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재자 김정일을 해부한다
<목 차>
I. 김정일의 한 평생
1. 출생에서 성장
2. 후계자 수업 준비기
3. 후계체계 기반 구축기
4. 실질적인 김정일 시대의 개막
II. 연속된 악행의 철권통치
1. 권력과시형 경제운용
2. 원칙을 무시한 경제운용
3. 끝없는 폭압정치의 산물
III. 김정일의 만행과 핵 공갈
1. 무차별적 각종 테러
2. 과격해진 무력도발
3. 핵무기 보유에 대한 강한 집착
IV. 김정일의 종합평가
1. 김정일의 통치스타일
2. 폭압에 의존하는 반인륜적 지도자
3. 선군정치에 의존하는 군사독재자
김정일의 한 평생
1. 출생에서 성장
김정일의 출생과 형제
동북항일연군의 무력투쟁이 내리막길을 걷던 김일성과 김정숙은 1940년
말경 결혼하고 다음해 3월 경 소련으로 도피
김정숙은 함북 회령 출신으로 김일성보다 7년 연하의 여성으로 출신성
분이 비슷한 빨치산 출신임
이들은 연해주로 가서 하바로프스크 인근에 자리잡은 88여단에 가입함
1942년 2월 16일 88여단의 브야츠크 야영지에서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
의 맏아들로 탄생, 김정일은 소련에서 태어난 탓으로 ‘유라’라는 러시아
이름을 가짐
김정숙은 브야츠크에서 차남 만일을 낳았고 ‘슈라’라고 불러짐, 그러나
차남 만일은 평양에서 물놀이 중 익사함
해방 후 김정숙은 장녀 김경희(현 당 경공업부장)를 낳음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은 1949년 9월22일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모자가 함께 사망함
<사진 1> 김정일의 가족 아버지 김일성, 생모 김정숙, 여동생 김경희와 김정일
자료: 연합뉴스
김정일 출생년도 및 출생지 조작
김정일의 1941년 태어났으나 김일성의 70회생일인 1982년부터 출생년
도를 1942년으로 조작함. 이는 김정일의 우상화작업의 일환으로 김일성
과 김정일의 ‘꺽어지는 해’(5년 또는 10년 단위)를 맞추기 위한 것임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민족적 지도자인데 소련에서 출생한 것이 마땅하
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임
항일유격대의 밀영지인 백두산의 소백수 상류 골짜기 양강도 삼지연군
에 위치한 귀틀집에서 태어났다고 조작함. 김정일이 태어난 곳 뒤에는
‘정일봉’이 있는데 귀틀집과 정일봉과의 고도차이는 216미터라고 함. 이
는 김정일의 생일이 2월16일과 일치함
김일성이 88여단의 일원으로 소련의 브야츠크에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
정보문서에서도 발견됨
김정일의 청소년시절
김정일은 7세 때 어머니를 잃은 탓으로 온전한 가정은 아니었음
<사진 2> 정일봉의 전경
김정일은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후계자로 자리
잡은 1970년대 말 어머니의 고향 함북 회령에 김정숙의 동상과 박물관
을 짓고 ‘김정숙 군’도 신설함
한국전쟁은 김정일이 8세 때 발발, 편부 슬하의 김정일․김정숙 남매는
전쟁기간 동안 만주로 피신, 그곳에서 피난 온 다른 빨치산들의 아이들
과 같이 ‘혁명학원’을 다님
전쟁이 끝난 후 평양에 돌아와서 김정일은 ‘삼석인민학교’에 다니다가
‘평양 제4인민학교’로 전학, 1954년 12살 때 초등학교를 졸업
1954년 ‘평양 제1초급중학교’에 진학했고 ‘남산고등중학교’를 1960년에졸업
<사진 3> 김정일의 소년시절 모습
자료: 데일리NK
김정일 소년시절의 위대성을 위한 상징조작
초등교육시절에 마르크스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을 탐독했다고 선전
또한 초등교육시절에 주체사상을 탐독했다고 선전
김정일의 대학시절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입학하여 1964년
졸업
김정일이 해외유학을 포기하고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닌 것은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며, 이를 북한은 민족의식이 강한 지도자라
고 선전
북한당국은 김정일은 대학 재학 중에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특히
졸업논문으로는 김일성의 ‘우리나라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를
연구해서 농촌문제에서 군(郡)의 역할을 높이는데 독창적인 글을 썼다고
주장, 그러나 김일성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는 1964년 2월 25일에
발표되었고 3월에 김정일이 이에 관련된 논문을 제출했다는 것은 이치
에 맞지 않음
김정일은 대학재학 중 김일성의 평양시 ‘이현’ 협동농장의 현지지도에
동행함으로서 제왕학 수업을 시작함. 또한 재학 중 노동현장에서 생산실
습도 하고 정치생활을 병행함
따라서 김정일의 대학시절은 사상적 이론기반을 쌓아올리는 시기였고,
동시에 현장실습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의 입장에서 사물을 총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운 준비기라 할 수 있음
<사진 4> 김일성종합대학 재학시절의 김정일
자료: 데일리NK
김정일의 여인들
공식적으로 김정일과 부부관계인 것으로 알려진 여인만 4명이며, 그는
결혼하기전 1969년부터 영화배우 출신 유부녀 성혜림과 동거했고 1971
년 아들 김정남을 낳았음
1974년에는 중앙당 전화교환수 출신인 본처 김영숙과 결혼해 딸 설송과
춘송을 낳았음
1976년에는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인 고영희와 동거하면서 정철과 정은
을 낳았음 네 번째 여인은 개인 비서 겸 부인으로 알려진 김옥 임
<사진 5> 김정일 여인의 가계도
2. 후계자 수업 준비기
조선노동당 초급간부 시절
김정일은 1964년 대학 졸업 후 김일성의 후광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첫 정치행보를 시작함
1965년 김일성이 인도네시아 방문 시 동행함
1967년 김정일이 25세 되는 해에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과장으로, 1970
년에는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하고 1973년 당 중앙위원회의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로 발탁됨으로서 후계구도의 발판을 마련함
김정일의 출세가도는 아버지 김일성의 절대적 후원 때문임
<사진 6> 김일성의 소련방문을 환송하는 김정일 출처: 동아일보
조선노동당 초급간부 시절의 업적
북한은 김정일은 초급간부 시절 선전선동부에서 문화예술 분야와 사상
사업에서 특별한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선전하고 있음
김정일은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에 근무하면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고 김일성의 유일지도 형태를 체계화하기 위해 김일성의 모든 저작
들을 편집․재출판하였으며, 정치사상적 통일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
특히 김정일은 영화제작을 지도하였는데 대표작은 1969년의 ‘피바다’,
1970년의 ‘어느 자위단원의 운명’, 1972년의 ‘꽃 파는 처녀’ 등이 있음.
그가 지도한 작품들은 대부분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들이 지난날 만주에
서 항일투쟁했던 것을 소재로 삼았고 북한인민들에게 혁명전통을 강조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룸
이처럼 김정일의 영화예술론에는 확고한 사회주의적 내용이 있고, 이것
은 아버지 수령의 지위를 떠받드는 선전선동용으로 가치를 발휘함
이렇게 제작된 작품은 김일성의 인정을 받았고 김정일의 능력을 드러내
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됨
<사진 7> 영화 ‘꽃 파는 처녀’
3. 후계체계 기반 구축기
어둠속의 후계자
1973년 9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로 선출되고, ‘3
대혁명소조운동’의 총책임자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후계체제 기반을 구
축하기 시작함
‘3대혁명소조운동’이란?
당과 국가기관의 일꾼과 기술자, 청년 인텔리 등으로 소조를 구성하고,
그들이 당이나 국가의 높은 자리에서 지시 또는 명령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현지에 내려가 사업함으로써 사상 ․ 기술 ․ 문화의 3대혁명에 청년
들의 새 기운을 동원해서 북한의 경제를 재생하려는 운동이다. ‘3대혁명
소조운동’은 김정일의 후계준비사업으로 진행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
두지 못하고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김정일은 당시 권력2인자인 삼촌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정치적
힘을 과시하던 계모 김성애,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을 받던 이복동생 김
평일의 도전을 물리치고 후계체제의 기반을 구축함
가족간의 권력투쟁 끝에 1974년 노동당 정치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선출
됨. 이후 김정일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당중앙’으로 호칭함. 이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북한은 이를 대외공
포하지 않음
전면에 부상한 후계자
1974년부터 1980년 당대회가 열릴 때까지 ‘당중앙’이라는 불분명한 호
칭을 사용하면서 후계작업을 수행
‘로동신문’(‘74.4.25)은 ‘당중앙’과 함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완수해야
한다는 보도함으로써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는 것을 암시함
1980년 노동당중앙위원회 중앙위원,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비서국 비
서, 당 군사위원으로 선출됨으로서 당내 서열 2위로 처음 공개석상에
등장함
1980년 이후부터 ‘김일성과 김정일’의 공동통치의 시기가 시작됨. 김일
성은 국가적 사업을 담당하고 김정일은 당 사업에 치중함. 이를 통해 김
정일은 노동당의 지도층을 김일성 세대로부터 김정일 세대로 바꾸는데
성공
1982년 김정일은 ‘공화국 영웅’이라는 칭호를 부여받고 우상화 작업이
본격화됨. 1990년에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고 1991년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함. 김정일이 최고사
령관에 취임하였다는 것은 김정일이 북한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
였다는 것을 의미함. 그리고 창군 60주년이 되는 1992년 김정일은 ‘원
수’에 오르고 이듬해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취임
<사진 8> 6차 당대회에 참석한 김일성과 김정일
4. 실질적인 김정일 시대의 개막
김일성의 사망과 유훈통치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망으로 김정일은 명목상 2인자인 후계자의
지위에서 명목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제1인자로 등극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은 김일성과 김정
일은 통일론과 악화된 경제상황에 대해 갈등이 있은 것으로 알려짐
김정일은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되자마자 극심한 흉년과 이로 인한 기아
사태가 지속되는 소위 ‘고난의 행군(1995-1997)’에 직면하게 됨. 이에
그는 김일성에 대한 3년상을 빌미로 3년 동안의 유훈통치를 내세워 ‘얼
굴없는 지배’를 이어감
<사진 9> 고난의 행군의 상징: 토끼풀 소녀 자료: KBS
유훈통치란?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북한은 체제의 정당성을 김일성의 '유훈
통치'에 둠에 따라 김일성의 시신을 미이라화하여「금수산 기념궁전」에
안치하는 한편, 김일성 영생탑을 건설하고 주체연호와 태양절을 제정
(1997. 7)하였다.
주체연호는 김일성이 출생한 해를 기점으로 계산하며,
1999년은 주체88년이 된다. 태양절은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로서
1997년 제정하여 1998년 첫 공식행사를 가졌다. 북한은 1997년 7월 김
주석의 3년 탈상을 마치며 `유훈통치'를 끝냈다.
또한 김정일은 유훈통치 기간동안 ‘물리적 강제력’을 보유한 군대에 의
존하는 ‘선군(先軍)정치’로 북한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
김정일은 1996년 김일성종합대학교 연설에서 자신은 경제위기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함
17년 철권통치의 시기
1997년 10월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하면서 공식적인 북한의 최고지도자
가 됨. 한편 그는 1998년 헌법개정을 통해 주석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
회위원장에 재취임함
이후 그는 경제재건을 위해 ‘강성대국론’, ‘실리주의’ 등을 제시하였지만
실질적인 개혁․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도저히 달성될 수 없
는 허구적 구호에 불과함
2000년 5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최고지도자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비공식방문하고 중국의 장쩌민 주석과 면담하고, 직후인 6월 남북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하고 ‘6.15공동선언’을 발표함
<사진 10> 제1차 남북정상회담 자료: KBS
2002년 김정일은 ‘7.1경제관리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을 도입함으
로써 경제재건을 도모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실질적인 개혁으로는 연결되
지 못함. 왜냐하면 사회주의 틀 속에서 경제를 재건하려고 하였기 때문
에 실질적인 개혁으로 연결되지 못함
7.1경제관리개선조치란?
북한은 2002년 7월1일 기존의 경제관리제도를 개선한 것을 의미한다. 주
요한 개선내용은 ‘가격제정체계의 재정립’, ‘사회주의분배제도의 엄격한
적용’, ‘기업경영관리체계의 개선’ 등으로 요약된다. ‘
7.1경제관리개선조치’는 분명히 북한의 경제관리제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내용을 포함하고있지만 생산수단의 국가적 협동적 소유의 근간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의 변화이기 때문에 ‘찻잔속의 미풍’에 불과했다.
2006년 10월 9일 ‘벼랑끝 전술’의 일환으로 1차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국제사회의 고립을 자초함. 2007년 2월 6자회담에 따른 2.13합의를 채
택하고 10월에는 10.3합의를 도출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대통령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10.4
정상선언을 발표함
<사진 11> 제2차 남북정상회담 자료: KBS
2008년 8월 뇌출혈로 쓰러져 9월 9일 건국 60주년 기념열병식에 불참
함. 그러나 은둔 80일 만에 북한군 축구경기를 관람함으로써 건재를 과
시함
2009년 1월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한 ‘위대성 자료’를 하달하고 본격적으로 3대세습을 진행함
김정은에 대한 위대성 자료의 주요내용
-청년대장 김정은 동지는 조선이 낳은 또 한 분의 백두산형 위인이시다.
-김정일은 “이제 우리대장이 나의 사업을 많이 보좌해주고 있다”고 언급
-김정은은 “주체혁명을 일으킬 유일한 후계자로 모신 것은 민족이 받은
행운중의 행운이며, 우리 인민은 대를 이어 수령 복, 장군 복, 대장 복
을 누리게 됐다.”
2009년 5월24일 제2차 핵실험 및 미사일발사를 강행함으로써 국제사회
로부터 더욱 고립되는 우(憂)를 범함. 이로 인해 북한은 UN안보리로부
터 제재를 받음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하는 도발을 감행하고 동년 5월 중국 동
북지역을 비공식방문하여 후진타오 주석과 천안함 문제를 논의
2010년 9월 노동당 대표자회(한국의 임시전당대회와 유사)에서 김정은
을 후계자로 공식화하여 3대세습을 마무리함
주: 1980년 10월 19일의 로동신문과 2010년 9월 30일의 로동신
문의 모습은 너무도 닮았다.
2010년 11월 24일 연평도 포격 도발함. 이는 민간인 대상 첫 포사격임
2011년 12월 17일 급성심장마비로 사망
<사진 12> 후계자 공개방법의 유사성
연속된 악행의 철권통치
1. 권력과시형 경제운용
‘측권정치’와 ‘선물정치’
김정일은 경제적 이권을 통해 측근들을 철저히 관리통제하는 ‘측근정치’
와 ‘수령경제’ 등을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 유지함
또한 ‘선물정치’로 간부들의 충성경쟁을 유도함. 당 고위간부들에게 나누
어주는 선물은 벤츠승용차, 롤렉스시계와 같은 고가의 명품들임
김정일은 신상필벌의 원칙을 주요한 용인술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고위
간부들을 관리함. 그는 아예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는 간부들은 ‘출당’시
켜 정치적으로 매장시킴. 또는 광산, 공장 등에 보내 육체노동을 시키거
나 정치범수용소로 추방함. 이때 원상복귀의 기준은 충성심임
‘광폭(廣幅)정치’와 ‘인덕(仁德)정치’
이는 김정일을 ‘통크고 대담하며 어질고 아량이 넓은 인물’로 설정하기
위한 것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은 아님
김정일이 광폭정치와 인덕정치를 강조하는 것은 북한인민들이 원하는
지도자상으로 이미지 메이킹 하는 것이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임
2. 원칙을 무시한 경제운용
끝없는 추락, 대량 아사자 발생
당권장악 이후 전국의 알짜 공장과 농장을 국가경제에서 당경제로 전환
무리한 대중동원방식을 채택함으로서 북한경제와 주민생활을 추락시킴.
‘70일 전투’, 각종 ‘속도전’ 은 오히려 경제위기를 불러온 요인이 됨
경제적 보상을 얻기 위해 ‘벼랑 끈 전술’의 강온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상
대국의 불신을 자초함. 이는 경제의 자생력회복에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
어 2006년부터 경제는 다시 마이너스 성장으로 추락함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약 350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됨. 그러나
그는 자신의 비밀금고에 유치해 두었던 외화를 식량을 구입하는데 사용
하지 않음. 이는 ‘통크고 어진’ 정치는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하다는 것
을 입증함
북한주민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북한주민 1/3
인 840만명이 영양부족 상태에 있음
3. 끝없는 폭압정치의 산물
대량탈북자 양산
만성적인 경제난 ․ 식량난 때문에 북한주민은 강제적으로 식량난민이 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됨. 북한당국은 대량탈북을 막기 위해 국경
감시 및 통제를 강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한 탈북은
이어지고 있음
1990년대 후반에만 30만명의 북한주민이 탈북한 것으로 추산되며, 한국
에 거주하는 북한이탈주민도 2만3천명에 달함 정치범수용소에 강제수용
김정일은 국제사회의 비난여론 때문에 지난 10년간 정치범 수용소 10곳
중 4곳을 폐쇄하였음. 그러나 아직도 요덕 개천 등 6개소에서 15만4천
명이 수감돼 있음
정치범수용소는 일정기간을 거쳐 심사 후 출소할 있는 ‘혁명화 구역’과
사망할 때까지 종신 수용되는 ‘완전통제구역’으로 구분 운영하고 있음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정치범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강제 노동에 동원
되며, 의료혜택도 제공받지 못한 채 하루 평균 100~300g의 급식을 제
공받음. 정치범수용소에서는 원칙적으로 면회와 서신 교환, 결혼과 출산
도 금지되기 때문에 인권유린이 가장 심하게 자행되는 곳임
북한의 교화소(敎化所)는 ‘강한 노동으로 징벌하라’는 교시에 따라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을 경우 수감되는 곳으로 우리의 교도소에 해당하는
기관임. 하지만 대부분 경미한 죄로 수감생활을 하게 되며 죄인이라는
이유로 강제노역 과정에서 광범위한 인권유린이 자행됨. 현재북한에는
7곳에 교화소가 산재해 있음
<사진 13>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및 교화소 현황
김정일의 만행과 핵 공갈
1. 무차별적 각종 테러
아웅산 테러 사건
1983.10.9 당시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
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테러 사건으로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음
버마 당국은 이 사건이 북한 독재자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모(某)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등에 의
해 저질러졌다는 수사결과를 밝힘
<사진 14> 아웅산 테러현장의 모습 출처: KBS
<사진 15> KAL기 폭파범 인도모습
2. 과격해진 무력도발
천안함 폭침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이 피격되어 침몰된 사건으로 해군 병사 40명이 사망했
으며 6명이 실종되었음
5개국 합동조사 결과 천안함 폭침의 원인은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것
으로 발표됨
<사진 16> 폭침된 천안함의 모습
연평도 포격
연평도 포격은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에 북한이 한국의
대연평<사진 16> 폭침된 천안함의 모습도를 향해 170여 발을 포격한 사건으로 해병대원 2명이 전사했
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음. 그리고 민간인도 2명이 사망했고 3명이 중
경상을 입었음
남북간의 교전 중 민간인이 사망한 것은 한국 전쟁 이후 이번이 처음으
로 국제 사회의 큰 관심을 불러 모았음
<사진 17> 포격당한 연평도의 모습
3. 핵무기 보유에 대한 강한 집착
평화적 핵 이용 포기
김정일은 1992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해서 1차 핵위기를 조
성함. 1994년 제네바합의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설립하고
북핵포기 대가로 경수로건설을 합의함
그러나 김정일은 핵개발을 지속함으로서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어기고
2002년 농축우라늄프로그램이 발각되어 2차 핵위기가 촉발되면서 경수
로건설사업도 중단됨
2차례의 핵실험
김정일은 2006년 10월 함경북도 풍계리의 지하핵실험장에서 1차 핵실
험을 강행함
그리고 약 3년 뒤인 2009년 5월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차 핵
실험을 단행함. 2차 핵실험은 1차 때보다 약 5배 정도 큰 규모로 핵보
유국임을 선언함
2차례의 핵실험은 한국을 직접 위협행위이며 국제사회를 향한 협박임
| 24
Ⅳ 김정일의 종합평가
1. 김정일의 통치스타일
종횡무진형의 통치
북한 언론매체나 공식간행물이 선전하는 김정일의 통치스타일은 ‘광폭정
치’와 ‘인덕정치’임. 이는 김정일이 통이 크고 스케일이 큰 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과 인민들에게 끝없는 은덕을 베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임
김정일은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전격적인
정책결정을 구사하는 스타일이며 군중동원, 속도전의 방식을 즐김
또한 김정일의 통치스타일은 강압과 회유, 환심책을 구사한다는 특징이
있음. 그는 반체제요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제재와 색출을 가했지만 반
체제 이외의 직무 도덕상 과오 및 과실에 대해서는 선심정책을 구사함
종합적으로 김정일은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지도자이자 의욕적인 정치가
로 평가되지만 일정한 원칙과 기준에 따른 정치를 하기보다는 개인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정치를 하는 종횡무진형으로 판단됨
책임회피형의 통치
1996년 김정일의 ‘김일성종합대학 연설문’을 통해 식량난은 ‘자신의 잘
못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함. 즉 그는 ‘당 일꾼 경제일꾼이 제대
로 일을 안 한다.’, ‘당 간부들이 혁명성이 없고 관료주의만 부린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함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말하
지 않더라도 300만 명이 아사자가 발생된 현실을 왜곡하는 무책임한 처
사임
김일성의 후광에 과도한 의존
김일성을 포함한 혁명1세대에 비해 정력적으로 일한다는 인상을 심어주
기 위해 노력함. 이를 김일성에 비해 부족한 카리스마를 보완하는 요소
로 활용함
김정일은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이어받아 지도자로서의 권리와 자질을
획득하고 이를 북한주민에게 각인시켜 나가려는 노력을 지속해 옴. 이는
김정일이 군 최고사령관, 공화국 원수, 국방위원장, 당 총비서 등의 직
책을 잇달아 확보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됨
김일성 사후 3년 동안의 유훈통치도 김일성에의 의존을 보여주는 대표
적 사례임
2. 폭압에 의존하는 반인륜적 지도자
폭압적 공포정치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공개처형은 빈번히 자행되고 있음(탈북자 10
명 가운데 7명이 총살을 목격)
탈북자의 60%는 식량배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굶어 죽는 사람을
목격한 것으로 알려짐. 그러나 김정일은 미사일발사, 핵실험 등으로 외
화를 낭비하고 있으며, 그의 사금고에 예치된 외화로 식량을 구입하지는
않음
<사진 18> 공개총살 현장
북한체제에 반하는 언동이나 행동을 한 북한주민은 어김없이 정치범수
용소로 보내져 사상교육을 받고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반인륜적 범죄가
만연하고 있음
3. 선군정치에 의존하는 군사독재자
선군(先軍)정치의 진의
김정일이 주창하는 선군정치는 ‘군인들이 정치를 한다.’는 의미임. 따라
서 선군정치는 군사독재에 의한 정치라 할 수 있음
선군정치란?
“군사선행의 원칙에서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며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내세워 사회주의위업전반을 밀고 나가는 정치방
식”으로 ‘군사선행, 군 중시’의 정치이다.
김정일이 선군정치의 구호를 내세운 뒤 극심한 경제난과 마이너스 성장
에도 군사비만은 지속적으로 증가되면서 경제는 더욱 축소됨. 이로 인해
북한주민은 식량난 경제난이 더 악화되어 탈북자를 양산하는 요인으로
작용함
형식적 개혁 제스처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군사우선주의의 전략과 국제사회의 지
원으로 식량난을 땜질하는 미봉책을 구사함.
김정일은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
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사회주의의 틀 내에서 개선이기
때문에 당장 한계에 봉착함
2009년 11월에는 화폐개혁을 통해 시장화의 길을 막고 교환한도를 설
정함으로서 주민들의 자산을 약탈하는 조치를 취함. 화폐개혁 실패로 물
가는 오히려 상승하는 부작용을 발생됨
참고 문헌
남성욱 외, 「북한경제개혁과 사회변화」, 높이깊이, 2006.
서대숙, 「현대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을유문화사, 2000.
손광주, 「김정일 리포트」, 바다출판사, 2003.
양문수, 「북한경제의 시장화」, 한울, 2010.
연합뉴스, 「김정일 100문 100답」, 2000.
조영기, 「북한의 3대세습」, 자유기업원, 2010.
주성환 외, 「북한의 경제제도와 관리」, 무역경영사, 2006.
출처 : 조 영 기 (고려대 인문대 북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