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덕면 신중리 신촌을 망청개라고도 하는데 청일전쟁 때 청군이 크게 망한 곳이라는 데서 지어진 이름이다.
동학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아산만에 상륙한 엽지초휘 하의 청군은 성환과 안성, 직산등에 주둔하고 일부 초색병은 충주에까지 둔병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한편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의 혼성여단 가운데 일개부대 병력을 인솔하고 성환에 남하한 마쓰사끼 부대와의 첫 대전에서 어이없게도 대패를 당한 청군은 지리분멸하고 재정비를 위해 충주에 있는 청둔병을 안성으로 집결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충주에 있던 청군이 안성을 향해서 출발하기로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 일본 마쓰사끼 부대는 그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급거 충주를 향해 직산을 떠났다. 그리하여 충주를 떠나 안성을 향하던 청군과 직산을 떠나 충주로 들어가려는 일본군은 해질 무렵에 석양을 등에 없고 요천변 대미들(지금의 망청개)에서 마주치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청군의 땋은 머리가 망했다는 뜻으로
그리하여 밤 오래도록 계속한 싸움은 다음날 새벽에 이르러야 총소리가 멎었는데 이 전투에서 청군은 거의 전멸을 하고 그 시체가 이 들판을 덮히다시피 나뒹굴고 있었다. 이에 일본군들은 마을사람들을 동원해서 청병시체를 한군데로 모으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시체를 운반하는데 있어 땋은 머리를 잡고 질질 끌어왔다(그 당시 청나라 병정들은 앞머리를 배코치고 뒷머리를 길게 따 내리고 있었는데 이런 것을 개라고 했다.
이것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땋은 머리가 깎은 머리한테 망했다고 했는데 후일에 그곳 지명을 청군 땋은 머리가 망했다는 뜻으로 망청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2) 배극렴과 어래산
이 태조가 세 번씩이나 찾아 왔다고 해서 삼방리,
그 산의 이름을 어래산이라고 부르며
배극렴이 땔나무를 하던 골짜기를 배나무골,
그 부인이 베틀을 놓고 베를 짜던 굴을 베틀굴,
또 이태조가 국사를 의논했던 산정을 국사봉
주덕면 삼청리에 해발 387m의 경승 좋은 산이 있는데 태조에 얽힌 전설이 있다.
공민왕으로부터 남달리 총애를 받고 있던 배 극렴은 왕의 시역사건이 일어나자 정사에 뜻을 잃고 모든 사관을 버리고 그 부인과 더불어 충주고을로 낙향을 했는데 그가 어느 곳에 은거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배 극렴은 어래산 동굴을 찾아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기로 작정하고 머루 다래를 따먹어가며, 그 부인은 베틀을 놓고 베를 짜며 야인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좌우군 도총사였던 이성계가 왕실을 한 손에 휘어잡게 되자 그의 정권을 위한 명분과 대외적인 명분으로라도 고려중신이었던 우현보, 이색, 정몽주, 배극렴과 같은 사람들이 그의 자문직을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불사이군의 뜻을 고집한 우현보, 이색등은 하옥을 하고 정몽주는 격살을 하였다. 배극렴은 행방조차 묘연해지자 8도 수령 방백에게 찾아내도록 영을 내렸다 우연한 기회에 배극렴이 충주고을을 모 산중에 은거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성계는 직접 찾아갔다.
그러나 첫 번째도 못 만나고 두 번째도 못만나고 세 번째 가서야 동굴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배극렴을 만나서 솔직한 집권계획을 밝히고 앞으로 개국공신으로 협조해 줄 것을 간청하므로 다시 정사에 나가서 개국공신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 후 이 고을 사람들은 이태조가 세 번씩이나 이곳을 찾아 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삼방리라 하고 그 산의 이름을 어래산이라고 부르며 배극렴이 땔나무를 하던 골짜기를 배나무골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부인이 베틀을 놓고 베를 짜던 굴을 베틀굴이라고 부른다. 또 이태조가 배극렴과 첫 번째 만나서 국사를 의논했던 산정을 국사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 빈대절터
승방안은 빈대가 벌통속의 벌떼 같았으며
자기 몸은 빈대물린 자국으로 빈틈이 없는데다
몸의 살집이 빠지고 피를 과중하게 잃고보니..
. 주덕변 덕련리 조동마을 뒷산 아늑한 곳에 나무가 우거졌는데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이다. 그 산을 설매산이라고 부르며 그 절을 설운사라고 불렀었다.
그리 크지 못한 절에 노승 주지와 한 탁발승이 있었는데 노주지가 입적을 하자 젊은 탁발승이 주지가 되어 불사를 하고 있었다. 혼자손이라 절을 비우는 일이 너무 잦았다. 한번 시주길을 떠나면 몇일 또는 몇 달씩 되는 때가 많았다. 그렇게 되니사찰경내는 잡초가 우거지고 법당 안에 먼지가 쌓이고 거미가 줄을 치고 밤낮 산짐승들도 비를 피하는 곳이 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어느 해 여름 바랑을 메고 절을 떠난 주지승이 가을이 되어 많은 시주미를 거둬 가지고 절로 돌아 왔다. 오랜 만에 돌아온 경내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청소할 겨를도 없이 승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너무도 곤하게 잠이 들어 빈대가 뜯는 것도 몰랐다.
다음날 늦게서야 잠이 깨었는데 일어나려고 하니 현기증이 나서 거동할 수가 없었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자기 몸을 살피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승방안은 빈대가 벌통속의 벌떼 같았으며 자기 몸은 빈대 물린 자국으로 빈틈이 없는데다 몸의 살집이 빠지고 피를 과중하게 잃고 보니 현기증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새삼 법당 생각이 나서 기어서 법당으로 들어섰다. 법당안에는 있어야 할 불상은 안 보이고 법당 한 가운데 이때까지 없던 굵은 기둥이 하나 서 있었다. 더욱 이상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나무 기둥이 아니라 놀랍게도 수천만마리의 빈대가 뒤엉겨서 서로 잡아먹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다가 사람의 냄새를 맡은 듯이 법당안의 빈대가 웅성대기 시작하더니 기둥이 무너지며 사람에게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또다시 놀란 주지승은 기겁을 하여 도망을 치려고 하였으나 몸을 움직일 힘도 없어지고 빈대는 막아야 살겠다는 생각에서 법 당에다 불을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간신히 경내에 솟아 있는 바위머리를 끌어 안은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마을에서 보니 절에서 화재가 났으므로 황급히 몰려가 보니 절 부근엔 빈대가 우글거렸고 주지승은 이미 숨을 거두어 있었다. 그 후 그 터가 좋아서 절을 지으려고 여럿이 와 보았으나 아직도 빈대들이 돌 틈에 살고 있다고 하는 빈대 절터라는데서 헛걸음을 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4) 장자 망한 꼬꼬바위
장자는 화를 벌컥 내며 삽으로
쇠똥을 바랑에다 푹 퍼 넣으며...
주덕면 신양리 마치마을과 새터마을 사이에 꼬꼬바위가 있다.
옛날에 최장자란 사람이 이 바위 옆에 집을 짓고 살았었다. 그러나 그 장자는 심사가 좋지 못해서 남에게 인정을 베풀어 본 일이라고 한 번도 없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욕심만 차리고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날 한 노승이 문전에 와서 시주를 청했다. 그러자 최장자는 시주할 것이 어디 있느냐며 다른데나 가보라고 냉정히 거절했다. 노승은 조금이라도 정성만 표시하면 된다고 말하고 합장을 했다. 장자는 화를 벌컥 내며 옆에 있던 삽으로 외양간에 있은 쇠똥을 바랑에다 푹 퍼 넣으면 이래도 안갈테냐고 눈을 훌부렸다. 어이없다는 듯이 서있던 노승은 합장을 하고 물러났다.
그런 일이 있은 지 100 일이 되는 날 최장자는 잠자리로 들어 갔는데 밖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나기에 방문을 열어 보았더니 어떤 장수가 커다란 바위 한 개를 등에 지고 와서 마당에다 내려 놓더니 한양사는 안장자(친한사이)가 보낸 것이라고 했다. 최장자는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장수는 이것이 도깨비 바위인데 이곳 돌문에 대고 소원하는 것을 말하고 가볍게 세 번 두드리면 소원한 물건이 나온다고 하며 「무엇이 소원인가 말을 해 보시오」하는 것이었다. 최장자는 「황금 한 말만 가져 봤으면 원이 없겠소」했다. 장수가 「황금 한 말 나오너라」하고 세 번 두드리니 정말 그 속에서 황금이 쏟아져 나왔다. 최장자는 어쩔 줄 몰라 덩실덩실 춤을 추웠다. 이 것을 본 장수는 바위를 두고 나가 버렸다. 최장자는 장수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금덩이에만 정신이 팔려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금덩이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것들은 마침내 쌀 만해 지고 또 조알만해지고 마침내는 흔적도 없어져 버렸다.
어부적이 나서 눈을 떠보니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최장자는 아쉬움과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문 밖으로 나가 장수가 놓고 간 도깨비 바위 자리를 살펴 보았으나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길가에 오래 전부터 넓적하게 자리잡고 있던 바위만이 여전하였다. 방에 들어온 장자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던 다음날 대문 앞길을 오락가락하며 집터를 살피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는데 혼자말로 「옥에도 티가 있다」고 중얼거렸다. 최장자는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댁은 누구이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그쳤다.
그러자 「나는 지술을 공부하는 과객인데 이 집이 만석군이 집터이지만 저 바위 때문에 천석군이 밖에 안되니 하는 말이요」하고 그 노인은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깨진 바위 틈에서 몸은 봉(鳳)이 되었고
머리는 아직 닭과 같은 새 한 마리가
피가 흐르는 발을 벌벌 떨며..
최장자는 들었다. 봤다는 듯이 그 날부터 품을 사서 바위를 깨기 시작했다. 바위를 깨면서도 혹시 꿈에서 본 금이나 안 나오나 하고 눈을 떼지 않았다. 인부들은 열심히 바위를 깨부수었다. 바위가 반쯤 부숴졌는데 느닷없이 바위가 크게 요동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겁이 나서 모두 뒷걸음질을 치고 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마른 번개가 지나가더니 그 깨진 바위 틈에서 몸은 봉이 되었고 머리는 아직 닭과 같은 새 한 마리가 피가 흐르는 발을 벌벌 떨며 최 장자를 향하여 원망스럽다는 눈치로 꼬꾜, 꼬꾜 세 번을 소리치더니 간신히 날개를 펴고 산 넘어로 날라가 버렸다.
그 바위는 봉황태암으로 그대로 두었으면 그곳에서 봉황이 등천할 것을 부순 것이다. 그러므로 최장자는 패가망신을 하고 말았다. 물론 바위를 부수라고 일러준 노인은 먼저왔던 노승의 변장이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 후 이 바위를 꼬꾜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5) 풍년드는 용가래미
이홈 모양으로 된 못자리의 논을
용이 갈라 놓은 논뱀 이란 뜻으로
주덕면 「대곡리」에 뽕나무밭 (삼성제사 공장 직영)이란 집단상전이 있는 곳 큰길가 들판에 수천평 되는 솔밭을 볼 수 있는데 이 솔밭둘레에 홈을 파 돌린 것처럼 생긴 논다랑이가 있다.
이 솔밭에는 옛날에 어떤 부자가 호화로운 집을 짓고 살았는데 아무나 못 드나들게 하느라고 집 주변에 못을 파놓고 출입문에는 파수병을 세워놓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연못에는 물이 펑펑 쏟아지는 물구멍이 있어서 언제나 물이 가득차 있었다고 하는데 그 연못에는 이상한 기물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서 인근 사람들이 두려워 해서 접근 하기를 꺼려했고 그 집 식구들조차도 연못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연못에 흰 구름이 서리더니 하늘로 치솟으며 구름 사이로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었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용이다 용」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용이 나간 자리에는 그 못둑 한 곳이 갈라져서 못물은 빠지고 못은 긴 골짜기 모양을 남게 되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이 못자리를 메워 논을 만들고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이홈 모양으로 된 못자리의 논을 용이 갈라 놓은 논뱀 이란 뜻으로 「용가래미」또는 「용배미」라고 불리고 있다.
지금도 그 논 구석에서 솟는 물은 수량 많고 물 맛 좋기로 유명하며 아무리 가물은 해에도 이 물이 닿는 논은 풍년이 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