이제 정말 설이구나 하는 실감(實感)으로 내 마음은 온통 아궁이의 불처럼 행복하게 타올랐다. 오래오래 달여 엿을 식혀서는 강정을 만들었다. 검은콩은 볶고 호콩은 까고 깨도 볶아 놓았다가, 둥글둥글하게 콩강정도 만들고 깨강정도 만들었다. 소쿠리에 강정이 수북이 쌓이면서 굳으면, 어머니는 독 안에다 차곡차곡 담으셨다. 수정과(水正果)를 담그는 일도 쉽진 않다. 우선 감을 깎아 가으내 말려서 곶감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알맞게 건조(乾燥)한 곶감은 바알갛게 투명(透明)하기까지도 하고, 혀끝에 녹는 듯한 감칠맛이 있다. 이것을 향기로운 새앙물에 띄우고, 한약방에서 구해 온 계피(桂皮)를 빻아 뿌리는 것이다. 빈대떡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우선 녹두(綠豆)를 맷돌로 타서 물에 불려 거피를 내고 다시 맷돌에 곱게 갈아, 돼지고기와 배추김치도 알맞게 썰어 넣은 다음, 넉넉하게 기름을 두르고 부쳐 내는 것이다. 며칠씩 소쿠리에 담아 놓고 손님 상에 내놓기도 좋거니와, 솥뚜껑에 푸짐히 부쳐 가며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것도 별미(別味)였다. 그러나 정초 음식의 주제(主題)는 역시 흰떡이다. 흰쌀을 물에 담갔다가 잘 씻고 일어선 차례로 쪄내고, 앞뜰에 떡판을 놓고는 장정 두어 사람이 철컥철컥 쳤다. 장정들이 떡판을 쳐내면 어머니는 밤을 새워 떡가래를 뽑고, 알맞게 굳으면 이것을 써셨다. 그리고, 세배꾼이 오는 대로 맛있는 떡국을 끓이고, 부침개며 나물이며 강정이며 수정과며 한 상씩 차려 내셨다. 나는 지금도 설날이 되면, 어머니 옆에서 설빔이 되기를 기다리던 그 초조(焦燥)한 기쁨, 엿을 고고 강정을 만들고 수정과를 담그고 흰떡을 치던 모습, 빈대떡 부치던 냄새, 이런 흐뭇한 기억(記憶)이 되살아나 향수(鄕愁)에 잠긴다. 우리 어머니들은 설빔 하나 만드는 데도, 설상 하나 차리는 데도 이처럼 수많은 절차(節次)를 거치고, 알뜰과 정성과 사랑을 쏟아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대접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 기성복상(旣成服商)에는 항상, 맞춘 것 이상으로 척척 들어맞는 옷들이 가득 차 있으니, 언제든지 돈만 들고 나가면 당장에 몇 벌이라도 골라 입을 수 있다. 설이 돌아와도 여자가 그의 남편이나 아이들을 위해서 밤새워 옷을 지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식료품상(食料品商)에는 다 만든 강정이 쌓여 있고, 다 갈아 놓은 녹두도 있다. 아니, 빈대떡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흰떡도 치거나 뽑을 필요 없이, 쌀만 일어 가지고 가면 금방 떡가래를 찾아올 수 있다. 세상이 모두 기계화(機械化)되었으니, 필요한 것은 돈과 시간뿐이요, 솜씨나 노력이나 정성이나 사랑이 아니다. 참으로 편리(便利)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편리 속에 짙은 향수가 겹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는 정작 귀한 것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여성들의 그 정성과 사랑을 우리는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옷 한 가지 짓는 데도, 남편의 밥 한 그릇 마련하는 데도, 조상의 제사상(祭祀床) 하나 차리는 데도, 이웃에 부침개 한 접시 보내는 데도, 우리 여성들은 말할 수 없는 정성과 사랑을 다 바쳤다. 옛날의 우리 의생활(衣生活)과 식생활(食生活)은 여성들의 무한한 노고(勞苦)와 인내(忍耐)를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우리 여성들은 오로지 정성과 사랑으로, 노고를 노고로, 인내를 인내로 알지 않았다. 밤새도록 시어머니의 버선볼을 박던 며느리, 손 시린 한겨울에도 찬물을 길어다 흰 빨래를 하고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하고,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던 아내와 어머니, 한국 여인들의 그 아름다운 마음씨를 누가 감히 따를 수 있을까? 오늘의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잃어 가고 있다. 마음을 잃어 가고 있으므로 생활도 잃어 간다. 아침이면 뿔뿔이 헤어지고, 저녁에 모여선 빵과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고, 텔레비전 앞에서 대화(對話) 없는 몇 시간을 지나다간 또 뿔뿔이 헤어져 잠자리에 드는 사람도 많다. 편리하지만 참생활이 없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孤獨)한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려서 우리 어머니들에게서 느끼던 그 어머니를 오늘의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느끼게 하지를 못한다. 사서 입히고 사서 먹이는 동안에 우리는 정성과 사랑이 식어 간 것이다. 뼈저린 고생이 없는 대신, 그 뒤에 오는 샘물 같은 기쁨도 없어졌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고독하게 자라는지도 모른다. 편리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뜨겁게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새삼스럽게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여성들이 보여 준 그 정성과 사랑의 며느리, 아내, 어머니의 마음만은 이어받자는 것이다. 아무리 기계화된 생활이라 할지라도 정성과 사랑은 쏟을 데가 있을 것이다. 이야말로 삭막(索漠)해져 가는 우리의 생활을 인간다운 것으로 되돌리며, 현대인의 고독을 치유(治癒)하는 길이리라. 아니,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필요까지도 없다. 나의 남편과 아이들로 하여금, 고독을 모르는 기쁜 생활을, 행복을 누리게 하는 길이라고 믿자. 명절이 돌아오면 나의 고독한 눈에, 어머니가, 어머니가 자꾸만 떠오른다.
탕자(蕩子)의 변
며칠 전 저녁을 먹으며 어머니 이야기를 하던 끝에 우연히 막내 동생 성결이 말했다.
이제 우리 엄마도 내년이 환갑이셔!했다. 나는 이 말에 소스라치듯 깜짝 놀랐다.
우리 어머니가 벌써 환갑이 되시다니. 나는 이 거짓말 같은 사실을 입으로 중얼거려 봤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벌써 오래 전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 환갑 잔치를 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땐 어린 내 마음에 환갑 되신 할머니가 태고적 사람처럼 무척 늙어 보였다. 그리고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할머닌 어쩌면 환갑이 되도록 그렇게 오래 사셨을까!하고. 그러던 아득한 길이 내 어머니 당신 앞에 벌써 닥쳐 오다니…….
나는 당신을 내 어머니인 동시에 언제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 칠처럼 곱고 윤나는 머리, 빚어놓은 듯 오뚝한 코와 부드러운 눈매, 희고 맑은 살결, 거기에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살뜰한 고운 마음씨는 어디를 가나 안과 밖이 똑같이 아름다운 여성의 표본처럼 흠모를 받으셨다.
당신은 칠남매나 되는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도 맏딸인 나를 가장 사랑하시었다. 대개 맏자식은 미워하고 막내를 사랑한다는 말이 있지만 당신은 이상하게도 맏딸인 나를 그렇게 몹시 사랑하셨다. 그것은 아마 여러 아이들 중에도 맏딸인 내가 성격상 어떤 이지러진 불행의 온상을 지니고 있다 생각해 당신 앞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마음껏 사랑해 주신 것만 같다.
나는 잔뼈가 굵어지도록 당신이 나타내어 화를 내시거나 큰 소리로 누구를 꾸짖으시는 일을 보지 못했다. 혹 가다 내가 무엇을 잘못 하거나 하지 말라는 일을 할 때는 당신은 입을 꼭 다문 채 가만히 나를 쳐다보신다. 그 쳐다보시는 눈초리는 참말로 어찌 그리도 두렵고 또 슬픈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가끔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에 유혹을 받을 때 그 두렵고 또 눈물이 가득 고인 듯 슬픈 눈초리가 번개처럼 나타나곤 한다. 그리고 당신의 그 눈초리에 부딪칠 때면 나는 꼼짝 못하고 당신의 뜻을 받게 되고야 만다.
나는 당신께서 큰 소리 치시는 것을 보지 못한 것과 같이 또 한 번도 노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당신은 종일 무엇이든 일을 하고 계셨다. 식전에 눈을 떠 보면 당신은 벌써 자리에 안 계시다. 부엌으로 쫓아 나가면 거기엔 언제나 활활 붙은 아궁이 앞에 도마를 똑닥거리시며 우리 도시락 반찬을 준비하고 계셨다. 밤에도 나는 언제나 바느질감을 붙드신 당신 옆에서 잠들곤 했다. 이렇게 늘 가사에 바쁘시면서도 당신은 또 낮이면 틈틈이 성경과 성인전 같은 것을 부지런히 읽으시고 동화책도 읽어 바느질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옛이야기도 도란도란 들려 주셨다.
진실한 성직자의 아내로서 한평생을 지내오신 당신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곤란이 계셨을 것이나 한번도 그러한 불평을 하시기는커녕 인내라면 그 표본이나 되는 듯이 모든 어려움을 소리 없이 잘 참아 오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교회의 모든 회합에 빠지는 일이 없었고 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한결같이 즐겁게 접대해 보내셨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빤한 목사의 딸이면서 동무들 사이에선 가장 부잣집 딸로 인정을 받았다. 그건 순전히 당신의 피땀 맺힌 얌전하신 손끝과 노력의 결과로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에 궁색하지 않게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언제나 비단에 색색이로 곱게 물을 들여 정성스럽게 다듬고 매만져 옷을 해 입혀 놓으시곤 맵시가 난다고 다신의 수고도 잊으시고 기뻐하시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며칠 밤을 주무시지 못해가며 해 주시는 옷도 나는 단 며칠이면 휘말아 버리곤 하는 딸이었다. 내가 이화(梨花)기숙사에 있을 땐 당신은 일주일 내내 기다리다 토요일이 되어 내가 집으로 외출만 하면 어디서 굶주리다 온 것처럼 손수 온갖 좋은 음식을 다 만들어 주시곤 했다. 그러나 그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당신 자신은 며칠을 좋은 음식이라곤 입에 대지도 못하셨을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어머니도 좀 같이 잡수시자는 말이 어색해 혼자만 퍼먹고 기숙사로 와 버리곤 했다. 당신은 또 가끔 내가 기숙사에서 찬 없는 밥을 먹을 것이 애처로워 볶은 고추장, 장조림 같은 것을 해 드시고 아현동 고개 그 먼 산길을 오곤 하셨다. 그러나 당신께서 두고두고 맛있게 먹으라고 며칠을 두고 장만해다 주신 음식도 기숙사 식당에서 한두끼면 다같이 먹어버리곤 했다. 그뿐인가. 나는 또 그러한 당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나이들과 곧잘 어울려 다니는 딸이었다. 내가 결혼으로 당신 곁을 떠나던 날! 당신은 맏딸인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셨다.
뉘우칠 일을 하지 마라.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늘이나 사람 앞에 떳떳한 사람이 되라.
바로 지난 가을의 일이다.
안양에서 포도농원을 하시는 당시은 농사철이 끝나자 바로 나를 만나러 대구까지 오셨다. 그때 당신은 커다란 보따리에 고구마 강냉이 포도 그런 것들을 가지고 오셨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오시느라 너무 고생을 해 병환까지 나셨다. 빈 몸도 타기 어렵도록 복잡한 찻간에 보따리를 어떻게 가져 오셨을까 생각하니 나는 화가 치밀어 당신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어머니두, 촌 마누라들처럼 이런 건 왜 가지구 다니세요. 장에만 나가면 포도구, 고구마구, 강냉이구 지천으로 있는데 누가 그런 거 먹겠대요.
그러나 당신은 조용히 대답하셨다.
물론 돈만 들고 나가면 무어든 맘대로 사다 먹을 수도 있을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내 손으로 피땀 흘려 지어 먹는 것도 별미라는 것을 너에게 맛보이기 위해 가져온 것이니 그러지 말고 하나 먹어 봐라. 내 고생한 건 다 지나 갔으니 괜찮다.
나는 할 수 없이 당신이 집어 주시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강냉이 한 이삭을 받아 들었으나 가슴이 복받쳐와 먹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가실 때 거기는 병아리를 살 수가 없으니 여기서 금방 깨운 병아리와 또 앞 내(川)가 좋으니 오리 새끼를 몇 십 마리 사가지고 가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펄쩍 뛰고 말렸다. 사람도 가기 어려운데 그걸 어떻게 가지고 가시느냐고 야단을 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정거장에 나가면서 커다란 상자 속에 털이 보구루루한 병아리들이 소복이 담겨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고생만 하고 가다가 다 죽어버린다고 그렇게 말렸으나 당신은 기어코 그것을 가지고 가셨다.
얼마 후 나는 당신을 뵈오려 서울까지 갔다가 안양을 통과한 채 서울서 차를 부탁해 놓았다. 그러나 서울 와서 실컷 놀다 차를 타고 당신을 휘입 뵙고 온다는 일이 어쩐지 온당치 않은 생각이 들어 나는 당신도 늘 걷는다는 그 길을 걸어 나섰다. 서울서 안양까지 버스를 타고 안양서도 시오리를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식전에 서울을 떠나 저녁 때야 그 험한 남태령 고개를 넘고 안양 산길을 걸으며 그래도 나는 당신이 걷던 그 길이기에 피로한 줄도 모르고 자꾸 걸었다. 낯선 산도 나무도 당신의 모습을 기억할 것만 같아 무척 정다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런 산 속에서 외로이 사시는 당신을 생각하고 자꾸 가슴이 아팠다. 이런 머나먼 길을 당신도 걸으시거늘 나는 다시는 차를 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집에 닿자 당신은 내가 걸어온 것을 깜짝 놀라시면 애처롭게 생각하시었다.
그 먼 길을 어떻게 걸어왔니. 차가 없으면 그냥 대구로 가지. 안 보면 어때서 이렇게 먼 델.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당신에게 다정한 대답을 해 봤다.
어머니가 걸으시는 길을 제가 왜 못 걸어요.
나는 오랜만에 와 보는 당신의 농토를 휘이 한바퀴 돌아보았다. 만여 평이나 되는 넓은 땅은 그냥 구경만 하기에도 한참 걸렸다.
날이 추워오니 포도는 벌써 덩굴을 땅에 묻었다. 농사철이 지나 다 거둬들였다는 땅엔 푸른 김장거리와 붉은 고추들이 매달려 있고 넓은 밭에는 벌써 밀과 보리씨가 뿌려져 있었다. 배나무 복숭아나무는 열매 없이 서 있고 밭 언저리로 수십 주(株)의 커다란 밤나무가 꿋꿋하게 서 있었다. 집 앞엔 이른 봄 제일 먼저 손가락처럼 굵고 붉은 딸기가 열린다는 조그만 밭이 있었다. 작년 가을에 포도 팔아 사놓으셨다는 송아지는 벌써 중소가 되어 그 넓은 벌판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낯선 듯이 나를 쳐다본다. 돼지우리에선 새까맣게 기름이 흐르는 돼지가 꿀꿀거리며 뜨물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영양 좋은 돼지보다 그 울이 더욱 볼만했다. 하얗고 반듯반듯한 돌만 골라 높이 쌓고 위엔 새 짚으로 지붕을 이었다. 보통 돼지우리처럼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 안이 몹시 깨끗하다. 이건 흡사 사람이 살고 있는 돌집 같은 풍경이다. 이 돌집은 아버님께서 교회 일을 보시는 여가에 앞 내에서 하나씩 골라다 쌓으신 것인데 매일 쉬지 않고 한 것도 석달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내가 놀란 것은 가다가 죽어버리고 고생만 하신다고 한사코 말리던 그 병아리와 오리새끼들이 커서 이젠 큰 닭과 큰 오리가 되어 떼를 지어 햇빛에서 놀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것을 가져 오시느라 무척 고생은 하시었으나 삼십 마리 중 열 마리는 실패하고 이십 마리가 고이 자라나 오리는 벌써 주먹 같은 알을 낳아 주고 닭도 얼마 후에는 알을 낳아주리라 하셨다. 나는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이게 사는 것이로군. 이게 즉 생활이로군.
그날 밤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노란 차기장에 햇양대와 햇밤을 두어 오곡밥을 짓고 닭을 잡고 새로 털어 말린 참깨를 볶아 갖은 신선한 야채로 성찬을 준비해 주셨다. 이 한 상을 차리기 위해 돈과 바구니를 들고 나가 몇 시간만에 차려진 것이 아니라 콩을 심고 타작해 메주를 쑤어 담은 간장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땀과 눈물이 맺혀진 것이었다. 당신은 또 포도즙을 주셨다. 추수를 마치고 난 당신의 집엔 과연 오곡백과 없는 것이 없었다. 당신은 이것들을 무역이나 장사를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의 땀과 노력과 인내와 성실로써 얻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집에 있는 것은 또한 오곡과 백과만은 아니었다. 평화와 안정과 사랑,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갖지 못한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집엔 가득차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이 평화로운 조그만 낙원이었다. 그 옛날 우리 죄 많은 조상들이 쫓겨난 그 영토를 당신이 다시 창조하신 것만 같았다.
나는 어려서 사랑하는 당신이 남과 같이 물질적으로 풍성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 아팠다. 그래서 내가 커지면 우리 어머닐 호강을 시켜 드려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해마다 4월 4일, 당신 생신이 가까워 오면 나는 언제나 새로운 계획을 가져본다. 이번 생신 땐 우리 어머니가 깜짝 놀라시게 제일 좋은 옷을 한 벌 해다 드려야지. 그리고 또 어머님 말씀대로 이번 1년은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봐야지. 그러나 난 정작 그 4월 4일이 되면 당신에게 좋은 옷을 해다 드리기는커녕 그 날조차 곧잘 잊어버리곤 하는 딸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한 번도 이 딸에게 야속하다거나 섭섭하다는 말씀은커녕 내색조차 한 일이 없었다. 이렇게 맘속으로만 계획도 하고 효성도 다 한 채 어려서 맘 먹었던 대로 호강도 못 시켜드리고 옷 한 벌 못해 드린 채 당신에겐 벌써 환갑이 닥쳐오다니…….
당신이 걸어오신 육십 평생의 발자국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때 거기에는 진정 가시밭 투성이었거늘 이제 당신의 성실과 인내로써 쌓아 올린 뚜렷한 답을 나는 보았다. 온 세상이 가마솥에 물 끓듯 설렁거려도 당신만은 흔들리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도 않고, 남을 부러워하는 일도 없이 오직 자기의 분에 맞는 사명만을 완수해 가는 그 매몰찬 인생관 그것은 수양이라기보다 거의 천부의 성품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인색할 수 있는 당신이 이 딸에게는 어찌도 그리 관대할 수 있을까. 열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내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또 그것으로 인해 나에게 실망을 하지 않는 당신.
숙희야! 너는 꼭 좋은 사람이 될 줄 믿는다.
당신의 이런 신념과 희망은 나에게 오히려 무거운 부채를 짊어지워 주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 종일을 불러 봐도 그리운 이름. 세상엔 제각기 수많은 어머니가 있으되 나에겐 다시없을 단 하나의 어머니.
어버이의 품을 떠나 헛되이 헤매던 탕자(蕩子)가 다시금 그 따뜻한 어버이의 품으로 돌아오듯 나는 지금 내 어머니 당신의 품을 새삼스러이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과 한을 삼키고 슬픔과 괴로움도 침묵 속에 묻어버린 채 오로지 신념과 인내와 극기로써 가난도 외로움도 이겨내신 당신을 나는 이제야 밝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 침묵의 채찍 속에 조건 없는 사랑 속에 뒤늦게 돌아온 이 어리석은 탕자는 모성의 위대함에, 한 인간의 집념의 승리에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 숙인다.
_ 탕자의 변 창작노트
수필은 산책과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 글이야말로 내 마음의 행로를 따라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다.
시작과 끝, 그리고 내용마저도 기획한 바가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보고 느끼고 감동한 바를 그저 담담히 써 내려간 내 마음의 수상(隨想)이라고나 할까.
나는 사람에게 반하기를 잘한다. 열 권의 책을 읽는 깨달음이나 기쁨도 크지만 한 사람에게서 얻고 배우는 감격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길 수 없다.
내 어머니야말로 내가 반한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여성이시다. 그는 외면적으로도 단정한 미인이었고, 내면적으로는 더할 수 없이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의 여성이었다.
그의 음식 솜씨, 바느질 솜씨와 남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의 정신은 뛰어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태어났고 그의 품에서 자랐다. 내가 비록 결혼을 해 집을 떠난 다음에도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솜씨는 늘 나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언제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 언제나 내 곁에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한 내 어머니도 어느새 나이든 여인이 되어 환갑을 맞이하시다니, 정말 내 어머니만은 영원히 젊은 여인, 손과 발이 닳도록 우리를 위해 일하며 섬기는 여인으로만 믿고 있었다.
그러한 내 어머니의 회갑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생의 허무함을 나에게 다시 확인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의 발자취가 갑자기 떠올랐다. 고난 중에서도 병아리를 길러 큰 닭에서 아침이면 알을 낳게 하는 생명에의 사랑, 포도나무를 심어 거두고 온갖 야채를 손수 가꾸고 거두어 우리들에게 푸른 생명을 먹여 주시던 사랑의 손, 그의 생명 애호와 자연의 사랑 - 흙에서의 정직한 생산, 입은 언제나 침묵하고 땀 흘리는 정성과 사랑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르치심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부끄러움과 회한의 충격 속에 당신 앞에 나는 탕자로소이다. 그리고 늦게나마 당신의 탕자가 돌아왔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이 글은 나의 진실, 어리석은 현대인, 나의 참회,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 울림소리 멎지 않았던 삶의 振幅力 / 전숙희 약력
1919 출생지는 함남 원산(함남 협곡, 강원 통천 등으로 돼 있지만).
1934 『여성』 『사상계』 등의 잡지에 「시골로 가는 노파」 등의 단편 추천
1945 포항 해운대에 주둔한 군정청에서 비서 겸 통역관으로 근무
1947 손소희와 공동으로 문예지 『혜성』 창간
1954 경향신문사 문화부 기자
1955 아세아재단 파견 미국 문화계 시찰 / 컬럼비아 대학 비교문학과 수학
1957 제29차 도쿄 국제펜대회 참석
1958 대만 정부 초청 문화교류단
1970 월간잡지 『동서문화』 창간
1975 유엔 세계 여성의 해 대표 미국 유럽 이란의 세계 여성 생활 취재
1979 계원예술고등학교 설립
1983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피선 / 유네스코 한국본부 문화분과위원
1987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연임
1988 제52차 서울 국제펜 대회 개최
1989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연임 / 예술원 정회원 선임 / 방송심의위원
한국적십자 서울지부 상임위원으로 선임
1991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명예회장 추대 / 국제펜클럽 본부 종신 부회장
1993 계원조형예술전문대학 설립
1997 동서문학관 개관
1975 문화교육부 문화훈장
1989 대한민국문학상
1994 대한민국예술원상
1995 독일연방공화국 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