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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선생과 우산리(牛山里)의 유풍(遺風)
- 빙월정(氷月亭)․목미암(木美庵)․송매정(松梅亭)을 중심으로 -
안동교(安東敎)
1. 우산리(소뫼 마을)를 찾아서
송광사에서 광주행 국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고인돌 공원’을 바로 지나 호남의 유서깊은 마을 우산리(牛山里)[우산리는 1895년까지만 해도 보성군 문전면(文田面)에 속했다가 1914년 보성군 문덕면 한천리(寒泉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그 후 1973년 7월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승주군 송광면에 편입되면서 다시 우산리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가 나온다. 이곳 우산리는 지금은 주암호 건설로 인해 마을의 원형을 거의 잃어 버렸지만, 한때는 호남의 대표적인 유가(儒家) 마을 즉 유촌(儒村)으로 명성이 자자했었다. 1987년 주암호 건설 이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은 백여 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고, 자연의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었으며, 대대로 뛰어난 유학자들을 배출해 왔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 속에서 경학(經學)과 문장(文章)과 예학(禮學)에 밝은 유학자들이 나와, 유교의 사상을 꽃피우고 문화를 일구면서 규모있는 생활을 꾸려왔으므로, 사람들은 우산리를 호남의 굴지(屈指)의 마을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산리는 마을 뒷편 동쪽에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오봉산(五峰山)과 우제등․금성등이 산맥을 형성하고, 남으로는 계족산(鷄足山)이 우뚝 솟아 있고, 북쪽엔 조계산(曹溪山)이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모후산(母後山)이 있고, 서쪽으로는 강과 들을 사이에 두고 천봉산(天鳳山)․반월산(半月山)이 있어, 서쪽으로 약간 트여 있기는 하나 이곳은 하나의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마을 앞 서쪽에 보성강과 동복강이 합류하여 큰 강을 이루고 마을 앞을 구비쳐 흐르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류[背山臨流는 “산을 등지고 냇물에 임하여 도랑과 연못이 이어있고 대나무가 둘러졌으며 앞에는 마당과 채소밭 뒤에는 과수원이 있네(背山臨流, 溝池環잡, 竹木周布, 場圃築前, 果園樹後)”라고 후한때 尙書郞 仲長統(179~219)이 지은 [樂志論]에서 이야기하고 있다.]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우산리는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마을은 동쪽의 오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쪽 즉 왼쪽에 청룡등이 있으며 북쪽 즉 오른쪽에 백호등이 에워싸고 있다. 또 모후산의 한 갈래가 멀리 마을 앞을 안고 서쪽에 안산을 이루어 풍수지리상의 네 가지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최재율․김희승, 「내우산(內牛山)마을의 수몰과 그 사회적 충격」, 『주암댐 수몰지역 종합학술조사연구보고서』, 전남대학교박물관, 1987, pp.133-134.]
천혜(天惠)의 경관을 갖춘 이 마을을 옛부터 우산이라 불러 왔는데, 그렇게 부르게 된 까닭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와우(臥牛)의 형국이기 때문이다. 원래 우산리에는 옥씨(玉氏)와 하씨(河氏)들이 살고 있었는데, 1614년(광해군 6년) 빙호자(氷壺子) 안방준(安邦俊) 선생(1573-1654)[안방준 선생은 초년에는 ‘빙호자(氷壺子)’라 했고, 중년에는 우산에 살았으므로 ‘우산병복(牛山病覆)’이라 했다. 만년에는 평생동안 포은(圃隱)과 중봉(重峯)을 사모하여 또 ‘은봉(隱峰)’이라 자호하고, 암호(菴號)를 ‘은봉암(隱峰菴)’이라 하였으며, 이외에도 ‘매환옹(買還翁)’ ‘대우암(大愚庵)’ ‘왈천거사(曰川居士)’ 등이 있다.]이 혼란한 정국을 피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죽산안씨(竹山安氏)가 자작일촌(自作一村)하여 지내게 되었다. 이 곳에 터를 잡아 은둔하면서 제자들을 기르던 선생을 세상 사람들이 ‘우산(牛山)’이라 부르면서 이 마을의 명칭도 세인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우산 선생이 꿈에서 얻어 숨어들었다는 우산리. 이곳에는 그의 고귀한 정신(精神)과 유풍(遺風)이 살아 숨쉬고 있다. 달콤한 벼슬의 유혹을 뿌리치고 초연하게 낚싯대를 드리우며 명월청풍(明月淸風)과 송매(松梅)를 벗삼아 노닐었던 그 맑은 기상(氣象), 그 기상이 어려있는 빙월정(氷月亭)과 목미암(木美庵), 송매정(松梅亭) 등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선생의 기상을 전해주고 있다.
2. 우산(牛山) 선생은 누구인가.
우산은 1573(선조 6년)에 보성 오야리(梧野里,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에서 첨추(僉樞) 안중관(安重寬)의 아들로 태어났다.[우산은 8세에 진사(進士) 안중돈(安重敦)의 양자로 들어갔다.] 문헌고가(文獻故家, 학문으로 여러 대에 걸쳐 이름있는 집)의 유풍(儒風) 속에서 자란 우산은 11세 되던 해에 퇴계(退溪)의 제자였던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1526-1597)의 문하에서 『소학(小學)』 등 여러 경전을 공부하면서 학문의 방향과 절의의 실천을 깊이 함양하였다. 또 19세 되던 해에는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의 문하를 찾아가 성리학(性理學)의 요체를 배워 안덕(安德)의 기초를 닦아 갔다. 우산은 약관의 나이에 스승 죽천을 따라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왜란이 끝난 뒤에는 많은 역사적 기록물을 정리하여 ‘의리를 숭상하는 기풍[尙義之風]’을 진작․전승하고 세교(世敎)를 굳건히 세움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원기(元氣)를 배양하는데 심혈을 쏟았다.
한때 스승 우계를 모함한 시류배들의 작태에 울분을 삭이지 못했던 우산은 1611년(광해군 3년) 가족을 이끌고 옛집이 있던 서울 낙산(駱山, 낙산은 서울 동대문에서 동소문으로 뻗어 있던 산으로 중앙부가 낙타등과 비슷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의 매계동(梅溪洞)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우산은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전투에서 순절한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의 유문(遺文)을 모아 『항의신편(抗義新編)』을 편찬하였으며[이 해가 1613년(41세)이다. 그 후 1622년(50세)에는 중봉의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수정하고 있다.], 또 많은 준재(俊才)들과 교유하였다. 우산은 당대의 문장가이며 정치가였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인목대비의 폐비를 완강히 거부한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며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피봉된 치천(稚川) 윤방(尹昉), 형조참판을 지낸 괴음(槐陰) 홍준(洪遵), 우계의 아들인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그의 사위이며 반정공신인 계곡(溪谷) 장유(張維) 등 대부분 선배들과 교유하면서 단순히 시가(詩歌)에만 젖어든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구하고 담론을 나누며 인간적 유대를 다졌다.
그러나 이러한 학자적 생활도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연보」에는 당시의 우산이 처한 정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당시 이이첨(李爾瞻) 등 역적이 그득하고 김개(金闓), 윤호(尹昈)가 함께 이웃하니 선생(우산)이 오래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바야흐로 환향(還鄕)하려 하자, 그 고을의 사대부 자제들이 선생을 사표(師表)로 삼아 서로 예조판서 이이첨에게 편지를 올려 교관(敎官)으로 삼기를 청하니, 선생이 강력히 사양하여 면하게 되었고 끝내는 두문불출하였다. 이이첨이 또 천거하여 쓸 생각으로 선생의 처얼남(妻孼男) 정사립(鄭思立)에게 이르기를 ‘너의 적매부(嫡妹夫)가 죽은 스승의 피무(被誣)로 벼슬에 뜻이 없다하나 만약 나를 보러 오면 내 마땅히 우계(牛溪)를 신설(伸雪)할 것이니 너는 이 뜻을 전해라’하고, 또 남대(南臺:사헌부 臺官)의 벼슬길을 열어주겠다고 말하니 그의 의도는 대개 선생에게 있었다. 또 한찬남(韓纘男)이 거듭 찾아왔으나 선생은 피하여 보지 않았다. 이에 귀향할 계획이 한층 굳어졌다.”[『은봉전서(隱峰全書)』Ⅱ(한국문집총간본), 「연보(年譜)」, p.503 참조.] 광해조(光海朝)를 혼란으로 몰고간 간신배 이이첨과 한찬남 등은 처음에는 관직으로 유혹하고 나중에는 스승 우계(牛溪)의 원통함 - 임진년에 선조(宣祖)가 의주로 피난가기 위해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출영(出迎)하지 않았다는 일로 수년간 공박을 당함 - 을 풀어주고 욕됨을 씻어준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출사(出仕)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우산은 평소의 소신인 ‘의리(義理)의 정도(正道)’를 내세워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우산은 경륜과 포부를 펼치기 위한 사욕(私慾)때문에 일시적으로 굴종하느니 차라리 혼탁한 소굴에서 뛰쳐나와 한적한 곳에 은둔함으로써 ‘빙호추월(氷壺秋月)’[이 말은 얼음병에 비친 가을 달처럼 순수한 마음을 상징한다. 우산에 은둔하기 전에 즐겨 쓴 <빙호자(氷壺子)>라는 호는 여기에 연유한다.]같은 청렴결백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을 더욱 소중히 생각했던 것이다. 우산은 3년여의 짧은 매계동의 생활을 끝내고 42세 되던 갑인년(1614) 가을에 우산(牛山)으로 돌아왔다.
3. 우산(牛山) 선생의 낙향(落鄕)
우산이 저술한 「우산전사기(牛山田舍記)」에 의하면, 우산은 보성 송산(松山)에서 서울 매계동(梅溪洞)으로 이사하기 전 정미년(1607)에 꿈 속에서 이 곳 우산을 얻은 것으로 적고 있다. “정미년 간에 같은 고을의 임준(林埈)이 내 집(송산)을 찾아 날이 저물어 여기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날 밤 꿈 속에서 임준(林埈)․박언장(朴彦章)과 함께 살만한 땅을 보러 다니다 한 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산수가 수려하고 수목이 무성하여 경치가 아름다웠다. 내가 두 벗에게 「이 땅은 살만한 곳인데 다만 서북쪽이 트여 있어 바람을 받으니 이 점이 아쉽다」고 하니, 임준은 「소나무와 대나무를 많이 심어 세월이 흐르면 그러한 걱정이 없어질 것이다」 하고, 서로 여러 편의 시를 주고 받다가 벌떡 일어나 보니 그것은 꿈이었다. 시는 거의 잊어버렸으나 내가 지은 「온 천지에 바람과 이슬이 가득한데 달빛만 차누나(滿天風露月光寒)」라는 구절만 기억하여 임준에게 말하고 꿈에서 본 산천의 모습과 경치를 설명하였더니, 임준은 「조만간에 그 꿈과 같은 아름다운 땅을 얻을 것이다」고 하였다.”[『은봉전서』Ⅰ, 「우산전사기」, p.457 참조.] 은봉은 몽득(夢得)한 그곳을 항상 그리워하던 중, 계축년(1613) 겨울에 잠시 고향을 들르기 의해 보성으로 가던 길에 그곳을 실제로 얻게 되었다. “송광사에서 투숙하고 날이 밝아 송산을 향해 출발하여 10여리를 가니 맑은 강과 흰돌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으나, 땅이 모두 척박하고 메말라 집을 짓고 살 수 없음이 한스러웠다. 군의 북쪽 60리쯤에 이르러 한 고개에 올라 내려다보니 산 아래에 매우 깨끗하고 한적한 마을이 있어 종자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우산촌(牛山村)이라 했다. ··· 나는 그곳을 다시 살펴보기 위해 임준과 박언장을 데리고 송산에서 60여리를 나란히 강가를 따라 걸어 우산에 이르렀다. 주변을 두루 살펴보니 과연 그 전에 꿈 속에서 본 곳이었다.”(위와 같은 곳.)
우산은 이 마을로 이사할 것을 결심하고 촌민(村民)으로부터 살만한 집터[可宅之地]를 어렵게 도득(圖得)한 뒤 이듬해에 가족을 이끌고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산수(山水) 간에 유유자적한 삶을 희구했던 우산의 꿈은 이루어졌다. 그는 이 때의 만족한 심정을 “사물에는 각각 주인이 있고[物各有主] 만남에는 각각 때가 있다[遇各有時]”고 술회했다. 우산 땅은 선생을 만나 빛을 발하고 선생은 그 땅의 주인이 되었다. 우산은 이 곳 시내 위에다 우산전사(牛山田舍)를 짓고[오희도(吳希道)의 「우산전사기발(牛山田舍記跋)」과 수은(睡隱) 강항(姜沆)의 「상량문(上樑文)」이 남아 있다.], 또 시내 동쪽에 단(壇)을 쌓아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 여덟 그루를 심어놓고 지팡이와 짚신차림으로 소요하며 풍진세상을 벗어난 생활을 즐겼던 것이다.
우산은 인간관계가 덧없는 이해타산으로 엉키고 뒤틀리는 것을 체험하면서 사람의 냄새가 싫어지자, 사색과 명상에 젖기 위해서 자연 속에서 호젓한 고독을 찾으려 했다. 사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권력의 세계를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동시적으로 가는지도 모른다. 우산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벗하면서 자연에 대한 감정을 노래했다.
왈천거사(曰川居士) 안방준은/
한평생 유유자적한 사람/
미친 듯이 노래하며 인간사를 벗어나/
소나무 아래에서 밝은 달 맑은 바람과 벗하네.[『은봉전서』Ⅰ, 시(詩), 「우음(偶吟)」, p.333 참조.]
4. 우산리(牛山里)의 유풍(遺風)
1) 빙월정(氷月亭)
자신의 경륜과 포부를 펴지 못하고 좌절과 실의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우산(牛山)에게 조그만 위안거리는 고기를 낚는 것이었다. 우산은 순호(蓴湖)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명월청풍(明月淸風)을 벗삼아 혼돈의 정국에서 초연히 벗어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우산은 낚시를 통해 세월만을 낚으려 했을까? 오히려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 물고기의 우둔함에서 인간의 삶의 지혜를 배우려 했던 것은 아닐까? 언젠가 막역한 친구 포저(浦渚) 조익(趙翼:1579-1655)에게 우산은 다음의 시를 지은 작자를 물었다.
“온종일 낚싯대 드리우고 푸른 물살을 굽어보니/ 盡日垂竿俯碧流
물고기 향기로운 먹이를 탐하여 덥석 바늘을 삼키네/ 魚貪芳餌競呑鉤
앞의 물고기 낚아 올리는데 뒤의 물고기도 올라오니/ 前魚登釣後魚進
한가로이 이끼 낀 바위에 기대어 한바탕 웃어본다.”/ 閑倚苔磯笑未休
[『은봉전서』1, 서(書), 「포저 조상공에게 보낸 편지[與浦渚趙相公]」, p.366. 盡日垂竿俯碧流, 魚貪芳餌竟呑鉤, 前魚登釣後魚進, 閒倚苔磯笑未休.]
물고기는 먹음직한 먹이[芳餌]를 보면 분별없이 달려들어 쉽게 걸려든다. 인간도 달콤한 벼슬자리[美官]에 쉽게 눈이 먼다. 물고기는 앞의 물고기가 걸려나가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뒤의 물고기도 걸려든다. 인간이라고 예외일까? 우산은 낚시를 하며 벼슬의 속성을 알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읽었다. 우산에게 낚시는 일종의 마음을 닦는 공부였던 셈이다.
우산이 낚시하던 곳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보성강 순호(蓴湖)의 우산리 쪽 돌벼랑 위이다. 절벽의 양 머리가 호수에 들어가 우산이 이곳을 낚시터로 삼고 유유자적하게 생활했는데 바로 여기를 ‘은봉조대(隱峰釣臺)’라고 한다. ‘은봉조대’의 유래는 우산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을 가장 숭배하여 두 분의 호에서 한 자씩을 따서 ‘은봉(隱峰)’이라 자호(自號)하였기 때문이다. 우산은 조대에서 낚시를 하면서 조대에 정자를 지어 아름다운 경치를 음미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삼기를 바랬다고 한다. 그 후 우산의 6대손 오봉(五峰) 안수록(安壽祿)이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1728-1807)의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은봉조대’라는 글자를 받아 상자 속에 감추어 보관해 왔다. 오봉은 선조를 숭모하여 그 뜻을 좇아 정자를 지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로부터 근 백년이 지나 1912년(임자년) 가을에 오봉의 5대손 후송(後松) 안종민(安鍾珉)이 조대의 앞 면에 ‘은봉조대’라는 큰 글자를 새겨놓고 친구들과 시를 지어 모아서 권축(卷軸)을 이루었다. 또 약간의 재산을 모아 문중의 자질(子姪)들과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과 뜻을 모아 정자를 지을 계책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애석하게 세상을 떠났다.
12년 후 후송의 큰 아들 안사순(安思淳)이 분연히 용단(勇斷)을 내어 어려운 살림을 돌보지 않고 사재(私財)로 정자를 짓기 시작하여 5개월이 걸려 빙월정(氷月亭)을 완성하였다. 이 정자가 완성되자 사순은 문중에 빙월정을 희사하고 관리를 위임하였다. ‘빙월정’이라 이름한 것은 우산의 성품이 빙호추월(氷壺秋月)과 같다는 옛 말을 따서 빙월정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한 유래와 함께 정자의 왼쪽에 빙고등(氷庫嶝)이 있고 호수의 서남 쪽에 반월산(半月山)이 있어 지명 또한 일치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빙월정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원근의 선비들은 우산 선생의 공적을 그 후손만이 책임질 수 없다 하고 의연금을 모집하여 계(契)를 조직하고 봄과 가을에 빙월정에서 회강(會講)하는 자금으로 삼았는데 그 계원수가 8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도 매년 음력 4월 12일엔 남도의 유림(儒林) 100여명이 참가하여 빙월정계안(氷月亭契案)에 따라 강회(講會)를 성대히 치루고 있다. 그러나 빙월정은 1981년 여름 홍수로 유실되어 1983년 9월 18일 복설되었으며, 그 뒤 주암호 건설로 인해 ‘은봉조대’는 수몰되고 빙월정만 마을의 바로 뒤 -옛 우산전사(牛山田舍) 터 뒤편- 동쪽 개미등에 이설되었다.
빙월정에는 단운(丹雲) 민병승(閔丙承)과 노탄(老灘) 송규헌(宋奎憲)이 적은 「빙월정기(氷月亭記)」와 후손 종민이 지은 「은봉조대차마애비운(隱峰釣臺次磨崖碑韻)」 등이 붙어 있다. 단운은 기문에서 “선생의 마음은 맑고 밝아 흠도 없고 찌꺼기도 없어 거의 정명도(程明道)의 형철(瑩澈)한 마음과 이연평(李延平)의 쇄락(灑落)한 마음과 같았다”고 적어 우산의 밝고 깨끗한 마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2) 목미암(木美庵)
우산이 은둔하면서 강학한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선비들은 먼 길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태고정(太古亭) 문희순(文希舜)․동계(東溪) 박춘장(朴春長)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우산은 제자들에게 공맹(孔孟)의 종지(宗旨)인 인의(仁義)를 숭상하도록 가르쳤으며, 환로(宦路)에 눈을 돌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우산의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들은 훗날 정묘․병자호란에 우산의 창의막하(倡義幕下)에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대부분 초야에 묻혀 은둔자정(隱遁自靖)하는 삶을 살다간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우산의 인의(仁義) 교육은 제자들의 심금(心琴)을 울렸고 제자들은 거기에 순순히 공명(共鳴)했던 것 같다.
우산의 증손인 매계처사(梅溪處士) 안후상(安後相:1665-1726)은 증조부가 우산리에 정착한 뒤 자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고 제자들에게 인의(仁義)를 숭상하도록 가르친 뜻을 이어받아, 가문의 전통과 규범을 살리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는 고을의 풍속을 교화시키기 위해 향약(鄕約)을 설치했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의창(義倉)을 설립했으며, 후손들의 학문 증진을 위해 학사(學舍)를 세웠다. 그리고 후에 학행(學行)으로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기도 했다. 목미암(木美庵)은 매계처사가 자손들의 독서할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1722년(임인년)에 마을 동쪽 300m 뒤 오봉산(五峰山) 아래에 지은 서재(書齋)이다. 이 서재는 1784(갑진년)에 직우당(職憂堂) 안창훈(安昌勳)이 중건했고, 그 뒤 47년이 지나 안명집(安命集) 등이 다시 보수했다. 경내의 넓이나 집의 기초를 보면 당초에 목미암은 상당히 규모가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목미암의 정원과 그 주위에는 250년 이상된 동백나무 한 그루와 써나무 30그루, 오래된 백일홍, 소나무 등이 산재해 있어 고풍(古風)을 자아내고 있다.
이 서재를 목미암(木美庵)이라 부른 것은 맹자(孟子)의 말에서 연유한다. 『맹자』 「고자상(告子上)」에 보면, “우산의 나무는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대국의 근교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도끼로 벌목해 가니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孟子曰 牛山之木 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伐之 可以爲美乎.]라고 했다. 우산(牛山)은 중국 제(齊)나라의 동남쪽에 있는 산 이름인데 이곳의 지명과 우연히 일치한다. 즉 “우산지목(牛山之木) 상미의(嘗美矣)”라는 구절에서 목미(木美)를 딴 것이며, 암(庵)이라 한 것은 당시 서당, 또는 글공부하기 위해 산간에 지은 집을 암이라 부르는 예가 많아서 그렇게 부른 것 같다.
목미암의 본채는 방과 부엌을 합해 네 칸 집이며, 바깥채는 세 칸 겹집으로 방 한 칸과 칸이 막혀 있지 않은 마루 두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익점신도비(文益漸神道碑)」를 썼던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1760-?)가 쓴 ‘목미암’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太極圖)」에 나오는 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의 그림이 새겨진 주련이 걸려 있어 다소 이채롭다. 또 목미암의 오른쪽에 1784년 매계처사의 맏아들 세림(世霖)이 지은 상관재(相觀齋)가 있고, 그 서재의 방을 수정와(守靜窩)라고 하였으며, 그 외에도 규모는 적은 것이나 점진문(漸進門)이라는 대문이 있다. 이 상관재와 수정와와 점진문은 모두 성담(性潭)이 짓고 쓴 현판들이다.
상관재의 기둥에는 우산(牛山)의 오륜시(五倫詩)가 주련으로 걸려 있어 공동체사회에서 반드시 구현되어야 할 인간의 다섯 가지 윤리규범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충만하고 공허한 우주 속에서/ 宇宙盈虛內
인간은 먹고 입으며 사는데/ 人生食與衣
오륜을 극진히 실천하지 않는다면/ 五倫如不盡
금수와 같이 되리라./ 禽獸是同歸)
부모는 하늘․땅과 같으니/ 父母如天地
누군들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리/ 誰無愛敬心
예전에 불효한 사람을 보았는데/ 嘗觀不孝者
그 생각을 끝내 알기 어려웠네./ 其意竟難尋
임금과 부모가 어찌 다르리/ 君父何嘗異
마땅히 충절을 다하는 신하가 되리라/ 當爲盡節臣
탕(湯)과 발(發)의 덕을 논하지 말게/ 無論湯發德
조벌(弔伐)도 또한 인(仁)은 아니라오.弔伐亦非仁
탕(湯)과 발(發) ; 탕(湯)은 중국 고대에 상(商)나라를 세운 황제. 하(夏)나라의 걸(桀)이 포학하여 민심을 잃자 군사를 일으켜 그를 타도함. 발(發)은 서주를 세운 황제의 이름. 상(商)나라 주(紂)의 실정을 틈타 공격하여 죽임.
조벌(弔伐)은 조민벌죄(弔民伐罪)의 준말로, 고통받는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포악한 군주의 죄를 밝혀 친다는 뜻이다. 탕발(湯發)은 신하의 입장에서 폭군인 걸주(桀紂)를 제거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켰다는 점에서 훌륭하지만, 그래도 신하가 무력으로 군주를 정벌한 점은 순수하고 온전한 인(仁)이 아니라는 견해이다.
도에 뜻을 두되 어디에서 얻을까/ 志道從何得
스승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네/ 非師不可成
만일 방몽(逄蒙)의 활 솜씨를 배운다면/ 如其學蒙射
영원히 악한 이름이 흐르리라./ 千載惡流名
『맹자』 「이루하(離婁下)」에 보면, 방몽(逄蒙)이라는 사람은 스승 예(羿)에게 활 쏘는 방법을 다 배우고 나서, 천하에 오직 예(羿)가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스승을 죽였다는 고사가 나온다.
거문고와 비파처럼 잘 화합하니/ 好合如琴瑟
가정을 친화하여 나라 사람을 교화하리/ 宜家化國人
일찍이 옛 부부를 보니/ 嘗觀古夫婦
서로 대접하여 손님처럼 공경하였네./ 相待敬如賓
한 몸이 형과 아우로 나뉘니/ 一體分兄弟
항상 우애하고 공손하여라/ 尋常友與恭
서로 화합해야지 서로 좋아하지 못하면/ 相猶不相好
세상에 죄가 용납하기 어려우리./ 於世罪難容
친구란 형제와 같아/ 友也如兄弟
경계하여 바루는 데도 방도가 있으니/ 箴規道亦存
난잡하고 경박한 사람과/ 紛紛輕薄子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豈敢與之言
이 밖에 다른 길이 없으니/ 此外無他道
여기에 간절한 생각을 두어라/ 丁寧念在玆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들으니/ 嘗聞古人語
성인이 되는 근본이요 기초라 하네. /作聖是根基
그리고 오봉(五峰)이 가려 뽑은 목미암팔경(木美庵八景)[안수록, 『오봉유고(五峰遺稿)』 권1, 시(詩), p.13후.]이 붙어 있는데, 이 시는 목미암을 둘러싼 우산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를 함축적이면서도 목가적(牧歌的)으로 노래한 것이다.
① 모악의 돌아가는 구름[茅嶽歸雲]
저녁에 날아드니 산비탈과 골짜기가 어둑하고/ 夕飛崖谷暗
아침에 흩어지니 나무와 수풀이 성글다/ 朝散樹林疎
바라보게. 삼복이 지난 후에/ 請看三伏後
강변의 비가 개이는 것을. / 江雨欲晴初
② 덕봉의 낙조[德峯落照]
쨍쨍 비치던 해가 어느덧 넘어가니/ 白日行將盡
층층 언덕엔 저녁 그림자가 외롭네/ 層邱夕影孤
석양의 햇볕이 문득 빛깔을 나투니/ 返照忽生色
석벽은 도리어 순호 속에 나부낀다./ 石壁飜蓴湖
③ 순호의 저녁 연기[蓴湖夕烟]
가느다란 바람이 석벽에 불어오고/ 微風來石壁
조대에는 석양이 찾아든다/ 釣臺夕陽低
물가 마을에 밥짓는 연기 다했으니/ 水村炊欲盡
슬며시 마을 수풀의 서쪽으로 나서보네. / 細出巷林西
④ 조동의 아침 안개[漕洞朝霧]
산마루가 붉은 해를 토해내니/ 山日紅將吐
맑은 냇가엔 아름다운 기운이 피어나네/ 晴川發氣佳
아침녘에 백척이나 뛰어올라/ 崇朝騰百尺
단장하고서 높은 산비탈에 솟아난다./ 粧點出高崖
⑤ 동강의 뱃놀이[桐江行舟]
새벽 물가에는 바람이 지나가고/ 曉渚隨風過
저녁 모래톱엔 달을 싣고 돌아온다/ 夕洲載月回
제격이야. 두세 명의 벗을 맞아들여/ 恰受人三兩
오고 가며 한 길을 트는 일이./ 往來一路開
⑥ 인연의 고기잡이[印淵打魚]
복숭아 꽃 핀 언덕에 그물을 치고/ 集網桃花岸
가랑비 맞으며 고기를 몬다/ 驅魚細雨濱
이끼 긴 바위에 앉아 한 번 바라본 뒤에/ 臨磯一觀後
회치며 구우니 더욱 화목하다네./ 膾炙更宜人
⑦ 산촌의 길쌈 등불[山村績燈]
등불 아래 푸른 치마입은 아낙네/ 燈下靑裙婦
실을 잣다가 밤이 깊어버렸네/ 理絲夜欲分
남은 불빛 멀리서 서로 비추더니/ 餘光遠相照
닭소리 들리는 새벽까지 반짝거린다./耿耿到鷄聞
⑧ 죽림의 돌아가는 새[竹林歸鳥]
석양녘에 바삐 마시고 쪼더니/ 斜陽飮啄足
대나무 우거진 마을로 날아가네/ 飛向竹多村,
텅빈 산마을엔 인간사도 적으니/ 空山少人事
시끄럽게 지저귀도록 내버려 둘 뿐./ 任爾作啾喧
또 상관재에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지은 「목미암에서 향음주례를 행한 뒤 감회를 읊다(木美庵行鄕飮酒禮感吟)」라는 시가 현판에 새겨져 있다.
소중화의 문물이 오랑캐로 변해가건만/ 小華文物化爲戎
이 고가에서는 아직도 예학을 공부한다네/ 猶有故家尙禮功
어진 주인 아름다운 손님 서로 겸양하는 곳/ 賢主嘉賓相讓地
이 예를 바라보면 쉬이 고을 풍속 변하리./ 觀瞻易易變鄕風
향음주례는 온 고을의 유생(儒生)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읍양(揖讓)을 지켜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이던 예절인데, 공자도 『예기(禮記)』 「향음주의(鄕飮酒義)」 편에서 “나는 향음주례를 보고 비로소 왕도(王道)를 실현하기가 쉬운 줄을 알았다”[孔子曰 吾觀於鄕 而知王道之易易也.]고 말 한 것으로 보아, 향촌사회의 예절이 잘 지켜짐에 따라 국가의 정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여 목미암에서는 매년 봄 좋은 날에 마을 사람들과 종족들이 모여 『여씨향약(呂氏鄕約)』[송나라 때 남전여씨(藍田呂氏)가 만든 향약(鄕約)인데, 우산리에는 이 여씨향약과 율곡의 해주향약(海州鄕約)을 참고하여 증손(增損)한 「문전면향약문(文田面鄕約文)」이 지금도 남아있다.]을 강론하고 향촌의 예절 향상과 인화(人和)와 상부상조를 도모하였다.
목미암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곳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서당으로 사용되어 왔고 우산리 주민 뿐만 아니라, 이 지역 일대 주민들이 이 곳에 모여 글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이 지방에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목미암의 방에 걸려 있는 「상관재학규(相觀齋學規)」를 보면 당시에 글공부하던 학자들의 엄격한 규모와 진지한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학규(學規)」는 순호(蓴湖) 안수린(安壽麟)이 짓고 오봉(五峰)이 썼는데, 사족(士族)과 서류(庶類)에 관계없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누구나 서재에 들어와 공부할 수 있도록 문호를 활짝 개방했을 뿐만 아니라, 새벽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학자들의 생활태도와 글 읽는 자세를 조목조목 밝혀 규칙화하고 있다. 즉 이 서재에 입학한 사람은 이 「학규」에 따라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성현의 글을 공부함으로써 「경사(警辭)」에 내 건 목표를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경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는 우리들은 힘껏 배우고 몸을 가다듬어, 서로 학문을 권장하고 경계하여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진보해야 한다.” [안수린, 『순호유고(蓴湖遺稿)』, 「상관재학규」, p.186. 凡我同塾, 力學律身, 互相勸戒, 日新又新.]
3) 송매정(松梅亭)
우산은 소뫼 마을에 정착하자마자 우산전사(牛山田舍)의 동쪽에 단(壇)을 쌓고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나무 여덟 그루를 심었다. 이를 ‘고송팔매(孤松八梅)’라 부른다. 우산은 ‘세한삼우(歲寒三友)’ 즉 송․죽․매(松竹梅) 중에서 소나무와 매화나무를 심고 어떤 역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굳은 지조, 즉 ‘세한조(歲寒操)’를 지키려 했다.(대나무를 심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곳에 이미 대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공자는 송백(松栢)에서 굳은 절개의 표상을 보았다면, 우산은 송매(松梅)에서 변치 않는 지조의 이미지를 배우려 했던 것 같다.
우산의 5대손 직우당(職憂堂) 안창훈(安昌勳:1748-1828)[효행(孝行)으로 조정에 천거되었으며 사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추증했다.]은 우산의 유의(遺意)를 받들어 1817년에 송매정(松梅亭)을 창건했다. 직우당의 맏아들 오봉(五峰) 안수록(安壽祿:1776-1857)[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의 제자.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참봉(參奉)이 되었다.]은 「송매정상량문(松梅亭上樑文)」에서 “송매정이라 편액을 달았으니 이는 곧 곧은 절개를 지키며 유유히 살아가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을 기리 전하려는 것”이라고 이 정자의 의미를 설명했다.우산을 추모하는 한편 후손의 면학을 위해 지은 정자가 바로 송매정이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 정자에서 오봉은 학자들을 맞아 학문을 강론했고 자손에게는 ‘시례지교(詩禮之敎)’를 전했다. 백어(伯魚)가 아버지 공자(孔子)에게서 시(詩)와 예(禮)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들은 고사에서 출발한 이 가르침은 이후 유교(儒敎) 가정의 전범(典範)으로 여겨졌다.
일명 ‘고송팔매정(孤松八梅亭)’․‘초당(草堂)’으로 불리면서, 학문을 강론하고 손님을 영접하는 곳으로 기능해 온 송매정은 마을의 뒷편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마을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어 민가(民家) 7호(戶)와 함께 수몰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후일 여순(麗順)사건 때 소실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으나 195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실은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이 지은 「송매정중건기(松梅亭重建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정자는 두 칸 겹집의 방과 마루로 형성되었으며 뜰에는 아담한 연못[小塘]이 있어 운치를 더해 준다. 또 40여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현판이 달려 있는데, 대표적인 현판으로는 성담(性潭)이 쓴 ‘은봉유장(隱峰遺庄)’과 ‘시례전가(詩禮傳家)’가 있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쓴 ‘매화동심(梅花同心), 괴석지기(怪石知己)’가 있으며,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쓴 주련이 붙어있어 고아(古雅)하면서도 유한(幽閑)한 멋을 자아낸다. 이중에서도 창암이 쓴 주련의 시는 송매정의 경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뛰는 잉어에게 지시하여 매화 비 속으로 가게 하고/ 指揮躍鯉行梅雨
깃든 까마귀에게 분부하여 대나무 숲을 지키게 하네./ 分付棲鴉護竹林
이슬이 연꽃 방에 떨어져 백 명의 자식을 품에 안고/ 露滴蓮房涵百子
연기가 솔 장막에 자욱하여 천 명의 손자를 기르네./ 煙深松幕長千孫
휘감아 도는 물은 푸른 담쟁이 족자를 펼친 것 같고/ 縈廻水展靑蘿幅
높이 솟은 산은 푸른 옥 비녀를 뽑는 듯 하네./ 突兀山抽碧玉簪
새들은 산 빛 속에서 이리저리 나르고/ 鳥去鳥來山色裏
꽃들은 물 그림자 가운데서 피고 지네./ 花開花落水影中
매화비 곧 매우(梅雨)는 매실이 익을 무렵에 오는 긴 장마를 말함. 매림(梅霖)이라고도 한다.
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후예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은 우산의 유적을 둘러보고 「차송매정운(次松梅亭韻)」이라는 시를 지었다.
은봉의 어진 후예들, 유지를 따라 정자를 짓고/ 隱峰賢裔克遵成
송매의 뜻을 본받아 학문으로 명성을 드날렸네/ 志取松梅以學鳴
얼어붙은 겨울의 혹독하고 굳센 기운이 없었다면/ 不有凍天嚴勁氣
어느 곳에서 참되고 정성스런 마음을 보랴/ 却於何處見眞誠
옛적에 편액을 걸던 깊은 뜻이 여기에 있어/ 伊昔揭扁深意在
오늘도 조상의 업을 이으니 더욱 빛이 발하네/ 如今肯構倍輝生
어두운 북녘 시커먼 구름이 온누리를 드리울 제/ 漠北頑雲垂八宇
이 정자와 더불어 세한의 맹세를 지키리라./ 斯亭同守歲寒盟
1898년 63세의 나이로 송매정을 찾은 연재는 7년 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반대하다가 끝내 음독 자결하여 불의(不義)에 저항하는 선비정신의 표상을 세웠다. 거세게 불어닥친 외세(外勢)의 어두운 문명, 조선 천지의 캄캄한 미래를 “어두운 북녘 시커먼 구름이 온누리를 드리울 제”라고 표현하고, “이 정자와 더불어 세한(歲寒)의 맹세를 지키리라”라고 다짐했던 연재―. 그의 지조(志操)와 절개(節槪)는 일찍이 이곳 송매정에서 배태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5. 우산리(소뫼 마을)를 떠나며
우산리(소뫼 마을)의 죽산안씨들은 고려조의 대유학자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혈통을 이은 정치가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하는 현달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우산(牛山)은 이곳에 낙향하여 정치의 일선에 직접 뛰어들기보다는, 은둔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실천적인 제자들을 양성하는 유교인(儒敎人)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어떤 거대한 이론을 창안하여 그 이론에 대한 관념적 유희를 즐기기를 거부하고, 유학의 본래 정신인 인의(仁義)에 입각하여 이를 철저히 역사적 삶 속에서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그에게 진실한 학문이란 거대한 이론이나 논리의 틀 속에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삶에 잔잔한 윤기와 활력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우산(牛山)의 후예들은 선조의 가르침대로 벼슬살이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의 길을 걷지 않고, 생활의 지혜와 인생의 여유로움, 심신의 수양과 자기완성, 자기성찰과 반성공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존을 지향하는 학문을 추구했다. 향약(鄕約)을 만들어 고을의 풍속을 순화하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서당(書堂)을 열어 교육을 진흥한 일련의 작업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리고 빙월정(氷月亭)과 목미암(木美庵), 송매정(松梅亭)은 바로 이러한 학문을 성취하는 공간이요 도량이었다.
유촌(儒村), 우산리에 남아있는 유적(遺蹟)에는 유교의 정신이 곳곳에 스며있다. 이러한 유적들을 피상적으로 대하지 않고 좀 더 탐구적인 자세로 면밀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색 바랜 글씨 한 줄에서도 유교의 전통과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철저하게 삶을 살아가고 조용히 인생의 의미를 향유했던 생활인의 태도와 유풍(遺風)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자료제공 ; 安東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