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국제화시대에 부응하는 교육력제고를 위하여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로서 살아있는 유럽문화 및 앞서가고 있는 유럽 인문교육과 실업교육의 실태를 알아보고자 '96년 8월 29일부터 9월 9일까지 충청남도교육청이 주관하는 교원 해외연수 유럽 4단의 일원으로 독일,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많은 것을 배우려고 마음먹고 출발하였으나, 일부지역의 학교 및 농장방문, 언어소통의 문제, 우리 문화와의 차이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의 제한 등으로 그 나라의 전체 실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특별한 사례만을 走馬看山式으로 살펴볼 수 밖에 없어 무척 아쉬웠다. 그러나, 百聞而不如一見이라고 말로만 들어 알고 있던 곳을 실제로 살펴보니 그 나라의 형편을 잘 알게 되었고, 우리 나라를 바르게 바라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되어 해외여행이란 해 볼만한 가치가 있음을 느끼게 하였다. 이번 교원 해외연수 중 유럽 4단에 얽힌 사연들과 배운 느낌을 각 나라별로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1.연수 준비
'96년 6월 17일 대천 임해수련원에서 사전연수를 8시간 받고 유럽 1, 2, 3, 4, 5단별 특성에 맞추어 단장 및 총무와 영역별(농업, 공업, 상업)간사를 선출하여 일정에 맞는 프로그램을 작성하도록 간사들에게 위임하였다. '96년 8월16일 대전의 온누리 여행사에서 마지막 사전교육을 받으며 유럽의 문화와 생활관습에 대하여 질의 응답식으로 유럽 4단원 22명은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묻고 또 물었다.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설레임과 모든 사람들이 가보고 싶어하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내마음도 어느 사이에 초등학교시절 소풍가기 전날밤의 어린 소년이 되어 있었다.
'96년 8월 29일 오전 6시 30분에 천안 톨게이트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망향동산에서 김밥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10시 30분까지 김포국제공항 제 2청사 2층에 집결하여 외환은행에서 환전을 하고 출국수속을 밟아 12시 40분 대한항공 KAL 905편으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frankfurt)를 향하였다. 비행 항로는 서울→수원→중국(상해)→몽고(울란바토르)→티벳고원→러시아(이르쿠츠크-옴스크-스베르들로프스크-노보시비르스크-시베리아) →덴마크(스톡홈롬)→독일(프랑크푸르트)로 되어 있었고 고도 65,000피이트로 12시간 40분간 비행하였다. 가는 도중 중국 황하강의 위용을 바라 볼 수 있었고 공산 국가로서 기계화가 되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바둑판처럼 경지정리가 잘되어 있어서 깜짝놀랐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우리가 앞서 있지만 언젠가 중국이 경제적으로 부흥한다면 다시 한국 경제에 타격을 많이 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으며 몽고초원을 지날 때 지난 大火災의 현장을 높이에서 나마 볼 수 있었으며 나름대로의 견해들을 피력하는 동안 독일 현지시간 18시 15분(한국과의 시차는 8시간)에 금융의 도시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였다.
2.준법정신, 장인정신, 자기 것을 소중히 여기는 독일 사람들.
철학자 칸트와 헤겔, 음악가 슈베르트와 바하, 문학가 괴테와 헤르만 헷세,면적 357,000Km2,인구 7,700만명(게르만계), 카톨릭과 개신교의 비율이 반반정도,독일어사용,화폐단위 DM(도이치마르크:1DM=560원),국민소득27,000$.아침인사(Guten morgen:구텐 모르겐),저녁인사(Guten tag:구텐탁),고맙다(Danke Sch n:당케쇤)정도를 사전에 알고 갔다. 독일은 우리 나라의 10월 하순경의 밤과 같이 차가운 공기가 볼을 스치고 독일인들은 스웨터와 바바리코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길가의 가로수는 이미 낙엽이 되어 흩날리고 있었지만 화단에는 정성 들여 가꾼 꽃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듯했다. 차붐(차범근)선수가 활약했던 곳이라 도시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지 안내자(강두현)와 인사를 나누고 전용버스로 이동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동해식당에서 저녁식사를했다. 시내에는 전차, 시내버스, 택시가 어우러져 운행되고 있었는데 영화에서 자주 본 모습들이었다. 우리가 묵을 호텔은 라인강변의 Holiday inn Offenbach였는데 깨끗하게 정돈된 방, 여행자들의 옷을 다릴 수 있는 기계, 실용적으로 꾸며진 공간 및 조명은 이국적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96년 8월 30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조깅하러 나갔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였지만 라인강변을 따라 개와 함께 조깅하는 사람, 자전거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날이 환하게 밝아올 때까지 조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샤워장에 들어갔는데 우리 나라와 다른점이 있었다. 샤워실 바닥과 거실바닥 높이가 같았으며 배수구가 없었다. 욕조 안쪽으로 비닐커텐을 치고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1번스위치를 눌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호텔 로비로 가려고 했는데 2층에서 멈추었다. 우리 나라에서 익숙해진 1번이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0번이 1층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Guten morgen!(구텐 모르겐:좋은 아침!)인사소리에 다른 나라에 와있다는 것을 실감하였고 우리도 Guten morgen!하고 답해 주었다. 그들은 항상 미소를 지으며 이방인들을 맞이해 주었다. 아침 식사시간이다.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흐르는 호텔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난데없는 큰소리가 들려왔다. 일행 중 한 명이 일찍 깨우지 않았다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과 욕설을 하는 바람에 좋은 아침 분위기를 망쳐 놓았다. 여기는 타국이니 조용히 하라고 만류하는 동료에게 "나는 조선 놈이야 내마음 대로하게 내버려둬"하며 眼下無人이었다. 대천에서 사전연수때 식사예절에 대한 교육의 효과도 없이 아마 밤 늦도록 술을 마신 모양이다. 외국인들이 ugly korean을 생각하며 우리를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 보는것 같다. 한 잔의 맥주를 놓고 2∼3시간 조용히 이야기하는 독일인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적어도 우리 일행만큼은 한국의 자존심을 지켜주리라 믿었는데 식당 지배인의 만류에도 아랑곳없다는 듯이 참 부끄러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독일의 일반도로를 주행하는 자동차는 대부분 소형자동차이고 경적소리를 내지않는 것도 이상할 정도였다. 소방차, 도로 보수하는 차를 제외하고는 트럭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대형차량은 밤에만 도로를 이용하도록 하여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교통의 체증을 적게하여 편의를 제공하는 실용적인 방안에 함께 참여한다는 말을 듣고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한 모든 길에는 자전거 전용도로와 인도가 만들어져 있었고 역전 광장에는 수 천대의 자전거로 꽉 차있었다. 출.퇴근은 자전거로 대중 교통수단의 연결되는 곳까지 간 후 지하철, 기차, 전차, 버스 등을 이용하여 교통의 혼잡도 줄이고 카풀(Car Full)제도가 잘 지켜지고 있는 나라였다.
괴테가 사랑에 빠졌던 오덴(Odenwald)의 푸른 산림으로 둘러싸여 있는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를 방문하였다. 괴테가 강의하려고 걸어 다녔다는 네카강의 다리를 보며 고딕과 바로크양식의 결정체인 600년된 古城에 들어섰다. 녹색의 잔디공원이 마치 양탄자같이 눈앞에 펼쳐지고, 오래된 나무, 연못과 햇빛의 조화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될 수 있는한 자연 그대로 간직하려고 노력한 게르만과 옛것보다는 새것을 선호하는 우리와 비교하는 시간을 가져보며,"파우스트"를 쓸 수 있는 영감을 얻었다는 벤치에 앉아 현대 한국의 괴테가 되어보기도 했다. 학생 감옥을 보고 지하에 보관된 22만ℓ나 되는 세계 최고의 맥주통 앞에서 이통을 지키는 우수꽝 스러운 난쟁이 석고상과 포즈를 취하며 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그 맥주통에 "대한민국 만세 000"라는 낙서가 뒷맛을 씁쓸하게 했다. 잠시 후 우리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방문하였다. 1386년 개교한 독일 최초의 대학으로 1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로 역사와 전통이 유서깊은 학교였다. 하이델베르그 시내 몇 개의 건물을 제외하고 대부분 대학부속건물이라 한다. 대학 본관에 들어가 학교내부를 둘러보고 여러가지 정보가 게시되어 있는 게시판을 보며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학생이 된 느낌으로 복도를 걸어 다니며 교실을 살펴보았다. 계단은 대리석으로 되었으며 퇴색된 색깔은 오래된 전통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학교의 팜플렛 몇장을 기념으로 가지고 왔다. 독일의 대부분 대학교는 외국인에게도 개방되어 Abitur시험에 합격한 사람 중 학문연구에 열중하는 사람은 국적에 관계없이 값싼 수업료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대성당에서 1,200년전의 종을 보았다. 대성당 내부가 한국교회와 약간 다르게 되었다. 「십자가 苦難像」이 없이 聖畵가 전면에 걸려 있고 교회의 박물관이 2층에 만들어져 있어 교회의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 촬영지인 학사 주점에 들러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잠시 틈나는 대로 한국에 안부 전화를 하느라 바쁜 우리 일행들. 빵으로만 사니까 밥과 김치가 먹고 싶다며 모두가 음식 타박하는 일에 열중이다. 오후에 쌍둥이 칼로 유명한 점포에 들어갔다. 수공업으로 만든 칼과 공장제 제품을 비교해보며 여러 가지 물건을 볼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칼을 생산하는 이유는 한 직업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연구를 거듭한 장인정신이라한다. 果刀 몇 개를 산 후 중고자동차시장을 살펴보고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식사 후에 교민과의 대화시간이 이루어졌는데 교민대표 왕충현씨는 나름대로 독일에서 성공한 한국인 중 한명이었다. 독일의 교육제도에 대하여 질의 응답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주 정부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헤셋주의 학교시스템(Hessisches Schulwesen)을 살펴보면 6세 미만 예비학교(Vorklasse), 9년간 의무교육(초등 4년, 중등 5년)이 실시되고 있는데 초등학교(grundschule)4년간 담임교사가 바뀌지 않으며 학생 각자의 적성 및 능력을 매일 매일 관찰하고 정리한 후 진로지도 교육자료로 활용한다고 한다. 특히 이들은 인문계 학교(Gymnasium)에 20%, 실업학교(Real schule)에 40%, 일반 중등학교(Haupt schule)에 40%진학을 하며 인문계 학교(Gymnasium) 진학학생과 실업학교(Real schule)학생 중 희망자에 한해 대학입학고사(Abitur)를 거쳐 10%만을 선발하여 교육시킨다고 한다. 그 나머지는 직업 교육기관에서 본인의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고 수료후 사회 직업전선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며「마스터 정신」이 꽉 박혀있는 독일인들이다. 블루칼라, 화이트칼라 가리지 않고 세계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식에게도 본인의 직업을 갖도록 권장한다는 소리에 한국과는 사뭇 다른 점이라고 생각했다. 왕충현씨는 독일에 입시학원, 피아노학원 등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고 우리 나라 학생들에게 知的향상에만 힘쓰지 말고 인성교육을 시켜야한다는 걱정어린 당부의 말도 남겼다.
'96년 8월 31일 우리는 인문계 라이프니츠학교(Leibniz Gymnasium)방문과 로렐라이(Loreleyfelsen)를 관광하기로 했다. 1930년에 개교한 라이프니츠학교는 1개반에 22명이고 60개 학급으로 전체 학생수가 1,200여명이라는 설명을 듣고 학교 시설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랄 일을 발견했다. 교장실이 매우 협소한데 비해 교사와 기능직 아저씨가 거주하는 공간이 교실 한 칸 정도의 크기로 교사의 방에는 각종 학생관찰 누가기록부가 소장되어있고 기능직 사무실은 컴퓨터와 방송시스템, 각종 제어장치 등이 그에 의해 작동되고 있는 점, 학교 내의 관사는 기능직 가족만 살 수 있다는 일들이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전기, 건축, 토목, 배관 등의 기능사 자격요건을 갖춘자만 학교에 기능직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한다. 실내체육관, 샤워장, 보일러실, 컴퓨터실, 교실, 자전거 보관대를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하는 기능직 아저씨의 얼굴에서 자기일에 만족하는 모습을 엿 볼 수 있었다. 그의 가족들과도 간단히 인사를 나누며 우리 나라에서 준비한 인삼과 태극기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교장실에 태극기를 전시해 놓고 한국과 우리가 방문한 일을 기념한다고하며 기념촬영을 했다. 다시 우리는 로렐라이(Loreleyf
-elsen)로 향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 자유롭게 벌어지고 있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길가에서나 학교 내에서 입맞춤을 하는 모습.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가며...
전용버스는 플라타너스나무와 아카시아나무 숲 터널로 된 아우토반(속도무제한고속도로)을 시속 100Km로 달려갔다. 조금 속력을 더 내라고 했더니 기사는 지금도 빨라 위험하다고 하며 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안전운행 및 도로교통법을 똑바로 지켜야한다고 준법정신을 강조했다. "아!이러한 정신의 결정체가 바로 독일을 통일시키고 세계속의 선진국 선두주자로 갈 수 있었구나". 운전할 때의 내모습을 생각해보고 귀국하면 혼자라도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자 굳게 마음먹었다. 라인강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강가에서 손을 닦았다.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배들이 철강, 석탄 및 각종 물건을 싣고 쉴 사이 없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물은 석회수라서 식수로는 부적합하다. 그러나, 천혜적인 자원을 최대로 이용하여 경이적인 경제발전으로 세계 사람들이 놀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곳이 아닌가!" 우리도 주어진 자원을 잘 이용하면 모든 면에서 기적을 이룩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졌다. 벤취에서 할아버지와 손녀가 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우리는 대화를 시도했지만 영어를 전혀 못하였다. 전후세대 젊은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지만 노인들은 영어에 대해 門外漢이라 한다. 버스는 다시 라인강변 도로를 달려가고 있다. 강가에 펼쳐진 아름답고 굳건한 옛성들은 투쟁과 증오의 역사를 간직한채 오늘도 묵묵히 옛 일들을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잠시 후 M d포도 재배 농장에 도착하여 포도밭을 둘러보고 우리 나라의 포도 재배 농가와 재배 방법을 비교하여 보며 농부에게 토지의 소유권 및 언제부터 농업에 종사하였는지 물어 보았다.
토지는 주 정부가 관리하며 이를 일정기간 임대하고 농업에 종사하려면 3년간 농업 전문교육을 받은 후 농사지을 자격을 부여받는다고 하며 조상 대대로 포도재배를 하여 세계 최고의 포도주를 담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토지의 공개념, 선진국 사람들의 모습이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며 옆집 사이에 울타리가 없어서 의아했던 점이 동시에 해결되었다.
점심 식사는 코블렌츠(Koblenz)에 있는 1,300년대의 건물인 정통 독일식당에서 하기로 예약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이 들어가 앉자 마자 "황성옛터"곡이 은은하게 울려 퍼져 나온다. 잠시 한국의 노래방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는데 우리에게 마이크를 주며 노래를 청한다. 우리는 한국의 국력이 이렇게 신장되어 외국에서도 우리 가요를 들을 수 있음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점심 식사 후 1871년 보불전쟁 승리 기념으로 만든 35M 높이의 게르마니아 여신상을 감상하고 로렐라이에 도착한 우리는 중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로렐라이 언덕" 노래를 부르며 낙엽쌓인 오솔길로 20여분간 걸어 올라갔다. 길가에 개(犬)들이 물을 먹을 수 있도록 수도장치가 되어있었는데 독일의 모든 개들은 세금을 낸다고 하니 그 대우를 받는 모양이다. 갈증을 느껴 물 1병(500㎖)을 2,700원에 샀다. 유럽 나라 대부분은 다른 나라에서 식수를 수입하여 사서 먹고 있는데 관광버스 냉장고에 항상 물을 준비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 나라는 얼마나 축복받은 나라인가! 언덕위에 도착하니 바람이 심하게 분다. 독일 국기가 펄럭이고 라인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노래소리에 취하여 목숨을 잃었다는 뱃사공들의 슬프고도 감미로운 옛 전설을 지닌곳, 라인강변 관광의 하이라이트로서 손색이 없었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로렐라이 요정의 노래소리가 들려 올 것만 같았다. 외국인들과 서투른 영어로 말을 건네며 사진도 찍을 수 있었고 한국에도 부여의 낙화암이 있는데 언젠가 한번 한국 관광을 오라고 말을 건냈다. 그들은 그렇게 하겠다며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빌헬름 황제 기마상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중간까지 올라 갈 수 있도록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을 올라 가는데 여기 저기 유리병이 깨져 널려 있다. 지저분한 것을 보며 그동안 좋았던 이미지에 약간 먹칠을 했다. 또한 이곳에 統獨이 되기 전 베를린 장벽의 일부분이 전시되어 있어 총탄 흔적을 만져 볼 수 있었다. 우리 나라는 지금도 지구상 마지막 冷戰의 산물인 휴전선에서 동족간에 총부리를 맞대고 있으니 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대치하고 있는 긴장 상태가 비슷하다고나 할까" 갑자기 자동차 경적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신랑 신부를 태운 승용차가 지나간다. 앞에는 예쁜 꽃바구니로 장식하고 뒷쪽에는 깡통을 매달아 끌면서 경적을 울린다. 소음공해법에 위반되지 않는 유일한 날이라 한다. 우리 나라에서 자주 보아 색다르지는 않았지만 여러대가 동시에 경적소리를 내는 것은 특이했다. 독일에서는 결혼식을 2번한다고 한다. 결혼식은 일요일이 아닌 평일에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 주 정부의 건물에서 주지사의 주례로, 또 한 번은 교회에서 신부님이나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해야 비로소 혼인 신고식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양가 부모님이 해주시는 것은 그날 참석하신분들의 식사만 대접하면 된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택과 가전제품 등 온갖 살림을 다해 주는 가정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자기들 스스로 벌어 장만 한다고 하니 아마 문화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돌아오는 길에 시내 여러곳을 살펴 보아도 예식장을 찾아 볼 수 없었다.
'96년 9월 1일 뢰머(R mer)광장에 있는 1815년 민주시민봉기의 기념탑을 보고, 1405년부터 사용하고 있는 시청광장은 만인 앞에 평등한 법을 수호하는 정의의 여신「유스티티아」가 한 손에 칼을, 다른 한 손에 평등을 상징하는 천칭 저울을 들고 있다. 이 광장에서 악사들이 자유롭게 연주를 한다. 서로 직업은 다르지만 음악에 흥미 있는 사람끼리 만나 언제든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연주를 한다고 한다. 우리들은 박수로 답례를 하고 시청사(Die paulskirche)를 방문하였다. 1787년 건축한 것으로 이곳이 파올스(Pauls)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구 바오로 성당이었는데 1848년부터 16개의 주 정부기가 게양되고 현재의 독일의회 발상지로 알려져 오고 있으며 괴테 문학상 시상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한다. 우리들에게 연단에 올라 마음대로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히틀러를 찬양하는 발언은 금지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우연히 한국에서 배낭여행 온 여대생을 만날 수 있었는데 매우 기뻤다. 우리 일행과 같이 1749년에 괴테가 태어난 괴테하우스에 가서 그가 사용하던 가구들을 살펴보며 옛날 독일 상류사회의 생활상을 살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괴테가 앉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를 쓴 책상, 벽난로들을 만져보니 괴테의 체온이 전해오는 것 같았다.
괴테가 훌륭하게 자랄 수 있게 해준 藏書를 보고 부모님들의 자식을 위한 정성은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한결같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괴테가 직접쓴 글씨를 보았다. 내용은 라틴어로 된 것이라서 알 수 없었지만 誤字하나 없이 대단히 정리를 잘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독일 우체국 박물관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입구에 백남준씨 작품이 진열되어 있어 기분이 좋았다. 옛날부터 사용해오던 전신전화기, 우체부의 옷과 가방, 역마차의 발달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수집을 좋아하는 나는 우표를 2장 살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오후에 카이저공원에 갔다. 나무들이 우거지고 옛날 궁전과 꽃들이 잘 어울려 아름다웠다. 같이 걷던 외국 할머니께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니 쑥스럽다며 거절한다. 자기는 너무 늙어 미웁게 나오니 젊은 아가씨들과 찍으란다. 마침 옆에 젊은 부부와 학생이 있어 몇마디 나누었다. 그들은 Erwin Roth씨 가족인데 오늘이 결혼 17주년 기념일이라 산보를 나왔단다. 우리는 즉석에서 "축하합니다(Congratulation)곡"을 불러 주었다. 대단히 흡족해하고 고마워한다. 한국 주소를 적어달라며 사진도 같이 찍자고 한다. 저녁 식사 후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근처를 걸어가며 거지를 보았다. 선진국에도 거지가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잠시 후 쟉센 하우젠의 전통 맥주집에 들어갔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젊은 사람과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맥주 한 잔에 정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왈츠곡에 맞춰 춤을 추는 노부부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밖에 나오니 술취한 흑인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한국인이라는 말을 건네고 그자리를 피하여 택시 정류소로 갔다. 택시를 타고 Holiday inn Offenbach호텔로 가자고 하였다. 앞자리는 운전사의 개[犬]자리라서 사람은 타지 못하게 하여 택시 1대당 3명의 손님이 탈 수 밖에 없었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우리 나라에서 보지 못한 일을 겪어야 했다. 운전사가 중앙역에서 부터 호텔까지의 거리를 적고 택시비를 적어 싸인하고 영수증을 교부한 후 택시비를 받는다. 팁을 주니 기사는 "Danke Sch n!"(당케 쇤!:고맙습니다!)하고 떠나간다. 팁문화가 발달한 나라 유럽에서는 요금의 약 10%정도를 팁으로 주어야 예의를 지키는 것이란다. 이러한 나라에서 탈세를 할 수 있을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異口同聲으로 말하며 독일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날 우리는 3박 4일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프랑크프르트 공항에서 스위스 제네바(Geneve)를 향하여 라푸탄자 (Lafutanja)회사의 LH 4582비행기로 1시간 10분간 몸을 맡겼다.
3.작지만 큰나라, 관광부국의 스위스.
에델바이스와 요들송의 나라, 복지 시설이 가장 잘된 살기 좋은 나라, 정밀시계 공업, 영세 중립국가, 국토면적 41,000Km2, 화폐단위 SF(스위스프랑:1SF=670원), 불어, 독어, 이태리어, 로만시어 사용,국민 소득 38,500$이라는 사전지식을 갖고 간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과연 듣던 대로 호수(약1,500여개)와 산의 나라라는 것이 실감이 나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96년 9월 1일 18시 15분 제네바(Geneve)공항에 도착했다. 안내자(임준수)는 다행히 우리가 오기 바로 전부터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어 행운의 신이 돕는다고 하였다. 이곳의 기온 역시 독일과 비슷하였다. 그러나, 독일과는 달리 토지의 사유화가 인정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집집마다 담장을 예쁘게 만들었는데 모두 나무를 길러 자연경관과 어울리도록 하였다. 특히 지붕이 왜 이렇게 뾰쪽하며 급경사로 되었느냐고 질문해 보니 스위스는 365일 중 약 270일 정도 흐린 날이나 눈, 비가 오는 날이 많아서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전용버스로 레만호(Lac Leman)근처에 있는 Hotel De Camavannes Bogis에 도착하였다. 전형적인 스위스 농촌풍경과 레만호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조용한 호텔이었다. 독일의 Holiday inn Offenbach같이 실내정돈이 잘되어 있었는데 여행자의 구두를 닦는 기계가 있는 것이 다른점이었다. 샤워실의 타올을 보니 여러번 사용하여 낡았지만 대단히 청결한 것으로 보아 스위스 국민성을 알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독일의 분위기와 달리 시끄러운 소리로 귀가 아플 정도였다. 미국인들이 식사를 하며 자지러지게 웃고 떠드는 소리였다. 몇 번 쳐다보다가 지배인에게 저렇게 떠들어도 괜찮은지 문의했다. 떠드는 것이 아니고 대화를 즐겁게 한다는 것이란다. 참 해괴한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와 창가에 앉아 밖을 보니 은은한 달빛 사이로 호수가 보였다. 은빛 물결이 출렁인다. 시인이 아닌데도 시상이 떠 오른다. 베토벤도 아마 이러한 모습에 반하여 그 유명한 월광곡을 작곡하였는지 모르겠다.
'96년 9월 2일 샤모니(Chamonix)에 있는 해발4,807M의 몽 블랑(Mont Blanc:하얀 산)으로 간다.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스위스 국경에서 프랑스 국경쪽으로 넘어가는데 각 나라에서 온 관광버스들이 운전수의 신고 하나로 비자(VISA)없이 국경을 통과했다. 국경선은 우리 나라 고속도로 톨게이트와 같은 모양이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정경!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 전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젖소와 양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높은산 속에도 자동차가 다니도록 70M의 교각이 있는 다리를 건설하여 도로를 자연 그대로 이용하여 환경 파괴가 없도록 한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들이었다. 샤모니(Chamonix)에 도착했을 때 태극기가 게양되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외국에서 태극기를 바라 볼 수 있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데 우리들은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국기에 경례를 하고 케이블카 탑승구로 갔다. 케이블카는 1년 내내 운행된다고 한다. 단, 비바람이 치거나 눈보라와 바람을 동반한 폭설이 내릴시와 같은 악천후의 기상조건하에서는 사전에 통보없이 케이블카운행이 중지될 수도 있다고 한다. 오늘은 다행히 날씨가 좋다고 하여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1차 케이블카로 샤모니계곡 1,030M에서 알프스의 숲을 너머 2,317M까지 8분 후에 도착하고 오른쪽으로 몽 블랑 고원과 정상, 그리고 계곡 아래로 보송빙하와 등산객들이 보였으며 왼쪽과 뒷쪽으로 "AiguillesVerte" "Drus" "Aiguilles de Chamonix"를 볼 수 있었다. 다시 2차 케이블카로 3,842M고지의 "에귀디미디"(Aiguille du midi)에 도착하였다. 몽 블랑 다리를 건너서 블랑슈 계곡(Galerie de la Vallee Blanche)의 지하통로를 지나 몽블랑테라스에 도착하면 오른쪽으로 "Col du Midi"에 이르던 옛 케이블카의 흔적과 옆에 쌓여 있는 빙벽 "Pelerins빙하"의 줄기가 절벽에 드리워져 있으며 계곡과 절벽에 매달리다시피 붙어 있는 빙하를 볼 수 있다. 병풍처럼 드리운 알프스 최고 영봉의 아름다운 절경을 맞은 편에서 감상하고 있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여러번 날씨가 급변하였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집들이 성냥갑처럼 작게 보인다. 현기증을 느낀다고 몇 분이 말씀하신다. 다행히 나는 그러한 증세가 없었으나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데 평지보다 호흡하기가 역시 어려웠다. 우리 나라는 지금 무더운 여름인데 영하 10℃로 손과 발이 시려워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났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프랑스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난 후 점심은 스위스식으로 쇠고기를 물에 익혀 감자와 소스를 발라먹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지만 한국의 김치와 쌀밥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만 한다. 다시 스위스 제네바로 돌아오는 길에 2차 세계대전 중 폭탄을 제조하던 공장을 보았다. 오늘날에는 제철소로 변하여 과거엔 파괴의 장소가 이제는 건설의 장소로 둔갑해 버린 현장, 바로 이런것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잠시 후 제네바시내에 있는 세계 장미공원에 들러 각 나라에서 수집해온 1930년대 장미로부터 현재의 장미로 육종되어 온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은 장미꽃 밭에서 사진을 찍고 레만호 옆에 있는 북한 무역대표부건물과 김일성.김정일부자를 선전하는 게시판, 굳게 닫힌 철문을 보며 휴전선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아 마음이 아팠다. 통일이 되는 날 우리는 문을 활짝열고 들어가리라 다짐하며 밖에서 기념촬영만 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96년 9월 3일 아침 일찍 일어나 룸메이트와 스위스 농촌을 구경하러 나갔다. 밴츠 자동차를 세우고 아릿다운 여인이 인사를 한다. 스카우트 단복을 입고 있는 나에게 자기 아버지도 스카우트 지도자라며 말을 건넨다. 추억에 남는 좋은 스위스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며 한국의 날씨에 대하여 물었다. 한번 와서 파란 가을 하늘을 보라고 하며 말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라 자랑 했다. 갑자기 헬리콥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리가 머무는 BOGIS호텔 비행장으로 내려온다. 스웨덴에서 주말을 즐기려고 여행을 온다고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어느 사이에 경찰차가 이곳으로 왔다. 각종 신분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모습 속에서 세계 제일의 민방위 체제를 갖춘 나라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빛이 내려온다. 산과 잘 어우러진 호수, 하얀 요트를 배경으로 해바라기 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포도 나무와 사과 나무를 심고 가꾸는 방법이 특이하여(과일 나무를 철사줄에 잡아매고 점적 관수법을 쓰고 있음)농부에게 인사를 하며 왜 이런 재배방법을 선택했는가 물었더니 바람이 심하게 불어 다른 방법으로 재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조금 걷다 보니 무궁화가 유난히 아름답게 피어있는 집을 발견했다. 무궁화로 울타리를 장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어릴적 우리 집을 보는 것 같아 무척 기뻤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국제 연맹과 세계 적십자사를 둘러 보러 가는 길에 시내에서 우리 나라 자동차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유럽의 여러 자동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경제적 위상을 보는 것 같아 자부심을 느꼈다. 잠시 후 제네바 국립대학을 방문하여 교정에 있는 오래 된 나무를 보고 이 학교의 역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칼뱅의 부조 앞에서 65세된 한 노교수로 부터 칼뱅의 종교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설명하는 건강한 그의 모습에 건강의 비결을 물어 보았다. 단, 한마디로 담배 안태우기!(No smoking!),술 안마시기!(No alcohol!)라고 대답 한다. 대학 본관 앞 잔디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학생들과 스위스의 정치에 대하여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스위스 정부는 6명의 장관과 대통령이 있는데 주 정부에서 뽑힌 사람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지 않고 자기의 직업을 갖고 있으며 다만 나라의 상징성과 대표성을 띤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자기들은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2002 월드컵」에 대하여 자랑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는 Bucherer백화점을 구경하고 커다란 꽃시계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한국에 콜렉트 콜로 아내에게 안부전화를 하며 "좋은 세상, 좁은 세상 지구촌"이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호텔에 돌아와 고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쁜 엽서와 편지를 썼다. "작지만 큰 나라 관광부국 스위스 "에 대한 이야기로 지면을 메꾸었다. 내일은 프랑스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일찍 잠을 청했다.
'96년 9월 4일 이른 아침 TGV(떼제베)를 타기 위해 제네바 역에 도착하여 안내자와 작별의 악수를 하고 2박 3일의 스위스 일정을 마쳤다.
4. 파리 시내가 박물관이며, 평생 교육 문호가 개방된 나라 프랑스.
프랑스의 국토 면적 551,695Km2로 우리 나라 면적보다 2.5배나 더 크다. 인구 5,600만, 화폐단위 FR(프랑:1FR=160원), 종교 87%가 카톨릭, 불어사용, 문화재가 많은 나라, 선진국, 개선문, 에펠탑의 나라라는 사전 지식을 갖고 프랑스에 간다. 제네바 역에서 프랑스 리용(Lyon) 역까지 3시간 30분 소요된다고 한다. TGV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실내에 들어와 보니 우리 나라 새마을호보다 공간이 약간 작았다. 객실내 서비스도 우리만 못했지만 3시간 30분 동안 참고 창밖의 풍경을 보기로 했다. 끝없이 들판이 펼쳐지고 있다. 우리는 프랑스의 중앙 평원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성지 순례를 오신 한국 목사님 일행을 만나 오랫만에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프랑스 리용역에 도착한 시간은 '96년 9월 4일 오후 2시 5분이었다. 리용驛舍 앞에「Gold star」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서울역 앞에서 본「Gold star」라는 네온사인이 떠올라 감회가 새롭다. 안내자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전용 버스를 타고 베르사이유 궁전(Le palais de Versailles)으로 향하였다. 안내자는 우리에게 아침인사 봉쥬(Bonjour), 점심인사 봉수아(Bonsoir), 저녁인사 봉뉘(Bonnuit),본느 샹스!(Bonne chance!행운을!)를 알려주었다. 차 창으로 보이는 시내의 건물은 옛날의 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있고 시내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 같았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완벽에 가까웁게 옛 모습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의문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나라에서는 건물을 개축하려면 외형은 그대로 두고 내부만 손질할 수 있다고 한다. 신축은 될 수 있는한 허가하지 않으며 만약 허가한다 하더라도 옛날 건축양식으로 설계 및 시공을 해야한다고 한다. 건축설계 한가지로 부터 매사에 철두철미하게 고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들이 부럽기만 했다. 우리 나라는 용인 민속촌, 경주시내, 낙안읍성 등 국가에서 지정한 몇 장소를 제외하고 될 수 있는한 현대식으로 회색빛 시멘트 문화를 이루는데 노력을 더 기울이고 있는 듯한 느낌인데... 프랑스가 유럽의 곡창지대이며 농업국이라는 것을 이 곳에 오기 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특히 프랑스 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먼저 판매한 후 수입품을 판다는 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시내 한복판과 아파트 옆에 예쁜 꽃으로 장식된 공원이 있어 무엇인가 물어 보았더니 사람이나 개(犬)의 공동 묘지란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파리 시내 가장 번화한 중앙에 19개의 공동묘지(대표적인 곳: 몽 마르뜨, 뻬르 라 셰즈, 몽 빠르나쓰)가 있다고 한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묘지를 바라보며 어제 밤에도 무사히 지낼 수 있음을 신에게 감사드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오늘의 일을 시작한다고 한다. 파리의 도시 계획은 100년전(1860년경)에 세워졌으며,인구 220만, 월평균기온 15.9℃, 동서로 12Km, 남북으로 9Km, 위성도시 8개, 외곽 도로 길이 35Km, 하수도 길이 2,100Km로 하수처리를 철저히 하며 세느강으로 보내지 않고 종말처리 후 바다로 보낸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듣는 동안 우리는 베르사이유 궁전에 도착했다. 미술 교과서와 사진으로만 보던 천장벽화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궁전의 벽화를 그리기 위해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540명의 화가를 초청하여 루이 14세때부터 루이 16세 때까지 20년에 걸쳐 완성된 궁으로 좌우 대칭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었다.무도회를 열던 거울의 방, 호화로운 마리아 앙뚜아네뜨의 침실, 궁전 뒤편의 인공적으로 잘 만들어진 분수대와 나무 숲은 조경의 극치를 이루는 곳이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 대한 책을 구입하려고 US$를 받느냐고 물었다. 프랑스 돈 즉 프랑을 가져와야 구입할 수 있다고 하며 환전소에가 프랑으로 바꾸어 오라고 한다. 나는 Bank Credite card로 구입가능하냐고 물어 간신히 책 한 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 구경을 하였다. 텔레비전에서 본 랑콤 화장품회사 제품이 많이 정리되어 있고 향기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 잠시 후 약간의 소동이 벌어 졌다. 선생님 한 분이 보이지 않는다. 수집을 좋아하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우표와 녹음테이프를 사러 나가셨다고 한다. 40여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다. 우리 일행 일부는 식당으로 이동하고 에스코트와 안내자가 찾아 나섰다. 바로 길 건너 오페라 하우스에서 건물이 똑같아 한동안 헤메고 계셨단다. 죄인이 된듯 미안하다는 소리를 여러번 하고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이마에 땀이 나신 것을 보니 내심 걱정을 많이 하신 모양이다. Hilton ORLY호텔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낮에 구입한 베르사이유 궁전 책을 보았다.
'96년 9월 4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 보았다. 청소 자동차가 길가에 물을 뿌리며 쓸고 닦으며 간다. 거리가 유난히 깨끗하여 기분이 상쾌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봉쥬!하고 아침 인사를 한다. 우리도 인사를 하며 잠시 걸었다. 모든 건물 벽면에 파란색 판이 있었는데 숫자와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길의 우측으로 짝수, 좌측으로는 홀수로 표시 되어 있다. 지도 한 장으로 번호를 따라가면 파리의 어느 곳이라도 찾아 갈 수 있는 이정표와 주소 역할을 하고 있다. 도로 표지판의 바탕색도 우리 나라와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는 파랑색과 녹색 계통인데 프랑스만은 유일하게 주황색으로 되어 있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 식사 후 화훼 관광농원(Parc Floral de Paris)을 찾아갔다. 1969년부터 조성하여 현재 10만평의 대지에 1,350여가지의 식물과 4,000여종의 꽃을 재배하는 곳으로 3,000평은 어린이 놀이터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96년 현재 세계 달리아꽃 경연대회가 개최되고 있으며 동양의 소나무, 소사나무 분재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종사하고 있는 식물 재배사에게 몇 년간 이 직업에 종사했으며, 이 일에 대한 만족도를 물었다. 27년 봉사했으며 무척 직업에 대한 애착심을 갖는다고 했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은 식물 및 곤충에 대한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10년이상 거주한 사람에 한하여 화훼 관광농원의 안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식물과 꽃, 하찮은 곤충으로 이러한 농원을 만들어 외화 획득을 하는 것을 보고 자원의 소중함을 알았다. 이곳에 현장학습을 나온 유치원생들과 아기를 데리고와 가르치는 프랑스 아주머니를 보았다. 영어를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약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분은 Roure Aline이었는데 아기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싶다고하자 허락하며 나중에 사진 보내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오브아!(Au revoir!:안녕!)하며 3살난 꼬마가 작별의 인사를 한다. 나는 한국돈 100원, 500원짜리 동전을 기념으로 1개씩 주었다. 샹제리제 거리의 개선문(L'Arc de Triomphe), 리보리 거리에 있는 여걸 쟌다크 동상, 프랑스 대혁명때 루이 16세와 마리아 앙뚜아네뜨왕비 등 3,000여명이 죽음으로써 유명해진 단두대(기요틴:Guillotine)가 있는 콩코르드 광장(La place de la concorde : 혁명 광장)을 바라보며 마로니에나무가 줄지어 있는 시내로 버스는 달려 갔다. 나뭇잎에 黃化현상이 있었다. 자동차에서 나오는 매연가스 때문에 마로니에나무가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파리 시내도 공기가 나빠 사회적 문제가 된다고 한다. 교회가 여기 저기 눈에 많이 띄었다. 카톨릭 역사가 1,500여년 되고 교황을 24명 배출했다는 소리에 새삼 구교와 신교의 역사가 유럽에서 얼마나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참고로 카톨릭교회는 지붕에 십자가로 표시하고 개신교는 십자가 위에 닭이나 물고기로 표시되어 풍향계 역할을 하며 하늘 높이 빛나고 있었다. 점심은 말로만 듣던 엉트로꼬트(달팽이요리)를 처음 보고 음식을 가져온 아가씨에게 먹는 방법을 배웠다. 모든 식탁에 촛불을 밝히고 식사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오후에는 1789년 8월 10일에 개원한 루브르 박물관에 갔다. 루브르 박물관 앞에 피라미드형 철골 조형물이 있었는데 중국계 아메리카인 이오민뻬이가 설계했다고 한다. 박물관이 어찌나 큰지 총 작품수가 40여만점이 넘는 것을 관람하려면 약 3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몇 가지만을 골라 보기로 하였다. 헬레니즘 예술작품의 뷔너스상과 사모트라차의 니케. 질투의 여신, 피에튼의 추락, 니키, 오달리스크, 레오나르드다빈치의 모나리자와 암굴의 성처녀. 낭만주의 대표작품 중 하나인 디오틀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쟉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드라크로와의 고대앗시리아왕 살다나팔로스의 죽음과 민중을 이끄는 자유여신, 앙드레아 망테냐의 산 세바스티앙, 파울로 우체로의 산 마리노의 전쟁, 루벤스의 제시, 앙트왕 반 다아크의 챨스 1세의 초상, 140캐러트 다이아몬드 왕관 등을 보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배낭 여행을 온 한국 학생을 만날 수 있어서 참 반가웠다. 루부르 박물관에서 책 한 권을 구입하고 바로 에펠탑으로 갔다. 1889년 무역 박람회기념 조형물이 바로 에펠탑. 높이320m 총무게 9,700톤으로 만들어 졌으며 2단 엘레베이터로 300m까지 올라 갈 수 있었다. 파리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육군 사관학교와 나폴레옹 묘가 있는 곳이 보였다. 서쪽으로는 노을 빛에 물들은 세느강이 유유히 흐르고 유람선이 떠가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해발 130M의 Mont martre(몽 마르뜨:순교의 산)언덕에 가서 화가들이 유화, 초상화 그리는 모습을 보며 예쁜 엽서를 샀다. 고향에 소식을 전하려 길가에 있는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아가씨에게 O est la poste?(우 에 라 포스트? : 우체국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니 하던 일을 멈추고 약도를 그려가며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참 고마웠다. 편지와 카드를 부치고 프랑스 우표를 구입할 수 있어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외국인에게 자기가 하던일을 멈추고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이 바로 보이지 않는 관광 부국을 만드는 초석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며 나는 파리에 관한 책 한 권을 구입하고 1919년에 국가의 찬조로 만든 샤크레쾨르사원(La Basilique du Sacr -Coeur:예수성심사원)으로 갔다. 로마네스크와 비잔틴양식을 섞은 건축물로 4개의 크고 작은 돔(Dome)은 전형적인 동양적 작품성을 띠고 있으며 19톤이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 내장되어 있다. 우리는 안내자(양단철)와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800여년 전에 만들어진 노트르담 대성당(La cath drale Notre-Dame)을 방문하였다. 노트르담 대성당 전면에 있는 목잘린 쌩 드니(프랑스 최초의 카톨릭 순교자)상이 있는데 잘린 목을 자기 손에 들고 있어 의아했었는데 안내자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나라의 하얀피를 흘렸다는 신라시대의 순교자 이차돈의 죽음에 얽힌 전설과 비슷하게 잘린 목을 스스로 들고 유유히 북쪽으로 약 4㎞를 걸어 갔다는 전설이 있어 친근감이 있었다.1430년 앙리 6세 왕과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치렀으며, 노트르담 성당 남쪽에는 스테인드글래스의 걸작품「장미의 창」이 있다. 1,200년대 것이지만 18세기에 보수된 것으로 중앙에 12사도, 순교자, 현명한 처녀, 어리석은 처녀 등으로 둘러싸여 축복을 주고 있는 그리스도 상이 있다. 풍부한 색채와 광채, 정확한 유리 조각의 배분은 우리들에게 눈부시도록 빛나는 별이 갑자기 깨어져서 흩어 날아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왕의 토대라 불리는 높은 곳에 28개의 이스라엘과 유다왕의 조각이 있다. 어찌나 정교하게 조각을 하였는지 우리 나라 다보탑을 보는 듯했다. 성당 안에서 미사(Misse)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모두 라틴어로 하여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만은 엄숙하였다. 안소니 퀸 주연의 "노트르담의 곱추"영화를 촬영한 곳과 임마누엘 종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더욱 뜻깊은 곳이기도 했다. 나는 우리 나라, 학교,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며 촛불을 봉헌했다. 저녁에는 세느강(Seine:총길이 774Km, 다리 32개,수심 3∼4M)의 400년된 Pont neuf(퐁 네푀:다리 새로운)다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Bateaux Mouches(뱃사공의 뜻)유람선에 승선했다. 세느강 左岸으로 "앵바리드광장과 건물, 군사박물관, 부르붕 궁, 바스티유감옥의 돌다리, 샤르뜨 5세의 성, 노트르담 성당, 파리수호신 성녀 저느비애브 조각상, 뉴욕의 자유여신상 모조품 바루뚤디". 右岸으로 "라 로슈 기용 고성, 발쟈크의 집,마티유의 집, 프랑스기념물 박물관, 시립 현대 미술관, 기메 동양 박물관, 몽떼뉴 가, 샹제리제 고급상가, 쁘띠 빠레 소궁, 그랑 빠레 대궁, 쏠본느 부속건물, 콩쿠르드 광장, 리보리 가, 루브르 옛터, 루브르 궁전, 그래브 광장, 쌩뽈 성당, 쌩제르베 성당"등의 안내 방송이 영어, 불어, 독어, 일어로 나왔다. 기분이 언짢았다. 우리말로 나오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일본에 대한 좋은 감정이 내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세느강 야경은 낮에 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끌어 주었고 에펠탑은 밤과 낮의 다른 두 얼굴을 갖고 있는데 마치 용암이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비결은 현대적 조명기술이라 한다. 세느강에서 유람선을 타는 동안 날씨가 대단히 쌀쌀했다. 그러나 움츠린 몸보다는 마음에 와닿는 추억거리가 많아 나를 기쁘게 했다.
프랑스의 교육제도(Organisation Du Systeme Educatif)에 대해 안내자에게 물어 보았다. 우리 나라는 사회가 학력을 중시하는 분위기여서 초.중.고등학교의 교육이 저마다의 적성. 능력. 흥미 등에 관계없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반하여 프랑스에서는 무한경쟁의 세계 속에 살아 남는 올바른 생활 태도 및 가치관을 심어주는데 주력하고 있다. 취학전 교육은 만 2∼5세까지로 아동에게 가장 적절한 미래를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유치원 교육의 역할은 아동이 지닌 특수한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달시키는 방법을 부여하고 읽기, 쓰기, 그리기, 노래 등 기본적인 능력을 배우기는 하나 가정이나 학교에서 지나치게 특정 분야에 대한 조기교육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없다. 초등학교는 만 6∼11세까지로 5년간이며 유치원 교육과 함께 쓰기, 읽기, 셈하기 등을 기본으로 감각, 수공, 신체, 운동 능력의 발달을 촉진하며 예술의 기초지식을 습득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교사와 부모는 호기심, 흥미, 적성, 능력을 살펴보며 상대방과의 경쟁보다는 개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나라 교육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한다. 수업은 월, 화, 목, 금요일에 전일 수업을, 수요일은 휴일, 토요일은 오전 수업만 한다. 교사는 학교에서 체벌을 할 수 없으며 잘 못하는 일을 하면 부모님을 소환하여 잘못을 지적하고 가정에 돌아가 부모로부터 가정교육을 스파르타식으로 철저히 받는다. 단, 3회이상 학교에 부모님이 소환되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한다. 중등교육은 전기과정 4년(만 11∼14세: Enseignement du premier cycle -college)과 후기 과정 3년(만15∼18세:Enseignement du second cycle-college)으로 이루어 졌다. 전기과정은 입학 후 1,2학년의 "관찰지도과정 "(Cycle d'observation - 모든 학생의 능력, 적성, 흥미, 취미등을 체계적으로 살핌)과 3,4학년의 "정향지도과정"(Cycle d'orientation -관찰지도과정의 결과와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진로를 결정)으로 구성되어 있어 학생의 진로 지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하고 있다. 고등교육은 만 18세부터 시작하며 우리 나라의 대학교육에 해당한다. 학제는 제 1, 2주기(4년간 대학과정) 및 3주기(박사과정)로 구분되며, 수학기간은 원칙적으로 각 2년으로 되어 있다. 대학 입학은 별도의 시험은 없고 중등교육 마지막 학년에 국가에서 시행하는 대학입학 자격시험 (바깔로레아:Baccalaureat)을 치르게 되며 합격자에 한하여 대학에 등록할 수 있다. 대학의 문호는 자격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고 수학연한도 박사과정 후를 제외하고는 제한이 없어서 일하면서도 계속 학위 취득을 목적으로 공부할 수 있으며, 편·입학이 자유로워 항상 개인의 필요에 따라 전공을 바꿀 수 있고 취업과 관련된 지식과 기술을 언제든지 배울 수 있다. 더우기 프랑스는 몇 개의 사립 대학을 제외하고 국립 대학이어서 한 학년당 등록금이 약 30만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프랑스의 독특한 교육제도인 고등전문학교(그랑제꼴:Grandes ecole)는 대학입학 자격학위(Baccalaureat)를 받은 뒤 1∼2년간의 입학준비반(CPGE)을 거쳐 시험에 의해 입학한다. 분야별 3∼4년의 교육과정이 있고 이곳을 졸업하면 프랑스의 엘리트 지위를 얻을 수 있어 선망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내일은 아침 일찍 네덜란드로 간다. 파리에서 짧은 일정이 아쉬움을 더하는 밤이었다. 저녁에 밖에 나가 샹송CD 1개와 포도주를 구입하여 우리 방에서 몇 명이 모여 앉아 포도주 잔을 주고받으며 귀국할 때까지의 건강을 위해 서로 건배를 했다.
'96년 9월 5일 아침 일찍 호텔의 환전소를 찾아가 남아 있는 프랑을 US$로 환전하려고 했다. US$로 환전해 줄 수 없다고 한다. 자기들은 오직 US$를 프랑으로만 바꾸어 준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환전해간 프랑은 프랑스에서 다소비하고 가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외화벌이 방법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을하며 하는 수 없이 ORLY 공항으로 이동했다. 프랑스 스튜어디스 B. BONE양이 땀을 흘리며 우리의 짐정리를 도와주었다. 일하는 모습이 천사같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Tr s bien merci!(트레비앙 멜시!:대단히 고맙습니다.) 하며 암스테르담에서 며칠간 관광하느냐 묻는다. 자기도 1주일 후에 휴가를 얻어 암스테르담으로 여행을 온다고 한다. 우리 일행과 합류하여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와 만날 수 없음을 알고 이내 섭섭해 한다. 물론 기념사진을 찍고 비행기 안에까지 와서 인사를 하는 그녀의 밝은 모습을 멀리하며 네덜란드 항공 KLM 064편으로 프랑스에 아듀(Adieu:안녕)를 고했다.
5. 풍차와 꽃의 농업 선진국 네덜란드
KLM 064편 비행기로 1시간 10분후 유럽에서 4번째 큰 SCHIPHOL(배가 정박하는 곳의 뜻)공항에 도착했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와 같이 혼잡하지 않고 마치 우리 나라 시골의 역과 같이 조용한 공항이었다. 화물을 찾은 후 밖에 나오는 순간 빨간 제라늄꽃들이 화사하게 웃음 지며 우리 일행을 맞아 주었다. 공항 광장 전체가 붉게 수 놓은 것 같았다. 역시 花蘭이라는 이름을 갖기에 걸맞는 나라 라는 것을 느끼며 우리의 여성 안내자(현정아)를 만났다. 밝게 웃어주는 한국 여성의 모습도 참 오랜만에 본다.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공항로에 현대 자동차간판이 우뚝솟아 있어 우리 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모두가 즐거워하며 전용버스 안에서 네덜란드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다. 일명 홀랜드(Holland)라고 부르며 기원전 1세기 12개주로 구성되었고 여왕 입헌군주국이며 면적41,500Km2, 총인구1,500만명,국민소득24,000$,종교는 카톨릭과 기독교, 화폐단위 NLG(길다:1NLG=500원), 연 강수량 750mm,육지보다 낮은 땅이 약25%, 제방길이 2,500Km, 1년에 220일이 비가 오며 25일정도는 맑고 나머지 흐린날이라 한다. 25℃가 넘는 날은 약 26일 정도이고 더운 날이 거의 없는 나라라며 우리를 보고 "맑은 한국의 가을 날씨를 조금 떼어가지고 왔느냐"는 소리에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한국의 교민수는 약 700명정도로 상사주재원 100명과 관현악 유학생 100명이포함 된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아침인사(후드 모르겐), 저녁인사(후드 아보트) 헤어질 때 인사(디엔트)라는 말을 배우며 그 나라 기사로부터 직접 발음을 해보라 하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길가에 한 가정집 뜰에 풍선이 많이 매달려 있고 출입문에 여러 가지색의 천과 풍선이 늘어져 있다. 그런 집은 대개 결혼기념일 또는 생일 등 즐거운 축제가 열리고 있는 집이란다. 거리 곳곳에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인구 1,700명당 꽃집 한 개라는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로면과 운하 물의 높이가 거의 같아 장마가 지면 범람하여 위험할 것 같은데 집들이 운하 바로 옆에 지어져 있다. 연중 고르게 이슬비로 내리기 때문에 현재까지 집중 호우의 피해가 없었다고한다. 집집마다 자가용 보트가 한대씩 있는것을 보며 운하의 나라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전용버스가 교차로가 아닌데 신호대기를 한다. 밖을 내다 보니 다리가 들리고 있다. 그 밑으로 배가 지나간다.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道開橋를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이 나라에서는 약속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다리가 들려서 늦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자동차때문에 길이 막혀서 늦었다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버스는 약 1시간을 달려 갔다. Linnaeuslaan에 있는 PBG Aalsmeer Florens College (Middelbare Tuinbouw school)에 가서 농업학교 실습시설과 교사와 학생들이 수업하는 과정을 살펴보며"아는 것은 행하라!"는 교사의 말에 공감하였다. 실업계 교육 현안에 대하여 설명하는 교사는 Touw씨로 청바지에 상의는 양복과 넥타이 차림이다. 책상에 걸터 앉아 설명을 하는데 자세보다는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학벌은 농부자격을 획득하고 1년 더 공부한 사람인데 반하여 전문적인 지식이 해박함을 알 수 있었다. 점심 식사는 암스테르담 주택가에 위치한 한국관에서 한식으로 된장 찌개와 김치를 마음껏 먹고 빵과의 전쟁에서 해방되는 날로 기념하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정말로 오랫만의 일이었다. 오후에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다이아몬드 가공 공장 COSTER DIMONDS견학을 갔다. 17세기 이후부터 유럽 각국의 왕가와 귀족들이 왕관과 목걸이, 귀걸이 등을 맞추어 간다고 한다. 한 숙련공은 이 공장에서 다이아몬드를 가공하며 노인이 되기까지 한평생을 다 바쳤다고 한다. COSTER DIMONDS만이 58면각을 깍아낼 수 있어 세계에서 가장 가공을 잘하는 공장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었다고 자랑한다. 다이아몬드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구경도 하며 여왕 왕관 모조품을 보고난 후 담[DAM]광장을 관람하였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데리고 다닌다. 우리 농촌 집에서 많이 본 정겨운 모습이다. 잔디 위에서 꼬마 한명이 어머니와 함께 연을 날리고 있다. 우리 나라의 가오리 연과 비슷하나 연줄을 2개로 사용하는 것이 다른점이었다. 무게 중심이 잘 맞지 않아 땅에 곤두박질친다. 고쳐주어도 되느냐고 꼬마 어머니에게 묻고 난 후 허락하기에 연을 잘 고쳐 주었다. 꼬마가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담[DAM] 광장 근처에 있는 백화점에서 선물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우리 일행 중 실속파들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값이 싸고 실용적인 물건은 거의 떨어져 늦게온 사람은 물건을 살 수가 없었다. 또 주문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 데 1주일 후에나 물건이 온다고 한다. 사재기를 하는일이 전혀 없으며 평소 1주일 소비량 만큼 항상 준비한다고 한다. 저녁때 우리는 Mercure호텔로 돌아와 사우나를 하고 저녁식사 후 암스테르담 시내에 나가 네덜란드민요CD 1장과 우표를 구입하였다. 횡단보도마다 신호등이 있는데 사람이 건너가려면 스위치를 누르고 언제라도 건널 수 있게 설계되었으며 자전거 전용도로가 잘 마련되어 시내를 다니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관계없이 짝을 지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유럽나라 대부분의 상점들은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다. 24시간 중 8시간 일, 8시간 취미생활, 8시간은 잠,자기의 건강과 가정을 위하여 철저히 지키며 살아간다고 한다.
'96년 9월 6일 우리는 자유 대학( Vrije Universiteit )과 Ede에있는 IPC (Innovatic en parktijk centrum :기술연구소 센터)를 방문하여 모든 것을 살펴보며 네덜란드 교육제도(Education In Netherlands)에 대하여 IPC교사 Rob van dijk씨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가장 이름이 있는 자유대학( Vrije Universiteit )은 1년 동안의 수업료가 75만원∼90만원 정도 이며 여름 방학은 6월 중순부터 8월 말일까지 바캉스를 즐기고 9월에 입학식을 하고 석.박사코스로 약 10년 정도 걸리고, 5∼16세까지 의무교육, 만 5∼12세는 초등 교육(Primary Education),만 12∼16세는 중등교육(VBO=Pre-vocational education), 18세때 중등 전문대교육(HAVO=Junior General Scondary Education, VWO=Pre-University Education)과 대학교육(University Education)을, 18세부터는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본인의 노력에 의해 사회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우리 나라와 특이하게 다른 점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농업계 학교는 농림부가 관할하고 나머지 학교는 교육부가 관할한다는 것이었다. 농업계 학교의 수업료는 농림부가 75%를 보조한다고 한다. 이 나라의 원예는 딸기로부터 시작하여 화훼, 화목을 연구하고 2차 대전이후 유리온실에 연구를 하여 튤립 900여종을 육종보급했다고 한다. 약 3,000평 규모의 유리온실 내에서 토양대신 스펀지와 스티로품을 사용하여 양액 재배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일조량 조절용 차광막과 작물에 필요한 필수 영양소 및 미량원소를 컴퓨터에 의해 적정량을 보급하며 자동 제어되고 있었다. 이는 인건비를 줄여 다른 나라와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길이라 한다. 토마토와 피망(piment)고추가 3M이상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열매가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특이한 사항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천적을 이용한 생물학적 방제법으로 무공해 채소와 과일을 생산한다고 한다. 우리에게 직접 토마토를 따 먹어보라고 하였다. 먹어 보니 정말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냉장 보관 중에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 것보다 약 3주간 더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 고장 당진에서도 농촌 지도소의 지도아래 비닐하우스 재배 면적이 넓어지고 유리온실이 보급되고 유기 농법의 중요성을 인식하여"꽈리고추, 오이, 수박, 토마토"를 주요작목으로 선택하고 재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맹독성은 아니지만 농약을 살포하여 화학적 방제를 하는 것은 천적을 이용한 생물학적 방제법보다 문제점이 아닐까 나는 우리 나라에서도 생물학적 방제법을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어 보았다. 우리 나라와 달리 네덜란드는 농부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15년간 농업에 관한 공부를 해야하며 각종 농기구를 다루려면 면허를 취득해야 한다. 농약을 분무하는데 분무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하며 트랙터와 콤바인들을 운전하려면 우리 나라 자동차 운전면허시험과 같이 코스, 주행, 경운 방법 등 모두 합격을 해야 농업에 종사하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특히, 농업교사로 근무하고 싶으면 15년 농업에 관하여 공부를 마친 농부자격을 얻은 사람 중 1년 더 전문 농업수업을 받으면 가능하다고 한다. 왜 네덜란드의 농업이 세계에서 선두자리를 빼앗기지않고 있는지 해답을 알 수 있었다. 항상 농업기술연구소, 학교, 농민들의 Study클럽활동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을 통합한 삼각관계의 연구로 농민의 의문점이 풀릴 때까지 같이 현장에서 연구하여 농작물의 병충해 및 재배 방법상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고 인체공학을 연구하며 기계를 작동시키는 모습 속에서 사람의 존중함을 위해 연구 노력하는 일이 우리 나라와는 대단히 다르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한국인 농업교사 대표 40명이 농업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여 점심 시간에 만나 볼 수 있었다. 그동안 고국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약 4개월에 걸쳐 원예,임업, 식품처리, 버섯재배, 양봉에 대한 교육을 전문적으로 배우러 왔다고 한다. 한 팀당 10∼15명이 1주일에 약 50만원 정도의 수업료를 내면 국적에 관계없이 가르친다고 한다. 컴퓨터로 물건을 선별하는 과정, 각종 재활용하는 시스템을 보여주며 세계 어느 나라와 경쟁해도 지지 않는다고 한다. 컴퓨터제어실에 금성모니터가 눈에 띄어 반가웠다. 성능이 다른 나라 제품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며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고 하였다. 특히, 네덜란드에 대우,현대,기아자동차회사가 설립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현재 대우 자동차회사가 네덜란드 회사를 인수한다고 한다. 누구나 실업률을 낮추고 일할 기회를 준다면 외국기업이라도 관계가 없다고 한다. 소형 자동차는 100%수입차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자동차 현지공장을 잘 운영한다면 유럽에서 경쟁력을 갖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마지막 질문이 있느냐는 물음에 "우리 나라는 대통령 존영을 관공서의 사무실에 게시하는데 네덜란드여왕의 존영이 왜 화장실 입구에 붙여 놓아 여왕을 모독하느냐?" 고 질문했다. 그는 의아해 하며 어느 곳에 여왕의 존영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 걸어 놓았는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들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고려해 보겠다고하며 우리 일행과 단체기념 촬영을 했다. 지금까지 자기는 한국인, 일본인과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사진 한 장 보내주는 사람이 없었단다. 나의 스카우트 단복이 장군같다고 농담을하며 장군님이라고 별명을 지어 주었다. 우리 나라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니 너무나 먼 나라이기 때문에 자기생전에 갈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암스테르담 주 정부기에 표시가 보인다. 이것이 갖는 의미를 물었다. 는 사랑, 물, 불을 상징한다고 한다. 시내의 건물들이 5층을 넘지 않아 의아했다. 지반이 연약하여 암스테르담 주 정부에서 제일 높은 건물 1채 32층을 제외하고 높이 제한을 철저하게 한다고 한다. 잠시 후 우리는 책으로만 알고 있던 "안네의 일기"의 산실인 안네의 집에 도착하여 그가 묵었던 다락방을 자세히 살펴보고 안네의 동상과 기념촬영을 하였다. 암스테르담 광장에 있는 궁전에 갔다. 네덜란드 여왕이 매년 한번씩 국민들에게 정견 발표를 하는 곳으로 1년에 단 한번 중앙 현관문이 열리는 곳이란다. 또한, 바로 옆에 수상 관저가 있는데 건물은 아주 작았고 경비원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신변에 위험을 느끼지 않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전혀 위험이 없다고 한다. 그 만큼 국민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만 이곳에서 근무할 수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소개되었던 "귀가 길에 주먹으로 구멍난 둑을 막아 나라를 위험에서 구했다는 한스 소년 이야기"에 대하여 질문을 하니 가공 인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육지보다 낮은 나라에서 이 교육은 얼마나 큰 효과를 얻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저녁때 우리는 아데나 실내 축구장을 볼 수 있었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오렌지색을 입고 항상 경기에 임한다고 한다. 국왕의 이름이 오라니아(orange의 뜻)라는 데서 유래되어 항상 어느 축구대회에 나가든 오렌지색을 입고 참석한다고 한다. 특히 매년 4월 30일 국왕 생일에는 전국민이 오렌지색 옷을 입고 축하잔치를 한다고 한다. 가는곳 마다 길가에 흑인들이 각종 물건과 신문을 팔아 달라고 한다. 유럽에는 백인들이 사는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왜 이곳에 흑인이 많은지 안내자에게 질문을 했다. 과거 노동력이 부족할 때 노동 인력으로 들어온 사람들인데 여기에 정착하여 여러 가지 물건과 신문을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간다고 한다.
'96년 9월 7일 우리들은 만국 평화회의가 열렸던 역사적 장소 Den Haag(덴 학=헤이그)의 만국 평화궁으로 이동하는데 길가에 있는 집들의 옥상에서는 전 가족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 왔다. 연중 비가 많이 오는 나라에서 오늘 같이 햇빛이 화창한 날에는 모든 사람이 다른 일을 제처두고 일광욕을 한다고한다.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옷벗은 모습을 잘 이해 하지 못했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그 이유를 알것 같았다. 백인들의 몸에 비타민 D를 형성하기에 노력하는 모습들이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화훼재료 상점을 관람하며 갖가지 화병과 꽃들을 보고 교재용 슬라이드 사진을 찍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화훼책 한 권과 초벌 구이한 화병 한 개를 4.95길다 주고 구입하여 깨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보관하였다. 점심 시간이 되어 北海(North sea)가 보이는 식당에서 白포도주와 赤포도주 먹는 방법을 배웠다. 白포도주는 채소와 생선같이 흰색을 띠는것을 먹을때, 赤포도주는 붉은색 나는 육류를 먹을때 마시는 거란다. 나도 白포도주 한 잔과 대구(Cod)까스를 먹고난 후 북해에 손을 담가 맛을 보았다. 우리 나라 바닷물과 염도차가 없게 느껴진다. 자유롭게 뛰어 노는 강아지와 아이들, 모래성을 쌓는 여학생이 참 귀여웠다. 발이 시려운데도 햇빛이 빛나고 맑은 하늘이 좋다며 노는 어린이들을 보며 우리 나라의 날씨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버스 운전수 CAINE씨에게 이곳 북해 연안에 대하여 아는대로 설명해달라고 했다. 마치 교사처럼 설명을 어찌나 잘해 주는지 특히, 5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 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의 기후는 서안 해양성기후로 여름에도 서늘하며 월평균 기온이 22℃, 연 강수량 500∼1,000mm로 습윤한 계절적 변화가 적은 곳이다. 북해 연안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사료 작물과 육우 사육을 하는 상업적 혼합 농업으로 전환하고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목축부분이 더욱 고도화되어 전문화된 낙농업을 발전시켰다. 이와 같이 유축 농업이 발달한 것은 유럽식 농업의 가장 큰 특색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북해 연안의 대도시 주변이나 교통이 발달된 곳에서는 채소나 화훼, 과실을 생산하는 원예 농업이 발달하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만국 평화궁에 도착하였다. 정문이 닫혀 있어서 궁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궁 안에 빨간 크록스꽃들은 녹색의 잔디와 대조를 이루는 아름다운 궁이었다. 정문 밖에서 우리들은 기념 촬영을 하고 잠시 1907년 제 2회 만국평화회의 때로 돌아가 보기로 하였다. 우리 나라도 12번째 회원국으로 정식 초청 되었고 고종 황제는 세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 보호 조약의 부당성과 불법적 행위와 침략사실을 널리 알려 국제여론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국제정세는 우리 나라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못하는 마음 그 누가 알아 줄까 지금도 울부짖음이 내 귀에 들려 오는듯 하다. 이준 열사께서 통분한 나머지 이국 땅에서 순국하신 바로 이 곳 빨간 크록스꽃은 마치 그 분께서 흘리신 선혈과 같아 보였다. 우리 일행은 다시 헤이그 시내에 있는 YI JUN PIECE MUSEUM (Wagenstraat 124A, The Hague, The Netherlands Tel:31-(0)70-356 2510 Fax:31-(0)70-361 5227)에 도착하여 그분의 자취를 찾아 보며 참배를 드렸다. 헤이그 3밀사 이준, 이위종, 이상설에 대하여 손창주박물관 관장으로부터 그분들의 업적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듣고 유품들을 살펴 보며 방명록에 우리도 님들의 뜻을 깊이새겨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제자를 기르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름을 써 내려갔다. 일본과 영국이 원망스러웠다. 英日同盟이 없었던들 우리 나라는 벌써 세계 속에서 선두로 달려가는 선진국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쉬움이 많았지만 우리들은 님들을 뒤로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이준 열사의 生死觀이 헤이그의 이준 평화 박물관 벽에 살아 숨쉬고 있다.
人死稱何死 人生稱何生
死而有不死 生而有不生
誤生不如死 善死還永生
生死皆在我 順勉知死生
" 사람이 죽는 것이 무엇이며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죽어도 죽잖은 것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나니
그릇 살면 차라리 죽음만도 못하고
제대로 죽으면 되려 영생하느니
살고 죽는게 모두 제게 달렸다면
모름지기 죽고 삶을 바르게 힘쓰라 "
돌아오는 길에 레이크스 박물관에 들렀다. 빈센트 반고호의 그림과 램브란트가 그린 가로 140m 세로 35m크기의 유화작품을 보며 우리는 미술의 세계에 매혹되어 40여분이나 머물러 있었다. 저녁을 먹고 노을진 암스테르담 강가를 거닐었다. 젊은 연인들이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고 강에서 카누를 타며 즐기는 사람, 배 위에서 살림하며 사는 보트 족, 이 모두가 하나의 화폭에 잠겨 살아 숨 쉬는 그림이 되었다. 내일은 유럽에서 마지막 남은 시간을 어떻게 하면 뜻있게 보낼까하며 아쉬워하는 눈치들이다.
'96년 9월 8일 오전 9시 서기 1000년에 세워진 도시 할렘(Haarlem)에 있는 풍차 민속촌을 향하여 버스로 이동하였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사진에서 익히 보아온 풍차! 신은 세계를 만들고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만들었다는 소리가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렸으나 물이라는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풍차를 만들어 척박한 간척지(폴더)를 개간하고 초지를 조성하여 풍요로운 목장으로 가꾸어 현재세계 제일의 치이즈 생산국이 되었다는 설명을 듣고 이해가 되었다. 안내자로부터 치이즈 만드는 공정에 대하여 설명 들으며 시식을 해보고 나무로 신을 만드는 공장에서 구경을 하며 우리 나라 나막신을 연상하게 되었다. 습지가 많아 네덜란드인들은 나무로 만든 신을 신었는데 현재는 민속 공예품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풍차 집에 들어가 보았다. 물레방아와 같은 원리로 동력이 바람을 이용하는것 한 가지만 다른 점이었다. 지금도 풍차를 이용하여 낮은 곳에 고여있는 물을 퍼내어 제방위로 보내고 있다. 과거와 같이 많이 사용하지는 않지만 농장에서 밭에 관수를 할 때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풍차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한 동양인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 홍콩인 王衛建이었는데 혼자 배낭여행을 왔다고 한다. 중국어와 영어로 의사 소통이 되었다. 그를 미남이라고 하였더니 자기가 미남이라면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웃는다고 하며 아니라고 한다. 점심을 먹고 17세기경 조성된 햇살 모양의 암스테르담 운하를 관광하였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유람선에서 영어. 불어, 독어, 한국어로 설명을 하고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나라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는 듯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 모두가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캐나다 사람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 캐나다 퀘백주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자기 직업은 바이어라고 소개하며 우리 나라 남북 관계에 관심이 많다고 하며 잠시 대화를 나누자고 한다. 남북한 통일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곧 통일이 될 것이며 세계로 손잡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날이 올 것을 확실히 믿는다"고 했다. 그 소원이 이루어 지길 바란다며 악수를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저녁 17시 0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SCHIPHOL공항으로 가는 길에 인공 담수호 중 세계에서 가장 큰 에이셀 호(Lac Ijssel)와 우리 나라의 삽교호를 비교하여 보며 크기에 매우 놀랐다.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신고를 하고 세관에서 배낭과 물건을 검사하며 여권에 네덜란드 표시의 스탬프를 찍고 출국문을 통과하는데 허리 쌕(Sack)한개를 습득하였다. 그 속에는 현금 350$과 한국지폐, 동전이 약간 있을 뿐 아무런 신분증이 없었다. 주인을 찾아 주려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물으며 대합실을 돌아 다녔다. 잠시 후 한 사람이 허리 쌕을 잃었다며 허겁지겁 뛰어 다니고 있다. 허리 쌕의 형태를 물어 보고 일치 하기에 돌려 주었다. 몇 번이나 고맙다며 인사를 한다. 무역 회사원인데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는 중에 허리 쌕을 분실하였다고 한다.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것 뿐인데 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흐뭇하였다. 암스테르담발 서울행 대한 항공 KAL KE 912편은 오후 5시 00분 정각에 이륙하였다. 한국까지 소요시간은 11시간 30분정도 걸린다고 한다. 오늘밤은 비행기 내에서 일박을 한다. 유럽이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 왔었지만 우리 나라 금수 강산에 비길 만한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단지 그들은 우리 보다 조금 일찍 전통을 지키는데 노력하며 문화재를 아끼고 과거와 현대가 함께 어우러지게 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좋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
'96년 9월 9일 아침해가 밝게 떠오른다. 하늘에서 해를 맞아보기도 처음이다. 모두들 피곤한 모양이다. 지친 모습으로 잠을 자고 있다. 나는 집이 가까워지고있다는 기쁨에 잠이 오지 않았다. 집안 식구들, 학교 선생님, 학생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드디어 창밖에 황해가 보이고 인천이 보이며 김포가 눈앞에 들어온다.잠시 후 착륙하고 입국 신고서를 제출한 후 우리 모두는 무사히 고국에 도착하였음에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더위와 싸움이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의 위도는 33°∼43°인데, 유럽 4개국의 위도는 42°∼55°사이로, 위도 10°∼20°차에 이렇게 온도차가 많이 날수있나?.
천안 톨게이트에서 일부 내리어 그동안 정 들었던 일행들이 손을 흔들며 하나, 둘씩 떠나갔다. 당진집이 가까워짐에 식구들에게 먼저 무슨 말을 할까 생각했다. 집 앞까지 나와 기다리던 식구들과 팔순 노모님의 "몸성히 잘 다녀왔니?"한마디에 콧등이 찡해지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잠시 하늘 높이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본다. 한성 아파트에서 바라보던 세상과 높이 날수록 멀리 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 학생들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교사로 거듭나야겠으며 우리의 눈을 세계로 돌려 급변하는 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을 길러 내어 나라와 민족에 쓸모 있는 인간으로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해 본다.
강 현주
경기도 일산시 장항동 호수마을 유원 아파트 302동1701호
이 정애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293-1한국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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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걸때는 맨앞에 0을 더침
⊙ 독일 : 0082-457-52-5440
콜렉트콜-공중전화 013080-0082-+ 신청
호텔에서 0013080-0082+ 신청
⊙ 스위스: 00-82-457-52-5440
⊙ 프랑스 : 19-82-457-52-5440
⊙ 네덜란드 : 09-82-457-52-5440
☎한국교환을 통한 통화방법
⊙ 프랑스 : 19-00282
⊙ 독일 : 0130-80-0820
⊙ 네덜란드:06-022-8220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14.0℃
♣96년8월29일 (제1일차)
10:30 김포국제공항제2청사2층 집결
외환은행:30만원환전US$ 360(1$=831.48원) 출국소속
※ 아침인사-구텐 모르겐, 저녁인사-구텐 탁 고마워요-당케쉐
☞ 독일개요 - 유목민으로 방랑하던 게르만 민족은 5세기 초에 프랑켄왕국을 건설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 도시국가, 중세의 영주국가를 거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시작,비스마르크의 통일시대후 국력이 크게 신장,공화국시대,1,2차 세계 대전의 주도국 으로 역사를 기록하여 갔으나 패전의 결과는 산업시설의 전반적인 파괴와 민족의 분단으로 참 담한 시대를 맞이했으나 재건의 의지는 세계가 놀라는 경제 부흥과 안정된 제도와 정치로 복지 국가를 건설하고재통일(,90.10.3)의 위업을 달성하 여 EC의 중심국으로 다시 역사를 주도하는 강인 한 민족성의 국가임.
☞ 정치-수상 중심의(임기4년) 내각책임제로 상,하 양원의 의회 제도와 지방 자치제의 발달로 지방의회 중심으로 활성화 되고 하원은 직선(4년마다)연방 대통령이 연방의회에서 선출(임기5년)되는 데 실권은 없으나 독일을 대표하며 정치는 수상 중심으로 이루어짐.
☞경제-튼튼한 물건을 생산하여 국제사회에서 신용도 높은 공업 국으로기계 철강,화학,자동차 분야에서는 독보적이 나 전자,항공 분야의 첨단산업에서 미,일에 밀리는 상황에서 콜 수상 정부의 야심적인 첨단 분야 10개 년투자계획이 가동 중, 통일 후 제2의 경제 부흥을 기대하고 있다.
☞ 인구-통독 후 7995만여명 인구밀도:217명/㎢ 면적357,042㎢
베를린(350만)함부르크(150만)뮌헨(120만)프랑크푸르트(61만)
☞종교-개신교49%. 카톨릭36%.무종교13%.모슬렘2%.기타2%
성직자는 공무원 대우를 받으며 신자는 교회세를 낸다.
☞언어-독일어,대도시와 관광지에서는 영어사용이 가능함.
☞교육-의무교육9년, 각자의 개성과 소질에 따라 장래의 직업과 관련된 상급학교 진학, 대학 진학은 13년의 과정후 대학 입학자격고사(ABITUR)를 거쳐서 입학,대학은 각 분야 관리 및 인력양성 위주의 교육기관으로 학비는 무료이며 졸업은 능력제로4-6년걸림.
☞
※ 바이에론-목공예품 보덴호수-미술.화랑,
※ 슈바르트발트-목공예품.뻐꾸기시계,유리그릇,도기.
※ 프랑켄-전통독일요리,손바구니,양철인형
※ 함부르크-고급보석상,골동품상
※ 베를린-자기
♣96년8월29일현지시각18:15 (한국시간밤 1시15분) Frankfurt
(프랑크푸르트)도착-국제적 금융도시
※ Tour guider-KANG,DU-HYUN(강두현)박사(철학:충북사람)
ZUM BUDESHEIMER.PFAD 8 61130 NIDDERAU. GERMANY
TEL:(06187)22081/2
FAX:(06187)22160
전용버스이동- 동해식당석식후
※ HOTEL : HOLIDAY INN OFFENBACH
♣96년8월30일(2일차)
※ 09:00 하이델 베르그(Heidelberg)
Odenwald(오덴)의 푸른 산림으로 둘러 쌓여 있는 자연 경관이 뛰어난곳이며 1356년왕가,제후들의 휴양지로 조성
1386년개교 08학기 공부 9학기논문 졸업을 위한것 4년제대학은 5 1/2-6년소요
※독일최초의 대학.Heidelberg로 이동 후 고성(600년됨) 및 낭만 의 대학가 학사주점 - (황태자의 첫사랑 촬영지)
※학생감옥(KAREZER)-1712년-1914년사용 관광
※Neckar(네카강-라인강의 지류)-포도주,2개의유리잔,타래송곳
포도주 쟁반이 유명
※하이델베르그 대학본관 및 대성당관람
※18:00 교민과 대화의 시간
※왕 충 현 : Karl-pfeuffer str.24 60388 Frankfurt Germany
Tel:49-6109-34477Fax:49-6109-34475Handy:49-171-4402087
※ HOTEL : HOLIDAY INN OFFENBACH
♣96년8월31일(제3일차)
※ 08:00학교방문 : 라이프니찌히 (Leibniz gymnasium)학교방문
59년전 개교 1200명 1반-22명으로 60개학급
5년-컴퓨터 6년-컴퓨터2시간(1주) 7년-정식과목---원하는 대 로 직업학교교육(농업학교,생물학교,공업학교-전자기술학교,
화학기술학교로 세분화 됨)
※ 교육제도-9년이무교육(초등교4년 중등교육5년) 토지 주정부
관리 농업 3년간 교육 후 농사질 자격을 줌
※09:00 포도재배농가 방문 ( MUD)포도농장
※ Pensiom enber(여인숙 명칭)
※ 게르마니아 여신상-1870년-1871년 보불전쟁 승리기념
높이38.5M
※ Loreleyfelsen-로렐라이Loreiey(요정이름) 언덕 관광
-프랑크푸르트에서 120Km떨어진곳 BADHOMBURG
의 코브렌쯔(Koblenz)도시
※빌헬름 황제동상(KAISER WILHEUMS BAD)
※18:00프랑크푸르트귀환-HOTEL:HOLIDAY INN OFFENBACH
※시내관광-맥주홀 사창가관람
⊙스위스 (Switezerland : swiss)
※국민소득:38500$
※면적:41000㎢gksqksehdml1/5(한국의경상도+전라도)
※1SF=670원(동전=1,2,5,10,20,50 지폐=10,20,100,350,500,1000)
※사용언어:불어,이태리어,독어로만시어(라틴어인구의1%미만사용
※호수:약1500개
※1648년 중립국가, 제네바 : 14.0℃
※ 박물관-랜디스뮤지엄-옛날 투구,벽화-1515년 메리뇽 전투
11-13세기 로마네스크식 성베드로 교회의 시계 지름72Cm
괴테,모짜르트,쉴러 음악가
※ 샤프하우젠-1045년(1944.4.1. 미공군 습격-독일로 오인함)
1564년 요세(성) 상징:양 .차량통행금지 라인폭포-21m
※루쩨론-쮜리히로 부터 64㎞떨어짐-휴양도시
(독일어,독일풍).문화의 교차로,
※탑 빈사의 사자-석상. 톱니바퀴기차(증기기관)
934년 베네딕또수도원(바로코식)
※ 140개의 빙하 1년에 3Cm이동,알프스공원
에델바이스 구경,요들송
※ 인트라크-1800년대
※ 베른-1848년 스위스의 수도 1131년에 형성된 도시-상징=곰, 시계탑.
※ 바젤
※ 류샤트-류샤트성
※ 로쟌느-고급 포도주(불어)스위스 고등법원 소재,대학,상업,
휴양중심지.
시용성(13세기)-마법사재판 및 고문
※제네바-3대도시-국제연맹본부(1946년해체)후UN의유럽본부, 꽃시계
※ 체르마트-니콜라이강 상류
※ 안데르 마트
※18:15 호텔-HOTEL : PENTA OR SAME CLASS ( BOGIS )
♣96년9월2일(제5일차)
※09:00 Chaymony(샤모니)로이동 Mont Blanc 4807m
(몽블랑=하얀산)몽=MT 블랑=white 등정
※ 시내관광 - 맥가이버 칼 4개구입(60$)
북한무역대표부건물관람, 세계장미공원관람,
※ 제네바대학(국립대학)방문- 노틀담성담(1275년)
칼빈의종교개혁(1536년)
※ 국제연맹-UN의 유럽 본부, 국제적십자사건물
※ 레만호(LAC LEMAN) 대분수
※ HOTEL : SAME AS ABOVE
※BUCHERER백화점에서SWACH시계2개구입- (100$=117SFr)-박찬원에게서 삼
⊙프랑스 France
※카톨릭역사1500년 교황24명배출,
※주거지역:녹지대6:4,
※유럽의 곡창지대이며 농업국,
※자국의 농민보호를 위해 자국농산물 먼저 판매후 후에 수입품
판매.
※전국인구 5500만
※면적546,000㎢ 남북의2.5배 남한의6배,
※1$=5Fr, 1F=160원
※국기- 청색=국민 흰색=왕가의 상징 적색=군중의 특징
※파리:도시계획 100년전에 수립. 시내에 19개의 공동묘지가 있음
※ 크기 동서로12㎞ 남북으로9㎞ 인구220만 9 월평균기온15.9℃
※ 위성도시8개시 파리외곽도로 총길이 35㎞
※ 아침인사=봉쥬르 오후인사=봉수아르 다시보자=오브아
당신 사랑해-즈 땜므
※교육-그랑제꼴(대학)-영재학교 신학기10월 1달에 1주일
이상 밤을 세워가며 공부함
가정교육-스파르타식(16세때까지 부모말 절대 복종)
-17세 부터 자유 스스로 책임지며 독립
※ 바깔로니아-과별 예비고사
교사-체벌하지못함(단,부모소환 3번이되면 다른학교로
전학가야함)
학교수업= 월,화,(수=쉬고) 목,금,(토=오전수업)
※가이더:양 단철: 15. Av.president wilson 75016 paris . France
※France에서서울로전화(수신자부담00282-0457-52-5440)
♣96년9월3일(제6일차)
※07:45 TGV로 파리 이동(66,640원) 프랑스리용역까지3시간30분
소요- 오후2시05분에 도착
※쟌다크 동상
※11:12 베르사이유궁-루이14세(짐이 곧 국가다)부터시작 20년에 걸쳐 루이16세때 완성 ( 1661년-1682년 )
루이16세 열쇠 수리에 열중하는 왕으로 3년간 감금 생활 을 하고 탈출시도하다 잡혀서 콩크드 광장(피의 광장으로
불리기도함)에서 1343명 단도대에서 죽음-세계 최초의 민주화=프랑스 대혁명
왕비(마리아 앙뚜아네뜨-오스트리아공주)침실,
거울의 방(무도회 열던곳)
※ 책구입-마스터카드(50F*160=8000원 정도)
※18:00 석식호텔-HOTEL:HILTON ORLY AIRPORT PARIS
♣96년9월4일(제7일차)
※09:00-화훼관광농장-1969년부터시작 10만평 1350가지 식물재배
4000종의 꽃재배
1ha=어린이놀이터 음식을 먹을수 있는 곳
1996년 다알리아 경연대회 거름=카카오 썩인것
※파리 루브르 박물관관람
※뷔너스상-그리스 남쪽 미로에서 발견 아름다운 여신 기원전90년으로추정(2100년)
※질투의 여신-제우스 신의 부인
※피에튼의 추락(그리스 시대)
※니키(나이키:승리의 여신)-기원전190년(2200년전)
※테라코타-죽은사람이 술마시는모습-2500년전-샤므트라케돌섬
에서 발견
※오달리스크(Odaliskque-1814하녀라는 뜻)- 23m
-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4년에 걸쳐 가져옴.
※140캐러트다이아몬드
※모나리자-레오나르도 다빈치(이탈리아인)
※기리코(gericault)의 메두사의 뗏목(1791-1824)
낭만주의 의 시작
※드라크와-낭만주의 기수-불란서혁명찬양
※이오밍뻬이-철골구조 세계적인 권위자
(루부르 박물관 입구 조형물설계)
배낭여행학생만남
※ 강현주:경기도 일산시 장항동 호수마을 유원 APT302동1701호
※ 몽마르뜨언덕(몽=산 마르뜨=순교자-해발 130M
추억의 광장)-생드니로세교황순교
※예수성심사원관람-1919년에 만듬
노틀담 (노틀-성모님 담=마담)대성당-임마누엘 종 보관
28개의 입상=유태인들의왕이며 학자들의 상
들어가는 문 왼쪽 = 성모마리아문 중앙=최후심판의 문 오른쪽=성녀 안나 문 최후심판의문에서 저울질하여 왼 쪽으로 치우치면 천당 오른쪽으로치우치면 지옥
콩크드 광장(화해의 광장)
※12:00 개선문 샹제리제 거리 관광
점심-엉트로꼬트(달팽이요리,쇠고기,빵-17000원)
※Roure Aline:149 Ter Rue de Roruy 93 100 Nont reiul France Tel : 48 58 9063
※세느강-수심 3-4m 총길이 774㎞ 하수도 총길이 2100㎞, 32개의다리가 있고 pont neuf(퐁네푀)400년된 다리임
※Bateaux mouches (뱃사공)의 뜻을 가진 유람선 타고
세느강 야경 구경
※에펠탑(1889년 무역박람회 기념 에펠이 만듬 320 m
총무게 9500톤)관광 (70$)
※18:00 호텔 투숙-HOTEL:HILTON ORLY AIRPORT PARIS
⊙네덜란드(HOLLAND)
※ 기원전 1세기 12개주로 구성
※ 1$=1.55GILD (1길드=500원)
※ 면적-41500㎢(한국의남한크기의반임)
※ 전체인구1500만. GNP=24,000$,
※ 연강수량750MM
※ 원예는 딸기로 부터 시작하여 화훼(화목)연구함
※ 1815년 윌리엄 오란(오렌지=오라니아-국왕생일 4월30일 생일) 여왕 입헌정치국
※교민수-700명(500명교민100=상사주재원,100=유학생(관현악)]
땅 27%바다보다 낮은곳임, 제방둑길이-2500㎞ 수심5m
※아침인사-후드 모르겐 저녁인사-후드 아보트 good bye=디엔트 헤드비어=날씨
※인구1700명당 꽃집 1개
※ 교육-자유대학-석박사코스-약10년걸림,5-16세=의무교육,
5-12세=초등교육,12-16세=중등교육,18세 중등(전문대교육),18세 -대학교교육
※ 18세 독립
※ 대학교1년등록금=75-90만원, 3수까지허용, 학기=9월시작
방학-6월중순-8월말까지 방학
※ 농업학교는 농림부관할 75%가 농림부 보조
※ 농민들의 study그룹이 각곳곳에 있다 공통점 연구로 연구소에서 연구하여 해결
※2차 대전 후 온실 유리붐 튤립종류=900여종
KLM-1919년 알베트프린스만이 비행기 만듬
트라이 앵글 시스템-연구소,학교,정보
※암스텔담의 유명한COSTER DIAMONDS공장견학
(58면각처리 기네스북에 오름)-다이아몬드시계삼123길다
(123*500원)
☎ 네덜란드에서 한국 서울 06-022-8220-0457-52-5440
※암스테르담 : 상징 XXX(사랑,물,불) 14.0℃,아데나축구장
♣96년9월5일 제8일차
※ 08:00 조식
※ 10:15 KL064 암스텔담향발
※ SCHIPHOL=유럽에서 4번째 큰 비행장(SCHIP 배 HOL정박 의 뜻을 지님)
※ 1년 날씨=25일구름없는날,26일-25℃넘는날,220일-비오는날
※11:25 시내명소관광
오후-운하 다이아몬드 공장 화훼농장 관람
※19:00 석식 후 호텔- HOTEL : MERCURE
※현정아Nachtegaalln183135kw.VlaardingenTheNetherlands.
♣96년9월6일(제9일차)
※ 학교방문-Ede에 있는 IPC(innovatie en parkjijic school-
기술연구소센터) ※농업실습교육센터-원예,임업,식품처리,버섯재배,양봉 기술교육(6-9명이 1조로 1주일50만원정도약1000길다)
※ 안네의 집방문 및 동상에서 기념촬영 ,
※ 한스=가공인물(뚝을 주먹으로 막은사람)
학교 실습 시설 견학 교육현안 토의
※18:00 석식 호텔-HOTEL : SAME AS ABOVE
♣96년9월7일 제10일차 09:00 헤이그(Den Haag) 로이동
※ 만국평화궁 이준열사 묘역 참배
※ 화훼재료상점관람-화병구입 4.95길다
※ YI JUN PIECE MUSEUM관람
※ 세계제일의크기그림 감상(가로140m 높이 35m)
※ 홀랜드 민속 노래CD구입(42.95길다*500= 원)
※ 대구까스중식-북해에서 손을 담그고 거닐어 보다
※18:00암스텔담 귀환 - HOTEL : SAME AS AB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