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 CEO’ 김복용 매일유업 회장 별세(상보)
기사입력 2006-01-03 10:50 |최종수정2006-01-03 10:50
현역 최고령 최고경영자(CEO)로 꼽혀온 김복용 매일유업 회장이 2006-1-2일 밤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매일유업은 “고 김복용 회장이 숙환으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으나 최근 병세가 악화돼 운명을 달리했다”며 “장례식은 매일유업 회사장(會社葬)으로 치러진다”고 3일 밝혔다.
김복용 매일유업 회장은 ‘한국 낙농업의 산 증인’ ‘유가공업계의 입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같은 이북 출신인 남양유업 홍두영(87) 명예회장과 함께 업계 최고령 창업주로도 유명하다.
함경남도 이원(利原)에서 태어난 고(故) 김 회장은 함남 북청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단신으로 월남했다. 실향민 특유의 억척스러움에 납기ㆍ품질 약속을 꼭 지킨다는 평판을 바탕으로 사업을 늘려갔다.
제분업과 해외 무역으로 제법 큰돈을 벌었다.
56년 공흥산업주식회사,
64년 신극동 제분주식회사를 경영해 오다
69년 정부로부터 한국낙농가공주식회사(매일유업의 전신) 인수를 제안받았다.
당시 국내 시장은 미미했고 김 회장은 낙농업에 대해 아는 바도 없어 고민이 많았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 고인은 북청농업학교 시절 꿈꿨던 ‘잘 사는 농촌 건설’을 떠올리고 인수를 결단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정부와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전국의 황무지를 초지로 개간하고 우량 젖소를 도입, 낙농가를 육성해 한국 낙농산업 기반의 초석을 다졌다.
김 회장은 국내 낙농산업 발전과 축산 진흥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76년 농림부장관 표창, 78년 동탑산업훈장, 99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나이 50줄에 매일유업 경영을 맡은 김 회장은 37년 만에 매출 8000여억원, 순이익 300억원을 올리는 국내 굴지의 종합식품회사로 성장시켰다. 고인은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선진국의 신제품 동향을 둘러보기 위해 수시로 미국 유럽 일본 등 해외 출장을 떠나는 등 노익장 경영을 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내 컵커피시장을 개척한 ‘카페라떼’도 그가 직접 발굴한 작품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인순(71) 여사와 매일유업 사장인 장남 정완(49) 씨를 비롯해 차남 정석(47), 삼남 정민(44), 딸 진희(46) 씨가 있다.
정석ㆍ정민 씨는 매일유업 지분을 약간씩만 유지한 채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 대신 별도의 식품 원자재 납품회사와 무역회사를 각각 운영하고 있으며, 진희 씨는 매일유업의 물류 관련업체인 평택물류를 경영하고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영결식은 오는 6일 오전 10시 경기도 평택공장에서 치러진다. 광주 및 경산공장에도 별도 분향소 설치. 장지는 남양주시 오남읍. (02)3010-2631
삼가고인의명복을 빕니다~~()()()~
"기업책임은 고용" 이라는경영철학.........바바리코트 40년입어
그는 정직하고 따뜻한 경영자였다. 최근 경쟁업체와 브랜드 문제로 마찰이 있었을 때의 일이다. 양사 간 감정싸움이 격해질 무렵, 고인은 “다 함께 공존하고 상생하는 것이니 타사의 흠을 잡지 말고 우리 제품의 질을 홍보하는 것으로 승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0만 명당 3명에 불과한 희귀병 유아를 위한 특수분유 개발을 지시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는 “정부가 못하니까 우리가 해야 한다”며 특수분유를 만들어 시중가의 10분 1 가격으로 공급했다.
고인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경영자이기도 했다. 그는 낙농인을 사랑했지만 냉정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농업시장 개방과 관련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쉰이 넘어 매일유업을 경영한 뒤 낙농가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최근 농업 시장 개방을 두고 농업계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시장의 문을 닫게 되면 우리 모두가 죽는다. 지금 우리를 이만큼 만든 것도 수출 덕분이다. 농업계는 정부만 바라보면 안 된다. 어렵더라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는 큰 일가를 이뤘지만 검소한 기업가였다. 바바리코트 하나를 40년 동안 입던 그다. 칼국수를 즐겨먹었고, 자가용은 12년이나 탔다. 이 회사의 한도문 이사는 “차 좀 바꾸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려도 결국 안 바꾸고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매일유업은 지금도 사옥이 없다. 69년 설립 이래 계속 전세살이다. 고인의 절대적인 ‘고집’ 때문이다. 그는 “사옥을 살 바에야 공장을 하나 더 짓는 게 좋다”는 뜻을 버리지 않았다.
쉰이 넘어 황무지를 개간해가면서 시작한 회사는 현재 매출 8000억원이 넘는 국내 대표적인 종합식품 회사가 됐다. 그럼에도 그에게 경영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었나 보다.
그는 최근 사사(社史)에서 “인생 칠십 고래희(古來稀)라는데 나는 ‘기업 삼십 고래희’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30년간 기업을 경영해 온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에 대한 고백의 글이나 다름없다.
그는 많은 것을 이 땅에 남기고 영혼은 이제 북한의 고향땅으로 돌아갔다. 많은 후배 기업인들은 그를 ‘나이를 초월한 진정한 기업가’로 기억할 것이다.
김복용 매일유업 회장약력
1920년 함경남도 이원 생.
1946년 월남
1956년 공흥산업 설립
1964년 신극동제분 대표이사
1969년 매일유업 창업
농림부 장관 표창(1976년), 금탑산업훈장(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