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慶州) 김씨(金氏)의 대보공(大輔公)은 김알지(金閼智)에서 시작된다.
김알지는 65년 신라 탈해왕 9년 금성(金城) 서쪽 계림(鷄林)의 나무 끝에 걸려있던 금궤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이를 기뻐하며 성을 “김”(金)으로 하사 했는데 이것이 경주 김씨의 시작이다.
경주 김씨는 대보공의 후손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의 사위로 후사(後嗣)없이 승하하자
첨해왕(沾解王)이 뒤를 이어 신라 13대왕에 오르면서 신라의 왕성(王姓)이 되었다.
그 후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손국(遜國)할때까지 신라 56명의 왕중 38명의 왕(王)을 내어
삼한(三韓)의 대표적인 성씨를 이루었다.
-상촌공 김자수 유허비(안동 소재)-
경순왕의 13대손 태사공(太師公) 김인관(金仁琯)은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하고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를 제수받았다.
우왕(禑王) 초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왜구(倭寇)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경상도 도순무사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대하여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그가 전날 김해, 대구에서 있었던 왜구와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도망하여 많은 병사들을 죽게한 사실을 들어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하지만 상촌은 뒤에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時事)가 되고
공양왕(恭讓王)때는 대사성(大司成),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이때 상촌(桑村)은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 할 것과 왕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자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淫祀)는 금지하고 모든 무당의 궁중출입을 엄단 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崇佛)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탑(演福寺㙮)의 중수공사를 중지 할 것’,
‘언관(言官)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상촌공을 배향했던 인계서원(仁溪書院)의 유허비. 봉화군 재산면 소재-
1392년(태조 1) 판전교시사(判典校時事)가 되어 좌상시에 전보되고 충청도 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고려말 상촌은 정세가 어려워지자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금곡동에 은거하여 유유자적 했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손에게 묘갈(墓碣)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상촌은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이다.
그의 11대손 저(箸)는 이곳 영남의 봉화군 춘양면 숫골의 낙향시조로
창릉참봉(昌陵參奉)을 지냈으며 배위는 청주 한씨이다.
12대손 태중(兌重)은 호는 백운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배위는 윈씨이다. 묘소는 원주 외남송리 자좌 쌍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