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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로 오래 전에 저의 답사기행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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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회보. 1993.08
시베리아 샤머니즘
-북방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박경하(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이번 답사는 구소련 독립국가연합(CIS)내의 야쿠트 사하 공화국 문화부의 초청으로 ‘93년 7월 22일부터 8월 4일까지 이루어졌다. 경희대 박물관장인 김태곤 교수가 단장이 되어 역사민속학회의 윤승용(종교학)․주강현(민속학)․이수자(구비전승)․강영경(역사학)․고부자(복식사) 등의 연구자, 서울지역의 무당과 무속음악 연주자, 임학선 교수(수원대)가 이끄는 전통무용단, 이혜자 교수(동남전문대)가 이끄는 다도팀 등 43명이 참가하였다.
불안한 출발
우여곡절 속에 모스크바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 43명이나 되어 예정된 아에로플로트 러시아비행기에 다 탈 수 없어서 2팀으로 나뉘었는데, 학부학생인 무용단원들이 공산국가에 간다는 불안감에서 동료들과 같은 비행기로 가야 한다고 울고불고 하는 북새통을 겪었다. 우리의 반공교육이 얼마나 철저하였는지를 그 소란에서 실감하게 되었다, 1,2팀 배치가 끝나자 그 다음은 무용단의 장고, 북 등의 공연도구 의상과 무속팀의 굿에 필요한 의상 제물들이 어찌나 많은지, 200Kg이나 중량 초과되어 짐을 풀고 다시 싸는 소동을 한바탕 벌였다. 이 소동에서 나는 이번 여행이 순탄치 않을 것이란 조짐을 느꼈는데 결국은 이 예언이 여행 내내 맞아 들어갔다. 나는 뒤의 전세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소련비행기들은 군용기를 개조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스튜어디스들은 예상대로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리 친절하지는 않았으나 조종사들의 비행술이 좋아서인지 그 고물비행기로 큰 흔들림 없이 12시간을 비행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인 야쿠츠크까지 2시간, 도합 6시간이면 갈 수 있으나, 일행의 대부분이 모스크바를 가보지 못했고 또 비행기 일정이 맞지 않아 모스크바를 경유하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무사히 도착하였으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일기불순으로 인해 예정에 없는 다른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우리를 맞아줄 가이드가 도착하지 않았다.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검색된 짐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특공대로 윤승용 씨가 공항을 답사하는 동안 기다리는 사람들의 불안감이란!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출구를 찾아 나가 고려인 안내원을 만나 우크라이나호텔에 도착하니 현지시간으로 새벽 3시였다. 이 호텔은 1935년에 지은 것이나 생각보다 안락하게 묵을 수 있었다.
다음날 모스크바 시내를 간단하게 관광하고 저녁에는 야쿠츠크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공항에 가보니 바로 어제 저녁 우리가 헤메던 공항이 아닌가. 그 공항이 국내선공항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출발시간이 지났는데도 탑승을 시켜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물어물어 온갖 유비통신까지 동원하여 알아보니 승객이 찰 때까지 안 떠난다는 것이다. 그 변방 야쿠트까지 갈 러시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기막힌 노릇이다. 로비에서 각자 가져온 비상식량을 꺼내 43명의 저녁을 해결해야만 했다. 완전 거지꼴이다. 주위의 러시아 사람들이 도리어 측은하게 보는 것 같다. 그래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우리 속담이 백 번 옳은 말이다. 만약 비행기에서 안주면 6시간 이상을 굶어야 한다. 드디어 예정시간에서 6시간 후에 출발하였다.
거기에도 동포가 살고 있었다
트랩을 나오자 북극 밑의 동토의 땅인 줄 알았는데 영상 40도 가까운 땡볕이었다.
문화부 직원과 우리 교포들이 환영해주었다. 이 먼 곳에 있는 동포들을 볼 때 정말 코끝이 찡해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 곳 한국인은 레나강가의 골드러시와 관계가 있다. 1910년대부터 이주가 시작되어 1925년에는 노다지를 찾아온 한국인이 3천명에 이르렀다. 1910년대 러시아혁명에도 많은 한국인이 참여하여 그곳의 한 연구자는 150여명의 한국인 혁명열사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는 한국계가 1000여명 있다. 이 2세들은 대부분 한국말을 잘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인들은 2세 교육에 열심이어서 박사학위 취득자가 3명이나 되고 대학병원, 지질연구소 등에서 일하고 비교적 잘사는 편이다. 북한벌목장에서 탈출하여 야쿠티아 여인과 결혼하여 사는 한 교포의 집에 가보았는데 노동자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연금을 받아 생활한다고 하는데 한 25여 평의 아파트로 컬러 TV, 냉장고 등을 갖추고 비교적 잘 사는 편이었다. 본인의 말로는 물가가 너무 뛰어 살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야쿠트는 천연가스가 풍부하여 더운물과 찬물을 지상파이프를 통하여 무상 공급해주고, 시내버스는 무료이다. 그러나 고기나 가죽제품은 비교적 싸고 흔하나 과일과 옷감이 귀하여 이런 것은 비싼 편이다. 대부분의 교포들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했으며 한국어교재를 보내주기를 원했다.(곧 야쿠트 대학에 경희대의 후원으로 한국어학과가 생길 예정이다.)
야쿠트의 자연 개관
시베리아는 러시아 동쪽을 가로막고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우랄산맥으로부터 베링 해협까지 뻗어간 북극해를 낀 거대한 땅덩어리이다. 그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북극해에 들어가는 길이가 5천km나 되는 레나강을 중심으로 동서시베리아로 나뉜다. 야쿠트 공화국은 레나강을 한 가운데 두고 있다. 총면적이 3백 3십만㎢로 한반도의 15배이나 인구는 1백 10만명에 불과하다. 10월부터 4월까지의 겨울은 평균 영하50도이고, 5월부터 9월까지의 여름은 영상 40도로 100여도 가까이 기온차이를 가지고 있다. 총강우량도 연 600㎜를 넘지 못하여 곡식 및 채식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야쿠트 사람들은 사냥꾼, 고기잡이, 순록방목 등의 수렵생활을 하였으나, 금, 석탄, 천연가스, 다이아몬드 등의 광물자원이 풍부해 요즈음은 이들 광물 채굴 등에 종사한다. 또한 건축이 특이하다. 여름에는 동토가 30㎝정도 녹아서 집이 내려앉게 되므로 1층의 중간 높이까지 받침기둥이 올라와 있다.
시베리아 ‘샤만’
도착 다음날은 문화센터에서 그곳 학자들의 학술심포지움이 있었다. 주로 샤마니즘이 공통주제가 되어 발표되었고 야쿠트와 한국의 샤만에 관한 것이었다. 샤머니즘이란 용어는 시베리아지역에서 무당을 샤만으로 불렀던데서 유래해 서구학자들에 의해 학술용어화한 것인데 실제 그들의 발음으로는 ‘사만’이었다. 우리가 무당이라는 것도 실은 몽골말이며 몽골에서는 여자무당을 ‘무당’이라 하였고, 남자무당을 ‘벅수’라고 불렀다. 신라왕의 칭호인 ‘차차웅’, ‘거서간’도 몽골말로 지배자를 뜻하는 말이며, 단지 한문을 차용한 것으로 한문으로는 아무 뜻이 없다(한국에 와 있는 몽골의 바이에르교수로부터 확인).
오후에는 한국과 야쿠트샤만의 공연이 각각 있었다. 한국측에서는 서울지역의 사만들의 공연이 있었는데, 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시베리아에 와서야 우리의 굿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굿 중에서 활을 들고 사냥하는 듯한 동작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곳 수렵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공산국가가 수립된 후 사만들의 굿행위가 금지되어 이곳에는 사만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멀리에서 에벵키족의 사만들이 와서 굿을 보여 주었다. 남자사만이 가죽으로 된 모자, 옷, 신발을 신고, 사슴가죽으로 된 북과 사슴뼈로 만든 북채를 들고, 난로에 불을 지핀 다음 북을 두드리며 화신과 대화를 나누며 점차 빠르게 두들기며 몸을 흔들거나 뛰면서 행한다. 사만은 옷의 뒤에 달려있는 쇠로 만든 해, 달, 곰, 사슴, 오리, 물고기 등을 매달고 엉덩이를 흔들어 쇠들이 부딪히는 요란한 금속성의 소리가 나며 이때 무당의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 무당이 물오리나 물고기 또는 동물로 변하여 천상계․수중계․지하계로 가서 인간이 원하는 내용을 직접 알아온다고 한다. 시베리아 무당이 다른 물질로 변하는 현상이 한국 중국 일본의 강신현상과는 다른 점이다. 또 중간에 담배를 피우기도 하는데, 담배를 피우는 것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고, 옛날에는 담배대신 가와크라는 풀을 말려서 피웠으며 머리가 빙빙돌아 술취한 것처럼 된다고 한다. 아마 환각상태를 촉진시키는 일을 하는 듯하다.
다음 날은 양국간의 전통무용, 음악 등의 공연이 있었다. 그들의 전통음악은 사만의 음악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현대 록그룹의 연주에서도 그러한 멜로디를 담고 있었다. 이번 11월에 야쿠트 문화부장관과 답사시 만났던 학자들이 학술심포지움 참가차 한국을 다녀 갔는데, 문화부장관이 우리의 상여소리가 자기들의 사만 음악과 같은 멜로디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레나강 답사
레나강은 5,000km로 남으로는 흑룡강 부근에서부터 북으로는 북극해로 연결되는 긴 강으로 강폭이 4km나 되어 마치 바다와 같다. 겨울에는 이 강이 얼어 얼음 위로 자동차가 달린다고 한다. 유람선은 아주 시설이 좋은 배로 상당히 빠르다. 레나강에는 그야말로 기암절벽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간 곳은 해발 100m의 Diring-yuryakh 유적지로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200만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라고 한다. 이곳에서 기원전의 유물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미국․캐나다․프랑스와 공동조사중에 있다. 이날 점심은 레나강에서 잡은 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먹었으나 고추장이 빠졌으니 그냥 탕이다.
소도마을 방문 - 장승․솟대․서낭당과 만남 -
다음날 다시 배를 타고 북으로2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국영농장이 있는 소도와 마야마을을 방문하였다. 배에서 내리니 발밑의 검은 것이 전부 석탄이다. ‘소도’는 신라시대의 소도와 같은 발음으로, 이 마을 중앙에 큰 신령스런 나무가 있어 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숭배의 대상이다. 손을 나무에게 향하여 뻗으면 정말 손에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이같은 위대한 큰나무라는 의미를 지닌 ‘아리마 마스’라 불리는 나무가 고장마다 수호신으로 숭앙되며, 여기에 화신(火神)인 ‘워드 이잇치’가 살고 있다고 믿어 마을사람들은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며 신수(神樹)에는 울긋불긋한 천조각을 걸어 놓는데, 이것은 신에게 바치는 예단으로서 여기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서낭당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거목숭배신앙인 것이다.
마을입구에 서있는 사람모양의 장승도 만날 수 있었다. Emeget라 하는데 대략 2m내외의 통나무에 사람의 얼굴과 몸뚱이를 조각해 마을입구에 세우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전날 박물관에서 본 장승사진은 우리나라 충남 청양의 장승과 똑같았다. 장승은 나무로 만들어져 얼마 못 가 없어지기 때문에 옛 장승의 사진을 전시한 것이니, 시베리아 장승의 원형은 도리어 우리나라에 있다 할 것이다.
큰나무 옆에는 오리를 나무로 깎아 장대 끝에 세운 솟대를 볼 수 있다. 오리는 인간세계와 천상을 오가는 신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집에 들어가면 항상 입구에는 금줄이 쳐져 있고, 전통가옥의 경우 방 가운데는 난로(게위로크흐)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워드 이잇치(아르곤)’라는 화신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신에 제사를 지낼 때 30cm가량의 나무주걱인 ‘우자하르야크흐’를 던져 이것이 바깥쪽으로 향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하여 던진다. 이는 우리나라 무속에 객귀를 물리칠 때 식칼의 끝이 문밖으로 향해 떨어져야 객귀가 나간 것으로 믿어 칼끝이 문밖을 향해 떨어질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밖에 고시레풍습이나 주인의 유무를 알려주는 제주도 정낭도 ‘아한’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이 마을에서는 50여명의 무용단이 우리에게 전통무용을 보여주었다. 이 무용단은 유럽에 순회공연도 하였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6월에는 만물이 생동하는 것을 축하하는 ‘오롱코’라는 축제를 벌리는데, 이 때 커다란 열려진 들판에 민족의상을 입고 넓고 둥글게 춤을 춘다. 우리에게 보여준 춤이 이런 종류의 것인 것 같다.
사하공화국의 독립 열기
야쿠트라는 이름은 러시아에서 정해준 이름이고 원래는 ‘사하’였다. 시베리아는 17세기 이후 제정러시아에 의해 정복을 당하였고,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의 건설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의 대대적 이주로 토착인들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시베리아에는 사하족․몽고족․퉁구스족․타타르족․부리야트족․만주족 등이 주류를 이룬다. 예니세이강에서 레나강에 이르는 광대한 곳곳에는 퉁구스족이, 몽골 쪽에는 몽골족이, 바이칼 호수 주변에는 부리야트족이, 아무르강 주변에는 만주족이 산다. 현 사하공화국의 절반이 러시아인이고 나머지가 여러 종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자원을 개발하여 경제의 바탕으로 삼았지만, 반면에 토착민들은 그늘에 가려 저소득의 악순환을 겪고 있는 중이다. 소연방의 해체이후 시베리아의 비러시아계들은 민족전통을 중시하면서 민족문화 부활이라는 과제를 풀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스탈린시대에 잃어버린 자신의 언어를 학교에서 러시아어와 함께 공식적으로 부활시켜가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이다. 사하정부의 이번 초청도 러시아로부터의 정치 경제적 독립과 민족문화의 부활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현지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동정은 사하신문에 매일같이 일면 톱기사로 사진과 함께 실렸다.
사하공화국의 진정한 독립과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백야의 밤
시베리아의 여름날 백야는 정말 희고도 밝고 길기만 하여 페테르스부르크(레닌그라드)의 백야는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의 새벽녘 같은 날씨가 오후 7시경부터 새벽 4시까지 이어진다. 이에 익숙지 못한 우리는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이에 한수를 거든 사람들이 사하의 여인들이었다. 사하사람들은 작은 키, 검은 눈, 황색피부 등, 우리와 외견은 똑같다. 그래서 친근감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외부 손님들에게 친절함을 갖춘 민족이어선지 학술대회에서 토론자로 참가한 몇 명의 여자 연구자들이 우리 숙소에까지 와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안나․올가․엘비라 예쁜 이름이다. 역시 시베리아 여인들의 다혈질적인 성격과 주량이 대단해 우리가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들과의 대화에서 러시아인들의 토착민에 대한 차별, 사하의 장래, 사하인들의 생활 풍습 등을 진솔하게 들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물론 우리의 아리랑과 사하의 노래와 춤이 빠질 수 없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음치 소리를 듣는 나도 여기에서는 ‘굿싱어’가 되었으니!
어느새 8일간의 짧은 체류기간에 정이 들어 야쿠츠크공항에서의 이별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다시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해 이번에는 저번의 경험이 있어 세련된 솜씨로 나왔으나, 이번에는 안내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해져 각자는 기다리면 나오겠지 하며 여유를 부리며 근처의 자유상점에서 쇼핑을 하기도 하였다. 4시간 뒤에 안내인이 도착하였다. 야쿠트까지의 4시간의 시차가 문제가 된 것이다.
모스크바는 해만 떨어지면 치안부재로 돌아다닐 수 없는 것이 가장 불편했다. 예전에는 생필품이 부족하여 줄을 늘어선다고 들었으나 지금은 해외에서 수입을 많이 해오고, 우리나라의 길거리 토큰 가게만한 개인이 경영하는 자유상점들이 많아서인지 물산이 풍부하였으나, 내국인들은 값이 너무 비싸 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여행 중 화폐개혁이 있어 ‘93년 발행화폐만 사용하게 되어 은행에 돈이 없어 환전을 못하는 사태도 겪었다. 매일 치솟는 물가에 시민들은 본업 외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고 한다. 대부분의 큰 건물이나 박물관들은 50년대에 지은 것이며 모스크바는 60년대 초반에 이미 성장이 정지된 도시 같았다. 모스크바하면 으레 크레믈린 광장을 연상하는데 그 무시무시하여 보이던 광장은 정말 어느 조그만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만 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옐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으나 대부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치안부재, 중앙의 통제력 상실, 민생고 해결 등의 많은 난제로 요술방망이를 가진 지도자가 아니고서는 이 나라를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귀국후 반옐친 사건으로 얼마전 우리가 묵었던 우크라이나호텔이 진압군 숙소가 되고, 바로 건너편 의사당이 폭격을 당하고, 레닌의 시신이 크레믈린 광장에서 사라진다는 소식에 국외자인 내가 착잡한 기분이었다.
마지막 소동
한 무당할머니가 한 마지막 날 큰 일이 한 번 더 남았다는 예언이 들어맞고 말았다. 비행기표는 출발 72시간 전에 예약을 확인하여야 하나 여행사의 실수로 또 일행이 같은 비행기로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5명이 뒷 비행기에 타야했는데 뒤에 떨어지게 된 5명이 울고불고 같이 가야한다고 난리를 쳤다. 그동안 너무 고생을 했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오후 관광을 포기하고 대사관에 전화하고, 여행사에 따졌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뒷 비행기가 전세비행기라 앞의 38명이 취소를 하고 뒷 비행기로 겨우 귀국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힘든 여행은 정말 처음이었다. 다시는 러시아 땅에 발도 디디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나, 사하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와 인정에 그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어지며 이번에는 영하 50도의 혹한에 도전해 보고 싶은 충동이 가끔씩 든다, “산천은 의구하되 사람은 간 데 없다.”란 우리 시조 구절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 가슴에는 인정만이 남는 모양이다.
첫댓글 교수님께서는 추억이 많으신 분이시네요. 마음의 재산이 쌓이고 쌓여서 남들보다 두배 세배의 인생을 사시는 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