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나씨(羅氏)는 한족인 대륙의 축용씨(祝融氏)에다 뿌리를 갖고 있는 기원이 먼 씨족이다, 나씨(羅氏)가 동래(東來)한 것은 당(唐)의 태종(太宗 六二七 ~ 六四九)이 재위하던 때인 七세기 초이고, 이때는 신라가 통일을 이룩하기 직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곧 당태종(唐太宗)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로 있던 나지강공(羅至强公)이 동국(東國)의 정벌론을 반대하다가 정적에 몰려 해상을 통해서 망명하여 도착한 곳이 신라였다. 나지강공은 신라에 들어와 정착하고 지금의 나주인 발나현(發羅縣) 에 자리를 잡은 뒤 나라에 봉공하여 승상이 되었다,
통일신라 때에 나지강공의 후손 경공(璥公)이 효공왕(孝恭王) 4년에 나주사찬(羅州沙餐)의 벼슬에 봉해졌다, 이 때에 나씨는 나주로 사관(賜貫)되어 나주나씨(羅州羅氏)로 저관(著貫) 되었으니 820년 의 일이다,
그러나 羅州羅氏로 적관(籍貫)되어 정식으로 입문하게 된 것은 지강공 이하 십여대(十餘代)가 실계(失系)됨으로 그후 고려조의 태조(太祖) 때 삼한공신(三韓功臣)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으로 봉작된 나총례공(羅聰禮公)으로부터이다,
이때부터 나주나씨(羅州羅氏) 는 820여년 동안이나 나씨(羅氏)로 위관(爲貫)하여 호남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불행히 조선조 영조4년 1730년에 나숭대(羅崇大)와 나홍언(羅弘彦)이 역란(逆亂)에 연루되는 정변의 변고에 휘말리게 되어, 1732년에 관(貫)을 한때 나주(羅州)에서 거평(居平 - 文平) 으로 바꾸고 거평나씨(居平羅氏)가 되었다,
그 후 영조(英祖) 23년 1747년에 거평나씨(居平羅氏) 는 정묘보(丁卯譜)를 수보(修譜) 하면서 나주의 고호(古號) 가 금성이고 시조가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임을 내세워 금성(錦城)으로 이관(移貫) 하여 다시 금성나씨(錦城羅氏)로 바뀌었다,
또한 최근 서기 1957년, 정유수보(丁酉修譜) 이후 9년 뒤 서기 1966년에 금성나씨(錦城羅氏)의 대종회에서는 문중의 합의와 결의를 거친 뒤 나총례공(羅聰禮公)이 최초에 적관(籍貫)했던 원상태로 나주(羅州)로 복관(復貫)하여 나주나씨(羅州羅氏)로 관(貫)을 찾았던 어려운 일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 관(貫)을 금성(錦城)으로 되돌려 쓰는 등 관(貫)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우여곡절을 겪은 씨족이다,
한편 나씨는 관(貫)이 나주(羅州) 이외에도 안정(安定), 군위(軍威), 수성(壽城), 비안(比安), 정산나씨(定山羅氏)도 있고 금성나씨(錦城羅氏)로 불리어지기도 하나 동국(東國)의 모든 나씨(羅氏)는 나총례공(羅聰禮公)의 후손으로 나주나씨(羅州羅氏- 現 錦城羅氏)에서 출계된 같은 뿌리의 씨족이다,
그러므로 "만성보"를 비롯 가정보 천계보등 각종 보첩에서 나주나씨(羅州羅氏) 단 일본(一本) 으로 해왔다,
그러던 것이 세월 의 흐름과 함께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씨족사(氏族史)의 혼동(混同) 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 혼동을 막고 한뿌리임을 제창(提唱)해 온 오라(吾羅)의 깊이있는 식자간(識者間) 에는 총나씨합보(總羅氏合譜)의 당위성을 끊임없이 외쳐왔으나 그 실현(實現)을 보지 못해 오다가(西紀 1930年) 지금으로부터75년전 소화(昭和) 5년에 나기풍씨(羅基豊氏) 를 중심(中心)으로 나씨총보(羅氏聰譜)를 펴내게 됐다, 여기에서 현(現) 금성나씨(錦城羅氏)를 대표한 나종환(羅宗煥)도유사(都有司), 나주나씨(羅州羅氏)를대표한 나원성(羅元性)부도유사(副都有司)의 서문 을 훑어보더라도 각기 七관(貫-금성,나주,안종,군위,수성,비안,정산)을 가진 후손 모두는 휘 총례공(諱 聰禮公)의 후손(后孫)으로 동근(同根) 임을 주장하고 있는 걸 보더라도 엄연한 한핏줄임이 만천하(萬天下)에 확인 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불행하게도 이의 실현을 보지못한채 오늘 날 또다시 금성(錦城)과 나주 (羅州)양가에서는 토당라(土唐羅)를 제기하면서 이근(異根)이다" 동근(同根)이다"로 시비가 끓기지를 않고 있으니 안타까운 심정(心情) 금할길이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나성(羅姓) 을 가진 모두는 선현(先賢)들의 유업(遺業)에 입각(立却)하여 더욱더 친목(親睦)을 다져 나아갔으면 하는 생각 이다,
그 단면(斷面)인 관(貫)을 부치지 않고 영남(嶺南)에서 나씨종친회(羅氏宗親會)가 그좋은 예의 하나로 한핏줄임을 강조(强調)하면서 화목(和睦)을 다지고 있는것을 똑똑히 보고있지 않은가?
나성(羅姓)의 본거지(本據地)에서 사는 우리 모두는 부끄럽게 생각(生覺) 해야 할것이다,
2005년 5월 일 을유(乙酉) 모춘지절(募春之節)
청백리공종회장(淸白吏公宗會長) (羅永採) 근지(謹識)
錦城羅氏 淸白吏公派世譜 一券에서 옮긺,
첫댓글 나도 사실은 우리 羅씨 에 대하여 계략적으로만 알았지 위의 글을 통해서 확실히 알았네
좀더 우리 족보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 하여 후손들에게 명확하게 알려 줄수 있도록 해야겠네
고맙네 ...
할아버님의 관심으로 저또한 열심히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꾸뻑
청유공 문중 카페가 활성화 되니 보기가 참 아름답습니다.
아직은 초창기라 여러가지 올릴께 많습니다.찾아보고 공부하고 노력해서 많은 가족들이 참여 토록 하겠습니다.꾸뻑*^!^*