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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백촌공파 연혁
경주김씨의 시조는 알지(閼智)이시니 신라 석탈해왕 9년(서기65년) 경주 계림에서 탄생하시었다.고사에 의하면 경주 시림(始林)에 오색이 찬란하고 계성이 고고하여 이상히 여긴 석(昔)탈해왕이 직접 시림에 거동하여 보니 금빛 찬란한 궤(櫃) 아래서 흰 닭이 우는지라 기이히 여겨 궤를 열어보니 이목이 수려한 어린 옥동자가 들어있어 기뻐하며 데려다 길러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성은 김(金)씨로 하였다는 신화가 전한다. 우리 경주 김씨는 미추왕께서 처음 신라 13대 왕위에 오른 후 라조(羅朝) 박(朴) 석(昔) 김(金) 삼성 56왕 992년 통치 중 38왕 587년을 면면히 내려 왔다. 백촌공파(白村公派)는 신라 마지막 왕이신 경순왕의 네째 아드님이신 은열(殷說)을 중시조로 본관을 경주로 하여 내려오다가 은열의 7세손 시흥(時興)이 김령군(金寧君)에 봉작되면서 본관을 김령으로 바꾸었으나 김령군이 김해로 지명이 변경되면서 그 후손들 중 혹자는 김령, 흑자는 김해, 또 혹자는 경주로 관행하는 등 난맥상을 이루다가 본 파조(派祖)이신 백촌공(白村公) 휘(諱) 문기(文起)에 이르러서는 본관을 고증할 수 없게 되었다. 백촌공이 단종사화에 연류되고 그 자손 3대가 금고의 형(刑)을 당한 후 종통(宗通) 일맥(一脈)이 혹은 산간벽지, 혹은 절해고도에서 겨우 명백만을 유지하던 중 자례(知禮) 김치욱(金致旭)등의 가짜 족보 사건 선조묘소 찬탈 사건 등 갖은 수난과 곡절을 겪으면서도 끝내 종통을 지켰고 현종 병오(현존12년 1846년) 8월21일 임금님의 윤허를 얻어 다시 경주로 복관함으로써 시흥(時興) 이후 어지럽던 관향(貫鄕)을 경주로 단일 정리케 되었다. -------------------------- < 백촌공 유사록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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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촌공,김문기 할아버지의 연혁을 잘 숙지했습니다.
위백촌공파연혁에서 백촌공이 단군신화에 연류되고에서 "단종사화" 로 잘못표기된듯합니다.
진언 종친님, 잘 지내셨는지요. 백촌공이 단군신화에 연류되고에서 "단종사화" 로 정정허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언님께서 말씀 안해주셨으면 그대로 잘못표기할뻔 했네요. 감사합니다. 자주 들리시어 좋은 고견 주시기 바랍니다. 행복한날 되십시오
상촌사랑 종친님 안녕하신지요, 모처럼들렀습니다.
진언 종친님, 반갑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죠? 벌써 또 한해가 지나고 임진년 새날을 맞이했네요.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에 화목하시기 바라오며 소원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금년에는 자주 들려 고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시자 흥자 시흥 할아버지는 고려때 분입니다.
고려사에 기록이 지금 발견 된다면..그리고 북한에 함흥 어디에 백촌할아버지에 기록이 있다면.
금녕 충의 공파와 경김 백촌 공파는 상황이 명백해 질 것입니다.
남효온 후손에게 충의공파가 찾아 온날 새벽에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났기에..
그날 찾아온 충의 공파에게 남효온 후손이 백촌에 관한 고 문서를 전부 주었다 들었습니다..
10 여 년 전에 희년 덕년님 거창 안의에 묘비 입석 전에 김일제 백촌 종친 회장 소인과 나주 종친 분들과 삼호 상촌 문중에 같었습니다.회관 식당에서 삼호 종친 분과 입주를 간단히 하고 진도에 종친과 약속으로 진도로 같었지요.
그때 삼호 문중 족장님들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시고 희년 덕년 입비에 헌금 하신 것으로 기역합니다..
경주 김씨 백촌공파 영모사 다음 카페 들어 오시면은 함평 영모사 사진 시제 여러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