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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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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조병옥 박사가 본 대구폭동 및 4.3 사태
촌놈 추천 0 조회 65 06.07.28 15: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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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옥 박사가 본 대구사태

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역시 공산당이 배후 조종하는 시민들이 경찰관서를 습격함으로써 폭동화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신문에 발표된 군정청 경무부장 조 병옥(趙炳玉)의 대구사태 개요는 다음과 같다.

“10월 1일 오후 1시 대구역전에서 동맹파업단의 무질서한 군중이 집합하여 치안을 교란할 염려가 있으므로...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역전에 있는 전평(전국노동조합평의회) 본부에서는 ‘남조선파업 공동투쟁위원회’ 간판을 걸고 군중의 위세를 보였다.

오후 2시경 수사과장 이하 30명의 경찰관을 파견하여 해산명령을 다시 발하고...전평 간부와 해산에 관한 절충을 하는 동안에 포위를 당했으므로 권청장은 무장경찰관 60명을 인솔하고 현장에 임하여 동위원장과 직접 교섭하여 다시금 해산을 명령했다.

이때 집합한 군중은 파업자, 공장직공, 일반시민 약 1만5천명이었는데, 무장경관을 철퇴시키지 않으면 해산 안한다며 명령에 불복했다... 군중은 명령복종은 고사하고 도리어 경찰관을 타살(打殺)하라고 고함을 치면서 혼란상태를 이루어 사태는 극히 험악... 청장은 발사를 명령, 군중은 해산... 그중 사망자 1명 발생... 그날밤 대구의과대학에서는 공산당 대구책임자 손 기채(孫基采)지휘하에... 학생폭도 일부는 40정의 무기 탈취와 유치장 파괴의 폭거에 이르렀다... 각 경찰서 파출소를 파괴하고 파출소 경찰관 또는 노상에 있는 경찰관을 살해하고 경찰관의 가족을 납치, 가옥, 가구등의 파괴, 약탈을 자행 하였다 (이하생략)


                                조병옥 박사가 쓴 4.3사태의 실상

먼저 4.3폭동의 경위부터 살펴보자.  다음은 당시 미군정청 경무부장(趙炳玉)이 발표한 제주도 4.3폭동의 최초 단계의 양상이다.

“(4월 3일)폭동이 일어나자 1읍(邑) 12면(面)의 경찰지서가 빠짐없이 습격을 받았고 저지리, 청수리 등의 전부락이 폭도의 방화로 전부 타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살상방법에 있어 잔인 무비하여 4월 18일 신촌서는 6순이 넘은 경찰관의 늙은 부모를 목을 짤라 죽인후 수족을 다 절단하였으며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임신 6개월된 형수를 참혹히 타살하였고, 4월20일에는 임신중인 경찰관의 부인을 배를 갈라 죽였고,4월 22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부친을 총살한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임신 7개월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체로 매장하였고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서는 대동청년단 간부로서 피살된 김 용조의 처 김성희와 3세된 장남을, 30며명의 폭도가 같은 동네 김 승옥의  노모 김씨 (60)와 누이 옥분(19), 김종삼의 처 이씨(50),16세된 부녀 김 수년, 36세된 김 순애의 딸, 정 방옥의 처와 장남,20세된 허 연선의 딸, 그의 5세 어린이등 11명을, 역시 고 희숙씨 집에 납치, 감금하고 무수 난타한후 눈노름이라는 산림지대에 끌고가서 늙은이 젊은이 불문하고 50여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과 죽창, 일본도 (日本刀)등으로 부녀의 젖, 배, 음부, 볼기 등을 함부로 찔러 미쳐 절명(絶命)하기도 전에 땅에 생매장 하였는데, 그중 김 성희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왔다.

비싼 대가 치른 사상초유의 민주선거  그리고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위하여 부락민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심지어 부녀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천인이 공노할 그 비인도적 만행은 이루 헤아릴수 없는 정도이다.  “경향신문 1948년 6월9일자”

제주도 4.3폭동에이어 북한 공산당국은, 거의 전적으로 압록강 수력발전에의존하고 있는 남한에의 송전(送電)을 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해 일제히 단전(斷電)하고 말았다.  그로 말미암아 남한의 공장은 전면 가동중단되고 말았다.  공산 게릴라들은 파출소를 습격하고 학생들은 적색분자의 선동으로 툭하면 “동맹휴학”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사이래 처음으로 우리손으로 뽑은 제주도를 제외한 국회의원 1백 99명 (이북의석 1백석의 자리는 비워 두었다)은 구조선총독부 저리에서 역사적인 개원식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을 소멸시키기 위한 공산당의 선동, 선전과 파괴 공작은 그칠줄을 몰랐다.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은 각급 세포조직을 통해 38이북에 “정통적인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든가, 북에는 수십만의 강력한 군대가 있어 국방력이 약한 남조선은 곧 해방된다는 등 루머를 퍼뜨렸다.  사실 이런 류의 루머는 공산당이 바라는 희망사항이며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루머는 많은 사람들을 현혹, 불안하게 만들었다.

5.10 총선을 전후하여 공산당이 벌인 선거방해는 3백35개 경찰관서를 습격한 것을 비롯, 78명의 경찰관이 피습, 그중 64명이 희생되었고 무고한 양민 5백70여명을 살상했다.  비싼댓가를 치른 사상초유의 선거였다.





2004.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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