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각남면은
동·남쪽은 남산(820m)·천왕산(619m) 등의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은 청도천과 그 지류를 따라 소규모의 평야가 분포한다. 1960년대 이후 하천부지와 구릉지가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감·밤·사과·복숭아 등의 생산이 많다.
예리(禮里)·칠성(七星)·화(華)·일곡(日谷)·구곡(九谷)·옥산(玉山)·함박(咸博)·사(沙)·신당(新堂)·녹명(鹿鳴) 등 10개 동리가 있다. 면적 46.84㎢(2007), 인구 2,462명(2007.10).
칠성리(七星里)
남산(南山)지맥중의 하나인 갈마(渴馬)봉이 굴곡도 다양하게 마을의 동쪽을 달려와 우뚝 멈추는 바람에 외묵치(外默峙)와 안산치(案山峙)등 고개 길이 마을로 이어져 있다.
칠성천과 화동천이 좁다랗게 합류하는 계천변을 따라 취락된 마을이다. 선사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가 남아 있어 아득한 옛날부터 주민이 살았음을 알 수 있으나 기록이 없음은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다. 코앞에 청도천이 흘러 남고북저의 지형구조도 대동소이하다.
칠성리는 마역(麻亦)동과 향인(向人)촌, 월곡(月谷)촌으로 되어 있다. 지방행정개편 시 동명은 대부분 합친 마을에서 글자를 따서 동명을 정했는데 이 마을은 그렇지 않다. 지석묘 7기가 남은 것을 별똥이라고 칠성(七星)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1리는 마역동과 월곡인데 마역리(麻亦里)는 수리가 완전치 못한 시대에 논보다는 대부분이 밭이라 의생활의 기간이 된 삼(麻) 농사가 성행하여 인근의 화동(和同)과 같이(麻谷) 이 곳도 역시(亦) 삼을(麻) 주로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 조(趙)들마을 조부자가 약 200여년전에 거주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나 월곡(月谷)리로도 불린다. 남산의 달밤 경치가 워낙 아름다워 이 일대를 월곡(月谷)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각종 지리지에는 기록이 없고 다만 화동 거주의 영일 정씨 세보에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 향인촌(向人村) 2리에는 1500년경에 아산인 장희윤 공이 정착하여 유교의 바탕인 인(仁)을 숭상하는 뜻에서 동명을 정했다 한다. 그러나 오산지(鰲山誌)에는 사인촌(舍仁村)으로 표기되어 있다. 음의 잘못된 발음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명 향죽(向竹)이라고도 한다. 이는 향인촌과 아래 마을인 죽촌을 합칭하는 것이다.
2리에는 절터가 있다. 동리남쪽 1km 지점인 남산 중턱 골짜기이다. 창건연대, 절 이름, 폐사 원인, 연도도 아는 이가 없다. 절터가 규모로 보아 그리 크지는 않게 보이나 축대가 상존하고 있다. 추측컨데 1700년대에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지 않은 사찰에 대한 철거시에 철거된 것 같다.
화리(華里)
남산이 무슨 일로 급하게 내리닫다가 놀라 멈춘 북정(北征)골에서 경사진 비탈을 따라 층층이 서향으로 자리잡은 마을이다. 마을 앞 좁은 계천이 젖줄처럼 이어지다 끊어질 듯 흐르고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서 끝내는 청도천에서 끊어지고 만다.
부근에는 아득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된 마을이 있으나 어쩌면 까마득히 잊어진 과거사에 미련마저 가질 수 없을 정도다. 구전으로는 노씨(盧氏-본관미상)가 부자로 행세하면서 구혈(救血)도 많이 하여 송덕비까지 세워졌다 하나, 가계나 기타 일체가 사라져버려 아는 이도 없고 알 수도 없다.
○ 화리(華里) 동명은 화악산에서 인용했다 하나 그리 오래되지 않은 마을이라 별다른 뜻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마을의 동명을 원래는 어떻게 불렀는지 미상이나 조선시대 1834년간(순조 34년) 청구도(靑丘圖) 청도군읍지에 마곡(麻谷-마실, 삼실)로 기록되어 있다. 이 이전의 촌명도 역시 마곡(麻谷)이라 불렀을 것이다.
○ 마곡(麻谷) 당시 이 마을 부근일대가 밭이 많이 삼(마-麻)농사를 주로 하여 삼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붙여진 동명이다. 삼의 적지로 행정적인 장려도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 구랑(九郞) 윗마을로 화 2동 또는 합동(合洞)으로 불리며 분동, 합동이 수 차례나 반복이 된 마을이다. 구전으로는 경주 최씨 문중에서 아홉 분이 랑자(郞字) 벼슬을 하여 붙여진 동명이라 한다. 랑자의 동명은 유일무이한 동명으로 희귀한 글자로 된 마을이다.
○ 북정(北亭)사 사지 마을 남쪽 소강(小岡)위에 위치한 작은 절이다. 아마도 1700년 중엽에 여지승람에 기재되지 않은 사찰이라 철폐된 것 같다. 현재는 복숭아밭이 되어 있고 기와 조각이 많이 산재되어 있으며, 석불은 10여년 전까지 잔존되었으나 다른 절에서 안치하기 위하여 가져갔다는 것이다.
동제는 정월 보름에 두 곳 신목에게 치성하는데 상단(上壇) 신목은 무학산(舞鶴山)에 있고, 하단(下壇)은 동리 입구에 있다. 상단 신목에는 동리와 동면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고, 하단 신목은 당시 관도(官道)변에 있어서 여행객의 무고를 기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일곡리(日谷里)
남산을 비봉(飛鳳)에 비유한다면 좌족(左足)에 해당되는 봉우리가 완만하고 청려하게 내려 뻗어 무학산이 융기되었고 무학산 품에 안겨 있는 마을이 일곡리다. 마을 지대가 상당히 높은데도 마을에 들어서면 높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는 이 마을이 그 만큼 산등성의 품이 아늑한 때문으로 낮은 곳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군내 굴지의 길지(吉地)에 해당되며, 선조 26년(1593) 임란 다음 해 대구에서 전란을 당한 경주인 최여준 공이 노모를 모시고 최정산(最頂山)에서 피신하였다가 팔조령(八助領)을 넘어서 정착한 곳이 일곡리다.
○ 일곡(日谷-낮실) 마을이 동향이라 아침 첫 햇살에 온 마을이 햇빛을 받는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이 지대를 살펴보면 아침 햇빛이 먼저 남산 봉우리를 비추면 흡사 녹거천로(鹿車釧路) 같은 조광이 서서히 봉우리 아래로 내려 비치어 이 마을 골짜기까지 햇살이 들면 서리의 반짝임이 실로 청초하기가 비길 데가 없다.
이로 인한 아침 햇빛의 신비한 햇살이 비치는 골짜기를 한자표기로 일곡(日谷)으로 한 것이라고 믿어져 풍류적인 동명이라 할 수 있다. 이 동리는 최씨의 종족 마을로 현재까지 변동 없이 내려오고 있다. 지방유형문화재 제166호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있다.
구곡리(九谷里)
남산의 줄기가 길게 짧게 갈라져 골짜기 비탈진 곳에 여러 마을이 자연적으로 취락되어 있다. 동명이 암시하듯이 소강(小岡)사이에도 계천을 따라 여건이 허용되는 곳에는 몇 집씩 어울려 마을을 형성하여 자못 골짜기마다 집들이 흩어져 있다. 이것을 보면 조상들의 취락의 요건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산기슭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음은 슬기롭다 할 수도 있다.
○ 구곡(九谷-구실) 아홉 마을이 합동이 되었다고 붙여진 동명이라 한다.
○ 구촌(九村) 큰마을, 탑골, 셋집매기, 강변(청도천변), 주막, 삼거리, 장등(長燈)밑, 권정자, 구터 등이다. 이 여러 마을 중에서도 주막은 조선시대 관도(官道)가 창령, 풍각∼화양, 밀양방면 지나던 곳으로 고목이 있는 곳에 자연히 주막이 생겼고 주막이 있으면 여행객이 머물기 마련이라 꽤 흥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지금은 흔적이 전혀 없고 당시의 고목만 남아 있다.
○ 탑(塔)골 마을 입구에 좌편 소강(小岡)이 절터다. 신라시대 사찰이라는 것은 절터에서 발견되는 기와 조각으로 알 수 있다. 절은 없어지고 석탑만이 남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탑도 없어졌다.
예리(禮里)
1, 3리는 청도천변에 위치한 들 가운데에 자리한 마을로 안태(安胎)에는 남산에서 갈라져 나와 우뚝 융기한 끝등선이 일명 구복산(龜伏山)이다.
풍수학설로 자라가 물을 먹기 위해 청도천을 향하여 엎드려 있는 형국인데 이를 마중하는 뜻에서 이 곳에 취락이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로는 전형적인 전원마을로 되어 있다.
2리는 구복봉(龜伏峰) 품안에 자리하고 북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산등성에 싸여 있다. 이 마을도 취락 지형은 다른 대부분의 마을과 같이 등선을 등지고 주머니 형국으로 한 방향으로만 열려 있는 동리로 형성의 여건이 같다. 소강이 마을 일부를 막아 터의 지기(地氣)의 유실을 막고 있는 묘한 곳이기도 하다.
○ 예리(禮里) 가례(可禮)동과 평리(坪里)동을 합동한데서 인용한 동명이다.
○ 평리(坪里) 들 마을이다. 들에 마을이 자리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고 한자 표기로 평리(坪里)로 한 것이다.
○ 갈촌(葛村), 가례(加禮), 가례(可禮) 형성된 시기는 1530년경이라 하나 확인할 수가 없어 구전으로 전하는 것을 기록한다. 충주인 석가응(石佳應) 공이 입촌하여 갈촌(葛村)이라 불렀다 한다.
이는 주위 산 일대에 칡이 하도 많아서 붙여진 마을 이름인데 1600년경에 철성(鐵城)인 이 공이 입주하여 동명을 가례(加禮)로 변경했다고 한다. 이는 예를 바탕으로 하는 유풍(儒風)을 숭상하고자 동명에 예(禮)자를 붙였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가례(加禮)또는 가례(可禮)는 철성 이씨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신당리(新堂里)
남산(南山) 서봉(西峰)의 여러 갈래 중에서 몇 줄기의 지봉들이 깊게 짧게 뻗어 우뚝 우뚝 선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들이다.
사촌천(沙村川)과 대산천(臺山川)이 합류하는 지점 부근에 신당(新堂)촌, 산등선사이 곡간(谷間)의 가마실(釜谷), 이실(耳谷)이 각각 나름대로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고 있으나 앞들에는 선사시대의 지석묘군이 있는데 경지 정리로 그 수가 줄고 있음이 애석하다.
○ 신당(新堂) 1600년 말경에 달성인 서대건 공이 입촌하여 보니 곽당(藿塘)이라는 마을의 옆에 새로(新)이 생긴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신당이 성해지자 곽당촌은 차차 쇠퇴하여 폐촌이 되어 지금은 동네터가 밭으로 변해 있다.
○ 가마실(釜谷) 마을 주위의 산세가 가마솥(釜) 형국이라고 붙여진 이름으로 풍수지리상의 동명이다.
○ 이실(耳谷) 마을 양쪽의 산등선 모양의 사람의 귀(耳)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동명이라하나 그 전에는 이길(梨吉)이라 했다. 이길(梨吉)을 이곡(耳谷)으로 개명한 것은 이길원(梨吉院)이 있던 곳이라 원명을 그대로 동명으로 하는 것보다 같은 음인 다른 한자로 바꾸어 부른 것이 아닌가 싶다.
2리인 부곡에는 1600년말에 창녕인 성세린 공이 입촌 정착하여 동풍을 유교의 바탕에 두는 등 윤리관 정립에 수범적인 처신을 하였다. 이곡(耳谷)에는 1600년초에 피난 차 이곳에 머물던 의성인 김경원 공이 정착하여 마을을 가다듬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으므로 오늘의 이곡은 의성 김씨 마을이 되었다 한다. 이길원(梨吉院)지에는 당시를 증명해주는 고목이 남아 있어 여행객들의 인상 깊었던 술맛과 더 불어 짙은 잔영이 되어 있다.
녹명리(鹿鳴里)
화악산의 지봉들이 줄줄이 이어져 양 줄기가 서로 경주나 하듯이 옥산(玉山)천을 끼고 달리다 동쪽 봉우리 아래 등선에는 2리가, 서쪽 줄기 기슭에는 1리가 자리하면서 산골짜기 계천이 분동을 시켜놓고 있다.
이곳 역시 남고북저이나 그리 심한 비탈은 아니고, 2동은 사촌천이 옥산천과 합류하는 지점인 만큼 유독 돌이 많은 전답이나 1리는 나름대로 비옥한 토질의 토지가 마을 앞에 있다.
2리인 녹갈리에는 1630년경에 현풍에서 성주인 곽 탄 공이 입촌하여 성주 곽씨촌을 이루게 되었다.
○ 녹갈(鹿渴) 옛날 사슴이 물을 먹고 간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나 이보다 사슴이 흔할 때 사슴들이 먹는 우물이 있으므로 기인된 동명이라는 것이 타당성 더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녹갈이라 해도 칡이 많아 사슴들이 모여든 데서도 유래를 찾을 수도 있다.
어떻든 사슴으로 인한 동명임은 분명하다. 녹명이라는 동명도 사슴이 많이 모여들므로 우는 사슴도 있었을 것이니 사슴으로 연유된 동명임은 틀림없을 것으로 본다.
○ 구만(九萬) 1리인 구만리에는 서기 1700년 초에 성주인 도진칠 공이 대구 서촌(西村)에서 입주하여 성주 도씨 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구만(救萬)이라는 설도 있으나 조선초 시대의 각종 지리지에는 구만(九萬)으로 표기되어 있다. 구전으로는 임란시 부근 동민들이 운정산에 피난차 모여 들어 산성을 축조하여 왜군과 일전을 각오했으나 왜병이 오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구(救)했다고 구만(救萬)으로 동명을 정했다는데 어찌하여 상당수의 관 기록에 구(九)자로 표기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또 지방행정구분개정시 녹갈(鹿渴)과 구만동(九萬洞)을 합동할 때 녹명리(鹿鳴里)라고 동명을 정했는지도 불명이다.
사리(沙里)
남산과 화악산의 준령고봉이 마을 앞뒤로 내리 뻗어 나가고 양산령 사이로 계곡천인 부곡천이 흐르고 있다.
부곡천을 따라 서쪽만 열려 있는 산촌으로 청도읍 상리와 통하는 밤 고개 길은 예나 지금이나 심산유곡으로 알려져 있고 산서 지방의 삼대(三大)고산 중 이대고산이 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산간 마을이나 오랜 마을 유래를 갖고 있기도 하다. 대구에 속한 각초동면의 사외(沙外)동이 지방행정 개편 시 동명이 바뀐 마을이다.내사(來舍), 외사(外沙), 상사(上沙), 하사(下沙) 등 동명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도 사(沙)자는 꼭 붙어 다닌다.
원래 이름은 싸리골이다. 싸리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싸리를 사(沙)로 음만 따서 표기한 것이다. 1리인 하사(외사)에는 임란당시 인 1952년에 평택인 임동철 공이 피난차 이 곳에 들렀다가 그대로 정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리인 상사(내사)에는 동년대인 임란시에 피난차 머물던 김해인, 김동국 공이 정주하였다. 사동은 산곡촌이라 경지도 그리 넓지 않은 곳인데도 비교적 주민이 많은 편이다. 임산물이 풍부하여 그런지도 모른다.
○ 비수덤 화악산 계곡에 있는데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낸다. 그러면 2, 3일 내로 효험이 있어 비가 내렸다 한다. 이 기우제는 언제부터 이 곳을 택하게 된 것인지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어 내력을 알 수 없다.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이 마을에 풍년을 기원하는 풍년제를 사당이나 성황당이 아닌 산중에서 지내는 일이다. 화악산의 여러 봉우리 가운데 신선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은 옛날에 신선들이 살았다는 곳으로 신선과 자연에 풍년을 기원하는 풍년제를 년 1회 택일하여 지냈다는 것이다. 풍년이 들건 말건 1년에 한번씩 지내던 것을 시대의 흐름으로 폐지한 지도 오래다.
함박리(咸博里)
화악산계가 귀찮을 정도로 갈라져서 밀양과 군계를 이룬 곳에 마산 방면에서 대구로 가던 나그네와 상인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던 요지령(要地領)이 당시의 통로로 이곳 함박리로 통해 있다.
옥산리 쪽인 북편으로만 트이고 삼면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다. 삼면의 산들이 무려 400고지를 다 넘는 산들이라 밀양 방면으로 통하는 길이 험난함을 알 수가 있다.
○ 함박(咸博) 마을 뒷산이 "박"같은 평국이라고 동명을 정하고 한자로 표기만 했을 뿐 "박"과는 전연 뜻이 다른 표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동리에 관해서는 일체불명이다. 이 마을은 두 마을로 형성되어 있는데 하함박, 상함박이다.
청도 납닥바위, 유등의 영남 물고개와 함게 청도 3대명물의 하나인 함박의 정자나무 굴 길이 있다. 괴목나무가 아래로는 두 그루 같이 보이고 위로는 한 그루 같이 보이는데 이 나무 사이로 요지령(要地領)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 밀양, 마산 방면에서 대구, 한양으로 오고가는 행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정자나무 속의 길로 이름이 널리 퍼졌다. 요지령과 더불어 많은 행인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옥산리(玉山里)
천왕산계와 배바위산계가 첩첩으로 다투기나 하듯이 험한 고개 높은 봉우리를 이루면서 요지령이라는 태산 고개 마루를 있게 하고 그것마저 부족하여 함박산봉과 대산(臺山)봉이 마을 앞뒤로 가리는 가운데 숨통처럼 대산천이 흐르는 계곡이 의외로 깊은 골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계곡변에는 산간들이 골마다 펼쳐져 아담하고도 비옥한 농토를 이뤄 경작되고 있다. 옥산리는 1, 2, 3리이나 1895년의 영남읍지에는 대산(臺山), 옥포(玉浦), 개양(開陽)으로 1917년 전국 리동명칭 일람표에는 옥척(玉隻), 태산(台山)동으로 되어 있다. 또 지형에 따라 상대산, 중대산, 하대산으로 구분하고 있다.
○ 상옥산(2리) 진주인 강재호(姜載浩) 공이 입촌(入村)한지가 오래 되었다는 것이다. 옥산리에서는 제일 위쪽이며 깊은 곳이다. 지금은 옥산지라는 큰 못이 있어 이곳이 옥포라면 현실성이 있다 하겠다.
○ 하옥산(下玉山) 제일 아래쪽에 있다고 하옥산 또는 하대산이라 한다. 1리는 기록으로는 1730년경에 전 주인 이용호 공이 입촌하였다 한다. 물론 이전에도 주민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고분(古墳)군이다. 출토되는 파편은 신라 가야 토기로 보이나 정확히 알 수가 없을 따름이다. 그런데 18세기부터 알 수 있으니 연구가 계속 되어야 할 곳이다.
○ 오리바다, 오리밭 지형이 묘하게도 베틀과 비슷하여 베를 짜려면 실과 바다가 있어야 하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오리바다가 변하여 오리밭으로 부른다.
○ 우척(牛尺), 옥척(玉隻), 옥포(玉浦) 이 마을의 산세의 형상이 소(牛)가 누운(臥)것과 흡사하여 우척이라고 불렀는데, 그 뒤에 땅이 비옥하고 마을로서는 길지(吉地)라는 지관의 말에 따라 옥척이라 고쳤다 한다. 보물이 풍부하다 하여 다시 옥포(玉浦)로 개명되었다 하나 확실치 않고 이 옥포가 상대산이 아닌가 싶다. 이 마을에는 달성 서씨가 주종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지대가 평평하다.
○ 신기(新基) 새로 터를 잡았다고 새터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 마을은 1900년 중엽이니까 해방 전후하여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옥산리는 대산(臺山)과 옥척(玉隻)리에서 따 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