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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작품 나누기 스크랩 프로방스를 그린 천재 화가 반 고흐-두리쌤 글
두리쌤 추천 0 조회 155 11.11.24 13:5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프로방스를 그린 천재 화가 반 고흐

 

-두리쌤 글-






태양의 닮은 화가가 등장하다.


'Starry, starry night ~' 어릴적 잠시나마 이 노래 속에 빠져보지 않은 이들은 없을 것이다. 비가 오는 밤이나 깊고 조용한 밤에 라디오에서 가끔 들을 수 있던 이 노래는 가사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채 음악 선율에 눈을 감고 로맨티스트가 되한다. 한 예술가의 삶과 그의 작품을 그린 이 노래의 주인공은 빈센트 반 고흐이다. 어떤 예술가보다도 특별하고 짧은 살았던 그를 추모하는 이 노래를 들으며 잠시나마 그가 되어 본다.


<자화상 1887년, 캔버스에 유채, 47 x 35cm>

 

네덜란드 출신으로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그는 램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태양의 화가'라 불린다. '태양의 화가'라고 불린만큼 따뜻함을 좋아했던 그는 삶 또한, 따뜻하고 평탄했을까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 본다. 아마,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경험해본다면, 그의 작품의 위대함에 더욱 빠져들게 된다.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쥐덴르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6남매로 맏아들로 행복한 시절은 보냈던 그는 16세 부터 회랑의 사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결국, 27세 무렵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동생 테오와 함께 활동하면서 37세라는 짧은 삶을 살았다. 뒤늦게 미술에 입문한 그는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작품들을 세상에 안겼다.


시련이 만들어낸 작품 세계...

 네덜란드부터 시작하여, 런던, 파리, 벨기에 등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던 그의 삶은 어두움으로 빠져들어가는 파국이었다. 1873년 런던의 화랑에서 일을 하면서 미술품 거래를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영국 여인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마음의 혼돈과 어두움을은 커져갔다. 1876년 파리의 호우필 화랑에서 일하면서 램브란트, 밀레 등의 작품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의 예술성을 점차 커져갔다. 목회의 길로도 가려했으나 충돌이 발생했고, 선교사의 삶도 위기를 겪게 된다. 절망적인 삶으로 빠져들어가면서 작품 세계에 빠져 들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이 예술가로서의 길을 열어주게 되는 계기가 된다.
 1886년부터 동생인 테오가 있는 파리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작품 세계에 빠져 들수록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그리워하게 된 것이 '태양' 이고, 1888년 파리를 떠나 프로방스의 지방의 아울러 떠난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생활에 싫증을 느낀 고흐는 1888년에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로 거처를 옮긴다.
아를에서 고흐가 그린 대표작으로는 해바라기, 아를의 도개교, 별이 빛나는 밤 등이 있다. 아를에서의 적응에도 실패한 고흐는 1890년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으와즈에서 70여 일을 살다 결국 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고흐는 세월을 한참 앞서간 화가다. 자신이 살았던 시기에는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불운의 화가. 주위의 시선이나 관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던 화가.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고흐는 피카소, 크림트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났던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해바라기>

 

 고흐는 해바라기와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그가 생전에 그린 40여 점의 자화상 가운데 18점을 고흐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해바라기 연작 가운데 한 점은 198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본 야스다보험회사가 당시 우리 돈으로 약 480억원에 낙찰을 받기도 했다. 고흐미술관의 전시품 가운데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으로는 해바라기, 까마귀 나는 밀밭, 아를의 노란 집, 감자 먹는 사람들 등이 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 빛의 향연을 이끌어 내다.

 빛의 효과나 색을 중요시 하는 화풍을 일컬어 인상주의라고 한다. 고흐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 중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인상주의에서 인상이란 처음 어떤 사물을 보고 처음 받은 인상을 느낀 그대로 표현하는 사조이다.예술가로서 너무 늦은 나이가 시작한 활동, 그래도 십년 동안 활동하면서 무수히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딱 한 작품만이 팔렸다. 그것도 그 그림이 전적으로 마음에 들어서 산것이아니라 고흐의 동생의 지인이 산 것이다. 감자먹는사람, 구두 등에서 보이는 고흐그림의 특징은 노동자계층을 그렸다는 점입니다. 이 그림들을 보면 어두운 색으로 그려 무언가 삶은 그늘의 느껴지곤한다. 그러다가 색이 강렬한 인상주의 그림들을 보고 충격을 받게되면서 점차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아를로 밤의 카페>

 

특히, '밤의 카페'를 보면 폭발적인 보색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은 고흐를 정신병자로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천재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의 특유의 기법 짧은 붓터치로 인해서 별의 폭발할 듯한 힘을 실어 넣는다.



사라진 색의 비밀을 풀다.

 고흐 그림에는 없는 색이 있다. 바로 '울트라마린' 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이색을 쓰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지만 그 의문은 너무가 쉽게 풀린다. 그 이유가 물감의 값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 물감은 kg당 천만원 이상정도였기 때문이다. 가난한 고흐로서는 절대로 쓸 수 없는 색이었다. 그래서, 그는 '울트라마린'을 대신해서 '코발트블루'를 많이 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코발트 블루'가 그의 작품세계을 반영하는데 더 큰 위력을 보여준다.

 

 

 

<별이 빛나는 밤에>

 

 별의 가운데 부분은 흰색 물감을 튜브에서 직접 짜내어 발라 하이라이트 효과를 주어 캄캄한 밤의 어둠과 극적인 대비를 강조했다. 인디고에 가까운 진한 블루로 채색된 하늘은 넓은 붓으로 다소 즉흥적이며 강렬하게 칠했다. 수평 방향으로 끊어가며 칠한 두터운 붓 터치가 눈에 띄며 강 표면에 비친 별빛은 가는 붓으로 떨림이 있게 그렸다.
 오른쪽 하단의 연인처럼 보이는 두 인물의 실루엣은 마치 부조처럼 표현했다. 얇은 붓을 이용해 촘촘하고 수직적으로 여러 번 덧칠함으로 가벼운 물감 층을 형성해 부조처럼 도드라진다.



별이 빛나는 밤에...

<아를로의 별이 빛나는 밤에>

 

 고흐 작품의 최고라고 불리는 '별이 빛나는 밤'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물론, 작품은 크게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과 '별이 빛나는 밤' 두 가지가 있고, 두 작품 모두 최고로 손 꼽히고 있다. 특히, '아를로의 별의 빛나는 밤'은 고흐의 예술 세계의 장인 '아를로'를 배경으로 그려 그의 심리적 상대를 엿 볼 수 있다. 왜나하면, 1888년 2월 파리에서 삶의 고뇌과 염증을 심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태양과 가까이 할 수 있는 프랑스 남부 아를로 거쳐를 옮기게 된다.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 있지. 욱신거리는 오른쪽 귀에서 강물 소리가 들려오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두 남녀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다네.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다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다. 아를로의 론강의 야경 모습을 그대도 묘사하고 있다. 아를로에 얼마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꿈꾸던 곳이였기 때문에 밤하늘의 무수히 반짝히는 별, 그리고 별빛이 비추며 흐르는 강물의 풍경부터 로맨틱한 연인의 모습까지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태양의 화가가 불리는 그였지만, 아를로의 밤 풍경을 좋아해 별들에 매료되어 있었다. 단순한 별들을그려 낸 것이 아니라 밤하늘 별자리를 알고 북두 일성을 기준을 삼아 수많은 별들을 방사형으로 묘사해나갔다. 당시 아를로의 중심을 흐르는 론강의 하천 특색을 담고, 강 주변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가로등인 가스등을 정확히 그려내 지역의 생활 경관을 파악하기에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왜 하필 그는 아를로에 그렸을까?

 

 

          <아를의 위치>

 

 프로방스는 프랑스 남동부, 이탈리아와의 경계에 있는 지방으로 론 강 동쪽 지중해 기슭에 위치해 있다. 프로방스를 대표하는 도시로는 마르세유(Marseille), 아비뇽(Avignon), 아를(Arles)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프로방스의 모든 매력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아를이다. 아를은 기원전 46년 론 강가에 로마의 식민지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번창했으나. 최근에는 인구 약 6만여명이 사는 소규모의 마을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손꼽는다. 론강 하류 지역으로 하구에 형성된 점이지대인 석호를 통해 지중해와 항행하는 해상과 육상의 지정학적인 요충지였다.

 과거 로마제국의 영토로 원형극장, 목욕탕, 수도, 지하묘지, 성당이 시가지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경기장은 구 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2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로 고대의 건축물이라고 생각하면 그 크기는 놀랄만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투기장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투우경기를 정기적으로 펼치기도 한다.



<구글어스로 본 아를로>

 

 고흐가 예술가로서의 삶을 영위했던 작품의 무대인 아를로, 왜 하필 아를로였을까?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서 단순히 태양이 그리워 아를로로 간 것인가? 남부 유럽에는 마르세유, 니스, 나폴리 등 세간에 더 많이 알려지고 유명한 도시들이 있는데 왜 아롤로일까? 인간은 삶의 역경 속에 빠지게 되면 자연스레 회기 본능이 나타난다. 그 회기 본능의 중심은 바로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이다. 파리의 삶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그에게 무엇보다 아를로의 경관이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란 고흐의 눈에 쏙 드는 자연의 모습을 제공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기후적으로 볼 때 뙤악볕을 쬐기란 어려웠고 항상 남부 유럽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동경의 대상이 되고는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던 것은 무엇보다 네덜란드의 특이한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였을 것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바다였고 간척사업으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는 네덜란드에 대한 기억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 아를로의 이름 자체에서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를로는 '습지의 마을' 이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16세기부터운하를 개발하면서 하면서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습지를 개간해서 만든 넓은 평야 지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를로의 경기장 - 출처:구글어스 사진>


 



강렬하게 내려쬐는 뜨거운 태양의 고장

 

 

<씨 뿌리는 사람>

 지중해에 이글거리는 태양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큰 영향분을 제공하기에 태양볕이 작렬하는 광활한평야는 고흐의 관심에 대상이 된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나 그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영원함을 선사한다. 밀레의 그림이 깊은 감동을 받아 그린 대표적인 주제로 아를로의 토양과 기후, 농업 경관을 모두 보여주는 하나의 연구 논문인 셈이다. 스스로 정확한 묘사로 이 작품에 대한 만족감이 컷던 그는 이그림을 일컬어 “씨 뿌리는 사람과 평야에 대한 연구”라고 지칭했다. 씨를 뿌린다는 점에 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게 막연하게 판단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구름은 점 없이 쾌청한 아를로는 사계절 모두 맑은 날씨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중해식 기후의 특징이 겨울철은 온화하고 강수량이 많으며, 여름에는 무덥고 건조하기 때문에 씨를 뿌릴 때쯤은 늦은 봄으로 추론할 수 있다. 론강의 하류 지역으로 넓은 평야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점토질 토양에서 이루어지는 아시아식 벼농사와 달리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유럽의 토양에 맞는 노랗게 무르익은 밀 재배 경관이 보인다.밀농사는 벼농사에 비하여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구 부양책이 높지 않기 때문에는 그림 속 풍경처럼 상대적으로 마을의 규모는 작게 형성된다.



<쟁기질을 끝낸 밭의 풍경>


 쟁기질을 끝낸 밭의 풍경이라는 작품 속에 경관은 남부 유럽의 산지와 식생, 그리고 이글거리는 태양을 통해 그 특징을 담아 내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여러가지 고민을 내 던지게 된다. 쟁기질을 유럽에서는 했을까?, 그렇다면, 이 밭에서는 무엇을 재배하고자 했을까?

 

 일반적으로 농경 문화는 하크 농경문화와 쟁기 농경 문화로 나뉘어진다. 문명의 발달은 농업의 성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크 농경문화는 유럽의 문화로 대표하는데, 과연 '쟁기질을 끝낸 밭의 풍경'에서 쟁기는 제대로 된 해석일까? 그 언어를 자세히 찾아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 밭에서는 무엇을 재배했던 것일까? 유럽의 농업의 형태는 삼포식에서 윤작, 혼합 농업으로 바뀌어가는데, 그림을 살펴보면 밀 재배를 끝내고 추수한 풍경임을 파악할 수 있다.   

 

 

<아를로의 붉은 포도밭>

 

 하필, 왜 붉은 포도밭일까? 일단, 아를로는 지중해와 가까워 지중해의 다른 지역들과 같이 포도 재배가 일찍 부터 발달한 지역이다. '붉은 포도밭'이라는 것은 와인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무언가 짐작을 할 것이다.

 와인은 크게 색에 따라서 화인트 와인, 레드 와인, 로제 와인이 있다. 아를로를 포함한 남부 유럽이 이러한 와인의 종류 중 레드 와인의 재료인 적포도가 자라기 적합한 토양과 기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고흐가 놓칠리 없고, 이것을 그림으로 담아낸 것이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나무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나무>

 

 고흐 그림의 백미 중 하나는 '사이프러스 나무'이다. 그의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것이 이 나무이다. 그는 이 나무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형태로 뽀쪽한 것이 오벨리스크같다고 묘사했다. 보색대비를 강렬하게 표현하고 소용돌이와 파도와 같은 모양의 색선들은 복잡했던 심리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삼나무가 있는 밀밭>

 

'사이프러스 나무'가 정식 명칭이지만, 일부 그림에서는 삼나무라고 번역해서 표현하고 있다. 삼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나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생겨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지 않는 탓에 이렇게 생소한 나무를 우리 것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사이프러스 나무와 굳이 비슷한 나무들을 찾으면 측백나무, 향나무, 노간주나무 등이 있다. 하지만, 세 나무 중 어느 것도 사이프러스를 그대로 쏙 빼닮지는 않았다. 식물학적으로는 측백나무에 가까우나 잎은 향나무, 전체적인 바깥 모양은 노간주나무를 닮았다.

 삼나무라고 표현한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사람들의 번역을 그대로 따왔기 때문이다. 일본의 학명으로 '재페니즈 삼나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삼나무라는 명칭을 따와서 부르고 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지중해 지역에 널리 퍼져 있으며, 특히 그리스 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사이프러스는 좀 더 조사해보면, 영문 명에서 특이점을 파악할 수 있다. 사이프러스의 영문은 'Cypruss'로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지중해의 섬 키프러스, 즉 영문으로  'Cyprus'에서 유래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이프러스 나무는 사프로스에서 숭배하던 나무로 그 섬의 이름에서 나무 이름이 유래되었다.

 지중해 연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 나무는  십자가를 만들던 나무로 알려져 있고, 선박과 집의 건축 소재로도 많이 활용되었다. 또한, 고흐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이기 하지만, 이 나무의 잎과 열매에서 추출되는 정유는 진정작용이 있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그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기능을 한 셈이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카페를 즐기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가장 즐겨찾는 장소는 무엇일까?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카페가 아닐까? 동서양을 고금하고 최근들어 카페는 많은 사람들이 찾은 곳이다. 고흐가 살던 당시 프랑스또한 카페의 인기는 지금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던 장소이다. 태양을 좋아했던 그였지만, 밤의 풍경를 즐겨봤으며 이러한 풍경을 즐겼던 장소가 카페였다.

 

 

<밤의 카페>

 

 밤의 카페를 보면 건물의 노란 외벽과 카페 앞에 만들어진 테라스, 그리고 그 앞에 놓여진 탁자와 의자들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흐가 그렸던 아를로의 밤하늘 풍경조차도 그대로인 듯 하다.  

 

 

 

<아를의 카페-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partsofmemory/89>

 

 밤의 카페의 풍경이 되었던 카페는 지금도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항상 유럽을 보면서 동경하는 것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백년을 넘어 천년의 역사 그대로를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적이지 않은 것들은 새롭게 바뀌어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들의 삶은 오히려 더 우리의 전통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새로운 장소에 머물다.

   

 1890년 고흐는 아를을 떠나 파리에 머물다 오베르로 거쳐를 옮기게 된다. 사실 안식처로 생각했던 아를 떠난 이유는 건강의 악화로 인해 파리에 있는 동생과 가깝게 지내면서 생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오베르에 머물며 풍경화를 비롯해 가깝게 교류하던 사람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2달 동안 수십 점의 그림을 그렸다.

<코르드빌의 초가 1890년>

 

  고흐는 오베르에 거쳐를 잡으면서부터 아를과는 이채로운 초가집과 경관에 대해 느낀 감동을 화풍까지 바꿀정도로 새로운 기법을 보여준다. 물론 이쯤 일본의 우키요를 받아 들였기에 바꾼 것이긴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오베르에 대한 새로운 감동과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작품의 제목인 <코르드빌의 초가>는 후에 가셰 박사의 아들에 의해 바뀐 것으로, 본래 제목은 <몽셀의 초가>로 전해진다. 코르드빌은 오베르에 위치한 시골 농가들이 모여 있었던 마을 이름으로 구릉지 위에 세워진 마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비 온뒤의 오베르 풍경>

 

 '비 온 뒤의 오베르의 풍경'은 오베르의 자연환경과 그 환경에서 이루어주는 주민 생활의 모습을 자세히 담고 있다. 그렇게 높지 않은 오베르 마을 주변의 산지와 그 안에서 반듯하게 구획된 농경지, 여름철에 들어서 비를 맞아며 약간 푸른 빛을 띄는 밭 등의 풍경 속에 붉은색의 지붕을 한 가옥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 마을의 형태는 집촌이기 보다는 자신의 토지를 근처에 집에 들어선 산촌의 형태이다.   

 

인간의 삶에 진실한 모습을 담아내다. 

 

<감자먹는사람>

  고흐 자신의 삶은 아를에 가기 전까지 매춘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압생트를 마시며 자신의 건강을 악화시켰기에 우울증이 더해 갔다. '감자 먹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은 고흐의 어두운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도 아름다운 모습만을 그림에 그려낸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일지몰라도 사람들의 이상한 얼굴 생김새와 어두움 모습 속에서 우울한 고흐의 심리 상태를 찾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노동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것이다. 고흐는 농부들의 손으로 행해진 노동과 그들이 정직하게 수확한 양식을 찬양한 것이다. 육체 노동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음식을 얻었는가'에 대한 경의와 순수함을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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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11.24 13:51

    첫댓글 일단 예시로 간단히 써 본 자료입니다. 이렇게 쓴 다음에 수정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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