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에서는 지역 인물을 비롯해 지리 ·역사·사회 등 전분야에 걸쳐서 최초·최고·최대 등의 사례를 모아서 <2002 원주 기네스북>을 발간했다더군요.
이 책에는 지난해에 95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 문창모 박사가 최고령 국회의원(의원당시 86세)과 최고령 의사 (은퇴당시 94세)로 올랐습니다. 그밖에 최초의 고아원(성애원, 1945년 개원), 최초의 성당(원동성당, 1896년 설립) 등의 자료와 원주에서 머리카락이 가장 긴 사람(강정희씨 2.4m), 가장 오래된 건물 (인목대비 생가, 1584년 건축), 가장 오래된 목욕탕 (은하목욕탕, 1971년 개업), 가장 오래된 과자점 (영신다과, 1971년) 등 재미있는 자료들이 실려 있습니다.
내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도 <서석 기네스북>이 나오면 좋을 텐데요? 각종 자료를 보면서 고향을 떠난 분들에게는 향수와 함께 끈끈한 유대감을 심어줄 테고, 지금 살고 계신 분들에게는 애향심과 함께 지역을 알 수 있는 향토 자료가 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료 수집이 필요할 텐데…. 우선 제가 알고 있는 저의 모교 서석중학의 정보 몇 가지를 올려 보겠습니다. 아직은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겠지만, 이것도 세월이 지나면 우리 고향의 역사가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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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면 최초의 중학입시
지금이야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니 입학시험이 없지만 예전에는 중학입시가 치열했답니다. 제 기억으로는 서석중학교에서 최초로 입시를 치른 세대는 서석초교 34회(서석중학 14회)부터가 아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서석중학 15회인데... 우리가 1학년일 때 13회 선배들은 한 열댓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원이 60명. 그러니 13회 이전까지는 정원 미달이라 입시를 치를 형편이 아니었겠지요. 14회 선배들이 입학할 때는 열 명 내외쯤 탈락생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수석입학을 한 학생의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청량초교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선배는 입학하자마자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가서 서석의 인재로 기록되지는 못했고요.
당시 입시에서 탈락한 학생은 학업을 포기하거나 인근에 있는 창촌중학교(내면에 있는 중학교지요. 그곳은 미달이었으니까요.)에 입학했다가 뒤에 결원이 생기면 전학을 온 듯합니다.
서석에서 가장 치열했던
15회의 중학 입시
서석중학 개교이래 가장 치열했던 입학 시험은 제 기억으로는 서석초교 35회이자 서석중학 15회였던 우리였던 듯합니다. 그 때, 정원이 60명인데 지원자가 104명!!!
제가 104명을 기억하는 것은 친구였던 조00군의 수험번호가 마지막 번호인데 104번이었기 때문이지요. 거의 2:1에 육박하는 무서운 경쟁이었습니다.
만약에 지금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학부모들이 교육청으로 쳐들어가고 난리였겠지요. 10여년 전에 춘천에서는 3.000명 쯤 되는 고교 인문계 정원에서 100여명 탈락했다고 학부모들이 농성을 하면서 교육청 마당을 점거했으니까요. 하지만 순박하셨던 그 때의 부모들은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때 수석합격은 청량초교 출신의 박성근 군이었습니다. 청량초등학교는 2년 연속 수석합격자를 배출하는 기록을 세운 것이지요.
서석초교 출신으로는 입학성적이 10위 이내였던 학생은 2위 심영기, 5위 연영흠, 8위 김영일, 9위 이규명의 4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합격자 발표를 할 때 1등부터 60등까지 석차순으로 게시를 했답니다.
우리 세대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 한숨을 돌릴 여유가 있었고, 더구나 산아제한이 시작되지 않던 무렵에 태어난 세대라서인지 인구가 폭증했지요. 그리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부모들의 학구열이 폭발했고, 학교는 미처 세우지 못했고요. 그러니 우리 동기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와 취직까지 치열한 경쟁에 시달린 억울한 세대였습니다.
우리 다음해인 서석초교 36회(서석중학 16회) 때는 지원자가 120명 쯤 되었지요. 하지만 그 때는 1차 입시에서 일단 60명을 선발한 뒤, 학급이 증설되어 추가로 60명을 선발했으므로 탈락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서석중학 입시와 관련된
몇가지 기록들
1)그러니까 서석중학 16회는 서석중학교에서 최초로 2반을 배출한 기수가 되겠군요.
2)서석초교 36회 (서석중학 16회)는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 최고로 시달린 세대일 듯하고요. 서석초교 35회 때도 입시를 대비한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을 했지만... 그렇게 많이 탈락하리라고 예상을 못했는지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배우는 우리들도 느슨했어요.
그러나 우리가 많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후배들은 스스로도 노력했겠지만, 학교마다 비상이 걸렸어요. 그 때는 서석면에 초등학교가 5개교 (서석, 청량, 삼생, 송촌, 항곡) 있었는데, 수석이 어느 학교인가, 탈락자가 얼마나 되는가가 학교의 명예와 관련되었으니까요. 우리 후배들은 5학년 때부터 지독하게 닥달을 당했지요. (1년 아래 후배들의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황00 선생님이신데, 정말 무서웠어요. 우리들까지 소문을 들을 정도였으니까.)
3)서석중학 15회 입시 때 수석을 한 박성근 군은 서석중학 출신으로 최초로 서울법대에 진학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유일한 경우가 아닌지 ㅠㅠ)
4)한편, 차석을 한 심영기군은 강원대학교 농대에 진학한 뒤 서석초교와 서석중학 출신으로 최초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기록을 세웠고요.
5)서석고등학교 입시 경쟁률은? 그렇게 치열하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우리 동기들이 1회인데... 정원이 60명에 지원자가 61명. 그런데 한 명(중학동기인 조00군)이 응시를 포기하고 다른 학교로 진학해서 탈락자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해에도 서석 중학교는 2학급이고 서석고등학교는 1학급의 병설중고교였습니다. 중학교가 2학급, 고등학교가 1학급이니 수치상으로는 탈락자가 있어야 하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석중학교 졸업생들이 도시 지역으로 진학하기도 하고, 그 때만 해도 넉넉하지 않은 시절이라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정원을 채우기가 빠듯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자료 출처 : 저의 기억입니다. 그러나 거의 정확하리라고 봅니다. 제가 경험했거나, 직접 보고 들은 사실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