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인의 자랑 판윤공 김수문의 역사이야기
논산시민 여러분 안녕하세요!
노성 장선인으로 을묘왜변(乙卯倭變) 당시 큰 공을 세우신 자랑스러운 인물이 있어 여기 소개 드리려 합니다.
[판윤공(判尹公) 양촌(陽村) 김수문(金秀文)]
제주목사 시절에 왜군을 크게 두 차례나 격파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시고, 그 공으로 4차례나 한성판윤(漢城判尹:正二品:현 서울시장:서울 600사: 어느 책에는 세차례로 표기하고 있음) 평안병사(平安兵使)로 가셔서 오랑캐의 침범을 격퇴시키는 훈공을 세우셨습니다.<明宗實錄><魯城邑誌>
제주시에 망경루(望京樓)도 당시 목사로 계시면서 성 밖의 적의 동태를 살피는 망루로 사용하였으나 한일합방이 이루어져 3년이 지난 1913년 가을에 일제가 헐어버렸고,
제주목관아지의 가장 중추적이고 특징적인 망경루 2층 누각 건물이 2007년 2월 4일(立春)에 다시 국가에서 복원 준공 되었습니다.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제수(除授)되시어 경상전라의 군사를 관장하시면서 왜적의 잦은 침범을 막기 위하여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군대 조직법을 만들어 미리 왜적의 침범에 대비하였으며, 明宗 辛亥年에는 염근인(廉謹人:청백리)으로 뽑히셨습니다.<명종실록>
[새로쓰는 제주사] (작가 이영권:제주사학자)에는 김수문 목사의 전공을 자세히 저술하고 있습니다
명재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 징비록(懲毖錄 [국보132호]) 24~26쪽에도 [김수문]판윤공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은 [징비록:국보132호]의 기록을 싣고
다음에 [새로쓰는 재주사]에 기록된 내용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발췌해서 실을가 합니다.
김수문(金秀文)
지난번 을묘년(乙卯年)의 왜변(倭變)14) 후에 김수문(金秀文)15) 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분군법(分軍法: 軍隊組織)을 개정(改正)하여 도내의 여러 고을을 쪼개어, 순변사(巡邊使)16) · 방어사(防禦使)17) · 조방장(助防將)18) · 도원수(都元帥)15) 와 본도(本道)의 병사(兵使: 兵馬節度使의 준말)에게
나누어 소속시켰는데, 명칭을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 했습니다.
여러 도(道)에서 모두 이를 본받았는데 이에 진관(鎭管)의 명칭은 비록 있으나 실상은 서로가 연결이 잘 되지 않았음으로, 한번 경보가 있으면 반드시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이 한꺼번에 움직이게 되고, 장수 없는 군사들은 먼저 들 가운데 모여, 천리 밖에서 장수 오기를 기다리다가 장수는 제 때에 오지 않고, 적군의 선봉(先鋒)이 이미 닥친다면 군사의 마음이 놀라고 두려워 할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패전하는 법입니다. 많은 군졸이 한번 무너지면 다시는 수합(收合)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이 때에는
장수가 비록 오더라도 누구와 함께 싸움을 하겠습니까?
다시 조종(祖宗)의 진관의 제도를 수복(修復)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 제도는] 평상시에는 훈련하기에 편리하고 사변이 있을 때는 병사를 징발, 집합할 수가 있을 것이며, 또 전후가 서로 의지하여 갑자기 무너져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지경[土崩瓦解]19) 이 되지 않을 것이니, 일을 처리하는데 좋을 것입니다.“
이 일을 본도[慶尙道]로 내려 보냈더니 경상 감사 김수(金睟)는 “[制勝方略]은 시행해 온지가 벌써 오래 되었으니 갑자기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여, 이 의론은 마침내 중지되고 말았다.
14) 을묘년(乙卯年)의 왜변(倭變:乙卯變):
명종(明宗) 10년(乙卯年, 1555)에 전라도(全羅道)에 왜병(倭兵)이 침구(侵寇)하여 영암(靈巖)의 달양성(達梁城), 어란포(於蘭浦), 진도(珍島)의 금갑(金甲)·남도(南桃)의 이보(二堡)가 분탕(焚蕩)을 당하고, 병사(兵使) 원적(元績)이 피살(被殺)된 사변(事變)을 이른다.
15) 김수문(金秀文):
?~선조(宣祖) 원년(元年:1568). 무신(武臣). 자(字)는 성장(成章), 본관(本貫)은 고령(高靈)이다.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及第), 명종(明宗) 10년 을묘왜변(乙卯倭變) 당시 제주목사(濟州牧使)로서 왜구(倭寇)를 맞아 쳐서, 크게 무찔렀다.
그 전공(戰功)으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승진(陞進)되고 14년(1559)에 평안병사(平安兵使)가 되어 여러번 호인(胡人)의 침범(侵犯)을 격퇴(擊退)시키는 훈공(勳功)을 세웠다. <명종실록(明宗實錄)>, <노성읍지(魯城邑誌)>
[징비록 원문]
**** 往在乙卯變14) 後 金秀文15) 在全羅道 始改分軍法 割道內諸邑 散屬於巡邊使16)
防禦使17) 助防將18) 都元帥及本道兵水使 名曰制勝方略 諸道皆效之 於是鎭管之名雖存 而其實不相維繫 一有警急 則必將遠近俱動 使無將之軍 先聚於原野之中 以待將帥於千里之外 將不時至 而賊鋒已逼 則軍心驚懼 此必潰之道也 大衆一潰難可複合 此時將帥雖至 誰與爲戰 不如更修祖宗鎭管之制 平時易於訓鍊 有事得以調集 且使前後相應 內外相倚 不至於土崩瓦解19) 於事爲更 事下本道 慶尙監司金睟 以爲制勝方略 行用已久 不可猝變 議遂寢
징비록 표지
징비록 24쪽 김수문 주서
징비록 25쪽 김수문 [제승방략]
징비록 26쪽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