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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군왕(君王)은 성군(聖君)으로 기억되고 싶어한다. 누가 폭군(暴君)·용군(庸君·어리석은 임금)으로 기억되고 싶겠는가? 그러나 원한다고 모두가 성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주 개인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 시대는 악역과 가시밭길을 요구한다. 이때 악역과 가시밭길을 거부하다 용군이 된 지도자는 많다. 반면 묵묵히 악역과 가시밭길을 걸음으로써 후대에 평가받았던 군주는 소수이다. 스물일곱 조선 군주 중 악역을 자청했던 두 임금이 3대 태종과 7대 세조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뭇 다르다.
태종도 다른 군주처럼 성군이 되기를 바랐다. 또한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성군이 되기를 바랐는지는 태종우(太宗雨) 고사가 잘 말해준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음력 5월 10일에 내리는 비가 태종우이다. 조선의 민간 풍습을 기록한 홍석모(洪錫謨·1781~1850)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5월조는 “태종이 임종할 때 세종에게 ‘가뭄이 극심한데 내가 죽어서도 비록 알게 된다면 이날에는 반드시 비가 오게 하리라’고 말했는데, 훗날 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 초·중기 문신 정경세(鄭經世·1563~1633)는 『우복집(愚伏集)』에서 “동산(洞山)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니 크게 가물었는데, 때마침 반가운 비가 왔다. 금년은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오지 않고 더 심했는데, 5월 10일 감로수 같은 비가 새벽부터 밤까지 내렸다. 이 나라의 민간에서 소위 말하는 태종우이다”며 “느낀 바가 있어서 그 기쁜 뜻을 적는다”고 기록했다. 신라의 문무왕이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겠다고 한 비장한 애국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죽어서도 비를 내리고 싶었던 태종은 살아서는 성군의 길을 걷지 못했다. 시대가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종은 재위 16년(1416) 5월 19일 극심한 가뭄 속에서 기우제를 준비하는 예조와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에 전지를 보내 “가뭄이 든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니 다른 까닭이 아니라 무인년(戊寅年)·경진년(庚辰年)·임오년(壬午年) 사건이 부자와 형제의 도리에 어긋났기 때문이다”고 자책했다.
무인년(1398·태조 7년)은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 해이고 경진년(1400·경종 2년)은 제2차 왕자의 난, 임오년(1402·태종 2년)은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발생한 해였다. 이 난들이 부자와 형제의 도리에 어긋났기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자책이었다. 태종으로서 이는 피를 토하는 자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태종은 곧이어 “이 또한 하늘이 시켜서[天使] 한 일이지 내가 즐거워서 한 일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태종이 악역을 수행한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그러나 그 명을 따른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에 따른 벌책은 태종이 감수해야 할 운명이자 업보였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의 최초 악역은 정몽주 살해였다. 이성계는 우왕(禑王) 9년(1383) 함주까지 찾아온 정도전(鄭道傳)을 만나면서 새 왕조 개창을 꿈꾸었지만 그에 따른 역신(逆臣)이란 비난까지 감수할 생각은 부족했다. 변방 무장 출신이란 이성계의 콤플렉스는 세평(世評)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때론 이런 성격이 개국에 대한 의지도 무뎌지게 해 개국을 물거품으로 만들 뻔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혁명 무력과 혁명 사상의 결합이었다. 역성혁명파가 고려 말의 문란한 토지 문제 해결을 개국 명분으로 삼은 것은 정도전의 혁명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위화도 회군(1388)으로 나라가 어수선할 때 정도전은 조준(趙浚)에게 토지 개혁에 관한 상소문을 올리게 해 혼란스러운 회군 정국을 일거에 토지 개혁 정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부전(賦典)에서 “전제(田制·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아울러 병합해 부자는 밭두둑이 서로 잇닿을 만큼 땅이 많아진 반면 빈자(貧者)는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의 주인이 7~8명인 경우도 있어서 빈자들은 남의 땅을 빌려 일년 내내 부지런히 일해도 밥을 먹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토지 개혁을 통해 새 왕조를 개창하기로 결정한 역성혁명파는 공양왕 2년(1390) 공사(公私) 전적(田籍·토지문서)을 개경 시가(市街)에 모아 불을 질렀는데, 『고려사』 ‘식화지(食貨志)’는 “이 불이 사나흘 동안 탔다”고 전한다. 이때 공양왕은 “선왕들이 만든 토지제도가 내 대에 와서 크게 바뀌니 아까운 일이다”며 눈물을 흘려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이처럼 과거의 문란했던 토지제도를 무효화하고 공포한 새 토지제도가 공양왕 3년(1391) 5월에 반포한 과전법(科田法)이다. 정도전이 이에 대해 “전조(前朝·고려) 때와 비교하면 어찌 만 배나 낫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빈농(貧農)들은 과전법을 쌍수 들어 환영했고, 농민의 지지는 새 왕조 개창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공양왕 4년(1392) 3월 명나라에 다녀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낙상한 것이다. 『고려사』는 경연(經筵) 중에 이 소식을 들은 공양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정몽주는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전한다. 공양왕과 정몽주는 이를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기 위해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로 여겼다.
정몽주는 곧바로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을 시켜 역성혁명파를 탄핵했는데, 『고려사절요』는 보고를 들은 공양왕이 주저 없이 정도전·조준·남은·남재·윤소종·조박 등 역성혁명파 핵심을 귀양 보냈다고 전한다. 게다가 “정도전은 귀양 간 곳에서 처단하여 뒷사람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탄핵이 뒤따라 곧 사형에 처해질 분위기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이성계가 벽란도(碧瀾渡)에 누워 자려 하자 이방원이 급히 말을 달려 찾아왔다.
“이곳에 유숙해서는 안 된다”는 방원의 거듭된 재촉을 받고서야 이성계는 견여(肩輿)에 올라 개경의 사저로 돌아왔다. 『고려사절요』는 “형세가 위급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는 방원에게 이성계는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있으니 다만 순하게 받을 뿐이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거의 체념 상태였던 것이었다. 이때 다시 변수가 발생했다.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온 것이다.
위독하다는 소문과 달리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자 사실 여부를 알아보러 온 것이다. 정몽주는 세평에 신경 쓰는 이성계가 자신을 해치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고려사절요』는 정몽주의 문병을 받은 이성계가 “전과 같이 대하였다”고 적고 있다. 방원이 이지란에게 정몽주 제거를 요청하자 “공(公·이성계)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하겠는가”라며 거절한 것처럼 정몽주 제거는 모두가 꺼리는 일이었다. 정몽주의 예상은 맞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방원을 간과한 예상이었다.
방원은 결단을 내려 가신(家臣)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 공양왕 4년(1392) 4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제거했다. 이성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동각잡기』는 방원이 사실을 고하자 이성계가 “너희들이 대신을 멋대로 죽였으니, 남들이 내가 모르는 일이라 하겠는가”라면서 “내가 약이라도 먹고 죽어 버리고 싶다”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했기 때문에 이성계는 석 달 후 개국시조가 될 수 있었다. 방원까지 악역을 거부했다면 조선 개창은 무망(無望)한 일이었을 것이다. 개국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오명 또한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다. 이 또한 그가 선택한 인생이었다.
첫댓글 조선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