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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2]
제2일 1월2일
어머니 생전에 신포동 진흥각에서 짜장면(炸醬麵)을 들면서 앞으로 祭祀는 神主를 들고 와서 메뉴판에 기대놓고 음식을 시켜놓고 지내게 될 것이라고 세태를 비아냥거렸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웃기만 하셨는데...말이 씨가 되었다. 대학 구내 단골 사진관에서 아가씨는 어머니의 寫眞과 筆跡을 合成해주고는 기념으로 아주 작게 한 장을 더 인화해 주었다. 아마 지갑에 넣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半은 젊은 날의 坐像 - 半은 어머니의 글 ‘새 세대의 어머니像’이다. 접으면 屛風이 된다. 우리는 그 병풍신주를 TV위에 놓는다. 그리고 잠이 들었었다.
아침은 고기잡이배들의 엔진소리로부터 깨어난다. 진회색에서 열푸른 보라와 녹색으로 그리고 섬의 윤곽은 더욱 검게 그러다가 하늘은 갑자기 선홍색을 띄면서 일시에 발코니에 잇닿은 호수바다에 태양의 길을 열면서 커튼을 붉게 물들인다.
아내는 뒤척거리며 기지개를 켜다가 잠시 눈을 덧붙인다.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아내를 처음 본다. 나는 기다린다. 그리고 나만의 이 시간이 얼마나 평화로운 시간인가를 처음 깨닫는다.
하얀 식탁보와 한 송이 꽃! 햇살을 한껏 받은 地中海風의 窓가! 뷔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식사방법이다. 많이 변했지만 전라도에서처럼 한 상을 차려 콩기름으로 潤을 낸 장판 아랫목에 端正하게 받쳐주는 그 아침밥이 그립다. 해남 대둔사(大興寺가 이름이 바뀐 듯하다)의 유선장이 유일한 곳이 아닌지? 고소한 밥향기와 창자가 먼저 꼬르륵 맛을 보는 된장국 냄새! 서양영화에는 가끔 침대로 날라 오는 아침밥이 있는데 아마 비슷한 경우겠지만 그 이부자리가 거슬린다. 일본의 구라시끼(倉敷) 아이비하우스에서 도시락을 시켰을 때 기모노를 입은 두 소녀가 마치 편대비행을 하듯 나란히 상을 받쳐 들고 우리 테이블 앞에서 좌향좌! 그리고 나란히 사뿐히 내려놓고 目禮하던 모습이 새롭다. 擧案齊眉 그대로다. 단 1초일지라도 누구를 먼저 주고 누구를 뒤에 줄 것인가? 인건비 비싼 일본에서 1천엔짜리 점심에 쏟는 人情이 지금도 새삼스럽다. 교또에나 북경에나 이런 대접의 문화는 常存한다. 뷔페는 해적들이 탈취한 음식을 갑판에 늘어놓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양손에 들고 뜯고 씹고 핥은 데서 由來(?)했다고 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것이 경제원리라면 掠奪이 최선의 방법이 된다. 약탈의 전제는 당연히 우세한 武器와 組織과 機動力이다. 결코 최소의 투자가 아니다. 그들은 廚房 대신 군함을 建造해야했으니까? 최대의 투자가 최대의 이익을 기약한다는 명제가 맞겠지...時代가 바뀌면서 이들은 자본 - 지식 등으로 變貌하고 있지만 그 底流는 바뀌지 않는다. 뷔페가 발전하면 구내식당처럼 朝三暮四 食單을 짜서 카운터에서 配食하고 다음 단계로는 식당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養鷄場의 닭처럼 컨베어 벨트로 음식을 운반할지 모른다. 동양의 侍從文化를 영국이 가져가 검은 손에 흰 장갑을 끼웠을 때 일본은 재빨리 회전초밥을 만들었으니 ‘역시 地球는 돈다.’라는 말이 明言이다.
오늘은 이 뷔페가 싫지 않다. 평생 아내가 밥을 했고, 뷔페에서는 밥을 날라다 주었으니 앞으로는 적어도 찾아먹거나 설거지는 하도록 해야겠다. 하얀 粥 - 그리고 짭쪼름한 무침 - 쥬스 이것이면 족하다. 경제학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스님의 바리때(발우) - 군인의 식판을 염두에 두자...바다를 건넌 아침 햇살은 창문을 지나 무릎을 간지럽게 한다. 커피를 마시고 눈부신 바다를 바라보고 로비를 서성거린다.
로비에 게시된 일일관광 메뉴는 다양하다. 낚시, 동굴탐사, 해수욕, 落照... 우리는 7-8개의 메뉴를 훑어보고 호핑아일랜드를 하기로 한다. 랑까위도 섬인데 주변에 100개의 섬이 또 있다고 하니 ‘Hopping’이라는 뜻이 순례는 아닐테고 ‘똥섬 건너뛰기’도 좀 그렇고 배를 타고 섬을 돌아보는 것으로 斟酌해두자.
9시! 발밑의 부두로 나가 물과 ‘타이가(싱가폴 맥주 - 말레이 회교국가에는 술공장이 없는 것 같다)’를 사고 浮橋를 걸어본다. 호화 욧트와 遊覽船들...내심 그 욧트를 기대해보지만 그 옆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작은 배에 구명조끼를 걸치고 쭈구려 앉은 나에게 선장(?)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인다. ‘이 배가 더 스릴있고 안전하다!!’ 배는 야마하의 엔진을 폭발시켜 파도를 가르며 물보라를 일으킨다. 五色의 물빛은 부드럽고 싱그럽다. 鮮明한 수평선에는 거칠 것이 없다. 그리고 소계림이라고 이름지은 섬들 사이를 배는 그네를 타듯 달려간다. 물보라가 분수처럼 뱃전을 치고 얼굴을 때린다.
연암의 一夜九渡河記(2001년에 가보니 한데 합쳐져 바다같은 密雲水庫가 되어 있었다)처럼 죽음의 공포는 사라지고 바람을 느끼고 물을 느끼고 산을 느끼고 평안해진다. 산사람은 산이 搖籃이요 바다사람은 물이 安樂椅子다. 땅에 발을 붙이나 물에 떠있거나 지구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물을 두려워하고 사람은 허우적거린다. 오히려 물이 배를 떠받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물이 사람을 삼키지는 않는다. 사람이 물을 헤집는 것이다. 사람이 물을-사람이 물을-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은 뱃사공이지 바다가 아니다!
선장은 바람이 없어서 좋은 날씨라고-
-No! Windy!
간단한 영어다. 물결이 이는 것을 보고 바람을 안다는 시인이 생각난다.
글재주가 없으니 후 적벽부에 이어 속 랑까위賦를 쓸수는 없지만 그 정취만은 자별하다. 아내는 야마구찌(山口縣)의 靑海島 뱃놀이를 연상시킨다. 그때보다 살기는 餘裕로와졌지만 10년이나 그리고 4,000㎞쯤 적도로 우리는 흘러와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世態일 뿐이다. 사람들은 ‘...年年歲歲人不同’ 운운하거나 ‘山川은 依舊한데 人傑은 간 데 없다’라고들 하는데 자연은 때에 따라 변하는데 人間의 舊態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떨지?!
인간이 변해야하는가 말아야하는가? 그것은 東坡에게 물어볼 일이다. 나에게 반가운 것은 전설일 뿐이다. 전설이 두 번 고마운 것은 작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전설 그 자체의 主人公인 그만큼 내게 친근감과 신뢰감을 더해준다.
물을 마시면 姙娠을 한다는 湖水가 있는 섬-프라우 다양 분탕(프라우라는 말이 반복되는데 공통점은 모두 섬이니 아마 바사어로 프라우가 섬인지?)-나는 이 호수가 분화구에 형성된 칼데라 호수인지 아직도 모른다. 내가 본 분화구는 제주도의 성산 日出峰과 산굼부리(*태국에는 칸차나부리 등 ‘부리’ 地名語尾가 많다. 나는 굼을 곰으로 보고 산을 부리로 보아 그냥 굼부리-곰뫼(熊山)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문화가 북방과 남방의 교류에 있어 이 단어가 어떤 연관이 있다가 추정한다) 어승생과 일본의 阿蘇(*아소도 阿斯達이나 ‘阿蘇 님하’와 연결하여 아사-아자-아직에-아참-아침으로 본다. 특히 03년(壬午년 冬至)에 이 분화구에서 一泊하고 그 보름달 밤 溫泉에 몸을 담갔을 때의 感懷는 잊을 수 없다)가 전부이다. 백두산은 물론 한라산에도 오른 일이 없으니까...
이 호수를 관광안내책자에서 보았을 때는 시큰둥했었고 조각배의 속도와 搖動에 놀라 그저 뭍에 내려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그리고 1시간을 정글에서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었다. 더구나 원숭이와 악어만한 도마뱀을 보았을 때는?? 뒤에 알았지만 이 파충류를 현지인들은 동네 강아지만큼이나 친근하게 대했고 이름도 이구아나나 파빌리온이 아닌 ‘모니터’라고 불렀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니 앞은 暗綠色의 수목에 덮인 거대한 산이 逆光으로 해를 가로막고 눈앞 그득하게 푸른 물이 넘실거리고 있다. 마치 여객선의 갑판같이 넓은 목재 데크는 선남선녀의 알몸을 싣고 잔물결에 흥겹게 흔들리고 있다. 알몸을 드러낸 백색의 부인들은 메기먹이를 뿌리며 사진 찍기에 바쁘고 일부는 싱크로나이즈를 하듯 스카이디이빙 대오를 짜듯 삼삼오오 담소하며 찬물을 즐기고 있다.
온통 海水에 둘러 쌓인 이들에게는 淡水 그 自體가 價値다. 그리고 따뜻한 바닷물에 비해 시원하기 까지 하니...이 말을 되뇌어 본다. 사람 자체가 가치다. 加味되지 않은 生命-自然이 가치다. 그리고 衣食住 인간의 문화 그 자체에서 얼마나 많은 것이 歪曲되어 있나 생각해본다.
이 물에 몸을 담그고서야 眼耳鼻舌身-물의 觸感-열대림의 樹木의 냄새-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입술을 적시는 透明한 맛과 逆光의 물빛-분리된 감각과 의식이 한데 어우러져 부서진 石膏人形같던 내 조각이 한데 모이고 비로소 피와 영혼이 통하는 부활과 재생을 맛본다.
호수는 천연의 산으로 에워 쌓여있고 열대림의 초록색 숨결로 향긋하다. 수평선에서 떠오른 午時의 해는 아직 산봉우리를 넘지 못하고 협곡사이로 명주를 드리운 듯-라이트를 비추듯 무지개를 걸어놓고 있다. 사람들은 말이 없다. 손짓과 미소와 물을 바라보는 눈길밖에 우는 아이도 없다. 나뭇가지에 데크의 매점 지붕위에 리틀몽키는 곡예를 한다. 물에서 나와 데크에 몸을 누이면 햇빛에 달구어진 나무의 질감이 젖은 몸을 말리는 부드러움이 좋다.
젊은 남녀는 검정과 진홍 水泳服을 입고 껴안은 채 한 장의 사진을 부탁하고 한껏 애교를 피운다. 건장한 말레이는 젊은 아내를 한껏 물로 誘引한다. 여인은 微笑를 머금고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두 번 세 번...나도 손짓으로 應援해본다. 마지못해 무릎을 적시고 이어 남편에게 안기어 가슴을 담그고 머리를 적시고는 입을 가리고 웃는다. 물결에 햇살이 부서진다. 女人은 긴 검정바지에 금실로 수를 놓은 진홍색 브라우스를 입었다. 물에 빠진 생쥐의 몸매를 부끄러워하는지 몸을 가리며 데크에 비스듬히 앉는다. 수줍음과 沐浴후의 新鮮함이 生氣를 느끼게 한다. 문명을 배운 아내는 수영복을 입고 오라는 말을 잊어버리고 손에 들고 왔다. 그렇다고 이슬람처럼 옷과 함께 물에 들어갈 줄을 모른다. 옷은 洗濯機에 들어가야 하고 알몸은 浴槽에 들어가야 한다고 배웠고 또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어울려 사진을 찍고 또 웃었다. 일어서서 고개를 넘기도 전에 옷은 太陽과 바람과 體溫이 말려줄 것이다.
洗禮 : 피렌체의 돔 聖堂은 아름답다. 찌는 여름에도 한발자국만 입구에 들어서면 이미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늘에는 天井이 뚫려있다. 문자 그대로 지붕에 우물 구멍이 있다. 그리고 그 중앙의 제단에 天上의 물을 받아 인간의 정수리에 氣를 불어넣는다. 이른바 洗禮이다.
태국의 설은 송크란 해마다 4월12-3일이라고 한다. 그날 모든 태국사람들은 물동이를 들고 서로에게 물세례를 한다. 파타야에서는 아예 화물차에 물통을 싣고 집단으로 물 뿌리러 다니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바가지에 물총까지 동원하여 지난해의 厄運을 씻어내고 福을 주는 설날- 그리고 행인 관광객들 모두 뜨거운(아마 30度는 넘을 것이다) 새해의 함박웃음이 끊이지 않는 洗禮...
간지스강을 찍는 寫眞作家는 반드시 카메라에 그 濁한 강물과 함께 몸을 씻는 여인을 담아온다. 나는 그 신기한 사진을 무수히 보아왔다. 지금은 이 호수에서 히잡을 쓰고 온몸을 천으로 가린 여인들이 평화롭게 그리고 한가하게 자신을 물에 담그는 현실을 보며 나의 존재를 잊고 있다.
우리 할머니들은 여름이면 계곡의 물줄기들을 찾아 오들오들 떨면서 물을 맞고 萬病을 豫防했다. 그 ‘물맞으러 간다’는 풍속은 ‘川獵간다’는 말과 함께 조상의 기쁨이었다. 그런데 ‘물벼락’을 거치면서 ‘물세례’를 汚染시키고 ‘물大砲’를 사전에 올려놓았다. 대한민국 아줌마는 선그라스를 끼고 전기로 지진 머리를 비닐로 싸매고 손수건만한 비키니를 걸치고 선브록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채 비치를 찾거나 헬스의 스위밍 풀에서 멋진 개구리헤엄을 선보인다.
-올 해는 12년마다 돌아오는 원숭이 해다.
호주에서 왔다는 중년여인
-오우! 한국에서 원숭이는 무얼 상징하나요?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해마다 신문을 장식하는 올해의 德談을 읽어둘걸...
-사람과 친하고 영리하다?!
이 때 고개를 넘어오며 까마득한 나뭇가지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한 손에 콜라캔에 또 한 손에 땅콩을 까먹는 리틀몽키를 본다.
-원숭이가 나보다 영리하네요!
나는 다급하게 대꾸한다-
-오우! 아니예요-당신이 아니고 나보다 영리하지요?
부인네들은 가볍게 웃는다. 그리고 어느덧 가방을 붙들고 먹을 것을 보채는 리틀몽키를 달래며 부두로 돌아간다.
어느 사이 유람선들이 船橋에 모여든다. 힌두-이스람-크리스챤-불교도 등등 모두 평화롭다. 수영을 하던 멋진 젊은이 나는 그를 독일인으로 보았는데 러시아에서 왔다고...생각해보면 -톨스토이-뚜르게니예프-챠이코프스키 우리의 젊은 시절은 그들과 매우 가까웠다. 그들은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한다. 나는 입에서 뱅뱅 도는 축구감독 이름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다시 배에 오르고 이제는 파도가 무섭지 않다. 바다는 잔잔하다. 깊이를 모를 透明한 푸름은 오히려 彈力있게 우리를 받쳐주고 있다. 마치 부드러운 흙이 농부의 식량을 받치고 있듯이...섬사람은 결코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다. 오직 바람을 두려워 할 뿐 - 그래서 오히려 ‘windy?!’ 이렇게 간단히 생각하는지 모른다.
섬을 돌아 창공의 매를 본다. 이들은 매를 신성시한다. 또 행운으로 생각한다. 섬은 열대림으로 덮여있고 드문드문 白骨을 드러낸 枯死木들만이 이 섬의 시간표다. 다시 유람선이 우리를 풀어준 곳은 백사장이 고운 Pulau Beras Basah- Pulau는 섬이라는 말인가 보다. 이곳도 물이 찬 것이 자랑이다. 脫衣室이 없는 해변에는 매점이 있고 - 아내는 드디어 수영복을 갈아입고 물에 들어갔다. 수영을 좋아하는 그러나 반평생 그 기회가 거의 없었던 갯가여인을 그 고향으로 보내주고 싶다. 몇 年前인가? 그의 제자를 엉뚱하게 내가 주례하고 혼례식 아침 산책하며 이 여인이 다니던 학교가 빌딩에 가려졌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음에 나는 큰 선물을 해준 기분이었었다. 맥주를 한잔! 이곳에서는 ‘Karlsburg’ 상표에 ‘皇冠’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다. 椰子樹와 白沙場 그리고 印度洋의 海風-玉色물결에 몸을 맡긴 아내를 바라보며 목을 축인다. 앞에 앉은 중년 부인은 히잡을 쓰고 남편은 쥬스를 마신다. 이스람-맥주를 든 나는 불그레 미안하다. 맥주는 별로 취하지 않는다. 공기탓인가? 땀으로 배출되어서 그런지 맥주를 마시고 으레 들려할 곳 걱정도 없다. 그들은 신기하고 너그럽게 나를 대한다. 쿠알라 북쪽 어디인지 그가 식품사업을 한다는 地名은 모르겠다. 玉色 사라에 히잡을 쓴 외동딸은 안경속의 눈동자가 맑다. ‘法律家가 되고 싶다’는 이 딸은 寄宿學校에 다니고 連休를 아버지는 이 休養地에 면회의 장소를 마련한 듯 했다. 이들은 여기서 물에 몸을 담그지 않고도 충분히 즐거워했다. 사진을 한 장 찍고 出嫁한 딸이야기를 하고 나도 다시 몸을 적셔본다. 우리 배의 친구는 피넹에서 온 부부-부평에서 연수했다는 젊은이와 수줍은 애인 그리고 사내 둘을 데린 부부 그러니까 선장(?)과 모두 11명인가? 어린애 둘은 정말 리틀 몽키를 닮았다. 그 유연함과 민첩함 그리고 맑은 눈동자와 골격까지...이 천진한 털없는 원숭이를 안아보고 싶다...
우리는 점심에 맞추어 돌아왔다. 항구에는 호화여객선이 정박해 있다. 싱가포르를 거쳐 태국까지 간다는 저 호화여객선이 지금은 관심이 아니다. 웬지 답답할 것 같다.
때가 지난 식당은 閑暇하다. 나는 어제밤에 웨이터에게 배운대로 인도카레를 시키고 아내는 스페인 오믈렛을 시킨다. 맥주를 사와도 좋으냐고 묻는다. 소녀는 맑게 웃는다. 재빨리 아내는 움직인다. 가게에서는 2링기트 식당에서는 8링기트...나는 항상 이것을 못마땅해 하지만 ... 주둥이가 노란 새는 비둘기만한데 몸집은 까마귀처럼 潤氣나는 검은 색이다. 소녀는 흘린 밥을 쪼고 있는 그 새를 ‘아왕’하고 부른다. 우리도 밥을 흘려본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가까이 온다. 참새들이 쪼르르 몰려와 건너편 倚子밑의 밥알을 쫓는다. 아왕이 날개를 펴고 부리를 흔들자 참새들은 魂飛魄散한다. ‘아왕’은 낮게 테이블을 선회하고 점잖게 제 밥상으로 돌아온다.
아침부터 변기의 配水가 되지않아 전화를 했는데 아직 수리가 되지 않았다. 프런트에 가서 다른 방을 물어본다. 풀쪽 바다쪽 발코니가 있는 것 그리고 디럭스와 스위트 - 우리가 술탄은 아니니까(말레이는 입헌군주국 - 왕은 술탄이고 귀족은 닷또인데 그 아래는 모른다 - 인도와 같은 계급제도가 있는 것 같다) 디럭스 룸을 본다. 아내도 만족한다. 발코니에 바다를 향한 浴槽(이 욕조가 돈값을 했다)와 세면대가 있고 샤워부쓰에 세면대 다시 문을 열면 옷장과 화장대 응접세트와 유리벽을 지나 바다가 보이는 침실과 화장대 견용 책상에 발코니...더 바랄 것은 없다. 우리는 짐을 옮기고 冷藏庫를 채우고 한낮의 바다를 바라본다.
水泳場으로 나가 물에 몸을 담근다. 백인 소녀와 이슬람소녀는 교대로 다이빙을 한다. 타이스같은 체육복 수영복은 틀림없이
아내는 여유있게 물위에 떠 있다. 수영장 관리인은 물을 움켜보고 정화탱크의 계기를 살핀다. 물은 더없이 맑고 깨끗하고 끊임없이 넘친다...아이들은 한 손으로 코를 싸매고 거꾸로 물에 뛰어든다. 그 부드러움이 고양이를 닮았다. 가운데 서 있는 소녀는 이들의 선생노릇을 한다. 백인 소녀는 번번히 실패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벤치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노부부는 이 아이의 祖父母일까? 지켜보다가 가볍게 잠이 들었다. 수영장 주변에 옮겨 심은 팜트리와 금잔디는 목이 탄다. 2월이면 雨期가 시작되고 여름이 지나면 생기를 되찾겠지...시간은 느리게 가다가 훌쩍 석양을 손짓한다.
우리는 풀장을 벗어나 기념품가게를 둘러보고 아이스크림을 사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日沒뱃놀이를 물어 본다. 욧트에 포도주를 곁들인 그 뱃놀이는 아름다울 것이다. 배는 지금 막 浦口를 떠난다. 이제는 焦燥하지 않다. 내년에도 저 배는 지는 해를 건지러 뜨는 달을 건지러 떠날테니까...
이사장과는 6시에 약속을 했고 그는 이미 로비에 와 있다. 말레이어로 중앙해변이라는 판타이 세낭의 모래사장 식탁에 ‘RESERVATION’- 종이봉투 팻말이 우리 자리다. 우리는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는 수평선을 가까워지면서 물결위에 照道를 열며 백사장을 지나 발끝을 지나 우리의 얼굴을 비춘다. 遠近法으로 그 길은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점점 넓어졌다...廣闊 그리고 平和 그런 것이 가슴에 젖어들어 나른해지는 그런 落照-하늘에는 파라슈트하는 젊은이들 밀가루같은 백사장에는 철부지의 河童-순식간에 해는 海霧속으로 사라지고 어둠이 깔린다.
좌우의 식탁에는 백인들이 둘러앉아 마치 낙조의 시간과 빛깔을 吟味하듯 포도주를 빨고 있다. 코코넛 잎사귀가 微風에 흔들릴 뿐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海潮音도 거의 ... 발가벗은 원주민 소년들이 기타를 치며 삼삼오오 어둠을 밝히고...우리는 맥주, 새우에 땅콩을 야채에 볶은 접시, 삭스핀 그리고 미판(米飯)에 국물과 이사장이 가져온 김치로 광동요리에 한식을 곁들인 묘한 저녁을 즐긴다.
數없는 모래사장의 발자국을 밤의 帳幕이 지우고 대신 밤하늘에 별이 繡놓인다. 서너명의 통기타부대가 저들만의 소리를 바다에 보낸다. 우리는 한 곡이 끝나기를 기다려 박수를 보낸다.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이번에는 한껏 목청을 올린다. 하늘의 별도 우리도 모두 聽衆이다. 젊음의 목소리는 야자수 잎사귀를 흔들고 잔잔한 바다를 흔들고 곱게 곱게 퍼져나간다. 이제 밤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발맛사지나 한 잔의 술보다는 낮에 옮긴 전망 좋은 방이 훨씬 안락하다.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상현달-소리없이 미풍에 춤추는 검은 바다와 하늘의 별 그리고 그 냄새...하늘하늘한 커텐은 덩달아 춤을 추고 데크에는 히잡을 쓴 一群의 여인들이 발소리도 없이 기슭을 치는 물고기들을 보며 가며 산책을 즐기고 있다.
하늘의 별만이 時針처럼 가끔 움직일 뿐 밤은 머물러 있다. 설걷이에 반찬준비에 새벽 1시를 넘겨야만 잠들던 아내도 이미 자리에 누었다. 높은 천정에 매달린 扇風機는 소리없이 돌고 어제부터 TV는 켜지않는다. 靈魂이 그런 것인가? 지쳤는데 힘들지 않고 자지 않는데도 상쾌하다. 베니스에서 느꼈던 그 薰風-溫和함...이 시간이 바로 이 사람들에게 哲學이 活動하는 시간인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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