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1분부터 4분 훑어봤는데
거기서 더 궁금한 점 있으면 얘기를 해줘보세요.
《질문 1》
질문자 : 3분에 보면 난생 태생 습생 화생 이런 부분은
우리 지금 생명체를 구분하는 것과 좀 다른 것 같은데.
알에서 나고 태에서 나고 이런 건데, 화생은 화현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교에서 나툰다는 거 있죠? 종교가 다 그렇게 표현하잖아요.
하나님이 화현돼서 나오는 거, 진리가 화현돼서 나오는 거, 그게 바로 화현입니다.
그림자처럼 비추어서 나오는 거.
그때 모든 인도종교에서의 나타남, 드러남이 바로 브라만에서 나온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화한 거다.
실재가 아니지만 실재처럼 화해 있다는 거죠.
모든 것이 드러나 있지만 이게 실체가 아니다 했을 때
그 이면에 뭔가 실체가 있다, 그 실체가 물질화 돼서 화현한 거다.
그 화현입니다. 여기서는 나타난다고 했을 때.
《질문 2》
질문자 : 형태가 있는 것이나 형태가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거는 무슨 얘기인가요?
그러니까 명상을 할 때 생각이 없는 상태로 명상의 체험이 일어납니다.
생각이 끊어진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렇지만 또 더 깊이 들어가면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런 어떤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게 ‘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있다고 얘기하는 모든 것들을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보여지는 것이 ‘이 사람은 생각이 있고 이 사람은 생각이 없다’ 그런 면이 아니고,
우리가 명상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 있잖아요.
명상을 하면 생각이 있는 자리에서 생각이 없는 자리로 들어가죠.
그렇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의식도 있고 의식이 없기도 하고
이런 체험을 한단 말이에요. 그런 거를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보여질 때 ‘이 식물은 생각이 없다’ 이런 어떤 단순한 게 아니고,
우리가 체험을 할 때.
왜냐하면 그 때 그 당시에 있었던 모든 체험들이 그것을 실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게 바로 ‘내가 있다’ 존재를 믿으면 그 모든 체험들을 믿게 되는 거죠.
내가 한 체험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걸 얘기하는 거예요.
그 체험조차도 없는 거라는 거죠.
그런 존재, 나라는 중생이 있다. 나라는 것에 기반이 된 모든 체험들,
우리가 ‘있다’고 얘기하는 건 다 뭡니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거잖아.
그거는 존재에 기반을 한 거잖아.
그 존재에 기반한 모든 있다는 것들, 모든 생은 그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존재에 대한 중생상이 없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명상을 통해서 생활을 통해서 체험하는 것, 그것이 있다고 믿는 이유가
바로 이 존재에 기반 한다는 거예요.
존재가 체험을 하면 이것이 반드시 있다고 체험을 한다는 거죠.
그게 우리가 생활하면서 체험하는 것이든 명상을 통해서 체험하는 것이든
똑같은 존재에 기반한 것이다.
그거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질문 3》
질문자 : 있기는 있지만 고정된 실체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보여지는 거죠.
그렇지만 우리가 그렇게 인식을 하지만 그거는 있는 게 아니죠.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변화하고 실체가 없고 어떤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그것뿐이죠.
그러면 그렇다고 생각을 하면 그것에 우리가 연연하지 않죠.
그러면 우리 사정에 있는 경계에 집착하지 않죠.
그 모든 체험될 수 있는 대상, 어떤 체험들이 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머무르는 거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거기에 대한 실상을 바로 보면 그것이 조건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고
조건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조건이 사라지면 또 변하고,
거기에 대해서 이해가 확실하면 거기에 머무르지 않죠. 다만 일어날 뿐이었죠.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체험을 한다든가 무엇을 봤다던가 하면
우리는 ‘있다’라고 믿고 거기에 실재한다고 머무르는 거죠.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우리가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실상을 제대로 보면 나라고 존재하는 것도 업다.
생이라는 게 우리가 존재에 기반을 두면 내 몸과 마음이 태어나는 거예요.
내가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모든 생각이 나에게 기반을 둘 수밖에 없죠.
그걸 명확하게 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연기입니다.
조건에 의해서 몸이 있죠?
그 몸을 우리가 인식할 때 이걸 나라고 인식한다는 거예요. 그게 생이에요.
우리가 나가 있어서 태어난 게 생이 아니고.
석가모니가 얘기한 생하고,
윤회에서 얘기하는 생을 우리는 구분을 잘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태어났다고 하는 게, 내가 태어난 게 돼버리죠?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조건에 의해서 몸이 발생을 한 거예요.
우리가 몸이 발생을 하면 자연히 감각기관이 있죠.
감각기관을 통해서 대상을 보면서 얘를 인식할 때 그냥 인식하지 않고
어떤 존재로써 나로 인식을 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생입니다.
12연기에 보면 촉 집 다음에 생이 나오잖아.
그 생은 바로 그 생을 얘기하는 거야.
나라는 착각이 나라는 집착이 일어나는 그 순간이 생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생을 모태에서 태어나는 게 생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태어났다고 할 때 모태부터 태어났다, 그 전부터 태어났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이게 전혀 다른 생이 되는 거예요.
이 생이 있다고, 내가 있다고 이게 나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생이라는 거야.
그러면 이 나라고 생각하는 이 순간이 생,
그러니까 12연기를 보면 유 다음에 생이에요.
제가 그래서 지난번에 몇 번 얘기했죠.
그냥 비가 내리잖아요. 내리는 무엇이 있잖아.
있음을 우리는 비라고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비가 생긴 거야, 발생을 한 거예요. 그거하고 똑같다는 거예요.
조건화된 몸이 발생을 했어. 그러니까 일어났어.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몸을 통해서 있음을 인식할 때, 나라고 인식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나의 발생이에요. 그게 생이라는 거야.
이게 어떻게 일어나냐면 원인은 딱 하나라는 거예요.
이 오온 몸이라는 것에 대한 무지,
이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모르는 데에서 일어나는 게 바로 나라는 생이라는 거예요.
원인은 딱 하나지.
그러니까 무명으로 시작해서 나라는 생이 딱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생이에요.
그러면 무명이 없어지면 뭐예요? 생이 없는 거죠.
그게 바로 생사를 초월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생사를 넘어가는 거예요.
무명으로 인해서 오온이 몸이 인식하는 대상,
색성향미촉법을 보고 뭔가 인식을 할 때 그것을 나라고, 그게 바로 생이라는 거야.
그러면 그러한 생이 일어나기 전에 오온에 대해서 무상하고 고하고 조건화된
어떤 몸을 이해하고 지혜로 그것을 본다면 나라는 인식에 대해서 끊을 수 있죠.
생이 뭐냐면 나라는 인식이 일어나는 그 순간이 생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끊잖아요. 그러면 생사를 해결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끊어야 됩니까? 이거를 오온에서 끊는 거야.
그래서 오온을 보는 거예요.
이렇게 연기를 봐야지 이렇게 생을 봐야지만
지금 대승에서 얘기하는 윤회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윤회에 빠져드는 이유가 바로 ‘내가 태어났다’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모태에서 태어난 게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윤회를 얘기를 하는 거예요.
모태에서 태어난,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하나의 이런 거(컵)하고 똑같습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나라고 인식하는 그 순간이 생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뭔가 이게 확연해지잖아.
그런데 그게 나가 태어났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지금 대승에서 얘기하는 윤회, 보살사상에 들어가 있는 윤회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해가 됩니까?
그 나라는 인식, 그게 오온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오온이 나라고 잘못 인식하는 게
바로 전도몽상이에요. 잘못 인식을 하면 우리는 괴로움을 경험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서 끊는 방법이 순서가 딱 나오잖아.
오온이 공한 거를 보면 되는 거예요.
무상하고 고고 무아인 거를 보면 나라는 인식이 끊어지는 거예요.
여기에서 생은 이미 벗어났죠? 그게 생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던 그 모든 것은 이게 나라고 생각하는 이 때,
이 때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생각이 있는 것이나 생각이 없는 것이나 난생이나 태생이나 이런 것들이
이 나라는 인식이, 존재라는 인식이 생긴 이후에
그래서 이게 없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 나라는 인식이 있으니까 존재라는 게 있으니까 이렇게 되면 내가 태어났죠.
태어났으면 그 이전이 있을 거 아니야. 태어나려면 또 뭔가가 있을 거 아니야.
계속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게 윤회가 생길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그거를 계속 처음부터 끊어주는 게 금강경이에요.
제일 처음에 보살이 깨달음을 구할 때
‘그런 중생은 없다’라고 얘기를 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쉬운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왜곡될 수밖에 없죠.
그리고 제가 지난 시간에도 얘기를 했지만
이 보살사상은 윤회하고 같이 들어온 사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존재에 기반을 두고 계속 신앙생활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실은 이 금강이 그거를 깨주는 거예요. 지금까지 잘못된 인식을.
그런데 그거를 그런 식으로 못 받아들이는 거죠.
질문자 : 그런데 이거를 다 이해한 다음에 이것마저도 버려야 된다는 얘기죠?
그렇죠. 계속 이거는 얘기하지만, 결국은 없다는 이것마저도 버려라.
법도 버리고 비법도 버리라는 거잖아요.
그 무엇도 다만 그거를 깨주기 위한 거니까.
《질문 4》
질문자 : 그러면 12연기 무명부터 시작하잖아요.
순간적으로 생각나는 게 애기가 딱 태어나면 이 상태가 무명 아닌가 싶어서요.
애기가 태어나면 이게 무명.
그런데 자꾸 움직이면서 자기가 스스로 오온을 통해서 자기가 있음으로 착각하게 되고.
그 자체가 무명이죠. 제일 처음에 무명(無明)입니다.
무명 다음에 행(行)이 있어요. 어떤 잠재성향 같은 게.
그 다음에 식(識)도 어떤 잠재성향을 얘기합니다. 아직 태어나기 전에.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게 명색(名色)이에요. 그러면 애기가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애기가 감각기관을 통해서 인식을 합니다.
인식을 하고 애기가 뭐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때 그게 나라고 인식을 하죠.
그때가 생(生)이라는 거예요.
무명이 처음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인식할 때 그게 바로 생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야지 그때 괴로움을 느낀다는 거야. 그것 때문에 괴롭거든.
그거예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인식을 못하는 데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그러한 인식에 그게 왜 일어났는지, 거기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하자는 거지.
그럼 거기서 끊어진다는 거예요.
《질문 5》
질문자 : 저는 상중에 수자상이 개념이 잘 잡히지 않는데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할 때 수자상요.
아상(我相)은 우리가 이거를 한문으로 보면, 해석하면 안 됩니다.
제가 지금 분명히 말씀드리는 거는 이 금강경이 지금 한문으로 나와 있지만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거를 한문으로 해석하면 다 틀립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그때 강의한 거를 한 번 들어보세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전부 다
나라는 존재에 기반을 두고 그거를 읽는 거예요.
그거를 해석하면 ‘내가 없어야 된다, 나라는 존재가 없어야 된다’로
그걸 다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는 사실은 나라는 존재를 존속시켜주는 뭔가가 없다는 거거든요.
왜냐하면 중생상(衆生相) 내가 존재 한다는 것에 기반을 둔
그 모든 생들, 모든 있음, 모든 존재에 대한 상을 다 끊어주는 분이에요.
그랬을 때 난생 태생 화생 이런게 나오는 거하고 똑같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나오는 거예요.
뭔가 영원히 존속시켜주는 아트만이 있다 라는 상이 아상이거든요.
그 다음에 인상은 푸드갈라(pudgala)라고 하는
그때의 어떤 종교단체에서 이 나 말고,
또 다른 존속시켜주는 어떤 나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게 개아(個我)라고 표현을 하는 인상을 표현했는데,
그게 바로 푸드갈라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또 다른 나를 연속시켜 준다.
중생상(衆生相)은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존재에 대한 상.
그리고 수자상(壽者相)은 지바라고 얘기했죠. 영혼입니다.
그 당시의 자이나교가 몸 안에 지바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영혼이 사는 지바가 있다. 그래서 자이나교는 고행을 하잖아요.
몸은 혹사를 시키면 이 영혼은 영원히 산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게 바로 수자상이에요.
질문자 : 그러니까 이게 다 통틀어서 내 존재를 받쳐주는 기반은 없다 라는
얘기를 하고 있네요?
그러니까 모든 것들이 존재가 있다는 것에서 나온 모든 상이잖아.
모든 관념이잖아요. 그거를 예를 들어가지고 다 깨주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가 있다. 존재에 대한 관념이 있는 한 이런 상은 다 생긴다는 거예요.
그걸 다 깨주는 거예요.
지금은 사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까지 네 가지만 나왔지만
사실은 원본에는 열두 가지 상이 나옵니다.
그 당시에 있었던 모든 종교 안에 있던 상들을
지금 다 깨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질문자 : 함부로 해석하면 진짜 안 돼.
상도 형상상이나 코끼리상을 써야 되는데 여기는 서로상을 쓰고 있고.
그러니까 구마라집은 서로상(相)을 썼고, 현장법사는 또 다른 생각 상(想)을 썼죠.
다 다르게 쓰여졌고. 그러니까 한문으로 해석하니까 엉망이 되죠.
그리고 제가 가장 중요한 알아차림이 빠졌다고 그랬잖아요.
1분에 나온 석가모니가 알아차림을 하고 앉으셨다 그 부분이 싹 빠졌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상을 깰 수 있는 방법이 빠져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를 이해를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구마라집도 석가모니 때 사람이 아니고 한참 뒤에 몇 백 년 후의 사람이죠.
그러면 그 때 불교는 인도 전통 수행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도 전통 수행이 뭡니까? 삼매에 빠지는 거죠.
삼매에 빠지는 것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석가모니의 삼매를 경험을 했지만 그 이후에
‘지혜로 금 모든 것을 봐라. 알아차려라.’ 알아차림을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알아차림을 얘기할 스승이 없으면, 그 당시에 있었던 정말 주류였던
인도 명상 삼매에 빠지는 명상을 다 하고 있었던 거예요. 400년 동안을.
그러니까 뭐가 가장 딜레마에 빠집니까?
무아와 윤회가 존속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그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무아라고 얘기했고, 아트만은 없다고 얘기했고,
계속 실존하는 무엇은 없다고 얘기했는데도
인도 전통은 계속 윤회를 얘기하고
또 그런 명상 체험을 통해서
윤회가 있다고 믿는 그런 부류들이 그걸 차지하면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계속 이어가는 보수파들과
또 그것을 대중들은 그런 걸 이해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기존에 했던 인도 전통명상을 통해서 요가를 통해서 경험되는 것들을 또 다룬 거죠.
그래서 거기에 대한 어떤 계속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 이 4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경계에 머물지 마라, 경계는 없다,
일어나는 상에 머물지 마라, 상은 없다 라고 얘기를 했는데
또 뒤에 뭐가 나옵니까?
‘그렇게 알면 너네는 복덕이 엄청나. 이 복덕을 키워서 너는 깨달아야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이 4분만해도 딜레마가 확실하게 보이잖아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데?
상이 없어. 상에 머물지 마. 그러면 너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그 오온이 공한 거를 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 다음에 반야심경이 뭡니까? 공에 대해서 계속 설명을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결국은 본생담에 있는 보살을 내세웠기 때문에.
본생담에 있는 보살은 뭡니까?
윤회를 통해서 그 많은 전생의 보살행을 통해서
석가모니가 된 걸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윤회를 믿을 수밖에 없고 복덕을 믿을 수밖에 없죠.
《질문 6》
질문자 : 그런데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게 저도 마지막에 절을 나온 게
윤회하고 무아의 딜레마가 저는 컸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걸 쓰신 분이라면 분명히 정말 대단한 건데
그러면 그분도 이거랑 윤회랑 굉장히 고심을 하지 않았을까요?
고심을 했기 때문에 이 책을 쓰면서 제가 지난주에도 봤죠.
복덕을 받을 자는 없다. 뒤에 나옵니다.
복덕도 없다. 복덕이 복덕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복덕이라고 얘기한다.
이렇게까지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불교에서는 무아를 얘기하면서 윤회를 얘기하죠.
그러면 윤회의 주체가 뭡니까? 뭐가 윤회합니까?
나? 무아인데? 무아인데 윤회를 한다고 얘기를 하는 거잖아요.
질문자 : 업
업? 그러니까 미얀마에서 오래 공부한 위빠사나 하시는 정준영 박사라고 있어요.
그분이 무아가 윤회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아, 정말 안됐다.’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질문자 : 왜냐하면 인정을 해야 하니까
그렇죠. 대승에서는 100% 윤회를 인정을 하고
그분은 미얀마에서 공부를 한 이거를 하시는 분이니까
그렇지만 남방불교도 100% 윤회를 믿습니다. 거기는 더 심한 윤회입니다.
뭐가 윤회합니까?
‘복덕을 쌓아라’고 그러면
복덕이 어떻게 윤회를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복덕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 이거를 알아듣습니다. 그죠?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질문자 : 나라를 구했기 때문에.
나라를 구했기 때문에 아니면 뭐. 그런 딜레마에 빠지는 거죠.
그러면 기존에 있던 설을 따라갈 수밖에 없겠죠, 그죠?
대승에서 이게 지금 색성향미촉법을 인식해서 일어나는 모든 상,
그게 무엇이든 그것은 다 오온으로 인식되는 거죠.
그러면 ‘그 오온이 공하다’ 라고 보는 게 바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공부할 때는 공함만 공부하면 됐기 때문에 단순했습니다.
우리가 얘기하는 무아랑 맞잖아요.
그런데 지금 금강경에는 보살이 나오단 말입니다.
보살행이 바로 윤회라고, 뗄 수 없는 그런 전개란 말입니다.
복덕은 그러면 어디에 있냐?
대승불교 하면 공사상하고 무아하고 유식 있죠. 그러니까 일체유심조.
일체유심조가 바로 대승의 두 기둥입니다.
무아(無我)하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무안데 어떻게 일체유심조냐?
또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그 두 개가 같은 기둥으로 가고 있다는 거예요.
대승은 그게 공존하고 있다는 거예요.
질문자 : 그런데 그럴싸할 수도 있네요.
그런데 공존하려면 얼마나 많은 머리를 굴려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단편적으로 들으면 그럴싸한 거예요.
다 맞는 것 같은 거예요.
질문자 : 식이 어떻고.
그러니까 그게 석가모니 때부터 종자론이 있었죠.
식이론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복덕이 어떻게 가냐.
아까 업을 얘기했잖아요. 업이 윤회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업이 어디에 저장돼 있냐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식(識)에 저장이 돼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육식을 얘기하잖아요.
색성향미촉법이 육경이고,
육근을 통해서 그걸 인식을 하면 일어나는 게 육식이죠.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이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거란 말이에요.
이 식은 전부 다 마지막의 육식인 의식을 바탕으로 식이 일어나죠.
알음알이가 있어야지 식이라는 게 일어나잖아. 안식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 당시에 전부 다 요가수행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수행은 다 요가수행이고 알아차림이 없었어요.
유식을 얘기하니까 유식의 유래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당시에 명상을 하시는 분들이 깊~은 삼매에 들어가니까
그걸 육아행이라고 얘기합니다.
깊은 삼매에 들어가니까 육식을 넘어서 뭔가가 있더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더라는 거야.
그 아뢰야식에 모든 업이 다 저장이 되더라는 거예요.
명상을 통해서 체험한 거예요. 이름이 아뢰야식이라고 한 거예요.
거기에 모든 지금까지의 말하고 행하고 마음에서 지은 모든 것들이
여기 들어가 있다, 이게 윤회라는 거예요.
그거를 깊은 삼매를 통해서 체험을 했다는 거예요.
그것을 이론화한 게 유식학(唯識學)입니다.
그게 바로 여기에서 얘기했던,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 상태로 들어가서 보니까 그렇더라.
그런데 그것을 학문적으로 얘기하면 그렇지만
전통적인 전설은 인도의 이 공사상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연기를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너무 어려워가지고 너무 고민을 하고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에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이 밤마다 내려와서 이 유식을 가르쳐줬답니다.
그 사람 이름이 무착인가 그래요.
그래서 그 사람이 그 밑에 누구누구 제자를 두면서
이렇게 이론화된 게 바로 유식학이라는 얘기에요.
그래서 유식 그거를 일체유심조, 그것을 믿는 종단에서는 미륵불을 모십니다.
그게 자기의 시조불이에요.
그렇게 시작된 게 가장 강력한 유식입니다.
원효대사가 이 유식을 배우려고 당나라로 가려다가
신유식, 유식 중에도 새로운 학문이 있다 이래가지고
그거를 배우려고 당나라고 가다가
중간에 해골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죠.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 이렇게 깨닫고 나서
가지 않고 돌아와서 유식학을 완성했죠.
거기서 얘기하는 식이 바로 마음입니다.
제가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마음이라고 얘기하는 게
식도 마음이라고 얘기하고, 의도 마음이라고 얘기하고,
마음도 마음이라고 얘기하고, 생각도 마음작용이기 때문에
생각도 어떨 때는 마음이라고 얘기하고.
그러니까 불교는 다 마음밖에 없다. 식에 저장을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이론이 펼쳐집니다.
그러니까 공사상 하나하고 업식 유식하고 같이
이때부터 그전부터 석가모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거의 뭐 백년 이후에는 이런 종교였습니다.
인도의 전통에 맞춰서. 그때부터 계속 같이 온 거예요.
이 복덕이 바로 아뢰야식에.
그러니까 안의비설신의식 다음에 말라식이 있고
그 밑에 아뢰야식이 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말라식(末那識)은 뭐냐면 나라고 인식하는 그게 말라식이라고 얘기를 해요.
우리는 공이라는 개념을 일체가 무상하고 고고 무아다.
이렇게 우리는 이해를 하는 거죠.
그런데 불교에서는 공은 번뇌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밖에 얘기할 수 없냐면 육바라밀을 보면
우리가 수행에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이 있지만
그 다음에 선정바라밀이 있고 그 다음에 반야바라밀이 있죠.
지혜가 일어나려면 선정이 바탕이 돼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정념이 빠져있죠.
그러니까 대승은 이 모든 지혜가 어디에서 오냐면
깊~은 삼매를 통해서 오는 거예요.
깊~은 삼매를 통해서 지혜를 얻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알아차림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얘기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알아차림이라는 어떤 정념을 통해서 알아차린다면
여기서는 깊은 선정을 통해서 분별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면 뭡니까? 삼매체험이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서 알아차림이 없어서, 정념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공이라는 개념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왜곡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번뇌를 끊는다 괴로움을 끊는다는 얘기가 공체험이 돼버리는 거예요.
선정체험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정을 통해서 깊은 삼매에 들어가 보니까 분별이 없더라.
그게 바로 분별없는 지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석가모니는 그게 아니라고 분명히 얘기했잖아.
그런데 그거 외에 다른 걸 모르는 거죠.
그래서 무분별이 지혜지만, 그것은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음으로 이게 아니고
선정의 깊은 삼매를 통해서 그것을 체험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공이라는 개념도 그렇고, 윤회라는 개념도 그렇고
대승에서는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아뢰야식이 어디 있을까요? 여기서는 모든 식이 업이 다 여기에 들어 있잖아요.
생각 속에 있나요?
종교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눈동자처럼 보고 계시잖아요.
마음속에 죄 짓는 거를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 역할이 바로 아뢰야식이에요.
어디에 있을까요? 다 있죠. 세포 하나하나에 다 있죠.
그러니까 아뢰야식은 뭐하고 같냐면 CCTV랑 같은 거예요.
그대로 저장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