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후 북한은 남한 내 혼란을 끊임없이 야기해 왔다. 남한에 북한 공작원들을 침투시켜 반정부 세력을 양산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청와대 습격을 감행하는 등 국가 최고통치자를 암살하려고까지 했다.
본 매체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정전 이후 북한의 대남 도발 역사 중 대표적 사건 10건을 연재한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 북한의 ‘테러’내지는 ‘만행’이 너무도 많아 전부 소개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도 한켠 들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한의 도발을 다루기에는 역량이 부족함을 고백하며 이해를 구하는 바이다.
15일부터 연재되는 <北의 침략>은 오는 24일까지 매일 하나씩의 사건을 싣기로 했으며, 25일은 자세히 다루지 못한 사건을 짧게 요약해 정리하고 현재 우리가 되새겨야할 자세에 대해 짚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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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국민항공사(KNA) 소속 여객기 '창랑호(滄浪號)'. | 1.창랑호 납북 사건
1958년 2월 16일 부산수영비행장을 이륙한 대한국민항공사(KNA) DC-3기(기종 : 더글러스 DC-3, 등록부호:HL106) 경여객기가 여의도 공항에 도착할 무렵 승객을 가장한 납치범들에 의해 납북(拉北)됐다. 창랑호라 불리운 이 여객기는 여성 2명을 포함해 총 6명인 납치범들에 의해 승객 34명과 함께 평양 순안비행장에 강제 착륙됐다. 대한민국 항공 역사상 최초의 납치사건이었다.
대한국민항공사는 지금의 대한항공의 전신으로 1950년 12월 미국에서 DC-3기 2대를 도입해 적자운영 가운데에서도 서서히 항공사업의 기틀을 잡아 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중 1대가 1957년 7월 7일 전복, 대파되어 가동불능케 되는 사고를 빚은 뒤, 상처가 채 아물기 전에 나머지 한 대가 납북되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승객들의 생사여부와 안전한 송환이었다.
당시 창랑호는 미군중령(군사고문단원) 1명을 포함한 승객 31명과 승무원 3명을 태우고 부산 수영비행장을 이륙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30분 평택 상공에 이르렀을 때 무장한 북한 간첩들은 탑승객 중 군인 2명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 실신시킨 다음 칼빈총과 엽총을 기내 앞뒤에서 발사하면서 조종사를 협박, 기수를 평양으로 돌리게 했다.
북한 당국은 보도기관을 통해 "대한국민항공사가 '의거월북' (자신의 의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음)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저우언라이(주은래, 周恩來) 중국 총리의 방북을 앞두고 '남한 비행기가 자진 월북했다'는 체제 선전을 위해 납치극을 꾸몄던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정부는 2월 20일 북한 공작원 김택선 등 3명을 납치범으로 발표했으며, 22일 국회가 본회의에서 민주당 소속 정일형(鄭一亨)의원의 긴급동의를 받아 들여 참전 16개국에 만행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발송,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를 받은 UN군은 2월 24일의 군사정전위원회에 수석대표 울라구 H. 기스토가 북한 측에 승객과 승무원, 기체의 즉시 송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25일에는 사건 배후로 기덕영 등 3명을 체포 하였다.
납북 18일만인 1958년 3월 6일 북한은 자유세계의 여론에 굴복해 탑승자 중 납치범과 가족 등 8명을 제외한 승객들26명만을 판문점을 거쳐 남한에 돌려보냈으나 기체는 억류했다. 피랍기의 조종사는 미국인 윌리스 P홉스, 부조종사는 미 공군의 맥클레렌 중령이었다. 피랍 후 송환된 탑승자 가운데에는 국회의원 유봉순과 공군정훈감 김기완 공군대령도 포함돼 있었다.
그 후 기덕영 등 3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이 가운데 기덕영은 스파이죄 이외의 죄상으로 징역 7년형이 선고되었고 다른 2명은 무죄로서 석방됐다.
이 사건을 조사한 결과 해당 항공기 탑승객에 대한 보안검색을 실시하지 않았고 무기 휴대자에 대한 통제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항공기 탑승객의 무기 소지자에 대한 단속권을 경찰에게 부여하여 정기 여객기의 공중 감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대한국민항공사는 이후 운영의 정상회복을 위해 1959년 4월 22일 DC-3형 쌍발기 1대를 도입, 그날로 국내선에 투입하는 한편, 같은 해 7월 28일에는 미국 록히드항공기제작회사(Lockheed Aircraft Corp.)로부터 콘스틀레이션(Constellation) 749A 4발 여객기 1대를 임차(賃借) 도입, 국내선과 국제선에 병용해 취항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