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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형 습관의 유익
글 김덕호
청소년 시절의 습관은 평생 영향을 끼친다.
어린 초등학생 시절의 작은 습관조차도 그렇다. 그것이 자발적이든 강요이든 간에 그렇다.
나쁜 습관 보다는 좋은 습관이 길들여지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초등시절부터 아침 일찍 기상하는 습관이 생겼던 것 같다.
제일 큰 이유는 조부와 같이 생활하였기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해야한다. 아침 일찍 깨는 새가 모이를 더 많이 쪼아 먹는다.”라고
성경 말씀과 격언을 인용하시면서 귀에 따댕이가 앉도록 말씀하시곤 했다.
늘 새벽 곤히 잠들어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셨다.
그러다 보니 아침 식사는 조부를 따라 일찍 먹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한문 공부도 정해진 분량이 있었다.
초등학교 2년까지는 영주시내에서 부모와 같이 살았다.
아버지는 온화하셔서 야단을 그리 치신 기억은 없다.
평소 과목하신 어머니도 기상 시간에 대해 간섭이 없으셨다.
“부자지간(父子之間)”은 식사를 마주보고 못하지만 “조손지간(祖孫之間)”은 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유가의 가르침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성경말씀을 토대로 가정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대신 저녁잠이 많았기 때문에 주로 아침 일찍 깨끗한 마음에 맑은 정신으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하나하나 가르침을 받았다.
초등 3년부터 6년까지 천자문, 개몽편, 명심보감, 고문진보, 사략, 격몽요결 등을 마스터했다.
조부께서 바쁘시거나하면 저녁에 조부가 운영하시는 일신 서당학생들과 공부하면서 보충해야했다.
서당학생들은 중․고생도 있었지만 대개는 청장년들이었다. 학교에 진학을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향학 열기는 대단했다. 거의 조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50대의 조부의 목소리도 한몫을 했다.
가르치시는 방법도 머리에 쏙쏙 들어가도록 막대기를 두드리면서 집중을 하도록 하셨다.
잠이 부족할 때 눈을 한참 비비면서 행동이 느리게 되면 찬물로 세수하고 오라고 채근하셨다.
어떤 때는 강요당하는 터라 조부가 싫기도 하고 미웠다. “호랑이” 같았다.
뜻에 안 맞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회초리가 기다린다.
그러나 한 가지 즐겁고 기대되는 시간이 있어서 참았다.
책 한권을 다 마스터하면 “책걸이” 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배운 학생들이 각자 조금씩 정성을 모아
스승에게 감사드리고 함께 공부하는 동안 느꼈던 체험담과 덕담을 나누면서 잔치를 하는 것인데
어린 나로서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좋고 형들에게 귀여움 받아 좋았다.
잔치하는 동안은 힘들었던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장은 나빴어도 식욕은 좋아서 실컷 먹고는 배탈이 났다.
그래도 이런 희망이 엄격한 글공부를 이기는데 한 몫을 했는지도 모른다.
용돈도 “육하원칙”에 의해 받았다. 타인들에게는 관대하고 주머니를 열어 많이 주시면서 가족들에게는 매우 인색하셨다.
겨울이 제일 싫었다. 춥기는 하고 고기와 집이라 모든 것이 불편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잡동사니 땔감들을 모았다. 청소도 되고 그것으로 소죽도 끓이고
소죽 끓이는 솥뚜껑을 뒤집어 물도 데우는 말하자면 절약 정신과 1인 3역의 경제 철학을 터득한건 지금 생각하면 유익했다.
찬물에 씻고 오라는 야단에도 살짝 소죽 끊이고 있는 아재 또는 형(일꾼, 당시는 머슴이라는 말보다 이 말을 많이 썼다.)에게
가서 데워진 물 한바가지를 몰래 주면 안뜰로 가서 찬물과 섞어서 세수하고 가기도 했다.
당시는 전기 가설이 안됐기 때문에 호롱불이나 촛불을 이용해 공부해야했다.
촛불은 그나마 사용이 적었다.
절약을 위해서 학생들 수업이 없을 때는 조부님과 같이 달밤을 이용하여 공부하기도 하고 반딧불이를 모아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희미한 빛에 눈을 가까이 하다 보니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로도 저녁 시간 보다는 아침시간을 이용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6학년이 될 때는 20m 앞의 사람이 선명하지 않았고 흑판의 글씨는 흐리게 보였다.
눈이 아팠다. 자주 충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조부님께는 숨겼다. 안경은 쓰기 싫어서다.
안경 쓰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안경 쓴 사람 보면 왠지 바보스러워 보였다.
나중에 확인한 일이지만 이때 이미 근시가 시작되고 있었다.
조부님과 같이 있던 소년시절은 나에게 아침 시간만큼은
철저히 강훈련받은 선수처럼 강요된 스파르타식 아침 훈련이었다.
때로는 곤히 잠들고 싶은 나를 깨워 새벽 기도회에 데려가시기도 하셨지만
계속 졸고 있을 뿐이었다. 졸다가 교회 마루바닥에 뒤로 자빠지기도 해 교인들이 웃는 분위기에 멋적어 한적도 여러번 있었다.
“김장로님이 손자를 잡는구먼.”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고집은 누가 말리랴.
잠 많고 자유로운 시절 아침 조기 기상 습관이 중․고등 시절을 아침형으로 보내게 하였다.
대신 저녁잠이 많았다.
하기야 시골이라 학원도 과외도 없었기 때문에 저녁에는 조부가 진료가 늦게 끝나시면
서당 강의와 기도시간 이유로 비교적 자유로웠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시내 학교까지 12Km정도 떨어져 있어 버스, 자전거, 기차 또는 도보로 번갈아가며 통학을 했다.
그러자니 자연 아침 일찍 일어나야하고 아침형 습관이 되어 있어 적응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통학 중에는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차나 버스는 복잡하기도 하고 친구, 선후배끼리 장난치거나 얘기하기에 바빠
혼자 조용히 글 볼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포장이 아니고 울퉁불퉁 자갈길이라 자전거 통학은 더더욱 긴장해야했다.
도보는 거리 관계로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등교는 물론 하교도 힘들어
아침저녁 예습 복습은 아예 못하고 수업 시간에도 졸기 일쑤였다. 그러나 체력은 좋아졌다.
근육은 단단해졌고 소화기는 튼튼해졌다.
어릴 때는 장이 나빠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겼다는 어머니 얘기는 옛날 얘기가 되고 있었다.
특히 고 2학년 때부터 은혜 받은 후로는 먹고 나면 배고프고 소화, 변 상태가 아주 좋았다.
은혜받을 때 성령의 불이 장을 더욱 튼튼하게 한 모양이다.
다리근육은 굵어지고 단단해서 10년 후 경희의료원 인턴시절 20층을 하루에도
여러 번 걸어서 오르내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기초 체력이 길러진 셈이다.
이렇게 힘든 상황을 조부께 설명 드려도 시내에서 하숙이나 자취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머니를 통해 설득 드려도 꿈쩍도 않으셨다. 은혜 받고 나서도 고2, 고3학년도 통학해야 했다.
의학계열 진학을 위해서는 단 1초도 소중한데 참 야속했다.
“도대체 자식이 좋은 학교 좋은 학과에 진학하는데 관심이 없으신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할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QT를 갖고 영어 단어를 종이쪽지에 빽빽이 적어서 자전거 타고 가다
한쪽 손으로 핸들을 한쪽 손으로는 쪽지를 들고 다녔다.
“고의로 사고를 내서 입원하면 관심을 끌 것이고, 그러면 내청을 들어 주지 않을까?” 도 생각했다.
재래식 화장실이라 하더라도 평소 같으면 빨리 나왔지만 단어 몇 개라도 외우다 보면 지연되었으나 냄새는 아랑 곳 없었다.
기차 통학 보다는 혼자서 다니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버스 안에서 글을 보면 멀미가 생겨서 오전 수업에 지장이 생길까봐 고 2, 3년에는 이용 안했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강릉 고모(이미 고모는 고인 되심)댁에 초대받아서 갔다가 해변가에서
조개 종류와 복숭아 상한 것을 먹고 토사로 고통을 받은 뒤부터 집까지 돌아오는데 차타는 거리가 멀어
차멀미까지 겹쳐 힘들었던 적이 있어 더욱 그러했다. 그 후로 자기암시에 걸려 차속에서는 글을 볼 수가 없었다.
12월 예비고사가 걸림돌이었다. 여기를 합격해야 본고사를 칠 자격이 주어진다.
당시 고3 교사들로부터 들리는 소문은 인문반 5명 정도, 자연반 5명 정도 합격 예상을 했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서류, 기타 준비 위해 2주간은 시내 친구 자취방에 같이 있기로 조부님께 청했다.
겨우 허락이 떨어졌다. 2주간을 몇 달처럼 최대한 활용했다. 영주 제일교회가 옆이라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새벽 기도에 참석하고 통학 시간만큼 자투리 시간을 활용했다.
예비고사 당일도 새벽 기도에 나가 하나님께 앞일을 다 맡겼다.
“새벽에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그 동안 체험해 왔기 때문이다.
다 맡기고 나니 평안이 찾아왔다.
은혜 받기 전 시절도 하나님은 내가 모르는 가운데도 성숙시키기 위해 여러 과정을 허락해 주셔서 잘 이겼다.
거듭난 후 2년간은 6년간과 맞먹는 노력을 다한 것 같았다.
2년간 신실하신 하나님이 되어주셨고 나 또한 서원한 약속을 어떠한 처지에 있다하더라도
지켜드렸고 앞으로도 그러겠다는 벨엘의 서원 내용을 고백했다.
시골학교 특히 내가 다니던 학교는 당시로는 “따라지”라고 할 정도로 공부
분위기는 아예 아니었다.
어쩌면 혼자 통학하길 잘 했는지도 모른다. 시내에 자취하면 어울리게 되고 나쁜 길로 갈 수도 더 게으를 수도 있었기에 그러하다.
예비고사 문제지를 받고 잠시 묵상기도한 후 각 과목을 자신있게 치루었다.
합격이었다. 겨우 5명이 합격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뒤 돌아볼 겨를 없이 본고사 준비에 들어갔다.
1971년 1월 전기, 2월 후기 시험이 있었다. 예비고사 후에도 시내에서 공부하도록 허락받고 새벽을 적극 활용했다.
단, 주일은 성곡 교회에 가서 학생부 회장직으로서 주일학교 보조 교사로서, 성가대 보조로서 봉사했다.
그리고 회지발간 마무리 작업을 12월 30일까지 마무리 했다.
고향 교회서 학생시절 신앙생활에서 새벽의 중요성을 체험했고 자연 환경 속에서 전원생활이
오히려 내게 큰 꿈과 비전을 주었고 건강을 주었고 아울러 세계 소외된 자들을 향해 나누고 섬길 수 있는
마인드를 길러 주었고 어떤 위기나 좌절, 고난 속에서도 이겨나갈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손이 있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본고사는 전기에 서울대 의대와 후기에 경희대 한의대를 선택하기로 했다.
내 일생 의료를 통해 복지 활동과 봉사하고 싶어서다.
본고사 2주일 전 자연반 5명 친구들은 홍능 부근에 하숙방을 정해 놓고 준비에 들어갔다.
5명 중 3명이 크리스챤이어서 청량리 동도교회에 새벽 기도 참석을 유도했다.
내말을 따라 주었다. 전기는 그냥 경험삼아 붙어도 좋고 떨어져도 좋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역시 수학과목이 문제였다. 영어 생물은 그런 대로 쳤고 국어는 약간 어려웠다.
새벽 하나님께 더욱 매달렸다.
후기 경희 한의대는 여러모로 내게 조건이 맞아서 세심하게 분석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새벽 기도를 길게 하다가 아침 거를 때가 종종 있었다. 나중 목사가 된 손경호가 신앙이 돈독하여 이런 분위기를 끌어 나갔다.
가끔씩은 농담도 하고 장난도 해서 비효율적인 시간도 있었지만 같이 서로 위로하고 도와주고해서 잠깐의 서울 생활이 유익했다.
후기 대학 시험은 눈이 많이 왔어도 강행되었다. 새벽 기도에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내가 공부한 내용 중에서 나오게 해 주세요.”
국어는 내가 약한 현대문 중심으로, 영어는 고대 영문학 작품과 수학은 미적분, 생물은 유전법칙 중심으로 집중 공부했다.
국어는 의외로 내가 자신있는 사자성어 중 한문과 고대문이 많이 출제되었고 영어는 회랍신화와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나왔다.
생물은 고 3 여름 서울 종로 상아탑학원에서 특강을 들은 책에서 다수 나왔다. 하나님께 맡겼더니 선하게 인도해주셨다.
합격이었다. 학교와 동네에서 축하받기에 바빴다.
친구들은 모두 재수하기로 해서 나만 홀로 대학 뺏지를 달았다.
대학생이 되어서 1학년 때는 우선 답십리 외삼촌과 자취하기로 해서 새벽기도는 가까운 교회에 출석하고
주일은 고향교회 건축현장을 가지 않으면 대예배는 대형 교회를 순회하기로 했다.
영락, 충현, 광림, 왕십리, 순복음교회 등을 번갈아 가면서 설교를 들었다.
1년간은 시골 교회에서 못 듣던 유익한 말씀들을 듣고 싶어서였다.
노트에 요점을 기록해 가면서 한 말씀도 빼놓지 않고 적고 다시 묵상했다.
예과 1학년 후반에 이사하여 개척교회인 석관중앙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
그 때 대학생 성경 읽기(UBF)에 창세기 공부에 초대되어 대형교회 순회를 끝냈다. 말씀의 깊이가 있었다.
말씀공부와 소감발표 준비에 열심이었고 친구들을 많이 인도했다.
3개월 지나 목요목자로 세워졌다. 의·약학 계열 주축 요일이었다.
목요일 공부 참석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분위기가 좋아 본부에서도 그 소문이 들어가 격려도 받고 인정도 받았다.
전국 UBF회원 대회가 불광동 소재 연수원을 빌려서 12월 24일 저녁에 개최되었다.
2∼3천명은 모인다고 했다. 전체 석상에서 목요회의 성장에 대한 간증 겸 소감발표를 요청받았다.
각 대학별로 합창대회도 있어서 1개월 이상 준비도 해야 했다.
훈련받는 동안 유익한 점은 이러했다.
특히 인도하는 열정과 소감문을 직접 씀으로 생기는 깊은 통찰력이었다.
일기문 쓰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일용할 양식 말씀에 비추어 성찰했다.
말씀메시지를 듣고 반드시 그것에 대해 받은 은혜와 느낌을 나누고 토론까지 했다. 그러자면 메시지 준비를 철저히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은혜 받은 말씀 중에서 추려서 “새벽부터 일하시는 주님” 이란 제목으로 소감문을 발표했다.
삶이란 “살림”의 준말로 생명을 살린다는 내용을 주제로 삼았다. 새벽 같은 삶, 새벽에 역사하는 삶, 새벽부터 시작하는 삶,
이 삶이야말로 자기를 살리고 남을 살린다는 논조로 썼다.
세상의 역사는 밤에 일어난다고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새벽에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내가 만난 주님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새벽을 통해 철저히 준비하신 나의 구세주다.
잠 많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새벽을 주시기 위해 조부의 교육방법을 비롯하여 환경을 만들어 주셨다.
이런 은혜로 경희대 한의대에 들어왔고 현재도 앞으로도 새벽을 깨워
목요회를 살리고 UBF를 살리고 경희대를 살리고 한의학을 살리고 대한민국을 살리는데
잠시 새벽이슬처럼 왔다가 가더라도 한 방울의 이슬이 식물하나의 생명을 살리는데
보탬이 된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갈 것이라고 마무리를 했다.
10분정도의 짧은 발표였지만 아멘과 박수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시골출신 대학생의 진솔한 신앙 간중 얘기에 이토록 공감하는 분위기에
우쭐대기보다는 뱉은 말에 대한 향후 책임을 더 느끼고 있었다.
대회를 마치고 나서 많은 인사를 받으면서 후배2명과 같이 경희대 부근 자취방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말씀에 은혜를 받고 전세금을 헌금으로 바치다보니 후배 2명과 함께 월세로 있었다.
학교가 기숙가사 없어서 지방학생에게는 전세금이 대단히 중요한 밑천인데 말씀을 듣고 하루정도 망설이다가
“예 따! 모르겠다. 하나님이 내일을 책임져 주시겠지?” 하고 눈 딱 감고 전세 뺀 돈 전부를 바쳐버렸던 것이다.
마음통하는 후배 2명과 같이 아르바이트나 과외수업으로 월세를 충당하기로 했다.
당시 통금은 있었지만 성탄절 전야였기 때문에 순찰이 별로 없었고
혹시라도 시비하다 유치장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 주로 샛길과 골목길을 이용하여 부지런히 걷고 뛰었다.
날은 차고 먼 거리라서 서울 길 잘 아는 후배가 길을 인도했다.
불광동에서 서대문, 종로, 동대문, 청량리를 거쳐 회기동까지 가는 장거리였다.
새벽 4까지는 조마조마했고, 통금해제 되고 나서는 졸음과 피로가 엄습해왔지만
극기훈련 한다 치고 하나님의 강한 군사가 된다는 기분으로 서로 격려하면서 여유 있게 걸어서 아침 8시쯤 도착했다.
이토록 열정적이었지만 갈등이 생겼다.
UBF가 순수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성도교제도 좋긴하지만 새벽기도회가 없었고
전통교회와 교류가 없고 특히 UBF경희문은 목자가 전통교회를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갈등이 생긴지 6개월 뒤에 종고종 6촌 형인 이재수집사를 우연히 만나 형이 인도하는 교회에 갔다.
개척교회를 막 벗어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건물이 아니었고 경희대와 가깝고 휘경전철역 부근이었다.
목사님 말씀보다는 새벽기도회가 좋았다.
본과로 올라가면 죽자사자 공부해야 하고 지난날처럼 새벽을 깨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과 1년은 교양과목 위주이고 한의학개론, 한문시간이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예과 2년은 한의학 관련과목이 반이 되고 본과 1년으로 올라가면 각종 시험이 매일 있다고 하니
거기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뜨겁게 기도하시는 형의 인도로 간 성문교회에 등록하고 안정된 서울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UBF 후배들과도 더 이상 함께 생활할 수가 없었고 당장 방을 구해야 했다.
집에다 다시 돈 보내라고 얘기 드릴수도 없고 해서 기도하다가 형에게 부탁했다.
정수장학금과 경주김씨 종친 장학금으로 등록금과 용돈으로 쓰고 아르바이트로 전세금을 모을 때까지 잠시 같이 있게 되었다.
대학생활 내내 중요한 시험과 행사가 있을 때일수록 불안을 떨쳐버리고
입 딱 다물고 성수주일과 새벽기도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이방 나라에서도 뜻을 정하여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닮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새벽기도의 유익과 기적을 마음껏 체험했다.
본과 1년 봄 어느 날 부흥회를 마치는 마지막 새벽에 고1때 체험했던 방언․통역․예언․신유 은사가 강하게 임했다.
교회가 떠나가도록 방언과 통역의 기도가 계속되었다.
부흥강사와 이도형 담임목사님 식사하는 사택에 까지 부르짖는 기도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기도를 듣던 강사목사님이 “저 청년은 누구냐?”
담임 목사님은 “우리교회 청년대학부 회장으로 경희대 한의과에 다니고 장래가.....새벽기도에 열심이고
성성주일하며 봉사 많이 하는 젊은이”라고 답하자
“ 저 기도 내용 속에 강력한 신유의 능력이 나가는 것이 보이니 잘 지켜보시고 키우세요.” 라고 나중에 담임 목사님이 들려주었다.
국가고시와 학년말 고사를 앞두고 준비기도는 가장 처절했다.
연말연시여서 기독학생회의 성탄절 합창대회와 성문교회의 신년 음악회 준비도 같이 해야했다.
공부하다가 1시간씩 연습에 참여했다.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
큰 시험들을 앞두고도 여유 있게 두 군데 합창연습을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과 내가 맡은 책임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킬 수 있도록 능력과 지혜를 주십시오.” 라고 고백했다.
두 합창대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난 수석졸업과 국가고시 수석합격을 검어 쥐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두 이루게 하셨다. 인턴 시험도 무사히 통과했다.
국가고시 수석합격은 경희대 입구 현수막으로 붙어있어
졸지에 경희의료원과 경희대 등용문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은 내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다들 갸우뚱해 했다.
“교회 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공부는 언제 하느냐?” 하기도 하고,
“주말을 교회에서 보내고 여러 서클 활동과 봉사활동을 하다보면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머리가 너무 좋은 거 아냐?” 라고
하지만 난 머리가 그리 좋지는 못했다. 노력형이고 성실형이었던 것 같다.
인턴과정에서 교수들이 서로 자기 과에 들어오라고 직간접적으로 청이 들어왔다.
그 중에서 내과 (간계내과)를 선택했다.
당시 간계내과 주임 교수이자 한의대학장이시고 병원장이셨던 김정제 교수님이
새문안교회 장로이고 종친 경주 김 5대조이고 내가 대학 3년 때 “기독학생으로서 한의학을 전공하는데
사고적 갈등과 현실적 장애를 어떻게 뛰어 넘을 수 있습니까?” 하고 서신을 통해 의견 교환 한 적도 있고 해서다.
새벽마다 기도한 끝에 김정제 교수 밑에 들어가기로 했다.
노교수였지만 열정적이어서 더욱 좋았다.
한의학계 원로서 대학에서나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분이였고 더욱이 항상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는 애기를 들었다.
실제로 같이 근무하면서 신앙적 자세를 본받았다.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 옆방에서 조교 역할할 때 출근하면 반드시 잠깐이라도 기도로 일과를 시작하고
병실을 라운딩 하다가 기도가 필요한 환자에게는 조용히 손잡고 기도해주는 모습을 보았다.
근무시작이 8시 30분인데도 그분은 특별한 아침행사가 없으면 8시 이전에 출근했다.
아침형이라는 면에서 같았다. 병원경영이나 환자관리에 대해 배울 기회가 아침 일찍부터 있어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인턴 전반기는 거의 병원 내에서 생활해야 했고 후반기에 가서야
3일마다 외출이 가능했다. 레지던트 때는 격일로 숙직을 해야 했다.
중환자가 많으면 아예 자리를 뜰 수가 없고 응급실에서 콜이 있으면 즉시 달려가야 했다.
밤을 꼴딱 새는 경우도 있고 밤늦게까지 중환을 관리하다보면 스테이션에 엎드려 잠드는 경우도 있었다.
숙직실이 있어도 편히 들어가 잘 틈이 없었다.
어떤 경우는 징크스가 있어서인지 새벽마다 노티(환자 상태를 알리는 행위)를 받을 때도 있었다.
아무튼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새벽을 깨우는 습관으로
나의 인생 중반기는 시간을 아끼면서 힘차게 보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비록 자발적 신앙습관이 아닌 가정교육의 일환으로 강요된 것이었지만
성장하면서 은혜체험 후 신앙적 습관으로 되어왔다.
아침형 습관이 수많은 숙제와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새벽을 깨워 교회 개척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경과 위기 때마다 여명의 희망을 안고 뛰어 넘어오게 된 것은
분명 새벽을 천금보다 귀하게 활용하신 예수님을 닮고 따르고자 했던 내게 큰 은혜요 축복이었던 것 같다.
첫댓글 청소년기에 습관화된 아침형 습관은 나이들수록 더욱 빛을 발하시군요. 저도 신년들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거듭나기"위해 새벽을 깨우고 있습니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위해서요. 좋은 신앙간증 잘 읽고갑니다.
좋은 신앙간증 잘보고 갑니다..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