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통해서 대통령의 담화를 듣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대통령은 멀리 서울에 계시고 그 얼굴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말씀이라
하지 라디오의 말씀이라고는 하지 아니합니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죠.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편지 할 일이 있을 때는 남의 손을 빌어 대필을 합니다. 그래도 받는 사람은 그 편지를 누가 썻든 상관없이 보낸 사람의 글로 받습니다.
성경은 근 40명의 인간 저자의 손을 통해 씌여졌지만 세상의 다른 책들처럼 집필자들의 사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필한 것입니다. (딤후3:16).
물론 편지 대필자처럼 기계적으로 받아 쓴 것이 아니고 필자의 개성이 반영된 '유기적 영감'이었음을 좀 자세히 설명해야겠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위에서 예를 든 대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통령의 말씀이 라디오의 말씀이 아니고, 남의 손을 빌어 쓴 편지가 대필자의 말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쓴 창세기가 모세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필한(유기적으로) 마태복음이 마태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는 논리적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66권은 어느 시대 어느 것에서 누가 썼든 간에 그를 감동시킨 것은 하나님의 영(성령0이시므로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성경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로로 우리 손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우리(프로테스탄트)가 성경이라고 부르는 책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합 66권입니다.
장수로 말하면 구약 929장, 신약 260장, 합 1189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B.C. 1500∼ A.D. 100년까지 약 1600년 동안 구약 28명, 신약 8명, 계 36명의 저자들에 의해 지중해를 중심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각 지역에서 씌여졌습니다.
구약은 B.C. 1400∼397년경에 씌여졌는데 극히 적은 부분이 아람어로(시리아어) 씌여졌을뿐 거의 다 히브리어(이스라엘)로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되어 단편으로 전해 오다가 B.C. 450년경 에스라 시대에 집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B.C. 200년경에야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구약의 정경이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은 A.D. 50∼96년경에 헬라어(그리스어)로 씌어져 단편적으로 전해 오다가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후 유대 사학자 유세비우스에게 신약 정경 목록을 작성하도록 명했고, 이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확정했습니다.
그후 신구약 원본들은 다 없어지고 지금은 많은 종류의 사본들만이 전하는데, 이 사본들로부터 각국어의 번역본이 나오게 됐습니다. 최초의 구약 번역본은 70인의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이른바 '70인역'입니다.
A.D. 386년에는 제롬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부터 신구약을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이것을 '벌겥역'(Vulgte)이라 하여 로마 카톨릭의 표준성경이 되었습니다. 그후 1382년에 영국의 위클리프가 벌겥판으로부터 영어 번역판을 내놓았고, 황실역인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이 1611년에 나왔으며,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루터는 독일어판 성경을 펴냈습니다. 그후로 성경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지금은 약 1700 언어로 출판되고 있습니다.
한글판 성경은 1832년에 화란 선교사 구츨라프가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 성경의 일부분이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것이고, 그후 1882년 로스 목사에 의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번역·출판되었으며, 1887년에 신약을 완성·출판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셩교전서'입니다.
그러나 로스 목사의 '예수셩교전서'가 한문성경으로부터 번역한 것이고, 이에 협조한 한국 사람들이 다 관서지방 출신인지라 심한 사투리가 많아 널리 쓰이지 않다가 1900년에 대한성서공회가 창립되고 그 해 4월에 신약전서가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10년에 구약을 출판했으며 1935년에 개역성경이 출판되어 오늘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이는 다 영역에서 중역한 것들이며 그후에 '새번역', '공동번역' 등 원어로부터 직접 번역한 성경들도 출판되었습니다.
3.신교와 구교의 성경은 같은가요? 다르면 어떻게 다른가요?
신·구교가 다 한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므로 성경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신·구교가 다른 것은 성경 목록과 성경에 대한 생각의(聖經觀) 차이입니다.
신교에서는 구약 39권, 신약 27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며 그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경
에스드라전서, 에스더라후서, 토비드, 유디드, 에스더, 부가서, 솔로몬의 지혜서, 시락의 아들 예수의 지혜서, 바룩, 예레미야서, 아지리아의 기도와 세 청년의 노래, 수산나, 종과 용
마세나의 기도, 마카비전서, 마카비후서
그러므로 구교의 성경은 81권이 되지요. 그럼 왜 이렇게 목록의 차이를 나타내느냐 하면 첫째, 히브리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옮긴 '70인역'에 본래 히브리 정경에는 없던 뒤의 15권을 추가했고, 제롬의 라틴어역은 70인역을 그대로 옮겼으며 그것(벌켙역)이 로마 카톨릭의 표준성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교에서는 뒤의 15권은 본래 히브리 정경에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영감의 정도가 66권에 미치지 못하고 오류가 많이 발견되어 이를 정경에서 빼고 '가경' 또는 '외경'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구교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교회권위 밑에 두고 교황이 성경 해석권을 가지며 교회 안에 전해 오는 유전이나 신경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로 취급합니다. 또한 성경은 완성된 계시가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은 교회나 교황을 통하여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교에서는 성경은 오류가 없고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성경과 비견할 다른 것은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계시도 인정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만 절대적이고 교회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고 합니다.
4.외경이란 무엇입니까?
외경이란 '정경(Canon)에 대한 상대적인 용어이므로 정경이 무엇이냐 하는 것부터 설명해야
되겠군요.
정경을 의미하는 희랍어 '카논'은 '표준', '기준', '근본원리를 기록한 책의 목록'을 뜻하므로 정경이란 기독교인의 신앙행위를 규정하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정경으로 인정받는 데는 두 가지 기준이 있으니 첫째는 역사적 기준으로 '사도적 권위'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내적 기준으로 '감화력'이 사도의 그것과 동일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외경은 성령의 감동을 믿을 수 없고, 그 자체에 많은 오류가 발견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것들입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외에 문서
들은 구역 히브리 원전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그리스역본(70인역, 셉투이진트)에 들어 있어 라틴어역 : 벌겥)에 채용되어 카톨릭에서 정경에 포함된 10여 권을 구약 외경이라 하고, 초기 그리스도 문서 중 정경에 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정경에 버금가는 가치가 인정되어 초대교회에서 널리 읽힌 기독교 문서들을 신약 외경이라고 합니다.
5.성경을 읽다보면 「없음」이라고 빠진 절이 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학생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원본과 사본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성경은 제2 저자(사람, 제1 저자는 하나님임)들이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한 원본은 하나도 전하지 않고 수많은 사본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본들이 파생할 당시에는 과정에서 오기들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사본도 원본에서 직접 필사한 것이 있는가 하면 사본을 보고 필사한 사본도 있게 되어1대 사본, 2대 사본, 3대 사본 식으로 불리워 질 수 있는데 원본에서 멀어질수록 차이가 많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처음부터 장절이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장절은 말씀을 찾기 쉽게 하기 위해 주소를 부여한 것으로 오늘과 같이 장절이 분류된 것은 1551년에 나온 '스테파누스 4판' 성경에서부터였습니다.
그후 여러 세기 지나오는 동안 학자들은 많은 사본을 비교·연구하면서 원본을 찾아 올라가는 본문연구가 착실히 발전하여 스테파누스 4판 성경 당시에는 원본에 있는 것으로 알아 절수를 부여했던 말씀이 그후 본문연구 결과로 원본에 없는 것이 확실시되어 빼버리게 되니 한 절이 비게 된 겁니다. 그렇다고 뒤에 것을 하나씩 올릴 수는 없고 빠진 그대로 결절로 남게 된 것이 바로 학생이 질문한 '없음'으로 표시된 사연입니다.
마치 여러분 학급의 출석부에 한 사람이 전학 가도 뒷 번호를 올리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과
같습니다.
6.원본은 없고 사본들만 남았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믿을 수 있습니까? 또 성경은 일점 일획도 가감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질문 5에서 말한대로 현재 성경의 원본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많은 사본들은 서로 100% 일치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으니 많은 사본들을 대조 연구한 성경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본 상호간의 차이점은 1/1000도 안되며 그것도 중요치 않은 부분들이므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불순물이 1% 섞인 금을 순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합니다. 실제로 99%를 순금으로 거래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99.9%를 순금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본 상호간에 0.1%의 상이점이 있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흔들릴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일점 일획도 가감할 수 없다는 것은 원본에 해당하는 말이고 사본이나 번역본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임의로 가감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원본에 비하여 가감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7. 사복음서에 있는 12제자의 이름이 왜 일치하지 않습니까?
사복음서에는 12제자에 대한 기록이 4번 나타나는데,
(1) 마태복음 10:2-4에
시몬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
(2) 마가복음 3:16-19에는
베드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
(3) 누가복음 6:14-16에는
시몬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룟 유다
(4) 사도행전 1:13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이중에 마태와 마가의 기록은 일치하고 누가만 '다대오' 대신 '야고보의 아들 유다'를 기록하고 있는데, '다대오'와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이름은 다르나 같은 사람으로 생각되며 사도행전에 가룟유다가 빠진 것은 예수를 판 그가 12제자 중에서 탈락된 때문이고 뒤에 '맛디아'가 충원됩 니다.
참고로 요한복음 10:40에는 베드로, 안드레, 빌립과 더불어 '나다나엘'을 부르신 기록이 있는데 공관복음의 '바돌로매'와 같은 사람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① 요한복음에는 바돌로매가 없고 나다나엘을 12제자 중에 넣고 있으며,
② 공관복음에는 바돌로매를 12제자 중 상위그룹에 넣고 있는데 요한은 나다나엘을 상위그룹에 넣고 있으며, ③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다른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8.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큼 쉽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습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와 이성을 초월한 신적(神的)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초등학교
학생이 박사 학위논문을 읽어도 이해랄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알려고 하는 노력조차 포기해 버릴 수는 없으니 가능한 한 이해를 시도해 봅시다. 이대답의 전제를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位'는 자리, 위치를 뜻하고, 體는 '몸'을 뜻하니 하나님은 한 분(유일하신 분)이신데, 그 존재하는 양상에 3의(성부, 성자, 성령)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3위는 각기 독립된 인격체이시며 하시는 일도 구분되어 있으니 구속사 중심으로 보더라도 성부는
그것을 계획하시고, 성자는 그 계획을 집행하셨으며, 성령은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렇다고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니 단수이면서 복수요 복수이면서 단수라는 수학적 모순(인간적 면에서)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적인 머리로서는 이해가 어려워지는 거지요.
이와 같이 유일 불가분의 신적 본체 안에 위적 구별이 있으신데 3위는 권능이나 영광은 꼭
같으면서도 일정한 서열이 있으며 1위는 성부, 2위는 성자, 3위는 성령이시며 삼위간에는 구별이 있으니 성부는 스스로 계시고(自存),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발생하며,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옵니다.
이해를 돕는다는 것이 오히려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아 비유를 해보기로 하죠. 전기는 본래 같은 것이나 어떤 때는'열로', 어떤 때는 '빛'으로, 어떤 때는 '동력'으로 나타나서 서로 다른 일을 합니다.
또, 여기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가정에서는 '아버지'라고 불리워지고 가정의 일을 합니다. 회사에 나가면 '과장'이라 불리워지고 총무과의 회사 일을 합니다. 그가 주일에 교회에 가면 '장로'라 불리워지고 시무장로의 일을 합니다.
이때 '아버지'와 '과장'과 '장로'는 아무리 칭호와 하는 일이 달라도 세 사람이 아니라 A라는 한 사람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명칭이 다르고 하시는 일이 달라도 세 분아 아니라 한 분이시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까?
그러나 이 A라는 사람에 관한 비유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는 아주 부당한 비유였으므로 잊어 버리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가정에 아버지로 있을 때 회사에 총무과장, 교회에 장로로서의 'A'는 없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니 예수께서 성자로 이 땅 위에 계실 때도 성부는 하늘나라에 계셨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셔도 동시에 성자께서는 성부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니 삼의일체론이 그렇게 단순하게 이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A에 대한 비유는 반 삼위일체적인 '양태론'이라는 이단적 비유가 됩니다. 그래서 잊기를 권했던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는 그대로 나타나지 않지만 대단히 중요한 교리로서 성경의 도처에 노출돼 있는 사상이기 때문에 정통적 기독교신앙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간결하게 잘 표현했다는 웨스트민스터의 기록을 다음에 옮겨 놓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시나 삼위로 계신다. 한 본체와 한 권능과 한 영원성이사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어떤 물질로 구별되거나 거기서 나오거나 그것에서 유출되는 것이 아니다.
성자는 영원토록 성부에게서 탄생하시고, 성령은 영원토록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
9. '하나님'과 '하느님'은 같은가요, 다른가요?
개역성경을 비롯한 우리 나라 성경이 거의 다 '하나님'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천주교 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은 '하느님'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개역성경의 '하나님'과 공동번역의 '하느님'이 다른 신은 아닙니다. 두 낱말이 다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가리키는 면에서는 같다고 하겠으나 두 낱말의 어원이나 뜻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간 '하늘'에 접미사 '님'이 붙고 'ㄹ'탈락 현상(하늘+님→하느님)이 더해져 이루어지 낱말로 '하늘'(天)을 신격화한 범신론적 신관이 담겨진 말이며, 우리 민족의 천신(天神)사상과 신앙이 담긴 용어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唯一)의 어근에 접미사'님'이 붙어 이루어진 낱말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하신 신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표기하는 것이 성경적이냐 하는데는 학자간에 이론들이 없지 않으나 본인의 소견으로는 '하나님'이 옳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전통신앙인 '하느님'과는 엄연히 다른데 '하느님'으로 하면 동일시하게되고 인명재천(人命在天),
지성감천(至誠感天), 천우신조(天佑神助)의 '天'과 구별하기 어려우면, 성경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나라', '하늘 보좌'등에서 보는 것처럼 하늘은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이 거처하는 처소일 뿐입니다.
다음의 성구를 살펴보아도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라는 의미가 내포하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출 20:3-7).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신6:4)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엡 4:6)
10. 하나님도 후회하십니까?
전지(全知)하시고 전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실패나 시행착오가 있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사람같이 후회하는 일이 없습니다.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한 학생은 혹시 사무엘상 15:11,35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닌지요?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한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민수기 23:19과 사무엘상 15:11,35은 서로 상충되는 말씀일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에는 오류와 모순이 없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잠시 성경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은 '여자(如字)적 해석'이라고 해서 낱말 그대로 해석해야 할 곳이 있는가 하면, 낱말을 사전적인 뜻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문장도 표면적인 뜻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풍유, 상징, 역사적 배경, 강조하는 뜻의 포착 등 다른 해석법을 적용해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천사로부터 '탄생 예고'를 들은 마리아가 놀라서 하는 말에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라 했는데 그때 '안다'는 말은 단순히 사전적인 뜻 그 이상임을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단순한 표면적인 뜻으로만 해석하면 마리아는 남녀도 구별할 IQ가 못되는 천치가 되고 맙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고전 3:2)라는 말을 읽을 수 있는데, '젖'을 낱말 그대로 해석하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식모가 아니고 유모였다"로 해석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잘못된 해석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예는 수없이 많지만 두 가지만 더 말하죠. 요한복음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란 말이 있고 요한일서 2:15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는데 요한은 왜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을' 성도들은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런게 아니라 두 군데 '세상'의 의미가 다른 겁니다.
마태복음 8:22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는데 앞뒤의 죽은 자를 똑같은 뜻으로 해석하면 송장이 송장을 장사지내는 기괴한 뜻이 되어 버리지만 앞의 죽은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 뒤에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죽은 자'로 달리 해석을 해야 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민수기 23:19에는 "하나님이 후회치 않으신다"했고, 사무엘상 15:11,35에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고 했는데, 이런 때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질문자도 이제는 알았을 줄 생각합니다. 두 군데 해석이 달라져야 한다는 거죠. 여기에서 '후회'라는 낱말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문장 전체에 비유적인 뜻을 도입해야 하는 것이 후회하신다고 한 사무엘상 15장의 말씀입니다. 낱말 뜻 그대로 하나님이 후회하신게 아니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인간적 표현방법을 쓰신 것입니다. 이런 표현법을 신인동형 동성적 표현(神人同形 同性的表現)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6:6에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한 것도 같은 표현법입니다. 사람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고통을 인간적 표현 방법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마치 백발의 할아버지가 손자아기에게 "식사하거라"하지 않고 "맘마 먹어라"라고 어린 아기의 표현법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후회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님 아버지는 계신데 왜 하나님 어머니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하나님을 세대주로 하는 하나님 가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내되는 하나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신화나 바알 신화같은 이방의 신화는 그렇게 꾸며져 있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방 신화들처럼 사람이 꾸민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우리들의 가족관계에서 연관되어진 생각일 수도 있지요. 존엄하신 하나님 아버지 외에 모성적인 하나님 어머니를 찾게 된 게 아닐까요?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아버지는 누구고 하나님의 어머니는 누구냐 하는 데까지 비약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의 권위와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로서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지 가부장 제도의 인간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그의 아들 예수님도 인간 가족의 부자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삼위 중에 제2위이신 성자의 신분을, 그리고 그의 직무를 나타내는 것일 뿐 실제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순전한 영(靈)이시므로 남녀의 성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니 아내가 있을 수 없고 태초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니 조상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12. 하나님을 언제 가까이 느낄 수 있을까요? 나에게는 너무 먼 것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인격체이십니다. 그는 물질이 아니고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 위에 계시면서 우주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또는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만 않고 가까이에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월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은 한없이 멀리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내재성, 편재성에서 볼 때 하나님은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이 가까이 계신 하나님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인데 무전이나 장거리 전화로 하지 않고 적은 목소리로 하는 것은 옆에 계시기 때문이며 때로는 묵도로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학생도 기도할 때는 소근 소근 할 터인데 그때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느낄 때가 아닐까요?
언제나 어디서나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각이 죄의 포로가 돼 있지 않아야 하고 우리의 시각과 청각이 세상에 빼앗긴 상태가 되지 말아야합니다. 어떤 방송을 청취하려면 그 방송국의 주파수에 다이얼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수신할 수 있는 다이얼은 '마음'이고 하나님의 주파수는 '청결'입니다(마 5:8).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너무 멀리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음파를 싸이클이 맞지 않아 수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간격없는 교제가 이루어지는 때는 부활 후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부터 라고 하겠습니다.
13. 하나님께서는 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막지 않으셨나요?
하나님을 악동(惡童)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함정을 파 놓으시고 아담과 하와가 빠지기를 바래서 숨어서 기다리신 게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에게 책임이 없고 전적으로 사람편에 있으므로 문책의 대상은 아담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의 금령을 주신 것은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함을 알게 하시려는 목적이었으며 이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지키면 보상이 따르고 어기면 벌칙이 있는 계약이었으니 이를 '행위계약'또는 '생명계약'이라고 부릅니다. 노예나 기계와는 계약을 맺으신 것은 사람을 노예나 기계로 창조하시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창조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따먹지 않을 수도 있는 두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니 말하자면 선악과는 자유의지(自由意志)라는 식탁 위에 놓여지고, 그 식탁에는 선택이라는 수저 있었던 거죠.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못 먹게 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순종'이지 선악과 한 개를 아끼는 것은 아니었으니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강제로 선악과를 못먹게 했다면 선악과 두 개가 나무에 그냥 달려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 아담의 불순종에는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안 먹는 것이 순종이지 못 먹게 해서 안 먹는 것은 순종이 될 수 없으니까요.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은 당신의 영광에 있고 자유를 가진 인간이 스스로 순종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버튼으로 조종되는 기계의 순종이나 녹음기의 찬송으로 영광을 받으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자유의지가 있는 도덕적 존재로 창조하신 그 이유입니다. 인간의 시조가 범한 최초의 범죄는 이 자유의지의 남용의 결과이므로 전적으로 사람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14. 하나님께서는 왜 김일성 같은 악인을 그냥 두실까요?
하나님의 뜻을 누가 알아서 대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몇 가지의 추측은 가능하겠지요.
첫째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닐까요(겔 18:25)? 그래서 악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때문이니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밭에 곡식과 함께 자라는 가라지를 곡식의 뿌리가 상할까 염려하여 뽑지 않으시고 추수 때(심판의 날)까지 기다렸다가 곡식은 창고에 넣고 가라지는 아궁이에 던진다고 합니다(마 13:24-30).
셋째로, 성경은 말하길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롬 13:1). 그 권세를 잘못 쓰는 것이 문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권세를 남용할 때는 남용하는 대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데 앗시리아나 바벨로니아를 들어 범죄하는 이스라엘을 치신 예로서 이를 '사람막대기', '인생 채찍'(삼하 7:14)이라 합니다. 김일성도 하나님의 어떤 목적을 위해 '인생 채찍'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으니 두려움으로 경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채찍은 사용한 후에는 꺾어 버립니다.
넷째로, 위에서 말한 대로 김일성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구조 속에 하나의 부속품으로 쓰여지고 있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징계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악인은 멸망할 때까지 악행을 계속하도록 버려 두는 것도 하나님의 징계의 한 방법입니다.
15. 하나님께서는 동기와 결과 중 어느 것을 더 중요시하십니까?
사람의 모든 일에는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지요. 사람들은 동기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거나, 동기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는 견해도 있는가 하면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주장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동기와 과정(방법)과 결과를 모두 중요시하며, 이 셋이 다 좋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동기가 아무리 좋았다 할지라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그런 일은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결과는 비록 좋지 않았어도 동기만 좋았으면 된다는 것은 무책임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함을 알고 놓아주려는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고 말아 예수를 죽인 정치적 책임자로서의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결과를 인류 역사에 암기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면 비록 결과가 좋다고 해도 하나님은 선으로 인정치 않으시고 상을 주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구제의 교훈에서 그것을 보게 됩니다. 칭찬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공개로 하는 구제에는 상이 없으니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마 6:-2). 또 동기와 결과가 아름다워도 그 과정이 좋지 않은 것은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 아니합니다.
신명기 23:18에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일날 일해서 번 돈을 몽땅 하나님 앞에 바친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3:7-8에 말하길 나의 거짓말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할지라도 정죄를 받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규범은 '동기도 좋게, 과정도 좋게, 결과도 좋게'입니다. 오늘날 사회 일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걸고 좋은 결과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그릇된 외침은 기독교나 성경의 목소리가 아니니 경계해야 합니다.
16.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주시지 않을까요?
지금 인류가 어디 있으며 그 신분이 어떠한가 부터 이해하면 자연히 해답이 나옵니다. 성경을 말하길 인류는 최초 범죄 후 죄인의 신분이 되었으며 실락원(失樂園)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평화·행복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마귀의 자식이 되어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되니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아래 놓이게 됐습니다(소요리문답 13, 17, 19). 다시 말해서 현재 인류가 사는 땅은 에덴동산이 아니고 저주받은 땅이며 인류의 신분은 죄수라는 말입니다.
감옥의 죄수가 호텔로 착각하고 시설과 서비스가 왜 이 꼴이냐고 항의한다면 넌센스지요.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사리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고루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신 행복을 사람이 잃었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람이 잃은 행복을 다시 찾아 주시려는 계획을 세우셨고 지금 진핸 중에 계십니다. 그 진행이 완성되는 날 모든 악과 불행은 사라지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그의 백성들은 신천신지(新天新地)에 복락원(復樂園)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17. 하나님은 언제쯤 지구를 창조하셨으며, 과학적 연대와는 일치합니까?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창 1:1). 그 '태초'가 지금부터 몇 년 전이냐 하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말하듯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다는 점에서 과학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대우주의 연령을 150∼200억 년으로 보며 태양계의 연령도 50억 년으로 추측합니다. 따라서 지구의 연령도 과학은 50억 살로 감정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오래 될 수 없다는 반론들도 제기됩니다. 지구가 정말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경과했다면 대기를 전부 상실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상당량의 우주낙진이 지표를 덮고 있어야 하고 바다에 용해된 화학물질은 지금보다 많아야 하며 지자기는 오래 전에 다 붕괴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구 증가율로 보더라도 진화론 입장에서 인류의 발생을 100만년으로 볼 때 26,000세대가 되며, 수학적으론 지구의 인류는 102100을 넘어야 하는데 40억밖에 안 되는 것은 납득이 안 간다는 것입니다.
지구 연령계산에 많이 쓰이는 동위원소 측정법도 문제가 있습니다. 방사성 연대측정은 폐쇄체계에서만 정확을 기할 수 있는데 지구는 개방 체계며 동위원소의 붕괴과정도 일정하기보다는 많은 이질적 요소들에 의해 변화를 받았을 가능성이 많고, 최초에 이물질이 들어 있었는지 조차 확인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의 예로, 하와이 후이라데 근처에서 형성된 대암석이 연대측정 결과 1억 6천만년 내지 30억 년의 연령이 산출된 것입니다.
한편 창세기의 족보에 근거하여 지구 연령은 5, 6천년쯤으로 보는 것도 옳지 않으니 족보에는 생략된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 7일에 대해서도 하루를 말 뜻 그대로 24시간으로 보는 견해, 지질학적 한 연대로 보는 견해, 태양 창조 전후의 하루의 의미를 다르게 보는 견해들이 있는가 하면 창세기 1장과 2장 사이에는 오랜 간격이 있다는 '간격설'도 있으니 성경적 연대 계산도 그렇게 단순치가 않습니다.
명심할 것은 성경에는 정확한 창조의 연대가 기록돼 있지 않으니 섣불리 연대수치를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비성경적 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구의 연령이 과학이 말하듯 그렇게(50억년) 오래지는 않으면 성경적이라고 제시했던 몇 천년보다는 상당히 더 되었을 것이니 과학의 발전과 성경 연구가 지금보다 고도화되면 양자 사이의 간격은 상당히 접근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18. 사랑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지옥에 보낼 수 있을까요?
예정론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선택자'와 '유기자를 구별 하셨습니다. 피선택자나 피유기자의 개성적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에서 그의 좋으신 뜻대로 정하셨습니다. 유기자 입장에서 볼 때는 불공평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무슨 사물이나 일은 전체적으로 보아야지 부분적으로 보고 평하는 것은 늘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본래 인간의 지위가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구는 대양에서 침몰해 가는 난파선이 있었습니다. 그냥 두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구조선이 와서 그중 일부를 구원했다면 열 명을 구원해도 정당하고 5명을 구원해도 정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5명이나 10명이 아니라 100%가 아닐 뿐 상당히 많은 수를 구원하십니다. 혹 어떤 사람은 100%를 구원할 능력이 없지 않으신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한 사람도 버릴 리 없다는 '보편구원설'을 주장하기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제한구속을 말하고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요 질서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또 다른 한 면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으니 이른바 자유의지라는 인간편에서 보는 입장입니다.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라"고 요한 웨슬레는 말했는데 진리의 일면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구원 얻으려는 인간의 의지를 막지 아니하십니다. 쉽게 생각하면 모순되고 충돌하는 말 같지만 서로 부딪치고 밀어내는 것 같은 톱니바퀴가 실은 서로 물과 돌아가며 공동의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정'과 '자유의지'는 두 개의 서로 물고 돌아가는 톱니바퀴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 갑니다. 이두가지가 어느 선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돌아가는지 인간의 지혜론 헤아릴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정도 진리고 자유의지도 진리인 것은 비단 구원문제뿐 아니라 인생의 제반사가 다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스스로 지옥을 찾아간다'고 나뭇잎에 앉았던 벌과 파리가 똑같이 공중으로 날아올라도 벌은 꽃으로 가서 앉고 파리는 오물 위에 가서 앉으며 새는 높이 공중을 향해 날아가고 두더지는 햇빛을 피해 기를 쓰고 땅을 파고 들어갑니다. 사후의 인간의 영혼도 같다는 거죠. 그냥 내버려두어도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등지고 어둠의 생활을 한 사람의 영혼은 스스로 지옥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밝은 빛과 향기를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옥 갈 영혼은 스스로 이 세상에서부터 지옥 갈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것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19. 죄란 무엇이며 어떤 죄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니 이에 대한 정의를 몇 가지 인용해 보겠습니다.
1.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이다' (소요리문답 14).
2. '죄는 행동에서나 성향에서나 상태에서나 도덕적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다' (벌코프).
3. '죄란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에 대한 순응의 결핍이다.' (비트링가).
죄는 원죄(原罪)와 본죄(本罪)로 크게 나누는데 원지란 선천적으로 가지고 출생한 죄적 신분과 상태로, 그 근원을 아담의 최초 범죄에 두고 있습니다. 본죄란 자범죄라고도 하는데 개인의 행동이나 마음에서 범하는 죄로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1. 무식죄와 유식죄 : 죄인 줄 몰라서 짓는 죄가 무식죄고, 알고도 짓는 죄가 유식죄(지식죄)입니 다.
2. 연약죄와 고범죄 : 힘이 모자라 불가항력적으로 짓게 되는 죄가 연약죄고, 고의적으로 계획적 으로 짓는 죄가 고범죄입니다.
3. 불가사죄 : 성령 훼방죄로 이 세상과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말합니다.
20. 죄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죄란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이라는 죄에 대한 모든 정의로 19문의 답에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구약에는 613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모세의 십계명에서 10개로 축약되고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두 가지로 압축되었으니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마 22:37)인데 이것을 다시 한 낱말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구약 613개 율법을 엑기스를 뽑아 정제하면 한 덩어리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럼 가장 큰 죄란 무엇일까요?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지 않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하라 한 것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면 죄의 본질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1. 아담이 지은 죄가 왜 내 죄가 되며, 왜 그 벌을 내가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행위계약을 맺으실 때 아담의 신분은 인류의 조상', '인류의 대표'라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 개인과 계약하신게 아니라'인류의 대표자 아담'과 계약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대표자 원리라고 말합니다.
한 단체의 대표자와 맺은 계약은 그 구성원 전체와 맺은 효력을 발생하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입학식 때 선서는 신입생 대표 한 사람이 했지만 그 적용은 여러분 전체에게 미칩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우리들의 현장에라도 있지 않았느냐고 할지 모르죠. 그러면 하나의 예를 더 들어봅시다.
지금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집단인 북괴의 도전을 받고 있어 누구나 안보를 염려하는 상황에서도 평화를 유지하며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한 미군에 힘입은 바 큽니다. 이렇게 미국군인이 와서 우리나라의 국토방위를 분담하고 있는 법적 근거는 1953년 10월에 조인한 '한미 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입니다.
이 조약의 혜택을 여러분이 지금 크게 받고 있는데 이 조약을 체결하던 당시 여러분은 현장에 있었습니까?
30여 년 전 우리 나라의 이승만 대통령 정부와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 사이에 무기한 유효하도록 규정되어 체결된 이 조약이 그 당시 이 땅에 나지도 않았던 여러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을 대표한 사람이 조인했고 여러분은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의 사회 생활도 모두 대표자 원리에 의한것이니 대통령은 나라를 대표하고 시장은 시민을 대표하고 사장은 회사를 대표하고 세대주는 가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표자가 잘하면 그 구성원이 모두 행복해지고, 대표자가 잘못하면 그 구성원이 다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아담이 계약을 성실히 이행했더라면 오늘 우리들이 모두 행복했을 것인데, 그가 범죄했기 때문에 그 죄과가 우리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돈을 못 벌기 때문에 자녀들이 고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을 근거로 해서 원죄의 유전을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여기 한 사람이란 아담을 말합니다. 이같은 범죄의 대표자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속의 대표자 원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음 성구를 음미해 보십시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순종치 않은 한 사람은 아담이고 순종한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22.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지금 인류의 상태는 어떠할까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류와 문명과 생활주변에 생긴 변화를 알아보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을 경우의 상태를 알 수 있을 줄 생각합니다.
최초 범죄의 결과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며 죄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성(人性)이 완전히 부패하여 사람의 마음이 도덕적으로 약해졌고 생활에 고통과 죽음이 있게 됐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뿐 아니라 자연도 저주를 받아 약해 졌습니다.
만약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창조 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보유한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한 교제를 하고 하나님을 기뻐할 것이며 순수하고 거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은 고통도 슬픔도 없고 죽음이 없는 세계, 한없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니 인류가 동경한 유토피아의 주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이상향의 동경은 바로 에덴의 향수(鄕愁)입니다.
23. 세상에는 왜 선과 악이 존재할까요? 선만 있으면 좋을 터인데…
절대 선(善)이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는지?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보는 의문이며 누구에게도 시원한 대답을 듣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惡)은 하나님이 지으시지 않았으며, 따라서 세상에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루종일 햇빛이 들지 않는 골짜기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태양의 책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악의 근원을 하나님에게 반역한 천사의 무리라고 하며, 인간세계에 악이 들어온 것은 이 사단의 꼬임을 받아 시조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악의 근원은 그렇다하고 사단의 활동이나 악의 존재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니 악을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지는 않았어도 세상에 있도록 허락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허용적 작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문은 계속 남게 되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악을 허용하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사단으로 하여금 의인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을까? 세상 끝날까지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을 난제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악의 존재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니 사단은 시한부 생명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최후심판 때 악의 세력이 멸망한 후에는 학생이 원하는 대로 선만이 존재하는 새 세계가 시작됩니다. 그 이전까지만 선악이 공존하게 됩니다.
24. 악인이 없어지고 선인만 존재하는 세계는 정말 오는지요?
악한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착한 사람들만이 사는 그런 아름다운 세계는 꼭 옵니다. 그 세계는 죄와 고통도 없으며 슬픔과 죽음이 없는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는 예수님의 재림 나팔소리와 함께 시작될 것입니다(전천년기 재림론).
혹 어떤 사람들은 이런 평화로운 세계가 1,000년쯤 계속된 후에 예수님이 오신다고도 말합니다(후천년기 재림론). 그때가 언제냐는 물음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때와 그날은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으니까요(마 24:36).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때는 점점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그때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 대비하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롬 13:11)했고,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당장 오시는 것으로 알고 모든 계획과 노력을 포기하고 주님 오시기만 기다리고 앉아 있다면 이것도 잘못입니다.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살후 2:2)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예수께서 곧 오실 수도 있고, 나의 생애 중에는 오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 위에 진행돼야 합니다.
25.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성령모독죄는 어떤 것입니까?
성령모독죄를 불가사죄(不可赦罪)라고 하는데 용서함을 받을 수 없는 죄라는 뜻입니다. 곧 성령의 사역을 고의적으로 훼방하고 증오 한다든가 마음이 굳어져서 회개치 않은 죄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믿고 성화 되는 것이 모두 성령이 하시는 일인데, 성령을 증오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회개할 수 없고 예수를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훼방죄는 회개치 않고 예수를 적대시하는 죄니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불가사죄가 되는 것입니다.
26. 예수께서 실제로 존재했다는 물적 증거가 있습니까?
어떤 물적 증거를 원하십니까?
무덤입니까?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없고 그 자리에는 '성묘지 교회'가 서 있을 뿐입니다.
시이저나 나폴레옹처럼 일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말합니까? 예수님은 세상나라의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하지 않으셨고, 로마 식민지의 한 구석 팔레스틴 땅에 나셔서 불과 3년의 짧은 공생애를 보내셨기 때문에 일반 세계사에는 한 페이지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세계사의 공통 연대기가 예수탄생을 분기점으로 해서 B.C. 와 A.D.로 구분되었는데 이것이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 것보다 작은 일입니까?
한 권의 전기를 원하십니까? 신약의 4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를 나타낸 4권의 전기입니다. 기념비를 원하십니까? 유대땅 도처에 산재한 성지의 유적들은 돌덩이들보다 확실한 기념비입니다. 기념과 같은 것이라도 원하십니까?
당시 유대를 핍박하고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제국의 수도 로마에 자리잡은 법황청과 성당들, 세계에 산재한 수많은 교회들, 특히 십자가의 숲을 이루는 우리나라의 도시 풍경들을 유물 몇 개 전시한 기념관에다 비기겠습니까?
또 다른 물적 증거가 필요합니까? 오늘의 세계 인구 1/4이 넘은 10억의 크리스챤은 예수께서 실존하셨다는 살아있는 증인들입니다. 법정에서는 두세 명의 증인만으로도 충분한데 10억 증인으로도 모자란다고는 안 하겠지요.
혹 예수의 신성이나 인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지 않았으나 예수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불필요한 의혹을 버리기 바랍니다.
27. 예수와 마리아, 요셉, 하나님의 관계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외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의 영적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인간 가족관계의 부자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성부, 성자는 위(位)의 구별이요, 하시는 일의 구별일 뿐 본질상은 한분이며 같은 하나님이십니다(문제 8참조).
마리아는 예수의 인성(人性)면에서 볼 때 어머니입니다. 그의 몸을 빌어 성육신(成肉身)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님의 육체적 아버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하셨으니 까요. 다만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했기 때문에 예수의 법적(호적상의) 아버지가 될 뿐입니다.
28. 예수께서도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까?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그리스)어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네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성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 부모의 사랑 등 혈족의 사랑을 뜻하는 스트로게,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 그리고 최고의 신적 사랑인 아가페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에서 볼 때 주님은 모든 여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여인뿐 아니라 남자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학생의 질문이 에로스적 사랑을 의미한다면 어떤 여인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연애하셨다는 기록도 없고 결혼하신 일도 없으니까요.
어떤 이단 종파나 불신앙인 예수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관계를 에로틱한 관계로 보고 스켄달을 꾸며 보려고 하지만 신성모독입니다.
29.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 언덕은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뜻으로 아람어(시리아어) '골고다'의 희랍어 음역이며, 라틴어로는 '갈라비아'로서 '갈보리'로 영역되었으니 골고다와 갈보리는 같은 곳입니다.
골고다의 현재 위치는 정확치가 못합니다. 유대의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시온산 북쪽에 있다고 기록했는데, 그곳에는 골고다로 추측되는 곳이 두 군데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성 안에 있는, 현재 '성묘지 교회'안에 있는 갈보리로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A.D.4세기에 이곳을 골고다로 인정하고 '성묘지 교회'와 '부활기념 교회'를 새웠는데, 1960년에 대대적인 복원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고든의 갈보리라고 불려지는 지역으로, 현재 예루살렘성 밖 다메섹 가까이에 있는 높이 20m의 언덕입니다.
한때는 이곳이 더 신빙성이 높았으나 그후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그 타당성이 희박해졌는데, 이 언덕에는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바위들만이 있다고 합니다.
30. 마귀의 말대로 예수께서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셨다면 다치셨을까요?
이런 유의 질문이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은 못되며 별로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하고 토론을 위한 토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제정 러시아가 붉은 혁명으로 무너지기 직전에 성직자들은 모여서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설 수 있는가 라는 무익한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성경에도 없는 사실을 추상해 내고 끝없는 말씨름의 소재를 창출하여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학생이 질문을 했으니 나의 사견을 말해 보도록 하지요.
만약 예수께서 사단의 말대로 뛰어내리셨다면 다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신이지만 또 사람이시기 때문이며 이때는 신성보다는 인성에 더 비중이 컸던 때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 시험받는 것 자체가 인성적인 것이고, 시장하신 것도 인성적이며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인성적 입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치는 것은 인성적인 것인데 예수는 무죄성을 제하곤 우리와 꼭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육체는 부활 이전에는 우리의 육체와 다름없이 물리법칙의 적용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못 박히실 때 괴로워하시고 목말라 하셨으며, 창에 찔릴 때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마귀가 그런 시험을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뛰어내릴 경우 다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시험을 했을 겁니다. 그래야 마귀의 승리가 되고 바라는 바대로 될 테니까요. 안 다칠 것으로 알았다면 그런 시험은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만약 예수가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인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가 다친다고 해도 신성은 부인되지 않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괴로워하며 죽어갔어도 신성이 부인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31.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데 좌편에는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 우편(Atright hand of God)이란 표현은 다윗의 시편 110:1 "내 우편에 앉으리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상징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니 하나님의 우편 보자 곧 영광, 영예, 권능을 나타내는 위치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온 인류의 구주되심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오른손은 유능하고 왼손은 불편한 그런 유한한 존재가 아닙니다.
또 한편 누가 계시냐는 질문은 성경이 대답을 주지 않고 있지만 혼수상태에서 5일간 천국을 방문하고 와서 ≪내가 본 천국≫이란 책을 쓴 펄시 콜레 목사님은 그 책에서 말하길 또 하편(좌편)에는 성령님이 앉아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성부가 가운데 계시고 오른편에 성자, 외편에 성령, 삼위가 같이 보좌에 앉아 계시다고 했는데 이것이 정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32. 예수께서 오늘 오시면 북한 동포들은 어떻게 되나요?
오늘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면 북한동포의 절대 다수가 멸망 할 것이며 극히 적은 수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북한에도 숨은 지하교인들이 있으니까요).
그러한 상황은 대한민국 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남한의 신자수를 대략 1,000만 명으로 봐도 그들이 모두 구원을 받지는 못하므로 역시 주님이 지금 재림하신다면 다수의 사람들이 멸망할 것이고 그 보단 적은 수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한과 같은 사회에서도 택한 백성은 구원을 받고 남한과 같은 신앙의 자유 속에서도 버린 백성은 멸망할 것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지금 북한에 있는 구원받을 백성들이 정치적 이유 때문에 복음에 접촉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주님은 그래서 재림을 지연시키시고 있는지 모릅니다.
33. 구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구원이란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로 죄악의 결과인 영원형벌에서 건짐을 받아 영생과 복락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범죄 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고 불화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람이 죄은 죄의 결과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시 사람과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우리들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셔서 믿는 우리들의 이름을 마귀의 족보에서 하나님의 가계로 옮겨 적어 놓으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빠지면 하나님 앞에 나타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며 하나님은 죄인을 자녀로 삼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34. 교회에 나가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교회에 나아가면 다 구원을 얻느냐"는 물음과도 상통하기 때문에 교회의 뜻을 분명히 하는 대답부터 해야 되겠습니다. 질문자는 교회를 교회당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요? 교회의 참뜻은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모이는 예배자들의 집단과 조직이며 그들의 교제를 뜻합니다.
주일에 교회당에 들어가서 한 시간 예배만 참석하고 빠져나오는 만년손님 교인은 교회당에 다니는 신자며, 예배참석은 물론 해당기관에 소속하여 봉사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교인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다하는 교인은 교회에 다니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해서 교회당에 다니는 신자와 교회에 다니는 신자가 있습니다.
교회의 뜻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분류가 한 번 더 가해져야겠는데 지상교회는 유형교회(가견적 교회)와 무형교회(불가견적 교회)로 나누어집니다. 유형교회란 일정한 장소에 예배처소를 정하고 모인 신앙단체로 정치적 조직을 가지고 있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로서 '○○교회'라고 간판을 건 지교회들이 여기 속합니다.
무형교회란 그런 외형적 조직이 없고 하나님만 아실 뿐 사람은 구분할 수 없는 교회로서 유형교회에는 구원받지 못한 가짜 성도가 섞여 있는 반면, 무형교회는 구원받은 참 성도만의 그룹입니다. 그렇다고 두 교회구성원이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유형교회에는 속했으며 무형교회에는 들어가지 못한 사람도 있고, 무형교회에는 속했으나 유형교회에는 속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교회는 중심을 다리하여 부분적으로 겹쳐지는 두 개의 원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이제 학생은 대답의 반을 들은 셈입니다. 무형교회에 속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유형교회에 속하지 않았다고 반드시 구원을 못 얻는 것은 아니라는 답이 나왔으니까요. 주님 옆에 못박혔던 한 강도는 유형교회는 소속하지 않았었지만 구원을 받았으며, 현재 북한에는 유형교회는 거의 없는 상태인데 지금 북한에서는 한 사람도 구원 얻지 못한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구태여 교회 나갈 필요가 없다는 무교회주의를 지지하는 줄 알면 안됩니다. 특수한 경우가 그렇다는 말이지 그것이 보편적 원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인정하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칼빈도 교회를 떠난 자에겐 파멸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키프리안이라는 교부는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했고, "교회를 어머니라고 할 수 없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없다"고 까지 했으며,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므라 간조도 교회의 외형적 조직을 부정한 것이지 교회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마땅히 교회에 열심히 출석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35. 예수를 믿어야만 천당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예수님 탄생전의 사람들의 구원문제는 어떻게 되나요?
퍽 어려운 문제를 물으셨군요.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죠.
카톨릭 같으면 연옥같은 중간 처소를 말하겠지만 신교에서는 이 교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없기 때문이죠. 성경은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을 전부 말해 주는 백과서전은 아니며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을 사람의 이성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추리해서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칼빈도 말하길 "성경이 가는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구원문제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냐 하는 거지 성경이 침묵하는 부분에 청신경을 모으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호기심이 아니라 하나님 앞의 경건이며, 성경은 백과전서가 아니라 신앙생활의 지침서이며, 구원의 안내서임을 명심하기로 합시다.
36. 출생하자마자 죽은 영아의 영혼은 천당에 갑니까, 지옥에 갑니까?
성경에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것을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유아림보'같은 중간 처소를 교리화하고 있지만 신교회에서는 성경적 근거 박약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죽음은 죄의 결과인데 영아도 죽는 것을 보면 영아도 죄가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이제막 출생한 아기가 무슨 범죄를 했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죄는 자범죄만이 아니라 원죄도 있으니까요. 영아라고 이 원죄에서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행위에 의함이 아니고 믿음에 의하며, 공로에 의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인도 자신의 구원이 어차피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행위 할 기회가 없었던 영아 사망자라고 해서 구원상에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지 않느냐하는 문제가 남지만 믿음을 가질 기회를 주었어도 믿지 않은 성인과 전혀 믿을 기회가 부여되니 않았던 영아 사망자에게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는 차등있게 적용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영아 구원도 역시 예정의 원칙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섭리로 가장 자비롭고 정당하게 처리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7.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확정되었다면 전도가 왜 필요합니까?
사람으로서는 누가 선택자고 누가 유기자 인지를 모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어느 씨앗이 싹트고 어느 것이 싹이 안 날지 모르기 때문에 넉넉히 다 뿌려서 싹트는 것만을 기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키우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 예정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갑이라는 사람은 나를 통해서 복음을 받고 A라는 교회에 인도되어 신앙 생활하도록 예정돼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전도무용론이 나올 수 있으며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를 성경이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딤후 4:2)고 했고, 강권하여 나의 집을 채우라고 했으며(눅 14:23),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고전 9:16).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최후로 명하신 것도 전도명령이었는데(마 28:19), 이것을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신자와 교회에 부여된 매우 중대한 사명입니다. 열심히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장 기뻐하시고 큰상을 주십니다.
38. 천사는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그림에는 천사가 여자처럼 그려져 있지요. 날개도 있어요. 화가에게 속지 마십시오. 처사는 여자도 남자도 아닙니다. 그러면 중성이냐 하겠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성(性)은 지상의 생물적 속정이고 영(靈)은 성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천사는 도덕적 피조물이긴 하지만 영적 실유(實有)로서 우리 인간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불사(不死)적 존재입니다. 물론 날개도 있지 않고요. 천사가 정말 날개로 난다면 대기권을 벗아나면 로케트를 달아야 할 게 아닙니까?(스랍은 예외로 6날개가 있음/사6:2-7)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데리고 살다가 다 죽었는데 부활시에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영혼도 다 부정하는 사람들이므로 이런 질문으로 예수를 시험했던거죠.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으니라"(막 12:25)라고 하셨습니다.
39. 마귀는 실제로 존재합니까?
성경은 마귀를 타락한 천사라고 알려 줍니다(유 1:6;눅10:18).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볼수는 없지만 마귀(Satan)는 사람보다 먼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합니다.
이 마귀는 인격적 존재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데 사람보다는 지혜롭고 능력도 큽니다.
성경에는 마귀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르고 있으니 시험하는자(살전 3:5), 악한 자(마 13:19), 세상 임금(요 12:31), 세상 신(고후 4:4),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 귀신의 왕(마 12:24) 등입니다.
이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성공하였고, 유대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하다가 실패했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속에 들어가 거짓말을 하다가 죽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속에 들어와 전쟁과 파괴를 자행합니다. 로마 황제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했고, 히틀러를 충동하여 유대인을 학살 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공산주의 탈을 쓰고 도처에서 하나님을 대항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 정치적 권세를 한 손에 쥐고 기독교인을 심히 핍박하게 되는데, 그때는 마귀의 멸망할 때가 가까워 온 것이니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십니다.
그때까지는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더 극성을 부리며 우리들의 마음속에 죄악의 씨를 뿌리고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유혹하고 충동합니다.
마귀가 정말 있는가 의심할 때 마귀는 미소를 지으며 접근합니다. 악한자는 자기 정체를 감추고 악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확실한 존재이니 경계태세를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40. 진정한 신앙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좀 어렵지만 신앙에 대한 신학적 정의와 학자의 말을 인용해 보기로 하죠. "신앙이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영혼의 운동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라고 정의합니다.
신학자 벌코프는 "신앙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심적 신뢰"라고 했고, 찰스 핫지라는 신학자는 "신앙이란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과 교리들을 그대로 확신하는 것"이라 했으며, 칼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상의 정의들을 종합해 보건대 신앙이란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과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아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영적 활동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대로 신뢰하는 것이며 성경대로 믿는 것은 사도신경대로 믿는 것이니 곧 ①천지를 만드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신 예수, ②예수의 성령잉태, ③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장차 재림하셔서 심판하길 주님, ④성령을 믿으며, ⑤교회와 성도간의 교통과, ⑥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⑦육체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지·정·의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지성적인 요소는 기독교의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며, 감정적인 요소는 이 진리에 대하여 전 인격적인 찬동이며, 결의적인 요소는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 신뢰입니다.
또 신앙에는 역사적 사실만을 믿는 '역사적 신앙'이 있고,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어려움이 오면 없어지는 '임시적 신앙'이 있는데 이런 신앙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이적과 기사를 보고 믿는 '이적의 신앙도' 있는데 이것은 , 구원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성경대로 굳게 믿으며 변치 않는 신앙만이 구원에 이르는 참신앙입니다.
41. 기독교인은 꼭 세례를 받아야 하나요?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안받으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학생의 질문이 물세례만을 의미하고 물세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 되느냐는 뜻이라면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겠습니다. 물세례는 죄를 씻는 하나의 의식이요, 은혜 언약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인치심의 표시일 뿐, 물세례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니 예수님의 우편에 달렸던 강도는 물세례는 못 받았지만 구원 얻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세례에는 요한의 물세례 외에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가 있습니다. 물세례가 외적 형식이라면 성령세례는 내적인 세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니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말하길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했으니 구원에 있어서 성령세례는 필수적이며 기독교인은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42. 장로교의 세례방법과 침례교회의 세례방법 중 어느 것이 옳은가요?
침례교에서는 전신을 물에 담그는 침수세례만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 장례, 부활을 의미하며 완전히 물 속에 잠겼다가 나오므로 그리스도와 같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며, 초대교회가 다 침수세례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례의 본질적 의미는 깨끗하게 한다는 뜻으로 성령의 세례는 영적 씻음, 정화를 상징합니다(행 2:38, 고전 6:11, 딛 3:5). 따라서 형식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침수세례(침례)와 더불어 머리에서 물을 붓는 관수세례,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적수세례도 다 옳다는 견해가 장로교의 세례관입니다.
세례를 의미하는 헬라어의 '밥티조'는 씻는다, 목욕하다, 정결하게 하다라는 뜻이 있어 반드시 침수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대표적인 침례 외에 여러 가지 세례방법이 행해졌음을 사도행전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38-41에 베드로의 설교로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이때 세례형식은 침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세례를 받을 때(행 9:18)와 고넬료의 가족이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을 때도(행 10:48) 침례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43. 예수를 믿으려면 어떤 마음상태를 가져야 하나요?
먼저 '영혼문제'에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궁극적 목적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세상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무궁한 영적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영혼이 없고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단히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 결과의 불행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겸손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겸손입니다.
교만중에 가장 큰 교만은 이성에 의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하나님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이성의 저울로 하나님을 달아보는 것과 같으데 기껏해야 100㎏밖에 달수 없는 저울에 1t 무게의 물건을 올려 놓아도 그 저울은 여전히 100㎏을 나타낼 뿐입니다.
또한 사람의 시력으로는 아무리 멀리 봐도 지구는 둥근 것이 아니라 편평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니,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고 크실 뿐만아니라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오관으로 감지 할 수 없는 것이므로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기의 고집이나 일신의 안일을 앞세우면 신앙을 갖기 어렵습니다.
성경말씀이 가르치고 명하는 바를 어린아이같이 순종하여 행하려고 노력하며, 목사님이나 신앙적 지도 위치에 계신 분들의 말씀을 잘 듣고 핑계하지 말고 순종하면 신앙에 입문할 수 있을 줄 압니다. 다시 말해 믿을 수 있는 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44.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왜 안 죽었나요?
학생의 질문을 보니 사단은 진실을 말하고 하나님은 거짓을 말한 듯 생각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대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적 죽음 곧,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현상으로 이것을 의학적인 죽음, 또는 생물학적인 죽음 이라고도 하는데 육체적 생명의 종식을 말합니다. 아담은 본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930세밖에 못살고 죽은 것은 선악과를 먹은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적 죽음은 천천히 온 셈이죠.
또 하나는 영적인 죽음인데 개인의 영혼과 하나님이 분리되는 현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마 8:22)에서 앞에 '죽은 자'각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하고, 뒤에 '죽은 자'는 육적으로 죽은 자를 말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영적으로는 즉시 죽었습니다. 그는 선악과를 먹자 하나님이 두려워 그 낯을 피해서 숲 속에 숨어버렸지요(창 3:8).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버린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의 단절을 뜻합니다.
급기야 그는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에서 추방되고 맙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 이렇게 영적, 육적으로 모두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은 마귀입니다. 본래 마귀는 거짓말장이입니다(요 8:44)
45. 성찬식 때 왜 떡과 포도주를 먹나요?
이 성례는 주님께서 최후만찬 때 정하신 거룩한 의식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마 26:26-29).
성례시 빵(떡)은 우리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살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례시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에 대해서 다른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화체설(化體設)이라고 해서 성례시 빵과 포도주가 신자의 몸 속에 들어가면 정말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공재설(共在設)을 주장했는데, 떡과 포도주안에, 옆에, 아래 예수님께서 같이 계신다는 주장입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쯔빙글리는 기념설(記念設)을 말했는데, 하나의 기념적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칼빈은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設)을 말했는데, 성찬식에 주님이 영적으로 임재해서 계신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 이론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려 돌아가셨음을 분명히 알고 마음에 되새기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46. 성경에 눈으로 범죄하면 눈을 빼버리라 했는데 실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말씀을 모두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여자적(글자 그대로)으로 해석해야 말 말씀이 있는가 하면 비유·상징으로 풀이해야 할 말씀도 있고, 강조하는 교훈을 파악하고 정신적으로 해석해야 할 말씀들도 있습니다(문제10 참조).
학생이 질문한 마태복음 5:29-30의 말씀은 그대로의 실천을 요구하기보다는 정신적으로 해석할 말씀이니 손으로 범죄했으면 정말 손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자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손이 없는것으로 알고 다시는 그런 범죄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눈으로 범죄했을 때는 정말 눈을 뽑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눈을 뽑는 아픔을 느끼고 눈이 없는 것으로 치고 다시는 그런 것을 보지말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손으로 범죄하면 외과에 가서 손을 절단하고 눈으로 범죄하면 안과에 가서 눈을 빼야 할 것이니 병원은 수지 맞겠지만 교회는 불구자의 집단이 되고 말게 아닙니까?
그리고 오늘날 우리 나라에만도 1,000만 성도가 있는데, 지를 지었기 때문에 눈을 빼거나 손을 잘랐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그 많은 크리스찬 중에 범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든지, 아니면 성경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든지 어느 하나가 될 터인데, 과연 그럴 수 있겠습니까?
또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세상에서 불구자는 천국에 가서도 불구자라는 말이 있는데, 그럴 수 없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불구의 육체가 하늘나라에서는 건전한 육체로 되는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이런 경우의 말씀은 성경에 많습니다. "내가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눅 12:49)는 예수님 말씀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예수는 방화범이 될 것이며,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눅 17:6)는 말씀도 여자적(如字的)으로 해석하면 티끌만한 믿음을 가진 목사도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47. 제 4계명으로 보더라도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은가요?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법칙 중에 하나입니다(안식일, 노동, 결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끝난 다음날인 제7일(토요일)을 안식이로 지켰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주일, 일주일의 첫째날(일요일)을 안식하는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제7안식교회에서는 지금도 토요일 안식일을 중요한 교리로 삼고 있으며, 제7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만 구원얻는다고 말하며, 주일은 로마정부가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정해 논 날이므로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안식일이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라 하며 후에 변경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안식(安息)이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며 사도들에 의해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기 시작했고, 히브리서 4:9에는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고 하였으니 안식일의 가변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의 주일의 예표며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하늘나라의 영원한 안식의 모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소멸됐으니, 골로새서 2:14-17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儀文)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건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했으니 여기서 몸은 실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안식일과 신약 주일이 안식일의 본질에 있어서는 같되 의식적 부분인 날짜는 일곱째 날에는 첫째날로 바뀌고 안식일을 지키는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에는 생업을 쉬고(출 34:21), 나무하지 못했으며(민 15:32-36), 음식을 만들지 못했고(출 16:23), 불도 피우지 못했으며 (출 35:3), 짐을지지 못했고(렘 17:21-22), 상업도 못하고(암 8:5)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런 것이 점점 형식에 치우쳐 안식일에는 바늘도 가지고나가지 못하며 서기관은 펜을 휴대하지 못하며 먼 길을 갈 수도 없고 물건을 집 밖으로 옮길 수도 없는데, 꼭 옮겨야 할 때는 그 장소까지 울타리를 치고 옮기면 괜찮으며, 안식일에 물건을 던졌다가 다시 그 손으로 받으면 안되지만 한손으로 던지고 다른 손으로 받으면 괜찮다는 규정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형식에 흐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고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때 예수께서는 응수하시길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7-8) 하셨습니다.
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마 12:11-12)하셨고, 율법주의적인 알맹이 잃은 안식일을 책망하셨으니 신약의 주일 지키는 태도는 예배 드리고, 성경과 경전 서적을 읽으며 문병 위로하고 부득이한 일 시급한 일은 허용하며 구제, 자비 등 선을 베푸는 일은 해야하고 노동, 일상 생업, 오락같은 것은 금합니다.
구약시대 제도가 신약시대에 와서 바뀐 것은 안식일제도뿐만이 아닙니다. 선민의 개념이 달라졌고 죄사함 받는 방법이 달라졌고 예배의식이 달라졌으며 할례는 세례로 바뀌고 유월절 잔치는 성찬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대변화 속에서 안식일의 외형적인 면이 바뀌었대서 놀랄 건 없습니다.
그리고 안식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일이 로마가 태양신 숭배일로 정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서 안식일이 주일로 점차 바뀌어 간 것을 초대교회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고린도전서 15:20-22, 16:2;행 20:7; 계 1:10 등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게할더 보스너라는 학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안식일에 변화가 생겨 첫째날을 지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1618년에 모였던 '동트회의'에서 안식일을 지킴에 있어서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로 구별하고 제7일을 지키던 의식적 요소는 신약 기독교인을 위해 폐지되고 여전히 남아있는 도덕적 요소응 안식과 예배를 위한 확실한 날인 첫째날로 되었다"고 규정했습니다.
이제 주님 오실 때까지는 주일이 기독교인의 안식일로 지켜질 것입니다.(마 5:17-18).
48. 기독교의 십자가나 천주교의 성모상은 우상이 아닙니까?
우상이란 경배(예배)의 대상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었을 때 해당된다고 보겠습니다. 동상이나 조각들이 우상이 아니고 예술인 것은 형상을 만들어 놓았으나 예배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석굴암 석불은 예슬품도 되지만 그 앞에 절하니 우상도 됩니다. 만약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앞에서 절하는 조각가가 있다면 그에겐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교회에서 십자가를 달았다고 해서 그 십자가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며, 외적으로는 교회의 심볼마크와 같은 역할을 하니 결코 우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혹시라도 우상숭배 심리로 발절할까 염려하여 강단 이에 십자가 거는 것을 금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천주교의 마리아상에 대해서는 좀 단순치가 않군요. 천주교에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신성시하는 마리아 숭배사상이 있습니다.
평생을 동정녀로 살았다는 마리아 청정설을 믿으며 마리아에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도 마리아를 예배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그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성인을 숭배하듯이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이라면 우상화한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신교의 안목에서 볼 때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에서 우상숭배의 체취를 느끼는 것이 전혀 무리는 아닙니다.
49. 국기에 경례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닙니까?
국기에 대해서 허리를 굽혀 절한다면 우상숭배가 됩니다. 일제 때 우리 나라의 기독교가 신사참배와 국기배례를 반대하고 혹독한 시련을 겪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국민의례는 국기에 대해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국기를 향해 부동자세를 취하고 오른손을 왼편 가슴에 대는 동작으로 대신합니다. 이는 절하는 것이 아니니 1,2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우리 나라에서도 해방 직후에는 일제식으로 국기에 배례를 했던 것인데 일제와 같은 우상숭배라하여 기독교와의 충돌을 빚게 됐으니, 1949년 3월에 파주에 있는 봉일천 초등학교에서 국기 배례에 대한 거부사건이 발생해 43명의 학생이 퇴학 처분을 당했는데, 그 중 36명이 주일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전국에 파문을 일으키고 국기 배례 반대 서명운동이 전개됐으며, 교계 대표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그 부당성을 역설하고 시정을 요구하게 됐던 것입니다.
크리스챤이었던 이 대통령은 기독교계의 이 요구를 받아들여 1950년 4월 25일 국무회의에서 '묵고'를 폐지하고 '배례'의 구령을 '주목'으로 바꾸고 허리를 굽히는 대신에 오른손을 왼편 가슴 심장위에 대기로 하는 국기에 대한 예식변경을 결의했고, 퇴학 처분됐던 초등학교 학생들도 복교
조치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 나라의 국기에 대한 예식은 기독교계의 투쟁의 결과이며 주일학교 학생들이 그 선봉이 됐던 것은 실로 가상한 일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주목'이 '경례'라는 구령으로 바뀐 것이 불만스럽기는 하지만 실제로 허리를 굽혀 절하지 않은 이상 우상숭배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되며, 국가의 상징인 국기에 대해 경의를 나타내며 애국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50. 영혼이 존재합니까? 존재한다면 전생이 있었고 다시 태어나는 가요?
세상에는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나 유물론자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개라는 당파도 영혼을 부인했지요.
그러나 세상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지요. 지금 이집트 사막에 높이 솟아 있는 피라밋은 과거 이집트인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은 기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다시 돌아올 때를 기다려 미이라를 보존하는 무덤이었으니까요.
영혼불멸 사상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모든 민족의 공통점입니다. 개인적으론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는 가람들이 있지만 민족적으론 부정하는 민족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신앙도 영혼의 존재를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을 '돌아간다', '저승에 간다'하며 무당을 통해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내 억울한 사연을 듣기도 합니다. 오늘 서구에서는 '심령과학'이라는 분야가 있어 영혼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육체와 영혼의 신비한 합성체로 가르쳐 줍니다. 육체의 근원은 흙이고 영혼의 근원은 하나님임을 밝혀주기도 합니다(창 2:7). 그런데 성경에는 전생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개인 영혼의 기원에 대해서는 3가지 견해가 있는데, '선재설'이라고 해서 육체가 있기 이전에 영혼이 먼저 있었다는 주장으로, 이 설에 따르면 전생(前生)을 인정해야겠지요.
또하나는 '유전설'이라고 해서 육신을 부모로부터 받을 때 영혼도 같이 받았다는 주장이며, 마지막'창조설'은 시기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영혼을 직접 창조했다는 주장으로 가장 성경적 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불교의 윤회사상이고 기독교의 교리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마지막 육체와 부활이 있으며 악인은 지옥에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고 선인(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생을 누린다고 가르쳐 줍니다.
51. 主日에는 무슨 일이든지 하면 안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일날에 무슨 일이든지 하면 안 된다는 것은 구약시대의 율법주의적 안식일 태도입니다. 주일의 성수는 안 할 일은 안하고 해야 할 일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은 하고 어떤 일은 하지 않아야 하느냐 하면 일상 생업에 관한 일이든가 오락적인 일, 불요불급한 일, 스포츠를 즐기는 일, 직장에 나가는 일들은 하지 않아야 하고 거룩한 일, 자비를 베푸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시급한 일은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교, 성경 가르치는 일, 전도, 봉사, 병치료, 문병, 위로 등은 해야 하며 시간을 다투는 일도 해야합니다. 집이 불타고 있는데 주일이라고 진화작업을 내일로 미룰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끌 필요도 없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주일에는 무슨 일이든지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안 해도 될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주일에 가장 많은 일을 하시지만 그렇다고 주일을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52. 방언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국어에서는 방언이라 할 때는 지방말을 뜻하며, 비슷한 사투리는 표준말이 아닌 말을 뜻하게 됩니다만 학생의 질문은 성경의 방언인줄 압니다.
성서적 방언의 의미는 배우지 않은 언어를 무아지경에서 말하게 되는 영적 발설입니다. 이는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 초자연적 현상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을 사도행전 2:3-13에서 읽을수 있는데 방언의 대표적 케이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방언의 은사를 말하고 있지만 여러 은사 중 하급은 사로 치고 있으며 위험이 따르는 은사로 경계하고 있습니다(고전 14:13,23,26,28).
뿐만 아니라 사도 후론 소멸의 길을 걸어 온 은사이지만 시대적 필요에 따라 재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방언 현상들을 전적으로 부정할 이유는 없다 할지라도 어떤 종파처럼 방언이 모든 성령의 은사를 대표하는 줄 알고 방언을 못하면 성령을 못 받은 줄 아는 것은 크게 잘못된 현상입니다.
방언은 고급은사도 아닐뿐더러 그 사람의 달란트에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받을수 있는 은사도 아니고 연습해서 되거나 돈 주고 살수 있는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그리고 혹 방언 몇마디 한다고 자랑하거나 교만해지는 것은 탈선의 시작입니다.
53. 입신에 관해서 말해 주세요.
입신(入神, Ecstasy)이란 쉽게 말해서 신들린 상태로 접신(接新)이라고도 합니다. 입신은 기독교 뿐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 특히 원시종교일수록 그 경향이 강하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무교(무당종교, 샤미니즘)는 입신을 특징으로 하는 원시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입신은 의식이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정지되고 자아(自我)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며 지배 받는 상태입니다. 이같은 성서적 엑스터시는 신구약을 통해 꿈, 환상, 황청, 황홀, 열광, 환희 등 다양한 상태로 나타납니다. 구약시대의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이 이런 엑스터시 상태를 경험 했으며 스데반의 하늘 환상이나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사건과 삼층천 겨험은 대표적 신약의 엑스터시 현상입니다.
그러나 입신은 기독교 고유현상도 아니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입신현상이 전부 성령의 역사로 보기도 어려우므로 경계를 요합니다.
기독교는 입신을 강조하거나 꼭 필요한 것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기독교인이 엑스터시를 경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입신을 경험한 것이 신앙상의 우월이나 자랑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삼층천의 입신경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파하기에 전력했습니다.
요한도 밧모섬에서의 굉장한 엑스터시 경험이 있지만 그보다는 사랑을 강조해 사랑의 사도로 불리워집니다. 더구나 성경을 떠나서 입신같은 신비만을 좇는 것은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참고로 성경 밖의 기독교적 입신의 명수로는 17세기 스웨덴사람 '스위든 보그'와 19세기 인도 사람 '썬다싱'이 있습니다.
54. 은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며, 은사와는 어떻게 다릅니까?
은혜란 헬라어로 '카리스', 영어의 '그레이스'(Grace)인데, 자격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본직은 사랑이며, 하나님의 가장 큰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의 구원으로 나타났으니 그리스도와 구원은 가장 큰 하나님의 카리스입니다. 그 외에 물질적 축복이나 사소한 영적 축복들은 아주 작은 은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챤들이 흔히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때 은혜를 잘못 알고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의 경우는 세상의 육신생활과 관련지어서 병 치료나 사업의 번창, 가세의 융성, 출세, 성공 등을 가지고 은혜를 받았다고 기뻐하는데 평소에 그리스도를 주신데 대해서는 기쁨도 없고 은혜 받았다는 생각도 안 하다가 자녀가 일류대학에 입학하니까 은혜 받았다고 기뻐한대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현실적·물질적 성공은 은혜가 아닐 수도 있으니 섣불리 속단할 게 아니라 두고 봐야 합니다. 불신자가 세상에서는 더 잘되는 경우가 많고 착실하던 기독교인이 사업에 성공하여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달음질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믿음을 팔아 부귀와 명예를 샀다면 그것이 은혜이겠습니까?
또 다른 경우는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인데 설교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신령한 믿음이 더해지고 성령의 열매 맺는 방향으로 생활에 변화가 왔다면 정말 은혜를 받은 것이나, 그렇지 않고 그저 목사님의 설교가 내 맘에 들었다든가,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어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렸다든가,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며 찬송을 하고 나니 한바탕 춤을 춘 듯 마음이 후련하다든가, 오랜만에 복잡한 도시를 떠나 깊은 산에 들어오니 그 어떤 정서적 감동을 느낀 것 등을 은혜 받았다고 한다면 이곳도 잘못입니다. 실제로 어디 가서 은혜 받고 왔다는 사람들이 가정에서 또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은사는 헬라어로 '카리스마'인데, 카리스가 근본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구원'을 뜻한다면 카리스마는 구원의 은혜 받은 자들에게 그 적성에 따라 주어지는 제 2차 적인 선물이라 하겠습니다.
은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니 고린도전서 12장에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교치는 은사, 능력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 은사, 방언 은사, 방언 통역 은사가 있습니다. 또 로마서 12장에는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유하고 위로하는 일, 구제, 다스림, 긍휼을 베푸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4:11에는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가 있는데 은혜나 은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자격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 없고 오직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써야 합니다. 은혜는 3가지 방편 곧, 말씀과 기도와 성례를 통하여 나에게 오는 것이므로 평소에 말씀을 열심히 읽고 힘써 기도하며 성례에 빠짐없이 참여해야합니다.
55.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다릅니까?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무조건 주시는 선물로 고린도전서 12장에 14가지, 로마서 12장에 7가지, 에베소서 4장에 5가지, 베드로전서 4장에 2가지가 나오는데 정리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중에 사도와 선지자는 지금은 폐지는 은사이고, 그 외에 은사는 그 사람의 달란트에 따라 주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도가 생활 속에서 성령의 역사 하심을 통해 맺는 아름다운 결실인데, 갈라디아서 5:22에 기록되어 있는 9가지입니다.
성령의 열매 :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은사는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서, 여러 가지 은사를 한사람이 다 받을 수는 없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은사를 받을 수도 없는 것이며, 받은 은사를 가지고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능력 은사를 탐낼 필요 없고 봉사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신비 은사를 부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성도가 땅위에서 이룩하는 결과로서 9가지 중 어느 하나만 맺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다 결실 해야 하며 사람마다 다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는 있는 열매가 내게 없을 때는 나도 그 열매를 맺도록 탐내고 부러워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은사 못 받은 책망은 찾아보기 어려워도 열매 없음을 책망하는 말씀은 많습니다. 세례요한은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회개의 열매 맺는 일이 없으면 찍어 버리라 했고, 과수원 주인은 열매 없는 나무를 땅만 버리지 말고 파 버리라고 했으며, 주님께서는 길가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죽게 했습니다.
성도는 마땅히 은사보다 열매를 사모하고 성령의 열매 맺기 경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에 이끌림을 받지 않는 사람은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56.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받았다고 할 때 그 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의 축복관에는 두 가지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적인 복으로 구약의 신명기 28장이 대표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복으로 신약의 마태복음 5장이 대표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복으로 신약의 마태복음 5장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말하는 복은 현세적·물질적 복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이 현세적·물질적 범위를 넘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말하는 5복과 다를 것이 없고 기복사상에 중심을 둔 샤마니즘(무당종교)과 다를 게 없으므로 그것은 이미 기독교적인 복관(福觀)은 아닌 것입니다.
참다운 기독교인의 복은 물질적 복도 도외시하지는 않으면서 그것을 뛰어넘어 영적인 복에 이르러야 할 것이니 그 영적 복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물질적 복을 미련없이 버릴 수 있을 때 참다운 기독인의 복의 사상에 도달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영적 복을 위해 재산, 지위, 명예, 생명 같은 현세적·물질적 복을 선뜻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조금 낫다는 사람들은 죽어도 둘 다 못 버리겠다는 편이고, 그 중에는 어차피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차라리 영적 축복을 버리기로 결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영적인 복에는 구원과 사급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고, 상급은 그 사람의 행적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57. 십일조에 대해서 알려 주십시오.
십일조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교회의 헌금방법으로 그 유래는 아브라함 때까지 소급해 올라갑니다(창 14:20). 모세시대를 거쳐 이스라엘의 신정국가에서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로 알았으며, 말라기 선지는 십일조를 안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행위로 신랄하게 책망하면서 십일조는 물질적 축복을 받는 전제조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말 3:10)
오늘의 교역자들이 이 말씀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로 마치 십일조를 하나님의 복을 예약하는 선불로 착각하고 십일조만하면 의무를 다한 줄 알게 만든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십일조 법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폐지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고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더라도 십일조 법은 지금도 계속 유효합니다.
그러나 십일조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헌금의 표준이냐 하는 데는 이의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십일조만 하면 헌금의 의무를 다한 것이지만 신약시대에는 헌금의 최소단위가 됐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시대에는 십일조가 헌금의 상한선으로 그어져 있었지만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헌금의 하한선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십일조밖에 못 드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역자들도 십일조를 구약시대같이 의무라 표준으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은 은혜에 따라 그 이상을 드리도록 가르쳐야 합니다(고후 8:1-15). 그리고 더 큰 물질적 축복을 받기 위해 항상 감사로 드려야 함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봉급자는 수령액의 1/10을 드려야 할 것이며. 상인은 원가(구입가)를 제하고 비용을 제한 순수 이익의 1/10을 드리면 되고 농부는 생산비를 제한 이익을, 기업가는 생산비와 기타 기업 활동비를 제한 순익의 1/10을 드리면 됩니다.
교인은 그 교회에 재정문제를 분담할 의무가 있으므로 소속교회에 내야하고 타교회에 임으로 보내는 것은 옳지 않으며 공적으로 교회에 드리지 않고 사사로이 목사의 주머니에 넣어주는 것도 옳지 않고, 십일조의 용도를 지정해서 낸다든가 한 번 교회에 드린 자기 십일조를 행방을 추적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감사헌금이나 구제금 같은 것은 십일조에서 내면 안되고, 기타 교회의 부담금을 십일조에서 떼어도 안되며, 주일헌금을 십일조에 포함시키느냐 하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따라 할 일입니다. 하여튼 온전한 십일조 그 이상을 드려야 합니다.
58. 휴거에 대해 말해 주세요.
휴거란 인상(引上)이라고도 하며 공중으로 들린다. 끌어올린다는 뜻인데 주님 재림하실 때 죽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고 생존 성도들은 홀연히 변화되어 공중으로 끌어올려져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때 모든 성도가 다 휴거되지는 못합니다. 마태복음 25:1-12의 열 처녀 비유에 보면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만이 신랑을 맞게되며, 마태복음 24:40-42에는 두 여인이 맷돌을 갈되 한 사람만이 들림을 받고 한사람은 버림을 받는다고 했으니 준비한 성도만 휴거에 참여함을 알 수 있습니다.
휴거되지 못한 성도들은 지상에서 대환란을 통과하며 신앙의 연단을 받아야 하는데 소설 ≪휴거≫(E.W.앵글리저)는 그런 내용을 아주 리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질문자도 아마 그 소설을 일고 한 질문이 아니가 생각됩니다. 구약의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11)가 휴거된 사람입니다. 성경적 근거는 데살로니가전서 4:16-17인데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59. 선악과는 사과입니까?
에덴동산에는 두 그루의 신비한 나무가 있었은 하나는 그 열매를 먹고 영생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열매를 먹고 선악을 아는 '지식나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의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시되 선악과만은 금하셨는데 사단의 꼬임에 빠져 이 금령을 어기고 에덴에서 추방된 후 아담은 다시 생명나무도 지식나무도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서양에서는 이 선악과가 사과라는 통속관념이 있어 남자의 목에 볼록 나온 것을 아담이 선악과를 먹다 목에 걸린 것이라고 해서 일컬어 Adam's Apple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어떤 이단 종파에서는 선악과가 복숭아라 하여 복숭아를 먹지 않기도 했지만 모두 근거 없는 이야기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그 과실은 지금 지상에는 없고 에덴 동산에만 있었던 신비수(神秘樹)요 신비과(神秘果)였습니다.
60. 기독학생의 이성교제는 죄가 됩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이성교제라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공간, 정도, 영향 등 부대 조건들에 따라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조건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시간이라기 보다는 시기라는 말이 적절한 데 학생이란 이성교제의 시기이기보다는 공부할 시기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학생은 전혀 이성을 교제하면 안 된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그런데 시기가 문제가 되겠죠. 중학교 때야 동의할 수 없고 고등학교 2,3학년쯤이면 그런대로 어떨까요?
공간이란 조건은 어떨까요? 기독학생이 자연스럽게 교제 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은 당사자들이 발견해야 할 줄 압니다.
정도라는 문제는 더 어렵습니다. 가장 중요하구요. 기독학생의 이성교제의 상한선은 반드시 있으니까 그 선을 넘어서는 안되는 거죠. 학생이기 때문에, 기독학생이기 때문에 그 영역은 그리 넓지는 못합니다. 우정보다는 퍽 높고 성인들의 이성교제보다는 아주 낮은 어디엔가 상한선이 있을 것이니 이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분별할 능력이 없거든 교제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끝으로 영향문제인데, 이성교제의 결과가 생활에 무엇인가 건설적이고 유익한 방향으로 플러스되어야지 반대현상이라면 즉시 중단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아주시고 사람들이 좋게 봐주는 범위 안에서 기독학생답게 꽃 피우는 이성교제는 아름다운 것이지 죄 될 이유가 없습니다.
61. 구하면 주신다고 했는데 왜 기도해도 안 이루어질까요?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 본 우화를 알지요? 무슨 일이든지 부분만을 가지고는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응답 받을 수 있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전모를 파악하고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는 코끼리 다리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되도록 넓게 성구를 찾아가며 응답 받을 수 있는 기도의 전모를 먼저 파악해 보기로 합시다.
1.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요일 5:14)
2.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마21:"22;약1;6-7)
3. 순결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4.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11).
5.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 14:13).
6.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구하시느니라"(롬 8:26).
7.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한 후에 기도해야 합니다.
"서서 기도 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8. 겸손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 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대하 7:14;눅 18:10-14).
9.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눅 18:1-8)
10.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1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 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이만한 표준을 놓고 검토해서 잘못된 데가 없어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이제는 기도 응답의 유형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즉시 이루어지는 기도만이 응답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1. O형응답 : 기도하는 즉시 하나님께서 O.K하고 들어주시는 기도로 즉시 응답형입니다.
2. B형응답 :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Better) 것으로 주시는 경우니 과분 응답형입니다.
3. W형응답 : 아직 때가 안됐으니 더 기다려라(Wait)는 응답으로 지연형 응답입니다.
4. N형응답 : 하나님께서 구하는 바를 No하고 거절하시는 응답이니 거절형 응답입니다. 불응답으 로 가장 많이 오해받는 것이 이 N형인데 실은 아주 확실한 응답입니다. 사람은 미련하여 그 결과를 모르고 구하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지각이 뛰어나신 하나 님께서는 미래를 다 아시기 때문에 불행을 초래할 것은 아무리 구해도 주지 않으십 니다. 마치 어린 아들이 면도칼을 다라고 울어도 주지 않는 아버지와 같지요. 그것 은 사랑의 응답입니다.
학생의 기도가 B형이나 N형으로 응답된 것은 아닐까요? 아니라면 지금 W형으로 진행중인지 모르니 때를 기다리며 쉬지 말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62. 성경은 불가피한 거짓말을 인정합니까?
세상에는 필요악(必要惡)이라 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성경은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일시적 악의 없는 거짓말이 목전에 이익을 가져오고 선한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치의 병을 발견한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 같은 거죠. "당신은 죽습니다." 이렇게 우직한 말을 하는 의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병은 몸살 정도입니다. 아무 염려 없어요"라고 말했다면 이것도 의사의 양심은 아닙니다.
판단하기 더 어려운 경우들도 있어요. 우리 나라의 민화에 '나무꾼과 사슴'이야기가 있지요 포수에게 쫓기는 사슴을 숨겨 준 나뭇군은 뒤이어 쫓아 온 포수에게 사슴을 못 봤다고 합니다. 또 빅톨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쟈베를 경감에게 쫓기는 쟝발장을 숨겨 준 수녀는 뒤따라 온 쟈베르에게 그런 사람 못봤다고 합니다.
나뭇꾼과 수녀의 거짓말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선한 결과로 해서 거짓말이 정당화돼야 할까요? 거짓말이라는 나쁜 방법 때문에 선한 결과가 비난을 받아야 할까요? 둘다 '아니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 "거짓말은 나쁘고 숨겨준 것은 잘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수녀의 경우 거짓말이 장발장을 숨기고 쟈베르를 따돌리기 가장 손쉬운 방법일 뿐이지 유일의 방법은 아니고 더구나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해 봅시다.
(수녀) "나는 성직자입니다. 가부간에 당신의 목적에 협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경감) "못 봤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은 협조가 아닐 터인데요. 그럼 수녀원 안에 있는 게 분명하 군요."
(수녀) "그렇지 않습니다. 못 봤다고 간단히 말해 버리는 것은 그가 당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빼앗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당신의 목적에 협조하는 것이 됩니다."
이쯤 되면 쟈베르는 수녀원을 나갈 것이요 수녀는 거짓말 아닌 방법으로 쟈베르를 따돌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결과는 물론 방법도 정당해야하며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는 거짓말 한마디로 인도가 독립된다고 해도 자기는 거짓말을 안 하겠다고 했으며,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우리 나라가 망한 원인을 거짓에서 찾고 자신의 생명보다 한 어린아이와의 약속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상황에 따라 거짓말이 용인된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질문자도 혹시 그런 성경기사를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인지 모르기 때문에 몇 군데 찾아서 해명키로 하겠습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야곱이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간사하게 속여 형 에서로 부터 장자권을 빼앗은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나기 전에 벌써 장자권을 동생에게 계승시키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25:23이 그 증거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태 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큰 자는 형에서고 어린 자는 동생 야곱이며 두 국민, 두 민족은 이스라엘과 아랍민족인데 야곱의 자손이 이스라엘민족이 되어 하나님의 선민으로 뽑히고 에서의 후손은 아랍민족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것은 우리들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가만히 있어도 자기 앞으로 굴러 올 복을 공연히 잡으려고 좇아 가다가 넘어진 꼴이 됐지 결코 거짓말로 장자권을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6장에는 하나님이 이미 사울왕을 버렸으니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의 아들(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라고 할 때 사무엘이 말하길 사울이 알면 나를 죽일 터인데 어떻게 가겠느냐고 하니까 하나님 말씀이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2-3절)하셨는데, 이 말씀을 하나님이 거짓말을 종용하신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다윗에게 기름붓는 일과 제사를 드리는 일 두가지 사명을 주어서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제일 사명은 비밀에 붙이고 제이 사명만을 공적으로 드러내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이럴 경우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슷한 경우를 출애굽기 1장에서 읽을 수 있는데 애굽왕 바로는 히브리산파 십보라와 부아에게 명하기를 이스라엘 아이가 나면 여자를 살리고 남자는 죽이라고 합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시행치 않고 바로에게 보고하기를 "히브리 여인은 애굽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19-20절)했는데 잘못 읽으면 산파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산파들의 말은 '부분 진실'을 말한 것이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히브리 여인들은 건장하여 산파없이 출산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애굽왕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 2장의 라합 이야기는 앞에 말한 나뭇꾼이나 수녀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사는 기생이었습니다. 여리고는 가나안 땅을 밟은 이스라엘 민족의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여호수아는 두 명의 스파이를 이 성에 보냈는데 발각이 되어 쫓기다가 라합의 집에 숨게 됐고, 기생 라합은 두 정탐꾼을 숨긴 후에 수색 나온 여러 군일들에게 그들이 여기 왔다가 이미 도망쳤다고 말합니다. 추격자들이 돌아간 후 라합은 두 사람을 안전하게 탈출시킵니다.
이 사실을 야고보서 2:25에는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하였고, 히브리서 11:31에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 하였도다"라 했는데 라합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멸망치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두 군데 다 라합의 거짓말을 정당화한 곳은 없습니다.
야고보서에는 정탐군을 접대하고 다른 길로 안전히 보낸 행위 때문에 의롭다 했고, 히브리서에는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고 순종했기 때문에 멸망치 않았다고 말할 뿐입니다. 이 일에 거짓말이 섞이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죠.
거짓은 진리에 위배되는 허위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가치관을 상황윤리에 적용시킬 수는 없는 줄 압니다.
63. 성경은 살인을 금하고 있는데 기독청년의 입영 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에 특히 살인을 크게 죄악시합니다. 제6계명에도 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전부 살인죄로 보지 않는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는 살인자나 간음자, 부모에 불효하는 자는 현장에서 돌로 쳐죽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 사호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또 다른 살인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형제도를 인정 하셨을 뿐만 아니라 악의가 없는 과실치사에 대해서는 살인죄를 적용시키지 않았으니 오살자(誤殺者)를 위해 도피성을 두어 그 생명을 보호하셨습니다(민 35장).
뿐만 아니라 정당방위를 위한 살인도 정당화하셨으니 출애굽기 22:2-3에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했습니다. 가장은 침입하는 도적으로부터 가족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의 사명이 기도 합니다.
국가는 가정이 확대된 것입니다. 가족의 생명을 지킬 의무가 가장에게 있는 것처럼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밤에 집에 침입하는 도적을 살해해도 피 흘린 죄가 없다면 백성의 재산을 파괴하고 생명을 해하려고 침입하는 적을 살해하는 것도 피 흘린 죄가 없을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주권이라는 권세를 받았고 국가는 이 권세로 청년들을 징집해 가는 것인데 성경은 이 같은 국가의 권세에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의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를 보낸 방백에게 하라"(벧전 2:13-14).
국가가 정당방위를 위한 군사행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바이며, 여기 동원된 기독청년은 범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단 종파의 집총 거부는 오히려 비 성경적입니다.
64. 모든 일이 다 예정대로 된다면 우리의 어떤 마음가짐으로 현실을
살아가며 미래를 바라봐야 할까요?
하나님의 작정과 한사람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생애를 이끌어 가는지 정확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줄 압니다. 그것은 심오한 신지식(新知識)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한사람의 일생을 포함한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으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시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작정만 절대적으로 작용한다면 사람은 프로그램대로 작동하는 로봇에 불과하며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기계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소유한 도덕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생각과 의도를 참작하시고 노력을 인정하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8)고 하셨으니까요. 그러므로 미래를 지혜롭게 계획하고 준비해야 하며 현실 속에서 분투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일생은 하나님의 예정과 나의 자유의지의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라고 생각하고 좌우 어느 레일에서도 탈선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운전해 나아가지 바랍니다.
65. 교회에서는 왜 술을 못 먹게 합니까?
교리문제가 아니라 윤리문제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첫 이적(요 2:)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고 최후만찬 때도 음료수 대신 포도주를 마셨으니 음주를 죄악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술을 경계하는 말씀이 너무 많습니다.
에베소서 5:18에 술 취하지 말라고 했고, 디도서 2:3에는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했으며, 로마서 13:13도 술 취하지 말라 했고, 잠언 23:31-35에는 술을 보지도 말라 했으며, 민수기 2:2-3에는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술을 경계한 것은 경건 생활에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술취하면 이성이 흐려지고 자제력이 없이지며 충동적이고 난폭해지며 단정치 못합니다.
성도의 자세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은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 했습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이 술에 무절제함을 보고 선교사들이 금주를 철저한 신앙생활 윤리로 가르친 것이 우리나라 신교의 전통이 되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술 때문에 교회에 못나온다면 술 마시면서라도 나오라고 해야합니다. 급한 것은 금주가 아니라 구원이며, 음주가 구원의 배재 조건은 아니니까요. 신앙은 성장할 것이고 술은 차차 끊게 되겠지요.
66. 새벽기도는 꼭 해야 합니까?
"새벽기도를 꼭 해야 되느냐"는 물음은 "기도를 꼭 해야 하느냐"는 물음과는 다르니 안 하는 것보다는 유익하다고 권장할지언정 일반적인 기도를 말할 때처럼 꼭 해야만 된다고 까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새벽기도의 가치를 낮게 말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으며(막1:35), 다윗도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시 119:147)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1906년에 평양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시작한 이래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자 특징이 되어, 세계 교회가 부러워합니다. 한국교회는 이 아름다운 전통을 살려 더욱 새벽기도에 힘써야겠는데 한국교인의 10%만이 매일 새벽기도에 참여한다는 통계가 있고, 도시의 대형교회일수록 새벽기도를 등한시하고 있다는 것은 서구교회를 닮아 갈까봐 걱정이 됩니다.
그렇다고 새벽기도를 신앙의 시금석으로 안다든 가 모든 기도를 대표하는 기도로 안다든 가 새벽기도만이 하나님의 응답을 보장받는 줄 아는 것은 잘못입니다. 새벽기도도 중요하지만 그날 하루를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를 모르는 서구에 훌륭한 신자들도 다 많고, 실력 있는 교회들도 더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벽이라는 시간이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므로 이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주 좋은 신앙태도니 새벽기도가 신앙생활에 꼭 필요하냐고 하기 전에 새벽기도를 모르는 신자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새벽기도를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것은 새벽에 목욕하고 산신령에게 비는 샤마니즘의 체취가 풍기는 것같이 유쾌하지 못합니다. 기도에는 시간적·공간적 성역이 따로 있다고 볼 수는 없는 줄 압니다.
67. 목사님과 장로님은 성경대로 사시는지요? 성경대로 못살아도 천당가나요?
아무리 믿음이 깊어도 성경말씀대로 조금도 어김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고 할 것이니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라도 성경대로 산다고는 말할 수 없고 그대신 성경대로 살려고 애쓴다고 해야겠지요. 그러므로 율법으로 구원 얻을 육체는 하나도 없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천국 갈 수는 있으니 구원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얻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생활실적을 보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을 때 예수께서 그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공로를 보고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대로 생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잘 지키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담보 없이 돈을 빌려주었으니 떼어먹어도 된다는 법은 있을 수 없고, 너무 고마워서 더욱 신용을 잘 지키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도 장로님도 성경말씀에 비추어 흠 없이 살지는 못하지만 일반 평신도보다는 나을 것이나 주님의 공로로 천당 가는 것은 평신도와 마찬가지입니다.
68.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대로라면 가룟유다가 왜 형벌을 받아야 하나요?
예수께서 은 30에 팔려 죄인의 손에 넘겨질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구속사의 성취과정의 일부요, 이미 구약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바입니다. 가룟유다가 하나님의 작정하신 길에 동원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유다가 하나님의 원격조정을 받은 로봇이 아니고 자유의지와 도덕성을 가진 인간이었던 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도덕적 피조물은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곤란을 느끼는 것은 인간 이성의 유한성 때문일 뿐 하나님의 지혜는 자신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서로 침해함이 없이 조화를 이루어 일하심을 믿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마 26:24)했는데, '기록된 대로 간다'는 뜻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이루어짐을 말하고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는 말은 인간의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뜻입니다.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시나리오 라이터와 배우의 관계와는 다릅니다.
69. 악한 사람도 잘 사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못 살까요?
어떻게 사는 것을 잘 산다고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봅시다. 흔히는 재물에 표준을 두어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살면 잘 산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자신의 영리밖에 모르는 중소기업 사장이 근로자의 임금을 착취하고 사기, 횡령, 탈세를 마구 자행해서 돈을 모아 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100평 아파트에 사는 것은 잘 사는 것이고, 청렴 결백한 관리가 고결한 인격과 양심을 가지고 13평 아파트에 살면서 버스로 출근하는 것은 못사는 것일까요? 그런 표준에서 보면 예수는 못살고 실패한 사람이요 마치아단 두목은 아주 잘 살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말합니다.
부분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사람이 잘살았다 못살았다 하는 판정은 그 사람의 일생을 놓고 평가해야지 어느 한때나 중간 결산 가지고는 알지 못합니다. 오늘 잘 사는 사람이 내일 망할 수도 있고, 오늘은 못사는 사람이 내일은 잘 살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6:24-25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최후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라고 합니다.
달리는 경기들은 일등으로 출발한 선수에게 승리의 영예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일등으로 골인한 선수에게 우승의 영광을 안겨 줍니다.
내일은 반드시 이 지상의 날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골인점은 이 땅 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 24:1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찌어다."
70. 기독교인들이 먹어서는 안될 음식이 있습니까?
구약시대에는 율법으로 금하는 식물들이 많았습니다. 짐승 중에는 새김질을 하지 않거나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못 먹고 물고기 중에는 비늘이 없는 것, 지느러미가 없는 것, 곤충 중에는 날개가 있으면서 두 발로 기어다니는 것은 못 먹으며, 새의 종류 중에는 독수리, 솔개, 어응, 매, 까마귀, 타조, 올빼미 등은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레 11:1-23).
구약의 율법이 전부 다 현재 우리의 생활에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을 규정한 '시민법'이나 제사제도를 규정한 '의식법'은 지금 우리는 지키지 않아도 되고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만을 지키므로 구약이 금한 식물을 먹어도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특별히 금한 식물은 없습니다. 단, 우상의 제물이 문제가 되는데 식물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라 우상에 드려졌기 때문에 부정해진 것이므로 모르고 먹을 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의 제물이 확실하면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루살렘회의의 결정도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멀리하도록 결정했고, 바울도 우상의 집에서 우상의 교도들과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없다고 했고(고전 10:14-22),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나 청함을 받은 집에서 나오는 음식은 구태여 우상의 제물인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으며(고전 10:25), 우상의 제물인 표식이 뚜렷하거나 누가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 할 때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고전 10:27-28).
71. 교회에는 의인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왜 싸웁니까?
교회에는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반대로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주장해도 교인들은 자기가 죄인임을 솔직히 고백한다는 면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롬 3:10). 크리스챤을 성도(聖徒)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께 부름 받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며 거룩하지 못합니다. 교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혈기도 나오고 의견의 대립도 생깁니다. 인간의 모든 약점을 다 가지고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며 주금씩 거룩하져 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또 유형교회라고 말하는 개 교회들은 가짜 기독교인인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십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기꾼도 있을 수 있고 절도범도 있을 수 있으며 위선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도 싸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유형교회의 분쟁을 보든지 그 구성원들의 결점을 봐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를 판 것은 12제자 중에 한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 일 때문에 교회 나갈 생각이 없어졌다면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교회에 나가야지 사람을 바라보고 나가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 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가정을 사랑하는 알뜰 주부는 폐품도 버리지 않고 재생해서 사용하듯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폐품 같은 분쟁도 하나님의 교회 확장에 이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분쟁을 통해 새 교회가 설립된 경우도 상당히 있답니다. 바울도 빌립보서에 쓰길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1:15),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1:17),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다툼과 분쟁은 없어야 하지만 있다고 해서 실망 할 필요는 없습니다.
72. 어떤 교회에서는 가요라든가 팝송을 부르는데 이단이 아닙니까?
어느 시간에 가요나 팝송을 불렀는지가 문제일 것 같습니다. 설마 예배시간에 찬송가 대신에 가요를 부르는 교회는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혹시 교회 안에서 청년회나 학생회 같은 기관이 줄 일이 아닌 날 교육관 같은데서 친목회나 친교모임 같은 회합에서 가요나 팝송을 부르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그럴 경우는 이단 운운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가사가 없는 경음악으로 연주됐다면 또 다릅니다. 우리의 찬송가 안에는 외국의 민요나 가곡 중에 곡만 채용된 것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는 우리 민요 아리랑 곡이 찬송가에 편입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차 대전 때 일제에 의해 징병으로 남양군도에 끌려간 우리 나라의 청년들이 향수를 달래며 부르는 아리랑 곡이 너무 좋아 그 곡에 찬송가 가사를 붙여 부르기 시작한 때문이죠.
어쨌든 상황을 자세히 모르니 무어라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교회에서 가요나 팝송이 나왔다고 단으로 성급히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예배 시간에 가사까지 그대로 가요나 팝송을 불러 찬송가를 대신하는 교회가 있다면 이단이 되고도 남습니다.
73. 교회에서 말하는 학습, 세례, 유아세례, 입교는 어떻게 다르며 그 자격은?
학습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여 6 개월된 사람에게 당회가 학습문답을 한 후 서약을 거쳐 교회 앞에 공포하는데 아작 완전한 교인이 아니고 완전한 교인이 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므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고 성찬에도 참석하지 못합니다.
세례는 학습을 받은 후에 6개월간 신앙생활을 잘 한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당회 앞에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문답을 거친 후여 세례를 받고 교회 앞에 공포함으로서 세례교인이 되는데 비로소 완전한 교인이 되어 성찬에 참여 할 수 있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으며, 교인의 의무다 감당해야 하며, 공동의회 회원이 됩니다.
유아세례는 출생 2년 미만 된 어린아이에게 베푸는 세례로 양친 중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그 아이를 하나님 말씀 안에서 책임지고 키우기로 약속하고 부모가 대신 문답하고 세례는 아이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교파도 있습니다.
입교는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 만 15살이 됐을 때 입교 문답을 하고 세례는 다시 베풀지 않으며 세례 받은 자격과 동등한 교인으로 공포됩니다. 이렇게 세례나 입교를 통하여 완전한 교인이 된 것을 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상은 장로교 합동측 헌법에 기준한 것입니다.)
74. 교회는 왜 세금을 내지 않습니까?
교회는 비영리 단체이기 때문에 세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법인세법 1조에 규정하길 민법(32조) 등에 의해 규정된 비영리법인은 납세의 의무가 없으나, 단 비영리 법인이라도 별도 사업을 해서는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다고 돼 있습니다.
교회는 민법 32조에 규정한 비영리법인이므로 원칙적으로 납세의 의무를 지지 않습니다. 교회뿐 아니라 성당, 사찰, 기타 다른 종교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교회라도 만일 다른 사업을 경영하여 소득을 얻었다면(그럴 리야 없지만)그것에 대한 법인세는 납부해야 합니다.
75. 교회의 헌금은 어떻게 쓰입니까?
교회에 드리는 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여집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모든 일들로 교회의 구성원들을 통해 수행되는데 여기에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됩니다.
교회 예산지출에 가장 큰비용을 차지하는 것이 인건비로 교역자들의 사례금과 종사원들의 급료입니다. 그 외에 각종 교회학교의 교육비, 도서비, 행사비, 선교비, 건축비, 건물유지비, 비품비, 공공요금, 구제비, 친교비 등등 지출항목이 아주 많습니다. 어떻게 쓰여지든 궁극적으로는 교회유지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여지는 것입니다.
교회 헌금이 쓰이는 항목은 대개 어느 교회나 비슷합니다.
1. 예배를 위한 경비
담임교역자 사례비, 부목사 사례비, 성가지휘자 사례비, 반주자 사례비, 성가대 유지비, 성례비등
2. 교육을 위한 경비
교육전도사 사례비, 교육비 등
3. 전도신앙비
여전도사 사례비, 새신자 관리비, 선교비, 전도지 인쇄비 등
4. 봉사 친교비
경조비, 구제비, 친교비, 접대비 등
5. 차량 운영비
기사 급료, 보험료, 수리비, 유류대 등
6. 절기 행사비
어버이주일, 어린이주일, 부활절, 성탄절, 추수감사절, 노회 경비 등
7. 관리 유지비
사찰 급료, 교회 수리비, 사택 관리비, 비품비, 연료비, 소모품비, 광열비, 청소비, 교통비,
방범비, 사무비, 전화료, 상·하수도료 등
8. 기 타
상회비, 인쇄비, 예비비 등
76. 교회와 정치는 어떤 관계입니까? 카톨릭과 일부 기독교 단체가 정치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적극적 자세로 대처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되는데요?
역사적으로 카톨릭은 정치에 깊이 관여해 왔습니다. 중세 교화의 전성기에는(1073-1301년)교황이 국왕을 지배했으니 그레고리 7세가 독일왕 헨리 4세의 무릎을 꿇게 '카놋사의 굴욕'은 서양역사에 유명한 사건입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교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왕의 왕이기 때문에 왕을 심판할 수 있다고 하며 영국왕을 굴복시키고 프랑스 헨리 2세의 가정문제에까지 관여하여 이혼한 왕비와 재결합 시키는 등 막강한 교황권을 휘둘러 왕권과 교황권 사이에 충돌이 잦고 카톨릭이 부패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교황권과 부패에 반기를 든 프로테스탄트는 자연히 정치와는 간격을 두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와 전통 때문에 오늘날에도 카톨릭은 국가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신교는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심각한 진리의 문제가 아닌 한 관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일단 비상한 사태에서는 신교도 현실참여에 주저하지 않으니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는 구교보다는 신교가 앞장섰고, 3·1운동 당시 33인 중에는 목사 12명을 포함하여 기독교인이 15명이나 됐지만 신부는 한 사람도 었었습니다.
최근의 단군 신전 건립 반대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도 구교보다는 신교였습니다. 다만 교회의 본분이 영혼 구원이기 때문에 사회개혁이나 체제개혁을 앞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치 상황에나 사회현실에 너무 무감각해도 안되겠지만 과민반응을 보여 크고 작은 일에 일일이 관여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77. 교회 종탑 위에 왜 피뢰침을 세웁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십니다. 섭리란 쉽게 말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관리인데, 하나님께서 지은 신 법칙에 준해서 관리하십니다. 그것은 제 2원인이라고 말하는 자연법칙입니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때로는 제2원인을 통하지 않은 비상섭리를 하시는데, 이것을 '기적'또는 '이적'이라고 부릅니다. 이적은 일반적 현상은 아닙니다.
제2원인을 통한 섭리를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챤도 이 법칙에 순응하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자연법칙이나 천재지변에서 치외법권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일은 없습니다. 교회는 하늘나라 대사관은 아니고 교인들 역시 대사관 직원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전장에서 신자도 총에 맞아 죽으면 신자도 교통사고 나면 다치고 교회도 불나면 타고 부실 공사를 하면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신자도 전투에 나갈 때는 철모를 써야하고 길에 다닐 때는 교통질서를 잘 지켜야하며, 교회도 소방법에 준한 방화시설을 갖춰야 하고 피뢰침도 세우는 겁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의 가족은 법을 더 잘 지켜야 되고 대통령 차라도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벌금을 내야합니다.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니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 된 신자들은 불신자보다도 하나님의 법칙을 더 잘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 까지도 굶으면 배고프고 맞으면 아팠으니까요. 교회는 개인 집 보다 크니 화재 위험이 더 크므로 방화시설을 철저히 하고 교회는 주위 건물보다 높으니 낙뢰에 맞을 위험이 더 많으므로 반드시 피뢰침을 설치해야 합니다. 이는 불신이나 기독교의 어떤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경건 생활의 연장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굉장한 특권이 있기 때문에 믿습니다.
벼락이나 교통사고에서 보호받는 정도가 아니라 영생과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엄청난 특권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연법칙에서 치외법권을 누리는 특권은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78. 목사는 어떤 사람이 됩니까?
구약에서는 레위지파를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그 후손들만이 제사장이 되고 성전 일을 맡도록 하셨습니다. 오늘의 목사는 그런 혈통이나 문벌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 예정을 입어 성역(聖役)에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 됩니다. 외형적으로 성경적 자격과 법적 자격이 있습니다.
성경적 자격은 디모데전서 3:1-7에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의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했습니다.
장로교 헌법(합동측)의 법적 자격을 위의 성경적 자격에 해당되는 자로서 만 27세가 넘은 남자여야하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 총회에서 실시하는 강도사고시에 합격하고 일년간 실습기간을 거친 후 소속 노회가 실시하는 목사고시에 합격한 후 노회에서 인수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목사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79. 왜 여목사는 없습니까? 기독교는 남녀 평등이 아닙니까?
우리가 평등이라고 말 할 때는 '법 앞에 평등' '인격적 평등'을 의미하지 위치나 직책의 평등, 대우의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 줄 압니다. 선거에서 대통령도 한 표 찍고 나도 한표 찍는 평등이지 나도 국무위원회를 주재하며 외국사절을 접견하는 평등은 아닙니다. 한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는 위치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도 그것을 불평등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남녀의 위치와 직책에 다름이 있다고 불평등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과 여를 창조하실 때 신체 구조뿐만 아니라 그 사명도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남자는 아기를 낳을 수 없고 여자는 중노동에 적합치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으셨다고 합니다(창 2:18). 이런 여성의 지위가 범죄 후에 다시 한 번 약화되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선언됩니다.
이런 창조원칙에 입각해 바울은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았다"(고전 11:9)하며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34-35)했고, 장로교 헌법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여장로나 여목사 제도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리교회에는 여장로와 여목사 제도가 있으며 장로교도 일각에서는 이를 요구하는 소리가 있으니 헌법이 재정된다면 장로교도 여목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목사가 있거나 없거나 남녀가 다 하나님 앞에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임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80. 신부님은 독신인데 목사님은 왜 결혼을 합니까?
하나의 전통이라고 할까요? 구교의 신부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제도화됐으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수녀 카테리나 폰보라와 결혼하여 모범을 보였으나 결혼하기 위해 종교개혁을 했다는 오해도 받았지요. 성직자가 독신이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 디모데전서 3:1-7에 감독의 자격에 보면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집을 다스리고 자녀들로 하여금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여 오히려 결혼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잘하는 것이나 이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따라 할 것이고(마 19:12;고전7:7) 독신으로 범죄하는 것보다는 결혼하여 범죄치 않는 것이 낫다고 했으며(고전 7:) 하나님도 일남일녀가 가정을 이루는 것을 아름답게 보십니다(창 2:18). 그러므로 결혼 안하는 것도 잘하는 것이되 결혼해도 잘못하는 것이 아니니 성직자가 독신이라고 더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금욕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중세기 금욕주의나 은둔주의의 연장으로서 잘못된 생각입니다.
81. 사람은 죽어서 천당 아니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그 외에 다른 곳은
없습니까?
천주교 입장과 개신교 입장에 따라 대답이 달라집니다. 천주교에서는 천당과 지옥 외에도 연옥, 선조림보, 유아림보가 있다고 합니다. 연옥은 천당 갈 자격은 모자라고 지옥 보내기에는 아까운 영혼들이 임시로 거처하며 일정기간 수련하는 곳으로, 이곳에 체류기간은 교황이나 가족 등 살아있는 사람의 기도나 공력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면죄부 판매도 이런 교리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선조림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 선조 들의 영혼이 머문 곳이라고 하며, 유아림보는 어려서 죽은 영혼들이 가는 곳으로 천국같은 기쁨도 없고 지옥같은 고통도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교에서는 이런 중간기 처소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음과 동시에 영혼의 운명은 고정되어 천당 아니면 지옥에 가며, 그들의 운명은 산 사람의 기도나 무엇으로도 변경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적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음부'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나 내세의 중간기 처소를 의미하지 않고 만약 이 말이 처소를 뜻할 때는 지옥이나 무덤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당과 지옥 말고 다른 곳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82. 사랑이신 하나님이 왜 정신박약아나 백치를 나게 하며 그들의 사후는
어떻게 됩니까?
사람은 가시적(可視的)인 이 세계 안에서도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세계에는 현대과학이 해답을 주지 못하는 7대 불가사이가 있는가 하면, E.T는 과영 있는지, U.F.O의 정체는 무엇인지, 블랙홀은 정말 있는지, 이런 것들도 아직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지식이란 태평양이라는 하나님 지혜의 대해(大海)에서 떠낸 한 컵 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해양탐구를 하려면 바다에 나가야지 컵에 물을 떠놓고는 못합니다. 백치의 출생과 사후문제는 가시적인 세계에 속한 문제가 아니고 신적 지혜의 대양에서 이루어진 일이니 컵 안의 물 같은 인간의 지혜 가지고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쉽게 판단했지만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이나 앉은뱅이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구자들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녀의 불구출생이 부모에게 책임이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알콜중독이나 약물 남용, 공해, 성병같은 것이 원인이 되어 기형아가 출생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러므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불구로 태어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고 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몸에 휘발유룰 뿌리고 분신 자살하는 것이나 강물에 투신 자살하는 것까지 하나님의 책임 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사후도 하나님만이 이시겠지요.
83. 아담은 배꼽이 있었습니까?
흥미 있는 토론 소재는 될 수 있어도 신앙에는 별 유익이 없는 문제군요. 소에게 무엇을 먹이는 것이 좋으냐는 토론을 하다가 소를 굶겨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제저 러시아가 볼세비키 혁명으로 몰락하지 직전에 러시아의 성직자들은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설 수 있느냐는 토론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실제적이 면에서 아무 유익이 없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발사된 문제들로 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 문제 떄문에 실제로 몹시 고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중세 화가들이었는데 아담과 이브를 그릴 때 배꼽을 그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된 거죠. 어떤 화가들은 아담을 모태에서 나지 않았으니까 배꼽은 없었을 것이라고 교황청의 눈치를 보면서 없게 그렸고, 어떤 화가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창조하셨으니 배꼽도 있었을 것이라고 있게 그렸어요. 그러나 아주 현명한 화가들은 배꼽자리를 나뭇잎이나 긴 머리카락 같은 것으로 살짝 가리워 놓는 방법을 썼지요. 잘 못하면 종교 재판을 받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피하자는 안전제일주의였어요.
나도 이 물음에 대해 "글쎄요?" 라는 나뭇잎을 아담의 배꼽자리에 놓기로 하겠습니다.
84. 세계는 왜 종말이 와야 합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악을 벌하시고 의를 보상하시는 공명정대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죄를 방관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의 범죄 후 사단의 지배에 들어가 죄악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 더럽혀진 이 지구에 물로 대청소를 실시하셨지만 죄는 너무 지독한 것이어서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다시 번식하기 시작하여 다시 이 땅위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근본적으로 죄를 소멸시키기 위해 불로 청소할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날(D-DAY)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베드로후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개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3:12-13)
'새 땅'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21징에 기록돼 있는데 너무 길어 인용하지 않으니 직접 성경을 읽기 바랍니다.
85. 천년왕국에 대해서 말해 주십시오.
세상 끝에 가서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왕국이 1000년 동안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며 요한계시록 20장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반드시 숫자상으로 천년이라기보다 천년을 전후한 일정기간으로 보겠습니다.
천년설에는 3가지 견해가 있는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며 교파에 따라 개인에 따라 생각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첫째 '천년기전 재림론'으로 흔히 전천년설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먼저 재림하셔서 1000년간 왕 노릇 한다는 견해로 선 재림 후 천년왕국이 이룩된다는 이 설에 따르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왕 노릇 한다고 합니다.
둘째는 '천년기후 재림론'으로 후천년설이라고 하는데 먼저 이 땅이 전 인류가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황금시대가 1000년간 계속된 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설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선행하고 천년왕국이 뒤따르는 천년기전 재림론과는 반대입장입니다.
셋째로 '무천년기설'또는 무천년설은 천년기를 부정하며,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을 신약시대로 봅니다. 후천년기 재림론 입자에서 보면 예수 재림은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고 무천년설에 따르면 내일이라도 재림할 수 있다고 봐야합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적 전통은 '역사적 전천년기 재림론'으로 천년기전 대환란 후에 주께서 재림하신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86. 천국에 가면 먼저 간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습니까?
물론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만이 아니라 지옥에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부자는 천국에 잇는 나사로를 당장 알아봤고, 변화산상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베드로는 금방 알아봤습니다.
천국에 먼저 간 부모나 형제, 친구는 몰론 성경의 위인들과도 만나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학생상이 '에스더'였다고 말해보십시오. 에스더는 기뻐할 것입니다.
'이 세상 작별한 성도들/하늘에 올라가 만날 때/인간의 괴롬이 끝나고/이별의 눈물이 없겠네'(찬송가 291장 3절)
장례식에서 많이 부르는 찬송입니다. 만약 천국 가서도 서로 알아볼 수 없다면 만나는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별의 눈물이 없겠습니까? 천국에서도 지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유하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육체를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물리법칙에 제한을 받는 이 지상에서의 육체와는 다른 신비스러운 육체입니다.
87. 천국에는 언어가 있습니까? 있다면 어느 나라 말입니까?
천국에도 언어는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이라 했는데 '천사의 말'이 바로 천국언어가 아닐까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눅 16:19-31)에서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도 천국언어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혹 히브리말이 아니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는 증거는 없으며 만약 천국어가 어느 특정 민족의 언어라면 천국에서도 통역관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아마도 천국의 공용어는 세상의 어느 나라 말이 아닌 천국 고유어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말은 세상에서의 외국어처럼 단어장이나 카세트 테이프로 공부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언어 일 것입니다. 또한 반드시 공기를 파동하고 전달되어 청신경을 통해서 알아지는 그런 언어는 아닐 것 같고 세상에서도 이심전심이 있듯 영과 영 사이에 어떤 주파수 같은 것을 통해서 전달되는 그런 언어, 막대한 불량과 심오한 뜻을 한마디 단어로 순식간에 상대편의 심중에 쏟아 부을 수 있는 그러한 언어, 그러면서도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음악같이 아름다운 언어, 원하면 대화자 외에는 들을 수 없게도 말 할 수 있는 그런 신비스러운 언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천국에는 언어뿐 아니라 문자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1에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88. 80세에 죽은 사람은 부활 때에 몇살 때의 모습일까요?
사람이 태어나고 늙어 가며 죽는 것은 시간 속에서 생기는 상태 변화입니다.
시간은 현세적인 것이며 지구적인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말하길 외계여행을 하다 돌아오면 그 동안 지구에서는 몇 배의 긴 시간이 흘러 간 것을 알게 되며, 광속과 같은 속도로 날을 수 있다면 늙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는 성경말씀의 과학적 증명이라고 할까요. 영적인 세계는 탈 지구적인 세계가 아니라 탈 우주(脫宇宙)적인 세계니 시간에 구애받지 않을 것은 당연하고 시간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늘음이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십을 살았든 구십을 살았든 부활할 때는 허리 꼬부라지고 주름살 투성이의 쇠약한 늙은이 모습이 아니라 가장 아름답고 혈기왕성한 본연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명 본연의 모습이요, 감격적인 본체 그대로의 모습일 것인데 그렇다고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물이 얼음이 되고 수증기가 되는 것은 온도에 따를 상태변화로 북극에 나서 생전 얼음밖에 못 본 사람이 있다면 유연하게 흐르는 강과 출렁거리는 바다를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 출생하고 시간 속에서 살아온 우리들로서는 시간 밖에서 나이 모습이 상상되지가 않지만 얼음의 본질이 물이듯 그것이 나의 본질 자아(自我)의 본체(本體)인 것입니다.
89. 천국은 정말 존재하는지요? 존재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천국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현세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 할 수 있겠습니다. 전자는 예수의 복음 선포와 함께 시작되어 지금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이니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하신 그 하늘 나라입니다.
후자는 미래적 하나님 나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인데 장차 우리가 갈곳입니다. 이는 막연한 환상이 아닐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세계냐 하는 물음에 답하기는 어렵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하리 만치 아름답고 행복하고 즐거운 세계인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천국의 아름다움을 요한계시록 21장에 가능한 한 인간적 표현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성곽의 기초석은 첫째는 벽옥, 둘째는 남보석, 셋째는 옥수, 넷째 녹보석, 다섯째 홍마노, 여섯째 홍보석, 일곱째 황옥, 여덟째 녹옥, 아홉째 담황옥, 열째 비취옥, 열한째 청옥, 열두째 자정 등 보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벽돌은 수정같이 맑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12개의 진주문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대리석으로 지은 집만 봐도 아름답다고 감탄하는데 온 도시가 전부 보석으로 건설된 그런 세계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기에는 저주가 없고, 수고가 없고, 궁핍이 없고, 질병·고통·눈물·죽음이 없으며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가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과실을 맺는다고 합니다(계 22:1-2). 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세계에는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밝게 빛나고 있어 밤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세계는 없어도 있다고 믿고 싶은데 예수님이 보증하시고 하나님이 보여주셨는데(사도 요한에게), 왜 의심하겠습니까? 천국에 관하여 좀더 알고 싶으면 요한계시록 21-22장을 읽고 J.E. 졸러 박사의 ≪천국론≫(HEAVEN)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90. 최후심판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세상 끝 날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성적·도덕적 피조물인 모든 인류와 타락한 천사인 마귀를 심판하여 영원한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을 '최후의 심판'혹은 '대심판'이라고 합니다.
그 시기에 대하여는 하나님밖에는 모릅니다. 이는 준엄한 하나님의 우주적 법정으로 재판장은 재림하신 예수시고 천사들이 보조하게 됩니다. 이 법정에는 당시에 살아 있는 사람은 물론 이미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여 심판대에 서고 마귀들도 피고로 등청하게 됩니다. 이 재판에서는 행위는 물론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와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과 의도까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로마서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니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4:10-12)하였습니다.
최후 심판의 결과 의인은 천국의 영생복락에 들어가고 악인은 지옥의 영벌에 들어가는데 여기서 의인이라 함은 세상에서 자기 행위에다 기준을 둔 판단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된(칭의) 사람을 말하며 악인이란 예수를 영접치 않고 그의 구주되심을 부정한 사람들입니다. 의인들에게는 최후 심판이 두려운 사건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일이니 자기의 행함에 따른 상이 베풀어지는 때이기 때문이며 악인들에게는 심히 두려운 사건이니 영원한 지옥 형벌이 선고되는 마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 우라"(계 6:16) 할 것입니다.
91. 썩어서 없어진 몸이 어떻게 육체적으로 부활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납득이 안 간다고 해서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부활이란 본래 인간의 이성적 산물이 아니니까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모래 한 알 만들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애 우주와 그 안에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어떻게 인간적 표준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적 측면에서도 부활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은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고 했는데 그것도 과학적 표현은 아닙니다. 열역학 제일법칙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은 상태의 변화는 해도 절대로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에너지 보존법칙, 아인쉬타인은 에너지와 물질은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함).
사람의 시체가 썩는 것도 신체를 구성하고 있던 물질이 근본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이 분자 구성에 와해되어 단백질을 구성하고 있던 원소 C.H.O.N.S로 분해되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분해됐던 원소들이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에 의해 다시 결합될 때 그 전의 육체를 다시 형성하리라고 생각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활은 과학적으로 이해할 사건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신비와 기적입니다.
창세기 1:1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창조란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것이고 부활은 있었던 것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이니 어느 것이 더 어렵겠습니까? 없는 것을 있게(창조)하신 하나님이 있던 것을 다시 있게 하지(부활) 못하겠습니까?
92. 예수 부활의 이론적(논리적)증거를 듣고 싶습니다.
먼저 내증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적 증거를 말하고, 다음에 외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를 논한 다음에 과학(자연)이 시사하는 가능성을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1. 제자들이 목격했습니다.
신약에는 여섯 군데나 제자들(바울 포함)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기록돼 있습니다. 도마 같은 의심꾸러기 제자는 직접 상처를 확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입니다. 현장에 없었던 10사람의 말이 목격자 한 사람의 말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건이 나면 수사진은 혈안이 되어 목격자를 찾는 게 아닙니까. 10여명 목격자의 증언을 오늘 누가 뒤엎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주님의 제자들이 모두 사기꾼이 아니면 정신병자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2. 군중이 목격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6에 말하길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했는데 이 얼마나 완전무결한 실증입니까. 바울이 이 글을 쓴 때는 A.D. 57년경으로 예수 부활 후 24년이므로 예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 아직도 태반(250명 이상)이나 살아 있는 때인데 바울이 사실 아닌 것을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이 주님의 부활을 실체가 아니라고, 군주중이 환상을 본 것이라고 '환상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비과학적인 억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까지 40일간 한사람에서 오백여 군중에 이르기까지 10회나 나타나셨는데, 이것이 과연 환상일 수 있을까요? 환상은 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어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환상을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환상은 마음속으로 그리되길 바랄 때 일어나는데 제자들까지도 예수의 부활을 의심할 때 나타났으며, 도마는 만져보고 확인했는데 환상이란 시각적 현상이지 촉각적 현상은 아닙니다.
3. 빈 무덤이 증거 합니다.
여인들이나 베드로가 갔을 때 주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부활설을 파괴하려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합리적 설명을 시도하는데 한 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제자들이 주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제사장과 장로들이 백성을 기만하고 메시아를 죽인 과오를 은폐하기 위해서 무덤을 지키던 로마병정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고의적으로 조작하여 유포시긴 낭설입니다(마 28:11-15). 시체를 도적 맞을 만큼 당시 로마군인은 그렇게 얼빠진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까지도 여종을 두려워하여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친 마당에 로마군인이 파수 보는 곳에 가서 시체를 훔칠 만큼 용감한 제자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시체가 노천에 방치돼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굴속에 장사되고 그 굴 문은 큰돌로 막혔으며 그 앞에 한 소대쯤의 로마군인이 창검을 빗겨들고 지키고 있었으니 훔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둘째, 밤에 제자들 몰래 제사장이나 로마 정부가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제자들이 부활을 설교하고 하루에 3,000명씩 회개해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날 때 왜 시체를 가져다 공개하지 못했을까요? 그렇게 했으면 제자들은 치명적 타격을 입고 군중의 돌에 맞아 죽을 터인데….
셋째, '기절설'로 예수님이 졸도했다가 깨어나 도망쳤다는 주장인데, 이런 주장은 당시엔 없었고 1700여 년 후에 만들어낸 이야기로 완전한 넌센스로 반박할 흥미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 없는 시체가 썩듯이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기독교도 이 땅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을 것인데, 오늘날 세계에 널리 전파된 사실을 부활이 거짓이 아니라는 가장 강력한 역사적 실증입니다. 또 유대인이 생명처럼 지켜온 제6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된 사건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 부활 같은 중대 사건이 없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기독교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당신도 예수당이 아니냐는 한 여종의 말에도 떨며 도망치던 베드로가 예루살렘 광장에서 단번에 3,000명을 회개시키며 공갈 협박하는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들에게 내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너희들이 판단하라고 말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 교회의 초석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또한 기독교인을 잡아죽이려고 대제사장의 영장을 들고 살기 등등하게 다메섹으로 내려가던 사울이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군이 되어 기독교 세계화에 초석을 놓은 것 등은 예수의 부활 확신이 없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 부활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5-38에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희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나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밀 알이 썩은 후에야 새로운 밀이 나온 것을 보고도 사람의 육체가 썩은 후에 새 부활체가 되는 것을 왜 의심하느냐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자연에는 부활을 시사하는 현상이 많습니다. 겨울에 죽은 듯하던 나무가 봄에 다시 잎이 피고 꽃피는 것이라든가 애벌레와, 번데기, 나방으로 변하는 곤충의 3생이 그것입니다.
바울은 이 부활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3에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93. 성경에는 뱀이 흙을 먹고 산 다고 했는데 사실을 그렇지 않은데요?
창세기 3:14-15에 보면 아담이 범죄 후 하와를 꼬여 범죄 하게 한 뱀에게 먼저 저주가 선포되는데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했습니다. 오늘의 뱀은 흙을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개구리 같은 육식을 합니다. 그러면 뱀도 식생활 개선을 한 것일까요?
"흙을 먹을지니라"라는 말의 뜻은 반드시 흙을 식물(食物)로 삼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그런 짓을 하면 욕먹는다'할 때 욕이 식물이라는 뜻은 아니며, '불장난하면 연기를 먹는다'할 때 연기가 식물이 된다는 뜻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4절에 흙을 먹는다는 뜻은 저주를 받아 극히 낮아질 것을 말합니다. '그런 재주가 있으면 왜 흙을 밟고 다니느냐' 든 가 "흙을 베고 잔다"할 때도 흙은 낮은 신분을 의미하는 것과 같지요. 시편 72:9이나 미가 7:17, 이사야 49:23을 읽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흙이 식물은 아니라 해도 뱀이 배로 흙 위를 기어다니다 보면 흙먼지가 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94. 노아 홍수는 역사적 사실입니까?
노아 홍수의 역사성 시비는 창조론 시비에 버금가는 논제로 만인이 수긍할 만큼 과학적 증명도 어렵거니와 부정은 더욱 어려우니 더 구체적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과학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운 사정 몇 가지만을 나열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1. 사실적 문체
신화는 이야기 진행에 있어 시간과 장소를 밝히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홍수의 기록을 보면 노아가 480세 때 경고를 받았고 120년간 방주를 지었으며 600세 때 40주야로 비가 내렸으며 홍수 시작 150일 후 아라랏 산에 배가 머물렀고, 3개월 후인 1월1일에 물이 걷히고 그후 57일간 땅이 말랐으며 배의 크기의 입체적 정확한 수치의 기록 등으로, 이는 신화적 문체가 아니고 사실적 문체입니다.
2. 방주의 과학적 설계
배의 크기는 137m×23m×13m 였는데, 과학자들이 이에 근거한 모형 배를 만들어 실험한 결과 어떤 파도와 급류에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성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조종이 불가능한 이 배는 최고의 안전성을 도모한 설계였습니다.
3. 성경과 무관하게 세계에 널리 알려진 대 홍수설
성경과는 독립적으로 대 홍수에 대한 이야기는 전 지구에 퍼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아르메니아인들은 2,000년 전에 아라랏산을 후손의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페르시아인의 전설을 그 산을 이류의 요람이라고 하며 'koh-i-Nuh'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노아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남아프리카 호텐트족은 그들의 조상을 노(Noh)라 하며, 하와이인들은 누우(NU-U)와 그의 가족만이 구원된 홍수이야기를 남기고 있습니다. 아즈테크 문명의 사학가는 최초의 세계가 대홍수에 의해 파괴되지 전 1716년간 지속됐다고 기록했는데 성경과 60년 오차를 보일 뿐입니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전설적 조상들은 제우스신이 인류를 홍수로 명망시키려고 했을 때, 식랭 실은 배에서 위기를 면했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은 큰배를 '船'자로 나타내는데, 이글자는 배+여덟+식구가 조합된 글자로 노아의 8식구와 방주를 의미합니다.
최근 신문(86.12.)의 해외 토픽란을 보니까 중국에서 발견된 고문헌에 홍수의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며, 1854년 고대 니느웨 성터에서 발견되어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서판들 중에도 대홍수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4. 대홍수가 가능한 당시 기상조건
고기후학(古氣候學)이나 지사학(地史學)의 연구결과는 고생대나 중생대 기후나 온난 다습하여 기 좋은 조건이었음을 알려 주는데, 그 이유는 대기 중에 짙은 수증기층이 있어서 태양의 복사열을 덜 빼앗겨 지구 전체가 아열대성 기후였다고 합니다. 이런 조건하에서 사람은 수 백년 장수할 수 있었고 식물은 무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화산 폭발로 생긴 미세한 화산재에 수분이 엉켜 대기중의 풍부한 수증기가 폭우로 쏟아질 때 엄청난 강우량을 보일 수 있으며, 천문학자 에드먼트 할레이는 대홍수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그때까지 수직이었던 지축이 23.5 기울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사실일 경우 적도에서는 150일간 9.6㎞ 수위가 유지되며 시속 1,600㎞의 물결이 지구를 휩쓸게 된다고 합니다.
5. 격변설을 지지하는 지질학
진화론자들은 지질 형성에 있어서 홍수로 인한 격변설을 반대하고 '동일 과정설'을 주장하는데, 이 설은 18C 영국의 지질학자 리일(Lyell)과 허튼(Hutton)이 주장하여 현대지질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학설로 '현재는 과거의 열쇠다'(Present is the key for the past)라고 합니다.
과거에도 지금 지표상에 작용하는 압력이 똑같은 방법과 강도로 작용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조륙(造陸), 조산(造山)운동, 화산활동, 해수면의 변동, 기후변동, 대륙빙하의 발달 등 격변현상이 많아 동일 과정설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 지표의 변화입니다.
6. 이상한 화석들
진화론자들은 고생대에서 신생대까지 열두 개의 지층을 차례로 배열해 논 지층기둥(Geological column)을 설정하는데, 실제 지층기둥은 지구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일 과정설에 따르면 최하 지층의 단세포동물 화석으로부터 위 지능의 고등생물로 진화사슬이 나타나야 하는데, 실제 화석은 빠진 고리를 연결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문제 100참고), 수많은 종류의 화석이 한군데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또 큰 나무가 몇 개의 지층을 관통한 채 화석이 되어 있는가(미국 테니시주의 래피도댄드리드 나무둥치 화석)하면, 크로마아티와 오크니 고지대에서는 뒤틀리고 구부러져 있는 물고기화석이 있는가 하면, 닫힌 상태에 있는 많은 조개화석과 보통의 경우 화석이 되기 어려운 벌레의 화석 등이 모든 것은 격변설로 설명이 가능하나 동일 과정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7. 내륙 염해들
지구상에는 카스피해, 고비사막의 내지해 등 내지 깊숙이 염호(鹽湖) 많이 있는데 이는 바로 바닷물의 육지 침범의 증거로 대홍수의 증인입니다. 또 아라랏산 2,100m 근방에서 소금덩어리들이 발견되며, 용암이 물 속에서 급히 식을 때만 형성되는 베개용암이 아라랏산 4,200m에서 발견되는 것은 여기까지 물에 잠겼었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대홍수의 지구적 규모를 부정하고 중동지역의 국부적 홍수론을 제기하나 아라랏산이 4,200m이상 침수되고 타 지역은 육지가 그대로 있으려면 중동지방을 중심으로 물을 피라밋처럼 쌓아 올려야 할 것이니 불합리한 이론입니다.
8. 목격자들이 많다는 사실
1856년이래 아라랏산에서 23회 이상 200여 명이 방주를 목격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 중에는 소련 비행사들도 있으며, 1883.8.10 시카고 트리분지는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다는 터어키 정부의 공식발표를 게재했으며, 1995년 나바라는 방주에서 나무 조각을 뜯어 가지고 내려와 감정한 결과 5,000년 전 유프라데스 평원에서 자란 나무임이 밝혀졌습니다.
아라랏산은 만년설에 쌓여 있어 방주는 눈 속에 묻혔다 나타났다 할 뿐 아니라, 이 산은 현재 소련과 터어키 국경인지라 탐사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본격적 탐사를 못합니다.
A.D. 80년경 유대 사학자 요세푸스도 방주의 유물이 아직 그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방면에 권위있는 서적으로는 죤위트콤, 헨리모리스공저≪창세기 대홍수≫가 있습니다.
95. 우리 나라에는 교회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당국은 왜 자꾸 허가를
해주나요?
확실히 우리 나라에는 교회가 많습니다. 동경이나 싱가폴·방콕 같은 아시아의 대도시는 하루종일 다녀도 교회 몇 개 보기가 힘든데 어느 날 퇴근하다가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세어보니 열이 넘더군요. 밤에 높은 곳에 올라가 보면 조금 과장하여 십자가의 숲을 보는 듯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많다는 생각을 불신자는 물론 신자까지도 부정적인 면에서 하는 사람이 있지만 교회가 많아서 좋은 면이 있으면 있었지 손해 되는게 없습니다. 일본 같은 나라는 교인이 전 인구의 1%도 안돼 교회가 적은게 당연하고 우리 나라는 25%를 넘으니 많은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경찰서 10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낫다고 교회의 사회적 가치를 알았던 것입니다.
교회가 소금의 역할을 하며 사회의 부정부패에 제동을 걸고 있는 효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세계가 다투어 유아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는 지금, 교회 유치원과 유치부 주일학교가 국가가 못다 하는 유아교육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나 수많은 교회들이 유년주일학교, 중고등부, 대학부를 통해 청소년 반공교육과 인격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막대한 교육의 효과를 무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측면에서보다는 선교적인 면에서 교회수의 증가를 환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우리 민족에게 특수한 선교적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렇게 많고 동남아이 신학교는 학생이 없어 문을 닫을 형편인데 우리 나라의 많은 신학교들은 학생으로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지도를 펴 보면 북한은 물론 중공과 민자와 소련의 한없이 넓은 대륙 남단에 있는 조그마한 대한민국은 장차 이 넓은 논에 복음을 이양할 준비로 설치한 복음의 못자리(묘판)라는 생각이 듭니다. 못자리를 보고 벼를 너무 많이 심었다는 사람은 벼농사에 아주 무식한 사람이죠. 농부가 그 말을 들으면 속으로 웃을 겁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교회 수는 더욱 증가해야합니다.
그리고 교회 설립은 당국에 허가사항이 아닙니다. 교회당은 지을 때는 건축법에 의한 허가를 받아야겠지만 교회를 창립하는 것은 소속 노회에 청원해서 허락 받는 것으로 됩니다.
96. 사람은 죽는 순간부터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사후 생명에 대하여 중요한 원칙만을 말해줍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두 길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직행하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으로 가서 최후 심판 때까지 머물다가 심판날에 의인과 악인이 다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은 후 의인은 하늘나라 영원히 복된 세계에 들어가 영생하고 악인은 지옥에 가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의 질문은 죽은 후부터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들부터 알고 싶다는 질문이니 성경으로는 대답하기 어렵고 어디까지나 사실이냐 하는 것은 논의로 하고 성경 밖에서 답을 찾아 볼 수밖에 없군요.
사후가 아무리 비밀의 세계라 할지라도 이 세계에 대한 단편적 지식을 얻어볼 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 많은 심령과학 서적들과 입신자들의 체험기, 일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인터뷰 기록들이 그것입니다.
입신자들의 체험기로는 스위든 보그의 ≪천국과 지옥≫, 썬다싱의 ≪영계사시≫가 있습니다. 또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인터뷰 기록으로는 영국의 심장병 의사인 모리스 롤링스 박사의 ≪죽음의 문을 넘어서≫(Beyond death's Door)와 미국의 신경과 의사며 철학교수인 무디 박사의 ≪사후의 생뭉≫(Life after life), 미국의 의사인 로스 여사의 보고와 우리 나라 이경순 목사의 간증 등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요즘은 인공 호흡술의 발달과 전기충격 요법 등으로 일시적 죽음에서 깨어나는 사람이 늘어나고 이 방면에 관심도 높아지고 있으나 앞으로는 더 많은 자료들이 나오리라고 생각됩니다.
일시적 사망 상태에서 깨어난 사람들의 증언을 비교 검토하면 100% 완전히 일치하는 사례는 거의 없으면서도 그 어떤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죽음이 임박하는 순간에 많은 사람들이 지극한 평화와 고요를 느낀다가 보고돼 있는 반면, 두려움에 떠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떤 소리를 듣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음악이 어떤 사람에게는 '윙윙' 또는 '쉿쉿'하는 아주 불쾌한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터널 같은 어두운 공간으로 빠른 속도로 빨려들어 가는 경험을 갖는데, 그 터널형 공간도 일정하지 않아 사람에 따라 동굴, 터널, 우물, 깔때기, 하수도, 계곡 등 여러 가지로 비유해 말합니다.
그후에 대개 영혼의 육체 이탈을 겸험하게 되는데, 영혼의 출입구는 머리 부분인 것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기간 동안 탯줄같은 것으로 육체와 연결된 채 시체 위에 둥둥 떠 있으면서 아주 담담하게 자기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그때 시체를 놓고 의사나 가족들이 주고받는 말이나 행동까지 일일이 보고 들으며 생환 후에 그대로 이야기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고 합니다. 공중에 떠 있는 영혼은 슬퍼 우는 가족들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왜 우느냐고 가족들을 흔들어 대도 산사람들의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빛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 빛은 말할 수 없이 밝은 광체이면서도 눈이 부시지 않고 아늑함과 평안함을 주는 인격적 존재로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은 서슴지 않고 그를 예수님이라고 증언하며 타종교인은 그들의 신으로, 무종교인은 '빛의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공통점은 자기 일생에 대한 회고가 영화필름같이 전재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중요 장면만이 보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이 영혼들은 어떤 한계점을 느끼게 되고 육체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되돌아가라는 경고를 듣기도 합니다. 영혼은 다시 머리를 통해 육체로 들어가고 긴 한숨과 함께 눈을 뜨고 주위 사람을 보게 되지만 대개는 돌아온 것을 아쉬워하는데, 그 중에 이경순 목사는 살아난 것이 너무 억울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유쾌한 경험을 하는 것만은 아니고 무서운 경험을 하고 와서 생활이 완전히 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들이 느꼈던 그 어떤 한계선이 생과 사의 마지막 경계선이 아닐까요? 이곳을 지난 영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 같으니 그 세계가 어떠할지? 죽음의 현관도 그렇게 좋다면 죽음의 내실은 얼마나 좋을지?
그러나 그 세계에선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알 길 없으나 신비가 스위든 보그는 입신을 통해 이 선을 넘나들고 상당히 깊은 것을 상세히 ≪천국과 지옥≫에서 말하고 있으니 참고가 되겠으나 이상의 이야기들은 성경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97. 교회는 한 하나님을 믿는데 왜 여러 파가 있습니까?
교파는 신학사상의 차이, 교리의 차이, 제도의 차이, 예배 의식의 차이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서 형성됩니다. 그리고 교파를 전혀 부정적인 면에서만 볼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양하게 지으신 것을 보십시오. 산 모양이 같지 않고 나무와 풀들이 같지 않고 돌이 그렇게 많아도 꼭 같은 돌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서로 다른 돌이 모여서 미의 하모니를 만들어 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꽃이 모두 한 색깔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봄의 아름다움이 반감되겠지요. 이렇게 사람의 본성도 다양하고 컬러풀한 것을 좋아합니다.
또 다르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니 만약 세상사람의 얼굴이 똑같다고 생각하고 그때 야기될 혼란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는 많은 성씨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건전한 결혼제도가 유지되며, 야당과 여당이 있으므로 건전한 민주정치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원리가 그런데 기독교라고 파가 있어서 안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이 있어야 앞에 사람이 더 빨리 달리듯 교파가 있으므로 상호경쟁으로 복음전파사업에 자극제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교파가 교회의 분열이 다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도 사실입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서 재산을 놓고 싸우다 분열하는 수도 있고, 교권싸움이나 개인 명예에 얽힌 감정 대립으로 분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명분 없는 분열과 과당 형성은 있어서는 안되겠지요. 우리가 명심할 것은 교리나 교파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꿈에 천국을 방문한 요한 웨슬레는 천국에는 감리교인이 얼마나 있느냐고 천사에게 물었더니 한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크게 실망한 웨슬레는 그럼 장로교인은 얼마나 있느냐고 물으니 역시 한사람도 없다고 했어요. 놀란 웨슬레는 그럼 어느 교파만 천당에 오느냐고 물었더니 어린양의 피로 구속된 자만이 온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너무 교파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파는 기독교의 몸을 구성하는 한 지체입니다. 건전한 지체가 맡은 사명을 다하면 유용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체는 오직 몸을 위해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교파 논쟁에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는 때입니다.
98.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적 자세를 가지며 기독교만 진리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독교를 보는 데는 두 가지 시각이 있겠습니다. 일반 종교론적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보는 지각이 있고,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서 절대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전자는 학문적 입장이요 후자는 신앙적 입장입니다.
학생은 전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나는 후자의 입장에서 답변할 것이니 이 문답은 처음부터 빗나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문제는 기독교의 진리성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민족들은 예외 없이 종교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찾는 종교본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만큼입니다. 계시방법에는 자연계시(일반계시)와 초자연계시(특별계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계시는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고, 초자연계시는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절대자를 추상한다든 가, 과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감지한다든 가, 타종교들이 특별한 제의로 신을 찾는 것은 모두 자연계시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범죄 후로 인성이 타락하고 자연은 혼잡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계시만으로 참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특별계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타종교들은 자연계시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다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고, 기독교는 특별 계시 속에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만이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예배하며 구원의 올바른 길을 안다는 것입니다. 타종교는 인격적으로 신을 찾지 못하고 죄를 발견하지 못하며 구주로서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 결정적 결함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외에 구원의 길이 없고 성경 외에 참 복음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저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니이다"(요 17:3).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재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얼마나 확신에 차 있고 권위가 넘치는 말씀들입니까? 타종교 어느 경전에서 이와 비슷한 말 한마디라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유명 브랜드일수록 가짜고 많고 귀중품일수록 모조품이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타종교는 기독교의 모조품이요 가짜 브랜드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배타나 독선이 아니라 가짜에 대한 진짜의 선언이며 모조품에 대한 진품의 선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저가 생명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99. 아담과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중 어느 쪽이 인류 조상입니까?
이 질문은 창조론 대 진화론의 세기적인 논쟁으로 연결되는 문제로 간단히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나라의 교과서들이 마치 진화론이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취급하고 이미 달라진 학계의 이론들을 외면한 채 수정된 학설들을 구태의연하게 강조하면서 학생들의 머리를 세뇌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좀더 자세한 이야기들은 100문에서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유인원의 화석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진화론은 몇 개의 벽에 부딪혔는데, 그 중에 하나가 '빠진 고리'라는 것이니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한 중간의 전이형태가 발견되지 않는 것, 이것이 진화론에서 말하는 빠진 고리입니다. 이 빠진 고리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법칙이 됐습니다. 그리고 빠진 고리가 발견되지 않는 한 진화론은 성립 될 수 없습니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뿐 아니라 라마피테쿠스, 피테칸 트로푸스, 네안데르탈인, 딜드타운인 등도 마찬가지인데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 주커만경은 초기 유인원이라고 주장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를 연구한 결과 그것은 긴팔 원숭이였음을 밝혀 냈고, 1932년 인도에서 발견되어 한때는 원숭이가 인류로 진화하는 전이형태의 중간 종으로 믿어졌던 라마피테쿠스는 그 후의 연구에 따라 멸종된 원숭이 뼈로 판별됐습니다.
예일대학의 인류진화론 학자 데이비드 필범 교수팀은 1973년 파키스탄에서 많은 화석을 발굴하고 종전의 자기 주장을 번복하여 '라미피테쿠스'는 인류와 관계가 없다고 발표했으며, 피테칸 트로푸스를 유인원이라고 발표했던 화란 의사 듀보다는 죽기 전에 그것은 긴 팔 원숭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초기에 반쯤 걸어다니는 유인원으로 학계에 소개됐던 네안데르탈인은 관절염과 비타민 부족으로 인한 꼽추병 환자였습니다. 1912년 영국의 필드타운에서 발견되어 50만년전의 인류의 조상이라고 했던 '필드타운인'은 1950년에 새로운 방법으로 연대 측정을 한 결과 수 천년 전 것에 지나지 않음이 밝혀졌을 뿐 아니라 철 염으로 화학 처리되고 이빨도 줄로 가른 자국이 발견되어 빠진 고리를 찾기에 광분한 학자들의 사기극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인류의 조상이 아닙니다.
100. 과학시간에는 단세포동물로부터 고등동물로 분화해서 발전했다는
진화론을 배웠는데 성경시간에는 하나님 창조하셨다고 하니 어느 쪽이 진리며 그 이론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생물시간과 성경시간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을 이해할 만 합니다. 그 갈등을 덜어드리기 위하여 이 문제는 철저히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내용이 좀 길더라도 끝까지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의 문제 99번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예루살렘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무죄의 그리스도를 정죄하여 처형케 하고 유죄의 바라바는 놓아 준 일이 있었는데, 현대판 빌라도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 재판이 1925년 미국 테니시주 데이튼에서 있었습니다.
'Scopes 판례'라 부르는 이 재판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법적 투쟁으로 이 재판에서 창조론이 패소하고 진화론이 승소함에 따라 창조론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빌라도의 법정에서 그리스도가 웃음거리가 됐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달라지고 있었으니 미국에서 창조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이번에 창조론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 신학자나 목사가 아니라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창조론 대 진화론의 투쟁은 기독교 대 과학의 투쟁이 아니라 과학 안의 내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느냐 하면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놀랍게 발전한 각분야의 학문들 ― 물리학, 화학, 천문학, 지질학, 화석학, 고고학, 유전공학, 고분자 생물학 등 ―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진화론의 모순을 폭로하고 창조론의 타당성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기에 앞서 양론의 주장과 차이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창조론은 성경(구체적으로는 창세기)에 근거한 것으로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셨고 각종 생물도 처음부터 종별로 그리고 성숙한 상태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본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5).
이에 대해 정반대 입장을 취한 진화론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체계적 이론을 세웠는데 다윈은 지상의 모든 생물이 우연히 발생한 하나의 단세포 동물로부터 수 백 만년의 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오늘의 다양한 종(種)으로 그리고 고등동물을 거쳐 인간까지 진화됐다는 것입니다.
다윈은 '종의 기원' 서문 가운데서 말하기를, "종이라는 것은 개별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변종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응당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하여 위의 성경말씀과 대립합니다.
진화는 소진화와 대진화로 나누는데 소진화란 한 종의 집단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이로서 흔히 '변종'이라고 하며 우리가 흔히 보고 인정하는 사실이며, 대진화는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발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진화라 할 때는 대진화를 말하게 됩니다.
대진화가 일어나는 과정은 두 단계가 있다고 진화론자들은 말합니다.
첫째 단계는 돌연변이라는 것으로 RNA(DNA 속에 있는 유전정보 전달자)가 유전정보를 전달하다가 실수를 범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며, 둘째 단계는 자연의 선택으로 돌연변이 된 유리한 형질을 자연이 선택하여 정착시키고 후손에 전달하는 것인데 '자연도태','적자생존'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RNA가 실수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DNA속에는 자동 교정장치까지 마련돼 있다는 것을 오늘의 발달된 유전공학은 알아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쩌다 돌연변이가 일어나도 거의가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하지 보다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또 드물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진화론이 실은 과학이 아니라고 말하면 진술자는 놀랄지 모릅니다. 과학적인 진리가 되려면 가설 ― 실험 ― 증명 ― 결론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진화론은 지금까지 실험을 한 번도 못했기 때문에 증명도 결론도 없이 가설에 머물러 있는 '학설'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진화는 지구 규모의 대공간에서 수 억 만년의 장구한 시간 속에서 진행됐다고 하니 누가 이것을 실험해 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과학잡지 '사이언스' 1982년 5월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동양에서는 이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은 진리로 받아들여졌고 현행 교육도 그 바탕 위에 실시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창조를 믿는 일부 주장이 다시 제기되고 국내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4월 19일은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이 세상을 떠난 뒤 꼭 백년 되는 날이다. 진화론은 지극히 강한 영향력을 미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명백하지 못한 이론도 드물다고 할만큼 논의의 여지가 되어 왔다. 또 연구 대상의 시간이 천년대가 아니라 수 억년을 논해야 될 만큼 깊어 정당성을 검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실이다.'
최근 과학 전문지도 이렇게 말하는 진화론을 우리는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배워 왔습니다. 이제부터 진화론을 부정하는 과학의 소리들을 들어보기로 하죠.
첫째, 수학적 확률은 생명의 우연발생을 부정합니다.
단백질은 살아 있는 세포의 기본요소로 한 개의 단백질 분자는 탄소(C), 수소(H), 질소(N), 산소(O), 유황(S)의 5개 원소 40,000개 가량이 특유한 결합을 이루고 있는데, 자연계에서 이 5개 원소 40,000개가 우연히 만나 한 개의 단백질을 형성할 수 있는 수학적 확률은 1/10160이라고 스위스의 한 수학자가 계산해 놨으며 이에 필요한 시간은 10243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말하는 대우주의 연령은 2×1010이며, 지구연령은 4.5×109인데 10243시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이 어떻게 4.5×109시간에 일어 날수 있으며 통계학에서는 1/1050은 0으로 보는데 어떻게 1/10160의 사건이 있을 수 있을까요?
영국의 천문학자며 무신론자인 프레드리 호일경과 인도 출신의 한 천문학자가 생물의 우연발생 확률을 컴퓨터로 계산했더니 1/10400로 나왔으며, 1981.8.3 영국의 런던 데일러 익스프레스는 '두 과학자가 도달한 놀라운 결론'이라는 제목으로 특집기사를 싣고 결론을 내리길 '신은 반드시 있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했습니다.
둘째, 유전법칙은 대진화를 부정합니다.
DNA는 DNA에 의해서만 복사되고 각 종간의 DNA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이제는 상식이 되었는데 이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지지하는 유력한 증거입니다.
멘델의 법칙에 의하면 유전은 규칙적인 질서에 따라 일어나며, 종은 이미 포함하고 있는 종의 결합에 의해서만 변이가 일어날 뿐 아주 새로운 종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멘델의 유전 법칙은 소진화만을 시인할 뿐 대진화를 부정합니다.
만약 다윈이 멘델의 유전법칙을 알았다면 '종의 기원'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셋째, 생명 속생설이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지지합니다.
진화론은 무생물에서 생명이 나왔다고 말하고, 창조론은 생명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과학은 생명은 생명에서만 나온다는 '생명 속생설'을 지지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 살아남으려면 무생물과 생물을 연결시켜야만 하기 때문에 이를 증명하려고 진화론자들은 애를 썼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현대적인 이론이 이른바 '할데인 - 오파린'설입니다. 1920년 소련의 생화학자 오파린(Oparin)과 영국의 할데인(Haldane)이 제창한 이론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 지구 대기는 메탄(Ch4), 암모니아(NH3), 수소(H2) 등의 화합물로서 번개나 자외선 등의 에너지에 의하여 유기를 질이 되고 아미노산을 거쳐 차츰 복잡한 화합물이 생성되어 마침내 세포가 조립되기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1953년 시카고 대학원생 '밀러'와 그의 스승 '유리'는 메탄, 암모니아, 수소, 물을 가지고 '오피린― 할데인'의 가설을 실험한 결과 아미노산 등 100여 가지의 유기물을 얻음으로써 당시 시카고의 크로니칼 신문은, 실험관 안에서 세포가 만들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대서특필했으나 그후 30년이 지나도록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한 개의 세포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생명의 신비는 점점 미궁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한때 "수소원자만 나에게 주면 생명을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케니 교수는 최근에"지구 생명의 화학적 기원에 관한 현존의 모든 이론들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음을 저자들이 믿고 있으며 지금 와서 본인도 그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어떤 책의 서문에 썼습니다.
1985.4.8일자 뉴스위크지 과학 기사에서도 '오늘날 생명의 기원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 중에는 적어도 다윈의 소위 생명 진화설을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197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 교육위원회가 세계의 석학들에게 '인간의 생명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설문을 냈더니 결론은'모른다'였으며, 그래서 교육위원회는 연방 정부에 건의하길 사람의 생명을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고 과학은 모른다고 하니 교과서를 고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국창조과학회가 창조론에 입각한 자연과학 개론을 집필중이며 가까운 시일내에 출판된다고 합니다.
넷째, 화석은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지지합니다.
화석학적인 면에서 볼 때 진화론이 옳다면 단일종에서 수 억 년간 진화됐으니 아래층에서 하등동물로 시작하여 제일 위에 인류까지 각 지층에서 체계적인 화석이 나와야 하고, 창조론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종별로 창조하셨다고 하니 갑자기 다양한 생물의 화석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화석학은 현실은 어떤가 하면, 많은 화석이 발견됐지만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해가는 전이형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무척추동물에서 물고기로 변해 가는데 일억년이 걸렸다고 하나 그 과정을 보여주는 화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양서류가 파충류로, 파충류가 포유류로 변해가는 중간 종은 없고,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해 가는 연결고리 역시 없습니다.
한때는 라마피테쿠스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피테칸 트로푸스, 네안데르탈인, 필드타운인 등이 원숭이와 인간의 연결고리를 생각했으나 사실을 감정의 오류나 사기극 이었음은 이미 문제 99번을 답할 때 말했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겠고, 파충류에서 조류로의 전이형태로 교과서에 소개된 시조새 화석이 생각날 것 같아 이것만을 해명하겠습니다.
진화론자들이 파충류와 조류의 전이형태로 이 시조새 화석을 내세우는 이유는 깃털 날개, 치아가 있는 부리, 뼈가 있는 긴 꼬리, 날개 끝에 발톱을 가지고 있는 때문입니다.
(1) 파충류의 비늘이 변했다는 깃털은 다른 새와 같이 완전히 발달된 형태이고,
(2) 날개 끝의 발톱을 전이형태로 주장하나 지금 다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호애친'은 날개에 발톱을 가지고 있으며,
(3) 시조새 물고도 부리에 치아를 가지고 있는 새의 화석은 많고,
(4) 시조새가 발견된 지층에서 완전한 새의 화석이 발견된 점등으로 시조새 화석은 중간 종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조새가 파충류와 비슷한 것이라 하나 깃털을 가졌다는 점에서 완전한 새임이 틀림없다"고 지질학자 오슨은 말합니다.
≪지구 위의 생물≫(Life on Earth)의 저자 D. 아덴브로는 "새가 알을 낳는 것은 파충류에서 진화한 확실한 증거다."라고 했는데, 그러면 물짐승들이 알을 낳지 않는 것은 어류나 파충류에서 진화하지 않은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뉴스위크지 1980.11.3일자 과학기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석 기록에서 빠진 고리(중간 형태)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과학자들이 종과 종 사이를 연결해 주는 전이 형태의 화석을 찾으려고 할수록 찾지 못하고 실망만 한다.'
다섯째, 열역학법칙이 진화를 부정하고 창조를 지지합니다.
열역학은 모든 방면에 관련된 에너지의 양과 형태의 변화 및 열의 상호관계를 다루는 학문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질서에 적응하는 물리법칙으로 제1법칙과 제2법칙이 있습니다.
(1) 열역학 제일법칙
에너지보존법칙 이라고도 하는데, 에너지는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도 없고 소멸될 수도 없으며 형태는 변 할 수 있지만 총량은 항상 불변한다는 것이 이 법칙의 골자입니다.
그리고 아인쉬타인에 의해 물질과 에너지는 궁극적으로 같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도 없고 소멸될 수도 없다는 말이 되니 우주 생성에 내재적 원리를 주장하는 진화론과는 맞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창조론과 부합합니다.
(2) 열역학 제 이 법칙
에너지 감소법칙이라고도 하는 제 2법칙은 에너지의 질적 쇠퇴 현상을 다룬 것으로, 이 법칙에 의하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은 그 자유에너지를 낟은 상태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물의 수평현상, 열의 등온현상)는 하향성 세계를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하면 열은 관계된 어떤 전환에서든지 항상 일정한 에너지가 가용성에서 불가용성으로 변하며, 그 역류현상은 자연상태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제2법칙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제2법칙의 에너지 질적 저하의 또 하나의 현상은 질서도와 무질서도를 다루는 엔트로피 개념입니다.
자연적인 반응은 항상 그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배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무질서화하는데, 이렇게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것을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말합니다. 이 엔트로피 현상을 감소시키려면 외부에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진화론이 말하듯 자유롭게 방황하던 원소들이 우연히 결합하여 단백질과 핵산같은 고도의 질서를 가진 분자가 형성되고 세포가 탄생했으며 하등생물에서 고등생물로 진화했다는 주장은 상향성 세계를 말하고, 자연상태에서 엔트로피의 감소현상을 뜻하고 있어 우주의 기본 물리법칙인 열역학 제2법칙에 정면 충돌합니다.
반면에 처음에는 완전히 창조한 세계가 죄를 범한 후 타락하고 부패하여 가고 있다는 하향성 세계관이나 밖에서 의도적인 힘 곧 하나님이 작용하여 질서의 세계를 이룩했다는 창조론은 1·2법칙과 무리 없이 밀착합니다.
참고한 서적
1.≪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한국창조과학회편)
2.≪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한국창조과학회편)
3.≪과학적 증거는 진화를 부정한다≫(한국창조과학회편)
4.≪창조론의 최전선에 서서≫(한국창조과학회편)
5. 월간 '창조' 1986.9(한국창조과학회편)
6.≪진화냐, 창조냐≫(도서출판 선구자)
7.≪자연과학을 통해 본 하나님≫(기독교문서선교회)
8. 사이언스 1982.5
9.≪창세기 대홍수≫(성광문화사)
제 2 부 교파의 종류
1. 신교와 구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구교와 신교는 역사와 교리의 정치가 크게 다릅니다.
팔레스틴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소아시아를 거쳐서 유럽으로 건너가 로마의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 로마제국을 기독교화하고 로마제국을 배경으로 기독교의 세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내부로는 교회의 감독제도가 발전하여 교황제도가 생기고, 교황이 세속정치와 국왕들을 좌우하는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면서 세속화하고 부패되었습니다. 마침내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신교가 발생하기에 이르렀고, 카톨릭의 탄압과 많은 종교전쟁을 치르면서 신교는 확장되었는데 많은 교파로 분열되었습니다. 신·구교의 중요한 교리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의 권위
신교가 성경의 절대권위를 인정하는데 반해 구교는 교황의 절대권을 인정하고 성경해석권을 교황이 가지고 있다고 하여 교회권을 성경의 권위 위에 두고 유전과 교훈을 성경과 동일시합니다. 성경을 완성된 계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와 교황을 통하여 새 계시를 주신다고 합니다.
2. 교황무오설
신교가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데 반해 구교는 교황무오설을 주장하는데, 교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모든 결정에 오류(잘못)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3. 연옥설
신교는 사후 거처로 천당과 지옥이 있을 뿐이라고 하는데 구교는 중간기 처소로 연옥설을 주장합니다. 이곳에는 지옥 보내기는 아깝고 천당가기에는 부족한 영혼들이 일정기간 머무르며 연단을 받는 곳으로 교황이나 가족의 기도나 공덕으로 그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4. 구원관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며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신교의 구원관에 비해, 구교에서는 은혜는 카톨릭에서 주는 기도와 성례를 통해서만 얻어지며 교회나 교역자의 중재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고 합니다.
5. 사도직 계승설
신교에서는 만인제사장주의를 주장하여 하나님과 신도 사이에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인간이 개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교에서는 교황은 사도의 계승자며 사제들만이 성도의 기도를 중보 한다고 하여 하나님과 신도 사이에 교황이나 사제를 개입시켜 그에게 죄를 고백(고해성사)하고 그를 통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신교에서는 사도의 직무는 성직자들에게 계승되나 사도직 자체는 초대교회의 12사도로 끝난 것으로 봅니다.
6. 성례관
신교에서는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인정하는데 구교에서는 7 성례라고 하여 세례, 성찬, 견진, 고해, 신품, 혼배, 종부를 성례로 행합니다. 신교에서는 성판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기념설 즉, 영적 임재을 주장하는데, 구교에서는 떡과 포도주가 완전히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7. 성인 공덕설
성인들의 선행과 공덕이 로마교회 안에 축적되어 있어서 교황이 원하는 사람에게 이를 분배하여 죄를 사할 수 있다고 하나 신교는 이를 부인합니다.
8. 마리아 숭배
구교에서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 무죄 탄생, 무죄 생활, 마리아 청정설을 주장하며 신격화하여 인간과 그리스도 사이에 중보자로 삼는데 신교에서는 무죄 탄생, 무죄 생활, 청정설을 부인하고 기도의 중보자도 될 수 없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이와 같은 구교에 대하여 신교의 기본교리는 이신득의, 만인제사장, 성경의 절대권위로 요약됩니다.
정치적인 면을 보면 신교도 교파에 따라 그 체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개교회 자치권이 인정되고 교인이 주권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잇는 민주정치체제를 채택합니다. 반면에 구교에서는 전세계의 교회가 교황청 산하에 속해 수직적 명령계통으로 움직이는 전제주의 정치며 평교인은 정치 참여가 허락되지 않는 교황정치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2. 통일교도 기독교입니까?
사이비 기독교입니다. 이런 것을 이단 종파라고 합니다. 이단이라고 한자로 異(다를 이), 端(끝단)을 쓰는데 처음에는 같은 것처럼 보이나 끝이 다르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단 종파들을 겉만 보고 기독교로 속는 일이 많습니다.
물론 교파마다 약간의 교리차이는 있는 것이고 교리가 조금 다르다고 해서 다 이단 취급하는 것은 아니며 삼위일체를 부인한다든 가, 그리스도의 인성이나 신성을 부인한다든 가, 영혼의 존재를 부인한다든 가 하는 기본적인 중대교리가 다를 때 이단시하게 됩니다. 통일교를 이단이라 하는 것도 이같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다리하기 때문입니다.
통일교는 신관(神觀)이 기독교와 다릅니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이시니 성(性)을 초월한 분이라고 하는데, 통일교에서는 하나님을 음·양 두 가지 성을 동시에 지닌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이해하며 동양의 음양철학으로 풀이합니다.
기독교의 정통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神性)과 완전한 (人性)을 가지고 계신 성부와 같은 하나님이면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데, 통일교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신성을 부인합니다.
통일교는 구원관이 기독교와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런데 통일교에서는 예수는 구원에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반만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통일교에서 하는 말은, 예수는 돌아가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닌데,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육체적 구원은 실패하고 영적 구원만 이루었으므로 육체적 구원을 이룰 재림주가 다시 와야 하는데 그가 바로 문선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에 의하면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가 아니라 실패의 십자가며,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문선명 두 사람이 되는 거지요.
통일교는 인류 타락설이 다릅니다.
성경은 아담이 금지된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으로 인류가 타락했다고 가르칩니다. 통일교는 하와가 사단과 성적 관계를 가지므로 인류가 타락했으며,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타락 후에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렸다고 하며, 그후 사단의 피가 인류의 혈관에 흐르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통일교는 성경관이 기독교와 다릅니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가감이 용납되지 않는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데 통일교에서는 성경은 불완전해서 새 계시를 첨부해야 완전해진다고 하며, 통일교의 교리를 해설한 '원리강론'을 성경에다 첨부합니다.
그 외에도 다른 점들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교리들이 이렇게 다르니 통일교는 기독교라고 볼 수 없습니다.
3. 여호와 증인은 어떤 교회입니까?
이단 종파의 하나로 치음에는 '럿셀파', '천년기 새벽파', '레드포드파'등으로 불리다 1931년에 '여호와 증인'으로 통일했는데 이사야 43:10의 "너는 나의 증인이라"는 데서 따온 명칭입니다.
여호와 증인의 창설자는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1852)의 럿셀이며, 후계자 레드포드를 거쳐 지금은 나단 호멜 노오르에 의해 영도되고 있습니다.
1961년 나단 호멜 노오르에 의해 '새 세계 번역성경'이라는 것이 완성되었는데, 본래의 성경을 임의로 가감하고 인위적 해석을 했습니다. 그 독특한 교리를 보면, 성경의 '주', '하나님'을 전부 여호와로 대치시켰고, 삼위일체를 부정 비난하기를 머리가 셋 달린 괴물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난 존재로 보아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을 인정하며, 그리스도는 1914년에 영적으로 재림했고 이 해를 여호와 왕국 시작의 해로 봅니다.
이들은 또 지옥의 존재를 부인하여 악인의 영혼은 멸절되어 없어진다고 합니다. 부활은 의식의 존속상태가 아니라 의식의 중단상태라고 하며,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도 부정하고 자력구원을 주장합니다.
이 교파의 특징은 집총 거부, 수혈거부, 국민의례, 방위세거부 그리고 잘 훈련된 2인조 전도대가 특히 기성교인을 상대로 집요하게 파고들며 징집에 불응하여 영장을 받으면 감옥에 갈 준비로 교인들이 모여 누비옷을 만든다고 합니다.
4. 장로교와 감리교는 무엇이 다릅니까?
장로교회는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교회입니다.
칼빈주의 신학사상은 '하나님 절대주의'위에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 제한 속죄, 성도의 견인의 5개 지주로 구축돼 있고 흔히 '예정론'으로 특징지어 지기도 합니다.
정치조직은 교인대표인 장로를 뽑아 목사와 더불어 당회를 조직하고 당회가 교회를 처리하는 대의 민주정치를 실시합니다.
교회직원으로는 장로(남), 안수집사(남), 서리집사(남녀), 권사(여)가 있으며 교역자 계통직원으로는 목사(남), 전도사(남, 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장로교는 아직 여목사, 여장로 제도를 두지 않고 있으며, 남자권사는 없고 감리교에 비해 장로의 권한이 큽니다.
감리교는 영국의 웨슬레에 의해 창설됐습니다. 칼빈의 예정 교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무차별적이어서 지옥가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장로교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감리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노력이 합작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원죄는 인정하나 장로교처럼 완전타락은 부인합니다.
정치는 비사제적 감독정치로 총회에서 감독을 투표하고 개교회 목사는 감독이 파송하는 중앙집권제입니다.
직원은 목사, 장로, 권사, 속장, 유사, 탁사 등이 있으며 여자도 목사와 장로가 될 수 있고 남자도 권사제도가 있는 점이 장로교와 다릅니다.
5. 하나님의 성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성회는 1914년 미국에서 시작된 개신교의 한 파로서, 적극적인 전도를 목적으로 한 오순절 교회 목사들과 복음 주의파 목사들에 의해 형성됐습니다. 그들의 신학사상은 감리교에 가까운 알미니안 신학이며, 정치는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를 절충한 양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 종교는 신조는 성경 무오설과 영감 확신,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속죄 확신, 성례, 세례, 방언은사, 신유은사 강조, 예수 재림의 강조입니다.
한국에서는 1947년에 '순복음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으며, 하나님의 성회로 전파되기도 합니다.
6. 몰몬교는 어떤 교회입니까?
몰몬교는 기독교 이단 종파의 하나로, 창시자는 요셉 스미스(1805-1844년)입니다.
요셉 스미스가 17살 때 천사 모로나이의 계시로 그모라산에서 땅에 묻힌 환금판을 발견·번역하였는데, 이것을 몰몬경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주장하길 성경 66권 만으론 부족하고 여기에 몰몬경과 새로운 성서인 '값진 진주', '교리와 성약'이 합해야 완전한 성경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성부, 성자, 성령을 개별적인 하나님으로 보며 하나님의 영성을 부인합니다. 성부와 성자도 사람처럼 육신을 가졌다고 하며 하늘에도 남·녀 성이 존재한다고 할 뿐 만 아니라 예수는 영적 자녀 중에 장자라고 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이 축복을 하기 위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으로 해석하며 원죄를 부인하고 현실적 범죄만 형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육체를 가졌고 개인적인 희생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했다고 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가 주음과 부활로 열어 논 천국 문으로, 사람이 원해서 복음이 요구하는 규례를 지키며 순조할 때 얻어진다고 합니다. 저들의 교회를 '말일성도 교회'라고 하며, 이것만이 참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계시를 받고 있다고 하며, 3종류의 천국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하는(해)의 천국'은 주님의 명령을 지킨 충성된 자들이 가는 곳이며, 둘째, '지상(달)의 천국'은 율법이 없이 죽은 자와 죽은 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들이 가는 곳이며, 셋째, '테레스타일(별)의 천국'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성령을 부인한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한떄는 일부다처를 주장했던 몰몬교는 마르다,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아내였다는 망발을 하며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육체적 인간이라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이들은 예배보다 교육에 치중하며 매일 분반공부를 합니다. 또한 매주 성찬식을 하는데 8세 이상이 참여하며 포도즙 대신 물을 사용하고 세례는 침례만을 인정합니다. 청년들은 의무적으로 2년간 자비 부담하여 해외포교를 해야 하고 술, 담배, 커피, 홍차를 금하며 육류 사용을 제한합니다.
7. 구세군은 어떤 교회입니까?
영국의 감리교 목사 월리암 부드에 의해 1912년에 시작된 교파로, 빈민과 소외된 사람들의 구제와 전도에 주력합니다.
구세군은 세상을 구하는 군대, 마귀와 싸우는 군대라고 하여 세상을 전투장, 교회를 병영으로 생각해서 군대식 계급과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빈민 구제가 특색으로 세모 거리에 등장하는 자선 냄비는 구세군의 상징같이 되었습니다.
8. 안식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이단시하는 종파입니다. 미국의 메샤츄세츠주 출신 밀러(Miller)에 의해 시작된 이 안식교회는 본래 농부요 침례교인이었던 그가 단독으로 2년간 성경을 연구하고, 1843년과 1844년에 두 차례 예수재림을 예언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후에 에디슨(Edson)은 예수재림을 예언한 그날 지상에 재림하지 않고 제 1지성소에서 제 2지성소로 들어가는 환상을 보았다고 하여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냄으로 신앙의 돌파구를 찾았으며, 요셉 베이츠(Joseph Bates)는 제7일 안식교리를 추가하였습니다. 실질적인 안식교회 창시자인 에린 G. 화이트는 위세사람의 교리를 종합하고 자기가 본 환상을 근거하여 교리를 정비하였습니다.
이들 교리의 특징은 구약의 제7안식일의 주장입니다. 이 날을 지키지 않는 자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로 절대로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없는 '조사심판'교리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미완성으로 보고 자신의 행위를 중요시하여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자력 구원설을 주장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가 도말 되거나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성품과 생활이 심판 때 지성소의 대제사장에 의해 검토되고 결정됨으로(조사심판) 죄는 여전히 남아있고 구원여부는 최후 심판자에 가 봐야 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이신칭의를 부인하고 율법순종(특히 안식일) 칭의를 주장하며, 1844년에 예수는 1차 재림하셨고 지금은 2차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은 정통교회와 같으나 인성은 유죄한 인성을 주장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사멸한다고 지옥을 부정하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잠자는 듯한 무의식상태라고 합니다.
9. 성결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미국 선교사 카우먼(C. E. Cowman)과 킬보른(E. A. Kilborn)이 극동선교를 목적으로 1901년 동경에서 설립한 동경선교회(O.M.S)가 한국성결교회의 모체로, 1907년에 한국선교를 시작함으로써 하나의 교파로 발전하였습니다.
교리는 사도신경을 근간으로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어진 유일한 경전이며, 기독교인의 생활에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거듭나고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치유하심 역시 믿습니다. 또한 기독교인은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됨을 믿으며, 믿는 자에게는 소망이며 불신자에게는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건전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결교회는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건전한 교파입니다.
10. 하늘나라에도 교파가 있습니까?
교파는 이 세상적인 것일 뿐 하늘나라에는 없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지 민족이나 교파나 교회의 집단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는 구원받은 의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꿈에 천당에 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보고 천사에게 붇길 이 중에 감리교인이 얼마나 있느냐고 하니까 한 사람도 없다고 천사가 대답했답니다.
크게 실망한 웨슬레는 또 묻길 그럼 장로교인은 얼마나 되느냐고 하니까 역시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죠. 그럼 어느 교파 사람들이 천국에 오느냐고 하니까 천사가 대답하길, 천국에는 장로교인도 감리교인도 없고 어린 양(예수)의 피로 구속된 자만이 온다고 대답하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