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정맥1차
청학동주차장-청학동탐방지원센터-옹달샘-능선삼거리-쌍계사갈림길-삼신봉-석문-음양수-영신봉-세석대피소-거림탐방지원센터-거림주차장
(낙남정맥)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던 한반도의 산줄기 체계는 하나의 대간(大幹)과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이들 맥은 10대 강의 유역을 가름하는 분수산맥을 기본으로 삼고 있어 대부분의 산맥 이름이 강 이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낙남정맥(洛南正脈)은 낙동강 남쪽에 위치한 정맥이다. 이 정맥은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끝나는 지리산(智異山)의 영신봉(靈神峰)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남강의 진주와 남쪽의 하동·사천 사이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마산·창원 등지의 높이 300∼800m의 높고 낮은 산으로 연결되어 김해의 분성산(盆城山, 360m)에서 끝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신봉1652m
경상남도 하동군의 화개면 대성리에 있는 봉우리이다(고도 : 1,652m). 지리산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제석봉·연하봉·영신봉·칠선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자리 잡았다. 하동군 화개면과 함양군 마천면, 산청군 시천면의 경계에 위치한다. 영신봉은 낙동강의 김해 분산(盆山)까지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출발점이다. 서쪽으로 칠선봉과 덕평봉, 동쪽으로 촛대봉, 남쪽으로 삼신봉에 이어지는 주요 능선들이 영신봉에서 갈라지는 분기점을 이룬다.
조선시대 하동의 주요 관찬지리지와 군현지도에는 영신봉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산의 남사면으로는 산청군 시천면의 거림골, 하동군 화개면의 큰세개골과 대성 계곡, 북사면으로는 함양군 마천면의 한신 계곡이 있다. 영신봉에서 남서쪽 사면으로 내려오면 화개면 대성리인데, 영신봉과 삼신봉 연맥의 서사면 산기슭에 의신·대성·단천 등의 자연마을이 입지하였다. 산골짜기에서 발원한 화개천 상류가 남서방향으로 흘러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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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봉1284m
삼신봉[1,284m]은 청학동에서 볼 때 서쪽의 내삼신봉[1,354m]과 중앙의 삼신봉, 동쪽의 외삼신봉[1,288m]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대 구실을 하여, 악양으로 흘러내린 성제봉[일명 형제봉] 능선과 멀리 탁 트인 남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삼신봉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 천왕봉[1,915m]~반야봉[1,732m]~노고단[1,507m]을 잇는 지리산 주능선이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다. 여기에 전라남도 광양시 백운산과 광양만, 섬진강 하구에서 이어지는 남해가 시계 방향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낙남정맥1차출발~~청학동-삼신봉-영신봉-거림
▼청학동탐방지원센터`~~
▼능선삼거리 가기전 옹달샘
▼쌍계사갈림길
▼낙남정맥 삼신봉 정상
▼푸르나 산악회 낙남정맥팀
▼삼신봉을지나 산죽 군락지
▼음양수가기전 석문
▼산속에 절구통이?
▼영신봉가기전 음양수 여기서30m정도지나 좌측으로 낙남정맥길입니다
▶ 세석평전 음양수 전설
이 물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산신에게 기도를 하고 마시면 누구나 소원대로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이 예부터 전해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지리산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한쌍의 남녀로서 아득한 옛날에 대성동 계곡에서 살았다고 한다. 남자의 이름은 호야(乎也)요, 여자의 이름은 연진(蓮眞)이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은 남해안에서 섬진강을 따라 화개골을 거쳐서 지리산의 비경을 찾아든 첫 번째의 인간 가족인 것이다. 다정다감한 그들 남녀는 씨족 사회의 엄한 규율과 간섭을 벗어나 연인끼리 남몰래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가정을 꾸미고 맛좋은 산채와 과일을 따서 배부르게 먹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함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인 호야가 산과(山果)를 따기 위하여 산골 깊이 들어가고 없는 사이에 근처에 살고 있던 검정 곰이 찾아와서 연진을 위로하며 하는 말이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세석평원에는 소원대로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는 음양수라는 신비의 샘이 있다”는 것을 자랑삼아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연진은 기뻐 어쩔줄을 몰라 하면서 남편과 상의할 겨를도 없이 혼자서 단숨에 음양수 샘터로 달려가서 기적의 샘물을 실컷 마셨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평소에 곰과 사이가 좋지 못한 호랑이가 곰과 연진 여진이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엿듣고는 이것을 그대로 지리산 산신령에게 고해바치니 산신이 대노하여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속에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百獸)의 왕이 되었고 또 음양수의 샘물을 훔쳐먹은 연진 여인에게도 무거운 벌을 주어 잔돌평전의 돌밭에서 평생토록 혼자서 외로이 철쭉꽃을 가꾸게 되었다. 그날부터 연진 여인은 뜻하지 않았던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저주하며, 세석평원에서 날이면 날마다 손발이 닳도록 꽃밭을 가꾸니 철쭉꽃나무는 무럭무럭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러나 연진여인은 닳아 터진 다섯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꽃밭에서 뿌리며 애처롭게 언제까지나 꽃밭을 가꾸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석의 철쭉꽃은 절세가인 연진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아 그처럼 청초하게 아름답고 또 연진 여인의 슬픈 넋이 꽃잎마다 서려있어 그처럼 애련하게 해마다 피고 진다는 것이다. 그후 연진 여인은 촛대봉 정상에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그대로 망부석이 되었으며, 촛대봉의 앉은 바위는 가련한 연진 여인의 굳어진 모습 그것이란다. 천왕봉 산신령도 연진 여인의 가련한 희생을 보고서는 인간에 대한 노여움을 풀고 기적의 샘 음양수를 인간에게 개방하였으며, 그 혜택을 받게 하니 그 후부터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고 한다. 한편 연진 여인의 남편인 호야는 산과를 따러 나간 사이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부인 연진을 찾으려고 날마다 계곡과 그리고 밀림, 산령을 넘어 지리산 일대를 헤매다가 칠성봉 중턱에서 까마귀로부터 연진의 소식을 전해 듣고 단숨에 세석평원으로 달려갔으나 산신령의 저지로 접근할 수 없게 되자 세석평원 중턱 능선의 높은 봉우리에서 발돋움을 하고 세석평원을 향하여 연진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목청껏 날마다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칠성봉에서 세석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호야봉(乎也峰)은 그때 그가 애태우며 섰던 자리라 하여 그런 이름을 부르게 되었으며 언제까지나 부르다가 지쳐서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 서 있는 호야의 굳어진 그대로라 한다. 수 천년을 두고 남모르게 꽃을 피우고서도 그 아름다운 자태를 찬탄하는 이 없더니 근년에 이르러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불어나서 매년 6월의 첫 번째 주에 전국의 산악회원들이 철쭉제를 올리게 되는데 그 원색의 차림은 이 고용한 평원에 만산의 성황을 이룬다. 이것이 풍수설에서 예언한 천호만인이
▼영신봉가기전 절경
▼영신봉 정상에서
▼세석대피소에서 거림까지는 약6km 지루한 하산길
▼거림계곡
▼산행날머리 거림탐방지원센터
▼산행후 하산식은 즉석에서 돼지수육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