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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의 안 건
1. 숭렬당 공원화에 대비한 토의
2. 변한국대부인 추모비와 시비 건립
3. 익양균 제단소 건립
4. 통일대전지에 수록된 익양군 행장
5. 영양군, 울산군을 익양군 직계로 하는 문제
6. 영양군, 울산군은 형제인가?
*일시 : 2009년 9월 17일 오전 11시
*장소 : 영천이씨회관
영천이씨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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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숭렬당 공원화에 대비한 토의
가. 위양공 신도비 건립(비문 : 1,800자 내외)
나. ‘이순몽장군로’ 명명
다. 숭렬당 공원의 명칭
라. 공원화 이후 준공식 문제
마. 위양공 전기 발간 문제
바. 추진 : 준공식 전(11월)
**주관 : 숭렬당관리위원회
2. 변한국대부인 추모비와 시비 건립
가. 장소 : 중앙공원 내
나. 내용 : 추모비와 시비(백로가, 단심가)
다. 협조 : 영천시청과 문화원
라. 추모비문 : 1,500자 내외
마. 시비 : 백로가와 단심가
바. 추진 : 관공서와 협조가 되는대로
**주관 : 대종회와 서승공파
3. 익양군 제단소 설립
가. 장소 : 선정(미정)
나. 구조물
(1) 광록대부 평장사(상장군) 익양군 영천 이공 휘 극인지단
(2) 제단비
(3) 신도비
(4) 문무관석 : 문무관석으로 할 것인가? 무관석으로 할 것인가?
(5) 양마석. 망주. 장명등. 동자석. 관세대. 산식석. 안내석
다. 비문
(1) 제단비문 : 후손들이 담당(1,500자 내외)
(2) 신도비문 : 후손들이 담당(1,800자 내외)
라. 추진계획
(1) 제단소 건립위원회 구성
-위원장 : 1명
-부위원장 : 2명
-자문위원 : 약간 명
-위원 : 20명 이내
-감사 : 2명
-행정담당 : 위원장. 위원(2)
-전례담당 : 위원장. 위원(2)
-총무담당 : 1명
-재무담당 : 1명
(2)추진계획
(가) 인허가 취득 : 100평정도
(나) 지관초청 : 지세감정과 형국도 작성
(다) 제반문건 준비
-개기고유문
-비문(신도비, 제단비)
-설단고유문
-상향축문
-축문
-산신축문
-홀기
-기타
(라) 익양군 전기발간(설단 고유첩 대신)
(마) 고유제 날자 결정
(바) 제일과 절차, 제수 등 준비 건
(3) 예산소유판단
-인허가비
-지관 초청비
-개기고유제, 낙성고유제 행사비
-상향축문, 설단고유문 의뢰비
-익양군 전기 발간비
-각종 회의비
(4) 익양군 행장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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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통일대전지에 수록된
익양군 이극인 행장 (?~1224년 의종 연간-고종11년)
본관은 영천, 시호는 익양이다. 금오위장군에 추증된 이영의 아들이며 영천이씨의 시조인 평장사 고울군 이문한의 7세손이다. 이문한은 고려초에 당시 영주로 불리던 영천의 호족이었다. 고울은 바로 영천의 옛 이름이다.
선대로부터 영주의 호족 지위를 이어받은 이극인이 역사의 무대 전반에 등장한 계기는 제20대 신종 2년(1202년)에 인근 경주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는 정중부의 무신정변(1170년 의종 24년) 이후 중앙정치가 극도로 혼란에 빠지자 신라를 부흥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경주 출신의 이의민이 무신정권의 실권자가 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명종 26년(1196년)에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신라부흥운동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최충헌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이의민의 지지세력인 경주인들을 박해하였다. 최씨정권 하에서 경주인들에 대한 경계와 차별대우가 날로 심해지자 경주에 주둔하고 있던 별초군이 신종 5년(1202년)에 운문(청도군)의 도적떼와 부인사와 동화사(대구 소재)의 승도들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들 반란군들이 인접한 영주를 공격했을 때 이극인은 스스로 도군수가 되어 아우 수춘 등과 함께 향군을 조직하여 이를 대파하여 격퇴시켰다. 지방주둔군인 별초군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경주반란은 최충헌 정권에 심대한 위협을 주었다. 최충헌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주 일대를 토벌하였다. 이 반란이 완전 진압된 신종 7년(1204년)에 최충헌이 경주를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격하시킨 사실에서도 이 반란이 최씨정권에 가한 타격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앞서 현종 21년(1030년) 3경제도를 설치하면서 경주는 개경, 서경과 함께 동경으로 3경의 하나가 되었다. 현종은 조모 태조비 신성왕후(神成王后)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사촌누이였던 관계로 이처럼 경주를 중시했던 것이다. 신종조 격하되었던 경주는 고종 6년(1219년)에 다시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이극인은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관직에 임명되어 중앙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여러 직위를 역임하고 광록대부 상장군에 올랐다. 고종 4년(1217년) 김취려 장군과 함께 동북지방으로 잠입해 온 거란족을 격퇴하였다.
고려를 3차례나 공격했던 거란족의 요나라는 1125년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그러나 금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은 1206년 징기스칸의 통치하에 흥기한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하자 이틈을 이용하여 대요국(大遼國)을 세웠다. 그런데 몽골군이 통일한 뒤 대요국의 토벌에 나서자 몽골군에게 쫓긴 대요국의 군사들과 유민은 고려의 동북지역으로 밀려들어 온 것이다.
10만 대요국의 군사들과 유민들이 철원, 원주, 제천까지 처들어왔는바 고려 조정에서는 김취려를 전군도병마사로 삼아 이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김취려는 제천 박달재에서 이를 대파하였는데 이극인은 좌익군의 지휘를 맡아 큰 공을 세웠다.
박달재에서 격파당한 거란군은 대관령을 넘어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이극인은 함경도 일대로 들어간 거란군을 김취려와 함께 뒤쫓아 이들을 소탕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의 <김취려전>에 다음과 같은 기술 대목은 당시 이극인의 역할을 증언해 주고 있다.
“상장군 이극인과 상장군 노순우 등은 방책을 만들어 방비를 튼튼히 하면서 10월에 대공격을 실시하여 정평 일대에서 이를 완전히 패주하게 하였다.”
고종 6년(1219년)에 최충헌이 죽고 아들 최우(후에 이로 개명)가 집권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탈취한 공사전(公私田)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주를 다시 동경으로 환원하는 등 정치를 바로 잡는 듯 했다. 그러나 여전히 왕권을 능멸하는 군사독제정치와 탐학이 심해졌다. 이극인은 여러 무장들과 최우를 제거하고자 거사를 주도하다가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오히려 화를 입게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고려사절요>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추7월(고종 11년 1224년 갑신년)에 대장군 이극인이 최우를 죽이려 거사를 도모했으나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최우는 이극인과 상장군 최유공, 장군 김계봉, 산원 박희도, 이공윤 등을 죽이고 그의 당여 50여명을 섬으로 유배하였다. 또한 우가 극인의 당여를 국문하여 추밀원부사 김중구, 상장군 함연수, 이무공, 대장군 박문비를 역시 원도(遠島)에 유배하였다.”
이극인은 이처럼 무신정권의 최고 통치자 최우의 제거를 주도하다가 처형당했으나 사후 34년 뒤인 고종 45년(1258년)에 최씨정권이 전복되고 왕정으로 복귀되자 평장사 익양군으로 봉해지고 3대가 금오위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아들 군경은 평장사, 손자 연은 별장으로 지냈다. 영천의 존덕사에 배향되었으며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 절요, 동사강목, 영천이씨 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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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우산군을 익양군 직계로 하는 문제
1. 일부 의견
가. 12세 휘 <백수 유2자)는 <영양군, 울산군 형제>가 아닌가?
나. 영양군, 울산군 형제를 휘 백수 후로 연결하면
(1) 모두가 시조공부터 계대가 되며 각 파간의 계촌이 가능하다.
(2) 이렇게 되면 종친간의 화합이 더욱 이루어진다.
2. 가계(家系) 비교
가. 익양군의 가계
7세 8세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극인 - 군경 - 연 - 상 - 원순 - 백수 - 유2자
1224졸 1258 평장사 1373졸 名미상
나. 영양군의 가계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대영 - 득분 - 문경 - 송현 - 흡 - 자용(1330 출생)
다. 익양군의 직계로 이을 경우
7세 ------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극인 ------ 백수 - 대영 - 득분 - 문경 - 송현 - 흡 - 자용
1224졸 1373졸 1385졸
라. 문제점
(1) 역사적인 연대의 불합리
- 7세 극인 : 1224년졸, 12세 백수 : 1373졸, 18세 자용 : 1385졸
(2) 160년(1244-1385) 간에 11대 경과
3. 결론
현재의 가계는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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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과 울산군은 형제인가?
1. 일부의견
가. 영양군과 울산군 가계는 대수(代數) 차이가 많다.
영양군의 6세손 : 고려말(휘 자용 기준 1330년 출생)
울산군의 6세손 : 조선초(휘 숙정 기준 1450년 출생)
** 형제분의 6세손이 120년 차이
나. 형제분이라는 근거가 없다.
2. 양파의 가계비교
가. 영양군의 가계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 현재
대영 - 득분 - 문경 - 송현 - 흡 - 자용(1330년생) ----- 30세
※대수와 년수 산정기준(보첩 학자)
- 통상의 경우 1대를 30년
- 번성한 가문 1대를 15년, 20년으로 산정
- 번성하지 못한 가문 1대를 35년으로 산정
※영양군의 출생년도 추정(휘 자용 생년 1330년 기준)
- 통상 30년 적용시 : 1180년대 전후(1330-5대×30년)
- 본파는 고려말에 육파로 분파된 대단히 번성한 가문임
※15년 적용시 : 1250년대(1330-5대×15년)
- 80년(1250-1330) 동안 5대가 내려옴(지극히 번성한 가문, 1대 15년)
영양군의 출생년대는 125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나. 울산군의 가계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 현재
중영 - 지 - 유 - 승길 - 명발 - 숙정 ------ 27세
※장녀(1290년대 출생) 1450년 생원. 1450년생
※ 울산군 장녀 고려 대사간 최원도의 모부인 졸년 1350년대
-묘소 북안면 도유동(광주이씨 시조 묘소와 관련 유명함)
-60세를 살았다면 출생은 1290년 전후로 추정
※장녀의 생년을 고려시 울산군의 출생은 1250, 1260년 전후로 추정
※ 울산군의 후손은 번성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음.
-5세 명발은 1450년 성균생원으로 30세 생원일 경우 출생은 1420년대로 추정
-명발의 자 6세 숙정은 부친의 생년 고려시 1450년대 출생으로 추정
-190년(1260-1450) 동안 5대가 내려옴(번성하지 못한 가문 : 1대 35년)
울산군의 출생연대는 1250년대, 126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3. 결론
가. 양파의 가계를 비교하면 영양군파는 지극히 번성한 가문이며 울산군파는 지극히 번성하지 못한 가문이다.
나. 역사 연대를 고려시 영양군은 1250년대, 울산군은 1260년대 전후이다.
다. 형제본이라는 기록의 근거는 찾지 못하였다.
다만, <무오대동보(1798년) 발간 때> 선조들은 <두 분은 형제이며 익양군의 후손>으로 정립하였다.
선조들은 <당시의 기록과 전승된 내용을 근거>로 했을 것인바 이는 <지금 후손들이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다.
라. 일부에서 이견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견에 대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마. 영양군, 울산군 형제본은 <익양군의 후대 어느 분의 자손>인지 모름으로 선조들은 <후손>으로 명기하였다.
바. 가계가 정립된 무오대봉보(1798년) 이래 210여년 동안 아무도 이의를 제기한 일이 없는데
새삼 이런 논의는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사. 古來相傳二百年의 교훈은 기록만큼 중요하다.
아. 이런 논의는 <종중화합을 해치는 일>, 이후로는 삼가하는 것이 좋다.
첫댓글 개인적인생각:: 첫째 공원명칭은 숭렬공원1번 위양공원2번 둘째 변한국대부인 추모비는 임고서원에 기설치된바 구태여 설치한다면 숭렬공원내 설치제안 셌째 익양군제단소 설립은 이영 할배산소밑에 7세 6분 다모시는것이 타당할것으로 사료/ 건의합니다 나머지 휘 광청 광순 봉수춘 세화힐배 제단소는 별도 설치할겁니까? 이렁게 되면 자연적으로 파문중 대표자 모임 장소가 되면서 상징성과 결속력이 발휘되겠죠 이영할배 산소 하단부만 좀 넓히고 석물만 좀 조졍한다면 가능한것 같은데 말입니다 예산도절약되고 나중에 제례 횟수도 적어지는(6.7세 같은날 제례)등 일석이조인것 같습니다만......위치선정은 아주중요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