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원에는 우리 선조의 자연관이 그대로 배어있다.옛 선조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자연과 벗하며 살아온 게 우리 선조들이다.그 선조의 자연관을 우리 정원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한국의 정원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신선설(神仙說)에
입각한 정원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경관이 우수한 자연을 그대로 이용해 연못과 돌, 꽃과 나무로 소박하게 꾸몄다.
사전적 의미로 정원(庭園)은 '집안의 뜰이나 꽃밭'을 말한다. 이와 비슷한 말로 원림(園林)이라는 것이 있다.
원림은 정원에다 숲의 영역을 포함한다
산과 연못과 돌과 나무와 꽃은 그저 자연일 뿐이다.거기에 정자나 누정이 들어감으로서 그 자연은 인본화(人本化)가 된다.
이 정자나 누정은 인간과 자연을 연결해주는 공간인 셈이다.이들은 인간이 자연 속에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다.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자연과 일치하여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정자와 누정이다.
누각과 정자는 자연과 인간이 만나 일치하는 곳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자연과 함께 풍요로운 삶을 살았던 선조들은 경관이
좋은 곳에 많은 누정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누정의 입지는 선조들이 살고 있던 주변 환경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과거 우리의 전통 속에서 가부장 제도의 아래 삼강오륜의 생활방식과 가정교육의 생활철학이 유학에 바탕을 두고
개인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이 작용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청렴함과 검소함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었으며 곧, 선인(仙人)의 경지였다.
해곡 최순우 선생은 "뒷동산의 잘 생긴 바위 한덩어리, 등 넘어가는 오솔길 한 갈래,
축동의 노목 한 그루에도 정령과 생명이 스며 있다는 생각, 즉 자연도 인간못지 않은 존귀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즉 자연은 공경의 대상이요, 두려움의 대상이어서 함부로 해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우리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원의 양식은 조선시대에 크게 발달한다.
삼국시대의 중국식 정원이 한국적인 정원으로 고유한 특색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풍수설이 크게 성행함에 따라 지형적인 제약을 받아
안채의 뒤 후원이 주가 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발달했다.
이러한 후원양식은 건물 뒤에 위치한 언덕의 사면을 계단 모양으로 다듬어
평지를 만들고 키 작은 꽃나무와 괴석 등을 조화시킨 정원이다.
창덕궁 낙선재의 후원과 경복궁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 등이 대표적이다.
또다른 조선의 정원수법으로는 자연 그대로의 바위나 시냇물, 지형 조건과 서로 어울려 깊은 숲속에
자리잡은 정원양식을 들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밖에도 조선시대에는 전국 각지의 명승지에 수많은 누각이나 정자를 세웠다.
평양 대동강변의 부벽루, 서울 자하문 밖의 세검정, 진주의 촉석루, 남원의 광한루, 수원의 방화수류정 등 수없이 많다.
오늘날 숲이 우거지거나 경관이 좋은 곳을 자연공원으로 지정해 이용하는 것과 거의 같은 수법의 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의 정원이 인공적이라면 한국의 정원(庭園)은 자연친화적이라서 좋다.
중국의 이화원이나 일본의 용안사에서 느껴지는 인공미나 웅장함을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후원에서 느낄 수 없는 이유는
한국의 정원은 가급적 인간의 손길을 배제하고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렸기 때문이다.
대개 ‘한국의 정원’이라면 후원(後園)을 말한다. 앞마당은 실용적인 공간으로 벼나 고추를 말리고 잔치를 여는 장소였고
뒤뜰은 휴식 공간으로 소나무, 대나무와 꽃과 풀이 있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창덕궁의 후원은 수목이 우거진 산기슭과 언덕 그리고 골짜기 등 자연 그대로의 지형과 숲으로 되어 있다.
한국 정원은 전통적으로 네모진 계단식 연못, 화계, 꽃담 등의 양식을 발전시켜왔다.
이 중 방지(方池) 라고 불리는 네모진 계단식 연못은 그 기원이 백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부여 정림사 연지 공수 공산성 방지 등이 그 예이다.
네모진 연못과 주위를 계단식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에는 매우 희귀하여
한국 정원만의 고유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늘과 우주를 담는 그릇으로 정원을 생각했던 선조들의 독특한 정원관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 화계는 신라시대의 사찰에도 나타나고 있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고조선 시대의 천단(天壇)신화가 그 기원으로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계단의 주위로 여러 층의 담을 쌓아 꽃을 심었는데 화계. 즉 꽃 계단이란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는 화계의 경계에 꽃담을 둘렀는데 붉은 벽돌로 화려한 무늬를 만들어 넣었다.
주로 여인들이 거처하던 규방의 후원을 둘러싸는 담이었기 때문에 이런 뜻에서 '꽃담'이라 불렀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는 사치스런 꽃담이 많이 만들어졌고 화계에도 괴석(怪石)이나 석함(石函)등을 여러 개 놓아
매우 인공적인 경치를 만들었다. 경복궁 아미산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 정원이 뚜렷하게 독창적인 모습으로 양식화되어 나타났던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전통적인 한국 정원 양식과 더불어 이 시대는 별서(別墅)라고 불리는 문인 정원양식이 많이 조성되었다.
대표적인 별서인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 강진 다산 초당, 영양 서석지 등은 정기적으로 시회(詩會)가 열렸던 곳으로
정철, 김인후, 고경명, 윤선도, 정약용 등 조선의 유명한 문사들의 시와 그들이 노래하였던 풍경이 담겨진 곳이다.
자연을 노래하는 별곡(別曲), 수조가(水調歌), 화사(花史)등의 국문학 장르가 모두 이처럼 별서에서 비롯하였다.
별서 정원은 시를 지어 노래하는 장소였으므로 시 가운데에서 비로소 정원의 멋을 알 수 있다.
시를 위해 경관을 조성하고, 시로써 감상되며, 시를 통해 그 기법이 전수되는 독창적인 조경 양식.
곧 시경(詩境)은 조선시대 조원에 있어 일종의 규범이 되는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소쇄원 사십팔영. 경정잡영. 어부사시사. 다산화사 등 정원을 세부적으로 노래한 글들이
지금까지 많이 남아 내려오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연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만들어지는 우리의 정원을 집안이라는 영역으로 한정한다면
우리의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거의 모든 정원이 담으로 자연과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담은 일정한 영역을 표시할 뿐
담 밖과 담 안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담을 너머 끊임없이 교류하는 것이 우리의 정서다.
정원은 자연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자연을 빌려 정원을 조성하려 한 점이 우리 정원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다.
정원은 정원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자연의 연장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다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으려 했다.
동산이나 계곡, 하찮은 길이라도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생긴 그대로 이용하고 화룡점정하듯 한 모퉁이에
건축물을 세워 자연 풍광을 한층 빛나게 하였다. 그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을 가졌다.
억지로 손질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 인본화된 자연공간이 바로 한국의 정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