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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앙수기는 2017년 12월 31일 하루 밤세워 쓴 글입니다. 신앙수기 공모전에서 탈락한 글이지만 저는 혹시라도 수기 공모전에서 입상을 하게 된다면 수상금을 어머니 이름으로 대구교구에 모 성당 건립기금으로 봉헌하고자 하는 마음에 수기 공모에 응시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탈락한 글이고 또 보잘것없는 수기이지만 어떤 분에게는 하나의 울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공개를 해드리는 것입니다.
먼저 신앙수기를 쓰기에 앞서 저의 삶에 시련과 역경을 안겨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삶에 말할 수 없는 시련과 역경이 있을 때는 정말 괴로운 나날들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런 쓰라린 시련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 하해 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부족한 제가 그 은혜를 보답하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아들로서 이 신앙수기가 보잘것없는 수기이지만 저의 비천한 수기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나마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을 가진 분들에게 작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지향으로 수기를 쓰고자 합니다.
신앙수기를 쓰게 된 계기는 2017년 올해 12월 18일 제 육신의 어머니를 하느님 품에 보내드릴 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마음에 신앙수기 공모 마감 하루를 앞두고 부족한 글이지만 전하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비록 저의 6년이라는 짧은 신앙생활 기간이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의 부족한 신앙체험 수기가 많은 천주교 신앙인에게 타산지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타산지석이라는 사자성어가 말해주듯이 남의 산의 보잘것없는 돌일지라도 자신의 삶에 이로움이 되도록 잘 적용한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신앙의 삶 속에 하나의 자양분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저는 2011년도에 영세를 받아 이제 영세를 받은 지 만 6년 된 마산교구 월남 본당 베드로 형제입니다. 영세 받기 4년 전에 천주교 신앙을 갖고자 무진장 노력을 했지만 영세를 받는 과정 중의 일부인 교리이수가 매번 차질이 생겨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게 제 운명이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해 다시 다니던 개신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의 직업은 영어 학원을 운영하면서 강의를 합니다. 학원을 하다 보니 마산에서 영어 교재를 전문으로 거래를 하는 사장님과 거래를 하는 중에 우연히 부탁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감리교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고 계십니다. 그분 교회에서 선교목적으로 미션 아카데미라는 선교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걸 제가 좀 맡아 줄 수 없는지 부탁을 간곡히 하셔서 워낙 친분이 있는 분이라 주일에 2시간 정도만 시간을 할애하면 되고 또 의미 있는 일이라 봉사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재능기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순수하게 강의만 하고 올 생각이었는데 나중에는 목사님이 부탁을 하셔서 예배도 드렸습니다. 10개월 정도 봉사를 하다가 2011년도 추석 명절 연휴를 앞두고 가족 선물을 사러 마트에 가는 중에 원래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도자기 가게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게 제가 영세를 받고 가톨릭 신앙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날 왜 그 도자기 가게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원래 서울에 오랫동안 살면서 인사동도 자주 가고 아는 지인으로부터 다기 같은 걸 선물로 받은 게 많이 있어 다기는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 당시만 해도 학원을 운영하면서 손님께 차를 대접할 다기도 충분히 있는 상황이었기에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뭔가 하느님의 이끌림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되시는 분께 다기를 좀 구경해도 되겠는지 여쭤보는데 마침 가게 테이블 위에 일반 독서대에 성경이 펼쳐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이 눈에 띄여 교회에 나가시는 모양입니다 하고 여쭤보니 성당에 나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저는 지금은 개신교를 다니는데요 4년 전에 성당에서 교리를 5개월 받다가 무슨 일이 있어서 영세를 받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만약 영세를 받았으면 지금 저도 아마 성당에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하고 말씀을 드렸던 거죠. 이 말을 듣자 가게 여자 사장님께서 예전에 성당도 나간 경험도 있으니까 성당에 다시 나가면 어떻겠냐고 선교를 하시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성당을 나가보는 쪽으로 마음이 동화기 시작했습니다. 그땐 예비자 교리도 막바지라서 너무 늦어 영세를 받기 힘들고 내년에 영세를 받도록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때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일이 어찌될지 모르니까 일단 빨리 영세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타 성당에서 5개월 정도 교리를 받았기에 나머지 기간을 보충해서 영세를 받을 수 없는지 여쭤봤습니다. 그러니까 사장님께서 성당에 가 주임신부님께 한번 여쭤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예비자 교리반에 등록을 하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앞에 못 들은 교리는 주일 미사 후에 보충을 했습니다. 제가 한 달 보름 정도 아마 교리에 참석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리에 참석하기 시작한 날부터 영세를 받는 날까지 평일 미사를 한 번도 궐하지 않고 다 참례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코 영세를 받고 말테다 하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저녁에 학원 강의 시간을 변경해서 미사에 참례를 했습니다.
그렇게 미사를 열심히 다닌 이유는 그래야 주임신부님께서 그런 성실한 모습을 보시고 나중에 영세를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생각해서 열심히 다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2011년 11월 6일 주일에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영세를 받고 한 달 후부터 복사를 섰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성당에서 복사를 섰습니다. 성당을 다니다가 성당 내에 성체조배라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성체조배 회원에 가입해서 지금까지 6년 동안 잘해 왔습니다. 중간에 어머니 간병 관계로 몇 개월은 하지 못했습니다.
직업의 특성상 원래 저희 본당에는 수요일에는 조배가 밤 10시에서 11시까지가 마지막 조배입니다. 그래서 저는 11시부터 12시까지 거의 6년째 혼자 해 왔습니다. 나름 처음에는 영세를 받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성당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때 일어난 문제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중간에 여러 차례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성당으로 인도한 도자기 가게 사장님이신 제 인도자 마르셀라 자매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고비를 잘 넘겼습니다.
저희 집안은 집안 대대로 불교를 신봉하는 집안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어머니께서는 절을 다니셨기에 자연스럽게 저희 가족은 부모님의 영향으로 절을 많이 가게 되었던 겁니다. 제가 어려서는 경남 함안에 있는 모 절에 다니셨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잘은 몰라도 스님 법문을 숱하게 들으며 자랐습니다. 집안 환경이 이렇다 보니 저희 집안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는 집안입니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제가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사실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저희 형제들은 기독교를 아주 배척하는 사고를 가졌습니다.
이런 가정 환경에서 자라다가 제가 20대 초반에 그만 사이비 종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종교는 영생을 부르짖는 종교입니다. 그것도 죽어서 영생이 아니라 살아서 영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무맹랑한 종교입니다. 일반적인 보통 사람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근데 중요한 사실은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저명한 법대 교수들도 그 종교에 다니고 대한민국의 수재들인 서울대, 연대, 고대 대학생들이 상당히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그런 이상한 종교에 가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20 살 된 젊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벌써부터 죽음을 생각하며 영생을 부르짖는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겠습니까? 바로 부모님을 생각한 효심이 그 종교를 다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저를 마흔 둘에 가지셔서 마흔 셋에 저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니 늦둥이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동네 어른들로부터도 효자라고들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말씀을 한다 해도 제 아버지께서 할머니께 효를 다한 것과 비교를 한다면 저는 거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정말 제 아버지는 하늘이 내린 효자였습니다.
아버지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3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할머니 묘소를 아침마다 찾아가 문안 인사를 올리셨다고 하니 옛날 조선시대처럼 정통 3년 상을 치르지는 못하셨지만 그래도 그에 못지않게 할머니 산소를 지킨 아들이었으니 아들인 제가 봐도 참으로 효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제가 그런 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초등학교 다닐 때도 어머니께서 감기로 앓아누워 계시면 어린 마음에 너무 걱정이 되어 어머니 옆에 있으면서 잠도 잘 자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렇다 보니 저는 중학교 다닐 때도 제가 늦둥이로 태어났으니 다른 형제들보다 부모님을 상대적으로 많이 볼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제 자신이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제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신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싫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수명의 각각 반을 제 생명 대신 부모님이 나누어서 더 살 수만 있게 된다면 제 생명을 기꺼이 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어린 나이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시골에 사시는 이모님 댁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이모부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때 이모님 댁은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20대에 제가 간 사이비 종교는 자신이 의인이 되면 가족도 구원할 수 있다고 해서 부모님을 살릴 수 있다는 일념으로 가게 되었던 겁니다. 이 종교를 가게 되면서 그곳에서는 성경과 불경, 유교 경전까지 두루 보는 곳이라 그 종교에서 성경을 접하게 되었던 겁니다. 만약 처음부터 성경을 가지고 저에게 그 종교를 선교했다면 아마 오랫동안 어머니를 따라 어려서부터 절을 다녔기에 거부반응을 가지게 되었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불교 경전으로 접근하다 보니 처음엔 별 거부반응 없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제 인생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아 정말 후회가 막심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당에서 영세를 받을 때 나이가 딱 마흔이었습니다. 영세를 받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지난 세월 잊어버리자. 만약 나처럼 불교를 몹시 따르는 집안에서 비록 처음엔 불교 경전으로 그 종교에서 접근했기에 그나마 그 종교에 몸담았던 거였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그곳에서 성경을 접하게 되지 않았던가. 그곳에서 성경을 접했기에 나중에는 그 종교에서 나와 일반 개신교 종교를 크게 무리 없이 접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나마 그렇게 돌고 돌아 골수 불교 집안의 사람이 어렵게 구사일생으로 성경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러지 않았다면 결코 하느님을 접할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해봤을 때 이 또한 이것도 제가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에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은 쉽게 하느님을 만났지만 저는 창세기에 나오는 신앙의 선조들처럼 일주일 만에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려 들어간 것처럼 저도 40년이라는 세월을 마치 광야를 돌고 돌아 하느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하고 제 자신에게 애써 위로를 하며 제가 모르는 그 속에 하느님의 섭리가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하느님 품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신앙생활이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세를 받고 어려운 고비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된 걸 후회를 한 적도 많았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한번은 어머니께 성당을 그만 다니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나는 부처님을 믿지만 너는 하느님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남자가 한번 마음을 먹었으면 그 마음이 변치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위기 때마다 저를 독려해 주신 어머니 덕분으로 지금까지 부족하지만 신앙을 지켜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4년 정도 하다가 2년 전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가까운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잘해서 다행히 큰 위기를 잘 넘겼습니다. 일반 병원 중환자실에 한 달 정도 입원하셨다가 요양병원으로 전원을 해서 치료를 받던 중에 갑자기 경련이 와서 초유의 상황이 발생하게 되어 자칫 잘못하면 운명하실 수도 있다는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가족들이 의논을 해서 2015년 12월 30일에 부산 해운대 백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이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때 가족들과 어머니는 응급차로 부산으로 이동하고 저는 따로 제 차로 부산 해운대 백병원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를 병원에 이송한 날 부산 해운대 백병원 원장님이 저희 집안 친척이라 급히 응급조치를 잘 취해 위기를 또 한 차례 잘 넘겼습니다. 그날은 일단 밤늦게 가족들은 다 되돌아가고 임시로 제가 어머니 곁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어떤 응급상황이 생길지 몰라 보호자 한 명이 대기를 해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원에서 하루를 지내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병원에 있는 천주교 원목실에 찾아가 수녀님께 어머니 대세를 부탁드렸습니다.
한평생 절을 다니신 분이라 가족들이 알게 되면 반대를 할 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서 정말 가족들이 아무도 없을 때 대세를 받아야 되었기에 저와 수녀님이 참석한 가운데 약간의 정신이 있을 때 대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순간 수녀님께서 세례명을 무엇으로 정할지 물으셔서 저는 성모님께서 잘 기억해 주실 수 있도록 하는 마음에서 마리아로 해 주십사하고 수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일단 그렇게 가족들 모르게 대세를 받았습니다. 약 3개월 정도 치료를 1인 병실에서 받다가 병원 중환자실에서 특이한 균에 감염이 되어 의료법상 더 이상 그 병원에 입원할 수가 없어 부득불 원래 처음 진단 받은 마산 의료원으로 다시 모셨습니다.
의료원도 어머니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만 오랫동안 어머니를 치료해 주신 주치의 선생님 덕분으로 격리병동에 입원하여 엄격한 관리 하에 입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어머니께서 선종하시는 날까지 정말 만 2년 동안 하루도 쉬지도 못하고 마음 편히 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병원에서 언제 불안한 전화가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2년 동안 가슴을 쓸어내리는 위험한 순간이 정말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너무 힘들어서 마산에 있는 진동 가르멜 수도원을 찾아가서 신부님을 찾아뵙고 상담을 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기도로써 인내하고 가는 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신부님은 성모신심이 대단한 신부님이라서 먼저 저에게 묵주의 9일 기도를 하며 성모님께 매달리며 어려움을 이겨 내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때부터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거의 매일 수도원 새벽미사를 봉헌하고 미사 후에는 수도원 성전에서 기도를 하고 오후에는 부산 병원을 오가며 차로 운전하면서 한 손에는 묵주를 쥐고 눈물로써 묵주기도를 하며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저녁에는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성전 내 성모님 앞에서도 묵주기도를 하고 또 감실로 자리를 이동하며 눈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어떤 날에는 유치하지만 추운 겨울 날씨에 성당 밖에 있는 성모님 앞에서 추운 날씨 속에서 기도를 하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불쌍해서라도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고 새벽까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그땐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해도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기도가 아니였는지 어머니의 병세가 차도를 보이지 않으니까 점차 심신이 지쳐서 어느 순간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 기도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보름 정도 수도원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마음을 다잡고 수도원을 가게 되었는데 수도원 신부님께서 그동안 왜 수도원에 기도하러 오지 않았냐고 하셔서 그간 심신이 너무 지쳐서 오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그래도 형제님 희망을 갖고 하느님께 기도하셔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또다시 하느님께 그동안 잠시 기도를 중단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며 다시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에는 답답한 마음으로 절을 하면서도 할아버지께도 저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할아버지, 지금 할아버지 며느리가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천국에 계시면 제 엄마를 굽어살펴 주세요. 제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세상에 이런 며느리는 없습니다. 할아버지. 세상에 얼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아버지께 할아버지 기일을 지내기 위해 제물을 다듬고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정성을 드리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이런 며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발 할아버지 이 손자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어 엄마를 굽어살펴 주세요 하고 오죽했으면 할아버지께도 간청을 했겠습니까?
어머니께서 13년 전에는 제가 그 당시는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대구 팔공산 갓바위를 가고 싶다고 하셔서 그게 소원이라고 하시는데 그래서 마산 집에 내려와 일흔이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갓바위까지 가는 게 어머니께는 무리가 될 것 같아 만류하였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하니 나중에 후회가 될지 몰라 정말 어렵게 어렵게 모시고 갓바위에 갔습니다. 사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어머니께서 갓바위에 가시려고 했던 건 저를 위한 기도를 하려고 가신 것이었습니다. 불자들 가운데에는 암암리에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갓바위에 있는 부처님께 처음 소원을 말하면 그 소원이 성취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때 저를 위해 기도를 부처님께 청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지금은 하느님을 믿지만 그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 여기 부처님께 처음으로 드리는 소원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하시기에 저는 지금 부처님을 믿지는 않지만 소원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기도가 있지만 저는 제가 원하는 기도를 하나 한다면 제 어머니 무병장수를 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서울에 오랫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살면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는 게 제 하루 일과의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겨울에는 혹시나 감기는 걸리지 않으셨는지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정말 어려서부터 엄마를 애틋하게 사랑하는데 저도 정말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되지를 않았습니다. 아마 하느님께서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런 모양입니다. 병원에 거의 2년 남짓 입원해 계신 동안 감기몸살이 걸린 며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산, 마산, 진영에 그동안 입원한 병원을 다니며 어머니를 간호하였습니다.
언제 돌아가실 줄 모르는 상황이라서 정말 하루하루가 힘든 날이었습니다. 제가 또 병원을 거의 매일 다닌 것은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병원에서 재활운동이 가능했지만 특정 질병에 감염이 된 후에는 격리조치가 있었기에 재활치료가 불가능해 와상 환자는 재활을 하지 않으면 몸이 굳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제가 의료진을 대신해서 어머니 운동을 시켜드리기 위해 병원을 찾은 것입니다. 중간 중간에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는 사실 보호자가 매일 찾아가면 간호사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호자가 있으면 신경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병원마다 다들 그렇게 싫어했지만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그런 간호사들의 마음도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간호하는 모습이 자기들 마음에 작은 감동의 울림이 있었나 봅니다. 나중에는 간병사들도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모습에 감동을 하곤 했습니다. 2년 기간 동안 병원에서 도저히 입원을 받아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모셔야 했던 기간은 제가 어머니 간병을 했습니다. 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낼 때 한 번씩 집에 오는 간병사가 그런 모습을 보고 그분은 많은 환자를 그동안 간병을 해왔기에 요즘은 자기가 보니 딸도 엄마를 간병하기 힘들어 하는데 아들이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하니 그분도 노모를 모시는 분이라 제가 어머니께 쏟는 애정을 보고 남의 일 같지 않아 정성껏 돌봐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집에서 목욕을 시켜드릴 때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셨기에 피부조직이 많이 약해져 있어 어머니 몸을 닦아 낼 때도 이런 마음으로 닦아냈습니다. 제가 성모님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성모상의 모습인 성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치 어머니 얼굴에 성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성모님의 몸을 닦아드리는 것처럼 생각하고 닦아드렸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하면요 그런 마음으로 하면 성모님께서 저를 참 기특하고 갸륵하게 생각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성모님께서 엄마를 생각하는 아들의 갸륵한 마음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이렇게 간병을 하다가 올해 설 명절을 앞두고 어머니 약을 타러 병원에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러 갔는데 주치의 선생님께서 저에게 힘들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은 개신교 신자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제가 가톨릭 신자라는 걸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번 설 명절이 어머니께는 마지막 명절이 될 거라 하시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이젠 아드님도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어머니를 편안하게 보내드리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길에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부터 하느님께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올린 게 있습니다. 올해 성목일까지만이라도 제발 어머니를 살려 주십사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왜 그런 기도를 드렸느냐 하면요 제가 이 세상에서 어머니가 겪는 병고의 고통을 성목요일 때 하는 철야 감실 조배 때 어머니를 대신해 하느님께 제가 기도로 대신 보속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어서 그런 기도를 드렸던 겁니다. 밤 10시부터 다음날 3시까지 17시간을 연속으로 예수님의 감실을 지켜 어머니께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나약한 인간으로서 저지른 죄를 아들이 대신 보속하게 된다면 어머니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가실 때 하느님께서 저의 정성을 보시고 어머니가 연옥에 가게 되시면 그만큼 연옥의 고통을 들어주실 거라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중풍 환자를 치유해 주신 것도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듯이 저도 하느님께서 그런 자비를 베풀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영세를 받고 첫 성목요일부터 제가 연속으로 10시간을 5년 동안 철야 조배를 해봤기에 약간 힘들지만 17시간을 하는 건 처음이지만 이게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위해 해드리는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해서 17시간 조배를 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다행히도 하느님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시고 기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거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마침내 성목요일에 17시간을 연속으로 예수님 곁을 지켜드렸습니다.
성금요일 3시에 감실 조배를 마치며 예수님께 큰절을 올릴 때 무사히 조배를 마치게끔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그 눈물의 기도와 거의 2년 동안 가슴 태우며 흘린 눈물의 기도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셨는지 의학적인 어머니의 수명을 거의 5개월 더 연명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후로는 병원에 어머니를 찾아갈 때면 매일 성수를 어머니 머리에 뿌리고 어머니 옆에서 최소 묵주기도 5단을 선종하시기 전 날까지 빠지지 않고 바쳤습니다. 이때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성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했습니다.
2년 동안 어머니 병상을 지키면서 저는 많은 사람이 병원에서 죽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2년 동안 기도를 하는 와중에 죽음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죽음에 대한 2년 동안의 묵상이 저의 앞으로 남은 삶에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귀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선종하시기 약 20일 전쯤엔 사정이 있어서 며칠은 밤늦게 병원을 찾아 기도를 드렸는데 그 무렵에 밤늦게 기도를 드리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불현듯 이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젠 어머니께서 비록 하늘나라를 가신다고 해도 물론 기쁜 일은 아니지만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다는 마음이 제 마음 속에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날 밤에 제가 그동안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2년 동안 제 마음 고생을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시고 지켜봐 주신 분이 바로 수도원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께 문자를 보냈습니다. 신부님, 저 베드로입니다. 오늘 늦게 어머니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신부님, 이젠 어머니께서 하늘나라에 가신다고 해도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 있겠습니다.
왜 기쁜 소식이라고 했느냐면요 제가 그동안 2년이라는 시간을 정말 힘들게 보내면서 마음고생을 했기에 이젠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게 되어서 신부님이 그런 걸 아시면 신부님께서도 한결 마음이 놓이실 거라 생각해 그렇게 표현했던 겁니다. 오늘 기도를 드리고 병원을 나서는데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 신부님께 알려드립니다 하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문자를 보낸 후 바로 신부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형제님 바로 하느님 은총입니다.
그동안 눈물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고 후회 없이 어머니를 봉양해드려서 그런 마음이 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시면서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올해 위령성월에는 위령성월에 맞게 제가 죽음에 대한 교부들의 문헌과 연옥에 대해 세부적으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내린 결론이 하나 있었습니다.
2년 동안 병상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른 건 몰라도 그냥 누워계신 것만 해도 저는 고통이라고 생각했고 또 음식도 입으로 드시지 못하고 튜브의 관을 통해 죽으로 생명을 연명하신 그것만으로도 한 인간의 삶에 고통이라고 생각했지만 연옥과 죽음이후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가르침을 놓고 판단했을 때 물론 마음으로는 어머니의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고통이 이 세상을 살면서 마지막 삶을 정리하는 끝자락에서 물론 비록 대세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되었지만 이런 어머니의 고통과 더불어 아들인 제가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가 감당하셔야 하는 보속의 십자가의 멍에를 기도로써 같이 질 수 있게 된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께서 병과의 투병이 어머니 자신에겐 보속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이 시간이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저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시기에는 그게 선물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잠언 30장에 보면 아구르의 기도가 나옵니다. 예전에 개신교 다닐 때 아구르의 기도로 묵상을 많이 하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사람은 기도를 할 때 시련이 있을 때는 기도를 하기 쉽지만 평온할 때도 시련이 있을 때처럼 기도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머니를 통해 찢어지는 단장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께 매달리는 기도의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저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어떤 날은 어머니께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 너무 육체적으로 힘이 든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수도원에 기도를 드리러 가는 날에는 수도원까지 집에서 왕복 33킬로미터와 부산 병원을 하루에 갔다 오는 시간만 교통체증이 있을 때엔 5시간을 운전을 하고 또 병원에서 어머니 운동을 시켜드리고 저녁에는 세상일인 학원 강의도 해야 되고 심리적으로는 마음이 편치 못하니까 잠도 설치게 되고 그런 생활을 사실 거의 1년 반을 하다 보니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서 몸이 천근만근일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도저히 어머니께 갈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든 날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게 해서 가지 못한다면 그동안 공들여 기도한 게 허물어질까 봐 정말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사력을 다해 어머니께 갔습니다.
어떤 날은 피곤에 지쳐 있다 보니 운전을 하면서도 졸음이 쏟아져 사고가 날 뻔한 일도 있었지만 이런 과정도 지금에 와서 보니 그 과정이 정말 힘들었지만 하느님께서 정말 기도를 지속적으로 하게 하는 연단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때 이런 힘든 고비 넘길 수 있도록 힘이 된 게 있었습니다. 바로 비오 성인께서 남기신 말씀입니다. 기도는 억지로 하면 안 되겠지만 성인께서는 억지로라도 기도를 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하려고 하는 의지를 보신다고 하신 말씀이 제가 나름 끝까지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선종하신 날은 월요일이었습니다. 원래 월요일은 새벽미사가 있는 날인데 그날은 본당에서 장례미사가 있어서 새벽미사가 없어 저희 본당 옆 다른 본당 새벽미사에 참례한 후 수도원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수도원을 갔습니다. 수도원 미사를 마치고 본당 장례미사에서 제가 복사를 서야 되기에 본당 장례미사 복사를 서고 성당에서 나온 후 휴대폰을 보니 어머니가 계신 병원에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어서 병원에 전화를 해보니 어머니가 폐렴증상이 있다고 하시면서 보호자를 찾기에 바로 병원으로 갔는데 이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 가보니 이미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었고 호흡이 조금 가팠습니다. 잘하면 그날 임종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바로 가족들에게 연락을 드리고 나서 어머니 옆에서 저는 혹시 모를 임종에 대비해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날 12월 18일 오후 12시 29분에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지막에는 호흡이 조금 가팠지만 정말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고 아버지 때도 그렇고 어머니 때도 마지막 임종을 지켰습니다. 사실 병원을 다닐 때마다 혹시나 갑자기 선종하시면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정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성모님께서 돌봐주셨는지 임종을 지켜드릴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본 간호사가 저를 보고 그 간호사분은 천주교 신자는 아니였지만 천주교에 대해 조금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를 위해서 묵주를 들고 아드님께서 열심히 기도하셔서 그런지 생각보다 큰 고통 없이 돌아가셨다고 하시면서 위로를 해주시더군요. 그러고 난 후 다른 가족이 도착했습니다. 가족들과 상의를 하고 원래 맨 처음 가셨던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하고 어머니를 그 병원에 모셨습니다. 2년 가까이 어머니를 돌보면서 또 다른 하나의 걱정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어머니께서 선종하시면 장례를 어떻게 치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성당에 나가는 걸 모르고 있었고 어머니도 대세를 받은 걸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런 상황을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평생을 절을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운명하신 후에 제가 저의 큰형님께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씀을 드렸는데 바로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때 그 심정은 이루 말로 다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은혜롭게 성당에서 장례미사로써 보내드리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해 평생 한으로 남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장남이 아니고 더군다나 막내라서 집안의 가풍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기에 눈물을 머금고 장례를 치를 병원으로 갔습니다. 장례를 치를 병원에 도착한 후에 저는 먼저 어머니의 선종 사실을 본당 사무장님께 알려드리면서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를 수 없어서 본당 교우분들께는 기도만 부탁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대세를 받고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야 되니 제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입관을 하고 제가 입관을 할 때 2년 전에 본당 자매님의 입관을 한 번 본적이 있었습니다.
입관할 때 관에 묵주를 넣어드리는 것을 봐서 제가 2년 동안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올릴 때 사용한 해미성지에서 판매하는 보혈묵주라는 걸로 기도를 했는데 그걸 넣어드렸습니다. 제가 그 묵주로 어머니 병상 옆에서 묵주기도를 할 때 어머니가 의식이 있을 때는 그게 어머니는 묵주라는 걸 잘 모르시지만 무의식적으로 묵주가 아마 절에서 사용하는 염주라고 생각을 하셨는지는 몰라도 한 번씩은 묵주를 손에 감아쥐기도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지금 비록 제 입술로 묵주기도를 바치지만 제 어미가 지금 묵주를 쥐고 있습니다.
부디 이 기도를 제 어미가 하느님께 올리는 것으로 해 주십사하는 지향을 말씀드리고 묵주기도를 드렸습니다. 단이 바뀔 때마다 계속 어머니 손에 묵주를 감아쥐게 해드렸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제 마음이 그때 올린 묵주기도가 어머니께서 하느님께 올린 것처럼 해드리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겁니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또 한 가지 하느님께 드린 지향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제 어미는 한 번도 성체를 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가실 때 마지막 노자성체도 없어서 노자성체의 힘으로 하느님께 가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할 수 없이 이 아들이 하느님 계신 곳으로 제 어미가 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생각한 게 있습니다. 제 어미가 이 세상을 살면서 나약한 인간으로서 저지른 죄의 때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에 죄로서 얼룩져 있다면 제가 하느님께 제 어미를 대신해 흘리는 속죄와 회개의 눈물로 제 어미의 죄 얼룩을 지워주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는 길에 마치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저희의 진홍 같은 붉은 죄를 씻겨주시듯이 어머니의 죄를 씻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어머니의 죗값은 제가 이 세상을 살면서 기도와 자선과 희생으로 대신 보속하겠다는 지향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느님, 세상 말에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고 하는데 제가 눈물과 탄식으로 드리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제 어미를 측은히 여기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또한 묵주기도를 올릴 때 엄마 나중에 하느님 만날 때 하느님께서 엄마 이름 부르실 때 마리아라고 부르실 테니 엄마 이름을 잘 기억해야 돼서 엄마 나 따라 해봐. 마리아, 마리아, 이렇게 하면 조금씩 엄마가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따라했습니다.
예수님 만날 때 예수님도 불러야 되니까 나 따라서 말해봐 엄마. 예수님, 예수님, 한번 해봐 엄마. 참으로 어머니의 영혼을 하느님께 잘 가시게 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했습니다. 입관을 하고 본격적인 조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문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어머니를 잃은 슬픔도 슬픔이지만 무엇보다도 가슴 속에는 장례미사를 못해 드린다는 게 제 가슴에 비수를 찌르는 듯한 아픔이었습니다. 다른 가족은 장례 절차를 의논한다고 어머니 빈소에는 저와 누나만 조문객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침 그때 부부로 보이는 조문객의 조문을 받았습니다.
상주인 저와 맞절을 하고 나서 조문해 주신 거에 대해 인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그때 제 눈에 번쩍 들어오는 게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오른 손목에 빨간 액세서리였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인사를 드리면서 혹시 묵주팔찌가 아닌지 싶어 아주머니 손목을 순간 유심히 보는데 처음에는 그냥 일반 액세서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왼손에 실반지 같은 게 눈에 또 들어왔습니다. 혹시나 싶어 반지를 보는데 반지 표면이 오돌토돌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묵주반지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혹시 천주교 신자이십니까? 하고 여쭤봤습니다. 그러니 천주교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성당을 나갑니다만 어떤 분과 관계로 조문을 오시게 되었는지 여쭤보니 바로 저의 큰형님과 지인이라 조문을 오셨다는 겁니다. 조문을 받고 제가 다과를 접대하는 곳으로 안내를 하면서 잠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저희 본당에서 분가해 나간 성당의 회장님 내외분이셨습니다. 제 큰형님과 오랜 세월 동안 잘 알고 지내는 절친한 사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매님께서도 저를 보고 안면이 좀 있다고 말씀하셔서 제가 이번 파티마 성모님 백주년 미사 때 제가 월영 본당에서 복사를 섰습니다. 혹시 그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제 형님은 장지에 볼일이 있어서 장지에 가 있어서 장례식장에는 없었습니다. 제가 그분께 부탁 하나를 드렸습니다. 제 혼자 성당을 나옵니다. 어머니도 2년 전에 부산에서 대세를 받았습니다. 가족들은 지금까지 어머니께서 절을 다니셔서 장례를 불교식으로 치르려고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 형님과 아주 친한 사이라고 하시니까 제 형님께 이야기를 좀 잘해주셔서 성당 신자들이 빈소에 와서 기도를 할 수 있게 형님께 말씀 좀 잘 드려봐 주실 수 있는지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형님께 전화를 드리면서 오늘 조문을 하는데 막내 동생이 성당을 나가는 모양인데 집이 불교라서 불교식으로 하지만 그래도 한쪽에는 성당 신자들이 기도를 하는 것도 고인에게 나쁠 것도 없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허락을 좀 해주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니 제 형님도 절친한 친구가 하는 부탁이라 그렇게 해보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속으로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반전이 이루어질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난 후 잠시 후에 형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성당 분들 와서 기도할 수 있으면 기도를 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본당 연령회 회장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집에서 큰형님이 성당 식구들이 와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서 연도를 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린 후에 얼마 있다가 빈소에 고상과 성수통과 성수채를 준비해서 제단을 꾸린 후에 본당 교우분들의 연도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례미사를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족들에게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그냥 성당에서 미사를 하면 안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는데 처음에는 가족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지만 나중에는 제가 막내고 이 세상을 떠나는 어머니께서 막내의 소원대로 해 주는 게 어머니의 마음이지 않을까 하고 큰형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결정이 평범한 보통 가정에는 평범할 수 있지만 큰형님이 그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정말 그때 하느님께서 제 형님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작은 형과 다른 형도 반대를 했지만 정말 우여곡절 끝에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때 정말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례미사를 하지 못했더라면 제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을 텐데 제가 그동안 눈물로 하느님과 성모님께 올린 기도의 힘이었는지 그런 저의 측은한 모습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저에게 마침 저의 형님 친구를 어머니 빈소에 보내주셔서 그분 자매님의 묵주반지가 제 눈에 들어오게 하시어 어머니를 은혜롭게 보내드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 거에 대해 정말 가슴이 벅차 눈물이 나왔던 겁니다.
정말 그 자매님의 묵주반지가 저를 살렸던 겁니다. 어머니께서 선종하신 날 거의 2년 가까이 저를 지켜봐주시고 도움을 주신 신부님께 어머니의 선종사실과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르지 못한다는 걸 알려드리고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장례미사를 할 수 있게 되어 다시 연락을 드렸는데 그날 수도원에 수사님 한 분이 종신서원을 하게 되어 전국에 계신 수도원 신부님들께서 서울에 다 계신다고 하시면서 장상 신부님이 허락해 주시면 그날 광주에 내려가셨다가 새벽에 출발해 제 어머니 장례미사에 오시겠다고 말씀하셔서 저야 개인적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먼 길을 오시게 하는 게 다소 죄송했습니다.
또 교구 내에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그동안 신앙생활하면서 친분을 쌓은 이형수 몬시뇰님께도 어머니 선종사실을 알려드려서 제가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 장례미사에 참석이 가능하시면 와 주실 수 있는지 부탁을 드렸는데 신부님께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몬시뇰님께 부탁을 드린 거는 나중에 믿지 않는 가족의 선교를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미사 때 오셔서 저희 본당 신부님과 수도원 신부님, 몬시뇰님 세 분이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해 주셔서 저에게는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었고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은혜롭게 보내드릴 수 있어서 정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발인제를 지내고 어머니를 성당으로 모신 후 미사가 9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제가 오랫동안 본당 장례미사 복사를 서면서 성가대에서 들려주시는 은혜로운 성가를 많이 들었지만 그날은 제가 유족의 한 사람으로 당사자가 되어 처음으로 성가대에서 울려퍼지는 성가를 듣게 되었는데 미사중에 처음으로 성가대에서 나오는 성가 소리에 순간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그 와중에 하느님께 화살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느님,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은혜로운 성가가 울려퍼집니다. 부디 이 은혜로움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저의 가족에게 이 천상의 소리가 심금을 울려 지금 거행되는 장례미사에서 은혜를 받아 장차 하느님을 믿게 되는 밀알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고 화살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순간 정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가족이 말은 안했지만 마음속으로 동생 덕분으로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아마 하지 않았을까 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성가대 자매님들께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제가 장지로 가는 도중에 성가대 자매님 한 분께 오늘 정말 은혜롭게 성가를 불러주셔서 정말 그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는 말씀을 문자로 보내드렸습니다.
또 고별식 때 유족 대표로 간단하게 제가 교우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나서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감동을 주기위해 광주에서 새벽에 출발하셔서 세 시간이나 손수 운전해 오셨고 이렇게 제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미사를 드려 주신 거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수도원 신부님께 드리면서 신부님께 한 말씀 부탁을 드렸습니다. 신부님께서 어머니께 병자성사를 주실 때 어머니의 모습에 대한 인상을 은혜롭게 말씀을 해 주셔서 한편으로는 정말 제 가족들에게도 신부님의 말씀이 감동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 저희 본당 신부님께서도 강론을 준비하시면서 믿지 않는 가족을 배려해서 강론을 준비하실 때 정말 고민을 많이 하시고 강론을 준비하신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정말 그날 세 분 신부님께 다시 한 번 더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인사를 전해 올립니다. 또한 그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본당 교우님께도 미사 참례에 감사를 드립니다. 본당 교우님들께서 정말 보잘것없는 저에게 부모를 잃은 슬픔을 위로해주시는 모습과 그분들의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을 보고 정말 또 한 번 뜨거운 형제애를 느꼈습니다.
아랍 속담에 함께 웃은 사람은 잊혀져도 같이 운 사람의 이름은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날 형제자매님께 받은 사랑은 제가 하느님께 빚진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가면서 그 빚은 반드시 제가 지금은 육신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사랑하는 애제자 요한사도에게 성모님을 맡기셨듯이 저도 이젠 저희 본당에 계신 자매님들을 제 육신의 어머니에게 사랑을 드린 것처럼 진실된 마음으로 어머니처럼 사랑으로 공경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번에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이런 생각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처럼 제 육신의 어머니를 보살피면서 어머니를 사랑한 게 앞으로 어머니가 안 계실 때 그 사랑을 성모님께 쏟아 부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저에게 그런 훈련을 미리 하게 하시여 성모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훈련을 시켜주신 것 같다는 생각도 한번 해봤습니다. 저에겐 지난 2년 간의 시간이 정말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런 고통의 시간이 저의 부족한 신앙을 좀 더 단단하게 해 주실려고 하신 하느님의 은혜였다고 생각하니 정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고통을 통해서 각자 자신이 하느님께 가는 길에 지고 가야 하는 자신의 십자가에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숨어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성가 218장에 나오는 가사처럼 자신이 일생 동안 살면서 지었던 십자가를 하느님께 가져가야 될 때 십자가는 신앙인에게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만약 죽음이 죽음 그자체로 끝난다면 정말 비참한 죽음이겠지만 십자가는 죽음과 동시에 부활의 삶으로 이어지고 십자가 없이는 그 어떤 부활도 있을 수 없고 우리 신앙인에게 어떻게 부활하여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는지는 예수님께서 친히 그 길을 먼저 가셨고 모범을 보여주셨기에 저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 길을 끝까지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당신께서는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위해 자신을 성부 하느님께 온전히 대속 재물로 바치셨습니다. 오로지 저희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었습니다. 2년 간 어머니를 돌보면서 가슴아팠던 시간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가 마지못해 져아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생각만큼 쉽지는 않지만 정말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야 되겠다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십자가는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돛단배의 돛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돛단배는 돛이 올려져 있을 때 바람을 맞아야만이 돛단배가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그 돛을 올릴 때는 마치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힘이 들어 그 돛을 올리지 못한다면 그 배는 망망대해에 정처없이 떠도는 배와 같을 것입니다. 또한 돛에 바람 또한 세차게 불어주어야만이 그 돛대에 있는 십자가가 천국으로 인도할 겁니다.
힘든 고난과 역경이라는 바람이 상징하는 십자가가 결국 자신을 천국으로 가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쥴리 빌리아르 셩녀는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당신들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당신들을 이끌어 줄 것이고 요한 비안네 성인은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런 십자가가 돌같이 차갑고 모난 마음에 세차게 몰아칠 때는 고통스럽겠지만, 그 고통이 죄로 얼룩진 모난 삶을 거룩한 삶으로 정화시켜 하느님처럼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닮아 우리 영혼이 하늘고향으로 마지막에 갈 때 고결한 영혼으로 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걸 알 수 있게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고 천국에 오르는 사다리처럼 감사한 마음으로 남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의 마지막 하나의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남길 수 있는 삶을 살다가 하느님 곁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뜨겁게 사랑한 아들 강 베드로 여기 잠들다.”
지난 6년간의 저의 부족한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며 소회를 말씀드린다면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미카엘이라는 천사가 나오는데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해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지상에 보냅니다.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원하는 세 가지 사실을 알면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그 중 하나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결국 미카엘은 인간세상에서 하느님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깨닫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사실은 사랑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랑 속에 사는 자는 하느님 안에 살고 있고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 그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카엘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 가지 사실을 알고 다시 하늘나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 소설의 내용처럼 원래 저희는 성경 욥기에 나오는 하느님과 욥의 대화를 보면 이미 우리는 세상 창조 이전 때부터 하느님과 같이 천사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하느님께 죄를 지어 타락한 천사가 되어 이 땅으로 육신을 입고 왔습니다. 비록 죄를 지어 육신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왔지만 성모찬송에 나오는 말씀처럼 이 세상의 삶이 귀양살이이고 이 귀양살이를 온전히 마치고 언젠가는 다시 육신은 흙으로 되돌아가야하고 영혼은 원래 하느님께로 되돌아갑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늘나라에서 범죄한 영혼이 하느님께서 저마다 주신 십자가를 지고 보속하는 삶을 살면서 다시 원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저희를 창조 때의 원래 하느님과 같이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이 지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 그런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저희 영혼을 이 세상에 보내게 되었다는 것과 이 지상에서 삶 또한 하느님께서 안배해 주신 사랑이라는 걸 알고 살아간다면 정말 이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범사에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걸 절실하게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올해 성모성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발행된 마산교구 교구보에 삶의 향기라는 코너에 엄마와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글로써 부족한 신앙생활을 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이 부족한 신앙생활의 체험이 많은 천주교 신앙을 가진 형제자매님께 미소한 도움이 된다면 저는 그걸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사람은 누구나 열 달 동안 어머니의 태속에 있다가 열 달을 채운 뒤에는 하늘이 맺어준 천륜을 뒤로한 채 육신의 연줄인 탯줄을 끊고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탯줄은 끊을지언정 어찌 하늘이 맺어준 엄마와 아들의 천륜을 끊을 수 있겠는지요? 새끼에게 물릴 젖은 어머니의 골수에서 얻어진 생명과도 같은 피로 만들어집니다. 그 젖을 물려 당신의 진액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식에게 주는 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어머니입니다.
병자성사를 받은 노모를 바라보는 막내 아들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갑니다. 살아 계실 때 아니면 할 수 없기에 엄마와 자주 얼굴을 서로 부비면서 엄마 살 냄새를 맡아보곤 합니다. 다음에 이 세상에서 엄마와 이별을 한 후 엄마가 몹시 그립고 생각날 때 엄마의 살 냄새를 기억하려고요.
아버지는 돌아가시면 산천에 묻지만 어머니는 산천 외에 또 다른 한 군데 더 묻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요 바로 자식의 가슴이라고 합니다. 그건 엄마가 열 달 동안 자식을 뱃속에 품어 배 아파 낳아 주신 은혜를 평생 가슴 속에 묻어 잊지 말라는 뜻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머니를 가슴에 묻게 될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젠 이런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쉽진 않지만요.
하느님, 만약 지금 제 어미의 병고가 천국 가는 데 필요한 보속의 십자가라면 자신의 십자가는 자신이 지라고 말씀하셨지만 하느님께서도 죄 많은 죄인들을 사랑하시어 그토록 아끼시는 외아들을 골고타 언덕 위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게 하신 것처럼, 이 아들도 제 육신의 어머니를 사랑하기에 어머니가 지고 있는 병고의 십자가인 멍에를 제가 질 수 있게 되어 어머니 자신이 보속해야 할 병고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 수만 있다면 이 아들은 그 어떤 고통의 십자가일지라도 달게 지고 싶습니다. 하느님, 부디 하느님 나라에 제 어미가 갈 때 당신의 한없는 자비로 품어주시옵기를 바라며 이 아들이 하느님께 눈물로 애절하게, 절절하게 부르짖는 마음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하느님, 성모님, 예수님 감사합니다.
첫댓글 공모 하루를 앞두고 급하게 쓴 것이라 문장부호와 약간의 맞춤법이 틀린 게 있습니다. 나중에 그건 다시 수정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