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과
단견(斷見, ucchedadiṭṭi)에 대한 이해
먼저 경전의 정의를 살펴 봅니다.
色(~識)을 我라고 여기지 않지만, ‘이것이 我이고 ․ 이것이 世間이며, 사후에도 나는 항상하는 것 ․ 견고한 것 ․ 영원한 것 ․ 非變易法으로 존재할 것이다’라는 그와 같은 見(diṭṭhi)이 있다면 그러한 常見(sassatadiṭṭhi)은 行(sāṅkhāra)이다. …(중략)…
色(~識)을 我라고 여기지 않지만, ‘이것이 我이고 ․ 이것이 世間이며, 사후에도 나는 항상하는 것 ․ 견고한 것 ․ 영원한 것 ․ 非變易法으로 존재할 것이다’라는 그와 같은 見(diṭṭhi)은 없지만, ‘만약 그것이 없다고 하고 ․ 나의 것이 없다고 한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 나의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와 같은 見(diṭṭhi)이 있다면 그러한 斷見(ucchedadiṭṭi)은 行(sāṅkhāra)이다. …(중략)…
‘혼란해하고 ․ 의심을 가져서 바른 法의 구경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비구들이여, 그 ‘혼란해하고 ․ 의심을 가져서 바른 法의 구경에 도달하지 못함’이 行(sāṅkhāra)이다.[SN. vol.3. pp.96~99]
경문의 앞부분을 고의로 생략했습니다. 앞부분은, “비구들이여, 色(~識)을 我라고 여기면 ‘그렇게 여김’이 行(sāṅkhāra)이다. …(중략)… 色(~識)을 我라고 여기지 않지만, 我는 色(~識)을 가진 것이라고 여기면 ‘그렇게 여김’이 行(sāṅkhāra)이다. …(중략)… 色(~識)을 我라고 여기지 않고 · 我는 色(~識)을 가진 것이라고 여기지 않지만, 我에 色(~識)이 있다고 여기면 ‘그렇게 여김’이 行(sāṅkhāra)이다. …(중략)… 色(~識)을 我라고 여기지 않고 ․ 我는 色(~識)을 가진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 我에 色(~識)이 있다고 여기지 않지만, 色(~識)에 我가 있다고 여기면 ‘그렇게 여김’이 行(sāṅkhāra)이다. …(중략)…”입니다.
지적하고 싶은 점은 ‘상견과 단견’이 모두 행(行)이라고 설해진다는 점입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한 행(行)’이므로 ‘상견과 단견’은 둘 다 ‘무명을 조건으로 한 견(見, diṭṭhi), 즉 사견(邪見)이라는 말씀이십니다.
사견(邪見)의 연기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Avijjāgatassa bhikkhave aviddasuno micchādiṭṭhi pahoti, micchādiṭṭhissa micchāsaṅkappo pahoti, …… micchāsatissa micchāsamādhi pahoti. …… Vijjāgatassa bhikkhave viddasuno sammādiṭṭhi pahoti, sammādiṭṭhissa sammāsaṅkappo pahoti, …… sammāsatissa sammāsamādhi pahotī ti.
비구들이여, 무명(無明, avijjā)을 따르는 어리석은 자(愚者, aviddasu)에게는 사견(邪見, micchādiṭṭhi)이 생겨난다. 사견(邪見)을 지닌 자에게는 사사유(邪思惟, 삿된 생각)가 생겨나고, … 사어(邪語, 삿된 말을 하게 되고), … 사업(邪業, 삿된 업을 쌓고), … 사명(邪命, 삿된 일에 종사하여), … 사정진(邪精進, 삿된 방향으로만 나아가서), … 사념(邪念, 삿된 짓만 기억하고)이 생겨나고, 사념(邪念)을 지닌 자에게는 사정(邪定, 삿된 삼매, 예를 들어 노름과 전쟁 등)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明(vijjā)를 따르는 賢者(viddasu)에게는 正見(sammādiṭṭhi)이 생겨난다. 正見을 지닌 자에게는 正思惟가 생겨나고, … 正語, … 正業, … 正命, … 正精進, … 正念이 생겨나고, 正念을 지닌 자에게는 正定이 생겨난다.[SN. vol.5. pp.4~5.]
위 경문에서 언급되는 ‘사견→사사유→사어→사업→사명→사정진→사념→사정’의 여덟 가지 막가(magga, 道, 길)의 이름이 ‘팔사도(八邪道, aṭṭhaṅgiko micchāmaggo)입니다.
Ayam eva kho āvuso aṭṭhaṅgiko micchāmaggo abrahmacariyaṃ, seyyathīdam: Micchādiṭṭhi (micchāsaṅkappo micchāvācā micchākammanto micchāājīvo micchāvāyāmo micchāsati) micchāsamādhīti.[SN. vol.5. p.16]
무명에서 연기된 행(行)인 ‘상견과 단견’을 끊으려면, 明(vijjā)를 따르는 賢者(viddasu)가 되어 중도인 팔정도를 닦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용수보살은 ‘단상중도(斷常中道)’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상견과 단견’을 여위고서(떠나서) 그러한 ‘상견과 단견’의 연기를 보고, 그 멸도인 중도(=37조도품, 팔정도)를 닦으라는 의미의 용어입니다.
용수보살의 '중론'은 인도 논리학과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매우 어려운 내용입니다. 불교적으로는 연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중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중도라는 용어도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용어입니다. 다음 기회에 설명해 보도록 가급적(?)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