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유럽연합

[쾰른하우스]

독일과 유럽연합

. 공동체로서의 유럽

      
“다양함 속에 통일”(in Vielfalt geeint)의 유럽연합

유럽은 다양성으로 인해 어디까지가 그의 경계인지 분명치 않다. 유럽의 서쪽 끝은 영국과 아일랜드이지만 동쪽 끝은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면 헝가리 사람들은 유럽이 헝가리의 동부 국경에서 끝이 난다고 주장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래 된 유럽의 도시라고 부른다. 우크라이나 역시 자신을 유럽 국가라고 주장한다. 터키는 역사적'문화적으로 상이한 전통을 같고 있으며 오랫동안 ‘유럽 국가에 대한 주된 위협’이었다. 그러나 현재 터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며, 유럽연합 회원국이 되길 희망하고 있다. 과거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대서양에서 우랄까지’유럽의 단합을 주창한 바 있는데, 이 견해에 따르면 유럽은 이들 국가를 모두 포함하는 지역이 된다. 사실 러시아, 터키, 우크라이나는 모두 유럽의 각종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 예컨대 유럽컵, 위너스컵. UEFA컵과 같은 유럽 국가 간 축구 경기에 참여하고 있다.
그 구성원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유럽을 ‘하나’로 바라보게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과거 ‘하나로 통합된 공동체’였다는 역사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 로마 제국은 북쪽으로는 네덜란드,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 동쪽으로는 터키, 서쪽으로는 영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면서 각 지역 간 물자를 교류시키고 문화를 전파하였으며, 유럽을 하나의 정치 제도와 계급 구조를 갖는 사회로 만들었다. 로마가 닦아 놓은 도로를 따라 로마의 문화와 기독교가 유럽의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이후 유럽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해 하나의 정신적'문화적 공동체로 ‘통합’되었다. 우리가 ‘유럽적’이라고 부르는 보편적인 특성으로서의 유럽의 문화는 이 시기에 확고히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통합된 공동체’는 수많은 정치적 단위로 분열되었다. 분열과 함께 국가 간 전쟁도 끊이지 않았으며, 유럽의 국경선은 언제나 변화해 왔다. 민족을 단위로 하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려는 노력은 민족주의가 유럽을 휩쓴 근대에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데, 소비에트 연방에서 많은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포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었고, 유고슬라비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4개국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새로운 유고슬로비아로 분열되었다. 북아일랜드 지방의 많은 아일랜드 인들과 스코틀랜드 민족당(Scottish National Party)은 영국에서 독립된 그들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이탈리아 북부의 북부동맹은 빈곤한 남부 지역과 구분되길 원하며 ‘파다니아 공화국’의 건설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분열과 다툼은 역사적으로 어느 한 국가가 군사적으로 우위에 서는 경우 그 군사력에 의해 유럽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곤 하였다.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이라든지 히틀러의 제국 건설의 꿈은 모두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이러한 군사적 수단에 의한 통합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전쟁을 통해 유럽인들은 진정한 통합의 필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투쟁한 유럽인들은 유럽 재건을 위해서는 국가 간 국경선을 철폐하고 유럽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하였다. 이들은 유럽 각 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적 자부심을 전쟁의 근본 원인으로 비판하고, 유럽을 하나의 이해 관계 속에서 안전과 번영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유럽 통합의 또 다른 요인은 국제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계중심이었던 과거의 유럽은 제1, 2차 세계 대전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고,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 정치 질서아래서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유럽인들은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유럽의 독자성과 일체감을 유지하고 세계 경제의 두 축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일본에 맞서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유럽 통합은 바로 이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었던 셈이다.

2. 유럽연합의 과정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두 가지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하였는데 하나는 황폐화된 유럽경제의 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갈등의 극복을 통한 항구적이고 안정된 유럽평화의 구축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새로운 지역협력체제의 설립이 절실하였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델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은 1952년 7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를 출범한다. 그러나 이것은 각국의 석탄과 철강을 한 기구 안에서 관리한다는 명목이었으나 독일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묶어 두기 위함이었다. 또 6개국은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EEC(European Economic community))와 유럽원자력공동체(EAEC(European Atomic Energy Community))를 출범하여 농업, 경쟁의 법과 무역의 영역과 같은 경제영역으로 확대하였다가 세 집행부를 통합하여 1967년 7월 ‘유럽공동체’(EC(Eurpean Community))를 발족 시켜 역내 수입 쿼터제의 폐지, 역내 관세의 단계적 인하 후 폐지 등을 통해 역내 무역 자유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73년 1월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가 유럽공동체에 가입하였다. 1970년대 들어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과 국제통화체제의 불안으로 세계경제가 침체됨에 따라 유럽통합 역시 공동의 이익보다는 개별 국가 차원의 이기적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극심한 인플레와 실업률의 급증으로 빈약한 부존자원을 가진 EC는 자국시장의 보호에 급급한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채택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개방적 상호의존 구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유럽 통합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여 1970년대 유럽통합은 극심한 정체를 경험하였다. 다만 EC는 국제외환체제의 불안에 따른 불확실성을 완화하기 위해 1979년 3월 유럽통화제도(EMS)를 출범시켜 회원국의 환율 및 물가의 안정에 기여함으로써 오늘날 유럽통화통합(EMU)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80년 그리스가 유럽공동체의 10번째 국가로 되었고, 1986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하였다. 1980대 들어 미국과 일본 경제가 회복세를 보인 반면 EC 경제는 대외경쟁력의 약화, 대량실업의 발생, 한국 등 신흥공업국의 추격 등으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유럽통합에 대한 무용론과 비관론이 강력하게 제기되어 유럽통합이 중대한 국면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통합의 약화와 포기보다는 통합의 심화와 확대에 그 초점이 두어져야 한다는 데에 회원국간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EC는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1986년 6월 '역내 시장통합에 관한 백서'(White Paper on Completing Internal Market)를 발표하고, 1987년 7월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단일유럽의정서'를 발효시켰다. 그리고 EC 회원국간에 상품, 자본, 서비스,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제고하고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완전한 EC 공동시장을 출범시키기 위하여 이를 저해하는 물리적'기술적'재정적 장벽을 282개 지침(directive)의 제정을 통해 대부분 제거하고 1993년 1월 1일 유럽단일공동시장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유럽에서는 소련, 동구 등 사회주의정권의 붕괴와 동서독의 통일로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하였다. 냉전의 종식으로 야기된 일련의 국제정세변화는 유럽통합의 방향과 속도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쳐 이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대적 변혁을 맞이하여 개최된 1990년 4월 더블린 EC 정상회담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1992년 말까지 유럽정치통합(EPU)를 완료하고 1993년 1월 1일 단일공동시장의 출범과 함께 ‘유럽연합’을 창설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어 1990년 12월 로마 정상회담에서는 EMU의 추진과 함께 EPU 완성을 위한 기본 방향으로서 공동외교안보정책(CFSP)의 수립, 유럽의회(EP)의 위상 강화, 공동체 활동의 강화, EC 시민권의 도입 및 EC 기구의 개혁 등 5개 원칙에 합의하였다.
1991년 12월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히트에서 개최된 EC정상회담에서 정상들은 EMU와 EPU 결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유럽연합조약'(TEU: Treaty on European Union, 일명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체결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조약안의 협의과정에서 영국의 반대로 독일과 프랑스가 제안하였던 ‘연방유럽’(Federal Europe)의 구상은 ‘보다 긴밀한 연합’(ever closer union)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1992년 2월 EC 정상들의 조인과 각국의 비준절차를 마치고 1993년 11월 1일 공식 발효되었으며 이에 따라 유럽공동체(EC)은 유럽연합(EU)으로 개칭되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EMU, CFSP, 사법'내무협력 등 세 분야를 축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EC를 구성하는 EEC 조약, ECSC 조약 및 EAEC 조약을 개정함과 동시에 공동외교안보정책과 사법'내무협력에 관한 규정을 새로 마련하였다. 1995년 1월 오스트리아, 스웨덴, 핀란드가 EU에 새로 가입함으로써 북해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15개 회원국이 되었고, 2004년에는 체코, 슬로베니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 말타, 사이프러스, 리트비어,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10개국이 유럽연합에 새롭게 가입하였다.

(EU 가입국)

(EU 새로운 가입국)

(EU 가입 신청국)

3. 유럽연합 속의 독일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은 ‘통합 계획의 대상’일 뿐 주체적으로 통합을 추진해 나갈 처지는 아니었다. 독일과 수도였던 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의해 분할 지배되고, 외교'안보 문제 등 주요 국가 정책은 연합국이 제정한 점령 조례(Besatzungsstatut)에 따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파견관의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9년 독일 연방 공화국 초대 수상이 된 아데나워(Konard Adenauer)는 서독이 정치'경제'안보상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유럽에 편입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다. 당시 제약을 받고 있던 서독의 주권은 연합국과의 합의에 의해서만 회복이 가능한 것이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서도 서유럽 국가들과의 교류가 중요하였다. 이와 함께 동서 냉전이 심화되고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소련의 군사적 위협과 독일에서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게 되면서 서독이 서유럽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것은 안보를 위해서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서독이 서유럽의 일원으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독을 지배하고 있던 연합국 중 유럽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와의 관계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독일의 정치적 변화에 언제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에 독일 문제에 보다 예민할 수밖에 없었고, 반면 서독 입장에서는 서독에 대한 프랑스의 의구심, 불신, 경계감을 떨쳐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데나워는 당시 현실적으로 독일의 통일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정하고 서방 세계와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신뢰감을 회복하고 서방의 일원으로 자리잡게 되면 향후 소련과의 협상에서도 유리한 입장에서 통일에 대한 양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서독의 서방 체제 편입을 통한 통일’이라고 하는 정책적 입장을 취하였다. 1950년 5월 프랑스 외무장관인 슈만이 석탄'철강의 공동 관리를 제안한 ‘슈만 플랜’이 발표되자 아데나워는 이를 환영하였지만, 서독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슈만 플랜안은 자를란트(Saarland)지방에서 나는 석탄을 값싸게 구입하고 루르(Ruhr)지방의 철강 공업의 재건을 막으려는 프랑스의 불순한 의도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고 당시 슈마허(K. Schumacher)가 이끌었던 야당인 사회민주당은 이것이 노동자의 권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독일 통일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점에서 반대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슈만플랜이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보았고 이를 수용하였다.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다가가기 위한 방법으로서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주장한 ‘슈만플랜’은 프랑스인들에게는 독일을 정치'경제적으로 제어한다는 의미로, 독일인들에게는 독'불 상호 우호증진이라는 의미로 서로 다르게 이해되었다.

냉전의 심화와 6'25전쟁의 발발은 서독 내부와 유럽 많은 국가의 적지 않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독의 재무장으로 이어졌고, 1955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도 가입하였다.
이후 서독은 매우 일관되게 경제적 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 유럽 통합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유럽 통합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기대는 이념을 초월하여 서독의 모든 정당이 공유하였으며 일반 시민들도 이에 높은 지지를 보냈다. 기민당의 오랜 집권 뒤 1969년 집권에 성공한 사민당 역시 통합에 적극적이었으며, 빌리 브란트 수상, 헬무트 슈미트 수상 모두 유럽 통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뒤이은 기민당의 콜 수상은 장기간의 집권과 강한 지도력으로 유럽 통합을 심화'가속화시켰다.

            
아데나우어와 드골의 독?불 우호조약 체결(1963,엘리제궁), 콜과 미테랑의 1?2차 세계대전 희생자 추모(1984,베르덩)

독일은 마르크화가 유럽의 단일 화폐로 대치되지 않은 채 다른 국가의 화폐를 압도할 정도로 강하게 된다면, 이는 반드시 주변국의 질서와, 경쟁, 그리고 유럽 국가 간 정치적 대립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단일 시장의 쇠퇴, 보호 무역주의로의 복귀, 그리고 민족주의의 부활, 협력 대신 경쟁과 갈등'분열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유럽 국가의 공영(共榮)체제가 불안정해진다면 독일의 번영도 궁극적으로 위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독일은 화폐 통합을 서두르려 노력하였다.
유럽연합에 대한 독일 국민의 태도는 비교적 호의적인 편이었지만, 독일 통일 이후 국내 경제의 위축과 실업의 증가로 인한 불만이 생겨나면서 유럽 통합에 대한 지지도는 다소 낮아졌다. 불만의 초점은 마르크화라는 독일 경제의 상징이 ‘유로’(Euro)라는 이름 뒤로 사라진다고 하는 심정적인 것으로부터 유로화가 적어도 마르크화만큼 안정적이고 강한 화폐로 기능할까 하는 현실적 우려에 있었다.

                        
독일인의 유로에 대한 두려움
독일 화폐가 사라짐으로써 독일 경제가 약화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독일인
(Den deutschen Michel plagt die Sorge, ob mit dem Verlust der deutschen Wahrung auch die Starke der deutschen Wirtschaft verloren geht')
Horst Haitzinger의 펜화 1993

아데나워의 집권시기 이래 서독의 입장에서 유럽 통합은 정치'경제적 안정과 통일을 이루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즉, 유럽 통합이 먼저 이루어지면 통합된 유럽의 구조 속에서 독일 통일을 실현시킬 수 있으리라는 의도가 있었다. 사회주의 동유럽이 붕괴되기 시작한 민감한 시기에 독일이 주변국으로부터 통일을 승인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유럽 통합 과정에서 과거 적대국인 프랑스'영국 등과 신뢰감을 쌓았던 덕택이었다.
독일 통일이 유럽 통합보다 앞서 이뤄짐으로써 독일의 행동 반경은 그만큼 자유로워진 셈이다. 통일이 된 것은 전후 체제의 청산, 즉 제2차 세계 대전의 정치적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독일은 과거에 비해 유럽연합의 틀 안에서 대외 문제에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그 한 예로 1992년 옛 유고슬로비아가 분열하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가 분리되어 독립을 선언하자, 독일은 제일 먼저 이들의 독립을 승인하고 유럽연합 다른 회원국의 소극적 혹은 부정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EU가 이들 국가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킨 바 있다. 이와 유사한 문제는 EU의 확장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독일은 중'동유럽 국가들을 EU와 NATO에 편입시킴으로써 소련의 붕괴 이후 생겨난 이 지역의 힘의 공백이 메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의 입장은 독일과는 다르다. 우선 지중해 국가(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등)들은 동유럽 국가의 편입이 자국에 대한 EU의 보조금 지급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 역시 정치'경제'사회적 조건이 상이한 중'동유럽 국가들이 EU에 편입됨으로써 통합을 보다 심화시키려는 노력이 퇴색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 또한 이들 동유럽 국가들이 지리적으로 독일과 인접해 있고 경제적으로도 독일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국가의 유럽연합 편입이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 확대와 EU 내 표결 행사시 독일의 동조국가를 늘리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콜 수상은 독일의 통일을 둘러싼 인근 국가들의 우려를 의식하여 통일이 유럽 통합에 대한 독일의 관심과 개입을 약화시키지 않을 것임을 여러 차례 표명하였고 “유럽의 일원으로서의 독일(a European Germany, not a German Europe)"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유럽연합의 각국별 인구, 이사회위원 수, 의회의원 수, 단위 %)

(유럽연합 국가별 의회 의원 수)

독일 정치의 큰 변화는 16년간 독일을 이끌면서 유럽 통합을 주도한 콜 수상이 1998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물러나고 사민당의 슈뢰더(Gerhard Schr'der)가 새로이 독일을 이끌게 된 일이다.

그는 독일이 EU에 부담하고 있는 과중한 분담금 규모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해 왔다. 독일이 유럽 통합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슈뢰더의 선택에 따라 유럽 통합의 방향과 속도 역시 적지 않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슈뢰더가 수상에 취임한 이후 독일의 외교 정책상의 변화를 감지하게 해 준 작지만 의미 있는 사건은, 그 동안 독일 수상이 관례적으로 참여해 오던 프랑스에서 열리는 제1 차 세계 대전 기념식에 참여하지 않는 일이다. 독일은 전쟁 도발국이었기 때문에 독일인에게 이 기념식은 일종의 참회의 자리였던 것이다. 슈뢰더가 이 자리에 불참하는 것은 이제 독일이 과거사의 책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대하고, 또 국제 무대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방향 전환의 상징적인 움직임이었다. 분단 독일에서 총리가 되었던 콜과는 달리 슈뢰더는 첫 통일 독일 총리라는 점에서 이는 더욱 의미 있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독일의 통일은 전후 체제의 종식, 즉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독일의 빚 갚음이 끝이 났음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2년 2월 기준 각국의 유럽연합 재정분담액, 단위: 10억 유로)

4. 유럽연합과 단일 통화 “유러”

‘유로’화의 출범으로 남부 이탈리아에서 북부 핀란드에 이르는 유럽 대륙의 약 3억 인구가 단일 통화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미국에 필적하는 경제규모를 가진 단일통화시장이 출현하게 되었다. 유로화에 참가하는 11개 국가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 및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모두 19.4%로 GDP는 미국과 비슷한 규모이며 무역량은 미국을 훨씬 상회한다.
‘유로’는 1999년 1월 1일부터 도입되어 금융시장 거래, 국가간 거래 등에 사용되었다가 가맹국 통화와 유로의 지폐와 주화는 2002년 1월 1일 부터 6월 30일까지 함께 통용되다가 7월부터는 유로만이 통용된다. 단일통화 참가국은 벨기에, 독일, 스페인, 프랑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핀란드, 그리스 11개국이다. 유럽 연합 회원국 중 영국, 덴마크, 스웨덴은 스스로의 불참 결정에 따라, 그리스는 경제 상황이 참가 기준에 미달되어 유럽통화 동맹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후 2001년 그리스는 유로 회원국이 되어 현재 12개국이 되었다.

       
(미'일과 유로화 통화권의 비교 유로 회원국)

유로화의 지폐는 5, 10, 20, 50, 100, 200, 500 유로 7종이며, 주화는 1유로와 2유로 두 종류와 유로의 1백 분의 1인 센트를 단위로 1, 2, 5, 10, 20, 50센트 등 모두 8종이다.

유로화의 발권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소재 유럽중앙은행 소관인데, 실제 조폐는 각국 중앙은행이 담당한다. 지폐의 경우 어디에서 인쇄하더라도 동일하며 제작한 나라 이름은 일절 표시되지 않는다. 주화의 경우 앞면은 공통이지만, 뒷면은 국가별로 다르게 디자인되어 있다. 2004년 2월 26일 기준 1유로의 환율은 1.2443달러이고, 우리나라 원화와의 환율은 1,504원 65전이다.
5. 21세기 유럽연합의 전망

유럽연합은 20세기 후반을 성공적으로 장식하면서 세계에 평화적인 지역 통합의 모델을 제시하였지만 유럽연합의 미래가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유럽통합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의 역사는 실패와 굴절,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유럽연합의 미래 역시 유사한 경로를 거쳐 나가게 될 것이다. 특히 연합의 회원국들의 단기적인 국가 이익과 장기적인 이익의 상호 모순성은 유럽연합을 운영하고 통합을 심화시켜 가는 과정에서 불가분 반복적으로 돌출 될 것이다. 유럽연합의 미래의 진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도전으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예상해 볼 수 있다.
유럽연합이 극복해야 할 첫째 과제는 장기적인 경제 위기에서 탈출하거나 경제 위기의 사회적 결과를 소화할 수 있는 기제를 마련하는 것이다. 1970년대 시작된 유럽의 장기 불황은 구조적인 경제'사회 문제를 유발시켰다. 유럽연합의 평균 실업률은 1980년대부터 10%를 웃돌고 있으며, 이는 유럽에 1.000만 명 이상의 실업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할 때 유럽의 실업자들은 상대적으로 관대한 사회 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긴 하지만, 실업 문제가 장기화'구조화되면서 사회 보장 제도로 포괄할 수 없는 실업자 계층이 양산되고 있다.
최근에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안되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보수주의자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경제 성장을 촉진시키는 데 있다면서 시장의 원칙을 확산시키고 정부의 규제를 완화'철폐하여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1980년대 단일 시장과 1990년대 단일 화폐를 추진하면서 상당 부분 이러한 방향으로 경제정책의 틀을 맞추어 왔다. 재정 적자를 줄이고 통화량을 통제하며 반(反)인플레 정책을 추진하였다.
실제로 유럽연합은 1997년부터 경기가 활성화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실업도 조금씩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경제 성장이 실업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방법에 대해서는 상이한 견해를 취한다. 이들은 시장 기제의 확산을 통한 경제 성장은 오히려 불평등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에 대한 보안책으로 케인스적 경기부양책과 고용의 분담을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따라서 정책적인 차원에서 경기 부양과 사회적 기제의 확충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극도로 세계화된 국제 경제 질서 속에서 유럽 사회주의 세력들의 시도가 성공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시장 경제의 효율성과 인간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적 기제를 이들이 성공적으로 혼합시킨다면, 21세기 유럽은 사회적 자본주의 모델을 세계에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이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 유럽은 미국식의 신자유주의 경제'사회 질서의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유럽의 신사회주의 실험은 역사적으로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이 극복해야 할 둘째 번 도전은 중'동유럽 국가들의 가입을 원만하게 소화하는 것이다. 2004년 새로운 유럽연합 가입국이 된 헝가리, 체코, 폴란드,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가입 이전의 시기에 성공적인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수립과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완수해야 하는 문제와 신규 회원국들과 기존의 회원 국가들 간에 유럽연합의 사업 예산 배정을 둘러싼 마찰을 해소하는 문제이다. 또 경제 발전 수준에도 큰 차이를 보이는 중'동유럽 국가들의 주민들이 보다 풍요로운 서유럽 지역으로의 대규모 이민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앞서 지적한 서유럽 국가의 심각한 실업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25개국으로 회원국이 늘어남으로써 이에 따르는 운영의 비효율성, 제도적 마비의 위험성이 지적되고 있다.
유럽연합에 대한 세 번째 도전은 유럽의 정체성 위기에 있다. 유럽은 공동시장, 단일 시장, 단일 화폐 등 경제적인 이익을 도모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해 왔다. 정책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다른 국가들과 협상을 하면서 하나의 정체성을 만들어 왔고 하나의 제도적 기반을 통해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거대한 시장과 강력한 화폐, 복잡한 제도와 절차만 가지고 있을 뿐 정체성의 기본이 되는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정체성은 객관적인 이해 관계와 제도나 절차 등을 통해서 형성되기보다는 주관적인 정신적 유대감과 소속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정체서의 문제는 이 같은 정신적 유대감과 소속감을 너무나 다양한 여러 민족 사이에 새로 창출해 내야 한다는 점이다. 민족 국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건국 신화나 종교를 재 발굴하였듯이 유럽의 일부에서도 그리스-로마-기독교 문명으로 연결되는 서구 문명에서 유럽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하지만 다른 일부에서는 이 같은 과거 지향적인 정체성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정치 및 경제 체제, 파괴적일 수 있는 시장적 기제와 사회적 기제의 적절한 보완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자본주의 모델, 법의 원칙이 지배하는 법치국가의 모델, 국민 국가와 유럽연합에 가지는 유대감과 소속감의 다원화 등이 새로운 유럽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데 핵심적인 요소로 거론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유럽연합이 이러한 세 가지 중요한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면, 이는 유럽연합뿐 아니라 인류 사회의 차원에서도 상당한 의미 있는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유럽의 경제적 위기 극복의 방향이 배타적이고 착취적이며 결국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방향이 아니라, 사회적 고민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경제의 주도적 흐름이 되어 버린 자본주의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유럽연합의 성공적 확대와 제도적 개혁은 일단 세계의 한 구석에 거대한 평화 안정 지역을 구축함과 동시에 다른 지역에도 이러한 평화적 방법을 통한 통합의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성에 기초한 유럽의 정체성 수립은 궁극적으로 민족 감정이 지배하는 세계 다른 지역에 새로운 문제 해결의 모델을 제공할 것이다.

(국수주의 위협의 유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