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한의원을 넘어
김성환 장로의 아들 김기진(金基振, 1927~1996) 장로는 자(字)가 교원(敎元)으로
1927년 경북 예천군 감천면 유리(유동) 390번지에서
김성환 장로와 송태령 권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기진 장로는 훌륭한 부친 아래서 엄한 가정교육을 통해
가풍을 이어받아가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유동에서 감천신상(新常)소학교(감천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도 잘했으며 친구들을 잘 사귀는 편이었다.
- 김기진 장로. 그는 인심이 후하고 넉넉한 사람이었다. -
당시 부친인 이당이 김기진 장로를 안고 학교에 다니곤 하였다.
특히 그는 얌전하고 인성이 남달랐다.
김장로는 1950년 4월 20일 안동 김씨 김선녀(金仙女, 1933~1999)와 혼인을 한 후 가정을 꾸렸다.
김기진 장로는 한동안 뜻한 바 있어 해방 후에 영주경찰서에 근무하면서
1952년 태백산 지구 경찰 사령부에 편입되어 통신망 구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친구들과 함께 고향 성곡에서. 뒤쪽 우측 첫번째가 김기진 장로-
그 후 그는 경찰서에 그직에 솔선수범하다가 1957년 퇴임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성곡에서 일꾼을 거느리고 농사를 지었다.
1979년 반구에 와서 부친을 도와 한의원을 운영하였다.
김장로는 부친곁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며 작두로 약을 썰기도 하고
부친이 화재(처방)를 내주면 약을 달아 주곤했다.
1967년 7월에는 대한석탄공사사무소로부터 산림녹화와 애림분야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장을 받는가 하면 1987년에는
영풍군 정화추진협의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면서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지역사회 활동을 통해 봉사와 지역발전에 일조했다.
-영주 경찰서 시절의 김기진 장로. 뒷줄 우측에서 두번째-
김기진 장로는 한의원을 부친과 함께 경영하면서
환자들에게 줄 한약을 달아보지도 않고 듬뿍듬뿍 후하게 손에 쥐여
주어서 넉넉하고 후덕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부지런히 부친을 도왔으며 물질에 대한 애착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남들에게 베풀고 즐거워하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것을 자신의 즐거움처럼 여겼던 사람이다.
가끔“덕호를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명의(名醫)로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되뇌이곤 했다.
-대한침구협회 일본방문시 아들 대호(맨끝)과 김기진장로(두번째)-
또한 그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안됩니다, 못합니다”라는 말은
평생을 두고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고 살았다.
어쩌면 부친 김성환 장로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 삶을 배웠던것인 지도 모른다.
그는 부친을 본받아 효성이 지극했는데 육중한 부친을 항상 자신이
목욕시켜주는 등 부친을 섬기는데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부친과 함께 장수면 소재지인 반구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
-제주도 여행때 김기진 장로 와 부인 김선녀 권사-
결국 김기진 장로는 부친을 간호하다가 어깨인대가 파열되어
2차수술을 받고 3차 수술중 마취제의 과다로 전신에 신경장애가 발생, 유명을 달리하였다.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효를 다하다 이렇게 되었으니 여한이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고 해 주위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으며,
“네고향은 네가 사랑해라, 의료와 복지사업을
꼭 고향에서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가도록 하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태백산 지구 통신망 구축 유공 표창장-
생의 마지막 1년은 못다한 효를 다하기 위해
김 이사장이 직접 서울 자신의 병원에서 정성을 다해 치료했다.
임종이 가까워였을 때도 간병인 등 주위의 사람들을 배려하고
전도도 해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사람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천국의 소망속에
여유있는 미소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김기진 장로는 부친 곁에서 항상 그의 삶을 배우고 실천했던 것 같다. 우측이 김기진 장로-
임종순간 하늘에서 무지개가 그의 몸위에 떠 있는 것을 주위의 증인들이 목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