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만점의 풍운아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면, 마라트 사핀(러시아)은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다. 9년 전, 20세의 사핀은 그의 등장을 알렸다기보다 테니스 경기에 대한 우리의 온갖 선입견을 깼다. 사핀은 체격이 큰 데도 마치 단신 선수처럼 민첩하게 움직이는 플레이어, 2000년 US오픈 결승에서 피트 샘프라스를 격파한 완벽한 스윙의 명수, 서브 앤 발리 테니스의 시대를 확실하게 마감한 선수였다. 샘프라스는 “사핀은 오랫동안 세계 랭킹 1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핀은 뭔가 다른 것을 원했고, 그것을 찾으며 13년을 보냈다. 자신보다 앞서 등장한 그 어떤 선수 못지않게 자신의 매력과 ‘성질’과 기분, 감정, 심지어 불행한 모습까지 ‘사핀’이라는 선수에 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사실상 11월로 예정된 사핀의 은퇴를 아쉬워하며, 그리고 그동안의 ‘업적’을 기념하며 사핀 본인의 이야기는 물론 그를 사랑했던, 그의 응석을 받아주었던, 아니면 그를 끔찍이 싫어했던, 또는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인물임을 알았던 사람들이 사핀에 대해 들려주는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무작정 떠나는 자동차 여행 마라트 사핀은 부상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플레이도 엉망이었다. 결승에서 완벽한 플레이를 보이며 타이틀을 따냈던 2000년 US오픈 대회에 디펜딩 챔피언으로 참가하는 날짜도 채 한 달이 남지 않았다. 매츠 빌렌더는 “그 경기는 골프에서 59라운드와 마찬가지였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경기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당시 사핀의 코치였던 빌렌더는 사핀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몬트리올 대회에서 초반에 탈락한 후 사핀과 빌렌더 두 사람은 빌렌더의 집이 있는 아이다호 선밸리를 출발해서 에릭 클랩튼의 공연을 보기 위해 보이스(Boise)까지 갔다. 두 사람은 3시간 짜리 온천 여행에나 필요할 법한 짐만 ‘달랑’ 챙겨 빌렌더의 캠핑카를 3일 동안 운전했다. 사핀은 느긋한 마음으로 즐거워했고, 테니스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공연이 시작되고 노래 몇 곡이 끝나자 사핀은 질리도록 들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쿠스틱 기타를 치는 클랩튼? 따분해. 그런 마음인지 사핀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빌렌더는 “사핀은 내가 가르치는 선수고, 나는 그의 코치다. 그러나 사핀의 기분에 따라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정말 콘서트를 끝까지 보고 싶었다. 진짜 괜찮은 공연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자신도 기타를 즐기고, 또한 클랩튼의 열렬한 팬이었던 빌렌더는 그때 사핀의 기분이 어두운 것이 못마땅했다고 실토한다(물론 지금이야 좋게 말하고 있지만). “그게 마라트에요.”
서슴없이 바지를 내리는 남자 2004년 프랑스 오픈, 파리의 늦은 밤. 사핀은 5세트에서 회심의 드롭샷으로 승부를 결정짓고는 입고 있던 반바지를 아래로 내린 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곧이어 1포인트의 벌점이 부과됐다. 사핀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경기를 망치려고 했다. 테니스 경기를 진행하는 사람들 전부. 진짜 뭘 모르는 사람들 아닌가?!”
라켓을 던지고, 밟고, 팽개치는 선수 2005년 바르셀로나의 연습 코트에 서 있는 사핀. 그는 기분이 좋지 않다. 우지끈! 라켓 하나가 바닥으로 날아간다. 딱! 또 다른 라켓이 나뒹군다. 그리고 또 하나. 사핀의 코치인 피터 룬드그렌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사핀은 이틀 뒤에 경기가 있는데 가방에 있는 라켓은 두 개다. 쩌억! 이제 하나 남았다. 우직! 룬드그렌은 말한다. “사핀의 매니저를 불러 말했다. ‘문제가 생겼다. 마라트가 방금 라켓을 전부 부러뜨렸다.’ 다음 날, 공항으로 달려간 룬드그렌은 매니저의 친구로부터 라켓이 든 가방을 손에 넣는다. 그 사람은 선물로 사핀의 라켓을 몇 개 받았는데 이제 되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 매니저 친구는 지체 없이 귀국행 비행기에 탑승한다. 룬드그렌은 “사핀이 그런 짓을 했을 때는 상당히 열이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나고 보니 무척 재미있다”고 말한다. “사핀은 화가 나서 자기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냥 무지하게 화가 난 것이다. 그래도 사핀은 정직한 사람이다. 사핀이 그렇게 화가 나면 당신도 거의 비슷하게 그걸 느낄 수가 있다. 그의 분노가 이해 된다고나 할까.” 사핀은 1라운드에서 탈락한다.
일 년만 더 뛰어도 좋을 선수 2009년 마라트 사핀 고별 투어의 첫 개최지는 호주 퍼스에서 열리는 호프만 컵이다. 이 대회에서 사핀은 여동생 디나라 사피나와 팀을 이루고 있다. 시작부터 평범하지가 않다. 사핀이 양쪽 눈에 멍이 든 채 나타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싸울 때 생긴 멍이다. 사핀은 싸움에 대해 별다른 말이 없다. 자기가 이겼다고만 말한다. 지금은 절친한 친구인 룬드그렌조차 전모를 알지 못한다. “사핀이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으면 나도 자세한 것은 묻지 않는다. 사핀하고 싸우고 싶지 않다.” 호프만 컵 결승에서 사핀은 도미니크 흐르바키의 서비스를 리턴할 준비를 한다. 서브는 사이드라인을 벗어났지만 사핀은 반사적으로 두 팔을 뻗어 투핸드 백핸드로 볼을 날려보내고 볼은 네트 저지를 맞힌다. 사핀은 네트로 다가가 네트 저지에게 사과하고 어깨를 두드린 다음 볼에 키스를 한다.
무엇이든 잃어버리기 좋아하는 선수 이반 류비치치는 “토너먼트에 와서 사핀이 라켓을 잃어버린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신발도 잃어 버렸다”고 말한다. 류비치치와 사핀은 어렸을 때 국제팀대항전에서 만나 몬테카를로에서 종종 연습을 했던 사이다. 사핀이 올해 윔블던 결승을 향해 시합을 하는 동안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 사핀은 각종 물건들과 함께 공항에 도착한다. 그 시즌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레코드를 잃어버리고, 인터뷰는 따분하고, 은퇴에 관해 말하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사핀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무엇이 다른가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토너먼트에 참가할 때 내가 느낄 거라고 생각했던 느낌, 내가 기대했던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사핀이 탄 비행기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는 뭔가를 잃어버린 모양새다. “비행기에 그냥 두고 내렸다.” 그는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간다.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에게 필요했던 용품은 다음 날 도착하고, 사핀은 1라운드에서 패한다.
자기 스타일대로 산에 오르는 선수 ‘터키석의 여신’이라 불리는,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히말라야 초오유에 오르려면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러나 사핀은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2007년 가을, 테니스 성적이 형편없었던 사핀은 네팔로 날아간다. 사핀의 등반 친구들을 만났던 드미트리 툴스노프는 그 여행에 대한 즐거운 이야기를 몇 가지 들려준다. “마라트는 전속력으로 산을 올랐다. 완전히 탈진 상태였다. 머리는 멍하고, 웅웅거리기도 하고. 산소가 없었다. 사핀은 그게 5세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낭을 맨 채 서두르고 있었다. ‘난 이놈의 산을 정복할거야!’ 다른 친구들은 정말 천천히 걸으면서 ‘이 친구, 멍청이 아냐?’라며 놀렸다. 원래 등반은 30일이 걸릴 예정이었지만 사핀은 10일 만에 내려온다. 툴스노프는 사핀의 동료 등반가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냥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상상만 했다. ‘누군가’가 마라트와 함께 히말라야에 가야만 했다. 누군가란 바로 여자다. 그가 섹스 없이 한 달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사핀은 자신의 등반에 대한 이런저런 야단법석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거기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갖는 게 좀 우습다. 나는 우주에 가는 게 아니다. 티켓을 사서 히말라야에 갔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지냈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그렇게 크게 소문이 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우와, 히말라야에 갔다면서요?’ 라고 말한다. 글쎄, 티켓을 한 장 사라. 티켓 값은 60달러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면 히말라야에 가는 거다.” 툴스노프는 “내 생각에 마라트가 다른 사람들만큼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즐기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마라트의 말말말… “그냥 라켓을 부러뜨렸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별로 위험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2000년 신시내티에서, 투어에서 사용한 30번째 라켓을 부러뜨린 후에.
“나보고 기자회견장에서 ‘네,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라는 것인가. 사실 우리 사이니까 하는 말인데, 나도 그러고 싶다.” =2000 US오픈 결승에서 샘프라스를 꺾고 “오늘 밤 술에 취할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자.
“어떻게 되는대로 경기를 할 수 있겠는가? ITF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2000년 로마에서, 그 해 초 호주오픈에서 경기를 일부러 무성의하게 했다며 벌금이 부과된 것에 대해 질문을 받자.
“코트에서 100퍼센트 모든 것을 보여주는 사핀 보다는, 온갖 고생을 하며 20퍼센트만 보여주는 사핀을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2001년 마이애미에서. 연달아 참가한 토너먼트 두 개에서 힘겨운 플레이를 펼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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