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치마와 가죽 옷의 차이....
“그러나 믿음이 온 이후로는 우리는 더 이상 훈육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너희 중에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5-27)
“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으로 외투를 만들어 그들에게 옷을 입히시니라”(창3:21)
여름에는 더위가 찌는 듯 지속되지만 가을이 오면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게 됩니다. 가을이라고 느끼기도 전에 어느덧 겨울이 찾아와 사람들은 월동준비를 하느라고 분주합니다. 김장도 마련해야 하고 이부자리도 손질하고 의복도 겨울 것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합니다. 농촌에서는 땔감도 준비하며 한겨울을 지낼 준비에 바쁜데 그 중에 제일 신경 쓰는 일중 하나가 활동할 때 큰 지장이 없도록 겨울옷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신문잡지 등에 자주 등장하는 광고문에는 밍크코트와 같은 가죽옷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겨울철에 사람들이 제일 관심 있는 옷은 추위에도 잘 견디고 질긴 가죽옷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종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외투나 코트는 어지간한 경제력이 있는 사람은 한 벌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가죽옷을 입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가죽옷은 다른 어떤 옷보다 질기고 따뜻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따뜻하고 질기고 부드러운 것에 더하여 아름다움까지 곁들여 입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패션 디자이너”들이 있고 “패션쇼” 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최초에 가죽옷을 누가 만들었으며 누가 그 옷을 입었을까요?
인류 역사가들은 수만 년 전에 원시인들이 만들어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성경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복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사람이 만들어 입은 최초의 옷이 “앞치마(aprons- 창 3:7 KJVB)”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아담 부부에게 만들어 입히신 옷이 “가죽코트(coats of skins-창 3:21, KJVB)”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든 “앞치마”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죽옷”을 통하여 영혼의 가죽옷 되시는 예수님으로 옷 입는 진리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든 최초의 옷, 무화과 잎사귀로 만든 앞치마
“이에 그들의 눈이 열리므로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들을 함께 엮어서 자신들을 위하여 앞치마를 만들었더라”(창3:7)
의복의 유래는 결코 멋이나 아름다움의 욕구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멋” 또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도 그 배경에는 끝없이 공허한 영혼의 눈을 만족시켜 보고 싶은 욕구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아담과 하와가 앞치마를 만들어 입은 동기는 양심에 스며든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가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우리에게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생겼습니까?
흔히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얼굴이 빨개졌다’, ‘홍당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부끄러움을 감추고 태연자약한 사람을 우리는 ‘얼굴에 철판 깔았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차라리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수치를 아는 양심이라면 무화과 잎사귀라도 꺾어 본능적으로 앞이라도 가릴 것이지만 부끄러움도 수치도 모르는 양심을 소유했다면 분명히 “양심에 철판을 깐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수없이 반복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으면서도 그들은 얼굴이 뻔뻔했으며(겔2:4) 목의 힘줄은 무쇠요 놋같이 단단한 고집투성이 의 이마였습니다.
“이는 네가 완악하여 네 목은 쇠 근육이요 네 이마는 놋쇠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라”(사48:4)
이와 같이 오늘날도 양심이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고 있는 죄인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영혼들이 선과 악이 뒤바뀐 상태에 살다보니 양심들이 마취되어 죄 중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는 말씀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뱀의 미혹에 빠져 실과를 먹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마치 구원받은 성도의 성경을 보는 눈이 밝아진 것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눈은 ‘선’에 대조되는 ‘악’을 발견하게 되었고 부끄러움의 눈이 뜨이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어느날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이 가지게 될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상태가 될 것입니다.
아담은 죄를 범하자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가슴에는 큰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죽음의 공포, 초조, 불안과 함께 하나님을 뵙는 것이 무서워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모든 감추어진 일에 따라서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것임이라”(전12:14)
“곧 내가 전하는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니라”(롬2:16)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꾀를 내어 저주받은 땅에서 나온 무화과 잎사귀를 엮어 앞치마를 만들어 입고 두려움을 감추어 보려는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본래 에덴 동산은 평화로운 낙원이었습니다. 온갖 향기들이 만발하는 기화요초들, 아름다운 새들, 수목들, 맑은 물, 푸른 숲들, 평화와 사랑이 넘쳐 흐르는 곳에는 추위도 더위도 부끄러움도 수치도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벌거벗고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남자와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
결코 죄를 가리 울 수 없는 앞치마
“이는 내 두 눈이 그들의 모든 길들 위에 있음이니 그들이 내 얼굴로부터 숨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두 눈으로부터 숨겨지지 아니하리라”(렘16:17)
“그들의 짠 것은 옷들이 될 수 없나니 그들의 행위들로 자기를 스스로 가리울 수 없으리라 곧 그들의 행위들은 죄악의 행위들이라 그들의 손들에게는 횡포의 행위가 있도다”(사59:6)
아담은 스스로를 구원해보겠다고 이미 저주받은 땅에서 나온 무화과나무 잎을 엮었습니다. 그러나 땅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땅에서 나온 것으로는 저주를 자초할 뿐 결코 죄를 가리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마찬가지로 결국 흙에서 나와서 흙에서 나온 것을 먹고 살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들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위의 말씀은 결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주받은 땅은 바로 우리의 육체가 나왔던 곳이기에 육신을 의미합니다. 우리 육체를 통해서는 결코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선행과 노력과 지혜로는 결코 인간의 죄악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무화과 잎사귀를 엮듯이 사람들은 종교를 만들어 온갖 우상을 섬기고 스스로 행한 의를 믿고 자신의 죄를 무마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눈에 가려졌다고 온 몸이 가리워진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무화과 잎사귀를 엮어 치마를 했다는 뜻은 사람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죄를 가리워 보려는 사람들이 창출한 “종교행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인데 죄를 범하고도 심판이 없다는 생각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이며 앞치마를 만들어 걸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벌거벗고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보다 더 사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앞치마를 걸치고 그것에 안주하여 속고 있습니까? 그것이 당신의 의(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3:11)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한 번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들은 더러운 걸레 옷들 같으며 또한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잎사귀 같아 시들며 우리의 죄악들이 바람 같아 우리를 몰아갔나이다”(사64:6)
혹시 당신은 구더기 같은 우리의 상태를 모르고(욥25:6) 스스로 자기의 의를 세우려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은(롬10:3)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이 걸치고 스스로 안주하고 있는 종교의 앞치마들 중 제일 무서운 것이 자기 생각의 앞치마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신뢰하는 자는 우둔한 자이나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건져냄을 얻으리라”(잠28:26)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시14:1), 죽으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히9:27),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각(마10:28),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롬3:11, 전7:20), 나는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상급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사64:6),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천국에 갈 것이라는 생각(마23:15), 나는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했기에 구원받았을 것이라는 생각(고전15:1-2), 우리 목사님이 나를 알아주기 때문에 거듭났을 것이라는 생각(행4:12), 헌금을 많이 했고 새벽기도를 많이 했으며 현재 집사나 권사나 장로이기에 구원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요3:5-8), 언젠가는 영혼문제를 해결 받을 때가 올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전9:12), 꼭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벧전1:3) 등은 모두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무화과 잎사귀 앞이마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결코 자신의 죄들을 가리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 앞에는 그날 심판날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앞치마를 입고도 하나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 동산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긴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결코 죄가 숨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날의 서늘할 때에 동산에서 거니시는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라 이에 아담과 가의 아내가 주 하나님의 면전을 피하여 동산의 나무들 가운데에 숨으니라”(창3:8)
“이는 우리의 허물들이 주님 앞에 많이 있으며 우리의 죄들이 우리를 증거함이요 또한 우리의 허물들이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의 죄악들도 우리가 아나니”(사59:12)
지금은 양심을 속이고 웃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날 모든 죄악이 심판책에 기록된 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심판을 받는 날 모든 것들이 속임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계20;11-15) 그리고 자신의 수치를 가렸던 치마가 들쳐지고 죄들이 호리까지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나훔3:5, 렘애1:9)
이제 하나님의 애정어린 권면을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에게 권고하나니 내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너희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고,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할지어다”(계3:18)
“보라, 내가 한 도적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키고 벌거벗은 채로 다니지 아니하여 자기의 수치를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
하나님이 준비하셔서 입혀주신 가죽옷(Coats)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겠으며 내 혼이 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니 이는 그분께서 구원의 웃옷으로 나를 입혀주셨고 그분께서 나를 의의 겉옷으로 덮어주시어 마치 한 신랑이 장식물들로 꾸민 것같이 한 신부가 보석들로 자신을 단장함같이 하셨음이라”(사61:10)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만들어 입은 앞치마를 걸치고도 결코 양심은 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눈을 피해 여러 가지 꾀를 내어 자신을 숨기려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다수’라는 수풀 속에 자신을 숨겨버리는 것입니다.
“다 그렇게 하지 않는냐?”
“이 많은 사람들이 잘못될 리가 없다.”
그러나 그 ‘다수’가 결코 죄를 가리워 주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을까요?
“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으로 외투를 만들어 그들에게 옷을 입히시니라”(창3:21)
창세기 첫 부분에서 가장 복된 소식 중에 하나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기록입니다. 결코 그들이 추워서 입혀 주신 것은 아닙니다. 에덴 동산은 추위도, 더위도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벌거벗고도 부끄러움이 없는(창2:25) 참 평화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변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변했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범죄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았기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사랑을 실천하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법칙은 파괴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담과 하와 대신 다른 생명에게 형벌을 내리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평화로운 에덴 동산에 순진하고 깨끗한 짐승 한 마리를 잡아 피흘려 죽인 후 가죽을 벗기셨습니다. 피는 곧 그 생명이며(레17:11)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죄사함이 없습니다.(히9:22)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면 많은 사람의 죄가 사해진다고 하셨고 그것을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마26:26-28)
에덴 동산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이름없는 한 마리 짐승은 아담 대신 저주를 받고 처참하게 피흘려 죽었습니다. 바로 그 희생동물은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져가시는 하나님의 그 어린 양이시로다”(요1:29)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너희가 누룩없는 자로서 새로운 덩어리가 되리니 곧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예물이 되셨음이라”(고전5:7)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셔서,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피흘려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만드시고 친히 입혀 주셨습니다. 아담이 할 일은 그 초라한 잎사귀 앞치마를 벗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탕자같이 돌아와 손들고 죄를 자복하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성도들
“그러나 그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말하기를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아들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눅15:22)
“그분께서 자기 앞에 서 있는 자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로부터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네게서 네 죄악을 떠나게 하였나니 이제 내가 너에게 옷을 바꾸어 입히리라 하시기에”(슥3:4)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것을 예비하지 말라”(롬13:14)
사람들은 아마 이 겨울의 입구에서 따뜻한 가죽옷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부끄러움을 덮어주고 따뜻하게 하는 가죽옷보다 영혼의 수치를 덮어주시고 따뜻하게 안아 주시는 우리의 가죽옷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요3:16, 1:14, 마1:23)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요12:47) 죄없이 성령님으로 잉태되셨습니다.(마1:18-21)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고 선언하신 대로(마20:28) 저 골고다 사형장 나무 위에 못박히시고 벌거벗김 당하셔서 모든 부끄러움을 홀로 담당하시고 모든 죄들의 형벌을 끝내셨습니다. 죄없으신 그분은 우리 대신 벌거벗김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의 옷을 벗기고”(마27:28) 그리고 피흘리시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셔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셨으니 이는 육체로 죽임을 당하시고 성령님으로 살리심을 받으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 위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느니라”(갈3:13)
이렇게 예수님은 가죽이 벗겨지듯 온 몸이 피투성이로 찢겨져 형벌을 끝내시고 가죽옷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복음의 말씀을 기록하셔서 오늘날 누구든지 듣는 자는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아담에게 입혀주셨듯이 이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복음을 기록하시고(딤후3:15-17) 성령님의 역사로 복음을 듣고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참으로 심령에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어져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은 성령님의 역사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요3:1-8, 고전12:1-2)
사람들은 옷을 보고 신분을 구별합니다. 군복을 입은 사람은 군인, 경찰복을 입은 사람은 경찰, 소방복을 입은 사람은 소방대원으로 금방 알아봅니다. 옷이 그 사람의 신분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요1:12, 롬8:15-16) 예수님은 죄없으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성도들 역시 신분상 죄없는 거룩한 성도(고전1:2, 히10:10-14)들이며 의인들입니다.(롬5:1)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성도들도 이미 믿음으로 하늘에 들어갔으며(엡2:4-7) 예수님이 부활하심과 같이 또한 성도들도 믿음으로 영화롭게 되었습니다.(롬8:30)
날이 이르면 구원받은 성도들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고전15:50-58) 예수님이 하늘의 상속자이심같이 예수님으로 옷입은 성도들 역시 하늘의 시민권을 얻은 자들이요(엡3:20-21) 하늘의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상속받은 아들들입니다.(갈2:27-29)
당신은 어떤 옷을 입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들은 더러운 걸레 옷들 같으며 또한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잎사귀 같아 시들며 우리의 죄악들이 바람 같아 우리를 몰아갔나이다”(사64:6)라고 하신대로 그 더러운 옷을 입고 있습니까? 또는 결코 죄를 덮을 수 없는 불신, 행위종교, 무관심의 자기의 앞치마를 걸쳐 입고 있습니까? 아니면 참으로 자기의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안전하게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그날! 모든 성도들이 기다리는 그날!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에게 이렇게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말하기를 친구여 그대는 어찌하여 혼인 예복도 입지 아니하고 여기에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니라 이에 왕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그의 손발을 묶어 데리고 나가 바깥 어둠 속에 내어 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였느니라”(마22:12-13)
이미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흘리신 피로 영원한 속죄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에 복음의 말씀이 증거가 되어 안전하게 하늘나라를 행하여 힘차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거듭나지 못했다면 이 대열에 들어오시기를 초청합니다.
“말하기를 복되도다 자기의 불법들을 사함받고 자기 죄들을 가리우심을 받은 자들이여 복되도다 주님께서 죄 없다고 여기실 사람이여 함과 같으니라”(롬4:7-8)
“보라 내가 한 도적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키고 벌거벗은 채로 다니지 아니하여 자기의 수치를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
http://cafe.daum.net/sbb21/6VJz/1
영월중앙침례교회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33번길 46 (영월읍 영흥리 947-17)place.map.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