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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락(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
와이오밍 주에서 태어난 폴락의 유년기는 험난했다. 폴락의 아버지는 다섯 형제를 버린 채 가출해버리고 어머니는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아이들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폴락은 로스앤젤레스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중도에 퇴학 처분을 받고, 1930년에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그림을 공부한다. 그러나 경제공황 와중에서 뉴욕생활은 고통스러웠고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며 알코올에 의존하여 세월을 보내야했다. 2차 대전 중 뉴욕에 망명중인 초현실주의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동기술법을 접한 플록은 그것에 깊게 매료되는데 그의 작업은 신화와 상징,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안의 회화기법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구스타프 융의 정신분석법에서도 영향을 받은 폴록은 점점 더 과격한 방식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1945년 롱아일랜드로 이주한 폴록은 헛간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마룻바닥에 편 화포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작업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초기에 냉랭한 반응을 받기도하지만 <라이프>誌와의 인터뷰 이후 빠른 속도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것은 작가의 제작 행위를 직접 화포에 기록하는 것이라 하여 '액션 페인팅'이라 불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패권국으로 부상한 미국으로서는 그에 어울리는 문화예술의 위상이 필요했고 많은 유럽작가들의 망명을 통해 뉴욕은 일순간 현대미술의 메카로 탈바꿈하게 되자 그 꿈을 이루게 된다. 더불어 미국의 평론가와 화상들은 미국을 대표할 현대작가들이 필요했는데 칼더, 폴락 등이 그러한 필요에 잘 어울리는 작가였을 것이다.
-1941년 리 크레이즈너를 만남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의 화랑에서 첫 개인전 -1945년 리 크레이즈너와 결혼 롱아일랜드로 이주, 헛간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뿌리기 회화를 제작. -1947년 베티 파슨스 화랑 전속 -1951~52 블랙페인팅. 음주와 신경쇠약 등으로 병원에 입원, 심리 치료 -1952년 시드니 제니스 화랑 전속 -1956년 8월 11일 급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사망.
<작업실의 잭슨 폴락>
<주요작품> 1953 심연
1941 무제
1943 암 늑대 She wolf 대공황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토마스 하트 벤튼, 호세 클레멘테, 오로츠코, 데이빗 알파로 시퀘이로스, 피카소 등의 영향을 소화해 간다. 이작품은 이듬해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의해 구입된다.
1946 열쇠
1947 대성당
1949 No.8
1950 No1
1952.blue poles. 1973년 200만불
1953 부활절과 토템 |
폴락과 리 크레이즈너
어느 날 형의 집에 얹혀살며 술에 찌든 생활을 하고 있던 잭슨 폴락의 작업실에 리 크레이즈너가 찾아온다. 그녀는 폴락의 예술적 끼를 감지하고 그와 동거에 들어가 헌신적으로 도와준다. 그녀의 도움으로 페기 구겐하임에서 1943년 첫 개인전을 열지만 전시회는 성공하지 못하고 폴락은 또다시 알콜에 탐닉하며 방황한다. 크레이즈너는 이러한 폴락과 결혼을 하고 함께 롱 아일랜드로 이사, 정착하여 그가 작업에 열중하도록 한다.
이곳에서 폴락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드리핑 기법의 작품들을 제작하지만 평단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던 중 1949년, <라이프>지와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이 인터뷰 이후 잭슨 폴락은 갑자기 뉴욕 화단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성공의 한가운데에서도 크레이즈너는 폴락의 끊임없는 창작을 요구하고 이에 지친 폴락은 후배 화가인 루스 크릭만에게 마음이 기운다. 결국 둘의 불륜을 참지 못한 크레이즈너가 폴락을 떠나고 그녀가 떠난 후에야 폴락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차지하던 무게를 느낀다. 크레이즈너의 가출과 알콜은 그의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고 숱한 기행과 자기번민에 괴로워하던 폴락은 1956년 만취상태에서 애인과 친구들을 태운 채 시속 120Km로 차를 몰다 사망한다. 폴락이 사망한 후 아내 크레이즈너는 그의 장례를 치루고 모든 작품을 박물관에 기증한다. 이후 크레이즈너는 자신의 작업에 몰두한다.
우리에게 <에덴의 동쪽>으로 알려진 제임스 딘과 함께 그의 삶과 죽음은 미국인들에게 예술가에 대한 하나의 환타지를 만들어 준 것 같다. 그의 작품 No5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 4000만불에 판매되었다.
잭슨 폴락
미국의 영향력 있는 화가였으며 추상 표현주의 운동을 이끈 인물. 1945년 Lee Krasner와 결혼. 생전에 상당한 명성을 누렸지만 악평도 많았다. 폴락은 세상과 담을 쌓은 사람이라고 알려졌지만, 변덕스러운 성격이었으며, 사는 동안 알콜중독과 싸웠다. 44세에 음주와 관련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1956년 12월 뉴욕의 Museum of Modern Art(MoMA)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며, 1967년에는 그보다 더 큰 규모의 회고전이 같은 곳에서 열렸다. 최근에는 1998년과 1999년에 Moma와 런던의 Tate Modern Art Gallery 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2000년에 에드 해리스가 감독, 주연한 영화 폴락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다.
<초기의 삶>
1912년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출생. 부친은 농부였으며, 나중에 정부의 토지 측량기사 생활을 한다. 폴락은 성장기를 아리조나와 치코, 캘리포니아를 보낸다. 고등학교는 로스엔젤레스의 Manual Arts High School에서 공부했다. 어린 시절 측량기사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그는 미국 인디언 문화를 경험했다. 1930년 형인 찰스를 따라 뉴욕으로 가는데, 여기에서 두 형제는 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의 Thomas Hart Benton에게 배운다. 벤튼의 미국 농촌의 주제는 폴락의 초기 작품에 잠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벤튼의 리드믹한 물감 사용과 강한 독립성은 훨씬 더 오랜 기간 영향으로 남는다. 1935년부터 1943년까지 폴락은 WPA Federal Art Project의 작업을 한다.
<Springs 기간과 독특한 기법>
1945년 10월 폴락은 또 다른 중요한 미국 화가인 Lee Krasner와 결혼하고 11월 그들은 뉴욕의 지금은 Pollock-Krasner House and Studio in Springs on Long Island라고 알려진 곳으로 이사한다. 페기 구겐하임은 그들에게 목조건물을 낮은 가격에 빌려준다. 폴락은 집 근처에 딸린 헛간을 작업실로 개조한다. 폴락이 이리저리 흘러내리는 물감을 사용하는 기법을 완성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폴락이 이 묽은 물감을 소개받은 것은 1936년이었다. 뉴욕 시에서 David Alfaro Siqueiros(유명한 벽화 작가)가 개최한 실험적인 워크숍에서였다. 폴락은 나중에 흐르는 물감의 여러 기법 가운데 하나인 흐르는 물감을 1940년대 초에 캔버스에 사용하였다. "Male and Female"과 "Composition with Pouring 1"과 같은 작품이 있다. 스프링스로 옮긴 후에 폴락은 작업실 바닥에 캔버스를 깔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나중에 "드립(drip)"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발전시킨다. 이 트립 기법은 유동성이 강한 낮은 점성의 물감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폴락은 화가들이 사용하는 물감 대신에 당시 새로 나온 매질(媒質, medium)인 합성수지 물감으로 바꾼다. 폴락은 화가들이 사용하는 물감 대신 자신이 집에서 만든 물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필요에 의한 자연적인 탄생"이라고 했다. 그는 물감을 칠하기 위해 단단하게 만든 붓과 막대, 심지어는 주사기까지 사용했다. 폴락이 사용한 물감을 붓거나 흘리는 기법은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의 기원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이 기법으로 폴락은 예술 창작의 보다 직접적인 수단을 얻을 수 있었다. 이때 직접적인 수단이란 말그대로 그가 택한 도구에서 캔버스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캔버스를 세워서 그림을 그리는 관슴에 도전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방향에서 캔버스를 보고 물감을 칠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그는 구상적인 재현으로부터 멀어졌고, 이젤과 붓을 사용하는 서양 전통에 도전했다. 그는 또한 물감을 칠하기 위해 그의 몸 전체를 사용했기 때문에 손과 손목만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도 멀어졌다. 1956년 타임지는 잭슨 폴락의 독특한 회화 스타일의 결과로소 그에게 "Jack the Dripper"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나의 회화는 이젤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나는 캔버스 천을 단단한 벽에 붙이거나 바닥에 놓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단단한 표면에서 오는 저항을 필요로 한다. 바닥에서 작업할 때가 더 편하다. 그림의 더 많은 부분들과 더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든다. 이 방법으로 그림 주위를 걸어다닐 수 있고, 캔버스의 네 면에서 작업할 수 있고 그림 속에서 작업할 수 있다."
"나는 이젤과 팔레트, 붓과 같은 화가들이 사용하는 도구에서 벗어나 더 나아갔다. 막대기, 흙손, 칼 그리고 흘러내리는 물감이나 모래를 사용한 두터운 임파스토, 깨어진 유리 혹은 다른 외국의 재료 등을 덧붙이는 것이 좋다."
"내가 그림 속에 들어가 있을 때에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나는 작업이 다 끝난 것은 알게 되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 돌아온 다음이다. 나는 이미지를 고친다던지 파괴한다던지 하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림은 그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이미지들이 드러나도록 한다. 그 결과가 엉망진창이 되면 나는 그림과의 연결을 읽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림에는 순순한 조화가 있고, 그림과 나는 상호 교감을 하며, 그림이 잘 나오게 된다."
폴락은 1940년대에 인디안이 모래그림 그리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의 드리핑 기법에 영향을 준 또 하나는 멕시코 벽화 화가들과 초현실주의자들의 오토마티즘이다. 폴락은 "우연한 일"이 아니록 했다. 그는 늘 특정 부분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기법은 그의 신체 움직임과 결합된다. 그는 점성이 있는 물감의 흐름과 중력, 물감이 캔버스에 흡수되는 것을 조절하였다. 그것은 조절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혼합된 것이다. 물감을 던지고, 흘리고, 붓고, 흩뿌리면서 그는 캔버스 주위를 활기차게 움직였고 거의 춤을 추듯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을 보게 될 때까지는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Taylor, Micolich and Jonas의 연구에서 폴락의 기법을 검토한 결과 어떤 작품들은 수학적인 프랙탈의 특성을 보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은 이 작품들이 폴락의 경력에서 시간이 갈 수록 더 프랙탈에 가까워진다고 주장한다. 이 저자들은 심지어 폴록이 자연의 카오스적인 움직임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수학적인 카오스의 표상을 그려내려고 시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것이 카오스 이론이 주장되기 10여 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전문가들은 폴락이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깊이를 자신의 회화에 부여하기 위해 그 시대에 잘 알려진 이론들을 모방했을리즌 없다고 주장한다.
1950년, Hans Namuth라는 젊은 사진가가 작업하고 있는 폴락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고 싶어했다. 폴락은 특별히 사진을 찍을 동안 새로운 그림을 시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Namuth가 도착했을 때 폴락은 그 그림을 이미 끝마쳤다고 용서를 구했다. Namuth가 작업실에 들어갔을 때의 일에 대한 기록.
"물감이 흘르는 젖은 캔버스가 바닥을 온통 덮고 있었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 폴락은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예상밖으로 물감통과 회화 붓을 들고서 캔버스 주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작품이 아직 덜 끝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아다. 그의 움직임은 처음에는 느렸지만 점차 빨라져서 그가 캔버스에 검은색과 흰색, 녹이 슨 것 같은 색의 물감을 칠할 때에는 춤추는 것 같이 되었다. 그는 Lee와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었다. 그는 카메라를 보지도 않았고 셔터소리도 듣지 못했다. 촬영은 그가 작업하는 동안 계속되었고, 아마 30분정도 였다. 그동안 내내 폴락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러한 움직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마침내 그는 '다 끝났다'라고 말했다."
"폴락의 작품 가운데 우수한 작품을 보면 그의 올오버 라인(all-over line)은 positive 혹은 negative 영역을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는 캔버스의 한 부분이 형태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추상적인 것이건 구상적인 것이건 캔버스가 바탕이 되는 어떤 부분 위로도 형태로는 읽히지 않는다. 폴록의 선에는 안이나 밖이 없다. 혹은 선이 움직이는 공간도 없다. 폴락은 세상 속의 대상들을 표상하는 기능으로서의 선에서 벗어났으며 캔버스 표면 위에 추상적이건 구상적이건 형상 혹은 형태를 묘사하거나 윤곽을 만드는 선의 역할에서도 벗어났다. "
<1950년대와 그 이후>
폴락의 가장 유명한 회화는 1947년과 1950년 사이의 "드립 기간"에 제작되었다. 1949년 8월 8일 라이프지에 "그는 생존해 있는 가장 위대한 미국 화가인가?"라는 기사가 실린 후에 갑자기 대중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의 명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폴락은 갑자기 드립 스타일을 포기한다.
1951년 이후에 폴락의 작품은 색채는 더 어두워지고, 초벌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검은 색으로 칠한 작품들을 제작한다. 그 다음으로 색채를 다시 사용하고 그는 구상적인 요소를 재도입한다. 이 기간 동안 폴락은 보다 상업적인 화랑으로 옮기게 되는데 여기에서 많은 소장가들의 그의 새로운 그림을 요구한다. 이러한 압력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고 개인적인 분노도 함께, 그의 알콜중독은 심해진다.
<작품에 번호를 붙이기 시작>(이전에는 제목을 붙였다)
폴락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재현적인 요소를 찾는 것을 그만두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제목을 포기하고 대신에 그림의 번호를 붙이기 시작했다. 폴락은 "...수동적으로 보고 그림이 전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받아들여라. 어떤 주제를 끌어들이거나 혹은 그들이 찾고자 하는 미리인식된 생각을 가져오지 마라"라고 했다. 폴록의 아내 리 크레스너는 폴락이 "그의 그림에 흔히들 붙이는 제목을 붙이곤 했지만... 이제 그는 단지 숫자만을 붙인다. 숫자는 중성적이다. 숫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림을 그림, 즉 순수한 회화로 보게 한다."고 말했다.
<죽음>
폴락은 1955년에는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사는 동안 내내 알콜중독과 싸운 끝에 폴락의 경력은 1956년 8월 11일 밤 10시 15분에 갑자기 끝났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Oldsmobile 컨버터블을 운전하다가 충돌사고로 죽는다. 목격자 중 한 사람인 Edith Metzger 역시 사고로 죽었다. 사고 장소는 폴락의 집에서 불과 1.6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는 곳이었다. 또 다른 목격자는 폴락의 여자친구 Ruth Kligman이었는데 그녀는 목숨을 건졌다. 폴락이 44세로 죽은 다음에 그의 아내 리 크레스너는 폴락의 재산을 관리하였으며, 미술 세계의 흐름이 바뀌어도 폴락의 명성이 높게 유지되도록 노력했다. 이 두 사람은 Springs의 Green River Cemetry에 묻혀있으며 커다란 표석은 폴락의 무덤을 작은 표석은 크레스너의 무덤을 표시하고 있다.
<전설>
폴록-크레스커 하우스 앤 스튜디오(Pollock-Krasner House and Studio)는 Stony Brook의 뉴욕 주립대학의 비영리 단체인 Stony Brook 재단에서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5월부터 10월까지는 이 집과 스튜디오의 정기 관광이 운영된다. 이와는 별도 단체인 Pollock-Krasner Foundation은 1985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폴락과 그의 미망인인 리 크레스너의 공식적인 재산을 관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크레스너의 유지에 따라 "재정적인 지원을 원하는 예술가 개인들을 지원한다". 폴락-크레스커 재단의 미국 저작권 대행자는 Artists Rights Society(ARS)이다.
<팝 문화와 뉴스에서의 폴락>
1960년, Ornette Coleman의 앨범 "Free Jazz"는 폴락의 그림을 앨범 커버로 사용했다. 1973년 <블루 폴스>(Blue Poles, no. 11, 1952)이 National Gallery of Austrailia의 공무원 Whitlam에 의해 구입된다. 가격은 미화 2백만 달러, 당시 호주 달러로 1백 30십만 달러였다). 이때 이 가격은 회화의 가격으로는 가장 비싼 값이었다. 당시의 보수적인 환경에서 이 구매는 정치적 스캔달을 일으켰고, 미디어에서도 크게 다루었다. 이 회화는 2006년 현재 이 갤러리에서 가장 유명한 전시 가운데 하나이며 그 가격은 1억 달러에서 1억 5천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1998년 뉴욕 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중심이 되는 작품이었고, 판매된 후에 처음으로 미국에 돌아왔었다.
2000년, 폴락이라는 전기 영화가 처음 상연되었다. 리 크레스너를 연기한 Marcia Gay Harden이 최우수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에드 해리스가 폴락을 연기하고 직접 감독한 프로젝트였다. 그는 아카데미 최우수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2003년 24점의 폴락적인 회화와 드로잉이 뉴욕 위스콘신의 벽장에서 발견되었다. 이 작품들이 폴락의 진품이인가에 대해서 결론이 나지 않는 논쟁이 계속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이 회화들의 진위를 가리는 데에 프렉탈이 사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했다. 종합적인 안료에 대한 분석은 몇몇 안료가 1980년대까지는 특허로 출원되지 않은 것이었음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폴락이 그러한 물감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2006년 11월 폴락의 <No. 5, 1948>이 익명의 개인 구매자에게 1억 4천만 달어에 판매되었을 때 이 작품은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회화가 되었다.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은 영화와 음악 프로듀서인 David Geffen이었다. 현재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독일 사업가이며 예술품 소장가라는 소문이 있다.
2006년 <Who the Fuck is Jackson Pollock?>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Teri Horton이라는 트럭 운전사가 중심인물이다. 1992년 그는 캘리포니아의 중고품 할인매점에서 5달러에 추상 회화 한점을 구입했다. 이 작품은 아마도 폴락의 잃어버린 작품일 것이며 지금은 수백만 달러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진위여부는 아직도 논쟁중이다.
<미국 원주민 예술과의 관계>
폴락은 "나는 이 방법이 그 주위를 돌아다닐 수 있고 네 면에서 작업할 수 있으며, 말 그대로 그림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그림과 더 가깝게 느껴지고 그림의 일부가 된 듯 느낀다. 이것은 서부의 인디안 모래 그림의 방법에 가깝다."라고 했다.
<비평적 논쟁>
폴락의 작품은 항상 극단적인 비평가들이 있으며, 많은 중요한 비평적 논쟁의 초점이었다. 1952년 Art News에 실린 해롤드 로젠버그의 유명한 평문에서 "액션 페인팅"이라는 말이 만들어졌고, 그는 "캔버스 위에서 그려진 것은 그림이 아니라 event이다. 그 중요한 순간은 '그리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그리려는 순간에 온다. 캔버스 위의 행위는 가치, 즉 정치적, 미학적, 도덕적 가치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행위이다"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로젠버그의 "액션 페인팅"이라는 패러다임이 폴락에 모델을 둔 것이라고 추정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폴락의 작품에 대한 형식주의적인 배경을 제공했다. 그린버그의 미술사적 시각에서는 폴락의 회화가 형식에서의 진보적인 순수화와 역사적 맥락의 제거로서 잘 맞아떨어진다. 그러므로 그는 폴락의 작품이 큐비즘과 세잔느를 거쳐서 마네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 미술의 전토의 정점에 도달한 당시의 가장 우수한 회화로 보았다.
폴락 작품의 사후 전시회 몇 번은 Congress for Cultural Freedom이 후원하였다. 이 조직은 CIA가 후원하는 미국의 문화와 가치를 증진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Eva Cockcroft가 가장 유명한 어떤 좌익 학자들은 미국 정부와 부유한 엘리트가 미국을 세계 예술의 최첨단의 지위에 올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폴락과 추상표현주의를 포용한다고 주장한다. Cockcroft의 표현에는 폴락이 "냉전의 무기"가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화가 Norman Rockwell의 작품 <Connoisseur, 전문가, 감식가> 역시 폴락 스타일에 대해 논평을 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은 폴락 스타일의 물감을 흩뿌린 회화 앞에 정장을 입은 남자가 몸을 곧은 자세로 서서 작품을 보고 있다.
Craig Brown과 같은 예술가이면서, 비평가, 풍자가는 "장식적인 벽지가, 본질적으로 머리가 텅 빈, 미술사에서 지오토와 티치아노, 벨라스케스와 같은 지위를 얻었다는 것이 놀랍다."라고 했다.
Reynolds News는 1959년 헤드라인에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악취미의 농지거리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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