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철폐투쟁의 전진을 위하여
비정규직 투쟁은, 가정이 파탄나고,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고, 불구가 되고, 구속되고 매맞았던, 비정규 노동자들의 피로 물들어있다. 그 두려움을 깨치고 힘들게 투쟁을 이어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 위에 떠있다. 단지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을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현장에서 쫓겨나 생존의 위협 속에서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한다는 이 사실 그 자체가 엄청난 고통이다. 몇 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그 고통 속에 있다.
우리의 책임은 이 고통을 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의 근원을 없애는 데에 있다. 그것은 쉽지 않은 길이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정규직 비정규직을 넘어서서 전체 노동자계급운동이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이기에 동지들과 함께 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 우리의 지향은 비정규직 철폐이다.
비정규직 투쟁 과정에서 우리는 '비정규직 철폐'가 궁극적 요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의 근원은 '비정규직'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단지 고용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단결을 파괴하고, 노동기본권을 분쇄하며, 자본의 초과착취를 쉽게 만드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전략을 의미한다. '비정규직'을 용인하는 선상에서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철폐를 지향할 때 운동의 계급적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비정규직 철폐'라는 주장 안에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새로운 지향의 확보, 그리고 계급적 연대의 재구축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의 의미로서 '비정규직 철폐'
비정규직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계약직, 임시직, 파트타임, 파견직, 사내하청, 특수고용직 등 각기 다른 형태를 갖고 있지만 본질은 같다. 업종과 업무의 성격, 그리고 기업의 규모에 따라 구조조정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어서 그 직무와 규모에 걸맞는 비정규직 형태가 개발되는 것이다. 대규모 제조업의 경우 사내하청이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고, 사무직을 중심으로 해서는 계약직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 공공부문도 도급으로의 전환 등 간접고용이 확대되고, 운전직 등은 파견형태로 전환한다. 소규모 기업이나 관리 감독이 어려운 업무, 계절에 따른 수요변동이 심한 경우 특수고용직으로의 전환이 많다. 이런 비정규직마다의 고유한 특성은 있으나, 유연화의 여러 형태일 뿐이다. 그러기에 비정규직 철폐는 비정규직의 다양한 양상을 만드는 근본 원인인 '구조조정' 분쇄의 의미를 내포한다.
자본은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비정규직들은 해고를 하거나 노동조건을 저하시키기도 한다. 비정규직화의 이유 중 하나가 기본권이 없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서게 되고 구조조정 철폐를 외치게 된다. 성과급 영업사원들을 비정규직으로 전환시키려고 하는 바람에 투쟁에 나선 홍익매점 노동자들, 도급으로 전환하면서 계약직 노동자 7000명을 해고하자 전화국 점거농성 등 극한 투쟁으로 맞서는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 구조조정과 민영화 과정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한 것에 맞서서 투쟁하는 대송텍 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생존권 투쟁임과 동시에 구조조정에 맞서는 투쟁이다.
2. 새로운 노동의 질을 창조하는 의미에서 '비정규직 철폐'
'비정규직 철폐'라는 우리의 주장은 우리의 궁극적 지향이 '정규직화'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작은 요구들조차도 자본과 정권에 의한 폭력적 탄압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규직화'는 아주 절실한 요구일 수 있다. 하지만 정규직화 된 이후 자본에 의한 구조조정과 비정규직화라는 현실에 또다시 직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요구와 지향이 '정규직화'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신자유주의 시대로 돌입하면서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들을 기업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자본은 항상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안정된 고용보다는 언제라도 짜를 수 있는 '유연화된 노동'을 선호한다. 그러하기에 노동자들은 특정 기업에 강하게 종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은 노동자 내부를 경쟁시키는 방안으로 통제력을 강화한다. 언제라도 고용될 수 있는 반실업상태의 비정규직이 깔려있고, 생존의 위협이 크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기 노동력의 질을 높여서 조금이라도 안정적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을 스스로 통제한다. 살아남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하고,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시간조차도 자본을 위해 자기 돈을 들여 사용한다. 그렇다면 '정규직 노동'은 과연 안정적인가? '안정적 고용'이란 것이 허구에 불과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다시 기업 종속적 통제구조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지향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유연화에 저항하는 우리의 투쟁은 획기적 노동시간 단축의 전제 위에서 일자리를 확충하고, 일자리의 자유로운 이동과 창의성이 발현되는 구조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의 틀을 넘어서는 요구일 수밖에 없다.
3. 계급적 연대를 복원하는 의미의 '비정규직 철폐'
'비정규직 철폐'라는 우리의 요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자본의 분할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를 다시 복원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본은 노동자들의 집단성을 부수고, 개별경쟁을 강화하며, 노동자들 사이에 위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할을 시도한다.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을 하는 경우 노동자 내부에 위계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관리전략을 함께 진행한다. 정규직들에게 허위의식을 심어놓고, 비정규직들에게는 각종 차별로 무력감을 증폭시킨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모습은 자본의 전략에 정규직 노동자들이 얼마나 깊숙하게 포섭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구조조정에 대항해서 제대로 투쟁하지 못하면 정규직들은 반드시 비정규직에게 배타적 태도를 갖는다.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캐리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정규직들의 태도,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태도, 대송텍 노동조합 투쟁에 대한 대한송유관공사 노동조합의 태도들을 보면 하나같이 배타적인데, 이 노동조합들이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자본은 투쟁 전선을 왜곡시키기 위해 비정규직 문제를 비정규직들만의 문제로 좁히거나 정규직 고용과 비정규직 고용이 대립적인 관계인 것처럼 조작을 하는데, 이것을 정규직들이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하나라도 더 짤려야 정규직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제로섬게임을 극복하는 길은 노동자들의 단결 투쟁을 통해 자본의 구조조정을 분쇄하는 길이다.
이런 자본의 관리전략과 분할을 넘어 노동자들의 집단성을 재구축하고, 노동자의 계급적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비정규직 철폐'이다.
Ⅲ. 비정규직 조직과 투쟁 사례에서 나타난 교훈
우리의 지향이 '비정규직 철폐'에 있다면 이것은 현실의 투쟁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가? 그것은 투쟁 주체를 세우는 것이다. 투쟁하는 비정규직 동지들과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성격과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해주고, 그것을 자신의 투쟁 속에 실현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노동자의 계급적 연대'에 기초한 '구조조정 분쇄'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어떻게 발전해왔고, 그 속에서 어떤 교훈들을 남기는지 살펴보자.
1.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이 요구된다.
비정규직 투쟁의 사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노동기본권 쟁취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생존이 매우 어렵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본권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 제도적 상황이 문제이다. 건설운송 노동조합이나 보험모집인 노조의 경우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본의 공세 앞에서 무력해졌다. 명월관 노동조합 등은 단위사업장의 복수노조 금지조항이라는 악법에 의해 법외노조가 되었고 사측의 탄압에 힘들어하고 있다.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파견법에 의한 주기적 해고 때문에 노동조합의 안정성 자체가 흔들리고 있으며, SK인사이트코리아 노동조합이나 대송텍 노동조합은, 현행 제도가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원청의 계약해지와 탄압으로 깨져나가고 있다. 이것은 특별한 몇몇 비정규직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투쟁을 하려고 하는 순간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문제이다. 이것이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발목을 잡고 투쟁을 장기화하며, 애써 만든 노동조합조차 결국 깨지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건설을 통해서 현재 자신의 처지와 문제를 깨닫게 되고 투쟁을 하면서 자신을 주체로 세워나간다. 노동조합 건설은 쉽지 않은 길이지만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투쟁하는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아마도 비정규직 투쟁의 의미는 쉽게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비정규직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 내부에 비정규직 조직화의 가능성과 의미가 더욱 각인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알려냈기에 비정규직 철폐투쟁이 우리 운동에서 중요한 투쟁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일반화하고,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만들겠다고 맘만 먹으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건설과 투쟁을 가로막고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파괴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쟁취하지 않는다면 비정규직 노조운동의 일반화는 먼 일이 된다.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쟁취투쟁은 단지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일반화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것이며, 자본의 구조조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정규직은 애초부터 노동기본권을 갖지 못한 존재였다. 정확히 표현하면, 자본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쟁취한 노동기본권을 적용시키지 않아도 되는 노동자들을 만들어내고자 했고, 그것의 형태가 비정규직이었다. 근로자파견제와 정리해고제를 관철시킨 자본은 비정규직들에게 가장 억압적인 부분을 일부 완화하면서, 단결권이나 단체행동권 등은 철저하게 깨버리려고 제도적 손질을 기획한다. 그것이 '비전형근로자보호'라는 명분으로 제기된 자본의 노동법 개악 안이다. 노동법 개악안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법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기본권을 완전히 쟁취하기 위한 투쟁들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자본의 구조조정은 유연화의 완성에 있기 때문에 노동기본권 쟁취투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이 아니라, 이제 곧 대다수가 비정규직이 될 민주노조운동 전체의 몫이다.
2. 투쟁의 의미들을 확장시켜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올해 중요한 의미들을 많이 남겼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보호의 대상에서 투쟁의 주체로 변화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이겠으나 동시에 노동운동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전에 노동자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자임을 선언하며 투쟁에 나서면서 노동운동의 영역과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노동운동가들을 만드는 통로가 되고 있다. 비정규직 투쟁을 통해 우리 노동운동이 더욱 풍성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투쟁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비정규직 투쟁은 우리 운동의 전투성을 충분히 강화하고 있다. 비정규직 투쟁대오 대다수가 현장에서 밀려나있기 때문에, 그리고 정권과 자본이 더 이상 던져줄 떡고물이 없기 때문에 투쟁은 치열하고, 극단적이다. 그런 만큼 최근의 투쟁에서 잘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투쟁전술이 만들어지고,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가 단련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이 외에도 비정규직을 넘나들 수밖에 없는 장애, 여성, 실업, 이주 노동자들과의 실천적인 연대를 통해서 운동의 주변부로 인식되던 불안정 노동자들 전체를 유연화 반대투쟁의 중심 주체들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러한 의미들은 저절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의 과정 속에서 예전과는 다른 의미들이 새롭게 생성되는 것은 비정규직 투쟁 자체가 더 이상 몇 가지 경제적 요구를 얻어내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존재 조건을 없애는 투쟁으로 발전해나가는 필연성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은 전술에서도 새로운 양상들을 만드는데, 먼저 품앗이 연대를 넘어서서 공동투쟁의 가능성이 확대된다. 한 기업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계급적 본능으로 연대하기에, 자신의 사안을 넘어서서 자본에 대한 공동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또한 투쟁의 양상도 더 이상 길거리에 밀려앉아 여론에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정세를 열어나가고, 공장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결의를 밝히는 대중적 점거투쟁을 만들어왔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깨닫고, 노동자로서 자신을 재구성해간다. 하지만 시위용 투쟁, 압력용 투쟁에서 그 의미들은 살아나지 않는다. 라면 몇 박스 전달하는 투쟁으로는 계급적 연대가 형성되지 않는다. 관성적 투쟁의 패턴들이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새롭게 열고 있는 이러한 투쟁들은 다소 거칠고 비합리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투쟁이 운동의 관성을 깨고 새롭게 투쟁의 의미들을 되새기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 합의의 이름으로 포장된 노동내부의 분할과 투쟁의 형해화를 극복하고, 투쟁의 계급성을 다시 복원하는 것은 이러한 투쟁의 의미를 적극화하고 사회화할 때 가능하다.
3. 자생적 투쟁을 넘어 조직되고 기획된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투쟁은 자생적 투쟁이었다. 하지만 자생적 노조조직화만으로 비정규직 투쟁이 확대될 수는 없다. 비정규직 투쟁은 투쟁에 나서는 순간 일개 자본가를 대상으로 한 투쟁을 훌쩍 넘어버린다. 파견노동자들의 투쟁은 '파견법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고,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중소규모 기업에서 개인사업자화를 유력한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 정권과 자본 전체의 구조조정 공세를 피할 수 없다. 구조조정에 의한 희생을 거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제 대세가 되어버린 구조조정이라는 괴물과 맞서야 한다. 그러하기에 더 이상 자생적 투쟁만으로는 이 국면을 돌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직과 투쟁을 기획할 것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 실천이 맞물린 것이어야 한다. 전략업종과 전략지역을 설정하고, 이곳에 집중적인 조직화계획을 세워야 한다. 조직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사람이 들어가야 하고, 재정이 필요하다면 재정을 집중시켜야 한다. 단지 들어가서 조직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다. 그러려면 투쟁을 엄호하고, 그 파장을 끝까지 확장시키기 위한 기획도 필요하다. 비정규직 사안들을 정치적으로 쟁점화하고, 투쟁의 의미를 단사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국화하기 위한 계획도 동시에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기획은 '노동조합'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 투쟁을 기획하고, 투쟁의 승리를 위한 엄호를 조직하고, 문제의식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그 활동은 그 자체가 대단히 정치적이고 전국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기획을 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위있는 주체가 마련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민주노조운동 전체에서 비정규직운동에 대한 인식이 통일되지 못하고 있으며, 문제의식을 가진 동지들이 지역으로 또는 개인으로 투쟁을 조직해가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운동 전체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인식을 확대시키고, 조직활동가들을 재배치하며, 투쟁의 성과를 확대시키기 위한 노력을 함께 진행할 필요가 있다.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동지들이 함께 모여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4. 투쟁의 경험과 내용을 확장시키고, 사람을 남겨야 한다.
지금까지 100여 개가 넘는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건설되었고, 대부분 치열한 투쟁을 거쳤다. 하지만 그 투쟁의 경험들은 대단히 파편화되어 있다. 비정규직 동지들은 투쟁 자체가 매우 힘겹기 때문에 자신의 투쟁 의미를 일반화하고 이것을 지침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버거워한다. 그동안 비정규직 투쟁에 지원 연대해왔던 정치조직이나 노동·사회단체의 경우에도 아직은 파편적인 경험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투쟁 경험과 조직화의 경험, 그리고 지원의 경험은 모두 개인의 경험으로 국한되어 있어서 모두의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앞서 투쟁했던 동지들의 경험을 그대로 답습하고 깨져나간다. 투쟁 하나 하나가 비정규직 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투쟁이나 한 단위사업장의 투쟁으로 좁혀져 홀로 외롭게 싸우다가 깨지면 자본에게 유리한 투쟁사례들을 축적하게 된다.
이런 것을 어떻게 뛰어넘어야 하나? 그 동안의 투쟁 경험을 객관화하고, 그 속에서 교훈과 의미를 추려내서 모두의 것으로 공유하고, 파편적 경험들을 조각맞추기 해 완전하게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방향을 잡아나가고, 그것이 서로의 투쟁역량을 상승시킬 수 있도록 하자. 그것을 위한 전국적 조직이 필요하다.
또한 지금까지 투쟁해왔던 동지들이 흩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투쟁을 해왔는데, 지금은 그 투쟁의 경험을 안고 남아있는 동지들이 거의 없다. 정규직에서 힘있게 비정규직을 끌어안고 싸운 경우라 하더라도 일단 비정규직 동지들이 정규직이 되어버리면 그 사업장에서는 더 이상 비정규직 문제를 중요한 문제를 끌어안고 싸우기를 힘들어한다. 그 정도면 됐다는 수준에서 머물고 만다. 투쟁의 경험을 가진 동지들을 남기지 못하면 비정규직 투쟁은 항상 일회적인 투쟁이 되고, 개별 단위사업장이 대표선수로 나가서 싸우는 꼴밖에 되지 못한다. 투쟁의 의미를 계승하려면 비정규직 투쟁을 해왔던 동지들을 훈련하고, 해당사업장을 넘어서는 운동의 주체로 세워나가야 한다.
Ⅳ. 비정규철폐투쟁을 노동운동 전체의 과제로 만들어야 한다.
이미 비정규철폐투쟁은 노동운동 전체의 과제이다. 민주노총의 주요 사업에 비정규직 문제는 항상 들어있고,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노동운동을 논하지 못할 만큼 무성한 논의들이 되고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지원도 많이 하고 모금도 활발하고 사업계획들도 많이 나온다. 하지만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우리의 투쟁을 민주노총이 받아야 한다'고 절규하고, 여전히 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은 '앞으로 하겠지만 아직은 역량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여전히 많은 노동운동가들은 운동의 변방에 있는 '비정규직들'의 문제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 어느 때보다 논의는 무성하지만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실천적 모습은 빈약한 기형적 모습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시 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다. 비정규철폐투쟁을 노동운동 전체의 과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1. 비정규철폐투쟁은 조직률의 문제가 아니라 투쟁의 문제다.
민주노조운동진영의 조직률이 조금 늘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많이 늘어난 것이 한 원인이 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너무 많이 깨졌다. 즉 실질적인 성과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많은 동지들이 비정규직 투쟁과 조직화를 이야기할 때 '조직률'을 이야기한다. 노조의 조직률이 너무 낮아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없고, 덩치를 키워서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정규직 노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를 시도할 때 가장 먼저 출발하는 논리이다. 그런데 이 논리에 머무는 순간 우리는 비정규직 조직화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생존이 어렵기 때문에 기껏 조직해도 조직률에 큰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을 조직하고 함께 투쟁하면서 깨닫는 것은 조직률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이 일상적으로 노동자들을 어떻게 분할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자신의 내면에 깊숙하게 들어와서 자본과의 대립전선을 희석시켜서 투쟁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자본이 비정규직을 늘리는 것이 구조조정이고, 이에 대응해서 함께 투쟁하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노동자의 계급적 연대의식을 확인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노동조합이 초기에는 조직률적 관점을 갖고 비정규직들을 조직하다가 곧 구조조정 분쇄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있어야 이후에 비정규직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투쟁하게 된다.
조직률을 이야기하는 일부의 동지들은 '일단 조직화를 하고 나서 안정적인 힘을 갖게 된 후에 투쟁을 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 동지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조직을 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이 손만 대면 언제라도 쉽게 짤라버릴 수 있다.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가가 비정규직을 활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그냥 두고 보겠는가? 선조직 후투쟁론이 갖는 함정은 여기에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존재 조건 자체가 조직화를 방해한다는 것, 조직화는 필연적으로 투쟁과 동시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단지 고용형태가 아니라, 정치적 의도의 산물이기 때문에 조직률로 이야기될 수 없다.
비정규직 조직화는 정규직 울타리 안에 비정규직을 넣는 것이 아니다. 정규직 울타리라는 것이 자본이 비정규직을 배제하기 위해 만든 울타리이기 때문에, 자신의 울타리를 허물고 자본과의 대립전선을 치는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은 비정규직이라는 존재 조건 그 자체를 향한 선언이기에 투쟁의 결의 없이 이루어지는 조직화란 모두 허상이다.
생각해보자. 민주노총에서 비정규직 조직방식으로 규약변경을 이야기하지만 규약변경을 시도해도 무산되는 경우가 많고, 설령 통과되었다 하더라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들어오지 않는다. 정규직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규약변경이 악용되는 사례도 있다. 규약을 변경한다는 것은 조직을 한다는 형식이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를 내걸고 파업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전체의 결의가 기반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투쟁 의지와 결부된 조직화만이 실질적 조직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2.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넘어서자.
노동자는 '우리'이고, 자본은 '저놈들'이다. 우리와 저들 사이에는 경계가 분명하다. 자본은 이런 경계를 허물기 위해 노사협력주의를 유포하고, 경계의 선두에 서있는 자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 경계를 쉽게 허무는 방법은 바로 '우리들'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다. '우리들'이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연봉제나 성과급제 등 개인주의적 임금유연화요, '우리들' 사이에 위계를 정해서 자본과의 경계보다는 우리들 사이의 경계를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비정규직화이다.
갈등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대오 각성할 것을 촉구하는 수준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노동자 사이의 위계를 강화하는 자본의 일상적 전략, 차별화를 강제하는 전략을 어떻게 분쇄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본에 포섭된 채 비정규직 문제를 사고하는 경향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가장 심한 것이 비정규직을 고용안전판으로 사고하는 경향이다. 비정규직 우선해고 조항이나 비정규직 투쟁을 반대하는 모든 논리들은 결국 이것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주장하는 논리도 이것 못지 않다. 물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차별을 재생산하는 자본의 관리기제들을 파괴해야 한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들, 즉 명찰이나 작업복, 식권, 기숙사, 휴게실 등의 문제에서 확대된다. 이런 것에 문제제기하고 뒤집어엎는 것은, 자본의 관리전략의 실체를 깨닫게 하고 계급적 연대를 세우기 위한 기초작업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정규직을 우선 보호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비정규직은 일단 처우를 조금씩 개선하는 것으로 하자는 분할 논리는 결국 고용안전판 논리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비정규직 처우개선 논리와 일상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 현상적으로는 비슷할지라도 선전의 방향과 조직화의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낳게 된다.
일부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요구 조건을 낮춰야 정규직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규직의 불안심리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여전히 '위계의 경계선'을 그어두고, 사측과 싸울 때 옆에서 응원은 해주겠다는 논리이다. 바로 자본이 원하는 바 그대로이다. 이렇게 비정규직을 깨지게 내버려두면 곧 자기 차례가 올 것임을 알기에, 정규직들은 노동조합으로 뭉쳐지 않고, 개인적으로 살 길을 찾아서 살아남으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그 자체로 무력화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넘어서는 길은 '적대'의 대상을 명확하게 하고, '우리들'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노동자 전체를 향한 자본의 구조조정에 맞서 전체 투쟁으로 승리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확고하게 하자. 비정규직을 확산하고, 노동자들의 고용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노동자들을 분할하는 구조조정에 대한 타협 없는 투쟁이 그 출발이다. 오히려 이것이 정규직 노동자들의 동의를 확보하는 길이다.
3. 왜곡된 주고받기는 더 이상 안 된다.
96·97년 총파업 이후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고, 민주노총을 합법화하면서 내준 것이 무엇이었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그리고 탄력적 노동시간제 허용이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급격하게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노동기본권을 상실했다. 사소한 것은 내주고, 더 중요한 것을 얻겠다는 논리, 권리와 권리를 비교하고, 그래서 당장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얻는 대가로 몇백만 노동자들의 권리를 맞바꾸기 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런 맞바꾸기를 한 자들이 이제는 '노동시간 단축은 비정규직들에게 불리한 것이 아니'라고 또다시 이야기한다. 올해 2월에 복수노조 금지조항과 전임자임금지급금지조항이 맞바꾸기 되었을 때 침묵을 하고 있었던 자들은 또 무엇인가? 6월 말, 모성보호법이 개정되면서 출산휴가 90일과 여성의 야간·휴일·갱내 근로 등이 인정되었는데, 이것을 여전히 개선이라고 주장한 자들은 또 누구인가?
이러한 맞바꾸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로 우리의 요구를 다 따낼 수는 없기 때문에 뭔가를 주기는 줘야 한다는 것. 둘째로 권리들을 저울질해서 좀더 약한 것을 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본에게 인정해주는 것은 항상 일관되다. 바로 '유연화'이다. 그러나 '유연화'는 절대로 승인해줄 수 없는 요구이다. 비정규직들에게 불리하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전체 운동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이 전체의 투쟁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정규직에게 유리한 권리와 비정규직에게 유리한 권리들을 상정하고, 둘 중 비정규직이 희생해서 정규직들에게 유리한 것을 내준 것이 핵심이 아니다. 전체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도 좋다고 승인해주고, 그 대가로 몇 가지 개선조치들을 따내고 있다는 데에 핵심이 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화의 문제이다. 이것은 멈추지 않는 구조조정이다. 그러기에 비정규직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문제들은 전체 노동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권리와 권리를 맞바꾸기 하면서 제 무덤을 파는 행위를 지금 당장 멈춰라.
Ⅴ. 비정규 철폐투쟁의 과제
1. 비정규 철폐투쟁은 정규직을 향해있다.
비정규 철폐투쟁은 '비정규직들'의 투쟁이 아니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자신의 문제로 느끼지 않고, 외부에 지원·연대하는 수준으로 국한하고, 자본이 만들어준 기득권에 안주하려고 하는 노동자들의 인식을 깨는 투쟁이다.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과 현장투쟁으로 바쁘고 사람도 없어서 비정규직 조직사업은 나중에 하자고 이야기하는 바로 그 논리를 깨는 것이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을 때, 구조조정 투쟁으로 바쁘고 힘든데 전선을 이원화하면 어떻게 하냐며 많은 노동자들이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호통쳤던 것을 기억해 보라. 그 때 우리는 자본의 구조조정이 바로 사내하청의 확대와 기본권 말살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한라중공업(삼호조선소) 노동조합은 100%가 넘는 사내하청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도대체 현장투쟁과 구조조정 전선과 비정규직 투쟁이 분리될 수나 있는 것인가?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렇게 전선을 분리시켜놓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투쟁을 시작하면 '도와주고 싶지만 조합원들의 의식수준이 따라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그러니 요구 수준을 낮추라고 주문한다. 그러다가 어떨 수 없으면 몇 가지 도와주는 척하면서 비난을 면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비정규직들이 너무나 힘든 전술을 선택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이 처절하게 진행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놓고 요구가 과해서 그렇다는 둥, 전술이 과격했다는 둥 평가하면서 마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척한다.
말로 하는 비정규직 투쟁은 비정규철폐 투쟁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지원하는 수준에 안주하는 것도 비정규철폐투쟁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투쟁의 처연함과 구조적 한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논평을 일삼는 것은 더더욱 비정규철폐투쟁이 아니다. 그런 안일함 속에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 되고, 비정규직의 노동기본권은 무너지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은 깊어만 간다. '지금은 바쁘다'고 이야기하는 그 순간 자본은 너무나 바쁘게 비정규직을 확대해서 곧 우리 목에 칼을 들이민다. 그게 곧 자본의 현장통제이고 구조조정이다. 노동조합의 가장 중요하고 바쁜 업무이다.
하지만 아직 이러한 의식은 너무 희미하다. 만약 노동운동의 계급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노동자의 생존과 신자유주의 반대 등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현실의 문제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접근하고 투쟁하고자 한다면 이제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야 한다. 문제제기를 던지고 조직하고 함께 논의하고, 주체를 세워가자. 이것은 매우 공세적인 과정이어야 한다.
2. 계급적 입장을 확고하게 하면서 현실의 과제를 풀어나가자.
계급적 입장을 확고히 한다는 것은 연대의 원칙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는 그 어떤 시도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정규직 문제를 비정규직들의 문제로 좁혀서 비정규철폐투쟁을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로 규정하는 경향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주장하면서 비정규직이 전면화되는 현 상태에 눈을 감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반드시 정규직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독자적으로 조직될 수밖에 없어서 힘겹게 투쟁했던 동지들의 투쟁을 폄하하는 태도에 반대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는 제도개선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합의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을 무모한 투쟁이라고 비판하는 태도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대가 우리의 현재 한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비정규직 철폐투쟁에서 해결해야할 무수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조조정의 여러 양태들 속에서 나타나는 비정규직화의 양상에 대한 구체적 이해, 조직화 방안에서 초기업단위 노조 조직화가 갖는 의미와 한계들을 구체화하면서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의 유력한 가능성을 만드는 것, 노동기본권 쟁취의 구체적 전술과 기획을 마련하는 것, 정규직 노동자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는 의미있는 안을 마련하는 것, 비정규노동조합의 생존을 위한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는 것, 비정규노조운동을 일반화하기 위한 기획을 마련하는 것 등 우리 앞에 놓인 구체적 과제들은 매우 많다. 이런 과제는 투쟁의 경험을 공유하고, 일반화할 수 있을 때 더욱 현실에 근접하게 해결될 것이다. 때로 우리는 원칙과 현실을 분리시켜서 이런 과제들을 아주 편의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유혹을 떨치고 계급적 입장의 기반 위에서 우리 앞의 구체 과제들을 풀어나갈 때 비정규철폐투쟁은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
3. 투쟁의 성과를 축적할 수 있는 주체를 확보하고, 조직을 만들어가자.
지금까지 비정규투쟁의 한계를 넘어 구조조정 분쇄투쟁과의 연관성을 확보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 투쟁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제도개선의 틀에 가두려는 그 어떤 사회적 합의주의 논의도 분쇄하고,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올바른 방향성을 정립하며, 비정규직 투쟁 주체들과 그에 대한 지원단위로 국한되어 있는 현재의 조직상황을 타파하면서 조직주체를 확대하기 위해, 비정규 철폐투쟁을 자신의 과제와 임무로 하는 동지들을 조직하자.
비정규운동의 새로운 질을 창출할 동지들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비정규직 투쟁을 자신의 과제로 하는 동지들이다. 비정규직들의 선도적 투쟁 과정에서 헌신적으로 비정규 투쟁을 지원하고, 비정규직을 조직했으며, 그 투쟁을 벌여왔으며, 이제 그 투쟁을 노동운동의 중요한 문제로 승인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동지들이 광범위하게 축적되어 있다. 그 동지들이 정규직 현장이건, 비정규직 투쟁광장이건, 단체이건 정치조직이건, 민주노총 등 상급단체에 있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전체 운동의 과제로 만들고, 자신이 속해있는 공간에서 이 투쟁을 실현하고, 그 투쟁의 성과들을 공유해서 모두의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일반화된 내용에 기초해서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전국적인 기획에 힘을 쏟아갈 모든 동지들이 '함께' 모이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